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4. 3. 10. 05:02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향하여

( 2:15-17; 3:1-7)

 

지난 수요일, 참회의 수요일 (Ash Wednesday)을 시작으로 우리는 사순절에 들어섰습니다. 사순절은 40일을 의미합니다. 참회의 수요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주일은 빼고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여기서 중간중간 끼어 있는 주일40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식기도 할 때, 주일은 금식기도를 안 하는 것도 좋습니다. 금식기도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거나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절은 어떻게 정해지는지 아십니까? 춘분이 지나 오는 보름달 후 첫 번째 주일이 부활절 입니다. 춘분은 대개 3 21일쯤 됩니다. 그 후 보름달이 얼마나 빨리 뜨느냐에 따라서 부활절이 빨리 오느냐 좀 늦게 오느냐 결정되는 것이죠. 올해 같은 경우는 춘분인 3 21일을 지나, 보름달이 뜨는 날이 4 14일이기 때문에, 보름달이 뜬 그 날 이후 첫 번째로 맞는 주일이 4 20일이기 때문에 부활절이 4 20일로 정해진 것이죠. 이 법칙만 알면 매년 부활절이 언제인지 스스로 계산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참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광야에서 보낸 시간이 40년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셔서 금식하시며 하나님을 만난 기간이 40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마귀의 유혹이 왔습니다. 교회가 40일을 정해 사순절로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40일 간의 영적 훈련을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인류 최초의 유혹이 들어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고,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시는 부분을 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의 말씀만 읽었고, 복음서의 말씀은 대부분의 분들이 너무 잘 아시는 이야기라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창세기의 말씀과 복음서의 말씀이 엮여 선포될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복 주신 후 어떻게 우리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죄는 미스터리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떻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왜 죄가 당신의 창조세계에 들어오게 놓아두셨는지, 등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창세기가 이런 것들에게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약간의 이해를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창세기는 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들어온 것은 미스터리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미스터리는 신비인데, 이는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체가 아직 파악되지 않았고, 파악되어 가는 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비는 종말론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종말에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도 드러날 것이고, 죄의 신비도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현재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거나 등한히 할 것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그것에 대한 실체를 알아가도록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와 복음서의 이야기는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결론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정황은 이렇습니다. 우선 창세기에서 보면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를 꼬드겨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합니다. 뭔가 솔깃한 것을 인간에게 던져주어서 그것을 덥석 물게끔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가 제시하는 솔깃한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대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매력적인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일이었습니다.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이가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하며 꼬드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유혹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바로 이 마음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피조물로 살기보다 인간은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뭔가를 좀 아는 것처럼 살게 된다는 겁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입니다. ‘안다는 것은 히브리어의 야다라는 말인데, 부부관계에서 서로를 알듯이 훤히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우리의 인생이 불안하고 답답한 이유는 우리는 한치 앞도 우리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당이나 점집이 잘 되는 겁니다.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구와 앞날을 알려주는 무속의 기능이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 그들은 정말로 무엇인가를 알게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3:7a). 그런데 하나님처럼 되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낭만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첫 번째가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된 것인 것을 보면 말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이런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가 시장에 가서 거위 한 마리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다음날 거위가 낳은 알을 가져다가 요리 해 먹으려고 거위 집에 갔는데, 가서 보니 거위가 낳은 알이 그냥 알이 아니라 황금알이었습니다. 너무도 신난 농부는 아내를 불러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거위는 하루에 한 개씩 매일 아침 황금알을 낳았습니다. 그 덕분에 농부 부부는 점차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부 부부는 서로 말하기를, 하루에 한 개씩만 황금알을 낳으니까 감질 난다는 겁니다. 한꺼번에 많은 황금을 손에 넣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생각하기를 거위의 배를 가르면 거기에는 수 많은 황금이 들어 있을 거고, 그것을 차지하면 감질나게 하루에 한 개씩 황금알을 가질 필요 없이 한 번에 엄청난 부자가 될 거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 농부 부부는 칼을 가져다가 거위의 배를 가릅니다. 물론 거위는 죽었죠. 그러나 거위의 배를 들여다 보니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거위도 잃고, 황금도 못 찾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만 마음을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 은혜가 족합니다. 한 눈 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한 눈 팔게 하는 유혹들이 엄청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이 타락의 순간이고 죄악에 빠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스스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교만이 싹트는 순간인 것이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 이야기 나오는 사탄의 유혹도 매우 매력적입니다. 1.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2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천사들이 네가 땅에 닿기도 전에 너를 받들어 줄 것이다. 3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는 교만한 마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우쭐해지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의존해서, 그것으로 만족해서 산다는 뜻이지, 하나님처럼 스스로 복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유혹 받습니다. 스스로 대단한 존재가 된 양 행동하고 싶어 합니다. 뭔가를 아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인간이 되는 법, 그리고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는 것과 똑 같은 시험이 왔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남은 구원하면서 자신은 왜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하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습니다. 우리 상식에서도 십자가에서 핵폭발과 같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사건, 그리고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어가던 예수를 바라보면서 조롱하던 사람들이 알아듣고 볼 수 있도록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났으면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더 잘 믿었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신적인 힘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 인간의 무력한 죽음만이 십자가에 걸려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에 만족하는 법을 보여주신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굉장한 겁니다. 지식과 생명의 일치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을 통해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부끄러움(shame)’만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생명이 자꾸 일치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곤욕이고 아픔입니다.

 

일례로 노벨상의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통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자기가 발명한 다이나마이트가 새 문명을 건설해가는 어려운 공사에 이바지되는 것은 기뻤으나 전쟁에 이용되어 많은 사람을 죽이는 힘이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지식이 생명과 일치하지 못하고, 결국 생명을 헤치는 일에 쓰이는 것을 보고 절망한 것이죠.

 

우리는 내가 뭔가를 좀 아는 것을 가지고 삶을 꾸려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풍성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지 못할 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참된 지식, 지혜는 우리는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데, 우리가 가진 지식은 생명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 같아 당황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바로 이것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순종. 순종이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어쩐지 생명으로 나를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를 참된 생명 가운데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 그것이 순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순종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알량한 지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맡겼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그랬더니 거기에서 생명이 꽃처럼 피어났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태초의 인류 때부터 그런 일이 인류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지식과 생명의 일치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일이 참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지식과 생명의 일치를 향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터득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니리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4:1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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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