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3. 5. 11:57

2013 3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5:1, 6-7, 10-12, 17

제목: 믿음이란 무엇인가? II

 

지난 주에 이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아브라함이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했을 때 두려워했던 상황을 통해서, 믿음이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두려움은 뱀이나 마귀를 보았을 때나,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느끼는 공포 같은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의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누군가를 공경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처럼,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그보다 더 위대한 능력 갖게 되는 것이죠. 이 능력은 무엇인가를 행하는 능력도 포함되지만,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쳐서 굴복시키는 겸손의 능력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오는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려 했습니다. 16장에 그것이 잘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죠. 믿음이 들어가면, ‘이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들과 같이 자손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나이는 들어가고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질 않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행하는 것이죠. 성숙한 믿음으로 가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성령 받으면, 믿음이 생기면 힘이 먼저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이든지 다 해야 한다는 일종의 열심이 생깁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사라의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내서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었습니다. 15 4절 말씀에 보면,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는데, 비록 사라가 낳은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풍습으로 봐서 몸종 하갈에게서 난 아들은 아브라함에게서 난, 즉 아브라함의 몸에서 난 자가 맞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렇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혼 줄을 내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 또한 믿음의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17장에 보면, 이스마엘이 하나님께 축복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20절입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여러분, 믿음으로 행할 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 실패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아름답게 사용하시고, 그 실패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즉 믿음에서 우러난 행동은, 믿음에서 행한 최선의 행위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갔기 때문에 적지 않은 트러블을 만들어 낼지언정, 언제나 하나님께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행위인양 가장하고 만들어 내는 트러블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트러블 만들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전진하라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믿음이 생기면 우리는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다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일이든지 해야 한다는 열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성숙한 믿음은 오히려 그 힘을 빼는 데 있습니다. 열심히 하지 않고 뺀질거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성령이 흘러가는 데로 나 자신을 맡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동을 좀 진지하게 해 보신 분들은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좀 더 잘 이해 가실 겁니다. 골프를 예로 들면, 힘 주는데 3년 힘 빼는데 3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수가 되려면 힘을 빼야 합니다. 스윙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되어야 공이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추어와 프로, 하수와 고수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큼 힘을 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죠.

 

지금 대만에서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 열리고 있는데, 한국팀이 네덜란드에게 졌습니다. 한국은 네덜란드보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섭니다. 그런데 왜 졌겠습니까? 힘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꼭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해서 힘이 들어간 것이겠죠. 힘이 들어가면 집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힘이 필요 이상 들어가지 않도록 힘 조절을 잘 하는 사람이 진짜 프로입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 사건, 즉 힘 주는 사건을 통해서 이제 힘 빼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18장에 나와 있는 대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세 명의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잘 대접해서 결국 이삭을 얻는 큰 축복을 받습니다. 18 14절에 보면, “ 여호와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하시면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두 노인네에게 아들을 선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들은 너무 늙어서 이제는 더 이상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힘이 완전히 빠진 것입니다. 힘 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냥 지켜보는 것입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죠.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결국 믿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 이제 우리는 이것이 믿음인 것을 저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맺는 의식(Ceremony)가 나오는데, 그 의식을 들여다 보면 믿음이 무엇인지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언약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약속입니다. 현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장차 그렇게 될 거라는 약속입니다. 언약이 체결되면 쌍방 간에 철저하게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뭇별과 같은 자손을 주겠다고, 그리고 이 땅,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대신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 징표로,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 삼 년 된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다가 새는 그냥 놓아두고, 소와 염소와 양은 반으로 쪼개어 마주 대어 놓는 의식을 행합니다. 하나님과 맺는 신실한 언약은, 땀과 눈물 없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나의 수고와 헌신이 꼭 필요합니다. 솔개가 그 짐승들의 시체에게로 달려들 때 아브라함은 쫓아냈습니다. 언약의 징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죠. 얼마나 힘들었는지, 해 질 때 아브라함이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수고로움과 헌신이 있고 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만나주시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17절 말씀입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햇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하나님께서 연기 나는 화로와 같은 모습으로, 타는 횃불과 같은 모습으로 임재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자 이제, 하나님 입장에서는 언약을 성취시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그 언약이 성취될 것을 믿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처럼,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진 줄로 믿고 나아가는 것, 즉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십자가는 무엇에 대한 언약입니까? 우리는 흔히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기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 사건으로 이해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이는 십자가 사건을 너무 죄와 관련시켜 본, 십자가 사건을 좁은 관점에서 본 표현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더 큰 틀에서 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을 새 창조의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죄에 대한 심판 사건이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듯이, 누구든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지는 않지만, 어느 모양이든 육신을 갖고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다 죽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인생이 끝난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심판 받고, 그냥 끝나버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성실하게 수행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이들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언약, 새 창조의 언약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바로 이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일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이 언약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거라는 언약.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미래는 누구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잠 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고,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우리를 당신과 같은 운명으로 이끄는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거는 일,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하기 위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를 맛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빼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렇게 될 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19세기 미국 시카고에 스패포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변호사로서 결혼하여 네 딸을 두고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생활을 하던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의사의 권유로 부인과 함께 네 딸 아이를 잠시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타이타닉 같은 큰 유람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던 중 충돌 사고가 일어났고 그들이 타고 있던 배는 대서양 한복판에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네 딸은 모두 익사했고, 아내만이 간신히 구조를 받아 살아남았습니다. 같은 시각, 설상가상으로 스패포드는 시카고의 대화재로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인 행복 기반이 대화재로 내려앉은 셈입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여느 사람 같으면 극심한 절망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나지 못할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창조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스패포드 역시 잿더미 속에 놓여 있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고백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흐르고 있는 찬송가 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을 이미 경험한 믿음의 사람들은 걱정 근심에 사로 잡혀 살지 않습니다. 두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예수 안에서 평안을 누릴 뿐입니다. 마귀가 달려와서 우리를 삼키려 해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장되시고, 최후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 지은 죄가 아무리 주홍 같다고 해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 흰 눈 보다 더 깨끗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걱정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그 때에도 우리는 이미 천국 인침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건 인생, 부활의 새 창조의 역사를 믿는 인생은, 평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는 마음으로 이 찬양 함께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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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