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1. 08:18

믿음이 의다

창세기 4

(창세기 7:1-10) 

 

저 어딘가, 무지개 너머 저편, 저 높은 곳에는 어렸을 적 자장가 속에서나 들었던 그런 나라가 있답니다. 저 어딘가, 무지개 너머 저편에 파란 하늘이 있고 우리가 그렇게도 꿈꾸었던 그런 꿈이 정말로 이루어지는 그런 나라 말이죠.

 

어느 날엔가는 난 별에게 소원을 빌어볼 겁니다.그럼 내 뒤로 멀리 흘러가고 있는 구름이 있는 곳에서 깨어날 거에요. 그 곳은 모든 고통들이 레몬 방울처럼 녹아 버리는 그런 곳이지요. 굴뚝 꼭대기보다 훨씬 더 높은으 그 곳에서 당신은 날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저 어딘가, 무지개 너머 저편에는, 파랑 새들이 날아다닌답니다. 파랑 새들이 무지개 너머로 날아다닌답니다. 그런데 왜, 난 그 너머로 날 수 없나요?

 

귀여운 파랑새들은 기꺼이 저 무지개 너머로 날아다니는데, 그런데 왜, 난 그 너머로 날 수 없을까요?

<Over the Rainbow, 무지개 너머>

 

오늘 말씀은 홍수 이야기(설화)입니다. 홍수 이야기에는 노아라는 인물과 방주, 그리고 무지개가 포함됩니다. 무시무시한 심판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무지개 언약으로 끝은 맺는 따뜻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경 말씀이 좋은 이유는 심판과 같은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는 것 같다가도, 끝에 가서는 해피앤딩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심판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위해서 거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인 거죠.

 

창세기는 희망차게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과 함께 안식에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장면이 바뀌면서 인간의 타락과 죄의 관영, 그리고 그것을 슬퍼하시고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 뒤를 잇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심판을 통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납니다.

 

성경에 나오는 패턴은 모두 같습니다. 희망과 타락, 심판, 그리고 새로움. 역사의 작은 사이클도 이렇게 돌아가고, 전체 구원사의 사이클도 이렇게 돌아갑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미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될 것이라는 거죠.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종말론의 구체적인 모습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종말론은 구원론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말론이든 구원론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배타적인 은총 사건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배타적이라는 것은 종말이든 구원이든,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일으키실 수 있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칼뱅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종말(구원)은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숨쉬고 살고 있으면서도 생명이 무엇인지 잘 모를뿐더러,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생명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지금 생명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대하지 못하고, ‘희미하게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온갖 생명을 경시하는 문제들이 인간 사회 속에 판을 치고 있습니다.

 

종말(구원)은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어느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3일만 굶어 보십시오. 당장 굶어 죽게 된 상황에서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변할까요? 체면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어질 겁니다. 그저 배고픈 배를 채우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동물적인 근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 생명의 문제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원초적으로 당신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당신 자신이 생명, 즉 죽고 사는 문제, , 구원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종말(구원)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위에서 말씀 드렸듯이, 종말(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은총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달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보면, 그 상황을 라는 단어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이 세대는 죄가 관영한 세대입니다. 그 상황을 표현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6:5).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6:11-12).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아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을 수 있는 조건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 스스로 의로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 기준이 우리 피조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은총 사건이라고 하는 겁니다. 노아가 구원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노아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인생은 바로 의로움과의 싸움입니다. ‘가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한 인생의 싸움을 하십니까? 대개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싸움이 그런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 ‘명예’, ‘안전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갈등하고 방황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돈, 명예, 안전 등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은 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고 하시니, 갈등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우리는 당연히 고민하게 됩니다. “어떻게 의로워질 것인가?(어떻게 구원 받을 것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아직도 이 질문은 인간에게 가장 큰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민족이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구원에 이르는 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생명처럼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율법을 통한 구원에 대한 회의가 들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생기게 된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직까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들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바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랐고, 갈릴리에서 활동하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일이 부활이라고 또한 증언합니다. 이것을 믿는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생겨난 겁니다. 이는 예수가 곧 그리스도(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증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 받는 길을 열어 주셨다고 합니다. 위에서 설명 드렸듯이,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은총 사건인데,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셔야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당신의 선한 피조물이므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 다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7장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노아와 그의 가족만이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를 포함한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 모두가 방주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만물)이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 구원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 바깥에서 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안도의 큰 숨을 쉴 수 있는 이유는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이 구원 받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죠.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래서 우리 모두가 구원 받기를 얼마나 바라시는 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는 우리들에게 구원을 길을 제시하셨는데,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위에서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자만이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와의 싸움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의로워질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을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의로워지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믿을 때,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믿음이 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믿음이 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싸움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과의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 ‘명예’, ‘안전등을 주어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생명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 명예, 안전 등이 아니라, 생명 자체이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