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12. 02:58

하늘에 있는 지체

(에베소서 3:12-17)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세상은 숨이 가쁘기도 하고 가슴이 벅차기도 합니다. 숨이 가쁜 이유는 새로운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인간이 너무 연약하기 때문이고, 가슴이 벅찬 이유는 새로운 세상은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름다움 풍경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보면서 환희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또한 절망하기도 합니다. 환희에 빠져드는 이유는 뭔가 새로운 것, 진리를 알아가는 기쁨 때문이고, 절망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이처럼 새로운 세상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니 구원이니 용서니 사랑이니 하면서 기독교적인 용어를 자주 듣기 때문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무게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용어들이 담고 있는 가치들을 캐내어 들어가다 보면 그것은 우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지닌 것들이 아닌 것을 금방 압니다. 다시 말해, 죄니 구원이니 용서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일컬어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도 표현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영역으로 다가서는 일이 망망대해 저편 에덴동산을 바라보는 일보다도 막막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흔히 극명한 대조를 할 때 하늘과 땅을 빗대어 말합니다. 우리는 땅에 있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십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딜레마가 생깁니다. 땅에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땅에 있는 지체인 우리들이 어떻게 하늘에 있는 지체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지난 주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 이것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허물기 때문입니다. 이 중에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은 성적인 악행을 말하고, ‘탐심은 물질적인 악행을 말합니다. 성적인 악행은 남자-여자의 가장 기초적인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이고, 물질적 악행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생존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또한 진노(분함, 노여움)와 잘못된 언어생활(비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은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해치는 것들입니다.

 

성서기자가 특별히 이러한 부분들을 죽여야 할 땅에 있는 지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것이 교회의 운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311절 말씀을 다시 읽어 봅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 말씀에서 거기에는이 가리키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저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교회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해도, 박사학위 받는 것으로도 모자랍니다. 다만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교회를 정의해 보면, 교회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만남, 교제,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실체입니다. 오늘 말씀에 근거해 보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고, 둘째는 거룩한 사람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지난 주 살펴보았던, ‘새사람의 본질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땅에 있는 지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하늘에 있는 지체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신분이 완전히 변화된 사람입니다. 신분이 변화되면 의복이 달라집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탕자가 허랑방탕한 삶에서 돌이켜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탕자를 향해 사랑의 마음으로 먼저 행하는 것은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탕자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택하고 사랑하셔서 옛 사람의 옷을 벗기고, 새사람의 거룩한 옷을 입혀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새사람의 옷입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 용납, 용서. 그냥 듣기만 해도 위에서 보았던 땅에 있는 지체의 모습인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 거짓말과는 너무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덕목들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새사람의 옷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들을 대하실 때 보여 주신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새사람의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는 내리고 있는 덕행이고, 교회 안에서 서로 적용하며 살도록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의 덕행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에서 더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말해 줍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 우리 나라 말로는 더하라는 단어를 썼지만, 원래는 12절에서 쓰인 입어라입니다. 그리니까,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어라가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라는 말은, 모든 옷을 입고 그 옷이 흐트러지지 않게 띠(벨트)를 매듯이, 사랑으로 옷 입기의 완성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성경 곳곳에서 누누이 강조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다른 덕행(은사)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거나, 그 순수성을 의심받고, 결국은 아름답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성 어거스틴은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사람을 헤치기 보다, 사람을 살리고, 인간관계를 깨기 보다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며, 공동체를 해치기 보다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여기서 한 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말합니다. 성도들이 부르심을 받아서 비로소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성도들이 부르심을 받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그들이 부르심을 받아서 비로서 들어가는 삶의 터전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교회를 세우셨으며, 사람들을 그 교회 안으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는 믿음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깊은 방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은 예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예배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이 있으면 감사가 넘치게 되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는 행위가 예배인 것이죠.

 

땅에 있는 지체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하늘에 있는 지체란 일차적으로 우리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지체가 손에 잘 안 잡히는 것이죠. 땅에서 하늘로 이동하려면, 우주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옷을 꼭 입어야 합니다.

 

아직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지, 손에 잘 안 잡히고 이해가 안 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지체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삶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하늘에 있는 지체가 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긍휼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자비를 베풀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온유해질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오래 참을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용납할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용서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믿음이 자랄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감사가 넘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예배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평강(peace)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 17절을 읽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여러분의 말과 행동이 땅에 있는 지체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지체의 모습을 보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새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땅에 있지만, 우리는 이미 하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씀이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날마다 더해져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한 마음 한 뜻으로 달려 갑시다. 아멘.

 

 

* 오늘 설교는 조경철 교수님의 골로새서 주석서 <오직 그리스도>에 많은 빚을 졌습니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