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31. 03:41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니까, 괜찮아!

창세기 12

(창세기 161-16절)

 

테네시 윌리암스(Tennessee Williams)는 그의 소설 유리동물원 (Glass Menageries)에서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냥꾼이고, 싸움꾼이고, 사랑꾼이다(We human beings are basically hunters, fighters, and lovers.)”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갈등과 노력과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그 자체로 괴로운 것이죠. 뭔가 견뎌 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을 두고 토마스 벅스톤(Thomas Buxto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평범한 재능과 비범한 인내가 있다면 얻지 못할 것이 없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가장 아쉬움이 남는 장면에서는 언제나 인내의 문제가 떠오릅니다. ‘그 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가진 삶의 한 부분이 떠오를 때마다 우리는 밤잠을 설치며, 후회합니다. 인내해야 하는 그 순간은 고달프지만, 인내의 열매는 매우 달콤합니다. 인내해야 하는 그 순간 인내하지 않고 포기하면 살 것 같지만, 결국 인내하지 못한 것 때문에 인생은 더 쓴 맛을 봐야 합니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아브라함)과 사래(사라)가 인내하지 못해서 생긴 인생의 굴곡.

 

그 전조는 15장에서 이미 드러납니다. 그 이전에 아브람이 목숨 걸고 조카 롯을 구해 온 이유도 아마 이런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자식이 없으니, 조카 롯에게라도 유업을 물려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늙어가는 아브람에게서 끊이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데 자식이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브람은 자신의 상속자로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지목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15:2).

 

이렇게 흔들리는 아브람의 믿음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자손에 대한 약속과 함께 횃불 언약을 세워주십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초조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초조함이 아내 사래에게도 당연히 전해졌겠죠. 금방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자녀에 대한 약속 성취가 지연되자, 이번에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흔들립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16:2).

 

사래는 후사가 아브람의 몸을 통해서 나와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래는 아브람의 종속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과 사래 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약속이지, 아브람에게서만 이루어지는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후사는 아브람의 몸을 통해서 나와야 하지만, 똑같이 사래의 몸을 통해서도 나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내하지 못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자꾸 다른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도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과와 자기 합리화된 믿음의 결과는 매우 다릅니다. 믿음의 결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만, 자기 합리화된 믿음의 결과는 볼썽사나운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 봅니다.

 

사래의 생각대로 아브람은 사래의 몸종 하갈과 동침을 합니다. 그리고 하갈은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엉뚱하게 꼬여 돌아갑니다. 사래와 주종관계에 있었던 하갈이 임신을 못하는 자신의 주인을 업신여기기 시작합니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16:4b). 인간은 이렇게 자기가 좀 유리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생각하면, 생각이 비뚤어지지 시작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주 발생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조금만 지체 높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하나님이 된 양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사래는 자신의 몸종 하갈이 이렇게 나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관계에 금이 가면, 암투가 벌어지고 폭력이 그 자리에 들어섭니다. 예외 없습니다. 사래와 하갈 사이에도 폭력이 들어섭니다. 잘잘못을 가리기 힘든 상태가 됩니다. 진실은 없어지고, 진흙탕 개싸움만 남게 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16:6b). 좀 더 힘 센 위치에 있었던 사래가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미 관계는 금이 간 상태입니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관계에 금이 가는 폭력 사태가 벌어지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폭력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가장 나쁜 것이 폭력입니다. 폭력은 악의 대표적인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주님은 평화이신데, 어떻게 그 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 사이에 폭력이 들어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평화 대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지닌 죄성(罪性)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한계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죄()과 싸워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랑과 평화로 폭력이 들어설 자리를 없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람 가정에 닥친 폭력 사태는 일차적으로 아브람과 사래가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주인이 인내하지 못하니, 종인 하갈도 인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하지 못한 아브람과 사래, 주종관계를 인내하지 못한 하갈. 인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인생은 이렇게 볼썽사납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은 폭력 사태에서 패자가 된 하갈에게 내린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사랑과 평화의 세상이 아니라, 폭력으로 얼룩진 죄악된 세상입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약자는 늘 내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약한 하갈이 힘이 센 사래에게 내몰렸듯이 말이죠.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아브람과 사래에게 집중합니다. 하갈에게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언뜻 보아도 아브람과 사래가 힘이 세고, 하갈은 힘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힘 센 것에 마음을 둡니다. 그리고 그것을 동경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장사를 합니다. 이 물건을 소유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힘 센 사람이 될 거라는 환상을 심어 줍니다. 드라마 같은 것도 재벌이나 부잣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 시청률이 높습니다. 가난하게 지지리궁상 떨면서 살다 죽은 이야기는 싫어합니다. 가난한 현실도 지긋지긋한데, TV에서까지 그러한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이 세상의 폭력의 희생자들이지, 폭력의 승리자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갈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힘이 약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폭력의 패배자, 폭력의 희생자, 약자였던 하갈은 힘 센 사래 앞에서 도망쳐 광야로 갑니다. 광야는 힘 센 자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참 척박한 곳이지요. 어쩔 수 없이 그곳에 간 하갈은 술로 가는 길에 있던 샘 곁에서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갈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일이 발생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지 못해 일어난 폭력 사태로부터 비롯된 비극을 치유해 줍니다. 우선 갈리진 관계를 이어줍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16:9).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끊겨진 사래와의 관계를 다시 잇는 길은 원래의 관계였던 주종관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하갈의 비뚤어진 생각을 바로 잡아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주종관계의 회복을 말하지 않으시고, 하갈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십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사장이 되어야 인간이 존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업원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이 사장만 못한 것이 아닙니다.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더 존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부교역자이기 때문에 담임목사보다 존귀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기 때문에 존귀한 것이 아닙니다. 종이기 때문에 존귀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주종관계가 그 사람의 존귀함을 결정짓지 않습니다.

 

하갈이 다시 사래의 몸종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갈 자신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이르시기를 아들을 낳으면 이스마엘이라고 이름을 지어주라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의 뜻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겁니다. 존엄성이 없는 자, 존재감이 없는 자는 그 누구도 그의 말에 그의 인생에 그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힘 없는 자의 고통에 누가 귀를 기울여 줍니까? 힘 없는 자가 죽어 나가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온통 힘 있는 자의 말에만, 힘 있는 자의 고통에만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온통 힘 있는 자가 되려고 영혼까지도 팔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 없고 존재감 없는 하갈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갈의 독특한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 사람은 이제 이 세상 어떤 것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하려 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하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16:13).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우리는 이 세상의 폭력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냥 우리가 조용히 자기 할 일 하면서 먹고 사는 데만 신경 써서 그렇지, 어떤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의 악과 더불어 싸우겠다고 덤벼보십시오. 우리는 십중팔구 세상의 폭력에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또한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하고 소유해도, 우리는 그것을 한 순간에 모두 잃어버리는 폭력의 상황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을 일컬어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의 존귀함을 확인하려 드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라지고 없어지고 짊어지고 가지도 못할 유한한 것들에서 존귀함을 찾으려 든다면, 우리의 존귀함은 그것이 사라지는 그 순간 몽땅 사라지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갈이 자신의 존엄성을 사래와의 주종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들으심(또는 돌보심), 즉 하나님에게서 찾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놀라운 사건임을 우리는 꼭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갈은 더 이상 사래의 몸종으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존엄성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랬기 때문에 하갈은 다시 사래의 몸종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갈은 자신을 향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니까, 괜찮아!(이스마엘)" 물론 이스마엘을 품고 있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말했겠죠.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