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6. 3. 11:43

2013 6 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왕상 17:8-24, 7:11-17

제목: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과 신약의 두 본문은 매우 비슷한 내용을 전해줍니다. 비슷한 두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우리는 어느 시각에서 본문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존재가 바뀌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과부의 입장이 되는 겁니다. 과부의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만 끝까지 붙들면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채우시는 은총을 체험하게 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엘리야와 예수님의 입장이 되는 겁니다. 엘리야와 예수님의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디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내고 있는 교회력은 성령강림절 후 두 번째 주일을 가리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총의 역사가 모두 이루어진 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부의 입장보다는 엘리야와 예수님의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끊임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하나님 외에는 붙들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 또는 그냥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단장의 마음, 이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픈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붙들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 입술에서 감사가 사라졌습니다.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보지 못하고, 풍요로움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가려버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본문은 오히려 엘리야와 예수님의 시각으로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시대는 시돈과 같은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명하여 시돈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시돈은 바알숭배의 중심지요, 예루살렘과 대비되는 이방인의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더러, 그곳에 가서 살라고 하십니다. 돈이, 풍요로움이 세상을 지배하는 우리 시대와 다를 바 없는 곳이 바로 시돈입니다. 돈을 벌어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 내 욕심을 모두 표현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까지도 팔아먹고 자기의 탐욕스러운 삶을 지지해 줄 수 있는 것을 신으로 모시고 사는 시돈과 우리 시대는 닮아 있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 들어가서 살라고 엘리야를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시돈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로 재미 있으신 분입니다. 시돈과 같은 이방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보내주신 후원자가, 사르밧 과부였다는 겁니다. 우리 상식 같으면, 엘리야를 이방 도시에 보내시면서 든든한 후원자,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팍팍 밀어줄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를 붙여 주시는 것이 도리에 맞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텐데,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엘리야의 후원자로 붙여 주십니다.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고대 사회에서 고아와 더불어 과부는 약자 중의 약자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를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이 명시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약자 중의 약자인 과부 중에서도, 오늘 말씀을 보니까 더 약자인 과부를 엘리야의 후원자로 붙여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약자여도, 끼니를 그나마 대충 때울 수만 있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숟가락 하나 그냥 더 얹어서 먹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붙여준 과부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고, 이제 굶어 죽을 처지에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상황이, 이것 먹고 자살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게 마지막 음식이니까 이것 먹고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상황이 이런 사람한테, 엘리야의 요청은 참으로 어이 없어 보입니다.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무슨 조직 폭력배도 아니고, 힘 없는 어린 아이 삥 뜯는 동네 깡패도 아니고, 이제 마저 남은 한끼 식사 하고 굶어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에게 그것 마저 내놓으라니요?

혹자는 이 본문을 가지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의 종을 잘 대접해야 축복 받는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의 종을 잘 대접해서 나쁠 건 없지만, 오늘 본문은 그것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어이 없는 요청을 한 것일까요?

 

이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열왕기에 흐르고 있는 전체적인 맥락을 봐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의 형편과 매우 대조되는 본문이 열왕기상 4:22, 23절에 나옵니다. 바로 솔로몬의 식탁이 얼마나 풍성했는지에 대한 본문입니다. “솔로몬의 하루의 음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고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고르요 살진 소가 열 마리요 초장의 소가 스무 마리요 양이 백 마리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더라.” 어떻습니까? 사르밧 과부가 지니고 있었던 한 움큼의 밀가루와 약간의 기름과는 너무도 다른 식사 풍경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솔로몬은 축복 받았고, 사르밧 과부는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 반대입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풍요로움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점점 잊어 갔습니다. 위에서 예기한 것처럼,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점점 타락해서 풍요로움으로 하나님을 가려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솔로몬 왕 이후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우상숭배의 징벌로, 하나님께서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역에 가뭄을 내리십니다. 그 가뭄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던 사람이 바로, 사르밧 과부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사르밧 과부가 살고 있는 시돈은 바알숭배의 중심지였으므로, 이 상황이 주는 메시지는 굉장히 큽니다.

 

농경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는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적절한 비는 농사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들이 바알을 숭배한 이유는 바알이 비를 내리고 멈추는 것을 주관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현상을 보고, 옛날 사람들은 참으로 멍청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엇을 섬기느냐, 대상만 다르지 그 근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요즘에 세상을 주관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본산인 미국이 특히 그렇습니다. 돈이 되지 않는 것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상품 가치로 봅니다. 돈이 될 만한 사람에게만 투자합니다. 돈이 안 된다 싶으면, 이제 더 이상 상품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쓰레기 버리듯 버려 버립니다.

 

남의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이 운영하는 비즈니스를 찾는 손님들을 여러분은 무엇으로 보입니까? 그들을 Sir, ma’am, 이라고 보통 부르는데, 진짜 그들이 Sir이고 ma’am이어서 그렇게 부릅니까? 바꾸어서, 우리가 어느 상점에 갔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Sir, ma’am 하고 부릅니다. 그들이 정말 우리를 Sir로 생각하고 ma’am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부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손님이나, 우리 자신에게 Sir, Ma’am 하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를 보여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우리 시대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에서 Sir, Ma’am은 인격적인 언어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언어, 그저 돈이 매개가 된 사무적인 언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든 인식하고 있지 못하든,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숭배에 자신들도 모르게 빠져들었듯이, 우리도 돈(맘몬)숭배에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빠져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엘리야라는 한 선지자가 한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오늘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여, 당신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지도자의 잘못이요, 당신의 지도자들과 당신이 믿고 있는 바알이 이 세상의 주관자가 아니요 당신을 먹고 살게 해주는 신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세상의 주관자시요 당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인 줄 아시오!” 이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 엘리야가 어떻게 사르밧 과부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보이듯이, 비를 내리는 분은 누입니까? 바알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가루와 기름을 공급하시는 분, 생명을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바알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하셨을까요? 가루와 기름이 막 스스로 불어났을까요? 사실, 이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렇게 역사할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미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큰 축복 중의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수고한대로 소출을 거두는 것입니다. 내 손과 발이 아무리 힘써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거둘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공부 열심히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공부한 만큼의 결실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사르밧 과부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아마도 아들이 수고한 대로 그 손에 가루와 기름을 쥘 수 있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을 겁니다. 내가 수고한 대로 내가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내 수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거기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감사하게 되는 거고, 이것을 모르면 내가 수고 해서 번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는데 뭐가 잘못이야하면서 자신의 욕망만 드러내게 됩니다.

 

상황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루와 기름이 떨어져 굶어 죽게 된 상황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사르밧 과부에게 발생합니다. 가루와 기름의 공급원이었던,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그의 아들이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제는 정말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살아갈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살 소망이 없는 것이죠. 엘리야에게 한 사르밧 과부의 원망에서 그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한계를 정해 놓고 하나님을 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하나님을 믿겠는데, 여기를 넘어가면 하나님은 더 이상 없는 거야!’ 사르밧 과부에게 신앙의 믿음의 마지노선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죽게 되자, 사르밧 과부는 돌변합니다. 절망합니다. 흔들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우리에서 발견되는 신앙의 한 형대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정해놓은 신앙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 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신앙에는 마지노선이 없습니다. 그 끝이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그 끝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문구를 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이 문구를 보고,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 우리 신앙의 마지노선은 죽음까지야! 이 정도 마지노선을 생각하고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은 그나마 참 괜찮으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죽도록 충성하라, 죽기까지 순종하라라는 말들은 단순히 죽음까지만의 한계를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다 바쳐서 그리고 죽음 이후에까지, 영원히 하나님을 신앙하라 믿으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상황을 아주 잘 말해주고 있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계신다면 나는 지옥에 가겠다.” 끝까지 예수님 붙들겠다는 말입니다. ? 지옥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한다기 보다, 예수님이 안 계신 곳이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든지,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그곳이 아무리 지옥과 같은 곳이라도,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하나님을 놓는 순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믿음을 져버리는 그 순간, 그곳은 바로 지옥이 되는 겁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지옥의 순간은, 아들이 죽었을 때 하나님을 놓아버린 바로 그 순간입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그 사실이 지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렸다는 그 사실이 지옥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 엘리야는 지옥으로 변한 사르밧 과부의 삶을 천국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죽은 아들을 살게 한 것입니다. 죽은 것을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가 하는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사르밧 과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바알이 생명을 주는 신이 아니요, 그것은 우상에 불과하고, 참 하나님, 생명을 주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초점을 엘리야에게 맞추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해 보십시오. 성령강림절 후,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도 메시지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로 부르십니다. 우리를 선지자로 부르셔서, 시돈과 같은 바알숭배, (맘몬)숭배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살되, 바알숭배자로, (맘몬)숭배자로 이방인으로 살지 말고,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분명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 선지자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참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지 증거하는 선지자로 살라고 부르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이 사르밧 과부처럼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나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귀한 사람입니다. 내 비즈니스를 찾아주는 손님은 내 욕망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주께 하듯 해야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내 비즈니스를 찾아주는 손님은 내 돈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내 섬김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섬겼는지,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를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슬픔에 동참하셨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축복의 통로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이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나만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무관심이 아니라, 저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긍휼함(Compassion)이 마음에 꿈틀거려야 합니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건넬 줄 알아야 합니다. “울지 말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물질에 굶주린 시대가 아니라, ‘위로에 굶주린 시대입니다. 그냥 한 없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들 왜 위로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위로 받고 싶은데, 나한테 무슨 위로할 힘이 있다고 내가 저 사람들을 위로해 주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로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힘이 있는 데서 위로하면 그것이 무슨 위로입니까? 동정이지요? 위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위로하는 것이 위로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먼저 위로하십시오. 죽을 힘을 다해 먼저 위로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갑절의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죽은 것과 같이, 소망이 없는 곳에서 생명을 심는 거룩한 일을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관을 만지는 수고로움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관(시체)를 만진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 것을 깨면서까지 소망 없는 곳에,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불어 넣으신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우리는 우리의 체면 때문에, 내 성격 때문에, 관습 때문에, 어떠한 이유에서든 수고로운 일을 피하려 하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만한 일을 절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성령 받은 선지자라면, 수고로움을 마다하거나 겪게 될지 모르는 불이익 때문에 소망을 심는 일, 생명을 심는 일, 덕을 세우는 일을 피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긍휼과 위로, 수고로움을 통해 모든 사람이 무슨 고백을 하는지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 앞에, 이 사명 앞에, 당신은 정말 선지자입니까?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