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3. 05:14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자

(마태복음 5:1-12)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 행복을 느끼십니까? 교회 다녀서 여러분의 삶이 행복해졌습니까? 예수님을 따라 나서서 여러분의 삶이 행복해졌습니까?

 

요즘 시대를 일컬어 소비사회라고 하는데, 소비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마음껏 소비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지니고 있습니다. 일례로,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쇼핑을 합니다. 그래야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은 쇼핑을 통해서 행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행복한 자란, 더 소비할 수 있는 능력자란 뜻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안내해 주는 말씀인 것 같기는 한데, 우리가 바라는 형태가 아닌 것 같아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성경에서 마음껏 소비할 수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해주면 내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그리고 이 사회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 옳다 여기고 열심히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할 텐데, 왠지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을 덮고, 못 본 척 하고 그냥 내가 행복을 느끼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좀 당황스럽긴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인내를 가지고 들여다 봐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이러한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팔복”. 오늘 말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입니다.

 

우리는 흔히 복 받았다라는 것을 행복과 연관 짓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특별히 ‘lottery’복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복과 오늘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행복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이 당황스러운 겁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 단어인 은 영어로는 ‘blessedness’라고 하고, 성경의 원어인 헬라어는 ‘makarios’라고 합니다. ‘마카리오스는 어느 한 가지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행운, 행복, 특권 등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행복과 마카리우스의 의미가 겹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팔복이라는 주제로 하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는 것을 찾기가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딱히 행복을 약속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을 약속하시는데, 그 복을 약속하시는 정황이 우리가 흔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입니다. 애통할 때, 온유할 때, 화평케 할 때, 핍박 당할 때, 심령이 가난할 때 등입니다.

 

우리가 흔히 불행하다고 느끼고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이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 나라(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상황에서 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맥락에서 선포하시는 복의 내용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행복이라고 말하는 부(wealth)나 건강(health) 또는 사회적 지위(status)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나 건강이나 사회적 지위가 복을 가져오는 인자(요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복이란 의로움이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했을 때 받는 보상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복이란 하나님의 충만한 선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생명은 명예와 수치를 통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통해서 다스려진다는 겁니다.

 

이것이 좀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는 지금 말씀 드린 하나님 나라의 생명 경험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이 부나 건강 또는 사회적 지위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부할 때, 건강할 때 사회적 지위가 높을 때 행복해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든, 부자가 되려고 하고, 건강해지려고 하고,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고 합니다. 내가 그러한 것을 못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내 자식들만은 그러한 것들을 갖추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뼈가 부서지도록 일합니다. 또한 우리는 의롭게 살거나 어떠한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때는 당연히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상이 없다면, 의롭게 살 필요도 없고, 어떠한 임무도 성실히 수행할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이런 식으로 행복을 경험하고 생명을 경험하는 우리들에게 오히려 오늘 말씀은 굉장히 낯설게 다가옵니다. 설교하고 있는 저 자신도 오늘 말씀과 다르게 작동하는 세상에서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니, 오늘 말씀이 낯설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저도 자식이 있는 입장에서 우리 아이들이 커서 잘 살았으면 좋겠고, 건강했으면 좋겠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어 세상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기는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느끼는 행복과 생명을 경험하는 방식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오늘 말씀이 우리가 가난하게 살아야 되고, 건강치 못하게 늘 병에 들어서 살아야 하고, 사회적 지위 같은 것 없이 천민으로 살라는 뜻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오늘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통치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란,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식이란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상황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말씀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서 하나님이 드러나시게 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한 사람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그 마음이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심령이 부자라는 뜻은 그 마음에 무엇인가가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무엇인가가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그것을 알리기 위해 힘씁니다. 내가 얼마나 아는지, 내가 얼마나 큰 일을 행할 수 있는지. 그래서 그것을 하기 위해 늘 바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행하실 비어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복이 임하는 방식, 즉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방식을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 할 때처럼, 무엇인가 비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위로의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온유한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기업의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배부름에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긍휼히 여김을 받음의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음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의를 위하며 박해를 받은 자는 비어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천국이라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때, 하나님의 생명을 살 수 있는(live) 때는 강할 때보다 오히려 약할 때이고 가득 차 있을 때보다 오히려 비어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약하게 되는 것을, 비어 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기를 쓰고 강하게 되려고 하고 기를 쓰고 가득 채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오히려 약할 때, 오히려 비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는 때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니, 혹시 우리가 지금 약한 처지에 처해졌다고 해서, 혹시 우리가 비어 있는 처지가 되어 있다고 해서, 너무 두려워하거나 수치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우리가 약할 때, 우리가 비어 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약한 것을 우리의 비어 있는 것을 우리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을 내려주시는데, 그 복은 하늘의 복, 즉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명, 하늘의 복을 누리는 것보다 이 세상의 복을 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약한 것과 비어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못하고, 이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 강해지고 채우는 삶을 살겠다고 하시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나를 따라오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의 나라로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의 삶(천국, 하늘 나라)으로 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면, 하나님 나라가 작동하는 방식을 따라 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드러나시도록 그분께 삶을 맡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자,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아멘.

 

 

* 오늘 본문 말씀이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에 그것을 한 편의 설교에 한꺼번에 다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 <하연이에게>라는 찬양을 통해 그 이미지를 더 풍성하게 표현해 보았습니다. 찬양을 듣고 싶으시면, 컬럼버스감리교회 홈페이지에서 설교를 들으시면 좋습니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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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