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 23:10

텐트(장막) 치고 사순절 맞기

마태복음 17:1-9

 

예수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신인가? 예수라는 이름은 지난 2천 년 동안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수많은 질문거리를 주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단하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2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나사렛에서 자랐으며, 갈릴리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했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끊임없이 예수는 누구인가?”를 질문해왔습니다. 기독교회가 내린 최고의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다. Vere Homo, Vere Deus. 이 말은 50%는 인간이고, 50%는 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들 중에는 그런 존재가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 말은 100% 인간, 100% 신이라는 뜻입니다. AD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확정된 교리입니다. 이후로,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모두 이단(정통이 아닌, not 나쁜놈)으로 낙인 찍혔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각각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통해서 선포해왔습니다. 우리는 별로 생각 없이 성탄절기와 주현절기를 보내지만, 사실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교회력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즉 참 사람됨을 증거합니다. 어떻게 증명합니까? 예수는 여느 사람들처럼 여자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여기에 물론 신성을 증명하는 요소가 가미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긴 태어나는데,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동정녀탄생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인성(사람됨)이 성탄절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제 예수의 신성(하나님됨)이 주현절기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주현절기는 동방박사의 이야기와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식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리고 오늘, 주현절기가 끝나면서 우리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또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해서 주현절기는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 음성을 듣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신성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예수의 신성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늘, 산상변모사건을 전해주고 있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의 하나님 됨을 깊이 묵상합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진술에 의하면, 오늘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하신 뒤 엿새 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이 장면은 분명히 구약의 두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과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처럼 시내산에 오르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상대로 씌어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늘 이런식으로 구약과의 연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 즉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고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예수께서 높은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여서 전해진 하나님의 의와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진 예언이 바로 예수에게서 성취될 거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 갔던 세 제자는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희한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는 장면입니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리고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제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모두 두려워 떨었습니다. 모세도 그랬고, 에스겔도 그랬고, 다니엘도 그랬고, 신적인 영광을 체험하고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베드로는 횡설수설하면서 예수님께 제언을 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우리도 중요한 장면,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은 비디오나 사진으로 담아두려고 합니다. 옛날에는 그러한 장치들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풍습에는 그것을 저장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절기(일종의 기억장치)입니다. 일례로 유월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을 우리가 비디오나 사진에 담아두는 것처럼 담아둡니다.

 

이스라엘에는 장막절(초막절, 수장절)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들은 이 절기를 통해서 출애굽 이후 40년 동안 광야생활 한 것을 기념했습니다. 광야에서 텐트를 치며 생활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죠. 광야생활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 그리고 위대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기간이었죠.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막을 셋 지어서 여기에 있자고 하는 것은 바로 장막절에 지었던 그 텐트를 의미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3대 절기는 유월절, 칠칠절(초실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입니다. 이 유대인의 절기 중, 장막절(초막절)이 가장 큰 절기였는데, 이것을 통해서 베드로는 변모사건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주님, 기념 사진 하나 찍어 놓죠!” 정도가 될 겁니다.

 

이런 가운데 놀라운 일이 연속하여 벌어집니다. 갑자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구름은 신적표상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는 구름이 몰려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임했다는 뜻입니다. 구름 속에서,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루만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라고 하십니다. 모세도 사라졌습니다. 엘리야도 사라졌습니다. 그들 눈 앞에 여전히 서 계신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고,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무서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신 것은 부활을 연상시킵니다.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 사건이 바로 구원 사건입니다. 그것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에게도 변모사건을 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빛에서 보지 않으면, 변모 사건도 그 빛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있은 뒤, 베드로가 어떻게 이 변모사건을 증거하고 다녔는지, 그리고 이 변모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는 베드로후서 1 16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은 분명히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음성이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리며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들려야 합니다. 이 음성을 들은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들려진 이 음성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과 똑같이 들은 분은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구원자로, 예수를 주님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겁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사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내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눈에 보이게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찬식 때 단순히 떡과 포도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내 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이요, 내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는 고백입니다. 내 살과 내 피가, 내 살이 아니고 내 피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살이고 그리스도의 피인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부활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변모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은 이제 내 몸과 내 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로 삽니다. 그게 나에게 의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이제 이번 주 수요일에 있는 참회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기가 시작됩니다. 충만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시간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간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 앞에 다가온 사순절 동안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요즘 텐트 치며 야영하는 레저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텐트는 장막인데,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장 가까이 체험한 것을 기념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의식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풍요로운 요즘, 우리는 광야와 같은 삶의 조건을 일부러 조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한다는 조건을 다 갖추어 놓고 살면,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만족을 조장합니다. 참된 만족이 없으면서도 우리는 만족을 조장합니다. 특별히 세상에서 말하는 풍요로움을 통해서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마치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이렇게 만족을 조장합니다. “내가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영혼아 여러 해 쓸 문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2:18-19).

 

우리는 재물의 풍족함에 취해, 영혼의 빈곤함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며 삽니다. 이와 같았던 어리석은 부자에게 다음과 같은 선언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12:20-21).

 

재물에 집착할수록 영혼이 빈곤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사람의 속성 중 하나가 바로 만족이 없을 때 어딘가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하나님께 노출(올려드림)시켜 드리십시오. 밥도 좀 굶어보고, 잠도 좀 안 자보고, 가난한 자에게 가진 것을 일부러 나누어 주고 좀 빈털터리로 살아 보기도 하고, 자발적인가난에 한 번 처해 보십시오. 만족이 없으면서 애써 만족하는 것처럼 재물로서 만족을 조장하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만족이 없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삶을 주님께 노출(올려드림)시켜 보자는 겁니다. 즉 우리의 삶을 광야와 같은 삶으로 한 번 만들어 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지, 즉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족시키시는지 한 번 체험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순절기를 맞는 것은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의 심정으로,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 인도하심을 받을 때의 심정으로,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몸소 체험하겠다는 영적인 갈급함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사순절기 동안 여러분이 각자 치시게 될 텐트는 다르겠지만, 여러분이 만나게 될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사순절기가 눈 앞에 왔습니다. 텐트 치고 사순절기를 맞읍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갑시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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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