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1. 19. 23:16

내가 만난 예수

(요 1:29-42)

 

오늘 말씀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 (the Lamb of God)’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왜 그 많은 표현을 놓아두고, ‘어린 양을 들어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을까요? 도대체 하나님의 어린양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어린 양하면 이스라엘의 제사를 떠올립니다. 레위기서에 보면 제사법이 잘 나와 있는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어김 없이 등장하는 동물이 입니다. 그리고 성경 곳곳에서 은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을 들어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친숙함을 느낍니다.

 

레위기서에 보면 제사에는 번제(the Burnt Offering), 소제(the Grain Offering), 속죄제(the Sin Offering), 그리고 속건제(the Guilt Offering)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죄를 사하는 제사는 속죄제입니다.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생각은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은 이와 관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서에 나와 있는 제사법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속죄제에 쓰이는 어린 양은 수컷이 아니라, 암컷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남자였다는 사실과 잘 맞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자였다면,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이 속죄제의 제물로 쓰인 것을 말하는 것일 텐데,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남자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디에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창세기 22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고자 고통스러운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 그 가운데서 영문도 모르고 이런 질문을 하는 아들 이삭: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22:7). 아들의 심장을 파는 날카로운 질문에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

 

여기서 이삭과 아브라함 사이에 오고 간 대화 중에 등장하는 은 번제물로 쓰일 양으로서 성별이 배제된 양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영어 성경은 이 양을 ‘sheep’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번제(the Burnt Offering)는 제물을 온전히 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번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앙을 표현할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을 제물 삼아 번제를 드리려 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에 대한 의문이 좀 풀리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좀 더 큰 틀에서 예수님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죠. 예수님을 단순히 죄사함의 제물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앙을 총체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말씀이 이것을 뒷받침 해줍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30).

 

이는 예수님이 단순한 죄사함의 제물 이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라고 하는데, 요한이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신 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의 기사를 통해서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요한 보다 몇 개월 늦게 잉태됩니다. , 요한의 생일이 예수님의 생일보다 빠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보다 뒤에 오시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요한은 그 사람이 본인 보다 앞서는데, 그 이유를 나보다 먼저 계시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단순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34절에서 요한이 증거하듯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도전적인 문장을 접하게 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31).

 

요한이 베푼 세례는 기본적으로 죄사함을 위한 세례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굉장히 모순된 행동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면 예수님은 스스로 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세례는 죄사함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양(lifting up) 또는 드러냄(revelation)’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수기에 나오는 불뱀사건과 연관됩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줄기차게 사용합니다. 유대교인이 아닌 기독교인이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받아 들고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잘 모르면, 신약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불뱀 사건은 민수기서 21장에 나옵니다. 가나안 땅으로 행진하고 있는 중, 이스라엘 백성은 길이 험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퍼붓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21:5). 이런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심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어 나가자,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모세에게 살려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뜻을 하나님께 전하는데,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셔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고 하시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나타나신다는 요한의 진술은 이 불뱀 이야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불뱀(놋뱀)을 장대 위에 매달아 높이 올린 것처럼 그래서 그것을 쳐다본 이들이 죄사함을 얻고 구원 받은 것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높이 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들(믿는 이들)’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 받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의 이러한 증언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인지 밝혀집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바쳤던 이삭과 같은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죽을 위기에 처했던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장대에 높이 달린 불뱀과 같이 십자가에 높이 달린 구원자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원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베푸시는 신적 능력입니다. 그 구원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신 어린 양이심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의 제자 두 명이 하나님의 어린 양인 예수님을 만납니다. 요한의 제자 두 명은 예수님을 만난 뒤 요한을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요한을 떠나 자신을 따르는 요한의 두 제자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What do you want?)” 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갖기 원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고, 그 중 한 명(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이 자신의 형제(베드로)에게 달려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요한이 만난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구원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안드레와 베드로가 만난 예수님은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말은 예수님은 메시야이시다!”라는 고백의 줄임말입니다.

 

여러분이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요한이 만나고, 안드레가 만나고, 베드로가 만났던 예수님이 여러분에게도 메시야, 그리스도로 고백되십니까?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이것이 제가 만난 예수님입니다.

 

주님 날 위해지신 십자가

허물 많은 내 삶에 늘 흐르며

죽었던 내 영혼 살리시네

메마른 나의 맘을 적시네

내가 만난 가장 큰 사랑 예수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니

이제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분이 사는 것

내가 만난 가장 큰 용서 예수

 

세상 모든 어둠 힘을 잃고

우리 가진 모든 일 녹아지리라

어떻게 그분 닮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길 걸을 수 있나

내가 만난 가장 큰 이름 예수

 

/ 꿈이 있는 자유, 한웅재 곡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