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16. 04:53

길이 참으라

(야고보서 5:7-11)

 

대림절은 기다림을 배우는 절기입니다. 무엇이든 재깍재깍 결과물이 있어야 하는 인스턴트 시대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덕목이 바로 기다림(인내)입니다. 이런 시대에 기다림을 인생의 가장 큰 틀로 설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기다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학생은 성적표, 또는 원하는 대학의 합격 소식을 기다리고, 젊은 숙녀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고, 젊은 청년은 신데렐라를 기다리고, 결혼한 부부는 자식의 탄생을 기다리고, 아이는 엄마의 젖을 기다리고, 아내는 퇴근해서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고(그 반대로 마찬가지입니다만), 부모는 밤늦게까지 안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립니다.

 

밤늦게까지 안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시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목은 <늦은 귀가>입니다. 제가 소시 적에 쓴 시입니다.

 

조심해서 다녀!

일찍 들어와!

 

매일 아침,

조심일찍을 강조하시는 어머니

 

나의 늦은 귀가에 어머니는

니가 늦게 들어오니까

간이 오그라 들었다 늘어났다 하잖아라고 꾸짖으신다

정말 그걸 느끼셨단다

  

조심일찍

어머니의 사랑의 열매

 

나는 오늘도

그 열매를 따먹지 못하고

어머니가 토해낸 그 열매의 씨앗을

어머니의 肝에 심어 놓았다

 

그런데 성경은 다른 기다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기다림만을 말합니다. 성경이 오직 이 기다림만을 말하고 있다는 뜻은 이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다림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5:7a).

 

야보고는 이것을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한다면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구절이 9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Don’t grumble against each other.” 원망(grumble)은 불평, 불만, 푸념 등을 말합니다. 우리가 원망(grumble)’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원망하면 주님께 심판 받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원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기쁨 때문에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쁨은 두려움보다 강합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자,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억제하겠지만, 무엇이든지 억지로 강제로 하면 거기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힘든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교회 문턱 드나드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믿고 삶의 모습을 완전히 바꾼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를 믿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1. 주께서 강림하신다. 2. 주님은 심판주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우리의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원망하지 않는 삶이 그것입니다.

 

주께서 강림은 하시는데 심판주가 아니시면 그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심판주이시긴 한데 강림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면 그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심판주가 아니시거나 강림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정의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강림하실 뿐만 아니라,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정의를 세우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한다는 뜻은 우리가 죄를 정한다는 뜻이고, 우리가 정의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서 이것만큼 교만한 일도 없는 것입니다.

 

법정에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죄를 정하는 일은 판사가 하는 것입니다. 판사를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어떠한 행위를 죄다 아니다결정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판사를 무시한 죄로 법원경찰에게 끌려 나갑니다.

 

오늘 말씀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우리가 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욥기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의 인생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배웁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라.” 욥의 인생을 들여다 보면 그에게 닥친 괴로움, 자식이 죽고 재산을 잃고, 아내와 친구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그런 일들을 보면 주님께서는 무자비하시고 괴팍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욥이 그러한 괴로움을 당한 이유는 그의 삶이 불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기서의 결론은 그것이 아닙니다. 욥의 삶은 의로웠고,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 결말을 보게끔 해 준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기다림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면, 욥의 삶은 불의한 삶으로 하나님은 무자비한 분으로 인식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욥은 기다림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회복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온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부당한 일을 당합니다. 그 반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부당한 일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이 당한 일은 잘 기억하는데,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잘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에게는 피해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피해자라고만 생각하지, 가해자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살면서 부당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것 때문에 스스로 정의를 세우려고 상대방을 향해 원망하지 말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그 부당한 일을 바로 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내가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나 스스로를 살펴 보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내가 저지른 부당한 일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불평, 불만, 푸념을 늘어 놓지 마십시오. 우리가 성인군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윤리도덕적으로 그것이 안 좋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심판주이신 우리 주님께서 곧 강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인내)은 주님의 강림에 대한 기다림이요, 그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기다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길이 참으십시오. 억지로 고통 가운데 참지 마시고, 기쁨으로 참으십시오. 주께서 곧 강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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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