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14. 23:08

이웃이 되라

(눅 10:25-37)

 

오늘 본문 말씀인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와 함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고자질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율법사는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사이기 때문에 율법의 관점에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생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구원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관점은 율법에 있습니다. 행위(율법을 지키는 것)를 통해서 받는 구원입니다. 율법사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들에게 율법을 잘 지켜라. 그래야 구원이 있다.’라고 가르쳤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가르침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면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이었나요? 이것은 신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믿음입니다. 행위를 통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통해서 구원 받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첨예하게 논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율법(행위)과 복음(믿음)’의 문제를 명확하게 규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율법사의 비열한 의도를 알아 차리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다시 질문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신명기 65절 말씀과 레위기 1918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율법사이기 때문에 율법의 내용과 요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인정하시며, 그렇게 살면 생명을 얻게 된다고, 구원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에 의한 구원을 인정하는 발언은 아닙니다. 질문이 여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이 더 중요합니다. 이 부분이 핵심입니다. 율법사는 예수님께 또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를 성서기자는 이렇게 밝힙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29).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한 질문은 이런 겁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이까?”

 

율법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의 이웃인가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율법사를 위해,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그의 생각에 파문을 던지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되어 쓰러져 있습니다. 마침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다 강도 만난 사람을 목격합니다. 그런데 왠 일인지 제사장은 그냥 못 본 체 하고 지나칩니다. 곧 이어 레위인이 그 길목을 지나가다 강도 만난 사람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제사장처럼 그냥 못 본 체 하고 지나칩니다. 세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자신의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며 목숨을 구해줍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는 것도 참 괜찮은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나서 거반 죽게 된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현대인들에게 가장 손쉬운, 그리고 정당하다고 느끼는 방법은 경찰에 신고하는 겁니다. 현대인들에게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은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라, 경찰이나 소방수, 또는 사회복지사(정부)들이나 하는 일 정도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길 가다 다친 사람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 있으면 니가 어떻게 하려고 들지 말고 경찰에 빨리 신고해.’ 이렇게 조치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전혀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은 율법사의 몇 가지 태도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사는 구원에 대한 문제를 율법과 관련시킵니다. 또한 율법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게 하는 데관심을 둡니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사마리아인처럼 누군가에게 이웃이 되어 주지 못합니다.

 

율법이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 율법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율법사의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누가 우리의 이웃이고, 누가 우리의 원수인지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인간 사회에서는 오늘의 이웃이 내일의 원수가 되기도 하고, 오늘의 원수가 내일의 이웃이 되기도 합니다. 그거 구분하려 들려다, 허송 세월 보내고 맙니다. 이웃을 사랑해 볼 겨를도 없이, 누가 나의 이웃인가만 고민하다 인생 다 가고 맙니다.

 

또한 율법에 매인 사람은 자신이 옳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됩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친 이유는 율법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를 만지거나 죽은 사람을 만지면 안 됩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정해졌다는 것은 이들의 본연의 임무인 성전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중요한 건,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 자신을 옳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죠. 그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러한 행위에 돌을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서 명령하는 대로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에 파문을 던지시는 겁니다. 요즘 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 율법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누구죠?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냥 이렇게 대답하면 될 것을,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을 입에 올리기도 싫고, 너무 뻔하게 대답하기도 싫어서인지, 이렇게 세련되게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결론을 내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가서 너도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누가 나의 이웃이냐를 따지지 말고, 사라미아인처럼 그냥 가서 이웃이 되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참 어려운 겁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주보의 <행복어 사전>에도 실어 놓았습니다만, 딕 티비츠라는 분이 <용서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겸손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겸손, 내가 가진 기준이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겸손,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모든 지식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겸손, 내가 상처 입은 상황이 모두 상대방의 잘못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겸손이다.”

 

사람들은 세 가지 착각을 하며 산다고 합니다. “자신이 남보다 잘 생겼다는 착각,자신이 남보다 똑똑하다는 착각, 자신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생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그냥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보다 못 생긴 사람은 나의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나보다 못 난 사람은 나의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은 나의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까? 나만큼 잘 생겼거나 나보다 잘 생긴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나처럼 똑똑하거나 나보다 잘난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나와 생각이 엇비슷한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찾아 헤매느라, 누군가의 이웃이 될 겨를이 없습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가장 잘 풀어낸 분은 아마도 마틴 부버라는 분일 겁니다. 오스트리아 출생의 유대인 종교철학자인 마틴 부버의 <나와 너>라는 책을 보면, 인간 관계의 페러다임을 나와 그것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볼 수 있습니다. 부버의 눈에 세상은 사물의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나와 그것입니다. 그것(it)은 그저 내가 이용할 대상일 뿐입니다. 위에서 율법사가 말한 대로, 그것은 나를 옳게 보이려고하는데 이용할 뿐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갑니다. 모든 것이 다 이용 대상일 뿐입니다. 기업가는 노동자를 이용해서 자산을 불리고, 반대로 노동자는 기업가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갑니다. 교육 사업가는 학생들을 이용하여 교육 사업을 확장해 갑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을 이용하여 대학을 잘 가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는 교인을 이용하고, 교인은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욕구를 채우기만 하면 됩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이런 사물의 관계가 보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출세에게 도움이 되면 부모이고, 걸림돌이 되면 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 마틴 부버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잘 표현해 주는 시가 한 편 있습니다. 여러분이 학창 시절에 열심히 외웠던 시입니다. 김춘수의 <>이라는 시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의미)이 되고 싶다.

 

예화) 조민정 권사님과 그 가게 주인 간의 법적 공방: 만약 가게 주인이 세입자를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의 관계로 생각했다면 적어도 치료비를 다 물어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500.00 주고 만다고 한다. 자신의 가족이 그렇게 다쳤어도 이런 식으로 해결했을 것인가? 그 주인도 아마 교회 다니는 사람 일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율법사처럼 행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고민하고 나의 이웃을 찾습니다. 자비를 베풀 때에도 그가 내 이웃인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나를 어떻게 옳게 보이게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내 이웃인지 먼저 살피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으로 괜찮은 사람인지, 신앙이 좋은 사람인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나에게 유익을 끼칠 사람인지 해악을 끼칠 사람인지, 등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냥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한 없는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데도 불구하고, 그 불편을 감수하면서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웃이 되어 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그러면 결국 강도 만난 사람, 불쌍한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도와주라는 얘기네 라고 생각하시면 오늘 말씀을 잘못 들으신 겁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웃에 대한 우리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또는 나를 옳게 보이려고의 율법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냥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웃이 되어주는 데까지 거쳐야 할 과정이 너무 많은 게 탈입니다. 그냥, 이웃이 되어 주십시오. 정말 그럴 순 없는 겁니까?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