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6. 23:09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가?

(고전 11:17-34)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으레 하는 성찬식이지만, 이렇게 성찬주일을 따로 떼서 제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2천년 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심각한 문제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분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할 교회가 교리적인 이유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분열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크게 볼 때, 주후 1054년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분리, 주후 1517년에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인한 개신교의 분리, 주후 1534년 영국 성공회의 분리 등 수많은 작고 큰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일치Unity’인데, 실제 우리가 행한 것은 분열이었습니다. 이러한 심각성을 인식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일치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다각도로 노력해 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세계성찬주일의 제정입니다. 1982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가톨릭과 정교회를 포함한 세계교회가 공감하는 성만찬 예식서를 채택하고, 성만찬을 통한 일치를 추구하며 이 날을 지키기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세계성찬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일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 단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일치라는 것을 산업화처럼 어떠한 규격으로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로보트가 아닙니다. 로보트는 프로그램밍을 통해서 똑 같은 생각과 똑 같은 행동을 하게 끔 만들 수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인간의 삶은 로보트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이루기 원하셨던 일치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아주 구체적인 것인데, 사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면 에로스의 사랑을 먼저 떠올립니다. 이것은 성애의 사랑인데, 에로스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결핍에서 오는 사랑을 말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무단히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에로스의 사랑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자기중심적 사랑인 것이죠.

 

자기중심적 사랑은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을 채우고 나면 만족할 것 같지만, 결국 또 다른 결핍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은 평생 그 욕구를 채우다가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런 자기중심적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러한 에로스의 사랑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일컬어서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중심적 사랑인 에로스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이타적인(타자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에게 이러한 사랑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인간에게서 가능한 사랑이 아니라, 신에게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신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사랑’, 아가페인 것이죠. 그 아가페의 사랑이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이러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그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아무리 우리가 많이 소유하고 먹는다 해도, 그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한 본질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되고,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쌓아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되고,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져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생명을 약간 보존해 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생명을 약간 보존해 주는 음식이나, 업적, 또는 재산과는 질적으로 다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인해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며 완전히 다른 세상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생명의 빵,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생명의 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아가페 사랑을 배우고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것을 나누면서 모든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어느 순간 그러한 아가페 사랑이 깨진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문제입니다. 식욕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교회는 아가페를 실천하기 위해서 공동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초대했습니다. 자신의 배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별히 배고픈 자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이죠. 그러나 음식을 차려 놓고 가난한 사람들, 배고픈 자들이 와서 함께 식사하기를 바라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의도대로 가난한 자들이나 배고픈 자들이 제 시간에 와서 공동식사에 참석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겁니다. 넉넉한 사람들이야, 시간을 아무 때나 낼 수 있지만, 가난한 자들, 배고픈 자들은 과중한 노동에 시달려 아무 때나 시간 낼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일이 반복되고 장기화 되면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자는 것입니다. 먼저 먹을 사람은 먼저 먹고, 나중에 오는 사람을 위해서 음식을 남겨 놓으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입니다.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다 보니, 공동식사를 마련하는데 별 기여가 없는 가난한 자들이 굴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자신들이 공동식사에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공동식사는 일치를 위한 식탁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게 된 차별의 식탁이 되고 만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신다 해도, 서로에 대한 마음의 담을 허물지 못하면 그것은 주님의 만찬과 무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33, 34). 이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서로에 대한 배려입니다. 나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 주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결여될 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일치와 상관 없는 공동체가 되고 마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을 통해서 구원에 대한 욕망을 채우고 만다면, 그것은 결국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에로스의 사랑을 하고 말 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결국 또 다른 결핍과 허무만을 생산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그리스도와의 참된 일치를 이룬다면, 우리 안에 아가페의 사랑이 불꽃처럼 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흘러 넘치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먹으러 모일 때 서로 기다리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즉 결핍이 아닌 만족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결핍이 아닌 만족을 느낄 때, 아가페 사랑을 서로 나눌 때, 우리는 비로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차려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드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있는 결핍, 허무, 불평의 마음을 만족, 희망,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바꾸십시오. 그렇게 살 때, 우리의 삶은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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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