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20. 04:03

소알 밴댕이 소갈딱지의 최후

창세기 18

(창세기 19:15-26)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긴박성은 성경의 큰 주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급하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감추어져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긴박성을 동반합니다.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할 때도 그랬고, 예수님이 이어서 천국을 선포할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는 온통 긴박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발맞추어 긴박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동틀 때라는 시간 자체도 긴박성을 말해 줍니다. 사건은 두 다리 뻗고 잠든 한 밤 중에 일어나거나, 늘어지게 낮잠 자고 싶은 오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건은 늘 긴박성을 동반하고 일어납니다. 동틀 때, 천사들은 롯을 재촉합니다.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그런데 문제는 재촉하는 천사들이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입니다.

 

우선, 생명이 죽고 사는, 이렇게 긴박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결국 롯의 사위들은 롯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의 긴박성이 잘 전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소통의 실패입니다. 소통의 실패는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천사들은 재촉하는데, 롯은 지체합니다. 천사들의 긴박성이 롯에게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롯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님은 롯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강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천사들은 지체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을 강제로 이끌어 냅니다. 천사들은 그들을 일단 성밖으로 이끌어 낸 후,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하지만, 그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면 우리 인간 쪽에서의 책임적인 응답도 필요한 겁니다.

 

롯을 보면 그에게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황이 긴급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롯은 계속하여 자기 자신의 형편만 생각합니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을 받아 들고 거기에 온전히 순종하기 보다, 자신의 요구를 말합니다. 이것은 당대 의인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노아의 순종과 비교해 볼 때 너무도 차이가 나는 반응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는데, 롯은 방주를 지으라는 것도 아니고 산으로 도망치라는, 비교적 쉬운 명령인데도 불구하고 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롯에게 드리운 비극의 그림자들입니다.

 

롯이 천사들에게 부탁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그 성읍의 이름은 소알입니다. 소알의 뜻은 작다는 뜻입니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말이 그것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자가 작을 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사실 문자적으로 아무런 관련은 없습니다. 영어로 소알은 ‘zoar’로 표시합니다.

 

작은 도시 소알로 도피하고자 한 롯, ‘소알이라는 도시가 그의 마음을 나타내주는 그림언어(메타포)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드넓으신 은혜를 담아내기엔 얼마나 작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게 순종하지도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하여 롯을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천사들은 롯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롯이 소알에 도착할 때까지 소돔과 고모라에게 내릴 유황과 불을 잠시 유보합니다. 그리고 롯이 소알에 도착한 것을 확인 한 뒤 비로소 유황과 불을 내려 소돔과 고모라를 다 엎어 멸하십니다.

 

그런데 소알로 도피하던 중, 롯의 가족에게 비극이 발생합니다. 사실 이것은 예견된 일입니다. 본문에 나온 말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기둥이 되었더라”(26). 천사들이 이르기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롯과 그의 가족은 처음부터 천사들이 내리는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스스로 탈락하게 된 겁니다.

 

본문 마지막 절은 롯이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곳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29). 롯이 구원받은 것은 롯 자신 때문에 아니라,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감사드릴 일이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나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구원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주체적으로 응답하지 못하면 롯처럼 아무리 긴급한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지체하게됩니다. 그것 자체가 스스로의 인생에 비극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롯과 그의 가족은 천사들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이끌려 나오면서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겁니다. 욕심은 인간의 마음을 작게 만듭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혼동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올바른 선택하는 것을 가로 막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로 보전되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욕심으로 작아진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만으로 만족을 못합니다. 아니 그보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큰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그 작은 마음이 담아내지 못합니다. 담아내지 못하니까 결국 그 작은 마음이 담아낼 수 있는 분량의 탐욕스러운 작은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겠죠.

 

구원의 장소로 롯이 택한 곳이 소알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화적입니다. ‘작은 것이라는 뜻을 가진 소알로 목숨을 부지하러 달려가다 결국 작은 것에 대한 집착을 못 버리고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 그녀만이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지만, 그것은 롯과 그의 가족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렇게, 소알 밴댕이 소갈딱지의 최후는 비극적이고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밴댕이라는 물고기는 하도 성질이 급해서 사람에게 잡히자 마자 죽어버린답니다. 그만큼 속이 좁아서 스트레스를 받자마자 죽는 것이죠. 소갈딱지는 마음속의 속된 말인데, 밴댕이가 작은 물고기라 그 내장이 작은 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 속이 하늘처럼 드넓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지 못하면, 우리가 롯의 가족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그 최후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썩어져 갈지라도, 그 마음은 하늘을 담아낼 정도로 드넓도록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긴박성을 갖고 있습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긴박하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감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음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때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소알에서 있었던 롯의 가족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좀 길지만 중요한 말씀이니 그 말씀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17:28-33).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긴박하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작은 것에 집착하느라 작아져서 드넓은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담아내지 못하는 소알과 같은 밴댕이 소갈딱지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최후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최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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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