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6. 08:20

아무도 모른다

창세기 16

(창세기 18:16-33)

 

 

아무도 모른다

- 김사인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후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뭔가를 좀 아는 것처럼 살아가다가도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보면, 뭔가 아는 것처럼 살아온 인생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 우리가 귀로 듣는 것, 또는 손으로 만져 보는 것, 이러한 모든 것들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뭔가 아는 것처럼 확신하고 눈과 귀와 손으로 느끼는 세상을 따라 조심스럽게 살아가지만, 결국 뒤돌아 보면 눈과 귀와 손으로 보고 듣고 만졌던 세상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이었나를 깨달을 때 섬뜩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확실한 것에 근거해서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기까지 합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 땅으로 나아갈 때 그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하란 땅에 아버지를 묻고 가나안 땅으로 나아갈 때 그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부르시는 음성 하나만 믿고 나아갔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브라함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시기에 조카 롯과 땅을 놓고 갈등한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 땅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히려 많은 재산을 얻어 가지고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아브라함 일행은 불어난 재산 때문에 갈등합니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13:5-7a).

 

사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이렇게 재산 문제로 다투게 될 거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투게 되었고, 그 다툼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가축들을 방목할 목초지였는데,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서로 갈라서서 각자의 목초지에서 가축들을 키우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어느 목초지를 차지할 것인가를 놓아두고 의논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건네 줍니다. 물론 삼촌이 조카보다 선택하는 데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고 해도 조카 롯이 토를 달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아들처럼 사랑했으므로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양보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진 자, 그리고 더 힘 센 자가 양보하는 것이 사랑이고 덕입니다. 또한 그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진 자, 그리고 더 힘 센 자가 모든 것을 먼저 차지하는 것이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그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더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또는 내가 덜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먼저 양보하고 내려놓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알고 먼저 내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화평과 사랑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먼저 내려놓은 것뿐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라리”(13:8-9).

 

그런데 문제는 롯입니다. 롯은 뭔가를 아는 듯이 선택권을 행사합니다. 눈과 귀와 손을 통해서 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뭔가를 안다는 듯이 자신 있게 선택합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3:10). 롯은 소알 땅에 가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빠진 이 문장을 몰랐던 것이죠.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13:10 중간).

 

만약, 롯이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것에 대해서 알았다면 과연 롯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손의 감촉을 통해 느낀 대로 소알 땅을 택했을까요? 망할 것 알면서도 그것을 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스스로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거나, 바보천치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힘든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인생이 힘듭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주요 논쟁점인 의인과 악인에 관한 것 또한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융성한 대접을 받으신 후, 소돔 땅으로 향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두 가지를 알려 주시는 데, 첫 번째는 18절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아브라함에 대한 계획입니다. 또한 택함 받은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두 번째로는 20절 말씀대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려고 하는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이 참 쉽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해야 하는데, 무엇이 의와 공도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명백하게 의로운 일인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그 의로운 일 때문에 다치는 사람이 생기거나 더 안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잘못한 일인 것 같아서 후회하거나 회개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 때문에 오히려 기쁘고 즐거운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더욱더 잘 모르는 것은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갖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을 티끌과 재같은 존재로 낮추면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킬 수는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의인 50명만 있다면 그 의인들로 인해 악인들까지고 구원해 달라는 간청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간구가 10명까지로 내려갑니다.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니라”(32).

 

아브라함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소돔과 고모라에 롯을 비롯해서 롯과 엮인 의인이 열 명쯤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예상과는 다르게 소돔과 고모라에는 열 명의 의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도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구분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고, 다른 사람(타자)에게는 박한 점수를 줍니다.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고 전제하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보통 마음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런 사건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로마인들과 유대인들이 어리석고 악독해서, 즉 그들은 악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자였고, 로마의 정치체계를 무너뜨릴만한 선동자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명백하게 신성모독죄를 범했습니다. 게다가 신명기 2122절과 23절 말씀은 나무에 달린 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들이 보기에 말씀에 근거해서 본 예수, 그것도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증거하는 바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유대인들이 거리끼게 여기고, 헬라인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바로 그 십자가의 예수가, 누가복음 2347절에서 로마의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향해 이렇게 외쳤듯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는 것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겸손함이 먼저 필요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입니다.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무지의 언어도 아니고 절망의 언어도 아니고 체념의 언어도 아닙니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막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살아야 하는 겸손과 용기가 필요한 겁니다. 정죄하기를 내려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들, 그저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를 세워주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는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인지, 좀 아는 것 아닐까요?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의 성장통  (2) 2014.02.17
생명의 물, 생명의 길 (2, 2, 20 운동)  (1) 2014.02.09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자  (0) 2014.02.03
예수를 따르라  (1) 2014.01.26
내가 만난 예수  (1) 2014.01.19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