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21. 05:41

전도자의 직무

(딤후 3:14-4:5)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입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디모데를 만난 후, 사도 바울은 평생동안 디모데와 복음을 위하여 동고동락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이든 바울은 자신의 순교적 운명을 예감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목회자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교훈이라는 것, 즉 유언과도 같은 교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읽어 내려가면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 절절합니다.

 

그 중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익숙한 구절입니다. 특별히 이 구절이 그렇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6, 17).

 

우리는 오늘 말씀을 받아 들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를 다니면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신분증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전도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열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이상, 사람은 그 신분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입니다.

 

안데르센 동화 중에 <미운오리새끼>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이 동화는 <성냥팔이 소녀>와 함께 안데르센 자신의 불운한 어린 시절을 형상화시킨 동화로 유명합니다. 안데르센은 굉장히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 즉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난 뒤에, <미운오리새끼>에 등장하는 미운오리새끼가 사실은 오리가 아니라 백조인 것을 깨달은 후 하늘로 비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늘을 나는 동화작가가 되었습니다. <미운오리새끼>에서도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말썽꾸러기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백조처럼 우아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교회 다니는 이들은 자신이 그냥 교회만 들락날락 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 받은 전도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분도 아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색다른 존재감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과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듣는 설교가 재미 있으신가요? 재미가 없으신가요? 설교가 재미 없으신 분들은 성경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즘 메이저리그 포스트 시즌인데, 야구를 봐도 야구가 재미 없는 이유가 뭐죠? 야구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아야 재미있는 겁니다. 학창 시절에 수업 시간이 재미 없었던 이유가 뭐죠? 예습을 안 해 갔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좀 먼저 알고 있으면 재미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경을 잘 알아야 하고,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알아 오늘 설교 제목처럼 전도자의 직무를 잘 감당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도 무슨 이유가 있으니까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직무를 잘 감당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이유는 41절 말씀을 살펴 보면 압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4:1)

 

이 말씀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교훈입니다. 살다 보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 없이 꼭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입니다. 개인의 삶에서는 죽음이 종말이겠지만,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가 종말입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서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겁니다. 벌거벗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느냐, 부끄러움이 없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아니냐가 결정됩니다. 죄 짓기 전, 아담은 벌거벗고 있었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죄 지은 후, 아담은 자신의 벌거벗음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담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야 하는 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고, 관심이 없고 몰라서 그렇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이야기. 하나님 나라가 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는 이야기.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우리가 좋던 싫던,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던 관심이 없던 과 상관 없이 꼭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도 말하고 있는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의 차이는 바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느냐,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최고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곧 이 세상이 어떠한 일이 닥칠 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차리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곧 일어날 일을 대비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서 삽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한데, 지금 당장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무슨 신경을 쓸 겨를이 있냐고 합니다. 그러나, ‘창수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만 일어납니다. 그리고 창수가 한 번 일어나면,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창수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창수가 바로 마지막 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날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는 먼저 죽음이라는 형태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사실 무의식 중에 죽음을 대비하면서 삽니다. 그에 대한 대비로, 좋은 배우자도 만나고, 재물도 쌓고, 자식도 낳아 키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서 하는 모든 행위는 은연 중에 죽음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준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그러한 것들은 죽음앞에서 굉장히 무력합니다. 배우자도, 재물도, 자식도, 내가 죽음을 맞이할 때, 결코 나와 함께 하지 못합니다. 그냥 우리는 그렇게 쓸쓸하게, 아무 것도 없이, 벌거벗긴 채로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무엇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벌거벗긴 채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나이 드는 것의 미덕>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이 드는 것의 미덕 중 첫 번째는 목표를 갖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매우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합니다만, 구원이란 지미 카터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것이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잘 지내는 법, 이웃과 잘 지내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의로운 자만이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잘 지내려면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이 성경에 있다는 겁니다. 또한 의로운 자란 하나님의 사람이고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는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잘 지내지 못하고, 이웃과 잘 지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온전하지 못하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쟤 좀 이상해!’ 이상한 사람과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습니까? 악한 일을 하는 사람과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전도자의 직무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잘 지내는 사람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섰을 때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웃과 잘 지내는 사람은 이웃과 얼굴을 맞대고 섰을 때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만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잘 지낼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가운데 처해져 있는 사람들을 성경을 통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4:3-4).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날이 꼭 오고야 말 것이라는 진리를 사람들은 잘 듣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지금 당장 눈에 앞에 보이는 쾌락이나,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닥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우리에게 임합니다. 일차적으로 인생 가운데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 전도자의 직무는 바로 그것을 대비하는 겁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 사도의 교훈을 들으십시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4:2).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