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5. 27. 04:03

2013 5 26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학개 1:1-15

제목: 황폐함을 보라!

 

서울 가신 오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비단구두이다. 그러면 내가 오빠를 사랑한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비단구두를 사가지고 오실 거라는 그 마음, 간절히 기다리는 그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로 대표된다.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증거는 무엇인가? 십자가 목걸이 하고 다니면 되는가? 교회 안 빠지고 열심히 다니면 되는가? 헌금 많이 하면 되는가? 봉사 열심히 하면 되는가? 착한 일 많이 하면 되는가? 아마도, 그것은 각자마다 다 다를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성전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 또한 성전이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율례대로 제사 드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학개서의 배경은 포로귀한 이후이다.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는 망하고, 모든 백성이 흩어지고 고관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이들은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생각 때문에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회복해 주실거라는 소망 가운데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포로생활을 한지 70년 정도가 지나서,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한 뒤, 고레스 칙령에 따라 유다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이 BC 537년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17년이 지난 BC 520년에 일어난 일이다. 포로 귀환한 지 17,8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이 처음 포로 귀환했을 때, 의욕을 가지고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여러 난관에 부딪혀 성전 재건의 사역을 손 놓는다. 그리고 성전 재건에 관한 생각을 이렇게 가졌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2). 여기에는 이러한 숨은 뜻이 들어 있다. ‘자신들은 성전 재건을 해보려고 했는데,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성전 재건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외부의 요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이다.’ 이런 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핑계라고 하는 거다. 그러면서 이들은(바벨론에서 귀환한 사람들) 성전을 재건하는 일보다 자신들이 거주할 집을 짓는 일을 더 우선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만약 이들의 판단이 옳았다면 이들의 삶은 풍요로워졌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집을 먼저 세우려 했던 이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일을 간섭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잠시 멈추고, 이들은 이들의 삶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학개 선지자는 이 상황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5).

 

성전 재건의 일을 뒤로하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 자기 집을 짓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한 이들의 삶을 한 번 보라. 6절 말씀을 좀 쉬운 성경으로 그대로 읽어보자.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농사일과 집 짓는 일에 온 정성과 마음을 쏟아 부었는데, 그들은 기대했던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이럴 때 삶에 패닉이 온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학개 선지자는 다시 한 번 말한다.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Consider your ways.”(7).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시무 레바르켐알 다르케켐)”(7). ‘심 레바르는 문자적으로, ‘마음을 두다’, 즉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 주의하고 생각하는 행위를 표현한 것이다. ‘다르케켐은 문자적으로, ‘너희의 길들에인데, 이것은 삶의 여정이나 행동 방식 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들이 걸어가는 길과 삶의 방식, 현재 그들이 살아가면서 취하는 행동들 전반을 포함하는 표현이다. 멈춰 서서 자신의 삶을 좀 진지하게 돌아보라는 뜻이다. 왜 이럴까? 왜 이렇게 만족이 없을까? 왜 이리 평안하지 못할까? 왜 이렇게 풀리지 않을까?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포로귀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해법을 주신다. 8절 말씀이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8). 그냥 겉에서 보기에는 굉장히 간단한 처방이다. 성전만 재건하면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이들은 17,8년 동안이나 하지 않고 있었을까?

 

겉보기에는 그래도,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자신들의 마음 또한 성전 재건이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 마음도 없을 뿐더러,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려는데, 방해까지 심하다면, 당연히 그 일 하기는 힘들어지는 거다. 마음에도 없었는데, 마침 그 일을 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나타나면, ‘아 잘 됐다! 그냥 핑계 대고 그만 둬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마음이다. 교회 오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는데, 마침 자동차 시동이 안 걸리면 우리는 대뜸 마음에 핑계가 생깁니다. ‘내가 안 갈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고, 자동차 시동이 안 걸려서 못갔어!’

 

여기서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 성전만 건축하면 만사 OK이구나!’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니까, 신앙의 발전이 없는 거다. 이것은 철저하게 고대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들에게 성전은 무슨 의미, 무슨 상징인지 살펴야 한다. 이들에게 성전은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 아주 실재적인 문제였다. ‘성전이 있고 없고는 아주 실재적인 문제였다. 다른 말로 해서, 지난 17,8년 동안 이들에게 성전이 없었다는 것은 이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옮기면, 이들은 없이 17,8년 동안이나 산 것과 똑같다. 17,8년 동안 돈 없어서 홈리스로 살았다고 생각해 보라. 이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삶이 그렇게 피폐했음에도, 왜 그랬는지 그 문제의 근원을 몰랐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삶의 황폐함이 안 보였다는 것이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자신의 운명을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의 처지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냥 물 속에서 놀기 바쁘고, 숨쉬기 바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뜨거워진 물에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개구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멈추고 주변을 살피는 것이다. 뭔가 좀 이상한데?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Consider your ways!”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포로귀환한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을 재개하라고 부르신 때는 이들이 한가하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곡식들이 한창 자라나는 시기였다. 굉장히 바쁜 시기였다. 지금 당장 하는 일을 멈추면 굶어 죽게 될지 모르는 그런 시기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너 자신을 한 번 되돌아 보아라!’

 

사실, 하나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다 백성들의 반응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 반응한다. 14절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이들은 예전에 안 그랬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지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감동을 못받았다. 예레미야가 그렇게 목에 피가나도록 외쳤지만, 이들은 오히려 예레미야를 잡아 가두고 예언을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 그런데, 포로생활을 겪고 돌아온 이들의 반응은 달랐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두려움이 있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이다.

 

예수를 믿기 전과, 예수를 믿은 후의 삶 중 달라져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은 후나,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하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다르다.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콧방귀를 꼈는데, 예수 믿은 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는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시는 분들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실 줄로 믿는다. 예수 믿은 후에도 정신 없이 살다 보면, 무엇이 우선 순위를 가져야 하는지 헷갈리고 놓치는 경우가 있다. 성건 재건을 방해했던 도비야 같은 요소가 우리 삶을 둘러 싸고 있다. 그것과 싸우다 보면 정신 없다. 정신 못 차린다. 당연한 거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삶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잠시 멈추고 자신의 행위를 진지하게 되돌아 볼 줄 아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개 정신 차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멀리 뭍에서 떠나 있는 경우가 있다. 탕자처럼 아버지 집을 떠나서 허랑방탕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정신 차리고 배의 방향을 틀어서 뭍으로 돌아오면 된다. 그럴 때, 정신 차리고 발걸음을 돌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면 된다.

 

자신의 삶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황폐함을 좀 보시라. 육신의 황폐함, 정신의 황폐함, 마음의 황폐함, 관계의 황폐함, 경제의 황폐함 등, 잠시 멈추고 돌아보면 이랬나!’싶은 정도로 황폐해진 삶의 한 부분이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란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