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8. 26. 04:42

하나님 나라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것이다

(눅 12:32-40)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 최대 목표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어도, 아무리 믿음이 좋다 해도, 아무리 좋은 일을,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공로를 많이 세운다 해도, 그 모든 것을 다 합쳐도 하나님 나라를 살 수 있을만한 값어치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은 포기입니다.

 

배고픈 여우가 길을 지나갑니다. 위를 올려다보니까 포도가 주렁주렁 열여 있었습니다. 그 포도를 따먹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결국 그 포도를 따먹을 수 없었습니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여우는 결국 포도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저 포도는 어차피 신포도라 먹을 수 없어!’ 포기에 대한 자기 합리화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뭐 어차피 나 같은 놈이 무슨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겠어! 그리고 그런 것이 존재하기나 하겠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바로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익숙한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합니다. 소유하지 못하면 안절부절 못합니다. 소유하고 싶어 안달을 부립니다. 돈도 많이 소유하고 싶어하고, 좋은 차도 소유하고 싶어하고, 좋은 집도 소유하고 싶어하고, 지식도 소유하고 싶어하고, 명예도 소유하고 싶어하고, 심지어 사랑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부부관계가 힘들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 꺼라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서로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도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합니다. 믿음이 많다 적다, 라는 말로 믿음의 정도를 표현합니다. 믿음을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게 되면, 내가 쌓아놓은 믿음 덕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 주실 거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복 받는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쌓은 믿음, 내가 소유한 믿음이 기준이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님을 위한 것, 이웃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하고, 나를 위한 것에 머뭅니다. 믿음도 내 소유이니, 내가 누려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은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법에 따라 그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싶어 하면서도, 내 방식대로, 이 세상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 들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 됩니다.

 

오늘 말씀의 첫 구절을 보십시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적은 무리는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 대한 특별한 호칭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서워 말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당연히 무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우의 신포도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는 상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 받지 못한다는 말인데, 구원 받지 못한 삶만큼 두려운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즉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나의 어떠한 공로로 인해 소유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사실 아무런 공로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주시는 것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우리는 공짜를 매우 좋아하지만, 사실 공짜로 받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익숙하지 않습니다. 공짜는 뭔가 구린 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받으면서도 찝찝해 하는 것이 공짜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어떻게 공짜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나서도, 받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것이 하나님 나라이어야지 하나님 나라가 값어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물건 값이 오히려 비싸야지 잘 팔린다고 합니다. 청바지 하나 만드는데 사실 별로 돈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가가 얼마 안 든다고 양심 있게 1만원, 2만원, 10 20, 정도 값을 매겨 놓으면 별로 안 팔린답니다. 10만원 20만원, 100, 200불 정도로 값을 매겨놓아야 불티나게 팔린다고 합니다. 비싼 값을 지불해야만 그 값을 지불하고 산 내가 빛나 보이고 특별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는 웬만큼의 공로 가지고서는 발 붙일 수 있은 곳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교회에 건축헌금 1억 정도, 10만불 정도는 헌금해야 하고, 꼬박꼬박 십일조 내야 하고, 감사헌금도 자주해야 하고, 각종 절기 헌금에, 새벽 기도 나오는 것은 기본이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와,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해야 하고, 그리고 적어도 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이상을 받아야, 웬만하면 장로 직분까지 받아야,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 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해야 하나님 나라의 값어치가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값어치는 하나님 나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비싼 값을 지불했느냐에 있다는 겁니다. ‘너 같은 사람은 여기 들어올 수 없어!’라면서 저 사람과 나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나는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이야! 내가 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힘썼는지 알아! 얼마나 비싼 값을 치렀는지 알아? 내가 그 동안 교회에 물심양면으로 갖다 바친 게 얼마인데! 너 같은 사람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그런데 오늘 말씀 33절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소유를 팔라고 하십니다. ,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팔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러면 어느 이단 사이비 집단처럼, 집 팔고, 자동차 팔고, 적금 깨고, 가족 관계도 다 팔고, 그리고 그냥 교회에 들어 앉아 예수님 다시 오시기만 바라고 있으면 된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여쭙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말은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죽 나열하십니다. 부자 청년은 그 말을 듣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굉장한 청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굉장한 청년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는 여기서도 모든 소유를 다 팔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소유를 다 팔고 예수님을 따르면 구원이 보장된다는 말씀인가요? 그러면 우리 이 말씀과 오늘 본문 말씀대로 모든 것을 다 팔아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오해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정말로 재산 다 팔아 먹고 교회에 모여 예수님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으려는 사람은 믿음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야말로 광신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의개념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각 자체를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뭐냐, 이게 바로 온전한 회개요, 좀 유식한 말로 메타노이아라는 것입니다.

 

바람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잡았다, 소유했다 하는 그 순간 사라지는 것이 바람입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숨결의 나라, 성령의 나라는 바람과 같기 때문에 우리가 소유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잡았다,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없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자체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 이전에 나오는 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와 관련해서 보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소유에서 찾으려 했던 어리석은 부자는 소출이 풍성해지니까 그 모든 곡식을 쌓아둘 곳간을 크게 짓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를 모두 거기에 차곡차곡 넣어둡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이게 단순히 재물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소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사람은 생명을 소유에서 찾았습니다. 생명이란 하나님 나라, 하나님, 성령을 말하는데, 이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위에서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믿음조차도 소유의 개념으로 지니고 있던 사람입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 나라를 잡았다고,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컬럼버스 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소유의 개념을 굳이 적용하자면, 하나님 나라가 내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나라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칠 때, ‘하나님은 내 것, 나의 소유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소유의 개념으로 하나님 나를 접근하지 말라는 말씀은,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 똑바로 구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로 접근하게 되면, 내 자아가 주인이 되고 이 세상 모든 것, 심지어 하나님까지 나를 위한 존재,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나의 소유물이 되고 맙니다. 이것만큼 큰 우상숭배가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소유의 개념을 버리고, 메타노이아, 온전한 회개의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에 접근하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 똑바로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고 나는 그분의 소유라는, 나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올바른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내가 그 어떤 무엇으로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으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이지, 하나님이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련된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하나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도 소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소유하려는 재물조차도, 사랑도, 생명도, 심지어 믿음도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고 드니까, 인생이 허무한 겁니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 드니까,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잡았다고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시시해지고 시들어지는 것입니다. 소유하려고 드니까, 다시 오실 주님 맞을 준비가 안 되는 겁니다. 소유했는데 여기서 누리고 여기서 즐겨야지, 가긴 어딜 가냐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부자처럼 내가 내 영혼에게,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합니다.

 

소유한 것이 많다 보니까 거기에 신경 쓰느라고, 하나님 부르시는데 그 음성이 안 들리는 겁니다. 하나님 부르실 때 즉시 네 여기 있습니다!’하고 달려갈 수 있도록 허리에 띠를 띠고즉 의복을 갖춰 입고, ‘등불을 켜도 서 있어야하는데 소유한 것이 많다 보니까, 그것을 즐기느라 허리띠 풀어 헤치고 등불 내팽기치고 긴장 풀고 사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주님이 와서 문 두르려도 두드리는 그 문소리가 안 들리는 겁니다.

 

아직까지도 뭔가를 소유하지 못해, 뭔가를 소유하려고 안달이신 분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종 부리듯이 부리려고 믿음까지도 소유하려고 드실 겁니다. 내 눈에는 나 밖에 안 보이고, 내 마음 속엔 나만 가득 차서, 내가 내 삶의 주인 노릇 하면서 살아가느라 정신이 없으실 겁니다.

 

그러나, 메타노이아, 참된 회개를 통해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정립하고, 이 세상을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으신 분은 하나님 주신 모든 것을 누리시면서 하나님 부르실 때에 네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면서 하나님께로 가실 준비를 잘 하고 계실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다시 오신 주님을 맞을 준비에 가슴 설레는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아직도 이 세상을 소유의 개념을 갖고, 소유하는데 정신 팔려서 살아가시는 분은, 주님 맞을 준비를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메타노이아, 참된 회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분은, 주님 맞을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계실 겁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주님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