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2. 27. 06:22

소통 문제

창세기 17

(창세기 19:1-14)

 

2004년에 만들어진 <Crash>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인종과 계층 간의 차별, 즉 소통의 문제를 다룬 영화인데, 서로에 대한 편견 때문에 겪는 아픔 그리고 화해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 중에서 명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이란인 가게에 문이 고장 나서 그것을 고쳐주러 간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은 자물쇠는 고쳤지만 문 자체가 문제이니 문을 꼭 고치라고 일러줍니다. 하지만 이란인 가장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돈을 돌려 달라고 고함칩니다.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은 돈을 돌려 주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란인 가족의 가게는 강도를 맞고, 문을 고치지 않은 것 때문에 보험금 처리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가게가 털려 화가 난 이란인 가장은 화풀이를 하기 위해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그에게 총을 겨누며 강도 맞은 피해 보상을 하라며 윽박지릅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히스페닉 열쇠수리공의 어린 딸이 아빠를 향해서 뛰어듭니다. 동시에 이란인 가장은 방아쇠를 당깁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디오) www.youtube.com/watch?v=Tjct4zCo_Qg

 

다행히도 이란인 가장의 총에 들어있던 총알은 공포탄이었고, 열쇠수리공의 딸은 무사했습니다. 가게로 돌아간 이란인 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소녀는 나의 천사야.”

 

이것 외에도 제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백인 경찰에게 부당하게 검문을 당하며 치욕을 겪은 방송국 PD 흑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흑인 부인이 교통 사고를 당해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동차가 폭발하기 직전 본인을 구하러 온 경찰관이 바로 자신들을 욕보인 그 백인 경찰관이었습니다. 그 경찰관의 얼굴을 알아본 흑인 부인은 “no, not you”하면서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찰관에게 구조받기를 거부합니다. 백인 경찰관은 사력을 다해 흑인 부인을 설득해서 자동차가 폭파되기 일보 직전에 그녀를 구출합니다.

 

모두 소통의 문제 때문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아무리 사실을 말하고 도와주려고 해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오늘 말씀에는 크게 네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천사들, , 소돔사람들, 그리고 롯의 사위들입니다. 이들 간에 일어난 소통의 문제를 하나씩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천사들과 롯 사이에는 소통이 잘 되는 듯 합니다.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있었다는 것은 소돔 사회에서의 롯의 사회적 위치를 말해줍니다. 성문은 장로들과 공직자들이 앉아서 법적인 문제를 논하거나 판결하는 장소였습니다. 롯이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소돔의 지도자 그룹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은 소돔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영접합니다. 롯이 그들을 어떻게 알아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들을 알아본 것과 똑같이 롯도 그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극진히 영접했습니다. 뭔가 좀 특별한 기운이 그들에게서 나왔던 것 같습니다.

 

롯이 두 천사를 영접한 소식이 소돔사회에 금방 번져나갔나 봅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무섭게 소돔지역 사방에서 노소를 불문하고 롯의 집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롯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합니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5). 여기서 상관하다라는 말은 그들과 성관계를 갖겠다는 뜻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소통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소돔사람들과 천사들 간의 소통의 문제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니까, 결국 소돔사람들과 하나님 간의 소통의 문제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 땅에 천사들을 보내신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을 멸하시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소돔사람들이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면 소돔 땅에 도착한 천사들을 그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이들이 롯에게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그들과 관계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소통을 거부한 처사입니다.

 

둘째는 소돔사람들과 롯 간의 소통의 문제입니다. 롯은 두 천사를 내놓으라는 소돔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롯은 두 천사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그들을 윤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합니다.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7-8). 롯은 소돔사람들과 소통을 해보려고 그들을 형제들아라고까지 부르며 적극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나, 롯의 그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소돔사람들이 롯을 다음과 같이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너는 물러나라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9a).

 

문제가 발생하니, 평소에는 모르던 것이 드러납니다. 롯은 소돔사람들을 형제라고 불렀는데 반해, 소돔사람들은 롯을 거류민으로 불렀습니다. 롯의 노력과는 달리, 소돔사람들은 롯을 자신들의 공동체 안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죠. 서로 간에 소통이 안 된 겁니다. 지금 소돔사람들은 롯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어느 설문 조사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뭔데 그러세요?”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선생님들은 허무해집니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에게 자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닌 것이라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롯은 평소 소돔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을 형제로 생각했는데, 지금 소돔사람들은 롯을 이방인 취급하는 겁니다.

 

이렇게 소통이 부재하니, 폭력사태가 발생합니다. 소통이 부재하고, 관계가 상대화 되면 거기에는 어김 없이 폭력이 발생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폭력을 행사하려면 일단 소통의 부재를 내세워야 하고, 상대방을 상대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명한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소통이 잘 되는 상태를 나와 너의 관계로, 소통이 잘 안 되는 상태를 나와 그것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소통이 잘 되는 나와 너의 관계에서는 절대로 상대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나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나와 그것의 관계로 서로의 관계가 상대화되면 거기에는 각종 폭력이 난무하게 됩니다.

 

롯과의 관계를 상대화시킨 소돔사람들은 자신들의 욕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끝내 폭력을 휘두릅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9b). 이런 상황에서 만약 두 천사의 개입이 없었다면 롯은 큰 화를 당했을 겁니다.

 

상황이 다급해진 두 천사는 자신들이 이곳 소돔 땅에 온 이유를 롯에게 알립니다.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13). 그리고 천사들은 롯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립니다.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12).

 

이 말을 들은 롯은 다급한 마음에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빨리 일어나 소돔땅을 떠나라고 일러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번 소통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위들이 장인의 말에 순종하여 다급하게 그 자리를 떠났어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그와 반대의 행동을 전합니다.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4b).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이것은 롯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 때문입니다. 롯은 소돔사람들에게서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을 합니다. 천사들과 상관하리라고 성내며 달려드는 소돔사람들에게 천사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두 딸을 내놓으려고 합니다. 롯의 집에 손님으로 들어온 천사들을 보호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혼을 앞 두고 있는 두 딸에게 험한 꼴을 당하게 하는 처사는 이해하기 힘든 겁니다.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두 딸을 내놓으려고 하는 롯의 모습을 예비 사위들이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장인 롯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위들이 장인 롯의 말을 믿지 않고, 농담으로 여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Crash>나 오늘 말씀이나, 소통의 문제 때문에 벌어진 참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픕니다.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서로를 상대화시키고, 서로에 대한 편견 때문에 차별이 발생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발생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의 그림자만 드리워집니다.

 

아무리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생명의 말씀은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소돔땅을 구원하러 간 것이지 멸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결국 소돔땅이 멸하게 된 이유는 소돔사람들이 천사들, 즉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장인 롯이 사위들에게 찾아가 구원 받을 방도에 대해서 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발생한 소통의 부재는 결국 사위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비극을 발생시킵니다. 이렇듯, 소통의 부재가 발생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소통이란 결국 상대방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기능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만약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저를 신뢰하지 못하고 저를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제가 전하는 말씀이 약장수의 허튼소리로만 들릴 뿐,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이 저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저를 신뢰하고 저를 마음으로 사랑하신다면, 제가 전하는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실 겁니다.

 

소통의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소통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에 따라서 생명을 보존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소통이 잘 될 수 있도록 평소에 주님을 가까이 해야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소통은 인격적인 사귐이 있을 때에만 잘 되는 법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사귐을 갖고 계십니까? 2천년 전,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셨을 때, 그리스도와의 소통에 성공한 자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와의 소통에 실패한 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통에 실패하여 멸망 받은 소돔사람들과 같이 되지 말고, 소통에 성공하여 구원 받은 롯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www.columbuskm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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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