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9. 04:42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냉소에서 희망으로

창세기 15

(창세기 18:1-15)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아브라함이 손님을 잘 대접해서 복 받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손님을 잘 대접하면 복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손대접하기(Hospitality)’가 기독교인들의 윤리이긴 하지만, 오늘 말씀은 단순히 손대접하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국을 형성해서 성전을 지어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 것과 요즘 우리들이 이렇게 모여서 예배 드리는 것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의 예배를 들여다 보면 아브라함의 예배는 예배 같지 않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의 예배는 공간의 존재가 없습니다(No Building). 아브라함의 예배는 공간의 예배가 아니라, 장소의 예배였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고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은 이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곳이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족장시대)에는 예배를 드리는 성전같은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본인을 나타내신(현현) 곳이 곧 예배의 장소였습니다. 이후에 야곱도 형 에서를 피해 하란 땅으로 가다가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한 후 바로 그곳에 제단을 쌓습니다. 사실, 성전신앙이 자리 잡은 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좀처럼 피어나지 못했습니다.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측면에서 예배를 드리긴 했어도, 삶의 곳곳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 임재의 의식이 사라지다 보니, 신앙 자체가 형해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해화 된 신앙은 우리도 체험합니다. 예배는 그저 교회당에 와서만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교회당에서는 거룩한 모습으로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데(하나님께 예배당에서만 잘 보이면 된다는 의식), 교회당 밖에만 나서면 전혀 거룩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 세상 속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회복해야 할 예배의 영성은 성전예배가 아니라, 삶의 예배입니다. 다른 말로 아브라함 예배 또는 족장 예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족장들)에게 예배는 닫혀 있는 공간에서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열려 있는 공간에서의 살아 있는 체험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은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이 예배를 통해서 기대하게 되는 기대치를 다르게 합니다. 예배가 닫혀 있는 공간에서의 퍼포먼스로 전락하면 예배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변하게 됩니다. 예배 드리는 자는 예배 받는 자를 만족시키면 그만이고, 예배 드리는 자는 자신들의 예배를 통해서 자족하면 그만입니다. 예배 드리는 자와 예배를 받는 자 사이의 인격적인 사귐 같은 것은 필요 없게 됩니다. 의무를 다했다는 생각이 더 이상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합니다. 인격적 사귐이 없는 존재들 사이에는 기대치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각자의 일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서처럼 예배가 열려 있는 공간에서의 살아 있는 체험으로 다가오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예배는 하나님의 현현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현현은 계시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신다는 것을 말하는데, 하나님이 드러나신다는 것(내재적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경륜적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말씀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일치를 이룹니다. 존재와 말과 행동이 언제나 다르게 노는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렇듯,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까 예배도 퍼포먼스 형태로 드리고 말지만, 아브라함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했기 때문에 삶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계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제단을 쌓으면(예배 드리면), 어떠한 징조가 있을 것인데, 그 때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제단을 쌓은(예배를 드린 그래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했던) 아브라함은 무더위 가운데서도 어떠한 징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장막 문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나타난 징조를 놓치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지라”(2a).

 

기대가 없는 사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 앞에 서 있는 징조를 포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은 절대로 징조를 놓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2b).

 

제단을 쌓아(예배를 드려)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열정을 지닌 참된 예배자의 자세를 보십시오. 그 어디에서도 교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몸을 땅에 굽히고, 자신 앞에 선 세 사람에게 주여라는 호칭을 쓰며, 자기 자신은 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분이고, 나는 땅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한 믿음의 사람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낮추고, 하나님은 높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높일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낮추고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때 우리의 삶은 영광스러워집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만 해야 합니다.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만 하십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을 그치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정죄할 때, 거기에는 죄악이 풍기는 썩은 내만 날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절대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함부로 나열하며 자신의 싸구려 욕망을 드러내 보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손님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나열합니다. 더운 날씨에 여행 중인 손님들에게 필요한 것은 발을 씻는 것과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픈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시선이 자기 자신에게 가 있지 않고, 오직 손님들에게 가 있습니다.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데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이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음식을 내오는지를 살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손님들을 나무 그늘 아래 모셔놓고, 아브라함은 급히 장막으로 달려가 음식 준비를 합니다. “고운 가루 세 아스를 가져다가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지금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배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쓰는 재료는 모두 제사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때 사용되는 것들입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 아브라함에게 따로 떼어낸 예배 시간과 삶이 구별되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삶 자체가 예배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로 만든 음식을 가져다가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 아래에 쉬고 있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모습은 영락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에게 집중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한 아브라함의 삶은 이제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게 됩니다.

 

식사를 마친 손님들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지금 아브라함 가정의 최대 이슈는 자손의 출산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가정의 사사로운 소망이 아니라, 아브라함 가정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신앙은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어,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지, 내 욕망을 채우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기에서 자꾸 걸려 넘어집니다. 우리는 예배 드릴 때 조차도 우리 자신에게만 집중합니다. 온통 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니 귀가 닫히고 눈이 닫힙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아무리 일하셔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된다면 비로소 우리 삶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이 들리고 보이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했던 아브라함에게 들린 음성을 보십시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현현이고, 계시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네 인생이 가장 바라는 것이 이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놀라운 순간, 하나님의 계시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냉소주의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냉소주의, ‘그게 되겠어?’ 냉소주의는 믿음 없음의 다른 말입니다.

 

사라의 냉소를 보십시오. “사라는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2). 비웃음, 냉소, 불신이 가득 찬 마음은 드러난 하나님의 뜻조차 발로 차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14a). 여호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께 어려운 일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입으로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꼭 이루십니다.

 

엘샤다이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냉소를 희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사라의 웃음은 냉소의 웃음이었으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라고 할 때의 웃음은 희망의 웃음입니다. , ‘네가 지금은 그렇게 냉소적으로 웃고 있으나, 내 뜻이 이루어지는 그 때에는 그 웃음이 기쁨의 웃음으로 변할 것이다!’라는 선포인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삶 가운데, 비웃고 싶은, 냉소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막막한 일이 있으십니까? 그 문제에 매여 있지 마시고, 우리의 구원자 되신, 엘샤다이의 하나님에게로 시선을 돌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보여준 절차를 따라, 퍼포먼스의 예배가 아닌 삶의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리면, 여러분의 냉소가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이 그분을 불신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냉소를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엘샤다이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불신을 믿음으로 바꾸십시오. ‘내년 이맘때’, 다시 말해, ‘웃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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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