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4. 06:35

당신은 에노스의 후손인가?

창세기 2

(창세기 4:16-26)

 

가인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개인적으로 가인이란 이름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한글로 가인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성경의 가인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죠. 차라리 그냥 히브리어를 그냥 음역한 카인이라고 불러야 맞는 것 같습니다.)

 

동생을 죽인 살인자로,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이라 불리는 땅에 거주합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죄로 인해 하나님께 엄청난 징벌을 받습니다. 가인의 직업이 농부인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하시길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않을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1-12)고 하십니다. 실로 엄청난 저주입니다. 농부인데 농사를 지어도 소출을 얻지 못하게 될 거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 입니다. 게다가 땅에서 유리하게 된다는 것은 인생을 쓸쓸하고 고독하게 보내게 될 것이라는 저주나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인은 땅에 거주합니다. 놋은 히브리어의 노드를 말하는데, 이는 방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죄의 대가는 이렇게 큽니다. 죄는 그 안에 그 대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누가 특별히 벌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죄를 지으면 그 죄 속에 있는 대가를 누구든지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가란 방랑’, 즉 안정적이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안정적이라는 말은 인간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삶을 행복하게 꾸려나갈 수 있는 첫 번째 요소가 안정적인 삶입니다. 우리의 투쟁은 바로 이것을 위한 투쟁일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죠. 그런데 근본적으로 안정적으로 살지 못하고, 방랑의 삶을 사는 인생이란 그야말로 불행한 존재죠.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죄가 잉태하는 대가는 우리가 그렇게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겠죠.

 

오늘 본문은 땅에서 방황하며, 안정적이지 못한 삶을 산 가인의 후손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가인의 6대손인 라멕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라멕은 악하고 음란하며 잔인한 삶을 사는 악한 인간형을 대표합니다. 라멕의 아들들은 문명 창조의 주도자로 그려지고 있는데, 야발은 가축 치는 자의 조상,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 그리고 두발가인은 무기제작의 창시자로 소개됩니다.

 

오늘 말씀의 절정은 23절입니다. 23절을 일컬어 라맥의 노래라고 하는데, 그 소재가 살인입니다. 라멕은 이 노래를 통해서 가인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이 어떠한 인물인지 보여줍니다. 이 노래에서 라멕은 가인보다 훨씬 더 포악한 살인을 저지른 인물로 그려집니다. 거기에 라멕은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범죄를 숨겼지만, 라멕은 오히려 이렇게 노래를 만들어 자신의 범죄를 공개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가정에서 시작된 가인의 범죄가 라멕에 이르러서는 사회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폭력은, 죄는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거기서 끝날 것 같지만, 죄는 죄를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고 해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댐이 무너지는 것은 댐 한 귀퉁이에 생긴 작은 균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회가 무너지는 것은 한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가정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가정 폭력은 가정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결코. 가정 폭력은 사회적 폭력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단코. 그러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정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것은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한자성어를 우리는 잘 압니다.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가 잘 된다!”라는 뜻입니다. 신문의 사회면을 보면 별의 별 일이 다 있습니다. 살인, 강간, 폭행, 강도 등 별의 별 상황에서 별의 별 수단들이 다 동원되어 온갖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사를 접하면서 우리는 사회가 썩었다. 세상이 말세다!’하며 혀를 쯧쯧 차지만, 사실 그러한 말을 무관심하게 내뱉기 이전에, 우리의 가정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절실하게. 왜냐하면, 그 온갖 끔찍한 범죄의 원인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가정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저지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에서부터 버림 받고 폭력에 시달리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밥을 먹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성장합니다. 부모로부터 공급 받아야 할 사랑의 정량이 있습니다. 부모가 아니더라도, 성장기에 그 누구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의 정량이 있습니다. 그 정량을 채우지 못하면 인간은 비뚤어집니다. 영양분의 정량을 채우지 못하면 육체가 잘 자라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성경에 밥 많이 먹어라!’라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밥을 좀 덜먹으면 키가 좀 안 자라서 그렇지 그것이 사회적 해악을 낳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굳이 반복해서 성경 전체에 걸쳐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을 덜 받으면, 한 인간의 영혼은 비뚤어져서 사회적 해악을 낳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의 사랑은 많은 것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사회에서 베풀어지는 사랑은 대부분 그 뒤에 어떠한 대가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사랑은 다릅니다. 부모님의 사랑, 형제 간의 사랑은 어떠한 대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맹목적인 사랑, 그야말로 순수한 사랑이죠. 바로 이 순수한 사랑을 많이 섭취해야 인간은 전인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는 법입니다.

 

가인의 자손들. 가인의 삶 자체가 방랑의 불안한 삶이었는데, 자손들이 순수한 사랑을 얼마나 섭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뻔한 결말입니다. 방랑의 삶, 안정적이지 못한 삶 가운데서 자손들이 물려받은 것은 악다귀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사회란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가정에서 시작된 폭력이 사회로 번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라멕의 노래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라멕의 노래를 들으면서 꽉 막혀버린 우리의 답답한 마음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처음 인간, 아담에게로 그 이야기가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담은 아벨을 잃고, 하와와 합하여 또 다른 아들을 낳습니다. 그들은 그 세 번째 아들의 이름을 이라고 짓습니다. 세 번째 아들이라 이름이 이 아닙니다. 이는 히브리어 세트를 한국말로 음역한 것입니다. ‘세트의 뜻은 대신이라는 의미입니다. , 아담이 아들 을 낳고, 고백하는 다음 구절에 그 뜻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25).

 

아담은 고백합니다. 셋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라고. 그리고 또한 그를 일컬어 다른 씨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다른 씨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한 다른 아들이란 뜻이 들어 있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보입니다. , 가인과는 다른 삶을 살 거라는 희망을 보게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참 생명의 말씀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가인의 후손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소개됩니다. 그가 바로 다른 씨 셋의 아들 에노스입니다. 에노스의 뜻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에노스에 이르러서 인간이 자기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온전히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란 하나님에 기대어 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에노스에 이르러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희생 제물을 드렸다는 뜻입니다. 이는 즉 예배를 일컫는 말입니다. 에노스 때부터 비로서 하나님께 예배가 온전히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카인의 후손인가? 아니면 에노스의 후손인가?” 당신은 안정적이지 못한 방랑의 삶을 살며 각종 폭력이나 일삼는 카인의 후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름 받은 예배자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며 평화를 일구어 내는 에노스의 후손입니까?

 

각종 폭력(전쟁, 살인, 강간, 강도 등)으로 얼룩진 세상을 돌아보면 답답합니다.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이대로 지구가 종말을 맞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나쁜 마음도 듭니다. 실제로 수 많은 사람들이 답답한 현실을 피하고자 자살을 택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요?

 

바로 에노스의 후손들에게서 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피조물이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에노스의 후손들에게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에노스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시며, 에노스가 바로 하나님께서 살인자 가인이 만들어 가는 죄악된 세상의 대안으로서 세우신 다른 씨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씨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338절은 분명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렇게 에노스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예배 하는 자들 통해서 세상에 희망을 전달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 일에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배 드리는 것은 단순히 복 받기 위함이 아니요, 이 험악한 세상의 대안으로서의 다른 씨라는 것을 깨닫고 사명감 가운데 예배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서로에게 축복합시다. “당신은 에노스의 후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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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