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10. 06:59

2013 6 9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욥기 42:1-17

제목: 신앙의 도약

 

고난에 대한 명언들이 많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명언은 세 가지 정도다: 1) 고난은 가면을 쓴 커다란 행운이다영국속담, 2) 고난이 없으면 성공도 없다소포클레스, 3)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도스토예프스키.

 

이 중에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난에 대한 명언을 좋아한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고난을 좋아할 이유도 없다. 고난에 대한 명언들은 모두 고난을미화(美化)’시키고 있지만, 명언들에서 미화되고 있는 고난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다.

 

대개 사람들은 고난을 만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고난에 걸려 넘어지거나, 고난을 외면하거나. 고난이 아무리 주는 유익이 크다고 미화되고 있어도, 고난을 겪고 나면 인생에는 고난의 얼룩이 남게 마련이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얻는 것도 있지만, 잃게 되는 것 또한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인간은 되도록이면 고난을 피하는 것이 좋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사실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고난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고난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난을 당하면 사람들은 대개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을 자꾸 묻곤 한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은 고난이 닥치면 신앙이 위축된다. ‘내가 뭐 잘못했나?’ 영락없이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모든 고난을죄의 문제로 치부하며, 결론을 회개로 이끌어 간다.

 

사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이것만큼 고난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고난이 닥쳤을 때 무조건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이 고난을 거두어 주시며, 제게 다시 당신의 은총을 허락하옵소서하면 오히려 겸손해 보이고 신앙심도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을 정당하게 이겨내는 방법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겨내는신앙적인방법 같으나, 깊이 들여다보면, 고난의 문제를 살짝 비켜가는 처세술에 불과하다.

 

한 번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인생을 살면서 맞닥뜨린 고난 중,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실로 만난 적이 있는지를. 위의 회개의 기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 아부해서 지금 당하는 고난에서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얄팍한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고난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을 욥기에서 배운다. 욥기는 우리를고난을 진지하게 대하는 영성의 세계로 인도한다. 고난을 당했을 때 가볍게회개기도를 통해서 고난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온 존재를 다해 직면해서 그 고난에 임재하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영성을 가르쳐 준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고난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욥기에 나타나고 있는 고난의 영성은 대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고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난을 직면한다는 것은 현재 나에게 일어난 고난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대게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면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하면서 고난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마음만 상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서 속으면 안 된다. 우리는 고난을 겪으며 마음만 상한 상태로 그 고난을 시간 속에 묻어 둔 채 사는 것을산전수전다 겪은 양 생각한다. 그 자체로 어느 정도의유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고난의 기억은 나의 인생의 에너지가 되지 못하고, 그림자만 될 뿐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온 몸을 다해서 그 고난을 우리 인생에 수용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억누르지 않는 것이다. 고난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하게도 하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 에너지가 바로 분노의 에너지다.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이는 필경범죄로 이어진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대부분은 인생의 고난에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잘못 다스려서 생긴 것들이다.

 

그렇다면 고난으로 생성된 분노의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 건전하게 풀 수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고난의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해야 한다. 신앙인은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분노를 엉뚱한 데가 풀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죄자가 된다.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푼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탄원하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대한 자신의 분노를 숨기지 않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리고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은 용서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이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와 좌절감의 표현을 방향 없이 허공에 또는 애꿎은 이웃에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향하여 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고난을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고난의 분노를 하나님을 향해 풀었다면, 이제 그 고난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차례다. 왜냐하면,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욥의 고백은 옳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기 2:10).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고난을 통해 겪는 고통이 가라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난에 의해서 생성된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선한 것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뿐이시다.

 

욥은 오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고난에 의해서 생성된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선하게 바꾸는 단계에 다다른 것이다. 고난을 이겨내는 마지막 단계에서의 고백은 공교롭게도 자기 자신의 무지에 대한 고백이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고백의 속성이다. 이 고백은 패배자로서의 고백이 아니라, 깨달은 자로서의 고백이다. 고난을 회피한 자의 고백이 아니라, 고난을 자신의 온 존재로 맞닥뜨린 자의 고백이다. 그렇다면 이 고백을 통해서 욥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이 고백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창조주되심에 대한 인정이 들어 있다. 즉 고난의 문제는 신비로운 창조 주권 차원에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차원에서 들여다 보아야 해결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욥에게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인식의 전환은 이렇게 표현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이는 풍문으로만 하나님을 알다가, 고난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바뀐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이다. 가치의 전환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가시는가? 한 번 생각해 보시라. 그것이 잘 바뀌지 않을 것이다. 돈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사시는 분은 무엇을 해도 돈만 보일 것이다. 그것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건강에 가치를 두신 분은 건강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나갈 것이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 바뀐 것이다. 이제 욥은 세상을 하나님이라는 창문을 통해서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바꾼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6). 여기서 회개는 히브리어 나함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회개와 조금 다르다. 만약 욥이 통상적인 회개, 즉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의미에서 죄를 인정했다면, 이는 전체적으로 모순에 빠진다. 욥에게 닥친 고난은 욥의 죄 때문이 아니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다그쳤지만, 욥은 거기에 저항했다.

 

여기서 욥이 하는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행위이다. 그동안 하나님에게 법정소송을 제기하거나, 탄식에 빠져든 자신의 마음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아픔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신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어려운 일 당한 사람들의 특징은 마음이 그 어려운 일에 가 있기 때문에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삶이 비뚤어지고 어긋나고 파탄에 이른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일상으로의 복귀를 결정한 것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자의 중대한 삶의 변화이다.

 

하나님은 욥의 편에 서셔서, 오해를 회복시켜 주시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삶을 회복시켜 주신다. 우선 엘리바스, 빌닷, 소발을 꾸짖으시며, 욥을 제사장 삼아 속죄할 것을 명령하신다. 친구들에게 정죄 당하던 욥이 하나님에 의해서 친구들의 속죄를 담당하는 중재자(제사장)가 된 것이다.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주신다.

 

하나님을 만난 자리에서는 언제든지 화해가 일어나고 생명의 회복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지표!) 이것이 참 놀라운 역사이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봤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분노와 좌절이 절정에 다른 자리이다. 분노와 좌절의 끝은죽음이다. 죽음은 부정적인 에너지의 끝이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조우가 일어났다. 그것의 결과는 부활이 일이었다. 부활은 화해와 생명의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일어나는 놀라운 은총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한다. “고난은 의식의 시작이다.”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의식하기 시작할 것인가? 바로 하나님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의식하지 못하면 그 고난은 그냥 형벌로 남겨질 것이고, 그림자 같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의식하는 자는 고난을 통해 거듭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욥기에서 바로 이것을 봤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도약이다. 고난을 통해 이러한 신앙의 도약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지 않는다면, 고난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인생은 허무에 빠질 수 있다. 허무한 인생을 살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고난을 통해서 당신을 의식하기 원하신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길 원하신다. 고난을 통해 당신을 만나 더 풍성한 은혜, 화해와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 원하신다.

 

고난을 은근슬쩍 회피하지 마시라. 온 존재를 다해 맞닥뜨리시라. 고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라. 신앙의 도약을 이루시라. 그것만이 인생을 새롭게 하는 능력임을 믿으시라.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