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4. 8. 04:38

201347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20:19-31, 5:27-32

제목: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의 달력과 절기를 지키신 분이었죠. 우리가 요즘 쓰는 달력은 로마 황제 율리우스가 만들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해서 다듬어진 달력을 씁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요즘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 따지면 금요일 저녁 해 진 후부터 토요일 해지기 바로 전까지 입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요즘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 따지면,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일요일을 일요일이라고 부르지 않고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앙고백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고, 그분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그분의 날이라는 신앙고백을 담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로마 황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박해 받던 시절, 박해 받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를 섬기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을 때 로마의 모든 국민은 로마 황제를 일컬어, 주님(퀴리오스)라고 불러야 했습니다. 이것을 거부하면 곧 죽음이었죠. 그런데,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주님은 황제가 아니고,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참 주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더욱더,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주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일에 더 박차를 가했습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정부에 의해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죽는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증거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들은 부활의 주님의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이상, 더 이상 이들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주님이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아닌 로마 황제에게 절하면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안식 후 첫날 저녁에, 그러니까 주일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처럼 끌려가서 십자가 처형을 당할까봐, 또는 돌에 맞는 처형을 당할까봐, 욕을 볼까봐 무서워서 어느 한 곳에 숨어 모여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곳에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 주셨다는 겁니다. 두려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의 가장 필요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복을 빌어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부활한 당신의 몸을 보여주십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던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한 몸을 보고 마음 속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기쁨이 생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인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잘 보셔야 합니다. 제자들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변하게 되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보기를 드립니다. 1. 십자가 사건, 2. 예수님의 부활 사건, 3.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건. 정답은 3번입니다. 두려움만이 가득 찼던 이들의 마음이 기쁨으로 변하게 된 사건은, 다름 아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이 부활한 주님을 못 만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냥 평생을 두려움 가운데 살았을 겁니다. 그 두려움 가운데, 예수님께서 살아생전 주신 사명도 잊어버리고, 그냥 두려움 가운데 인생을 살다 두려움 가운데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부활한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삶은 그런 삶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이 가득한 삶이었고, 그 기쁨 가운데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감당하는 능력의 종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 가운데 왜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는 이유를 기껏 생각해 봐야, 세상적인 기준에서 세상적인 것들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난 이것도 없고, 이것도 없고, 이것도 없고, 누구처럼 이런 것들이 나한테 있었다면 내 삶에 평강이 있고 기쁨이 넘쳤을텐데그래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적인 것들을 간구합니다. 포인트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죠.

 

우리에게 평강이 없고, 기쁨이 없는 이유는, 부활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나의 마음 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마음 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은 나.. 맘이 늘 평안해.”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에 평안을 원하시고, 참된 기쁨을 원하시면, 세상의 헛된 것을 간구하시지 마시고, 부활의 주님 만나 뵙기를 간구하십시오. 기도하실 때, ‘이것도 주시구요, 저것도 주시구요’, 이러지 마시고, ‘주님, 부활의 주님 저를 만나 주십시오!’ 하고 간절하게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것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안 주시는 이유는 그것을 우리의 정욕대로 쓸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안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 간구는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평강과 기쁨을 얻고 사명을 받고 있었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평강과 기쁨이 없으니까, 의심만 생깁니다. 제자 한 명이 도마에게우리가 주를 보았다하니까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도마의 의심을 의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도마을 일컬어의심 많은 도마라고 하지만, 이 의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나온 의심이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의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소망에서 나오는 의심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의심조차도 없지 않습니까? 의심은 둘째치고 부활하신 주님에게 관심조차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관심이 있으니까, 의심도 하는 것입니다.

 

도마의 의심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라고 했던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나서, 가장 강력한 신앙의 고백을 주님께 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말씀은, 이렇게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의 참 주님이시라는 것을 전하고 다니다가 공회(유대인들)에 붙잡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입니다. 위에서 살펴 보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들은 잡힐 것을 뻔히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며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이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 사람들의 삶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작은 일에도 쉽게 실망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담대한 마음이 생깁니다. 결코 작은 일에 쉽게 실망하고 절망하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작은 일 뿐만이 아니라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마음이 생깁니다. 바로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세상의 노예가 되어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살게 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세상도 감당하지 못하는, 즉 세상으로부터 자유한 참된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공회로 잡혀간 제자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십시오. 위에서 본, 두려워하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공회로 잡혀 갔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다는 말인데, 베드로와 제자들은 공회 앞에 서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서 꽁꽁 숨어 있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단 말입니까?

 

공회 앞에 서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이들의 기세를 보십시오. 죽음인들 이들을 감당하겠습니까?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뭔지 감이 잡히시나요? 뭡니까? “나를 죽여라!” 이거 아닙니까? 죽음이 하나도 안 무섭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말씀이 너무도 감격스럽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성령이 하시는 일과 자신들이 하는 일이 똑같다는 겁니다. 증인의 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구세주로 증거하는 일이 자신들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 일을 하는데, 죽음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죽일 테면 죽여봐라, 나는 이 진리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복음 전하면서 죽을란다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이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될까봐 숨어 있던 이들이, 세상이, 죽음이 감당하지 못하는 증언자들이 되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여기서서 말의 구슬이 뭡니까?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러면 꿰는 것은 뭡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겁니다. 그러면 보배는 뭡니까? 담대한 증인으로 인생이 180도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외치면서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면서 부활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의 부활 내 삶에 보배가 되고 참된 진리가 되고 의미가 되려면, 그 부활하신 주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서 말의 구슬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꿰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