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 15. 09:32

2013 1 13일 주일 예배 설교

본문: 13:1-18

제목: 십자가의 도로 해결하라!

 

오늘은 수세주일입니다. 수세주일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수세주일은 주현절기 가운데 들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세례 받는 것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공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수세주일에 임직식을 거행하게 된 것을 뜻 깊게 생각합니다. 임직식이란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대중들에게 드러낸 일과 같은 종류의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일차적으로 세례를 통해서 그 일을 합니다만, 세례 받고 나서도 숨어 지내는 기독교인이 많은데, 임직식이란 세례 받은 성도가 그동안 열심히 공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서, 그의 신앙이,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공적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공적으로 드러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세상 앞에서, 그리고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유해 나갈 때,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오늘 말씀 제목처럼 삶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의 도로 해결할 줄 아는 영성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례를 통해서, 그리고 임직식을 통해서 세상에 공적으로 나 자신의 정체를 밝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꼭 배우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부인 사라, 그리고 조카 롯과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 여정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네게브라는 지역에서 벧엘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삶의 터전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와중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조카 롯도 그렇고 그냥 홀홀 단신 여행 배낭만 매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재산, 즉 양 떼, 염소 떼, 소 떼 등을 거느리고 이주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축들을 풀어놓고 마음껏 먹일 수 있는 목초지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음이니라.”

 

영역이 겹치다 보면,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브라함의 목자들(종들)과 롯의 목자들(종들)이 목초지 문제 때문에 자주 다투었나 봅니다. 서로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었겠죠.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뜻하지 않는 문제(갈등)에 직면하게 됩니다. 문제(갈등) 없는 삶은 없습니다. 믿는 이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문제(갈등)이 없을 거라는 것이죠. ‘예수 믿는데, 왜 나한테 이러한 문제(갈등)이 생기는가?’ 하면서 신앙이 흔들릴 때가 있는데, 이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갈등)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육신을 입고 살아 숨쉬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갈등)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 없는 삶이 아니라, 문제(갈등)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푸느냐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갈등)를 푸는 방법이 다르다는 겁니다. , 하나님 앞에서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욕심에 따라 인간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에서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갈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툼 없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삶 속에서 일어난 문제(갈등)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한 번 보십시오. 문제가 발생하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13:8).

 

사실, 삼촌이 조카랑 다투는 것은 참 창피한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shame)입니다. 상대가 되는 사람하고 싸워야죠.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끼리 싸우는 것을 말할 것도 없죠.

 

그러나 그것보다도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것은 이득과 손해가 아니라, ‘하나 됨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를 꼭 짚어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이득과 손해가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가르칩니다.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안 하게 하고, 이득이 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저지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것이 절대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 됨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갈등)가 발생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 됨입니다. 사탄이는 갈등 상황에서 분열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니까, 거꾸로 얘기해서 분열과 다툼을 일삼는 말과 행동은 하나님 자녀로서가 아니라, 사탄의 자식으로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 됨을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의 상황에서 화평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 8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5:9).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합니까? 문제가 발생하거나, 갈등이 생겼을 때 이득과 손해를 따져서 행동하지 않고, 속시원하게 내 속에 있는 것 다 풀어내 놓지 않고, 어떻게 우리는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까?

 

문제(갈등) 상황 속에서 다툼 없이 그 문제(갈등)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리는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비전이라고도 부릅니다. 내가 바라보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서 용인해주시는 것이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것을 바라보는 것이 비전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제안합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3:9). 참 멋있지 않습니까? 우리 같으면, “가만히 있어, 내가 간 다음에 너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그러던지,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다 내꺼야!”할 텐데 말이죠.

 

삼촌 아브라함의 제안에, 롯은 신이 났던 것 같습니다. 아직 어려서 그렇기도 했거니와, 롯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서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을 차지합니다. 그 지역이 어딘가 보십시오.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소알 땅입니다. 눈으로 보기에 그 땅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의 땅과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을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곧 좋고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은 우리 마음의 탐욕대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눈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탐욕 대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 눈을 감는 것입니다.

 

롯이 선택한, 그의 눈에 좋게 보였던, 아름답게 보이고, 잘 먹고 잘 살 것 같았던 소알 땅, 나중에 이 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땅입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13:13). 탐욕스러운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던 롯의 눈에는 이것이 안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나중에 롯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함께 심판 받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잃고, 탐욕에 물들어 있던 아내까지 잃게 됩니다.

 

그리고 웃지 못할 사건도 발생하죠. 삼촌 아브라함 덕분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롯과 그의 두 딸은 자손을 보존해야한다는 명문하에, 첫째 딸이 먼저 아버지께 들어가고, 둘째 딸이 나중에 아버지께 들어가서 성관계를 가진 뒤, 임신을 하여 각각 모압과 암몬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을 평생 괴롭혔던, 모압과 암몬 족속의 시조들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탐욕대로 세상을 보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끝까지 골치거리로 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롯과는 달리,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땅을 바라봅니다. 그 땅은 롯이 택한 소알 땅에 비하면, 사막과 다름 없는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땅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땅은 아브라함의 눈에 보기에는 별로인 땅이였지만, 하나님이 복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고작 조카와 갈등을 겪으면서 빼앗은 땅은 아니라고 말이죠. 갈등을 겪으면서 빼앗은 땅에서 무슨 선한 열매가 맺어지겠습니까? 꼭 기억하십시오. 믿는 우리들이 어느 누군가와 갈등을 겪으면서 빼앗은 그 무엇이든,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을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대로 움직여서 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김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형님과 유산 문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형님은 법원에 재산분할소송을 제기하며 유산을 독차지하려 하였고, 이에 동생도 맞고소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를 드리다가 문득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5:23-24)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권사님은 모든 법적 소송을 중지하였고, 유산의 대부분은 형님이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유산으로 사업을 확장한 형님은 얼마 후 도산하였습니다. 이를 안 권사님은 거주할 곳조차 없어진 형님의 가족들에게 전셋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크게 미안해하는 형님과 형수님께 생활비 일부를 보태 주었습니다. 형님은 동생에게 예수 믿는 사람이 정말 다르구나.”하고 말하면서 집 근처 교회에 등록하여 출석하기에 이렀습니다. 권사님은 유산을 받지는 못했지만, 양보함으로 평안을 얻었고, 주님의 제자 됨을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해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에서 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과의 갈등입니다. 아주 극렬한 갈등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딪치는 문제(갈등) 가운데, 그 문제(갈등)을 해결하는 마지막 단계는 죽음입니다. 요즘 말로, 막장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예수님과 이 세상이 얼마나 극렬한 갈등 가운데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과의 갈등을 죽음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는 막장까지 간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데려다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답답해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천사를 동원하시든지, 벼락을 동원하시든지 자신을 부당하게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혼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가 답답해 하는 심정처럼 그렇게 하셨다면, 예수님과 세상은 다를 게 없는 것이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끝까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으시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그냥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기에서 정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고린도전서 2:9절 말씀이 증거해 주고 있는 것처럼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부활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이 세상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 하신 예수님의 선택이 옳으셨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증명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롯과는 달리 큰 민족을 이룬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 됨을 위해, 화평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아브라함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증명해주셨다는 뜻입니다. 위의 예화에서 보았듯이, 김 권사님 형님이 동생 권사님의 믿음을 통해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 됨을 위해, 화평을 위해 재산을 포기한 김 권사님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증명해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도로 이득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하나 됨을 위해, 화평을 위해 문제(갈등)를 믿음으로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옳다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부활의 은총이 있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임직하시는 분들이나, 여기에서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을 만나든지, 부활의 주님을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도로 그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보지도 못했고, 귀로도 듣지 못했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이란 무엇인가?  (1) 2013.02.25
성령과 말씀  (0) 2013.02.19
다른 길  (0) 2013.01.07
맡겨야 기쁘다  (0) 2012.12.18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0) 2012.11.19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