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19. 05:26

십자가 앞에서 허무를 논하지 말라

(전도서 1:2, 3:1-11)

 

전도서는 전도사님이 쓴 책이 아닙니다. 전도서는 전도하러 나가자할 때 전도가 아니라, ‘코헬레트라는 말인데, 이는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무리를 모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설교자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전도자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무리를 모은 것일까요? 오늘 말씀만 보면,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무리를 모은 것 같습니다.

 

제가 개그 한 마디 한 번 해보겠습니다. “너 나한테 불만있냐?” “아니, 물도 있다.” “바나나가 웃었다. 네 글자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바나나킥이게 그 유명한 허무 개그입니다.

 

허무라는 말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말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들어야 이해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사춘기가 지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허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압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저를 38 살에 낳으셨기 때문에, 저는 제 친구들의 어머니들보다 적어도 10년 정도는 더 늙으신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38살에 자식을 낳는 일은 우리 어머니 세대에는 좀 이례적인 일이죠. 저희 어머니께서 벌써 일흔 일고십니다. 이 생각만 해도 벌써 허무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늙으셨다니요. 늙으신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제 또래의 친구들보다도 철이 일찍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가끔 그러셨습니다. ‘내 마음은 스무 살 같은데, 벌써 내 나이가 일흔이 넘었구나! 세월이 정말 빠르다. 참 허무하다.’

 

오늘 전도서의 말씀을 보면, 허무함 그 자체입니다. 헛되다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얼마나 허무했으면 이렇게 반복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인생의 허무함만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실, 전도서의 저자는 허무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다는 것이죠. 전도자가 하고 싶은 말을 제가 이렇게 표현해 보았습니다. “인생은 허무하다. 그런데 안 허무하다.” 말도 안 되는 말 같지만, 이게 왜 말이 되는 말인지 우리는 묵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허무함의 극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만큼 허무함이 자리하고 있는 곳도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 십자가를 허무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하고, 허무함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예수를 통해서 천지개벽이 얼어날 것만 같아서 그분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주 무대 삼아 활동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놀라 예수님을 무작정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택하신 12명의 제자들까지도, 사실 예수님께서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면서 자신들이 무슨 중요한 인물이나 된 것처럼 의기양양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사역을 완성하시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때를 기억합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상징적인 나뭇가지입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가시적인 승리를 그들에게 안겨다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정말 허무하게 아무런 저항도 안 하시고, 로마 당국에 잡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정죄 당하고, 로마 제국의 고위 관리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은 뒤 십자가 형에 처해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처형이 십자가 형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 형은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죄의 명목으로, 로마제국에게는 국가반란죄의 명목으로, 그렇게 십자가 형에 처해졌습니다.

 

무엇인가 승리를 가져다 줄 사람이라고 굳게 믿었던 예수는 그렇게 허무하게 십자가 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끔찍한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냥 죽는 것도 허무한데, 십자가 형에 처해져 죽었다는 그 사실이 더 허무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던 사람들 모두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허무하게 십자가를 바라보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허무함은 복음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얼마나 허무했으면 그토록 열렬히 쫓아다니던 제자들이 하나 같이 모두 도망갔겠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허무를 논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십자가만큼 허무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허무하게 죽으셨다는 것이죠.

 

,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십자가 앞에서 허무를 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또 등장합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부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 부활 사건은 우리 인생의 모든 허무함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 인생이 궁극적으로 허무한 이유는 젊음이 사라졌기 때문도 아니고, 늙어가기 때문도 아니고, 결국, 죽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아무리 행복하게 산 사람도, 인생을 아무리 화려하게 산 사람도, 죽음 때문에 그 인생은 궁극적으로 허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죽지 뭐’,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차피 죽을 인생 좀 가치 있은 일을 하다가 죽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죽음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허무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인생은 내가 아무리 애써 부인해도 허무한 겁니다. 죽음 때문입니다.

 

장영희 씨의 매우 공감 가는 글입니다.

 

나는 스무 살 학생들과 살아갑니다. , 말만 들어도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스무 살.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까지 나긋나긋하고 발에는 스프링을 매단 듯 통통 가볍게 걷고, 어떻게 저 비좁은 공간에 인간의 내장이 다 들어갔을까, 의심될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 맑고 총기 있는 눈빛,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카락, 온몸으로 젊음을 발산하는 스무 살 학생들 사이에 쉰 살 내가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스무 살 때는 쉰 살 난 사람들을 보며 한 살 한 살 나이 먹어 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쉰 살로 태어나는 별종인간들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음식점에 갔다가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여남은 명이 , 숙자야” “영미야하며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아, 저들도 이름이 있구나. 저들도 우리처럼 아무개야 하고 서로 이름을 부르는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똑같을 겁니다. 제가 스무 살 때는 연세 드신 분들을 보면서 그 분들은 원래부터 그렇게 나이를 잡수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먹고 보니, 그것이 아니라,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어느새 늙었다는 겁니다. 나도 곧 50이 되고, 60이 되고, 70이 되고, 하다가 어느 순간 이 세상을 떠날 내 차례도 오겠다는 생각을 하면, 덜컥 겁이 납니다. 그리고 인생이 참 허무해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을 전해 줍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가 죽었는데,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게 끝났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극복했다는 말입니다. , 이 말이 여러분에게 실질적으로 다가옵니까? 아무리 이 말씀을 받아 들어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되는데 무엇이 다시 살았다는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십니까? 바로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이고, 바로 이 순간 그냥 죽음으로 인생을 허무하게 끝낼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부활의 삶을 바로 지금 이 순간 살 것이냐를 결정해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왜 믿음이 필요한가? 골로새서 33절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아주 실질적인 사실이, 드러나 있지 않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성령에 의한 믿음의 눈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 즉 죽음을 극복한 새로운 삶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임하시는 그 날에 그 감추어져 있던 영생의 신비가 우리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고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도 없는데, 무엇이 영생이고, 무엇이 죽음을 이긴 것이고, 무엇이 부활이라고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부활이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을 믿음을 통해 나의 사건으로 접하지 못하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 즉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골로새서 3 5절 이하에 등장하는 육체의 일들은 무엇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음란을 행하고,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과 그리고 분함과 노여움과 비방과 입이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을 하면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성적인 악행, 물질적인 악행, 그리고 언어적인 악행을 행하면서 살아가는지 아십니까? 이 모두는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그 허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허무를 좀 극복해 보려고 그러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허무한 인생, 이 마음에서 들 끊는 욕망이라도 채워보자.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욕망을 채워도 허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욕망을 채워주는 그것이 잠시는 즐거운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식상해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어떻게 해야 인생의 허무를 극복해야 할지 몰라, 야단법석인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여기에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궁극적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1절에서의 말씀처럼, 그야말로 위의 것을 찾으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위의 것을 찾으며 사는 사람들,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 부활을 사는 사람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육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십자가 앞에서 허무를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보다 더 허무한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의 모든, 그리고 궁극적인 허무가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끼십니까? 그래서 그 허무를 좀 가려보려고 육의 일을 행하면서 사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에서 일어난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사전에서 허무함이라는 단어는 사라질 것입니다. 아니, 허무함이 사라질 때까지(평생 안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십자가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집중하면서 사십시오.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 1643-1727)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난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광학자, 자연철학자이며 연금술사이고 신학자입니다. 그의 업적으로는 고전역학 정립,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 미적분학 정립, 기하광학의 학문적 체계화 등 수없이 많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많아져 세상을 떠날 즈음에 건망증이 들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나이도 잊어버리고 생일도 잊어버렸습니다. 그의 친구나 후배들이 찾아와 인사를 해도 뉴턴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가깝게 지내온 사람들을 만나도 뉴턴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시더라?" 하고 물었으니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한번은 제자 중 한 사람이 답답한 마음을 견디지 못해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지금 거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계신 것 같은 데 그래도 지금 기억하고 계시는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세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뉴턴이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기억하는 게 꼭 두 가지가 있어"하고는 "한 가지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것이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기쁘고 즐거운 이유, 우리의 인생이 전혀 허무하지 않은 이유, 바로 저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붙들고, 부활을 사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