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7. 21. 22:37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세상으로

(눅 10:38-42)

 

오늘 말씀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다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일화도 나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족은 예수님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주 친교를 가졌습니다. 그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화를 성서 기자가 택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성서 기자는 여러 가지 일화 중에서도 이 일화를 기록에 남겼을까요?

 

일의 형편은 이렇습니다. 늘 그렇듯이 예수님께는 베다니를 지나실 때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손대접의 도리를 다 하기 위하여 집안식구들은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식료품 가게나 음식 만드는 도구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손대접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음식 장만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것 같습니다. 손님이 도착했으니 몸과 마음이 더 분주해졌을 겁니다.

 

문제는 바로 그 시점에 발생합니다. 언니 마르다는 손대접의 도리를 잘 완성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이 너무 분주했습니다. ‘손대접의 의미를 요즘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요즘에는 손대접이 그렇게 사회적 관계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차지하고 있지 않지만, 옛날에는 손대접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운명이 갈릴 정도였습니다. ‘손대접을 잘 못하면 그야말로 공동체의 수치로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돈이 제일 중요한 사회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명예와 수치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요즘은 돈을 위해 생명을 걸지만, 옛날에는 명예와 수치를 위해서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손님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 마르다가 분주한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도와 손대접을 준비하는 일을 그만 두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르다가 발끈합니다. 굉장히 화가 났었나 봅니다. 발끈해도 동생 마리아에게 해야 하는 건데, 손님인 예수님에게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적어도 미소를 지으면서 이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인상 쓰면서 감정이 섞인 상태에서 곱지 않게 말이 나갔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리아도 뻘쭘하지만, 가장 뻘쭘한 건 손님인 예수님입니다.

 

뻘쭘해서 머리를 긁적였을 만도 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 이야기는 그냥 여기서 끝납니다. 이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성서 기자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상해 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각 속회별로 이 후의 이야기를 꽁트로 만들어서 발표회 같은 것을 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여러 가지 재미있는 상상력이 펼쳐지겠지요.)

 

우리는 흔히 이 이야기의 교훈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말씀을 듣는 일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 말도 맞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일도 온전히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서 기자가 이런 단순한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화 중 이 일화를 선택해서 기록에 남기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일화에서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할까요?

 

우선, 마르다가 열심히 일 한 것 때문에 문제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겁니다. 열심을 다해서 봉사하는 사람이 없다면 공동체는 절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봉사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들숨과 날숨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라는 말씀에 집중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르다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거울처럼 보여줍니다. 우리는 많은 일로 마음이 분주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느라,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이 산란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선택해야 할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바쁘게만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다의 세상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초점을 맞추라는 초대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는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예수님께서 손님으로 와 계십니다. 손님에게 가장 융성한 대접은 무엇입니까? 손님에게 집중하는 겁니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아도, ‘나 지금 바쁘니까 이거 빨리 먹고 집에 가세요!’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손님에게 소홀하면 손대접은 실패하는 겁니다. 그러나 물 한 잔을 놓아두고서도 손님에게 집중하여서 손님이 마음의 평안과 감사를 느낀다면, 그것만큼 융성한 대접이 없는 겁니다.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은 예수님에게 집중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마르다의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이 분주하여, 염려와 근심 때문에 예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겁니다. 여기서 분주하다라는 단어는 페리에스파도라는 헬라어인데, 이 말의 뜻은 다른 방향으로 질질 끌려가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질질 끌려가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마리아가 언니 마르다와는 달리 칭찬 받고 있는 이유는 일 하지 않고 말씀 들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에 사로 잡혀서 이것 아니면 저것을 생각하는데,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한 소리듣는 이유는 마르다의 섬김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 때문입니다.

 

마르다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마르다를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마르다를 새로운 세상을 초대하시는 겁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는 겁니다. 마르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현존(예수님께서 자신과 지금 바로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 것)을 받아 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겁니다. 그래서 그녀의 가치가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일로 인해서, 그리고 그 일을 얼마나 잘 하는지를 통해서 평가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마르다의 세상,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의 가치를 우리가 얼마나 바쁘냐,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 또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대에 얼마나 부응했느냐에 따라서 매겨지는 세계입니다. 그것을 감당하느라, 우리는 마음이 분주하여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교회에 나오는 것, 이렇게 예배 드리는 것도 그냥 분주한 일상의 스케줄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를 초청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마리아의 세상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해서 염려와 근심에 짓눌려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우리들을 은혜와 진리의 말씀을 듣는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나와서 예배 드리는 자리가 분주한 일상의 스케줄 중 하나의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얼마나 사랑 받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은총의 자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서 기자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지금 손님으로 와 계신 예수가 실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시다!' 그러니 손님으로 와 계신 예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일이 많아서 마음이 분주하여 염려와 근심에 쌓인 마르다의 세상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족한,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엔 우리에게 참된 생명과 풍성한 은총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손님이자 주인으로 앉아 계십니다. 그 발치에 가서 그분의 말씀을 들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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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