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5. 19. 05:44

2013 5 12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고린도전서 15:50-58

제목: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IV – 부활을 살라!

 

요즘 인터넷에서 화제인 그림이다. <여자의 일생>이란 제목의 그림인데, 한 여인이 아기를 낳아 기르고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확률 게임이다. 내가 태어날 확률이 얼마나 됐을까? 내가 결혼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내가 살다 사고를 당할 확률은 얼마일까? 내가 살다 암에 걸릴 확률은 얼마일까? 내가 살다 예수 믿을 확률은 얼마일까? 등 이 세상의 모든 일은 확률 게임이다. 그 확률이 0-100에 이른다. 세상을 살면서 일어나는 확률 게임 중, 100%의 확률을 지니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허상이 아니다. 죽음은 실체가 있는 대상이다. 지금 내가 눈으로 보고 있는 어떠한 대상보다 확실한 실체가 있는 대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이 대상을 전혀 눈여겨 보지 않는다.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죽음을 선고 받으면 그때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죽음이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즐거운 학문>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죽음, 그리고 죽음의 정숙함이야말로 우리 미래에서 유일하고 확실하며 모두에게 평등하다! 이 유일하고 확실하며 평등한 사실이 인간에게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한다니, 또 인간들은 자신이 죽음의 형제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괴이한 일인가!”

 

평소에 우리는 살아 있다라는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다. 그래서 지루함, 권태로움, 괴로움 등을 느낀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면 그때 비로소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우리가 죽음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죽음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다. ‘죽는다는 것을 가볍게 여기면서 인생을 막 사는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망나니라고 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실체를 인식하면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성인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현실에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건강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떠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그런 최후는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도 막연히 마지막까지 정상인과 다름없이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막상 그때가 닥치면 전혀 다른 현실에 배신 당한 기분까지 든다고 한다.

 

드라마 같은 곳에서는 죽을 때,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죽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현실 불가능 하다고 한다. 그것은 드라마이기 때문에 극적으로 그렇게 꾸밀 뿐이지,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죽어가는 광경이 낭만적이지 않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 죽음에 관해서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죽음을 잘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죽음의 순간에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 보았다. ‘지금 당장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 그리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주제를 가지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았다.

 

오늘은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제목의 마지막 말씀으로 부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앞 선 세 번의 말씀은 특별히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고, 또는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기독교인만의 독특한 신앙에 관한 이야기이다. 죽음에 관해서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주제이지만, ‘부활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말하기 힘든 주제이다. 그만큼 부활이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매우 독특한 신앙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기원을 사람에게서 찾자면, ‘예수라는 인물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라는 인물은 2천 년 당시 유대 땅에서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메시아 사상이 팽배했던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은 자신의 자식이 메시아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예수라는 이름을 많이 붙였다. ‘예수는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으로,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메시아란 구원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팍팍한 삶의 현실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어떠한 인물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2천 년 전,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던 예수라는 사람, 나사렛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서 일어난 어떠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예수라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없는 매우 독특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는 십자가이다. 그리고 가장 흔하게 보는 조형물도 십자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십자가 사건을 기독교의 기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깊이 있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중요해진 이유는, 부활 때문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 사건은 그냥 어느 죄인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중요한 이유는 십자가에서 달려 죽었던 그 사람에게 부활이라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부활을 가리켜 주는 손가락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찬송가에서도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서 고백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 자체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가리키고 있는 어떠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십자가는 죽음의 자리를 가리킨다. , 우리의 죽음의 현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죽음의 현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의 현실이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백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그 능력이 나타나질 않는다.

 

우리가 읽은 본문이 들어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한 교훈이 담긴 곳이다. 바울 서신은 복음서보다 일찍 씌어졌는데, 바울 서신에는 예수의 일대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그저 이렇게 부활에 관한 복음만이 등장할 뿐이다. 복음서에는 부활에 관한 기사가 바울 서신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로 등장한다. 그저, 일대기 형식으로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만 보아서는 부활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그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정도로만 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부활이라는 것이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정도의 사건이 아님을 가리켜 준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부활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기독교인의 영성은 이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는 만큼 성숙해진다. 이 세상에서 잘 살려면, 그리고 세련되게 살려면 윤리도덕적인 사람이 되면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련된 삶을 위해서, 윤리도덕적인 삶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윤리도덕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혀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이란 종말에 관한 실체이다. 그러니까, 부활이란 차원이 다른 이야기라는 뜻이다. 사실,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기도 힘들다.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어떠한 것을 설명할 때,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부활도 마찬가지다. 부활은 우리가 겪는 이 세상의 현실과 차원이 다른 현실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활에 대해서 미주알 고주알 설명하지 않고, 듬성듬성, 애매모호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2-53).

 

이것은 부활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는 구절인데, 부활의 상황이 죽음과 연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다음 구절이 이어진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여기서 부활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부활은 죽음을 이기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은 이렇게 묻는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부활이란, 적어도, 우리가 가장 인생에서 두려워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상황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는 누구든지 언젠가는 죽는다라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죽음이라는 실체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반응을 하는 지와 상관 없이, 여러분은 반드시 죽는다. 그것만큼 우리의 삶을 허무하고 슬프게 하는 것도 없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가장 아픈 일이 바로 죽음의 이별아닌가!

 

죽음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현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지금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바로 죽음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죽음의 현실과는 또다른 현실이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이 부활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겪는 현실과 차원이 다른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과도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부활이라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은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은혜이다. 복음서는 그러한 정황을 초자연적인 현상’(병자를 고친다든지, 죽은 자를 살리신다든지, 물 위를 걸으신다든지 등)을 들어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부활의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밖에는 없다. 믿음이란 나의 욕망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나의 욕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부활은 하나님만이 주권적으로 일으키실 수 있는, 새로운 창조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일이다. 그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에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가장 확실한 길이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다

이 땅 위에서 별처럼 살았던 사람도 별이 되고

이 땅 위에서 별 볼 일 없이 살았던 사람도 별이 되고

죽어서 모두 별이 되어 만난다면

그 잘난 교만도

그 못난 마음도

반짝반짝 허물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별처럼 살아도 상관 없고

별 볼일 없이 살아도 상관 없다

죽으면 모두 별이 되어 만날 텐데

뭐 그리 아등바등 살아갈 필요 있겠는가

교만을 탓할 것 없고

못난 마음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그저 빛나는 대로 살면 될 뿐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다

반짝반짝 허물어질 내 마지막 날

두 눈을 꼬옥 감으면

어느새 저 높은 곳에 별이 되어 걸리는 인생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너도 나도 다 한결같이 하늘에 걸리어 반짝반짝 빛나는 인생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