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24. 05:48

실패는 없다

(갈 3:23-29)

 

의란 무엇입니까? 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니까,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죠. 그러면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율법이 그 일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대로 살면, 의로워진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의로워지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멋져 보여서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인물이 되니까요? 그런 것은 이차적입니다. 의로워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유대인들에게 의로운 사람의 몫인 셈이죠. 유대인들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세에게서 율법을 받은 이래로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의하면, 율법을 통해서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악만 밝혀줄 뿐, 우리를 의로움으로 이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예수라는 분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난감한 일입니다. 그 예수라는 사람은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당국의 손에 넘겨져 처형을 당한 인물이었거든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가 십자가 형에 처해 죽었다는 사실은 그가 의롭지 못하다는 증거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이들은 그리스도로 소개하면서 예수라는 분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을 뿐, 율법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구원사건, 즉 우리를 의롭게 한 사건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부활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유대인들에 의해 로마당국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 처형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덤에 누워 있는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험한 꼴 당하고 죽었던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이 믿기 참 힘든 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났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이 일의 증인으로 자처하고 나선 겁니다.

 

사도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과 예수의 그리스도, 주님 되심을 증거했을 때 그것을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은 처음에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전해졌으니까요. 이들은 처음에 복음을 받아 들었을 때, 유대교 내에서 율법을 준수하며 예수를 믿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서부터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을 너머, 사마리아와 땅끝(이방지역)으로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방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하는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이방 사도로 부르셨다는 고백이 촘촘히 들어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한 지역 중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이 되는 갈라디아 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지역에 세워진 교회에 보낸 편지인 것이죠.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바울은 이렇게 갈급한 마음으로, 강력한 필체로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일까요?

 

갈라디아는 이방지역입니다.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룬 지역이 아닙니다. 그 말은 유대인의 율법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 아닙니다. 문화 자체가 유대인들의 문화와는 관계가 없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갈라디아 교회에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을 지켜야만 온전히 의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율법의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한 것이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즉 구원 받는다는 것을 이들도 인정했지만, 어딘가 좀 부족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율법의 준수만이 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율법은 단순히 종교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모든 것을 규정합니다. 예컨대 소가 이웃집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망가뜨리는 경우나, 성폭력이 발생한 경우도 율법이 대답을 제시합니다. 율법에 정진해 살면 모든 것이 의로운 상태로 복귀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는 유효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사회를 그나마 정돈시켜 주는 것도 법 때문입니다. 법이 없다면 무법 천지겠죠. 아마도 자동차 타고 다니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도로교통법 때문에 자동차 운전하고 다니는 것도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니까요.

 

이에 대해 바울은 놀랍게도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전통을 거부합니다. 율법이 정의롭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는 율법의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법은 일시적으로, 또는 표면적으로 정의를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정의를 세우지 못합니다.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세계에서 법이 가장 잘 정비된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미국에서 오랫동안 사신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 이 나가 정의로워 보입니까?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하나도 없으세요?

 

그리고 더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는 이것입니다. 법이 우리를 보호해 줍니까? 가령 누군가를 살인하거나 강간하면 그 일을 행한 가해자는 무기징역 또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것이 법입니다. 이러한 법이 있다고 한들, 살인이나 강간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러한 법이 있는 것 때문에 우리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습니까? 법은 법이고, 사건은 사건입니다. 아무리 법이 있어도, 살인이나 강간 사건이 일어나고 나면, 피해자나 그 가족은 그 사건으로 인해서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가해자가 아무리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망가진 인생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법이 모든 것을 의롭게 규정해 주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율법의 요구가 이 세상의 성공과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뒤떨어진 삶을 살 가봐. 그래서 대도시에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남보다 좋은 학교를 나와야 하고, 남보다 큰 비즈니스를 해야 하고,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 등등이런 것의 성취가 곧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이 삶의 완성을 어떻게 추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일반적으로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또는 행복한 조건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돈도 좀 잘 벌고, 이름도 내고, 착한 일도 하고, 취미활동도 잘 하고, 스펙도 잘 쌓고, 등등 ... 할 일이 많습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목사의 경우에는 교회를 크게 키우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런 노력들은 다 필요합니다. 모두 좋은 율법들입니다. 모두 열심히 자기 몫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인생을 걸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의미해집니다.

 

의로움은 삶의 완성이나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는 데서,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데서 옵니다. 바울은 3 2절에서 갈리디아 교회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의로움을 이루고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성령, 즉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증언을 듣고 믿는 데서 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령 받는 것은 40일 금식기도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통해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너무 허무한가요?

 

복음을 듣고 믿는 데서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룸으로 의를 이루고 구원을 성취하려는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3: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라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구별은 헛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내가 조금 부자로 살았던 가난하게 살았던, 도시에 살았던 시골에 살았던, 많이 배웠던 많이 배우지 못했던, 몸에 장애가 있던 없던, 그것들은 모두 율법의 요구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라고 자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자로 살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다. 시골에 살면 실패한 삶이다. 많이 배우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다. 몸에 장애가 있으면 실패한 삶이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해서 그들보다 뭐 하나라도 우위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 하면서 실패한 삶이라고 규정하고 비탄에 잠기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자꾸 '성공'하게 해달라는 부르짖음으로 치닫습니다. 율법의 요구, 이 세상의 성공의 기준을 이루기 위해서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의 삶은 실패 중의 실패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처형 당한 사람의 삶이 뭐가 승리의 삶입니까?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복음을 통한 의를 믿지 못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사느라 허우적댈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 본다면, 우리가 남들보다 좀 우월하게 살았다고 교만할 것도 없고, 남들보다 좀 못한 삶을 살았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느냐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기만 한다면, 우리 삶에 실패란 없습니다. 그러니 주어진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붙들고 불꽃처럼 사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으면, 여러분은 이미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사는 자들에게는 실패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해도 괜찮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명 감당하면서 한평생 살아도 괜찮은 겁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 말고, 평안 가운데 사십시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구원 사건에 집중하면서, 즉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의롭게 할 것이며,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아멘.

 

 

* 이 설교의 몇몇 부분은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에서 가져왔습니다. 바울 서신을 갖고 설교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편지문 형태로 '교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 서신은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놓아두고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정확하게, 그것도 좀 재미있게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바울 서신은 오직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는 요즘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는 것이 정말로 힘듭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을 갖고 말씀을 전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이지 '복음'이 먹히질 않습니다. 교인들의 표정과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목사가 지금 무슨 말을 하나...' 아.. 정말이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정말 도전이 되고 절망적입니다. 제가 지금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데도 말이죠. 이게 참 아이러니입니다.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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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