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4. 29. 04:48

2013 4 21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요한복음 14:21-24

제목: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II –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

 

죽기 전에 후회하는 일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합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나 흙으로 돌아가겠죠. 이 진실을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그동안 훨씬 마음 편하게 살았을 거에요. 사소한 일에 그렇게 아등바등하지 않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면서요.”

 

우리는 살면서, 이 사실을 깨닫지못하고 삽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나 흙으로 돌아간다!” 수도 없이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듣고 보지만, 그것을 깨닫지는 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아니라,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난다입니다. 그래도 나는 잘난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죽음을 앞두고 생각해 보았을 때, 잘나고 못나고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평등하게 세상을 떠난다입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으면서 후회하는 것은, “감정의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잘 다스려야 했는데”,라는 것입니다.

 

화살에 맞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화살을 빨리 빼내고 치료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화살을 맞으면, 우선 우리는 이 화살 어떤 놈이 쏜 거야!’라고 하면서 화 가운데서 시간을 허비합니다. 그러다 화살로 인해 난 상처를 제 때 치료하지 못하고, 그 상처로 인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화살을 뽑지 못하고, 그 화살의 상처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고,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일단 화살을 뽑아내고, 치료한다는 뜻입니다.

 

이탈로 칼비노가 쓴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제국은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제국이 자신의 상처에 익숙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에 휘둘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내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나쁜 것은, 그 상처에 익숙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처로 병든 사람들은 감정의 지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감정대로 살아갑니다.

 

성유리가 주연한 <누나>라는 영화를 보면, 동생이 물에 빠져 죽은 것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남동생은 '누나'를 구하러 물에 들어갔다가 누나를 구하고 대신 죽습니다. 그 일로 아버지는 술주정뱅이가 되는데, 아버지는 술에 취해 '누나'에게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 쓸 데 없는 년!'하면서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누나'는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누나는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을 아버지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속죄'하려고 합니다. 동생(아들)의 죽음을 놓아두고, 아버지는 매우 사디스트적인 행동(가학적 행동)을 취하는 반면에, 누나()은 매우 매조키스트적인 행동(피학적 행동)을 취하는 것이죠.

 

여기서 아버지나, 딸이나 감정에 휘둘리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탓이 딸 때문이라는 생각, 감정에 휘둘려, 틈만 나면 술을 먹고 딸을 구타하는 겁니다. 누나는 남동생이 죽은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구타를 통해서 속죄하려고 든다는 것이죠.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면, 이렇게 삶이 일그러지고, 행복하지 못한 법입니다.

 

미국 버클리대학교의 심리학자 바울린드 교수는 자녀 양육에서 중요한 요소가 애정과 통제임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3-4세 된 유아들을 대상으로 다섯 가지 심리적 능력(대인관계 능력, 자제력, 자립심, 호기심, 생동감)을 측정했더니, 그 점수가 상중하로 확연히 나뉘었다고 합니다.

 

상에 해당하는 그룹은 다섯 가지 심리적 능력이 모두 우수한 아이들로 부모에게 적당한 애정 표현과 적절한 통제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중에 대항하는 그룹은 아이들이 부모들로부터 애정 표현은 잘 받지 못했지만, 적절한 통제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하에 해당하는 그룹은 대인관계 능력도 떨어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나치게 의존적이며 자제력을 쉽게 잃었는데, 이들은 부모로부터 애정만 받으면서 모든 게 용인되는 분위기 속에서, 즉 통제 없이 자란 아이들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삶에서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것이 바로 통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사랑의 가치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런데 통제의 가치는 잘 눈치채지 못합니다.

 

자녀를 키우시는 분, 아이를 정서적으로 건강한 아이로 잘 키우고 싶다면, 무조건적으로 사랑만 베풀지 마시고, ‘통제를 적절하게 해야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통제하는가?’의 문제가 우리에게 남습니다. 통제란 무조건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예로 들면, 자녀들은 부모가 세운 제한을 주의 깊게 따르는 것이지요. 적어도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에게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잘 다스리면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명확하게 밝혀 주고 계십니다. 이는 우리의 삶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삶의 기준을 나의 감정에 두고 살아갑니다. 감정이 삶의 기준이다 보니, 삶의 모든 행동이나 말이, 나의 감정을 기준으로 해서 나갑니다.

 

일례로, 학창시절에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과의 차이가 여기서 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 없이, 엉덩이를 책상에 붙이고 꾸준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학생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공부합니다. 공부가 좀 된다 싶은 날, 즉 기분이 좋은 날은 공부를 좀 하는가 싶다가도, 기분이 좀 우울하면 세상이 꺼지는듯한 한숨을 쉬면서 신세타령합니다.

 

어느 사람이든지, 감정 낭비가 심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있는 분야에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을 한 번 돌아봅시다. 무엇이 우리 삶의 기준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께 인생을 건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기준이 이제는 나의 감정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말씀(계명)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계명)조차도 우리의 감정을 중심으로 지키든지 안지키든지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으로 여러분의 삶을 통제하십시오. 감정이 여러분의 삶을 통제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통제하도록 그 말씀을 붙드십시오.

 

남의 것을 도둑질 하고 싶다가도, “도둑질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남을 헐뜯고 싶고, 부정적인 말을 하고 싶다가도,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6)”라는 말씀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저 원수 같은 놈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가도,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에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감정을 부당하게 억누르고 무조건 참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 우리의 영혼을 소생케하시고 우리를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통제하도록 허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에 치우친 삶,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얽매여 평생을 허비하면 돌아오는 것은 후회뿐입니다. 감정을 잘 통제하는 사람,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스리는 사람의 삶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말씀으로 당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외쳤던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칠언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감정이 삶을 지배하게 놓아두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삶을 통제하시도록 맡기셨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감정에 휘둘리면, 그 당시 잠깐은 속 시원할 수 있지만, 어떠한 후회가 영원토록 남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화내고, 울고, 웃어도 인생의 시계는 흘러갑니다. 어차피 흘러가고 지나가는 게 인생이라면, 좀 더 웃고 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겁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주신 사명을 따라 무쏘처럼 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