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5. 03:51

땅에 있는 지체

(골로새서 3:1-11)

 

<술과 코카인에 취한 채 죽은 미라들>이라는 기사가 지난 주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사진 제공). 이들은 500년 전 잉카제국의 종교의식(희생의식)에서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고지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해서 불과 몇 일 전에 죽은 것 같이 보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이들의 상태를 분석해 본 결과, 이들의 몸에서 술과 코카인이 다량으로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을 선택해서 희생제의에 바쳐지기까지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술과 코카인을 투입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참 비참한 것은 발견된 미라 3구의 나이를 분석해 본 결과, 두 명은 4,5세의 소년 소녀였고, 한 명은 13세의 소녀였답니다. 이 중에서 특별히 13세의 소녀의 몸에서 술과 코카인이 더 많이 검출되었는데, 이는 13세의 소녀가 자신의 운명을 인지하고 공포를 더 느꼈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기사를 보면서, 우리는 잉카제국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미개인이라는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미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선진국이라 불리는 세상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다른 형태를 띠고 말이죠. 마약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사회악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약에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 때문입니다. 잉카제국의 사람들이 저렇게 비상식적으로 희생제의를 드렸던 이유는 그것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대 마약을 팔아 배를 채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남을 희생시키는 것이죠.

 

몇 년 전 아이티에 허리케인이 덮쳐 수많은 피해가 났을 때도 그 와중에 고아가 된 아이들을 몰래 잡아, 그들의 장기를 내다판 파렴치한들이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고아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안 보였던 것이죠. 인간으로 보이지 않고, 돈으로 보인 겁니다.

 

이번 주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군산여자실종사건>은 가정이 있는 남자(현직 경찰)와 이혼녀와의 불륜 때문에 생긴 범죄였습니다. 둘은 몰래 만나 성관계를 가졌고, 여자는 임신한 것 같다며 남자에게 위자료를 요구했고, 남자는 위자료 300만원을 주고 관계를 끝내려고 했는데 여자가 만족하지 못하겠다며 더 많은 위자료를 요구하자 홧김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 범죄였습니다. 남자의 살인 동기가 우습습니다. 가정이 깨질까봐 그랬다는 겁니다. 그렇게 가정이 깨지는 걸 걱정했으면 처음부터 불륜을 저지르지 말았어야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렇게 어처구니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악을 보면서 세상이 썩었다고 한탄하며, 남의 일처럼 여기지만,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곧 나에게서 벌어질 수 있는 나의 일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어떠한 죄악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그 죄악을 저지른 사람만이 저지른 죄악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저지를 수도 있는 죄악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 개인이 그 위치에 가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죄악된 일을 보았을 때 그것을 보며 손가락질을 하기보다, 그것을 보고 내가 저지른 죄악인 양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러한 죄악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여건 만 조성되면 언제든지 내가 그 죄악된 자리에 서게 될 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골로새서의 말씀은 땅에 있는 지체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골로새서에서 말하고 있는 땅에 있는 지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한 상태를 일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상태를 일컬어 거듭난 삶, 부활의 삶이라고 합니다. 거듭나지 않고, 부활하지 않은 삶은 땅에 있는 지체에 불과합니다.

 

골로새서는 땅에 있는 지체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 나열되어 있는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을 보면서 그냥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곰곰이 들여다 보십시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실존을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거울을 잔잔히 들여다 보십시오.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음란(sexual immorality), 부정(impurity), 사욕(lust), 악한 정욕(evil desire)과 탐심(greed)(우상 숭배, idolatry)

 

이것과 함께 나열되는 또 다른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이 있습니다.

 

분함(anger), 노여움(rage), 악의(malice), 비방(slander), 입의 부끄러운 말(filthy language)

 

지금 나열된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을 하나 하나 짚으면서 모르는 척, 나와는 상관 없는 척 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너무도 익숙하다 보니 오히려 낯설게 다가오는 것들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원래 가까이 있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법입니다.

 

남이 이러한 모습을 지적해 줘도 소용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비방으로만 들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 스스로가 내 모습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능력.

 

그런데 여기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을 내 스스로가 보고 깨달았다고 해도, 그것을 내가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을 우리의 존재에서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될 지 모르지만, 또는 세련된 방법으로 포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 실존에서 떠나지 않는 것 또한 알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부패했는지 보여주는 이러한 악들은 죽어야 끝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슬픈 현실입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여러분을 위에서 열거한 그러한 악한 일들로 괴롭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죽어야 끝나는 문제입니다. 막말이 심하고 성질이 더러운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다 죽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악한 것을 내뿜으며 사는 사람을 죽이라는 뜻입니까? 살인을 저지르라는 뜻입니까?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골로새서가 말하고 있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을 눈에 보이게 끔 해 주는 의식이 세례입니다. 세례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의식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심(살리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으키심(살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오늘 3절 말씀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에 대한 실천(실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학이고 윤리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것을 보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와 함께 산, 거듭난 존재, 부활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능력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다는 것은 교회 출석 잘 하고, 헌금 잘 내고, 교회 봉사 잘 하는 것 등의 눈에 보이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의 악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은 시간 많으면 잘 할 수 있고, 헌금은 돈 많으면 잘 낼 수 있고, 교회 봉사는 건강하면 잘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시간 많고, 돈 많고, 건강하다고 해서 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러한 여건이 되는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많고, 돈이 많고, 건강해도,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 많고 돈 많고 건강한 사람들이 이처럼 더 부패하기 쉽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가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죽이십시오. 그것을 죽이는 방법은 이 세상의 어느 극악무도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장 거룩한 방법입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으십시오. 이것이 바로 새사람입니다. 새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지 못할 때 우리는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우리의 인생을 거는 실천(실제)입니다. 이것에서 실패하면, 우리는 이미 생명을 빼앗긴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생명을 빼앗기는 순간 우리는 이미 지옥에 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등이 얼마나 많은 지옥을 만들어 내는지.

 

제가 오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은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입니다. 다음 주 설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살리심)을 받은 새사람이 찾으면서 살아야 하는 위의 것을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졌음이라"(3절). 예수 그리스도와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새람이 되십시오.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새사람입니다. 이는 거듭난 존재, 부활한 존재, 종말론적인 존재입니다. 이 복음이 여러분들의 귀에 들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