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18. 05:12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

(27:13-26)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의 재판을 모두 바친 사도 바울은 지금 가이사에게 상소한 까닭에 로마로 호송되고 있는 중입니다.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은 재판을 통해서 바울에게 아무런 혐의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를 풀어주려고 했으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억울함을 가이사(황제)에게 상소한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로마로 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이 숨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전부터 로마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로마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피력해 왔습니다. 시골 촌놈이 그 당시 세계 최고, 최대의 도시 로마에 한 번 구경 가고 싶다는 순진한 마음이 아니라, 로마를 발판 삼아 그 당시 땅끝이라고 여겨졌던 사바나(스페인)까지 선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말리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유대 땅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가는 길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요즘 지중해라고 불리는 바다를 건너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배를 타고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중해에는 유로굴라라는 광풍이 때때로 부는 데, 그 광풍을 만나면 살아남기 힘들었습니다. 유대인의 절기로 대속죄일이 끝난 뒤에는 지중해에 유로굴라가 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울 일행이 지중해를 건너야 하는 시점에 대속죄일이 끝난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호송을 담당한 로마 황제 부대의 백부장에게 조언을 합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10).

 

그런데 백부장과 선장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정박하고 있는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편하게 겨울을 나고자 하는 인간의 얄팍한 심리가 앞에 놓여 있는 위험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불편한 것보다,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생명이 붙어 있으면 불편한 것을 견딜 수 있지만, 생명을 잃어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때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이렇게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이 생명에 맞춰져 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도로교통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몇 분 빨리 가려는 급한 마음에 과속하다가 사고 나기 일쑤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습관이 베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호송 당하고 있는 입장이라 어떤 권위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장과 백부장의 뜻대로 항해를 합니다. 물론 출발할 때 날씨가 안 좋았으면 달랐겠지만, 공교롭게도 출발 당시 남풍이 순하게 불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바울의 예상과 우려대로 광풍을 만납니다. 아찔한 순간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유로굴라 광풍 때문에 배는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상황이 악화되어 최후의 수단까지 진행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즉 배에 있는 짐과 기구 모두를 바다에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안전, 생명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가 풍랑을 견디지 못하면, 모두 물에 수장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수단을 강구하게 됩니다. 1972년 럭비 선수들과 그의 가족들을 실은 비행기 한 한대가 우루과이를 출발하여 안데스 산맥을 넘다가 추락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추락의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중에서 16명이 살아 남았습니다. 이들은 추위와 배고픔 가운데서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러다 72일만에 구출되는데, 구출된 후 그들의 증언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행한 마지막 수단은 먼저 죽은 친구와 가족의 인육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두 명의 청년이 안데스 산맥을 걸어서 넘어가 구조 요청하는 일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까지 모두 강구했는데도 불구하고, 풍랑이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하자 점점 삶에 대한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20).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모든 물건을 바다 속으로 던져 넣는 바람에 먹을 것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멀미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정말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이 일어나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우선 아쉬운 마음을 전합니다.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21).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에게 핀잔을 주고 나무라는 말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입니다. , 지난 번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이번에 자신이 하는 말은 꼭 들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에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22).

 

아무런 희망도 없이 구원의 여망마저희미해져 가던 풍랑을 만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바울의 이 메시지가 얼마나 위로됐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그들은 바울의 말에 희망을 걸었을 겁니다. 게다가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참으로 희망적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23-24).

 

풍랑 속에서 구원의 여망마저희미해져 가는 상황에서 바울도 두려웠을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겠죠. 바울도 아마 이렇게 죽는구나라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바울이 붙들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그렇습니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배를 타게 된 이유는 가이사 앞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살아남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로마서에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이 말은 이것을 뜻합니다. 사명자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겁니다. 사명자의 생명은 하나님께 드려진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하나님께서 사명자의 생명을 우리 자신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아무렇게나 생명을 거두어가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의 사명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 중 지금 현재 주어진 사명은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에게 그러한 사명이 없었다면 바울은 풍랑 속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주신 분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당신이 바울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바울을 살려 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과 한 배를 탄 사람들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자와 한 배를 탄 것만으로도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명자란 자신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 싼 이웃들의 생명까지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을 행하게 됩니다.

 

바울의 희망의 메시지대로 풍랑 속에서 표류하던 그들의 배는 어느 한 섬에 걸리게 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그들,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성경은 그들의 삶을 조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들의 삶을 추적해 보면, 그들 중 상당수는 사도 바울의 희망의 메시지로 인하여서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겁니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 봅시다. 나는 사명자인가?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신 사명자인가? 하나님께 생명이 드려진 사명자인가? 나의 생명은 누가 주관하고 있는가? 나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나는 사람을 살리는 사명자인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사명자인가? 물론 사람을 죽이는 사람을 일컬어 사명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만, 사명자(使命者)와 사명자(死命者)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 죽을 위기에 처해져 있었는데, 살아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긴 사명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닫습니다. 또한 죽음 자체도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일례로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있습니다. 1889 10 2, 호주 빅토리아장로회 소속 데이비스 목사가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누이인 메리와 함께 한국 땅을 밟습니다. 데이비스는 다섯 달 동안 서울에서 한국말을 익힌 후 육로로 20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으나, 여행 도중 천연두에 걸려 도착 하루 만인 1890 4 5일에 게일 선교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 허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데이비스의 허무한 죽음의 소식을 접한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교인들은 한국 선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로 결정하고 메케이(J.D. Mackay)목사 부부와 멘지스(B. Menzies), 페리(J. Perry), 포셋(M. Fawcett) 등을 부산에 파송합니다. 그리고 189110, 수정산 자락 좌천동에 선교부를 세우고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지역 선교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사명에 대한 일깨움을 줍니다.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라는 말씀,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십자가에서 완수하셨을 때,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는 역사가 있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구주가 되셨으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이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받는다는 것, 사명자로 산다는 것은 내가 속한 모든 곳을 생명력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생명을 드린 사명자로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명을 통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생명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