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2. 11. 19. 17:33

2012 11 18일 주일 예배 설교 (추수감사주일)

본문: 히브리서 3:1-6

제목: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신앙생활과 극기훈련은 다릅니다.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새벽기도나, 수요예배나, 주일예배를 성실히 참여하는 것도 극기훈련처럼 보입니다. 신앙생활 생활과 극기훈련이 무엇이 다릅니까? 신앙생활은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극기훈련은 자기 의(의지)로 합니다. 신앙생활은 은혜로 하기 때문에 결과가 감사가 나옵니다. 극기생활은 자기 의로 하기 때문에 자기 자랑만 나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극기훈련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들어나는 것은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모두 열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열심이라는 것이 단순히 나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깊이 생각해 보면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나옵니다.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calling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일컬어,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합니다. 거룩한, ‘하기오스’,라고 하는데, 이것을 성도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서로 성도 외에,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성도인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부르는 호칭은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서 하는 삶이 신앙생활이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서 신앙생활 하기 때문에 우리 삶 가운데는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아, 형제들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우리 나라 말로 들을 때는 조금 덜 마음 속에 오는 것 같은데, 영어로 보면, “Fix your thought on Jesus”라고 합니다. 시선이나 생각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라고 합니다.

 

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을까요? 이 당시에 히브리서를 받아보는 성도들, 형제들이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박해와 핍박이 몰려오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다 보니, 예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던 생각이 자꾸 다른 데로 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거룩한 성도로서 감사함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극기훈련인지 신앙생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슨 신앙의 형태를 가지고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시선이라든지 우리의 생각이 예수에게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꾸 딴 데를 쳐다봅니다. 예수 외에 딴 데를 쳐다보게 하는 작전이 마귀의 작전입니다. 우리는 자꾸 거기에 말려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예수에게 시선을 집중하여라!” 왜 예수에게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가 누구인지 잘 알아야 시선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사도요 대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우선 예수님을 사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도라고 생각하면 금방 떠오르는 인물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도는 좀 더 큰 의미에서 사도입니다. 사도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을 일컫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보냄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마귀한테 보냄을 받은 것도 아니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사도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주일예배에 오신 여러분들도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사도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000’이라고 서로 불러 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로서 하나님께 보냄을 받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중재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이라고 하는 것, 기독교의 구원을 잘못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느 종교에서는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열심을 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일종의 극기훈련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구원은 하나님께 우리는 찾으시고 부르시는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의 시작과 구원을 이루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찾아오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은혜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제가 우리 아들한테, ‘건유야 이리로 와봐!’하면 건유가 어떻게 할까요? 아버지가 아들을 이리 와봐하고 찾는 겁니다. 아버지가 부를 때 아들이 하면서 달려오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부르실 때 하고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찾으심과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르심에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들을 불렀는데, ‘싫어요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불순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시고 찾으시는데, 아버지가 부르시는데 하고 가는 것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기본적으로 응답(믿음)’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이것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부르실 때 하고 대답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완악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상하게 완악한 사람 빼 놓고는 아버지가 부르실 때 하고 대답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부르신다, 찾으신다할 때 거기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비교하고 있냐면, 2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그 집을 잘 다스리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 나라 말로는 그냥 이라고 번역했지만, 이것을 오이코스라고 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가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건물을 생각합니다만, 교회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오늘 도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의미합니다. ‘권속이라는 말을 아시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해서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모세는 가족에 속해서 거기서 종으로서 이 가족이 하나님께 잘 갈 수 있도록 봉사를 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6절에 보면, 그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 가족을 이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종으로서 섬겼지만, 예수님은 아들로서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예수님 가운데 누가 높습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 구원을 가져다 주신 분이고, 모세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붙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합니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된 소망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자랑입니다. 이것이 자꾸 흐려지니까, 신앙인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소망과 복음의 자랑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끝까지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집을 다스리신다는 겁니다. 끝까지 붙잡고 있으면,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돌봐주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여기서 떠나서 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질 못합니다. 하나님의 집, 가족, 권속이 되어야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다스려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데, 우리가 자꾸 하나님의 집이 되지 못하니까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돌봄을 받던지, 스스로 돌보던지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2천년 전 성경의 시대(박해의 때)보다 예수 믿기가 더 힘듭니다. 너무도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많습니다. 너무 바쁘고, 너무 세상 살기 힘듭니다. 이것은 우리의 잘못은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지 못하게 하려고 별 짓을 다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 오기가 생겨서 더 달려드는 법입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핍박을 하면 이를 악물고 교회 나옵니다. 그런데 핍박이 없어지면 언제 예수를 믿었나 싶을 정도로 교회를 안 나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calling’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는 얼마나 응답을 하고 있습니까? 특별히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인데, 그 어느 날보다 더 강렬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들리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는 믿음으로, 그분의 부르심의 은혜로 신앙생활 한다면, 우리는 오늘 감사절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여기에 나오시면, 어떠한 감사를 들고 오셨습니까? 오늘 저는 여러분과 어느 시인의 시 한 편을 나누면서 감사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손에 대한 예의라는 시입니다. 제가 주보에도 실어놓았으니, 집에 가셔서 몇 번 더 보시면서 감사절 주간에 감사에 대해서 깊은 묵상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들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 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 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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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손에 대한 예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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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흔들리고, 삶이 어렵고, 불평 불만이 쌓여갈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집, 가족, 권속이 되는 것이고, 그럴 때 그 집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을 극진하게 돌아봐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실 때,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됩니다. 다른 어떤 것의 돌봄은 우리에게 감사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돌보심만이 우리에게 감사가 넘치게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고, 이 감사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깊이 생각하시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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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