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19. 04:36

사래 사건

창세기 9

(창세기 12:10-20)

 

사래는 아브람(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입니다. ‘사래 걸렸다할 때의 그 사래가 아니고, ‘손사래 치다할 때의 그 사래도 아닙니다. 사래는 복의 근원 아브람의 아내입니다. 나중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래는 사라로 이름이 바뀝니다. 아브라함은 만국의 아버지라는 뜻이고, 사라는 만국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인 단어 (베라카)’을 언급하시면서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까, 이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면서 창대함과 번영을 꿈꿀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약속한 형통은 오지 않고 오히려 기근이라는 시련이 닥쳤습니다. 아브람은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겁니다.

 

기근은 굉장히 무서운 겁니다. 생명의 파괴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기근의 원인은 가뭄, 전쟁, 자연 재해, 곤충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농사가 제대로 안 돼서 먹거리가 떨어지는 현상을 기근이라고 합니다. 기근이 오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됩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인 식욕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은 비극 중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죽음에 처해지게 되는 이유 중 굶어 죽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적어도 음식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내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선행인 것입니다. (입양한 아이(2)를 부부싸움 때문에 굶어 죽게 한 어느 젊은 부부 이야기)

 

아브람의 정착지, 가나안 땅에 얼마나 기근이 심했는지 더 이상 그 땅에서 살아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주를 결심합니다. 애굽 땅으로. 애굽은 늘 풍요의 상징입니다. 실제로 애굽은 매우 풍요로운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미국이 풍요의 상징이고, 미국이 풍요롭게 잘 사는 나라이지만, 그 당시 애굽은 세계 최고의 풍요로운 나라였습니다. 나일강 때문이었습니다. 나일강이 가져다 주는 풍요 때문에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을 신으로까지 받들었습니다. 그 신의 이름이 오시리스입니다. 바로(애굽의 왕)는 오시리스의 화신으로 불렸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면 우왕좌왕하게 되어 있습니다. 도를 닦는 도인이 아니라면, 먹고 사는 문제를 놓아두고 의연할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근이 오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도둑질이나 강도질이라도 해서 자신과 가족의 배를 채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버리고 풍요의 땅 애굽으로 향합니다. 기근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도착했을 때 한 가지 문제가 더 발생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로 인한 문제였습니다. “내가 알기에 그래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니”(11-12).

 

기근으로부터의 위기 의식은 이제 아내 사래의 외모로부터의 위기 의식으로 바뀝니다. 기근으로부터의 위기는 애굽으로의 이주로 해결되었는데, 아내 사래의 외모로부터의 위기는 해결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굴에 흠집이라고 내시겠습니까? 아브람은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합니다. 아내 사래를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신분을 속입니다. “원하건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13).

 

저는 이 문제를 두고 적지 않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브람은 왜 그랬을까?’ 실제로 나중에 애굽의 바로 왕은 아브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18-19).

 

아브람의 관심은 생명 보존과 안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래를 누이라 속이는 것을 통해서 아브람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기 원했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13). 이러한 아브람의 행위를 놓고 많은 주석가들은 아브람을 비판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아내의 위험은 차선으로 두고,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대신 거짓말을 통해 안전과 생명을 확보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비판은 이런 말로 들립니다. 아브람은 비록 기근을 만났지만 가나안 땅에 남아 있어야 했고, 아내 사래의 아리따움 때문에 살해 위협에 놓인다 해도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주석들에 대해서 손사래를 치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브람의 행동은 불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인 행위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기근은 총체적인 위기입니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내렸더라도 믿음으로 버티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구조적인 악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쓰나미가 닥치면 그 사정권에 들어온 것은 모두 파괴되고 맙니다. 쓰나미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버티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황당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광신입니다. 쓰나미가 닥치면 그 자리를 어서 피하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어떤 주문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받지 않는 초인적인 존재로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 있는 자들은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자연 법칙에 더욱더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소박하게, 나누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압니다.

 

두 번째로, 아내 사래로부터 온 위기를 해결한 방법은 옹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 당시 풍습상, 더군다나 애굽 사람도 아닌 이방인으로서 기근을 피해 온 아브람 일행에게 애굽 사람들이 환대를 베풀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든 그들을 착취하려 했을 겁니다. 그 중 가장 큰 가능성은 약자에 대한 폭력입니다.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폭력의 대상이 되기 쉬운 약자입니다. 아리따운 아내 사래가 애굽에서 봉변 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아브람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아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어려움에 처하게 될 거라는 것은 눈에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 같은 것은 아무 쓸모 없어지는 겁니다. 존재가 없어지는데, 약속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약속도 성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내 사래를 누이라 속이는 작전은 굉장히 기막힌 작전입니다. 이 작전이 기막힌 작전이었다는 것은 그 이후로 벌어지는 일로 인해 증명됩니다. 우선 애굽의 고위관리들이 사래의 외모에 반합니다. 일반 사람이 아니라 고위관리들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보존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뜻입니다. 사래에게도 잘 된 일이고, 아브람에게도 잘 된 일입니다. 작전은 대성공합니다. 단순히 고위관리 정도가 아니라, 애굽의 바로 왕의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애굽 왕은 그 대가로 아브람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얌수 나귀와 낙타등 수많은 선물을 하사합니다. 아브람은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서 애굽 땅으로 왔는데, 단순히 기근만 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것은 이후 하나님의 개입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셔서 사래의 신분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하십니다. 사래는 아브람의 누이가 아니라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아브람 자신이 처음부터 밝혔다면, 아브람과 사래는 이렇게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아브람의 우려대로 아브람은 죽음에 처해지고, 사래는 원치 않는 폭력에 시달리며 모진 고통 속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래의 신분이 무엇인지 온 천하에 드러나게 하심으로 아브람도 살고 사래도 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나게 하셨으므로, 아브람과 사래는 바로 왕에게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하사 받은 선물도 하나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부자가 되어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톡톡히 누리는 아브람과 사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꾀가 정말 자신만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면, 사래는 처음부터 아브람의 꾀를 순순히 따르지 않았을 겁니다. 어느 부인이 자신만 살겠다는 남편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남편의 말에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래는 아브람의 계획에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대로 따릅니다. 이것은 그만큼 사래가 남편 아브람을 신뢰했다는 뜻입니다. 남편의 지혜는 단순히 살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지혜라는 것을 자신도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과 사래는 담대하게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약속의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있었던 것이지요.

 

사래 사건은 옹졸하고 치졸한 아브람의 꼼수가 아닙니다. 자연인으로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믿음의 사건입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처럼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 법칙에 순종하며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벼락이 치더니 그 나무를 반으로 쪼개 놓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놀란 다른 짐승들이 그 딱따구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너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그 큰 나무를 쪼갤 수 있니?’ 그러자 딱따구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단지 나에게 맡겨진 일을 매일 성실히 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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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