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16. 04:53

길이 참으라

(야고보서 5:7-11)

 

대림절은 기다림을 배우는 절기입니다. 무엇이든 재깍재깍 결과물이 있어야 하는 인스턴트 시대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덕목이 바로 기다림(인내)입니다. 이런 시대에 기다림을 인생의 가장 큰 틀로 설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기다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학생은 성적표, 또는 원하는 대학의 합격 소식을 기다리고, 젊은 숙녀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고, 젊은 청년은 신데렐라를 기다리고, 결혼한 부부는 자식의 탄생을 기다리고, 아이는 엄마의 젖을 기다리고, 아내는 퇴근해서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고(그 반대로 마찬가지입니다만), 부모는 밤늦게까지 안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립니다.

 

밤늦게까지 안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시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목은 <늦은 귀가>입니다. 제가 소시 적에 쓴 시입니다.

 

조심해서 다녀!

일찍 들어와!

 

매일 아침,

조심일찍을 강조하시는 어머니

 

나의 늦은 귀가에 어머니는

니가 늦게 들어오니까

간이 오그라 들었다 늘어났다 하잖아라고 꾸짖으신다

정말 그걸 느끼셨단다

  

조심일찍

어머니의 사랑의 열매

 

나는 오늘도

그 열매를 따먹지 못하고

어머니가 토해낸 그 열매의 씨앗을

어머니의 肝에 심어 놓았다

 

그런데 성경은 다른 기다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기다림만을 말합니다. 성경이 오직 이 기다림만을 말하고 있다는 뜻은 이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다림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5:7a).

 

야보고는 이것을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한다면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구절이 9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Don’t grumble against each other.” 원망(grumble)은 불평, 불만, 푸념 등을 말합니다. 우리가 원망(grumble)’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 원망하면 주님께 심판 받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원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기쁨 때문에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쁨은 두려움보다 강합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자,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억제하겠지만, 무엇이든지 억지로 강제로 하면 거기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힘든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교회 문턱 드나드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믿고 삶의 모습을 완전히 바꾼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를 믿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1. 주께서 강림하신다. 2. 주님은 심판주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우리의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원망하지 않는 삶이 그것입니다.

 

주께서 강림은 하시는데 심판주가 아니시면 그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심판주이시긴 한데 강림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면 그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심판주가 아니시거나 강림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정의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강림하실 뿐만 아니라,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정의를 세우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한다는 뜻은 우리가 죄를 정한다는 뜻이고, 우리가 정의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서 이것만큼 교만한 일도 없는 것입니다.

 

법정에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죄를 정하는 일은 판사가 하는 것입니다. 판사를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어떠한 행위를 죄다 아니다결정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판사를 무시한 죄로 법원경찰에게 끌려 나갑니다.

 

오늘 말씀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우리가 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욥기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욥의 인생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배웁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라.” 욥의 인생을 들여다 보면 그에게 닥친 괴로움, 자식이 죽고 재산을 잃고, 아내와 친구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그런 일들을 보면 주님께서는 무자비하시고 괴팍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욥이 그러한 괴로움을 당한 이유는 그의 삶이 불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기서의 결론은 그것이 아닙니다. 욥의 삶은 의로웠고,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 결말을 보게끔 해 준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기다림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다면, 욥의 삶은 불의한 삶으로 하나님은 무자비한 분으로 인식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욥은 기다림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회복했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온전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부당한 일을 당합니다. 그 반대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부당한 일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이 당한 일은 잘 기억하는데, 자신이 저지른 일은 잘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에게는 피해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의 신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피해자라고만 생각하지, 가해자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살면서 부당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것 때문에 스스로 정의를 세우려고 상대방을 향해 원망하지 말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그 부당한 일을 바로 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내가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나 스스로를 살펴 보라고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강림하셔서 내가 저지른 부당한 일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불평, 불만, 푸념을 늘어 놓지 마십시오. 우리가 성인군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윤리도덕적으로 그것이 안 좋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심판주이신 우리 주님께서 곧 강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인내)은 주님의 강림에 대한 기다림이요, 그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기다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길이 참으십시오. 억지로 고통 가운데 참지 마시고, 기쁨으로 참으십시오. 주께서 곧 강림하십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2) 2013.12.22
약속이니까 아프다  (0) 2013.12.19
왜 회개해야 하는가?  (1) 2013.12.09
엘샤다이  (3) 2013.12.05
깨어 있으라  (2) 2013.12.02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9. 00:37

왜 회개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3:1-12)

 

요한만큼 사명이 확실한 나실인을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4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기 전, 세례 요한이 먼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누가복음은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을 적어 놓았는데, 그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의 만남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사갸랴의 집에 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만납니다. 그 만남을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1:41).

 

요한과 예수님은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복중에 있던 요한은 이제 겨우 잉태된 예수님을 만나자 어떠한 반응을 했습니다. 시작부터, 아니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요한을 준비하셨던 것이죠.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나실인으로 태어난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와 있듯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2).

 

그런데 다음 구절을 보면 조금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면서 천국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인물에 대해서 소개를 합니다. 요한의 소개를 직접 들어 봅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

 

요한은 천국을 장소적 개념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어떠한 인물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오기로 예언된 자이고, 그를 일컬어 주님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가는 것에만 초점을 둡니다. 천국만 갈 수 있다면, 그것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처든 공자든 알라든, 또는 돈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무엇으로든 천국을 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생각에 제동을 겁니다. 요한은 천국을 장소의 개념으로 전달하지 않고, 한 인물에 집중시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이 사실에만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요한의 행색에 대해서 나오는데, 가히 기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4). 뭔가에 집중한 사람의 인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어디에 집중시켜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기독교적인 용어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삶은 너저분하고 복잡합니다. 그러나 요한처럼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그 사명을 위해서 사는 사람의 삶은 이토록 심플합니다. 받은 사명을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나실인으로서, 자신의 사명에 집중하면서 살았던 요한은 모든 에너지를 모아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7-10).

 

지금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은 요한이 외치고 있는 이 말씀에 아무런 감흥이 없으시겠지만, 만약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직접적으로 외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시는 분이 있으시거나 돌을 들고 저한테 던지려고 흥분하신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이 말이 그렇게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불편한 말입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니리”(4:5). 복음서는 요한을 말라기서에서 예언한 엘리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엘리야처럼 유대 광야에서전파합니다. 우리가 열왕기서에 등장하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듯이, 엘리야가 아합 왕조를 향해 불 같은 메시지를 전했을 때, 엘리야는 곧바로 아합 왕의 아내, 왕비 이세벨의 살해 위협을 받고 광야로 도망칩니다. 지금 요한의 선포가 엘리야의 선포와 다르지 않고, 요한 또한 목숨을 내 놓고 이 말씀을 외치고 있는 중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요한의 외침이 한 사람에게 모아진다는 겁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면서 한 사람에게 우리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요한의 행동이 참으로 특이한 겁니다. 요한은 요단 강에서 물로 세계를 베풀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2).

 

우리는 물로 몸을 씻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목적과 이유입니다. 회개란 깨끗해지는 겁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물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말하길 자신은 물로 깨끗하게 하지만, 자신보다 능력이 많으신 는 불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불도 물처럼 깨끗하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은 물보다 위험합니다.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물을 사용하는 사람은 있어도, 불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요한의 세례는 준비의 세례입니다. 오고 있는 천국에 대한 준비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심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그 천국을 맞을 준비를 한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가까이 온 천국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된 자들에게는 두려운 소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회개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선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요한이 말하는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인물의 개념이었습니다. 요한에게서 천국은 내 뒤에 오시는 이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천국을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믿고 천국 간다라고만 생각하지, 예수 그리스도가 곧 천국이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내가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임한 천국인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에 있습니다. 천국을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의 회개와 당장의 합당한 열매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천국 가는 것을 어떠한 보상으로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천국 가는 것을 예수 믿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천국은 예수를 잘 믿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 걸려 넘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을 보상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예수님과 거래를 할 뿐입니다. ‘내가 당신한테 잘 보일 테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나를 꼭 천국 보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으로 이미 이 땅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중요한 것이지, ‘천국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만약 지옥에 계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에 가겠다!’

 

요한이 소개하는 천국, 천국으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주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2). 회개한다는 것은 심판주로 오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탕자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방향을 틀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듯이, 우리의 삶 자체를 그리스도에게로 트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왜 회개해야 하냐면,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와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친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친구를 심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친구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친구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귐을 갖는다면, 친구라면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친구 사이는 정죄하는 사이가 아니라 용서하는 사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지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그래야 물이 아니라 불로 하시는 심판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질 때, 그리스도에게로 우리의 방향을 틀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우리를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구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덮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 하십시오. 천국이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 하십시오. 천국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십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약속이니까 아프다  (0) 2013.12.19
길이 참으라  (0) 2013.12.16
엘샤다이  (3) 2013.12.05
깨어 있으라  (2) 2013.12.02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이유  (2) 2013.11.2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5. 06:41

엘샤다이

창세기 13

(창세기 17:1-14)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한 말인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살면서 이민자로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언어의 문제입니다. 영어가 한국말처럼 편하지 않다 보니 당하는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단순한 소통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미국 땅에서의 존재 자체가 여러 가지로 힘듭니다. 그 이유는 영어가 우리의 존재를 나타내주는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의 존재는 달라집니다. 만약 우리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다면 지금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살아가겠죠.

 

영어니 한국어니, 이러한 언어뿐만이 아니라, 언어에는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쓰는 언어가 있고, 부모자식 간에 쓰는 언어가 있고, 친구 간에 쓰는 언어가 있고, 비즈니스 사장과 고객 간에 쓰는 언어가 있습니다. 발음과 발성은 같지만 언어를 통한 관계나 친밀감은 너무도 다릅니다. 또한 법조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의료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정치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언론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경제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고, 종교계에서 쓰는 언어가 있습니다. 어느 분야 등 그 분야에 흥미를 느끼고 그 분야의 흐름을 따라가려면 그 분야에서 소통되는 언어를 반드시 익혀야 합니다.

 

이렇듯, 교회에는 교회만의 독특한 언어가 존재합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뜻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맺으려면 그분과 소통할 수 있는 고유한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 언어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세계는 매우 독특한 세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서 울고 웃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라는 존재가 만들어가는 세계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 세 존재는 매우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상, 우리 자신(인간)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우리의 존재를 지탱해 주는 자연,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은 매우 필수적입니다.

 

철학은 인간에 대하여, 과학은 자연에 대하여, 그리고 신학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세 가지 분야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자연과 하나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하여 말하려면 자연과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 하고, 자연에 대해서 말하려면 인간과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면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개념인 삼위일체의 개념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종교를 갖는다는 것, 특별히 우리처럼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이는 것처럼 배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키워드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부분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1).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샤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교회의 언어, 예수 그리스도와 소통하기 위하여 배워야 하는 언어는 바로 엘샤다이입니다. 이 언어를 배운다면, 우리는 좀 더 하나님을 잘 이해하게 되고, 소통이 잘 될 것입니다.

 

도대체 전능한(Almighty)’는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일단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능한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죠. 일반적으로 전능한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형상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이라는 의미가 떠오르면서 수퍼맨같은 형상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인간이나 자연과의 관계에서 한 번 생각해 보면, 전능한 존재는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이고, 자연법칙과는 상관없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수퍼맨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죠. 수퍼맨은 연약한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르고,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 다닐 수 있습니다. , 자연계에서 말하는 중력의 법칙 같은 거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수퍼맨과 같은 존재일까요? 만약 수퍼맨과 같은 존재가 이 땅에 있다면 그는 하나님으로 숭배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러한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들립니다. 100세 노인에게 자손을 약속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자연법칙에 의하면, 100세 노인은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남자 노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 노인에게는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자에게는 폐경기라는 것이 있어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더 이상 난자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자연법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노인들에게 자식을 낳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며, 아브라함과 사라와 언약을 맺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니까 그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을 오해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상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런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과 자연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법칙들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법칙입니다. 인간은 새처럼 날 수 없습니다. 땅을 걸어 다녀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법칙입니다. 인간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더 이상 자식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법칙입니다. 과학자들이 자연을 관찰해 알아낸 자연법칙들이 즐비합니다. 그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장난꾸러기 마법사가 아닙니다. 자신의 만든 법칙을 어겨가며, 당신께서 만드신 피조물들(인간과 자연)을 골탕 먹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리 말했다, 저리 말했다, 요리조리 자기가 유리한대로 말을 바꾸시는 사기꾼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당신이 하신 말과 법칙은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행하는 자를 틀림없이 징벌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심판이라는 말이 무서운 것이고,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후반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다라는 뜻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정한 말과 법칙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지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의 법칙과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례를 똑바로 알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뜨거운 불에 손을 대면 살이 탑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입니다. 그러니 뜨거운 불을 가까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뜨거운 불에 손을 댄 자의 살을 태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면 인간은 새처럼 날 수 없기 때문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거나, 높은 곳을 가야 할 일이 있다면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린 자가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그 자를 죽이실 것입니다. 운전할 때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질서를 잘 지키며 안전운행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대신 운전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 놓고 신호등을 어겨가며 과속하는 자가 있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교통사고 나게 하실 것입니다. 인간은 식사를 불규칙하게 하고, 잠을 충분히 안 자고, 정기적으로 적당한 운동을 해주지 않으면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아무거나 막 먹고, 잠도 충분히 안 자고, 꼼지락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교회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기필코 건강을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라고 밝히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좀 되시는지요? 이것은 하나님 당신께서 만드신 자연법칙을 깨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과 당신이 정하신 법칙은 꼭 이루어진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언뜻 보기에 자연법칙이 깨지는 것 같은 역사를 행하실 때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새로운 창조를 행하실 때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불러 언약을 맺으시는 것은 당신이 정하신 자연법칙을 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만드시는 거라는 겁니다. 기존에 하나님 당신께서 이미 정하신 법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새로운 창조 활동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지금 맺고 있는 언약은 창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므로 창조를 거스르는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 창조의 사건을 넘어서는 새창조의 사역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창조를 넘어서는 새창조의 사역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발견합니다. 십자가 처형으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창조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사건은 창조를 넘어서는 새창조의 사건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구원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께서 하신 말과 당신께서 정하신 법칙을 철저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능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께서 정하신 법칙을 철저하게 지켜주시기 때문에 이렇게 숨쉬고 사는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자연계의 혼란으로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전능하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뜻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할례언약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셨습니다. 언약하신 대로, 아브라함은 만국의 아버지가 되었고, 사라는 만국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주시고, 야곱을 주시고, 그 후 열 두 명의 아들을 통하여 하늘의 뭇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인 자손을 번창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를 새로운 피조물, 즉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체로의 새창조를 약속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뜻은 꼭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체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거라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믿으시는 자는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해지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배운 언어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더 가까워지셨기를 바랍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이 참으라  (0) 2013.12.16
왜 회개해야 하는가?  (1) 2013.12.09
깨어 있으라  (2) 2013.12.02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이유  (2) 2013.11.25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  (0) 2013.11.1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2. 2. 11:02

깨어 있으라

(마태복음 24:36-44)

 

우리는 인간으로서는 달력을 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교회력을 삽니다. 세상 달력은 12월을 맞았지만, 교회달력은 대림절을 맞았습니다. 대림절(Advent)는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는 절기입니다.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정신 차리게 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릴 대()와 임할 임()으로 구성된 말로, ‘임하는 것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어로 표현되는 Advent의 뜻을 다 담고 있지는 못합니다. Advent의 기본적인 뜻은, ‘뜻하지 않은 시간에 있는 하나님의 개입(역사)’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4).

 

2천 년 전 유대땅 베들레헴에 생각하지 않은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 가운데 생각하시고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역사를 당신의 때에 이루십니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것을 참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직성이 풀립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고, 생각지 못한 때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은총 받은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시험대에 올라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어느 날에 우리 주가 임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때문입니다(42).

 

예수 그리스도가 2천 년 전에 유대땅 베들레헴에 오신 것은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야의 도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2천년 전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은 그것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일컬어 언약이라고 합니다. 사실 성경 자체의 뜻이 언약입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하는 것이 옛언약’, ‘새언약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진술은 매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꼭 이루시는 분인데, 그분의 백성은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립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는 약속의 종교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기다림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를 보면, “삐삐(호출기)”가 등장합니다. 요즘에는 쓰지 않는 전자기기인데, 그 당시 삐삐(호출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누군가 호출하면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 호출한 사람과 연락을 취하는 형태의 전자기기입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공중전화가 가장 잘 되던 시절이었는데, 삐삐를 차고 다니다 호출이 들어오면 공중전화에 줄을 서 연락을 취하곤 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호출기를 지니고 다녔던 시절이라 공중전화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앞사람이 너무 오래 통화하면 뒷사람들의 원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통화를 길게 하는 앞사람과 그것을 기다리던 사람 간에 시비가 붙어 칼부림까지 나서 사람이 죽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기다리는 것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발전된 전자기기가 핸드폰입니다. 핸드폰의 보급으로 삐삐와 공중전화가 사라지고, 그만큼 인간사회가 편리해지긴 했지만, 인간은 더욱더 조급한 존재가 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터넷을 보급을 통해 우편물 또한 감소했습니다. 옛날에는 손으로 손수 쓴 편지를 상대방에게 부치고,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설레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설렘은 없습니다. 전하고 싶은 소식이 있으면 이메일로 전하거나, 간단한 것은 핸드폰의 메시지 기능 또는 카톡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늦게 오면 짜증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지금 시대는 기다림의 미덕이 없어지고, 온통 짜증만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대림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시대에 뒤쳐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의 뜻즉시알기 위하여 신접한 사람인 무당을 찾아가거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일컬어지는 성경을 쥐 잡듯이 뒤지거나 게임 하듯이 펼치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자신의 조급한 욕망을 채우려는 종교적 열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으시는 분입니다. 언제나 예기치 않은 때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역사,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 가운데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성취를 볼 수 없습니다. 욕망을 내려놓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에 기대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림절을 맞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갑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시간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시간의 끝은 그저 죽음뿐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생각은 허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이긴 새로운 생명, 즉 부활생명이 시간의 끝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대림절은 이것을 더욱 붙드는 절기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시간의 끝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2천 년 전에 유대땅에서 일어난 부활이 완성되는 시간입니다. 2천 년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부활이 일어났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는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이 일어납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이들을 당신처럼 부활의 몸을 입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시간의 끝,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거나 살지 않습니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이유는 한양에 과거시험 보러 간 이도령이 꼭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춘향이에게 이러한 믿음과 기다림이 없었다면, 춘향이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변사또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춘향이는 목적의식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고, 꼭 돌아올 이도령을 맞이할 몸과 마음을 유지했던 것이죠.

 

목적의식을 대림절의 용어로 바꾸면, ‘희망라고 합니다. 춘향이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좀 더 넓은 개념에서 말하자면, 우리의 희망은 ‘Advent’입니다.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은혜가 곧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지만,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절망의 순간 순간에 뜻하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정신이 번쩍 나는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에 우리 주가 임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노아의 방주 사건을 예로 듭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하지 않은 임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의 뜻하지 않은 임재를 준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 노아는 구원 받았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 외 모든 사람은 갑작스럽게 임한 홍수에 휩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 정황을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40-41).

 

이것은 누구는 구원 받고 누구는 구원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를 겁주는 말씀도 아닙니다. 약속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꼭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처럼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처럼, 뜻하지 않은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모순되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꼭 다시 오십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 즉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즉 뜻하지 않은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사실은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과 인내 없이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거라는 약속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인내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그분의 얼굴을 기쁜 낯으로 바라 볼 수 있게끔 성결하게 사시겠습니까?

 

우리의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러니 사시는 동안 너무 걱정 근심 가운데 살지 마십시오. 희망 가운데 용서하고 내려놓고, 화평 가운데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바로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25. 15:12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이유

(골로새서 1:15-20)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기도 하지만,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입니다. 또한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대림절(대강절)로 시작되는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됩니다. 교회에서 교회력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력은 온통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집중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서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여러분은 왜 감사하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입술에서 감사의 언어가 흘러나오게 합니까? 우리가 감사하는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는 쉽게 우리가 부자인 것(잘 먹고 잘 사는 것), 우리가 건강한 것, 우리의 어떠한 모습이 잘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들을 가능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그러한 감사의 고백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정말 감사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왕 또는 왕권은 다스림을 말합니다. 왕권은 다스리는 권세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라는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왕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의미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왕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대부분 권력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서 권력이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역사에서 패권을 차지하려고 했던 모든 영웅들은 권력을 손에 거머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꿈을 꾸며 이 세상의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왕권을 차지하려고 하는 경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민주적이라는 단어로 조금 세련되게 포장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에 대한 세속적 이미지가 그리스도의 왕권을 흐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권도 세속적인 왕권처럼 그 아래 있는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패권 정도로 생각하게 끔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권은 세상에서 말하는 왕권과는 근본적으로,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의 왕권은 우리의 삶을 피폐시키고 멸망시키고 종속시킬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는 구원하는 왕권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는 섬김의 왕권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왕권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권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이 세상에서 왕권을 주장하는 것들을 짚어 보면, 정치인들, , 죽음 정도로 추려낼 수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서 깊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러한 것들이 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지 우리는 압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백성을 기만하기 일쑤입니다. 그들이 하는 정치적 공약은 모두 장밋빛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어 표를 모아 권력을 쟁취하려는 술수에 불과합니다. 일단 당선되고 나면 정치적 공약은 휴지통에 버려지기 일쑤입니다. 공약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쁩니다.

 

이 시대에 왕권을 가진 것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돈입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팽배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좀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맞지만,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돈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들은 절대로 돈 주고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값비싼 건강보험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 자체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으리으리한 집과 최신형 좋은 차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의료서비스를 그때그때 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연장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풀 수 없는 죽음의 문제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류가 이 땅에서 살아온 이래로 가장 치열하게 싸워온 문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둘러 싸고 철학이 발달되어 왔고, 이것을 둘러 싸고 의학과 과학기술이 발달되어 왔습니다.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죽음을 막아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눈물 겹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이 가장 작고 초라해지는 순간은 죽음 앞에 섰을 때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이 밀려올 때 그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방도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왕권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왕권을 만납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왜 그리스도가 왕이신지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만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그에 대한 답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15).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그리스도는 보이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고 정확하게 만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은 하나님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와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그는(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15b-16a). 초대 교회 성도들(사도들)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의 부활체험 때문입니다. 예수의 부활체험을 통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창조의 중재자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구원을 가져다 주는 존재 일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의 창조자로 인식된 것이죠.

 

셋째, 그리스도가 세상을 창조한 분이기 때문에, 그는 세상의 주권자로 받아들여 집니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6). 보이는 것들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나, 보이지 않는 것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생명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생명현상만 볼 뿐이지, 생명 자체를 보지는 못합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죽음현상만 볼 뿐이지, 죽음 자체를 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또는 죽음의 근원)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시고 이 세상 모든 것(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의 주권자시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하시는 일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9-20).

 

이 세상의 왕권은 우리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은 화평을 이루는 왕권,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왕권, 즉 우리를 구원하는 왕권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진정한 섬김의 왕권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사도들)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과 같은 것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패권은 로마 황제가 쥐고 있었는데, 로마 황제는 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숭배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부활의 예수를 만난 뒤, 스스로를 신이라 하며 자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황제를 왕으로 모실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통하여 그들은 어떤 왕이 참된 왕인지, 뼈 속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감사의 이유는 놓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려드리는 감사의 이유를 면밀히 살펴보면 참으로 세속적입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 때문에, 건강한 것 때문에, 자식이 잘 된 것 때문에, 또는 하늘이 맑은 것 때문에 감사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즉 가난해지거나 건강을 잃거나 자식이 속 썩이거나 또는 하늘이 흐리면 감사할 이유가 없어져 하나님을 섬길 이유가 없는 것처럼 감사의 이유를 세상적인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추수감사주일과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을 맞아,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신 것에 감사하십시오. 이 세상의 그 어떤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선포하고, 그분의 다스리심만을 받으며 사십시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바로 그리스도께만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평을 이루는 참된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이시요 창조주이시요 모든 만물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신 것을 감사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샤다이  (3) 2013.12.05
깨어 있으라  (2) 2013.12.02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  (0) 2013.11.18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2) 2013.11.10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니까, 괜찮아!  (2) 2013.10.31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18. 05:12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

(27:13-26)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서의 재판을 모두 바친 사도 바울은 지금 가이사에게 상소한 까닭에 로마로 호송되고 있는 중입니다. 베스도 총독이나 아그립바 왕은 재판을 통해서 바울에게 아무런 혐의가 없음을 확인하고 그를 풀어주려고 했으나, 사도 바울이 자신의 억울함을 가이사(황제)에게 상소한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로마로 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도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이 숨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전부터 로마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로마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피력해 왔습니다. 시골 촌놈이 그 당시 세계 최고, 최대의 도시 로마에 한 번 구경 가고 싶다는 순진한 마음이 아니라, 로마를 발판 삼아 그 당시 땅끝이라고 여겨졌던 사바나(스페인)까지 선교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누구도 말리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유대 땅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가는 길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요즘 지중해라고 불리는 바다를 건너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배를 타고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중해에는 유로굴라라는 광풍이 때때로 부는 데, 그 광풍을 만나면 살아남기 힘들었습니다. 유대인의 절기로 대속죄일이 끝난 뒤에는 지중해에 유로굴라가 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울 일행이 지중해를 건너야 하는 시점에 대속죄일이 끝난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호송을 담당한 로마 황제 부대의 백부장에게 조언을 합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10).

 

그런데 백부장과 선장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정박하고 있는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편하게 겨울을 나고자 하는 인간의 얄팍한 심리가 앞에 놓여 있는 위험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불편한 것보다,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생명이 붙어 있으면 불편한 것을 견딜 수 있지만, 생명을 잃어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때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이렇게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이 생명에 맞춰져 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도로교통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몇 분 빨리 가려는 급한 마음에 과속하다가 사고 나기 일쑤입니다. 생명의 주님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든지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습관이 베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호송 당하고 있는 입장이라 어떤 권위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장과 백부장의 뜻대로 항해를 합니다. 물론 출발할 때 날씨가 안 좋았으면 달랐겠지만, 공교롭게도 출발 당시 남풍이 순하게 불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바울의 예상과 우려대로 광풍을 만납니다. 아찔한 순간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유로굴라 광풍 때문에 배는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상황이 악화되어 최후의 수단까지 진행해야 하는 순간이 옵니다. 즉 배에 있는 짐과 기구 모두를 바다에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안전, 생명을 위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가 풍랑을 견디지 못하면, 모두 물에 수장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수단을 강구하게 됩니다. 1972년 럭비 선수들과 그의 가족들을 실은 비행기 한 한대가 우루과이를 출발하여 안데스 산맥을 넘다가 추락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추락의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중에서 16명이 살아 남았습니다. 이들은 추위와 배고픔 가운데서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러다 72일만에 구출되는데, 구출된 후 그들의 증언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행한 마지막 수단은 먼저 죽은 친구와 가족의 인육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두 명의 청년이 안데스 산맥을 걸어서 넘어가 구조 요청하는 일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까지 모두 강구했는데도 불구하고, 풍랑이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하자 점점 삶에 대한 희망이 없어졌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20).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모든 물건을 바다 속으로 던져 넣는 바람에 먹을 것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멀미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정말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이 일어나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우선 아쉬운 마음을 전합니다.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21).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에게 핀잔을 주고 나무라는 말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입니다. , 지난 번에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이번에 자신이 하는 말은 꼭 들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에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22).

 

아무런 희망도 없이 구원의 여망마저희미해져 가던 풍랑을 만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바울의 이 메시지가 얼마나 위로됐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그들은 바울의 말에 희망을 걸었을 겁니다. 게다가 바울이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참으로 희망적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23-24).

 

풍랑 속에서 구원의 여망마저희미해져 가는 상황에서 바울도 두려웠을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겠죠. 바울도 아마 이렇게 죽는구나라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바울이 붙들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그렇습니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배를 타게 된 이유는 가이사 앞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울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살아남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로마서에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이 말은 이것을 뜻합니다. 사명자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겁니다. 사명자의 생명은 하나님께 드려진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하나님께서 사명자의 생명을 우리 자신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아무렇게나 생명을 거두어가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의 사명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 중 지금 현재 주어진 사명은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에게 그러한 사명이 없었다면 바울은 풍랑 속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주신 분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폭풍까지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당신이 바울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바울을 살려 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과 한 배를 탄 사람들의 입장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명자와 한 배를 탄 것만으로도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명자란 자신의 생명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 싼 이웃들의 생명까지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을 행하게 됩니다.

 

바울의 희망의 메시지대로 풍랑 속에서 표류하던 그들의 배는 어느 한 섬에 걸리게 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그들,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성경은 그들의 삶을 조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들의 삶을 추적해 보면, 그들 중 상당수는 사도 바울의 희망의 메시지로 인하여서 복음을 받아 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겁니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 봅시다. 나는 사명자인가?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신 사명자인가? 하나님께 생명이 드려진 사명자인가? 나의 생명은 누가 주관하고 있는가? 나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나는 사람을 살리는 사명자인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사명자인가? 물론 사람을 죽이는 사람을 일컬어 사명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만, 사명자(使命者)와 사명자(死命者)는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 죽을 위기에 처해져 있었는데, 살아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긴 사명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닫습니다. 또한 죽음 자체도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일례로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있습니다. 1889 10 2, 호주 빅토리아장로회 소속 데이비스 목사가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누이인 메리와 함께 한국 땅을 밟습니다. 데이비스는 다섯 달 동안 서울에서 한국말을 익힌 후 육로로 20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으나, 여행 도중 천연두에 걸려 도착 하루 만인 1890 4 5일에 게일 선교사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 허무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데이비스의 허무한 죽음의 소식을 접한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 교인들은 한국 선교를 더욱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로 결정하고 메케이(J.D. Mackay)목사 부부와 멘지스(B. Menzies), 페리(J. Perry), 포셋(M. Fawcett) 등을 부산에 파송합니다. 그리고 189110, 수정산 자락 좌천동에 선교부를 세우고 부산을 중심으로 경남지역 선교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 사명에 대한 일깨움을 줍니다.

 

네 사명이 너와 네 이웃을 살리리라!”라는 말씀,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십자가에서 완수하셨을 때,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는 역사가 있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구주가 되셨으며,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이제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받는다는 것, 사명자로 산다는 것은 내가 속한 모든 곳을 생명력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생명을 드린 사명자로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명을 통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이웃들에게 생명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1. 10. 23:34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살후 2:1-5, 13-17)

 

 

최근 뉴스 중 제 마음을 아프게 한 기사가 있습니다. <기러기 아빠의 유언>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53살 먹은 아빠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이유는 아내와 아들을 미국 유학 보내 놓고 한국에서 혼자 살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 기러기 아빠는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모든 분들한테 짐을 덜고자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00아 끝까지 책임 못 져서 미안하다. 아빠처럼 살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정말로 숨 막히는 세상이다. 아빠는 몸 건강, 정신 건강 모두 다 잃었다. 아무쪼록 모든 분께 죄송합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기러기 아빠의 장례식에 아내와 아들이 참석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비행기 삯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장례는 형제와 친척만 참석했다고 합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기러기 아빠가 아내와 아들을 유학 보낸 이유는 더 행복한 삶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참 비참합니다. 행복은 온데 간데 없고, 가슴 아픈 사연만 남았습니다. 아내 또한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미국에서 아들 뒷바라지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빠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낸 아들은 어떠한 정신적 외상을 입었을까요?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한들 아빠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각박합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들인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던 것 같습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할지 몰랐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격려의 편지를 써서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삶에 대한, 행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면, 위의 기러기 아빠를 통해서 보았듯이,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운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가슴 아픈 선택을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바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그릇된 행동을 낳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삶의 질을 망가뜨립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재림에 대한 오해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전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에 대해서 논하는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회에 부작용을 낳고 말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 몇몇이 사도 바울의 첫 번째 편지를 보고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오해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다시 오실 예수님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행동했던 그들의 마음도 이해할 만 합니다. 그들의 삶이 너무도 고단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인생살이의 고단함 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에서 오는 고단함이 컸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당시 예수를 믿는 잃은 크나큰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이 예수 믿는 것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어디를 가든 예수 믿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방해하는 것을 넘어, 종교적 또는 정치적인 탄압을 받았습니다. 종교적 또는 정치적 탄압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아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나, 목숨에 위협을 날마다 느끼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삶이 고단한 사람일수록 그 고단함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 법입니다. 병이 깊은 사람일수록 지푸라기라도 하나 잡고 싶은 심정에 그 병을 낫게 하는 약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아무리 혐오스러운 음식이라고 할지라도 먹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것이 고단하다 보니, 하루 빨리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삶을 고단하게 하는 불의한 세력들을 물리쳐 주길 바랐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재림이 지연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기독교가 안고 있는 크나큰 딜레마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24:34)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9:1)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증언과는 달리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됐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자신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소망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갈수록 이 세대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갔을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징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더 광신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에 매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고 그냥 생활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만 닥친 딜레마가 아닙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닥치는 딜레마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고 계십니까?

 

사실, 지금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전하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 다시 오시겠다는 예수님은 2천 년이 지나도 다시 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교회에서 종말, 재림등의 단어를 써가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기를 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오늘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의 증언을 우리 마음대로, 우리의 취향대로 골라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종말, 재림등의 언어는 사기꾼들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기독교의 언어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묵상이 필요한,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미래를 알려주는 중요한 언어입니다.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세계가 너무 깊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그 언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관심입니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가장 관심이 없는 부분이 예수님의 재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 잘 믿어 지금 여기에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예수의 재림이고 뭐고, 지금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예수가 다시 오든 말든 그것은 내 알 바 아니고, 그냥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숨통이나 좀 텄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숨통 트이는 데는 이 최고이니까, 돈이나 좀 잘 벌 수 있게 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더 이하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복음인 예수님의 재림은 묻혀 버린 시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재림의 문제로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크게 두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재림에 대한 징후에 대해서 미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의 재림이 있기 전에 배교하는 일이 있고 멸망의 아들이 먼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파악할만한 지혜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무엇이 배교이고, 누가 멸망의 아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내 교파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모두들 자기들은 정통이고, 다른 이들은 이단이라고 합니다. 자기들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지혜가 없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둘째,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합니다.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지 못하고, 자꾸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침반을 따라 가는 겁니다. 그런데 사막에서는 나침반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나타납니다. 그렇다 보니, 나침반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여 길을 나서게 됩니다. 물론 자기의 판단을 의지하면 속은 편할지 몰라도, 사막에서 자신의 판단을 의지하다가는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이처럼, 사막처럼 숨막히는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나침반, 즉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따라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숨막히는 세상,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정신 없이 살아갑니다. 개미 집단의 80%가 그냥 앞의 개미가 가는 대로 별생각 없이 그냥 따라 다니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개미보다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개미를 보면 우습게 생각하고 침 바른 손가락 끝으로 하찮게 죽여 버리지만, 생각해 보면 개미나 우리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왜요? 별 생각 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우리의 나침반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 숨막히는 세상에서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성경의 가르침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을 놓쳐 버리면 우리의 인생이 개미처럼 하찮은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재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의 증언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이 세상은 숨막히는 세상이 아니라, 위로와 소망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는 안타까운 삶이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저도 사도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여러분께 복을 빌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6-17).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31. 03:41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니까, 괜찮아!

창세기 12

(창세기 161-16절)

 

테네시 윌리암스(Tennessee Williams)는 그의 소설 유리동물원 (Glass Menageries)에서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냥꾼이고, 싸움꾼이고, 사랑꾼이다(We human beings are basically hunters, fighters, and lovers.)”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갈등과 노력과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그 자체로 괴로운 것이죠. 뭔가 견뎌 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을 두고 토마스 벅스톤(Thomas Buxto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평범한 재능과 비범한 인내가 있다면 얻지 못할 것이 없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가장 아쉬움이 남는 장면에서는 언제나 인내의 문제가 떠오릅니다. ‘그 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가진 삶의 한 부분이 떠오를 때마다 우리는 밤잠을 설치며, 후회합니다. 인내해야 하는 그 순간은 고달프지만, 인내의 열매는 매우 달콤합니다. 인내해야 하는 그 순간 인내하지 않고 포기하면 살 것 같지만, 결국 인내하지 못한 것 때문에 인생은 더 쓴 맛을 봐야 합니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아브라함)과 사래(사라)가 인내하지 못해서 생긴 인생의 굴곡.

 

그 전조는 15장에서 이미 드러납니다. 그 이전에 아브람이 목숨 걸고 조카 롯을 구해 온 이유도 아마 이런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자식이 없으니, 조카 롯에게라도 유업을 물려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늙어가는 아브람에게서 끊이질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는데 자식이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브람은 자신의 상속자로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지목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15:2).

 

이렇게 흔들리는 아브람의 믿음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자손에 대한 약속과 함께 횃불 언약을 세워주십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초조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초조함이 아내 사래에게도 당연히 전해졌겠죠. 금방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자녀에 대한 약속 성취가 지연되자, 이번에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흔들립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16:2).

 

사래는 후사가 아브람의 몸을 통해서 나와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래는 아브람의 종속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과 사래 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약속이지, 아브람에게서만 이루어지는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후사는 아브람의 몸을 통해서 나와야 하지만, 똑같이 사래의 몸을 통해서도 나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내하지 못하고 마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자꾸 다른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도 믿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과와 자기 합리화된 믿음의 결과는 매우 다릅니다. 믿음의 결과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만, 자기 합리화된 믿음의 결과는 볼썽사나운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말씀에서 봅니다.

 

사래의 생각대로 아브람은 사래의 몸종 하갈과 동침을 합니다. 그리고 하갈은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엉뚱하게 꼬여 돌아갑니다. 사래와 주종관계에 있었던 하갈이 임신을 못하는 자신의 주인을 업신여기기 시작합니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16:4b). 인간은 이렇게 자기가 좀 유리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생각하면, 생각이 비뚤어지지 시작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주 발생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조금만 지체 높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하나님이 된 양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사래는 자신의 몸종 하갈이 이렇게 나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관계에 금이 가면, 암투가 벌어지고 폭력이 그 자리에 들어섭니다. 예외 없습니다. 사래와 하갈 사이에도 폭력이 들어섭니다. 잘잘못을 가리기 힘든 상태가 됩니다. 진실은 없어지고, 진흙탕 개싸움만 남게 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16:6b). 좀 더 힘 센 위치에 있었던 사래가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미 관계는 금이 간 상태입니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관계에 금이 가는 폭력 사태가 벌어지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폭력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가장 나쁜 것이 폭력입니다. 폭력은 악의 대표적인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주님은 평화이신데, 어떻게 그 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 사이에 폭력이 들어설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평화 대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지닌 죄성(罪性)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한계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우리는 피흘리기까지 죄()과 싸워야 합니다. 이 말은 사랑과 평화로 폭력이 들어설 자리를 없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람 가정에 닥친 폭력 사태는 일차적으로 아브람과 사래가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주인이 인내하지 못하니, 종인 하갈도 인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하지 못한 아브람과 사래, 주종관계를 인내하지 못한 하갈. 인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인생은 이렇게 볼썽사납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은 폭력 사태에서 패자가 된 하갈에게 내린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 세상은 공중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사랑과 평화의 세상이 아니라, 폭력으로 얼룩진 죄악된 세상입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약자는 늘 내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약한 하갈이 힘이 센 사래에게 내몰렸듯이 말이죠.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아브람과 사래에게 집중합니다. 하갈에게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언뜻 보아도 아브람과 사래가 힘이 세고, 하갈은 힘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힘 센 것에 마음을 둡니다. 그리고 그것을 동경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서 장사를 합니다. 이 물건을 소유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힘 센 사람이 될 거라는 환상을 심어 줍니다. 드라마 같은 것도 재벌이나 부잣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 시청률이 높습니다. 가난하게 지지리궁상 떨면서 살다 죽은 이야기는 싫어합니다. 가난한 현실도 지긋지긋한데, TV에서까지 그러한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이 세상의 폭력의 희생자들이지, 폭력의 승리자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갈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힘이 약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폭력의 패배자, 폭력의 희생자, 약자였던 하갈은 힘 센 사래 앞에서 도망쳐 광야로 갑니다. 광야는 힘 센 자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 참 척박한 곳이지요. 어쩔 수 없이 그곳에 간 하갈은 술로 가는 길에 있던 샘 곁에서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갈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일이 발생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지 못해 일어난 폭력 사태로부터 비롯된 비극을 치유해 줍니다. 우선 갈리진 관계를 이어줍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16:9).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끊겨진 사래와의 관계를 다시 잇는 길은 원래의 관계였던 주종관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하갈의 비뚤어진 생각을 바로 잡아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주종관계의 회복을 말하지 않으시고, 하갈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십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사장이 되어야 인간이 존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업원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이 사장만 못한 것이 아닙니다.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더 존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부교역자이기 때문에 담임목사보다 존귀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기 때문에 존귀한 것이 아닙니다. 종이기 때문에 존귀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주종관계가 그 사람의 존귀함을 결정짓지 않습니다.

 

하갈이 다시 사래의 몸종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갈 자신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이르시기를 아들을 낳으면 이스마엘이라고 이름을 지어주라 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의 뜻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겁니다. 존엄성이 없는 자, 존재감이 없는 자는 그 누구도 그의 말에 그의 인생에 그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힘 없는 자의 고통에 누가 귀를 기울여 줍니까? 힘 없는 자가 죽어 나가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온통 힘 있는 자의 말에만, 힘 있는 자의 고통에만 귀를 기울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온통 힘 있는 자가 되려고 영혼까지도 팔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 없고 존재감 없는 하갈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갈의 독특한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 사람은 이제 이 세상 어떤 것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하려 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하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16:13).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우리는 이 세상의 폭력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냥 우리가 조용히 자기 할 일 하면서 먹고 사는 데만 신경 써서 그렇지, 어떤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의 악과 더불어 싸우겠다고 덤벼보십시오. 우리는 십중팔구 세상의 폭력에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또한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하고 소유해도, 우리는 그것을 한 순간에 모두 잃어버리는 폭력의 상황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을 일컬어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의 존귀함을 확인하려 드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라지고 없어지고 짊어지고 가지도 못할 유한한 것들에서 존귀함을 찾으려 든다면, 우리의 존귀함은 그것이 사라지는 그 순간 몽땅 사라지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갈이 자신의 존엄성을 사래와의 주종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들으심(또는 돌보심), 즉 하나님에게서 찾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놀라운 사건임을 우리는 꼭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갈은 더 이상 사래의 몸종으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존엄성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랬기 때문에 하갈은 다시 사래의 몸종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갈은 자신을 향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니까, 괜찮아!(이스마엘)" 물론 이스마엘을 품고 있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면서 말했겠죠.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28. 04:38

이것밖에 드릴 것이 별로 없어요

(마가복음 12:41-44)

 

성경 시대의 공간적 배경은 이스라엘 유대 땅(팔레스타인)이지만, 사회문화정치적 배경은 여러 문명이 섞여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 땅에 유대문화, 그리스문화 그리고 로마문화가 공존해 있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화폐 단위만 보아도 그 상황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달란트, 드라크마, 데나리온 등 우리에게 익숙한 화폐 단위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 화폐 단위는 각각 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반영한 화폐 단위입니다.

 

달란트는 유대인들의 화폐 단위입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인들의 화폐 단위입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인들의 화폐 단위 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등장하는 렙돈과 고드란트는 어느 나라의 화폐 단위일까요? 렙돈은 헬라인들의 화폐 단위이고, 고드란트는 로마인들의 화폐 단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과부는 두 렙돈을 성전 헌금함에 넣었는데, 이는 그 당시 유대땅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인들의 화폐가 아니라, 헬라인들의 화폐를 이용하여 헌금한 것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렙돈은 헬라의 화폐 단위 중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우리 나라 말로 이나 으로 번역하여 부를 수 있는 단위 입니다. 그러니까 과부가 성전의 헌금함에 넣은 돈은 두 전’, 또는 두 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화폐 단위를 이용하여 가치를 계산해 보면, 렙돈은 노동자 하루 품삯의 1/64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을 100불로 친다면, 렙돈은 약 1.5불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참 별 거 안 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헌금을 많이 한 부자를 칭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얼마 안 되는 헌금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교훈은 그 이전에 나오는 외식하는 자의 경고에 대한 말씀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긴 옷 입고 다니면서 눈에 남들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고, 눈에 잘 띄니까 사람들에게 인사 받게 되고, 또한 회당과 잔치 자리에 가면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기도할 때도 남들 눈을 의식하여 길게 기도합니다. 거룩함이나 사회적 책임 또는 기도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러한 것들을 이용해서 오직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에 비해, 가난한 과부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외적인 아름다움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움을 알아보시고,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칭찬하는 대신,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렙돈은 마카비 왕조 가운데 알렉산더 얀네우스 왕(기원전 103-76) 때 사용하던 돈입니다. 이 시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윗 왕국의 영화를 회복한 시절로 평가됩니다. 특별히 성전을 정화하여, ‘수전절의 기원을 만들기도 하죠. 수전절은 히브리말로 하누카라고 하는데, 그 뜻은 ‘dedication’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누카를 영어로 ‘Feast of Dedication’이라고 합니다. 마카비 왕조가 이방인들로부터 성전을 탈환하여, 다시 하나님께 올려드린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입니다. ‘는 닦을 ’, ‘은 전각 로서, 수전절은 <성전을 다시 고친 절기>라고 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다시 고쳤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수전절은 무너진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절기인 것이죠. 그러므로 가난한 과부가 성전에 와서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었다는 것은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헌금이었다는 겁니다. 그냥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외식하는 자들의 개념 없는 헌금과는 달리, 과부의 헌금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신앙의 회복의 소망이 담긴 소중한 헌금이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저는 이것을 기도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가난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고, 로마는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발돋움 하여 전 세계를 자신의 발 아래 둔 엄청난 힘을 지닌 나라였습니다. 그 엄청난 힘 앞에서 가난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로마 총독이 머무는 관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수도 없고, 칼과 방패를 들고 나가서 로마군과 싸울 수도 없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힘센 용병들을 고용할 수도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답답한 현실을 돌아보면서 다윗 왕과 같은 힘센 존재가 나타나서 그들을 그 답답한 현실에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 사상입니다. 메시아가 나타나서 다윗 왕처럼 주변 나라들을 다 굴복시키고 성전을 회복시키고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은 묘연해 보였습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로마 황제에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을만한 환경이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 간 것도 사실은 이해할 만 합니다.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자존심이라도 지켜야겠다는 마음이었겠죠. 그러나, 그러한 자존심마저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가난한 과부는 그저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담아 성전 헌금함에 두 렙돈의 헌금을 넣습니다. 정말 두 렙돈에는 하나님의 향한 겨자씨 같은 믿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죠. “이것밖에 드릴 것이 별로 없어요!”

 

우리의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십시오.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이 널려 있습니다. 우리가 나약하고 게을러서가 아니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지닌 한계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고픈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욕망을 담아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있고, 그러한 욕망을 담아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가 제작됩니다. 600만불의 사나이, 원더우먼, 쏘머즈 그리고 슈퍼맨 등의 드라마나 영화는 그러한 인간의 욕망이 담긴 제작물들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그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카지노나 복권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답답한 현실을 극복해 보려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답답한 현실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해도 별로 나아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은 점점 황폐해집니다.

 

우리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를 통해서, 답답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600만불의 사나이나, 원더우먼 또는 수퍼맨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한 마음이 담긴 기도에 있다는 겁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상황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일례로 최숙희 성도님이 지금 병원에 계신데, 목사로서 그분을 심방할 때마다 느끼는 좌절감은 그분을 위해서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가서 말동무나 조금 해드리고, 두 손 잡고 기도나 해드릴 뿐이지, 저는 그분의 병을 낫게 해줄 수도 없고 그분이 늙어서 죽어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습니다.

 

지난 주에는 이분께서 리헵을 받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는데, 자신이 젊었다 생각하는 사람들도 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계속 살겠다고 이러고 있으니인생을 오래 살고 보니까, 다 소용 없더라고요. 지난 날을 돌아보면 재밌는 일이 참 많았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욕심 부리면서 산 사람은 다 떠나고, 욕심 부리지 않고 산 사람들만 아직 살아 있더라고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이분을 위해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이분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변 사모님이 애기를 낳았습니다만, 애기는 낳는 사모님을 위해서 목사인 제가 해드릴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산통의 아픔은 그냥 변 사모님 자신이 겪어야 하는 것일 뿐,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요즘 김문규 권사님이 일하러 안델루시아라는 곳으로 가 계십니다. 지난 금요일 밤 830분쯤에 전화를 드렸는데, 김 권사님이 그러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좀 울적했는데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셨네요. 가족 떨어져서 먼 곳에 와 있는 것도 힘들고, 거기다가 찬바람까지 부니까 마음이 좀 울적하네요.’ 그러실 것 같아서 제가 전화를 드린 것입니다만, 그렇게 마음 울적해 하시는 김 권사님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제 마음을 울적하게 했습니다.

 

뉴스를 봐도, 거기에는 수많은 상처와 아픔이 생산되는 일들이 즐비합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 사건, 욕정 때문에 한 여인의 인생을 망가뜨린 사건, 남편의 외도 때문에 가슴 아픈 여인의 사건, 유괴, 납치, 강간, 살인 등의 일들을 통해 가슴 아픈 사람들에게 제가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또한 답답하게 돌아가는 정치 상황과 경제 상황을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때문에 제 자신이 초라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라는 겁니다. 기도는 일차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피조물과는 달리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탄식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탄식은 단순한 징징거림과 다릅니다. 징징거리는 것은 내 주변만 맴돌 뿐, 자기 연민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나 탄식은 나의 곤경, 또는 우리의 곤경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징징거림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지만, 탄식의 기도는 내적이든 외적이든 분명 어떠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별로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드리는 기도조차도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가치 밖에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탄식하는 마음으로, 겨자씨만한 믿음을 담아서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의 주님께서는 두 렙돈 만한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원래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누가 아파해도 대신 아플 수 없고, 누가 죽어가도 대신 죽을 수도 없습니다. 누가 아파도 그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없고, 누가 죽어가도 그 죽음을 막아 줄 수 없습니다. 지금 현재의 공간과 지금 현재의 시간에만 존재하는 우리는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서 고통 받으며 신음하는 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의 몸짓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비의 몸짓처럼 얼마나 보잘것없습니까? 그야말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같은 몸짓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가난한 과부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도 해주십니다.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현실이 답답하십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고 계십니까? 지금 바로,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그 두 렙돈 같은 기도에 '이것밖에 드릴 것이 별로 없어요'라는 겸손한 마음을 담아 주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인이시 우리 주님께서 두 렙돈 같은 여러분의 기도를 받으시고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21. 05:41

전도자의 직무

(딤후 3:14-4:5)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입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디모데를 만난 후, 사도 바울은 평생동안 디모데와 복음을 위하여 동고동락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이든 바울은 자신의 순교적 운명을 예감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목회자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남깁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교훈이라는 것, 즉 유언과도 같은 교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읽어 내려가면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 절절합니다.

 

그 중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익숙한 구절입니다. 특별히 이 구절이 그렇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6, 17).

 

우리는 오늘 말씀을 받아 들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를 다니면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신분증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전도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열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이상, 사람은 그 신분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입니다.

 

안데르센 동화 중에 <미운오리새끼>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이 동화는 <성냥팔이 소녀>와 함께 안데르센 자신의 불운한 어린 시절을 형상화시킨 동화로 유명합니다. 안데르센은 굉장히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 즉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난 뒤에, <미운오리새끼>에 등장하는 미운오리새끼가 사실은 오리가 아니라 백조인 것을 깨달은 후 하늘로 비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늘을 나는 동화작가가 되었습니다. <미운오리새끼>에서도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말썽꾸러기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백조처럼 우아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교회 다니는 이들은 자신이 그냥 교회만 들락날락 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 받은 전도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분도 아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색다른 존재감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과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듣는 설교가 재미 있으신가요? 재미가 없으신가요? 설교가 재미 없으신 분들은 성경 말씀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즘 메이저리그 포스트 시즌인데, 야구를 봐도 야구가 재미 없는 이유가 뭐죠? 야구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아야 재미있는 겁니다. 학창 시절에 수업 시간이 재미 없었던 이유가 뭐죠? 예습을 안 해 갔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좀 먼저 알고 있으면 재미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성경을 잘 알아야 하고, 우리가 누구인지 잘 알아 오늘 설교 제목처럼 전도자의 직무를 잘 감당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도 무슨 이유가 있으니까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직무를 잘 감당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이유는 41절 말씀을 살펴 보면 압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4:1)

 

이 말씀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교훈입니다. 살다 보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 없이 꼭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종말입니다. 개인의 삶에서는 죽음이 종말이겠지만,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가 종말입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되는 날이 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서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겁니다. 벌거벗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느냐, 부끄러움이 없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아니냐가 결정됩니다. 죄 짓기 전, 아담은 벌거벗고 있었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죄 지은 후, 아담은 자신의 벌거벗음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담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야 하는 이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고, 관심이 없고 몰라서 그렇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이야기. 하나님 나라가 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는 이야기.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우리가 좋던 싫던,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던 관심이 없던 과 상관 없이 꼭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도 말하고 있는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의 차이는 바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느냐, 무엇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최고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곧 이 세상이 어떠한 일이 닥칠 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차리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곧 일어날 일을 대비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서 삽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한데, 지금 당장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무슨 신경을 쓸 겨를이 있냐고 합니다. 그러나, ‘창수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만 일어납니다. 그리고 창수가 한 번 일어나면,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창수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창수가 바로 마지막 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날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 가운데는 먼저 죽음이라는 형태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사실 무의식 중에 죽음을 대비하면서 삽니다. 그에 대한 대비로, 좋은 배우자도 만나고, 재물도 쌓고, 자식도 낳아 키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서 하는 모든 행위는 은연 중에 죽음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준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그러한 것들은 죽음앞에서 굉장히 무력합니다. 배우자도, 재물도, 자식도, 내가 죽음을 맞이할 때, 결코 나와 함께 하지 못합니다. 그냥 우리는 그렇게 쓸쓸하게, 아무 것도 없이, 벌거벗긴 채로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무엇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벌거벗긴 채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나이 드는 것의 미덕>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이 드는 것의 미덕 중 첫 번째는 목표를 갖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매우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합니다만, 구원이란 지미 카터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것이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잘 지내는 법, 이웃과 잘 지내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의로운 자만이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잘 지내려면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이 성경에 있다는 겁니다. 또한 의로운 자란 하나님의 사람이고 온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는 능력을 지닌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잘 지내지 못하고, 이웃과 잘 지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온전하지 못하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쟤 좀 이상해!’ 이상한 사람과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습니까? 악한 일을 하는 사람과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전도자의 직무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고, 이웃과 잘 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잘 지내는 사람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섰을 때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웃과 잘 지내는 사람은 이웃과 얼굴을 맞대고 섰을 때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만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잘 지낼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가운데 처해져 있는 사람들을 성경을 통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4:3-4).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날이 꼭 오고야 말 것이라는 진리를 사람들은 잘 듣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지금 당장 눈에 앞에 보이는 쾌락이나,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닥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우리에게 임합니다. 일차적으로 인생 가운데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 전도자의 직무는 바로 그것을 대비하는 겁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 사도의 교훈을 들으십시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4:2).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10. 06:13

아브람의 승리 교회의 승리를 위하여

창세기 11

(창세기 14:1-23)

 

소돔 땅으로 간 롯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평화는 나 혼자만 평화롭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화롭게, 잘 살아보겠다고 소돔 땅으로 간 롯 개인은 평화로웠을지 모르지만, 그가 속한 공동체에 평화가 없었기 때문에 롯은 평화를 빼앗기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개인의 평화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평화는 더 중요합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 개개인이 노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공동체는 개인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평화로워도 개인이 괴로우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와 개인은 상호작용에 의해서 평화를 만들어 갑니다.

 

롯의 위기는 전쟁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번의 전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동방의 네 왕들과 서방의 다섯 왕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첫 번째 전쟁에서 동방의 네 왕들이 승리를 거둡니다. 그 결과 서방의 다섯 왕들은 동방의 네 왕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가 12년 동안 지속되다가, 13년째 되는 해에, 서방의 다섯 왕들이 배반합니다. 그 배반에 응징하기 위해서 동방의 네 왕들이 두 번째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에 맞서 서방의 다섯 왕들이 모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전쟁에서도 동방의 네 왕이 승리를 거둡니다. 승리한 동방의 네 왕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갑니다. 바로 그 때, 소돔에 살고 있었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포로로 끌려 갑니다.

 

어떤 사람(전쟁에서 도망한 자)에 의해서 이 소식이 아브람에게 전해집니다. 롯이 포로로 끌려 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군대를 소집하여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전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을 치르는 일은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큰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긴 쪽이 전리품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전리품이 전쟁의 상흔을 다 치유해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손자병법에서도 가장 좋은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아브람은 불가피하게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자신의 욕심을 따라 갔던 조카 롯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가는 사람은 자신 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도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나의 평화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욕심을 접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동방의 네 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아브람은 자신의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318명의 용사들, 그리고 자신과 동맹을 맺은 부족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 승리를 일구어 냅니다. 그리고 빼앗겼던 모든 재물과 특별히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 돌아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오늘 말씀에,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아브람 일행을 맞이한 자들이 등장합니다.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이 그들입니다. 이들이 아브람 일행을 맞이한 장소는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였습니다. 왕들이 왕의 골짜기에서 아브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 아브람의 위치가 왕의 반열에 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은 이렇게 존귀한 대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선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먼저 알현합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멜기세덱은 의로운 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멜기-, 세덱-의로운). 성경은 이 사람을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소개답게 아브람을 알현한 멜기세덱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송축하면서 아브람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19, 20).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아브람의 승리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 같으면 멜기세덱의 이 진술을 우습게 여겼을 겁니다. 목숨 내 놓고 뛰어든 전쟁인데, 그 공이 자신에게 오지 않고 하나님께 돌려진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었던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축복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 십일조는 아브람이 목숨 내놓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거둔 피값의 전리품 중 일부였습니다. 만일 아브람이 믿음 없는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멜기세덱에게 피값의 일부인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의 승리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했고,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의 개념이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십일조는 수입의 10분의 1을 정확히 떼서 드리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고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고백과 감사하는 마음 없이 수입의 10분의 1을 의무적으로 드린다면, 그것은 십일조 정신을 심각하게 헤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헌금을 세부화시켰습니다만, 그것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편의상 그런 것이지, 헌금의 정신 자체가 그렇게 세부화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헌금은 십일조 정신에서 비롯됩니다. 십일조 정신이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신앙고백과 감사의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요, 거룩한 헌금을 세속적으로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헌금은 불쌍한 사람 돕는 적선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송축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자, 즉 즐겨내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런 맥락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과의 은혜로운 만남에 이어, 소돔 왕과의 세속적인 만남이 이어집니다. 타락한 도시의 왕답게 소돔 왕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이름대로 아브람과 의로운 관계를 맺었다면, 소돔 왕은 아브람과 세속적 관계를 맺습니다. 그것은 소돔 왕의 요청에서 드러납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21). 이를 쉬운 성경으로 다시 옮겨보면 이런 겁니다. “사람은 나에게 주라! 그리고 너는 그 소유물을 너 자신을 위해서 취하라!”

 

아브람에게 더 많은 선물을 안겨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아브람이 목숨 걸고 되찾아온 사람과 재물 중, 사람은 자신에게 돌려달라는 소돔 왕의 요청입니다.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소돔 왕은 처음부터 아브람을 알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취하러 온 것이었다는 겁니다. 소돔 왕의 탐욕스러움이 아브람의 존귀함을 헤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것을 알았던 아브람은 소돔 왕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23).

 

만약 아브람이 소돔 왕의 말대로 사람은 돌려주고 재물을 취했다면, 나중에 소돔 왕은 우쭐대면서 아브람이 부자가 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떠벌리며 아브람의 명성에 먹칠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아브람에게 곤욕스러운 일들을 안겨주었을 겁니다. 아브람은 그러한 것을 미리 차단합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과의 예배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를 돕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이지 소돔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운 소돔 왕과 엮이지 않기 위해서 소돔 왕의 요청대로 사람뿐만이 아니라, 재물까지도 모두 돌려줍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의 행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소돔 왕의 요청대로 모든 것을 돌려주되, 아브람과 함께 목숨 내놓고 전쟁에 참여했던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은 제하고 돌려줍니다.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매우 공정하고 관대한 처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불필요하게 희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의란, 믿음이란 이렇게 나도 살고 주변 사람도 살리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믿음과 사랑과 의(윤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교회에 가장 요청되는 덕목입니다. 찬송가 600, <교회의 참된 터는>에서 고백되고 있듯이,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입니다. 우리 주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되어 나타난 하나님의 참된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는 하나님의 참된 계시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참된 터인 우리 주 예수 위에 세워지지 못하고, 세상의 욕망 위에 세워지는 듯한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모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데 무슨 몇 백억, 천억짜리 교회당 건물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데 누추하지 않을 만큼의 공간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만큼의 터를 세워나가는 지혜와 겸손 그리고 소박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아브람처럼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감사한 마음만이 우리의 삶에 자리 잡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아브람처럼 덕을 쌓는 교회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덕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덕망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가 가진 재물이나 지식 때문에 그렇게 덕망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것을 통해서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희생이란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이란 사랑 없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덕목입니다. 우리 교회 친교실에는 덕불고 필유린이라는 고사성어가 걸려 있습니다. 이는 덕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유는 그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얄팍한 종교적 욕망의 충족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셨다는 복음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지 않아도,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내어놓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희생없이 의로운 나라,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믿음의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더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즉 더 사랑하는 자가 더 희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롯이 삼촌 아브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더 사랑했습니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아브람은 롯을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전쟁을 일으켜 롯을 위험에서 건져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을 통하여 우리를 죄(죽음)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더 희생할 수 있게 됩니다. 솔로몬의 판결에서도 더 사랑하는 진짜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하듯이 더 사랑하는 자가 희생하는 법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덕을 쌓아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지체가 모여 교회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희생(사랑)을 통해 쌓는 덕이 교회를 교회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자기 자신을 내어놓으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시간, 물질, 마음을 빼앗지 마시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여러분의 시간, 물질, 마음을 내어놓으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9:24)는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아브람처럼 하나님 앞에서 공정하고 관대하게 처신하는 교회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의로움이란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는 자신의 교리나 신념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너무도 희생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의 바탕은 사랑이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심판이 아닙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정적입니다. 이 말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뜻입니다. 심판은 오직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십니다. 그때까지 교회는 판단하지 말고,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의로움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동맹부족의 젊은이들(아넬, 에스골, 마므레)을 희생시키지 않았습니다. 요즘 일어나는 종교전쟁이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 문제 등을 돌아볼 때, 우리는 우리의 의로움과 신념을 위해서 힘 없는 자들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차분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동성애를 옹호하자는 뜻이 아니라, 동성애가 잘못됐다는 신념 때문에 그들에게 불필요한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인 기독교 윤리는 사랑이 바탕 되어야지, 그 자리에 폭력이 들어서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아브람의 승리는 사랑(희생)과 믿음 그리고 도덕성(윤리, 의로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에 교회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도 다르지 않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교회의 승리를 위하여, 아브람의 승리를 은혜로 받으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 주의: 이 설교의 마지막 부분 중 동성애 문제를 거론한 것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님을 밝혀 둡니다. 동성애 문제에 대한 저의 개인적 입장을 듣고 싶으신 분은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할만큼 확실한 신학적 입장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 문제가 그렇게 저에게 영향을 끼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것밖에 드릴 것이 별로 없어요  (1) 2013.10.28
전도자의 직무  (0) 2013.10.21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가?  (0) 2013.10.06
신앙의 안전지대  (0) 2013.09.26
사래 사건  (0) 2013.09.19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10. 6. 23:09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가?

(고전 11:17-34)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으레 하는 성찬식이지만, 이렇게 성찬주일을 따로 떼서 제정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2천년 간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심각한 문제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분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할 교회가 교리적인 이유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분열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크게 볼 때, 주후 1054년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분리, 주후 1517년에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인한 개신교의 분리, 주후 1534년 영국 성공회의 분리 등 수많은 작고 큰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일치Unity’인데, 실제 우리가 행한 것은 분열이었습니다. 이러한 심각성을 인식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일치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다각도로 노력해 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세계성찬주일의 제정입니다. 1982년 페루의 수도 리마에 모였던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가톨릭과 정교회를 포함한 세계교회가 공감하는 성만찬 예식서를 채택하고, 성만찬을 통한 일치를 추구하며 이 날을 지키기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세계성찬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일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 단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일치라는 것을 산업화처럼 어떠한 규격으로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로보트가 아닙니다. 로보트는 프로그램밍을 통해서 똑 같은 생각과 똑 같은 행동을 하게 끔 만들 수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인간의 삶은 로보트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이루기 원하셨던 일치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아주 구체적인 것인데, 사랑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면 에로스의 사랑을 먼저 떠올립니다. 이것은 성애의 사랑인데, 에로스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결핍에서 오는 사랑을 말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무단히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에로스의 사랑은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자기중심적 사랑인 것이죠.

 

자기중심적 사랑은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을 채우고 나면 만족할 것 같지만, 결국 또 다른 결핍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은 평생 그 욕구를 채우다가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결국 이런 자기중심적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러한 에로스의 사랑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일컬어서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중심적 사랑인 에로스의 사랑과는 질적으로 다른 이타적인(타자 중심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에게 이러한 사랑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인간에게서 가능한 사랑이 아니라, 신에게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신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사랑’, 아가페인 것이죠. 그 아가페의 사랑이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이러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그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아무리 우리가 많이 소유하고 먹는다 해도, 그것이 우리 인간의 연약한 본질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되고,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쌓아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되고,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져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생명을 약간 보존해 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생명을 약간 보존해 주는 음식이나, 업적, 또는 재산과는 질적으로 다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인해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며 완전히 다른 세상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생명의 빵,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생명의 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아가페 사랑을 배우고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것을 나누면서 모든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어느 순간 그러한 아가페 사랑이 깨진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문제입니다. 식욕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교회는 아가페를 실천하기 위해서 공동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초대했습니다. 자신의 배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별히 배고픈 자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이죠. 그러나 음식을 차려 놓고 가난한 사람들, 배고픈 자들이 와서 함께 식사하기를 바라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의도대로 가난한 자들이나 배고픈 자들이 제 시간에 와서 공동식사에 참석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겁니다. 넉넉한 사람들이야, 시간을 아무 때나 낼 수 있지만, 가난한 자들, 배고픈 자들은 과중한 노동에 시달려 아무 때나 시간 낼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일이 반복되고 장기화 되면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자는 것입니다. 먼저 먹을 사람은 먼저 먹고, 나중에 오는 사람을 위해서 음식을 남겨 놓으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입니다.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다 보니, 공동식사를 마련하는데 별 기여가 없는 가난한 자들이 굴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자신들이 공동식사에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공동식사는 일치를 위한 식탁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게 된 차별의 식탁이 되고 만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신다 해도, 서로에 대한 마음의 담을 허물지 못하면 그것은 주님의 만찬과 무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33, 34). 이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서로에 대한 배려입니다. 나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 주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결여될 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일치와 상관 없는 공동체가 되고 마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을 통해서 구원에 대한 욕망을 채우고 만다면, 그것은 결국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 에로스의 사랑을 하고 말 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결국 또 다른 결핍과 허무만을 생산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그리스도와의 참된 일치를 이룬다면, 우리 안에 아가페의 사랑이 불꽃처럼 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흘러 넘치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먹으러 모일 때 서로 기다리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즉 결핍이 아닌 만족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결핍이 아닌 만족을 느낄 때, 아가페 사랑을 서로 나눌 때, 우리는 비로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차려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드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있는 결핍, 허무, 불평의 마음을 만족, 희망,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바꾸십시오. 그렇게 살 때, 우리의 삶은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도자의 직무  (0) 2013.10.21
아브람의 승리 - 교회의 승리를 위하여  (2) 2013.10.10
신앙의 안전지대  (0) 2013.09.26
사래 사건  (0) 2013.09.19
미래를 여는 교회  (0) 2013.09.08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26. 06:50

신앙의 안전지대

창세기 10

(13:1-18)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피신했던 아브람 일행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사래사건을 통해 일촉즉발의 상황에 처했던 아브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돌보심 덕분에 모든 가족이 무사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되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2).

 

애굽에서 돌아온 아브람 일행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터를 잡고 거주합니다. 그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전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도 이곳에 자리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정착은 두 번째로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정착했을 때 첫 번째 정착했을 때와는 달리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소유의 넉넉함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정착했을 때 없던 문제가 두 번째 정착했을 때 생긴 것을 보면, 아브람 일행의 재산이 얼마나 많이 불어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소유가 많은 데 왜 싸우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의 재산은 지금과는 달리 돈이 아니라 가축 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나 양 등을 풀어놓고 먹일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말씀을 보니까,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 그리고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등이 좁은 지역에서 목축업을 하려니 서로 많이 부대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길은 서로 갈라서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지역으로 가서 가축 떼들을 키우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다고, 좋은 지역을 차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좋은 지역을 차지하려면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정 안 된다면 가위바위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지요.

 

우리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욕심때문입니다. 더 많이 차지하고, 더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지요. 이것만 잘 다스린다면 문제를 최소화시킬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아브람은 그것을 잘 극복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우선권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한국 사람에게는 나이가 가장 큰 우선권이죠. 그래서 나이가 깡패라는 말도 있습니다. 나이 많은 어르신이 나서면 나이 어린 것들은 입도 뻥끗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절이라 배웠습니다. 나이 외에도 우선권을 정해주는 예법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한국 문화 속에서 성장하신 분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어느 문화나 연장자가 우선권을 갖는 것은 보편적인 문화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 일행 중 우선권을 갖는 것은 연장자인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 아브람은 자신의 우선권을 조카 롯에게 양도합니다. 친족끼리 싸우는 것이 볼썽사나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조카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떠나 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 본 뒤 좋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먼저 가면 자신은 조카 롯이 선택하지 않은 다른 곳을 선택하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아브람에게는 이런 여유로운 마음이 있었을까요? 아브람이 부자였기 때문에? 아니면, 조카 롯을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가 아브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볼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본문에 나와 있는 그의 행동을 살펴 본다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우선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습니다. ‘제단을 쌓다라는 말은 예배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무작정 예배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예배의 주도권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먼저 드려서 초월적 존재의 마음을 달래 주는 어느 종교의 제사와는 다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반응이 곧 예배입니다. 특별히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드린다는 것은 복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예배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임한 복에 대한 감사로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예배를 아예 이런 식으로 부릅니다. 그들이 말하는 미사감사성찬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를 재현하고,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예배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적어도 아브람은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은 예배를 아무 때나 드린 것이 아니라, 즉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에 대한 반응으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하셨다, 또는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코 감사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아브람이 어떻게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양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조카 롯보다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조카 롯에게 먼저 양보했습니다.

 

롯이 만약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삼촌 아브람이 우선권을 양도했을 때 그것을 덥석 받아 들지 않았을 겁니다. 삼촌 아브람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만 소유하겠다는 믿음이 있었다면, 롯은 절대로 삼촌 아브람보다 앞서지 않으려 했을 겁니다. 그런데, 롯의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애석하게도 롯은 삼촌 아브람이 우선권을 양도했을 때 얼씨구나 좋다생각하고 그것을 덥석 받아 듭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좋아 보이는 요단지역을 택합니다. 롯의 눈에 자신이 택한 곳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의 땅과 같이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모든 것이 흡족해 보였습니다. 그곳에 가면 더욱더 번영할 수 있을 것 같고,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롯은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의 선택에 대해서 이러한 간접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13).

 

조카 롯을 떠나 보내고 아브람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당신을 바라보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으로 처음 부르실 때의 그 음성을 다시 들려 주십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15,16). 아브람은 자신이 원하고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만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18절로 이어집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지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8).

 

무엇입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반응으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즉 예배 드렸습니다. 아브람에게 예배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것이 여기서 또 한 번 드러납니다.

 

반면에 롯의 선택한 지역은 신앙적으로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누가 보아도 그곳은 참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에덴 동산 같고 애굽의 땅과 같다는 표현이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그곳은 신앙의 안전지대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말씀에서 그것이 여실히 증명됩니다. 그곳은 신앙의 안전지대가 아니라, 심판의 장소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모르고, 눈이 보기에 좋은 곳만 찾아서 갑니다. 그것이 멸망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맹자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서 세 번 이사를 한 일화에서 비롯된 고사성어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떠한 선택을 할 때, 제일 먼저 경제(, 수입)를 생각하고, 둘째 자식의 교육을 생각합니다. 신앙의 안전지대 같은 것은 순위에도 들지 못합니다. 물론 경제도 생각해야 하고, 교육도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을 사는데 굉장히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라면 그러한 것들과 더불어, 내가 선택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안전지대에 거하게 하는 것인가를 꼭 고려해야 합니다.

 

사실 그러한 것은 따로 항복을 구분해서 고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든 교육이든,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가를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에게 들어오는 수입도, 내 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 줄 아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교육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인 줄로 아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나 잘 난 맛에 이룬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 신앙의 안전지대에 거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예배로 모아졌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 소유한 삶입니까?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리십니까? 신앙의 안전지대에 거하십시오. ,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만을 소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삶은 감사로 넘치는 복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브람의 승리 - 교회의 승리를 위하여  (2) 2013.10.10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가?  (0) 2013.10.06
사래 사건  (0) 2013.09.19
미래를 여는 교회  (0) 2013.09.08
출(出)하란  (0) 2013.09.05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19. 04:36

사래 사건

창세기 9

(창세기 12:10-20)

 

사래는 아브람(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입니다. ‘사래 걸렸다할 때의 그 사래가 아니고, ‘손사래 치다할 때의 그 사래도 아닙니다. 사래는 복의 근원 아브람의 아내입니다. 나중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래는 사라로 이름이 바뀝니다. 아브라함은 만국의 아버지라는 뜻이고, 사라는 만국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사래가 아브람의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인 단어 (베라카)’을 언급하시면서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까, 이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면서 창대함과 번영을 꿈꿀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약속한 형통은 오지 않고 오히려 기근이라는 시련이 닥쳤습니다. 아브람은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겁니다.

 

기근은 굉장히 무서운 겁니다. 생명의 파괴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기근의 원인은 가뭄, 전쟁, 자연 재해, 곤충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농사가 제대로 안 돼서 먹거리가 떨어지는 현상을 기근이라고 합니다. 기근이 오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됩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인 식욕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은 비극 중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죽음에 처해지게 되는 이유 중 굶어 죽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적어도 음식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내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선행인 것입니다. (입양한 아이(2)를 부부싸움 때문에 굶어 죽게 한 어느 젊은 부부 이야기)

 

아브람의 정착지, 가나안 땅에 얼마나 기근이 심했는지 더 이상 그 땅에서 살아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주를 결심합니다. 애굽 땅으로. 애굽은 늘 풍요의 상징입니다. 실제로 애굽은 매우 풍요로운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미국이 풍요의 상징이고, 미국이 풍요롭게 잘 사는 나라이지만, 그 당시 애굽은 세계 최고의 풍요로운 나라였습니다. 나일강 때문이었습니다. 나일강이 가져다 주는 풍요 때문에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을 신으로까지 받들었습니다. 그 신의 이름이 오시리스입니다. 바로(애굽의 왕)는 오시리스의 화신으로 불렸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면 우왕좌왕하게 되어 있습니다. 도를 닦는 도인이 아니라면, 먹고 사는 문제를 놓아두고 의연할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근이 오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도둑질이나 강도질이라도 해서 자신과 가족의 배를 채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버리고 풍요의 땅 애굽으로 향합니다. 기근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도착했을 때 한 가지 문제가 더 발생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로 인한 문제였습니다. “내가 알기에 그래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니”(11-12).

 

기근으로부터의 위기 의식은 이제 아내 사래의 외모로부터의 위기 의식으로 바뀝니다. 기근으로부터의 위기는 애굽으로의 이주로 해결되었는데, 아내 사래의 외모로부터의 위기는 해결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얼굴에 흠집이라고 내시겠습니까? 아브람은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합니다. 아내 사래를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신분을 속입니다. “원하건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13).

 

저는 이 문제를 두고 적지 않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브람은 왜 그랬을까?’ 실제로 나중에 애굽의 바로 왕은 아브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18-19).

 

아브람의 관심은 생명 보존과 안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래를 누이라 속이는 것을 통해서 아브람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확보하기 원했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13). 이러한 아브람의 행위를 놓고 많은 주석가들은 아브람을 비판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아내의 위험은 차선으로 두고, 자신의 안전과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대신 거짓말을 통해 안전과 생명을 확보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비판은 이런 말로 들립니다. 아브람은 비록 기근을 만났지만 가나안 땅에 남아 있어야 했고, 아내 사래의 아리따움 때문에 살해 위협에 놓인다 해도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주석들에 대해서 손사래를 치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브람의 행동은 불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인 행위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기근은 총체적인 위기입니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내렸더라도 믿음으로 버티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구조적인 악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쓰나미가 닥치면 그 사정권에 들어온 것은 모두 파괴되고 맙니다. 쓰나미가 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버티고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황당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광신입니다. 쓰나미가 닥치면 그 자리를 어서 피하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어떤 주문 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자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받지 않는 초인적인 존재로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 있는 자들은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자연 법칙에 더욱더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소박하게, 나누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로 압니다.

 

두 번째로, 아내 사래로부터 온 위기를 해결한 방법은 옹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 당시 풍습상, 더군다나 애굽 사람도 아닌 이방인으로서 기근을 피해 온 아브람 일행에게 애굽 사람들이 환대를 베풀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든 그들을 착취하려 했을 겁니다. 그 중 가장 큰 가능성은 약자에 대한 폭력입니다. 여성은 예나 지금이나 폭력의 대상이 되기 쉬운 약자입니다. 아리따운 아내 사래가 애굽에서 봉변 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아브람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아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어려움에 처하게 될 거라는 것은 눈에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 같은 것은 아무 쓸모 없어지는 겁니다. 존재가 없어지는데, 약속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약속도 성취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내 사래를 누이라 속이는 작전은 굉장히 기막힌 작전입니다. 이 작전이 기막힌 작전이었다는 것은 그 이후로 벌어지는 일로 인해 증명됩니다. 우선 애굽의 고위관리들이 사래의 외모에 반합니다. 일반 사람이 아니라 고위관리들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보존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뜻입니다. 사래에게도 잘 된 일이고, 아브람에게도 잘 된 일입니다. 작전은 대성공합니다. 단순히 고위관리 정도가 아니라, 애굽의 바로 왕의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애굽 왕은 그 대가로 아브람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얌수 나귀와 낙타등 수많은 선물을 하사합니다. 아브람은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서 애굽 땅으로 왔는데, 단순히 기근만 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것은 이후 하나님의 개입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셔서 사래의 신분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하십니다. 사래는 아브람의 누이가 아니라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아브람 자신이 처음부터 밝혔다면, 아브람과 사래는 이렇게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아브람의 우려대로 아브람은 죽음에 처해지고, 사래는 원치 않는 폭력에 시달리며 모진 고통 속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래의 신분이 무엇인지 온 천하에 드러나게 하심으로 아브람도 살고 사래도 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나게 하셨으므로, 아브람과 사래는 바로 왕에게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하사 받은 선물도 하나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부자가 되어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톡톡히 누리는 아브람과 사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꾀가 정말 자신만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면, 사래는 처음부터 아브람의 꾀를 순순히 따르지 않았을 겁니다. 어느 부인이 자신만 살겠다는 남편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남편의 말에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래는 아브람의 계획에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대로 따릅니다. 이것은 그만큼 사래가 남편 아브람을 신뢰했다는 뜻입니다. 남편의 지혜는 단순히 살기 위한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지혜라는 것을 자신도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과 사래는 담대하게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약속의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있었던 것이지요.

 

사래 사건은 옹졸하고 치졸한 아브람의 꼼수가 아닙니다. 자연인으로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믿음의 사건입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처럼 초자연적인 인물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 법칙에 순종하며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딱따구리 한 마리가 열심히 나무를 쪼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벼락이 치더니 그 나무를 반으로 쪼개 놓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놀란 다른 짐승들이 그 딱따구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너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그 큰 나무를 쪼갤 수 있니?’ 그러자 딱따구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단지 나에게 맡겨진 일을 매일 성실히 했을 뿐이야.’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가?  (0) 2013.10.06
신앙의 안전지대  (0) 2013.09.26
미래를 여는 교회  (0) 2013.09.08
출(出)하란  (0) 2013.09.05
항복하라  (0) 2013.09.01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3. 9. 8. 22:35

미래를 여는 교회

(빌레몬서 1:1-25)

 

오늘 우리가 읽은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여기에는 기막힌 사연과 기막힌 간청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따라 가다 보면 그리스도인이란, 그리고 교회란 무엇인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문구를 보면,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중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그의 집이 골로새 교회의 모임 장소로 사용된 것을 보면 말이죠. 옛날에는 정치적인 이유와 재정적인 이유로 지금처럼 교회 건물을 자유롭게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성도들 중 여유가 있는 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 편지를 빌레몬에게 쓴 바울은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 정황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3차 전도여행 후에 사도 바울은 박해 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로마로 압송 당합니다. 로마에 압송된 바울은 재판을 받기 전 미결수 신분으로 감옥에 갇혀 있었고, 비교적 자유로운 감옥 생활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시시때때로 복음을 전하고 자유롭게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빌레몬서 외에 에베소서와 빌립보서 등도 옥중서신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교우인 빌레몬에서 친필(대부분의 바울 서신은 대필해서 쓴 것입니다.)로 편지를 쓴 이유는 오네시모라는 사람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에 그랬는지는 정황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쳤습니다. 도망쳐서 로마까지 왔는데, 거기서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상황이 얼마나 일촉즉발의 상황인지 감이 잘 안 잡히실 겁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로마시대 때는 인구의 35-40% 정도가 노예였습니다. 노예제도가 합법적이었고, 사회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제도를 뒷받침하고 있는 법도 잘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 중 도망친 노예는 주인이 사형에 처해도 주인은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아주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오네시모가 처해 있는 상황은 생사가 달린 절체절명의 상황인 것입니다. 바울의 이 편지가 오네시모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매우 긴급한 상황인 것이죠.

 

물론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이 편지를 쓴 이유는 오네시모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빌레몬이 죽인다 해도 아무도 뭐라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무슨 권리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러한 곤란한 상황에서는 방관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력을 다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살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지금처럼 통신이나 교통이 발달된 시절이 아닌 그 때에 도망자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는 듯 합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드라마틱 하죠. 도망자 노예 오네시모는 도망친 로마에서 바울을 만났고,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거기에 골로새 교회를 세운 에바브라도 함께 있었던 듯 합니다. 그 에바브라를 통해서 골로새 교회의 상황과 빌레몬에 대해서, 그리고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에 대해서도 들었겠죠.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알게 된 바울은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오네시모가 도망친 것에 대해서 눈 감고 있자니 양심에 거리끼고, 그렇다고 오네시모를 돌려보내자니 도망친 노예에 대한 사형제도를 모를 리 없던 바울은 그것도 양심에 거리꼈을 겁니다. 그렇다면 두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를 쓰게 된 동기인 것입니다.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보람찬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고심 끝에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냥 돌려 보낸 것이 아니라, 아주 파격적인 부탁을 하면서 돌려 보냅니다. 그 파격적인 부탁이 빌레몬서의 핵심입니다.

 

우선 바울은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빌레몬이 바울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바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빌레몬은 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존경하거나 아니면 그를 신앙의 롤 모델로 생각했을 겁니다. 이방 선교계의 대부 사도 바울을 개인적으로 안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에게서 이러한 호칭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인 것이죠.

 

게다가 바울은 빌레몬을 매우 크게 칭찬을 합니다.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4-7). 몇 자 안 되는 편지에서 바울은 많은 부분은 빌레몬에 대한 칭찬으로 채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도 바울에게서 이러한 칭찬을 들은 빌레몬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그 동안 교회를 섬기면서 어렵고 힘들었던 마음이 씻은 듯이 녹아 내렸을 겁니다.

 

빌레몬에 대한 칭찬에서 이 문구에 눈길이 머뭅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그러면서 내 자신을 한 번 되돌아 보게 됩니다. ‘나로 인해 성도들의 마음은 평안함을 얻을까? 아니면 나 때문에 짜증날까?’ 그러면서 빌레몬은 어떻게 했길래 성도들에게 평안함(refreshment)을 주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답은 그 윗구절에 있습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레몬에게는 사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은 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은 있는데 사랑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 어느 한 쪽이 좀 부족하면 성도들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과 믿음이 누구를 향한 것이냐도 중요합니다.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은 주 예수와 모든 성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주 예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있는데,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있는데, 주 예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모든 성도(이웃)를 사랑하는 것 중 어느 한 쪽이 좀 부족하면 성도들에게 평안함을 주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아보지만, 일단 균형이 잡히면, 그 결과 성도들에게 평안함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바울 사도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칭찬을 들으면서 마음이 환해졌을 빌레몬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살려 달라는 부탁을 넘어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이것인 매우 파격적인, 파격적이다 못해 전복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노예제도가 기반을 이룬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빌레몬 개인에게 하는 부탁을 넘어 골로새 교회에게 하는 부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의 인사말에서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2)라고 쓰고 있는 겁니다. 빌레몬 한 명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빌레몬이 속한 공동체 전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큰 갈등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 개인을 넘어 골로새 교회 공동체에게 이 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의 부탁대로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 들였을까요? 아니면 바울의 편지를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고, 오네시모를 노예법에 따라 사형에 처했을까요? 당연히 바울의 부탁대로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일을 처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이렇게 우리에게 성경의 형태로 전해져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가 바울의 부탁대로 오네시모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과의 관계 때문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들은 주 예수의 복음에 온 생명을 걸고 산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20). 바울이 주 안에서 기쁨을 얻는다는 말은 곧 그들이 이 일을 주 안에서 처리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는 복음을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삶으로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충만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믿음인 것이죠. 그야말로, 빌레몬에 대한 바울의 칭찬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실제였다는 것입니다. 도전이 되는 신앙입니다. 꼭 본받아야만 하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노예제도가 있는 시대에 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빌레몬서에서 일어난 일과 똑같이 노예를 종이 아닌 형제로 받아들이는 일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보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 공동체가 오네시모의 미래를 열어준 것처럼 미래를 여는 그리스도인,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충만한 정도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 안에서 용기를 내시고 지혜를 간구하셔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모든 상황에서 미래를 열어가시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의 안전지대  (0) 2013.09.26
사래 사건  (0) 2013.09.19
출(出)하란  (0) 2013.09.05
항복하라  (0) 2013.09.01
누가 세상의 주인인가?  (0) 2013.08.29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