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8. 22:35

미래를 여는 교회

(빌레몬서 1:1-25)

 

오늘 우리가 읽은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여기에는 기막힌 사연과 기막힌 간청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따라 가다 보면 그리스도인이란, 그리고 교회란 무엇인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문구를 보면,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중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그의 집이 골로새 교회의 모임 장소로 사용된 것을 보면 말이죠. 옛날에는 정치적인 이유와 재정적인 이유로 지금처럼 교회 건물을 자유롭게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성도들 중 여유가 있는 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편지를 빌레몬에게 쓴 바울은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 정황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3차 전도여행 후에 사도 바울은 박해 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로마로 압송 당합니다. 로마에 압송된 바울은 재판을 받기 전 미결수 신분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고, 비교적 자유로운 감옥 생활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시시때때로 복음을 전하고 자유롭게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빌레몬서 외에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등도 옥중서신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교우인 빌레몬에서 친필(대부분의 바울 서신은 대필해서 쓴 것입니다.)로 편지를 쓴 이유는 오네시모라는 사람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에 그랬는지는 정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도망쳐서 로마까지 왔는데, 거기서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상황이 얼마나 일촉즉발의 상황인지 감이 잘 안 잡히실 겁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로마시대 때는 인구의 35-40% 정도가 노예였습니다. 노예제도가 합법적이었고, 사회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제도를 뒷받침하고 있는 법도 잘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 중 도망친 노예는 주인이 사형에 처해도 주인은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아주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오네시모가 처해 있는 상황은 생사가 달린 절체절명의 상황인 것입니다. 바울의 이 편지가 오네시모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매우 긴급한 상황인 것이죠.

 

물론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쓴 이유는 오네시모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죽인다 해도 아무도 뭐라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무슨 권리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러한 곤란한 상황에서는 방관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력을 다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살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지금처럼 통신이나 교통이 발달된 시절이 아닌 그 때에 도망자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는 듯 합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드라마틱 하죠. 도망자 노예 오네시모는 도망친 로마에서 바울을 만났고,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거기에 골로새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도 함께 있었던 듯 합니다. 그 에바브라를 통해서 골로새 교회의 상황과 빌레몬에 대해서, 그리고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에 대해서도 들었겠죠.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알게 된 바울은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오네시모가 도망친 것에 대해서 눈 감고 있자니 양심에 거리끼고, 그렇다고 오네시모를 돌려보내자니 도망친 노예에 대한 사형제도를 모를 리 없던 바울은 그것도 양심에 거리꼈을 겁니다. 그렇다면 두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를 쓰게 된 동기인 것입니다.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보람찬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고심 끝에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냥 돌려 보낸 것이 아니라, 아주 파격적인 부탁을 하면서 돌려 보냅니다. 그 파격적인 부탁이 빌레몬서의 핵심입니다.

 

우선 바울은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빌레몬이 바울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바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빌레몬은 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존경하거나 아니면 그를 신앙의 롤 모델로 생각했을 겁니다. 이방 선교계의 대부 사도 바울을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에게서 이러한 호칭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인 것이죠.

 

게다가 바울은 빌레몬을 매우 크게 칭찬을 합니다.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4-7). 몇 자 안 되는 편지에서 바울은 많은 부분은 빌레몬에 대한 칭찬으로 채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도 바울에게서 이러한 칭찬을 들은 빌레몬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그 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어렵고 힘들었던 마음이 씻은 듯이 녹아 내렸을 겁니다.

 

빌레몬에 대한 칭찬에서 이 문구에 눈길이 머뭅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그러면서 내 자신을 한 번 되돌아 보게 됩니다. ‘나로 인해 성도들의 마음은 평안함을 얻을까? 아니면 나 때문에 짜증날까?’ 그러면서 빌레몬은 어떻게 했길래 성도들에게 평안함(refreshment)을 주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답은 그 윗구절에 있습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레몬에게는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은 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은 있는데 사랑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 어느 한 쪽이 좀 부족하면 성도들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과 믿음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도 중요합니다.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은 주 예수와 모든 성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주 예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있는데,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있는데, 주 예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모든 성도(이웃)를 사랑하는 것 중 어느 한 쪽이 좀 부족하면 성도들에게 평안함을 주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아보지만, 일단 균형이 잡히면, 그 결과 성도들에게 평안함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바울 사도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칭찬을 들으면서 마음이 환해졌을 빌레몬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살려 달라는 부탁을 넘어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이것인 매우 파격적인, 파격적이다 못해 전복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노예제도가 기반을 이룬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빌레몬 개인에게 하는 부탁을 넘어 골로새 교회에게 하는 부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의 인사말에서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2)라고 쓰고 있는 겁니다. 빌레몬 한 명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빌레몬이 속한 공동체 전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큰 갈등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 개인을 넘어 골로새 교회 공동체에게 이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의 부탁대로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 들였을까요? 아니면 바울의 편지를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고, 오네시모를 노예법에 따라 사형에 처했을까요? 당연히 바울의 부탁대로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일을 처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이렇게 우리에게 성경의 형태로 전해져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가 바울의 부탁대로 오네시모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과의 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들은 주 예수의 복음에 온 생명을 걸고 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20). 바울이 주 안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말은 곧 그들이 이 일을 주 안에서 처리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복음을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삶으로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충만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믿음인 것이죠. 그야말로, 빌레몬에 대한 바울의 칭찬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실제였다는 것입니다. 도전이 되는 신앙입니다. 꼭 본받아야만 하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노예제도가 있는 시대에 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빌레몬서에서 일어난 일과 똑같이 노예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이는 일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가 오네시모의 미래를 열어준 것처럼 미래를 여는 그리스도인,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충만한 정도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 안에서 용기를 내시고 지혜를 간구하셔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모든 상황에서 미래를 열어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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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