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6. 7. 11. 03:06

사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눅 10:25-37)


오늘 말씀은 어느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 질문에서 비롯된 말씀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질문한 이가 율법 교사이므로 그에 맞게 다시 질문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는 율법교사 답게 똑 부러지게 대답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는 신명기 65절과 레위기 1818절을 인용한 대답이다. 이 두 구절이 성경의 핵심을 요약한 구절이다. 이것을 간단히 줄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달콤해 보이지만 실제는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사랑만큼 큰 사건은 없다.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후의 모습을 바꾼다. 사랑하기 전과 사랑한 후의 모습은 같을 수 없다.

 

사랑은 변화와 희생을 동반한다. 변화와 희생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변화와 희생 없이 사랑을 하려는 자는 사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향락을 즐기는 것일 뿐이다. 사랑은 우리를 성장시키지만, 향락은 우리를 타락시킨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사랑인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게 사랑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참으로 쉽지 않은 거다. 변화와 희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 변화와 희생에 대한 염려는 전혀 안 하게 된다. 변화와 희생이 두렵고, 귀찮은 이유는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이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변화와 희생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데만 힘쓰면 된다. 그러면, 변화와 희생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런 다음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런 다음에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하나님 뜻 안에 거하게 된다.

 

이런 말도 해볼 수 있겠다.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런 다음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다.

 

율법교사의 대답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또다시 질문한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해 주신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완전히 뒤엎는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내려간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예루살렘이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거반 죽게 되어 길 가에 버려졌다. 마침 그곳을 두 사람이 지나갔다. 한 사람은 제사장이고 다른 이는 레위인이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동일한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성전의 일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결이었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일을 하는 이들이 어쩐지 거반 죽게 되어 길 가에 버려져 있는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간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왜 그랬을까? 그들에게는 사람보다 일이 더 중요했다. 강도 만난 자가 거반 죽게 되었다는 것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는 뜻일 텐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부정한 것 (시체 또는 피 흘리는 것)’을 만지면 부정해져서 정결의식을 거쳐 다시 정결해지기까지 성전의 일을 담당하지 못하게 된다.

 

일 중심으로 삶을 살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한다. 일 중심으로 삶을 살았던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강도 만난 자는 이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귀찮게 만드는 존재에 불과했다.

 

교회에서도 보면 일 중심으로 인간 관계를 생각할 때 언제나 다툼이 발생한다. 어느 집단이나 마찬가지다. 직장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다. 특별히, 직장생활이 힘든 이유는 직장이라는 곳이 원래 일 중심집단이기 때문인 것이다. 일 중심이다 보니, 직장 동료가 이웃이 되지 못하고, ‘골칫거리가 된다. 일을 잘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일을 못하면, ‘죽여 살려한다.

 

다른 곳을 몰라도, 가정과 교회는 일 중심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지, 일이 중심이 되면 다툼만 일어난다. 일 중심이면 모든 것이 다 짐스러워진다. 그러나, 사람이 중심이고, 사랑이 중심이면 모든 게 가벼워진다.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을 발음하면 입술이 닫히고 사랑을 발음하면 입술이 열린다 사람은 사랑으로 서로를 열 수 있다.” – 김은주 <달팽이 안의 달>

 

강도 만난 자를 구한 것은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고, 여행 중인 사마리아인이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무시당하고 소외당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든 자는 다름 아닌 사마리아인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변화와 희생이 따른다. 강도 만난 자를 사랑한, 불쌍히 여긴사마리아인은 그를 위해 기꺼이 변화와 희생을 감수한다. 사마리아인은 가던 길을 멈추는 변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는 희생을 감수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는 희생도 감수한다.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변화와 희생이 동반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꺼려하고,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를 꺼려한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맺으며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신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교사가 질문한 것에 대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중심으로 이웃을 가려냈다. 그들의 입장에서 강도 만난 자는 이웃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귀찮게 만드는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은 자들이었다. 그냥, ‘그 일을 하는 자들이었을 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를 물으라. 다른 말로 해서,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나는 정말로 이웃을 사랑하는가?’를 먼저 생각하시라. 다른 말로 해서, 어떠한 일을 하는 데 드는 비용과 희생, 변화 등을 먼저 계산하지 말고, 사랑의 마음과 긍휼의 마음을 먼저 가지시라. “사랑하십시오. 그런 다음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거꾸로 하지 마시라.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십시오. 그런 다음 사랑하십시오!” 이건 사랑이 아니라, 향락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시고,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이웃을 더욱더 사랑하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여러분을 구원할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고백하자. “사랑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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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5:14

오병이어 이야기

(메시아적 만찬)

(마가복음 6:30-44)

 

두 명씩 짝지어 파송 받아 나가 복음 전했던 제자들이 돌아왔다. (두 명씩 짝지어 나가는 방법은 주로 성경에 충실한이단들이 쓰는 방법이다. 참으로 역설적이다. 원래 가짜일수록, 가장하기 위해 성경에 충실한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여호와의 증인, 또는 몰몬교 등)

 

돌아온 제자들은 선교 보고를 한다.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우리는 매주일 세상으로 파송 받아 복음을 전하고 복음대로 살다가, 주일에 돌아와 주님께 예배 드리며, 우리들이 일주일 동안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해야 한다. 그것이 예배의 의미이다.

 

선교 보고를 끝낸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을 받는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쉼은 굉장히 중요하다. 쉼은 열광과 헌신을 구분해 준다. 분주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마르다는 너무 분주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얻는 것도 없었다. 그 입에서는 불평만 나왔다. 멈출 줄 알았던 마리아가 칭찬 받았다.

 

쉬러 간 제자들과는 달리, 무리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라다니는 데 열광했다. 열광은 자기 자신에게 향한,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 이런 자는 쉴 줄 모른다. 멈출 줄 모른다. 이건 열심히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이다. 자기 만족을 이루지 못하면, 금새 폭도로 변해 버린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열광과 헌신은 다르다. 헌신은 나를 부인하는 것이다. 헌신은 일할 때와 쉴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헌신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주님이 멈추고 쉬라시는 데, 그 음성을 듣지 않는 사람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광신도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그렇게 열정적으로몰려든 큰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그렇게 열정적인 이유는 목자 없는 양 같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목자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맹목적으로 열정적이지 않다. 그들은 목자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기 자신을 헌신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기도 한다.

 

인간은 영적인 돌봄과 인도가 꼭 필요하다. 삶이라는 것은 망망대해와 같고, 광야와 같아서 돌봄과 인도를 받지 않으면 표류하거나 신기루를 좇아 가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시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다. 우리를 이용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먹이신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을 돌보시다, 시간이 흘러 식사 때가 되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제안한다. “이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6).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너희가 먹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이게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펼쳐진다. 이 이야기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옛날, 성서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었던 시절에 성경말씀을 전했던 설교자들은 그저 이 이야기를 기적이야기로 전했다. 어린 시절, 동네에 뻥튀기장사가 자주 왔었다. 쌀 한 바가지 가져다 주면, 뻥튀기 장사 아저씨는 뻥을 튀켜그것을 몇 배로 부풀려 주었다.

 

그러한 예를 들며, 무엇이든 예수님께 가져가면 예수님이 이렇게 뻥튀기튀겨 주는 냥 말씀을 전했다. 물론 똑같이 순진했던 사람들은 그 말씀에 아멘했다. 이러한 순수한 믿음도 과히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더 중요한 과제는 본문이 전해주고자 하는 의미를 최대한 저자의 의도에 가깝게 파악하는 일이다. 그래야, 본문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장난치지 않을 수 있다.


들으면 무조건 은혜 되는 말씀이 좋은 말씀이 아니라, 본문의 의미를 온전히 짚어주는 말씀이 좋은 말씀이다.

 

마가복음서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밝혀내기 위함이다. 마가복음은 예수를 메시아로 소개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뻥튀기 장사가 아니라, ‘메시아이다.

 

떡과 물고기는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일상 음식이었다. 그 일상 음식을 통해 예수님이 보여주는 것은 메시아적 만찬이다.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신 뒤, 축사하시고, 떼어, 주신다. 여기에 나오는 네 개의 동사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매)는 엠마오의 식사와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 동일하게 등장한다.

 

푸른 잔디는 메시아적 만찬의 식탁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푸른 잔디위에 사람들을 앉게하신다. 여기에 쓰인 앉게는 헬라어 아나클리노가 쓰였는데, 이는 누군가를 초대하여 식탁에 앉게 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리들을 초대하여 당신의 식탁에 앉히신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구약성경 가운데 만나 이야기와 엘리사가 떡 이십 개로 백 명을 먹인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만나를 다시 먹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만나를 먹이시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마가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다름 아닌, ‘그 메시아라는 것을 말하고 증언하고 있다.

 

뿔뿔이 흩어져 각자 먹는 게 아니라, 함께 먹는 것은 하나 됨을 뜻하고, 오병이어의 식사는 하나님 백성의 모임을 상징한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베푸는 잔치인 것이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는 매주일 공동식사를 한다. 주일 공동식사는 메시아적 만찬이다. 우리는 그러한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메시아)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결코 그냥 놓아두지 않으시고, 먹이신다는 것이다. 그냥 먹이시는 것이 아니라, 배불리 먹이신다는 것이다.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만족을 주신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메시아로 고백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열어준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놓으면, 우리는 그분이 베푸시는 메시아적 만찬에 초대되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예수님은 메시아시다. 이것을 믿는 자 만족하게 될 것이요, 그렇지 않은 자, ‘만족을 모르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으시는가? 그분의 메시아적 만찬을 누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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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5:10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오시는 예수

(마가복음 6:45-56)

 

본문의 이야기는 오병이어 이야기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 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병이어는 메시아적 만찬이었고, 오병이어는 주님과 함께 한 시간이었고, 오병이어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성만찬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이 자꾸,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진짜로(과학적으로) 일으켰는지 아닌지, 그리고, ‘예수님이 진짜로(과학적으로) 물 위를 걸으셨는지 아닌지에 가 있다.

 

성경의 이야기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일은 별로 이롭지 못하다. 성경의 이야기는 과학적인 증명을 위해서 쓰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경이 쓰인 시대는 과학적 세계관의 시대도 아니고, ‘신화적 세계관의 시대였다. 성경이 쓰인 시대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이야기,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를 접하며, 예수가 정말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어?’, ‘예수가 정말 물 위를 걸었어?’라는 것을 묻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은 고대인보다 상상력이 한 참 떨어지는 듯 하다. 불행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자꾸 이게 과학적으로 가능해?’를 따지지 말고, ‘이게 무슨 뜻이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 전하고 있는 본질을 놓칠 수 있다.

 

마가는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일차적으로, 마가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그렇다고, ‘메시아는 물 위를 걸을 정도로 초능력을 지닌 분이어야 한다를 말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만약 메시아는 초능력을 지닌 분이야를 말하고 싶었다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없다. 분명히, 십자가에서도 초능력적인 무엇인가가 발휘되었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는 십자가에서 무능하게 죽었다. 아무런 초능력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성경을 보면, ‘메시아는 초능력자라는 것을 마가가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 이야기가 메시아적 만찬오병이어의 이야기다음에 나오는 것을 주목하라고 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잔치를 벌인 뒤, 즉 예배 뒤에,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제자들과 예수님은 잠시 떨어져 있는 듯하다. 제자들을 보내시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다’.

 

시간이 지나,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셨다. 여기서 제자들이 탄 배가 바다 가운데있었다는 것에 주목해 보자. 사명을 받고 파송은 받은 예수의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바다 가운데, 즉 삶의 현장 가운데 있다. 그런데, 그 삶의 현장, 바다 가운데는 잔잔하지 않고, “바람이 거스르므로 힘겹게 노를 저어야하는 곳이다.

 

우리 삶의 현장은 힘겹다. 얼마나 힘겨운가. 너무 힘겨워서 헉헉댄다. 우리는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 가지 바람 때문에 힘들다. 더 이상 세상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은 다른 이들보다 힘겨울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마가복음이 쓰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현장이 정말로 힘겨웠다. 그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자유의 제약을 받았고, 생활이 불편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얼마나 힘겨운 삶의 현장인가!

 

이렇게 힘겨운 삶의 현장을 예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신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헉헉대며 힘겹게 노 젓고 있는, 바다 한 가운데, 삶의 현장 한 가운데로 오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제자들도 자신들의 배가 떠 있는 바다 한 가운데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유령인줄로 착각했다. 유령인줄로 알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은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얼마나 위로되는 말씀인가.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배 위에 올라 타신다.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힘겨워 하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배에 올라타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그렇다. 그들을 힘들게 했던 바람이 그쳤다. 주님이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오시면, 바람이 그친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주님을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모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제자들은 방금 전에 오병이어를 나누며, ‘떡을 뗐는데’, 그것을 금새 까먹었다. “이는 그들이 그 때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2).

 

우리도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도 매주일 예배를 드린다. 예배 드리며,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고, 우리는 주님께 세상으로 파송 받아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서면, 우리도 금방 까먹는다. 우리의 마음이 둔해져서, 우리가 누구인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조차 마음이 둔해져서 깨닫지 못한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이다. 이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슬러 우리의 삶, 하나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들을 막아 주시기 위해, 우리와 동행하기를 꺼리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언제든지 오신다. 그것이 바다 건, 산이건, 광야 건 상관 없이,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오신다.

 

예수님과 함께 한 그들의 사역을 보자. 그들은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 땅에 도착한다. 그곳에서의 사역은 성공적이었다. 실패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에게로 왔고, 예수님에게로 온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 “사람들이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55-56).

 

마음을 열라. 그러면 여러분의 삶의 현장으로 오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감격,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라.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여러분의 삶 가운데 있는 도전들, 어려운 일들, 여러분의 눈에 눈물 나게 하는 일들을 모두 그치게 하실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주님은 결코 우리를 혼자 세상으로, 삶의 현장을 보내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삶을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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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4:59

누가 크냐

(마가복음 9:30-37)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을 들여다보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지나 가버나움을 가시는 중이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2차 수난 예고를 하신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서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31).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이어 2차로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들었음에도, 그들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누군가의 친구가 되는 일, 누군가의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일,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우선 사람들은 일단 자기 자신에게 먼저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들은 전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직 그들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안 되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의 친구가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기 자신들의 이권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의 관심은 이것이었다. “누가 크냐?” 이러한 관심은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누가 크냐에 관심을 갖는다. 이 세상의 작동 방식이 그렇다. 큰 자가 되어야만 섬김을 받고 무시 안 당하고 성공했다고 칭송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 다른 이들보다 큰 자가 되고 싶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학벌 없는 사회라는 사회단체가 있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학벌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생겨난 단체였다. 그러나 최근 이 단체가 스스로 해단식을 가졌다. 더 이상 한국 사회는 학벌 사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벌이 없어져서 학벌 사회가 아니라, 학벌보다 더 무서운 요인이 학벌 문제를 집어 삼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본이다. , ‘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학벌이 중요한 사회가 아니라, 누가 돈을 더 많이 가졌느냐, 부모가 얼마나 경제력이 있느냐에 따라 사회의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불과 몇 십년 전만해도 한국 사회는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 등의 학벌을 가지고 있으면 사회적 지위 상승이 꽤나 보장되던 사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학교를 나와도 소위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으면 신분상승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자본, 즉 돈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사회가 된 것이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의 문제를 도상에서 토론한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메시아상 때문이었다. 이들은 지금 예수님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다. 예루살렘은 왕의 도시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이르면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될 거라 믿었다. 자신들의 생각대로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면 제자들 중 큰 자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라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크냐의 문제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들이 이렇게 날카롭게 신경전을 벌이며 누가 크냐의 문제를 따지고 든 이유는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실 때 세 명의 제자만 따로 데려 가신 일 때문인 것 같다. 일종의 시기질투인 것이다. 예수님과 따로 변화산에 올라갔다 온 이들에게 높은 자리를 빼앗길 것이 두려운 다른 제자들이 변론을 주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전혀 잘못 이해한 결과일 뿐이다. 예수님은 이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제자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가르침을 주신다. 이번 제자도의 핵심은 이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거스르는 혁명과도 같은 말이다. ‘누가 크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적당하지 못하다. 일반적으로 누가 크냐의 질문에 대한 답은 보통 학벌, , 지위, 명예 등이 결정한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큰 자가 되기 위해, 학벌을 쌓고, 돈을 모으고, 지위를 얻고, 명예를 추구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전혀 그러한 것을 말하기 않고, 큰 자의 덕목으로 오직 섬김을 말씀하고 있다.

 

섬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국회의원이 설거철만 되면 시장에 나가 몸을 굽신대며 장사하는 분들의 손을 잡아주고, 장보러 온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주는 일 등이 섬기는 일일까? 섬긴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예수님은 섬김이 무엇인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말씀하신다.

 

우리는 대개 섬김도 나를 위한 섬김을 알 뿐이다. 예수님이 말하는 섬김은 이런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는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

 

여기서 영접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보자. ‘영접하다는 말은 영어로 ‘receive’라는 단어를 쓴다. 풀어서 설명하면, ‘시인하다, 사랑으로 대접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다른 말로 하면, 상대방(타자)을 나와 동급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영접은 모든 차별이나 장벽을 없애고, 상대방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것을 잘하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방과 나 사이에 벽을 세우고, 상대방을 차별하고, 무시하면서 나의 존재를 기뻐한다. 상대방이 나와 같다는 것을 인정하면 큰 일 날 것처럼 여겨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멀리한다. 그런 자는 큰 자가 아니다. 그런 자는 찌질한 자이다. 그런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는 자이다. 그런 자는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전혀 모르는 자이다. 그런 자는 오히려 예수님의 적이다.

 

누가 크냐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본질을 드러낸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벽을 허무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다 그분의 형제로 인정했다. 그야말로, 영접했다. 사랑으로 대접했다. 섬긴다는 것은 저 사람보다 큰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저 사람보다 작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큰 자가 아니다. 반대로 나이가 어리고 건강하다고 그래서 나이 많은 이를 이런저런 면에서 이길 수 있다고 해서 큰 자가 아니다. 돈이 많다고 큰 자가 아니다. 학벌이 좋다고 큰 자가 아니다. 유러피언이라고 해서 큰 자가 아니다. 잘 생겼다고, 예쁘다고 큰 자가 아니다.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큰 자가 아니다. 사회적 명예가 크다고 큰 자가 아니다. 큰 자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또는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큰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니, 누가 크냐의 문제로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는데, 그 사람을 나의 형제로 자매로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제자도란, 바로 이렇게 모든 이들을 섬기는 것, 즉 그들을 나와 똑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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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4:54

이혼 문제

(마가복음 10:1-16)

 

제자도의 틀에서 생각해 보자. 제자란 이제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사는 자들이다.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요단강 동편의 베레아 지역으로 가셨다. 거기에서 바리새인들과 다시 한 번 대결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Testing Him’,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사람이(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2). 여기서 버리다이혼하다의 뜻이다. , 이혼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는 질문이다.

 

이들이 이혼에 관하여 묻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그것을 뚝 떼어 놓은 채, ‘이혼에 관한 문제를 들여다보면 엉뚱한 말씀을 전하게 된다.

 

일단 이들이 이혼에 대한 근거로 내세우는 성경구절은 신명기 24 1-4절의 말씀이다.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또한 그 당시 로마 사회에서 이혼은 쉽게 행해지던 일이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풍습이 전파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 처치할 죄목을 찾고자 했다. 우리가 알다시피, 헤롯 안티파스는 형제의 아내를 취했고, 이 일(이혼한 일)로 인해서 세례 요한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결국 요한은 그 일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이혼 문제는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매우 민간한 사안이었다. , 어떻게 이 문제를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목숨이 오락가락했다.

 

그 당시는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가부장적 사회(남성중심적 사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성 이외의 존재는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이혼은 남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우는 도구 밖에 되지 않았다.

 

신명기서의 말씀은 이혼의 정당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혼으로부터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여자가 싫어졌다고 마음대로 이혼하지 못하게 법적으로 구속하는 것이다. 신명기서 문구에서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은 남자가 여자를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법이다. 그런 사유가 발견되면, ‘이혼증서를 여자에게 꼭 써줘야 한다. 이것은 이혼을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여자가 이혼에 의해서 버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법이다.

 

예수님은 이혼 문제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근거한 대답을 내어놓으신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6-9). 여기서 짝지어 주셨다는 것은 멍에를 함께 씌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함께 곁에서 멍에를 멘이라는 뜻이다. 멍에를 함께 멨기 때문에, 이제 결혼한 두 사람(남자와 여자)는 함께 가야 하는 운명 공동체가 된 것이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거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평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자와 여자는 멍에를 함께 멘 사람이지, 여자가 남자의 멍에를 멘 것이 아니다. 남자 마음대로 여자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다. 옛날에는 그랬다. 여자의 운명은 남자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여자의 존재, 여자의 인권이 거의 없었다. 모두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지금 그것을 깨시고 있다. 남자의 편의대로 여자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름과 같이 결론을 내신다.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11-12). 우리가 알다시피, 십계명에 이혼죄는 없지만, ‘간음죄는 있다. 간음을 범한 자는 돌로 쳐죽임을 당했다. 그만큼, 중한 죄라는 뜻이다. 그만큼, 남자가 마음대로 여자를 무시하는 죄는 크다는 뜻이다. (물론 그 반대로 똑같이 해당된다.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면 안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매우 충격적인 가르침이었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인 여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시며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윤리를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이어서 나오는 어린 아이에 관한 가르침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혼 문제에 이어 곧바로 나오는 이야기가 어린 아이에 관한 교훈이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막는다. 그것을 본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이런 가르침을 주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4-15).

 

그 당시, 여성보다 더 존재감이 없던 존재가 어린이였다. 어린이는 사회적 약자중의 약자였다. 요즘처럼 아이를 금이야 옥이야 키우는 세대들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나이 드신 분 중에는 어린 시절에 자신들이 얼마나 존재감이 없었는지 기억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예수님은 존재감이 전혀 없던 아이들을 가리켜, 그들과 같이 받들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파격적인 선언이다. 그 당시 그 누구도 어린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애들은 그저 무시만 당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이 말을 깨달은 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무시당하고 거절당한 사람들, 즉 병든 자, 소외된 자, 이방인, 여자,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인정받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나라이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방인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여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외면하지 않으셨다. 모두 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다.

 

제자도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와 좀 다르다고, 나보다 힘이 약하다고, 나보다 좀 못나 보인다고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적 가치관에 갇힌 자들은 아직까지 차별과 무시와 거절을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제자는 모든 사람을 나와 같은 이로 받아들이며,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그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 것이다.

 

여러분은 제자인가?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고 있는가? 혹 세상적 가치관에 따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 말씀은 단순히 이혼을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사는 자들은 여전히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로 갈라서는 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사는 자들은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함께 곁에서 멍에를 멘자들 답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평화롭게 서로를 존중하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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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7. 04:49

영생이란 무엇인가?

(10:17-31)


진시황은 인생 말년에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의 권좌를 지키려는 욕심때문에 국고를 낭비해 불로초를 사들이고, 백성들의 노동을 낭비하며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이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Eternal Life)란 우리의 욕심 또는 욕망처럼,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어떠한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물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어로, “Good Teach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여기서 영어의 ‘inherit’가 히브리어의 클레로노메오를 잘 표현해 준다. ‘내가 만약 영생을 상속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의 뜻이다. 히브리어의 클레로노메오는 오직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 ‘약속’, ‘축복을 목적어로 취한다.

 

무엇인가를 상속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인가를 하면 상속 받을 수 있나? 상속은 행위의 관점에서 볼 수 없다. 상속은 관계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이 사람은 행위의 관점에서 상속을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여야 하나?’라고 묻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행위의 관점에서 상속을 접근하는 그에게 이런 행위할 것을 말씀하신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니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21). 이 사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예수님을 떠나 갔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재물이 많았기때문이다.

 

영생을 행위의 관점, ‘소유의 관점에서 보면 이 부자 청년처럼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떠나갈 수 밖에 없다. , 그는 결코 하나님나라, 영생을 상속받을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놀라워하며 서로 수군댄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본문에는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못 들으면 완전히 이상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위험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바로 이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한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28).

 

기본적으로, 신약성경이 쓰여진 시대는 박해시대라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베드로의 고백은 베드로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다. 베드로로 대표되는 초대교회 모든 성도들의 고백이다. 그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였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전토를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이민과 같다. 또는 죽음과 같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예수를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는가?

 

대답은 이것이다. 바로,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 때문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이 무엇이길래, 그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서게 하였을까?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이단사이비가 된다. 실제로, 이 말씀 들이대면서, 신도들에게 형제자매와 부모 자식을 떠나게 하고,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도록 강요하는 이단사이비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며, 그들을 현혹시키고, 영생과 구원에 집착한 어리석은 신도들은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을 행위소유의 관점에 보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일어나는 오류이다.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은 행위로 상속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개념이다. 관계사랑이 개입되고, ‘변화를 동반한다. 행위와 소유는 사랑과 변화가 동반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와 만나서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제한 채, 그저 영생을 자기의 재산처럼 소유하려고만 했다. 그렇게 영생을 얻으려는 자는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즉 그런 식으로 구원을 받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인가를 경험했다. 그것이 부활인데, 그 부활이란 이 세상의 것에서 완전히 떠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필요하다.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을 상속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욕심 내지 욕망에서 벗어나, 예수에게 나타난 또다른 현실(하나님나라)를 경험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영생, 하나님나라, 구원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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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6. 16. 08:08

섬기는 자 (대속신학)

(막 10:32-45)


복음서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그 문제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박해였고, 둘째는 예수님의 재림 지연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엮여 있었다. 사람이 어떠한 어려움을 겪게 되더라도 그것이 금방 끝나게 될 것을 안다면, 어렵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어려움이 언제 끝나게 될지 밑도 끝도 없이 묘연하면,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법이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랬다. 예수 믿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었다. , 예수님의 재림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자신들의 박해가 끝날 것이고, 영광 중에 높임을 받을 거라 생각했다. 마태복음 1628절에 보면,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러한 희망을 품을 만한 말씀이 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대개 이단들은 애매하고 풀기 힘든 성경 구절을 풀어내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혹시 그러한 구절을 들이대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이러한 것을 교회에서 배운 적이 있느냐고 말하며 접근하는 사람은 일단 의심해야 한다.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재림이 자신들이 죽기 전에 이루어질 거라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예수님의 재림은 지연되었다.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재림은 묘연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당연히, 사람들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문제는 예수님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와 유대땅을 종횡무진 누비던 제자들이 하나 둘씩 죽어 갔다. 어떻게 해야할까?

 

마음이 흔들리면, 사람의 마음에서 세상적 욕망이 샘솟는 법이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가 그런 것이었다. 예수님의 재림 지연과 박해의 상황 속에서 공동체 내부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세상의 가치가 교회 공동체 내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말씀은 그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 제자도라는 관점에서 말씀을 들여다보고 있다.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쳐 주고 계시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도가 흐려질 때, 공동체 내에 세상의 가치가 들어오는 법이다.

 

교회 공동체 내에 들어온 세상의 가치가 세베대의 두 아들의 청탁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수난 예고를 한 상황에 세베대의 두 아들이 예수님께 구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에 사로잡히면, 현재 초대교회 공동체가 겪고 있는 예수님의 재림 지연 속에서 겪는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 두 제자 중 일부인 이 두 사람만 이러한 영적인 어두움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니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다른 열 명의 제자가 세베대의 두 아들이 예수님께 구하는 것을 보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낸다. 이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다는 것은 나머지 제자들도 세베대의 두 아들처럼 똑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초대교회 공동체는 세속적 가치에 물들어 갔다. 예수님의 재림 지연과 박해가 위기요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점점 복음에서 멀어지고 세속적 가치에 물들어 간다는 것이 위기요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올바른 제자도를 가르쳐 주시고 자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는 세대배의 두 아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38). 이것은 다른 말로 해서, ‘고난의 잔과 고난의 세례를 말한다. 현재 고난 중에 (박해 중에) 있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고난이다. 그냥 고난이 아니라, ‘영광의 고난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공동체가 재림 지연의 상황과 박해 속에서 받는 고난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인 것이다.

 

이 말씀은 굉장히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아버지도 그랬어.” 특히 현재 우리 아이들에게 오는 자연적인 고난 중 가장 큰 고난은 이빨 빼는 고난이다. 이빨 빼는 것을 무서워하거나, 이빨 뺀 뒤 아파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해준다. “아버지도 그랬어. 아버지도 너희 나이 때에 그렇게 이빨 뺐어. 그리고, 그렇게 이빨 빼야 헝아가 되는 거야.” 성장하기 위해서 이빨 빼는 아픔은 필수인 것이다. 그렇게 말해주면, 아이들은 아파하면서도 그것을 꾹 참아낸다.

 

올바른 제자도에 관한 예수님의 두 번째 가르침은 모든 제자들을 향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3, 44).

 

여기서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는 말이 중요하다. ‘제자도는 기본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 제자란 세상의 가치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지니고 사는 자이다. 세상의 가치란, 42절이 보여주고 있듯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힘을 행사하고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 다른 이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이다.

 

그러나, 제자는 그렇지 않는 것이다. 제자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이의 자유를 빼앗는 자가 아니다. 그 반대다. 제자는 다른 이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할 줄 아는 자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삶(생명, 목숨)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

 

여기서 대속물이라는 것은 노예()와 관련이 깊은 단어로, 노예에게 자유를 주려고 지불하는 몸값을 말한다. 자유 없는 이의 대표가 노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대속물로 표현하는 이유는 자유의 개념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대속이란 대신 죽는다는 의미를 가지지만, 그 안에 있는 신학적인 개념은 그것을 훨씬 뛰어 넘는다.

 

대속신학은 주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자유를 말하기 위함이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대표적으로 사탄)에게 값을 치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대속을 누군가에게 값을 치룬 개념으로 이해하면, 굉장히 큰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탄에게 자신의 아들을 값으로 치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대속신학을 심하게 오염시키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거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이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값을 치를 필요가 없으시다.

 

재림의 지연과 박해 가운데 세속적 가치에 점점 물들어 가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살리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다시 한 번 그들의 육체에 채우는 것 밖에 없다. 재림의 지연과 박해 가운데서 죽어가는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이유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닮을 때만 가능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세상의 교회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휘청이고 있다.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어, 세베대의 두 아들처럼, 또는 다른 제자들처럼 누가 더 크냐의 논쟁에 빠져 있고, ‘영광 중에 주의 우편에, 좌편에앉을 궁리들만 하고 있다. 예수의 능력을 빌려, 출세하는 데만 관심 있고, 예수의 권세를 빌려 다른 이를 밟고 올라서는 데만 관심이 있다.

 

어떻게 하면 현재 교회가 겪고 있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육체에 채우는 수밖에 없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한 말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렇게 하지 않고(42)’, 이렇게(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 하는 자가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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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5. 16. 02:03

영의 사람

(사도행전 2:1-4, 14-21, 로마서 8:14-17)


오늘은 성령강림절이다. 주께서 승천하시며 약속하신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날이다. ‘승천은 신학적인 의미라고 지난 주 설명했다.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성령이 하늘로부터내려왔다는 것은 성령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늘은 신학적인 의미이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다.

 

성령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은 성령이 하나님과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지위에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인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핵심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성령을 우리가 부릴 수 있는 알라딘 램프의 지니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령이 오라 마라, 성령이 역사해라 마라라면서 성령에게 어떠한 명령을 내릴 때가 많다. 성령을 대하는 매우 잘못된 태도이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더불어 한 위를 구성하고 있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대한 보이는 역사라면, 성령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역사를 눈에 보여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보라.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으나, 결국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였다.

 

하늘로부터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 때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하면 그 길을 가는 것이 두렵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주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해 주신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의 승천 뒤, 예수님의 지시대로 예루살렘에서 모여 성령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은 드디어 성령이 오신 것을 경험했다. 성령이 오신 것은 그들에게 명백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사건이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건은 그것을 경험하기 전과 경험한 후의 인생의 전혀 달라지게 만든다. 우리의 일상은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이전의 모습과는 달라진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일상은 그저 그렇게 흘러간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면, 여러분의 인생을 바꾼 사건들이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즐비할 것이다. ‘이러한 사건만 없었어도, 내 인생은 지금 다를텐데..’ 또는 이러한 사건만 있었어도, 내 인생은 지금 다를텐데..’라며 아쉬움을 표현할 때가 많다.

 

사건에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우리가 매일같이 뉴스에서 보는 사건은 나에게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인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나와 상관 없어 보이는 사건이 결국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기후변화의 사건은 현재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으나, 결국 그것 때문에 삶에 큰 제약이 어느 순간 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때를 말한다. 수없이 많은 교통사고 소식을 듣지만, 내가 직접 당하지 않으면 그것을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 교통사고 때문에 장애를 얻게 되면, 그것은 사건이다. 그 사건을 통해 나의 삶이 영원히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부부가 자식을 낳는 일도 사건이다. 이제 자식을 낳은 것 때문에 영원히 속 썩으면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있는 거다.

 

사건의 의미를 마음에 품고, 제자들이 겪은 성령강림절 사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들에게 성령강림절 사건은 그들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사건이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그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자.

 

말씀을 통해 목격할 수 있는 변화는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했다. 성령이 우리의 주님이지, 우리가 성령의 주님이 아니다.

 

이들이 다른 언어로 말했다는 것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어를 쓰는 이들과 말이 통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성령강림의 사건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 25절부터 13절을 보면, 얼마나 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의 오순절 순례를 왔는지 보도하고 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고, 오순절 순례자들이 이런 말을 한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7-8).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중에는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큰 소리로 설교하는 내용이 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도망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당당하게 나서서 설교한다. 베드로 설교의 핵심은 21절에 담겨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굉장히 대담한 설교였다. 이 당시 그들을 구원해 주는 주님은 로마의 황제였다. 그런데, 제자들은 로마 황제가 주님이 아니라, 부활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빗대어 말하자면, 이는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압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행위와 똑 같은 일이다. 일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유관순 열사가 어떻게 되었은가? 일제의 악랄한 고문으로 처참하게 죽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일이나, ‘부활승천하신 예수가 주님이시다라고 외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관순 열사가 일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단순한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는 정말로 대한민국이 그의 고국이었기 때문이다. 유관순은 나라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나라가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부활승천하신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진실로 예수를 주님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읽은 또 하나의 본문인 로마서는 이렇게 증거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는 사도행전보다 성령 사건을 더 밀고 나간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게 됨을 선포한다. 성령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만큼 신비로운 관계가 없다. 자식은 부모의 모든 것을 물려 받는다. 성품, 외모, 그리고 부모가 가지고 있던 재산까지. 그래서 오늘 말씀은 상속자라는 말을 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17).

 

사실, 현대인들에게 상속자 개념은 그렇게 건전하지 못하다. ‘상속자라고 하면 우선 재산을 물려 받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둘러싼 법정다툼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상속자의 개념은 우리가 흔히 아는 상속자의 개념과 다르다. 그는 상속자를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강림절이란 무엇인가? 대략 2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신비한 사건인가? 너무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 우리에게 전혀 영향을 못 끼치는 사건인가?

 

우리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살펴 보았듯이, 오순절에 성령을 경험한 이들은 모두 새 술에 취한 것처럼기쁨과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했다. 성령강림 사건은 그들의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한 뒤, 예수의 부활승천을 확증했으며, 다른 그 무엇이 아닌 바로 부활승천 하신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았다.

 

우리는 성령강림을 경험했는가? 우리는 성령강림사건을 당했는가? 성령강림사건을 강 건너 불구경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것은 교통사고 당하지 않았는데, 절뚝거리며 교통사고 당한 것처럼 사기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모조아기인형을 등에 업고 다니며 아기 낳은 것처럼 거짓말 시키는 것과 같다.

 

성령강림사건을 당하면, 실로 영의 사람이 된다. 육의 사람에서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영의 사람으로 바뀐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들으면서, 여전히, 패리스 힐튼처럼 힐튼 가의 상속자나 되었으면 좋겠다, 또는 이재용 씨처럼 이건희 회장의 상속자, 삼성 가의 상속자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강림사건을 당하지 않아서, 성령을 받아 영의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어린 아이일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성인이 되어 모두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린 아이일 때는 장난감이나 인형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에 목숨을 맨다. 그거 없어지면 하루종일 우울해 하고 눈물 흘린다그러나, 성인이 된 여러분 중에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찾는 분이 있는가?

 

오늘은 성령강림절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육의 사람인가, 영의 사람인가?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는가? 아니면 성령에 관심도 없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에도 참여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기가 주님이라고 우리를 강력하게 유혹하는 가짜 주님의 유혹을 물리치고, 부활승천 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주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을 따라 살고 있는가?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돈 많이 버는 데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가? 이 말씀을 다시 선포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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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21. 01:22

우리는 누구의 양인가?

(요 10:22-30 / 9:36-43)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을 맞았다. 부활절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주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이 이 땅에 오시는 성령강림절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하여 부활절기를 지킨다.

 

예수의 부활은 유일회적인 엄청난 사건이다. 세상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사건이다. 인류 역사에서도 보면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역사적 창조사건이 즐비하다. 그런 역사에는 혁명이라는 말을 붙여 표현한다. 예를 들면, 농업 혁명(농경 사회로의 전환 à 수렵 생활 하다, 이제 한 곳에 머물러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 바퀴 혁명(운송 수단의 발달, 생활 반경이 넓어졌다), 산업 혁명(기계의 발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인간소외 현상이 발생했다), 과학 혁명(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신화적 세계관 à 과학적 세계관, 달에는 더 이상 방아 찧는 토끼가 살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혁명은 인간의 생활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가 바로 예수의 부활이다. 하나님은 왜 예수를 부활시키셨는가? 부활은 악(불의)에 대한 선(정의)의 승리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매일 보는 악이다. 그 악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기지 못한다. 부활이 그것을 증거한다. 세상의 악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지만, 예수는 다시 사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심판하시고 이기셨다. 이 사건을 보면서, 악하게 사는 자, 불의를 행하는 자, 힘이 좀 있다고, 돈이 좀 있다고, 배운 게 좀 있다고 교만하게 굴던 자들은 모두 회개하고 선하게 살기로 결단해야 한다.

 

참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나누는 자만이 신적인 생명인 영생을 누리게 된다. 영생은 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사는 삶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삶, 즉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저 천국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산다.

 

구원이란 이 땅에서 불의하게 죄짓다(쉬운 말로 개같이 살다), 어쩌다 예수 믿어서 저 세상에 있는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 사항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전한다. 모든 것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제 이 사실 앞에서 우리의 할 일은 이것을 믿든지, 안 믿든지 하는 것이다. 이것을 결단이라 한다. 신앙은 결단 행위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믿기로 결단한다면, 예수의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세상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고, 예수의 부활을 못 믿겠다면 우리는 여전히 불의와 죄가 가득한 이 세상을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하고 죄가 가득한 곳인가는 우리의 일상에서 날마다 겪는 일이다. 게다가, 누군가에 의해 아픔을 당해보면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하고 죄가 많은 곳인가를 뼈저리게 알 수 있게 된다. 전쟁, 학살, 억압, 불법, 구체적으로는 위안부 문제’, ‘세월호 참사등을 들여다 보면, 이 세상의 악함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게다가, 우리가 이렇게 살다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우리의 삶은 참으로 비참하게 만든다.

 

예수의 부활은 이 모든 비참함을 완전히 바꾼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이다.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고 편리하게 하는 일은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지만, 그래서 그렇게 혁명을 통해 해왔지만, 그 모든 것 안에 스며 있는 비참함은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예수 안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부활이다. 이것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양을 비유로 들어 복음을 믿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이 아닌 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 우리는 누구의 양인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는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예수님의 양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은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욥바라는 도시에 살던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를 여제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예수를 믿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 나서기로 결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비다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헬라식으로 번역하면 도르가이다. 뜻은 암사슴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살았던 이 사람을 규정 짓는 문장은 길지 않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who was always doing good and helping the poor.” 그런데, 그에게 힘든 일이 발생했다. 그에게만 힘든 게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37).

 

도르가(다비다)가 죽자, 주변에 함께 예수를 섬기던 또다른 제자들이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서 가까운 룻다라는 곳에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욥바로 모셔 온다.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해서 죽은 도르가에게 나아갔을 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베드로를 붙잡고 도르가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울었고, 도르가가 살아 있었을 때에 그들에게 어떻게 선행을 베풀었은지, 증거를 보여주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39).

 

베드로는 그들의 소망을 꺾지 않는다.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이렇게 외친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랬더니,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다.

 

이것을 보며, 어떤 이는 거짓말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안 믿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러나, 그렇게 싸우는 것은 하등의 도움도 안 되고, 필요도 없다. 지금 여기서 성경이 전하고 있는 내용은 다비다가 실제로 죽었다 살아났는지 아닌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에서 부활의 역사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가 도르가를 향해 기도하며 다비다야 일어나라한 것은, 그가 다비다, 즉 도르가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새로운 피조물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기도 대로 도르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세워주신 하나님께서는 도르가의 선행을 인정해 주시는 거다. 핵심은 이거다. 지금 여기에서는 죽은 도르가가 다시 살아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 ‘부활의 역사’(선하고 아름다운 일)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인 자들의 삶은 완전히 바꾼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양을 잡아 먹던 삶에서, 양을 먹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삶으로 바뀐다. 때로는 놀부처럼 이것을 위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은 도르가 사건에서처럼 부활의 역사가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인 자들의 삶은 꿈이 바뀐다. 그것은 오늘 주보에도 실은 두 사람의 삶에서 발견 할 수 있다. 마르크 슐츠와 조나단 에드워즈.

 

예화)

 

미국의 개척사에 보면 18세기 초에 두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배를 타고와 신대륙인 미국에 내렸습니다. 한 젊은이는마르크 슐츠’(Marc Schulze)이고 다른 젊은이는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 1758)입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신천지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지만 그들의 꿈은 달랐습니다.

 

마르크 슐츠의 꿈은이곳에서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 내 자손은 가난을 모르게 부를 자손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뉴욕에다 술집을 차려서 열심히 일하여 그의 꿈대로 엄청난 돈을 벌어서 당대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나는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음으로 신앙이 자유로운 이곳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라 고 생각하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150년이 지났고 5대 자손들이 태어났습니다. 뉴욕의 시교육위원회에서는 세간에 자주 이름이 거론되는 두 사람의 가계를 조사하기 위해 그 자손들을 추적 하여 조사했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큰돈을 벌어 자손들을 잘 살게 해주겠다는 꿈을 가진 마르크 슐츠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062명의 자손을 낳았는데 그 자손들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교도소에 서 5년 이상 형을 산 자손이 96.

- 창녀가 된 자손이 65.

- 정신이상이나 알코올 중 독자가 58.

-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가 460,

- 정부의 보조를 받는 극빈자가 286명이었고

그 자손들이 정부의 재산을 축낸 돈이 15천 만 불(1800억 원)이었습니다.

 

한편,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앙생활을 한 조나단 에드워즈느 유명한 프린스턴 대학을 당대에 설립하였고 5대를 내려가면서 1394명의 자손을 퍼뜨렸습니다.

 

- 자손들 중에 선교사 목사가 116

- 예일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교수, 교사가 86, 군인이 76,

- 국가의 고급관리가 80, 문학가가 75, 실업가가 73, 발명가가 21,

- 부통령이 한사람, 상하의원 및 주지사가 나왔고,

- 교회 장로와 집사가 286명 이 나왔답니다. 도합 816명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조나단 가문은 국가에 낸 세금과 지도자로서 미국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정부 재산을 하나도 축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화 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인 자들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돈 버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도 전혀 아니다. 예수님의 양은 꿈이 달라진다. 예수의 부활을 믿기 전에는 나의 성공을 위해 양을 잡아 먹는데 혈안이었는데, 이제는 삶의 방향 자체가 달라진다.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자기를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놓을 줄 알게 된다. 도르가처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사람이 된다. 그야말로,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게 한다.

 

베드로와 도르가는 예수님의 제자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으로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의 부활의 역사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자기 자신을 헌신했다.

 

우리는 누구의 양인가? 우리는 무슨 꿈을 꾸고 사는가? 양을 잡아 먹고 있는가? 아니면 양을 먹이고 있는가? 내가 있는 곳에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가? 한 번 따라 해보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주님의 양! 주님, 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 새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세요!”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꿈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그 안에서 부활을 사시는 믿음의 자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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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34

믿음이란 무엇인가?

(로마서 5:1-8)

 

성경에서 개념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란 구원에서 필수 요소이다. 의는 신체의 피와 같다. 피를 다 흘리면 죽는 것과 같이, 의가 없으면 죽는다. ‘저 사람은 피가 달라할 때 쓰는 것처럼, ‘란 물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성경에서의 는 사람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다. ‘신적인 의를 말한다. 문제는, 를 어떻게 감지하고,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삼느냐이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죽고 사는 문제다. 피를 몸 속에 유지하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인 것과 같다.

 

로마서에서는 의가 세 곳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첫째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통해서, 둘째는, 율법에서,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로마서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어떠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58절에 드러나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선, 죄인이라는 개념을 보자. 죄는 매우 신학적인 개념이다. 죄는 매우 아슬아슬한 개념이다. 죄는 하나님과 절대적으로 관련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런 거다

 

아버지가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죄인가 아닌가?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것은 죄인가 아닌가?

 

통상적인 개념에서는 이 모두 죄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일을 말하고 있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는 아브라함이다. 시아버지와 동침한 이는 다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을 오히려, 의인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다말의 시아버지 유다는 다말을 향해 그는 나보다 옳도다(의롭도다)”라고 말한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아브라함과 다말의 이야기가 죄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의인의 이야기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모두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 죽여 놓고 하나님이 시킨거야!’, 그러거나, 간음을 해 놓고, ‘하나님이 시킨거야!’, 이러면 안 된다. 그래서, 죄라는 개념은 아슬아슬 한거다.

 

여기서 핵심은, ‘란 철저하게 신학적 용어라는 뜻이다. 죄는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 상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상태에서의 죄는 참으로 비참하다. 우리의 생명을 파괴한다.

 

말씀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는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 어둠 속에 내던져진 상태이다. 어떠한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한국의 전례 동화 중에, <해와 달>이라는 전례 동화가 있다. 엄마가 시장에 가서 아이들을 주려고 떡을 사오는데, 그만 산길을 걷는 중 해가 지고 말았다. 얼마나 불안한가. 죄의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컴컴한 밤에 산 길을 헤매는 것과 같다. 밤 중에 산길을 걷는 엄마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호랑이가 나타나서 엄마를 위협한다. 호랑이가 아주 유명한 말을 하면서 엄마를 괴롭힌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들이 난무한 가운데, 그 거짓말에 의해 인생이 망치게 된다. 호랑이는 진실인 것처럼 꾸며서 계속 엄마에게 떡을 요구한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엄마는 호랑이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고, 그 말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얼마나 가련한가? 호랑이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호랑이의 요구를 들어준다.

 

그런데, 어떠한가? 호랑이가 떡을 자신에게 건네준 엄마를 살려주는가? 결국, 엄마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는다. 죄란 이런 것이다. 죄 가운데 있으면, 거기에서 어떠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속임수에 넘어가 그곳을 떠돌다, 결국 죄 속에서 죽게 된다. 죄의 끝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죄의 위협, 호랑이의 위협은 계속된다.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는 어린 아들과 딸은 어둠 속에서 가슴 조리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엄마가 왔다. 아이들은 엄마가 떡을 사오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 그런데, 도착한 것은 호랑이였다. 그들도, 어둠 속에서 호랑이에게 꼼짝 없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동화줄을 내려주세요~’ 그랬더니, 정말로 하늘에서 동화줄이 내려왔다. 호랑이도 기도했다. ‘하나님, 동화줄을 내려주세요~’ 그랬더니, 정말로 하늘에서 동화줄이 내려왔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내려온 동화줄은 튼튼한 동화줄이었고, 호랑이에게 내린 줄은 썩은 동화줄이었다. 아이들은 튼튼한 동화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구원 받았고, 호랑이는 썩은 동화줄을 타고 올라가다 허공에서 그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수수밭에 떨어져 죽었다.

 

아이들에게 동화줄은 구원이지만, 호랑이에게 동화줄은 심판이었다. 왜 그런가? 아이들에게는 가 있고, 호랑이에게는 가 있기 때문이다.

 

의의 속성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우리가 캄캄한 밤 가운데에서, 즉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동화줄을 내려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이유는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된다. 아이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동화줄을 내려 주실 거라고 믿었다. 의심하지 않았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신다. 믿음이란 바로 이 안에서 작동한다. 믿음은 그에 대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랑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아무리 기도해도 동화줄이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화줄이 내려오기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사랑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절대로 될 수 없다. 호랑이처럼, 동화줄을 타고 올라가 아이들을 잡아 먹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동화줄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음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듣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여러분의 욕망을 믿음이라는 것에 덧입혀 낭비하지 말라. 호랑이의 마음을 버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가지라.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그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바로 의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참으로 의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셨는가? 그 사랑 안에 거하시겠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 있는 자이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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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29

교회의 터 (바울의 교회론)

(고린도전서 3:16-23)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600장에 보면 <교회의 참된 터는>이라는 찬송이다. 거기의 첫 가사는 이렇다.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라 그 귀한 말씀 위에 이 교회 세웠네 주 예수 강림하사 피 흘려 샀으니 땅 위에 모든 교회 주님의 신부라.”

 

이 찬송은 우리가 오늘 살펴볼 고린도전서 3장 중에서 11절을 가사화한 찬송가이다. 고린도전서 311절은 이렇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며,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고린도교회는 파당이 여럿 있었다. 하나는 바울파, 다른 하나는 아볼로파, 또 하나는 게바파이다.

1) 바울파: 유대교 율법주의와 전통적인 헬라철학에 거부감을 가졌던 그룹

2) 아볼로파: 엘리트 그룹, 인간의 지혜와 세상 학문 강조

3) 게바파: 유대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자들의 그룹, 율법중심주의

 

, 고린도교회 분열의 근본 원인은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그 터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아볼로파는 세상이 지혜 중심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을 거시고, 게바파는 율법을 중심으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터로 삼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교회의 터로 삼는 우매함을 보인다.

 

우선,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교회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교회 내에 존재하는 신령한 자들육신에 속한 자들에 대하여 말한다. ‘신령한 자들이란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들이다. 사실, 교회에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교회가 얼마나 평안하겠는가? 그런데, 현실교회에는 육신에 속한 자들도 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이란 믿기는 하지만 성령보다는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이게 고린도전서 31절과 2절의 내용이다.

 

신령한 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삶을 살기 때문에,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산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가? 이것은 갈라디아서 522절에 아주 잘 나와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와는 대조적으로, ‘육신에 속한 자들이 맺는 육신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19-21절에 잘 나와 있다. “육신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들은 안 믿는 자들이 아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믿기는 믿되, 아직도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자들을 말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런 자들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의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어린아이라고 표현한 것은 다 자라지 못한 존재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함이지만, ‘어린아이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리스도 안에서 망나니’.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주목하는 육신의 열매시기와 분쟁이다.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가장 큰 문제가 시기와 분쟁이었다는 뜻이다. 각 파당끼리, 서로 시기와 분쟁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에 평안이 있었겠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내세우고 있는 원리가 십자가의 도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강조하기를, 각 파당이 추종하고 있는 바울, 아볼로, 게바(베드로)는 추종의 대상이 아니라 사역자들이라고 한다. 사역자란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이는 주의 복음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는 서로 경쟁이나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는 것이다.

 

사역자를 추종하지 마시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된, 새로운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이다. 사역자를 추종하지 말고,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라. 주의 복음을 위해 서로 섬기고 봉사하시라.

 

사도 바울은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통해서 세워져 가는 교회를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9). 여기서 하나님의 밭은 수많은 곡식과 열매를 기대하게 하고, ‘하나님의 집은 가족과 평안과 보호를 생각하게 하는 비유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곡식과 열매를 맺는가?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가족, 평안, 보호’, 이러한 단어가 떠오르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무엇이 더 쉬운지 아시는가? 사실, 사역자를 추종하는 것이 더 쉽다. 그리고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사역자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 섬기고 봉사하는 게 가장 어렵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교회의 터를 예수 그리스도로 하더라도, 각기 다른 건축 자재를 통해 교회가 세워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생각해 보자. 건축의 질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건축자재로 결정 난다.

 

<돼지삼형제>라는 동화를 아실 것이다. 돼지삼형제가 살았는데, 각자 집을 지어 살았다. 첫째 돼지는 초가집을 지었고, 둘째 돼지는 나무로 된 집을 지었고, 셋째 돼지는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집을 지었다. 늑대가 돼지삼형제를 잡아 먹으러 왔을 때, 첫째 돼지의 초가집과 둘째 돼지의 나무집은 늑대의 초강력 바람에 훅 날아가버리다. 그러나,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셋째 돼지네 집은 늑대의 초강력 바람을 견뎌내고, 결국 돼지삼형제를 늑대로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준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비유를 쓴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13).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의 건축 자재를 말한다.

1) ,,보석: 이것은 최고의 건축재료이다.

2) 나무: 이것은 보통의 건축재료이다.

3) 풀이나 짚: 이것은 임시 건축재료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건축 자재는 성도들의 교회생활의 질 또는 믿음의 질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최고의 건축 자재인 금,,보석으로 집을 짓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마음과 정성을 다해 경건함과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 가운데 기쁨으로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보통의 건축 자재인 나무로 집을 짓듯이, 특별한 열심이나 정성 없이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임시 건축 재료인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듯이,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불신자들과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신앙생활(교회생활)을 한다.

 

지금 내가 어떠한 건축 자재로 성전을 지어 신앙생활(교회생활)하고 있는지는 위의 돼지삼형제의 이야기에서처럼, 바람이 훅 한 번 불면, 하나님의 불(시험, 연단)이 한 번 임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14, 15).

 

엉성한 건축 자재로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침을 준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6, 17).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지적하고 있는 교회공동체 최고의 적으로 자기 자랑 그리고 자기기만을 지목한다. ‘자랑은 고린도교회의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자랑의 핵심은 세상 지혜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보이는 현상이 자기기만이다. 기만이란 속이는 행위인데, 자기기만이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신앙생활(교회생활)을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파당을 짖고 분쟁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스스로 속이는 자들, 즉 스스로 속고 있는 자들, 자기의 지혜, 지식이 얼마나 형편 없고 조잡하고 어리석은지 모르고, 자기의 지식과 지혜가 맞다고 착각하여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런 자들을 자기기만에 빠진 자들이라 한다.)은 약도 없다. 전형적인 사람들이 기독교 이단들이다. 그리고 스스로 도를 깨우친 양 공동체와 섞이지 못하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18절에서 20절의 말씀에 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우리가 알듯이,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의 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지혜가 되고 구원이 된다.

 

우리는 무엇으로 교회의 터를 삼고 있는가? 우리는 때로, 교회는 이래야 돼, 저래야 돼, 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토대로 교회의 터를 삼으려 한다. 교회의 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앙은 절대적으로 이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건축 자재를 통해 교회를 세워 나가는가? 금은보석?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있는가? 나무? 특별한 열심이나 정성 없이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풀이나 짚? 불신자들과 거의 구별이 안될 정도로 신앙생활 하는가?

 

우리의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자.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니, 우리는 자랑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의 평안 가운데 살게 될 줄로 믿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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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2:23

부활이란 무엇인가?

(고전 15:12-19)

 

일단, 부활이란 무엇인지를 오늘 다 말할 수도 없고, 평생을 다 말해도 알 수 없는 것임을 먼저 말씀 드리고 싶다. 우리는 부활 자체를 안다기 보다,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부활을 알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는 부활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한다.

 

우리는 금요일에 성금요일 예배를 드렸다. 성금요일을 영어로 ‘Good Friday’라고 한다.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오면서, 엄마가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Good Friday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이다.” 그랬더니, 작은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Good이야?”

 

아이가 똑똑한가? 사실, 똑똑하다기 보다, 순진한 것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도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것도 아이이다. 그만큼,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봐야, 세상은 더 잘 보이는 법이다. , 아이처럼 우리는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이가 먹는다는 것은 질문할 줄 모른다와 동의어다. 나이를 먹으며 질문이 줄어드는 이유는 세상에 대하여 많이 알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눈과 귀를 닫기 때문이다.

 

어떤 분과 카톡으로 나눈 대화인데, 좋은 교육 교재가 될 수 있기에 사용한다.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마시라. 이분을 정죄하기 위해서 이것을 사용하는 게 아니다. 순전히 교육용으로 쓰는 것이다. 오타는 내가 수정한 것이다.)

 

잘 보았습니다. 부활이란 죽었다 다시 사는 것인데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은 부활이 아닌 것을 누구나 부인할 수 없지 않을까요. 인간의 풍습으로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은 진정한 참 숭배가 아님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승인하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기념하라고 부탁하심을 그저 따르기만 해도 되는 것을 구태여 온갖 불필요한 것들로 대신하는게 과연 올바른 숭배일까요? 부활절이란 성서에도 없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이교행위인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죠. 예수의 생일도 기록되지 않아 고대 태양신을 섬기던 날로 예수 생일이라 만들어 행하고 있는 것도 기독교와 천주교에서 자중해야 할 일입니다. 원래 하느님 백성은 생일을 지내지 않았습니다. 성서에도 생일 때 살해사건이 두 번 나오는데 그 왕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부처는 생일이 기록돼 그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도 우리가 예수의 생일을 경축하기을 원했다면 성서에 그날이 기록되어 있었겠지요. 성탄절을 만들어 지키는 일은 하느님을 모르는 불교와 뭐가 다르겠어요. 성서에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들만 알려준다고 봐야죠. 보내주신 카톡 고마웠어요. 성서와 하느님에 관한 토론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이 도전하고 있는 문제는 첫째, 부활절 달걀 사용에 관한 것이다. 둘째는, 부활절기와 성탄절기 같은 것을 왜 만들어서 지키느냐 이다. 모두다 이교도들이 하던 일이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나는 이분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시는지 모르겠다. 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았으면 좋겠다.

 

부활절에 달걀을 사용하게 된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산으로 올라가실 때 잠시 십자가를 대신 져준 구레네 시몬의 직업이 달걀장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뒤 그가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암탉들이 낳은 달걀이 모두 무지갯빛으로 변해 있었기에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달걀을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꼭 이런 전설때문에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는 것은 아니다. 모든 나라가 달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지도 않는다. 특별히 우리 한국 교회가 부활절에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쓰는 데는 구한말에 있었던 독특한 경험 때문이다.

 

구한말 가장 흔한 병이었던 학질(말라리아)에 특효약인 키니네(quinine·한자로 금계랍·金鷄蠟)를 당시 무역상사가 수입을 했고 이를 다시 전도사들이 사들인 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지방에 되팔기도 했다. 약을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닭이 그려진 약병과 복음서를 함께 샀기 때문에 복음서나 예수교를 생각하면 닭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금계랍을 먹고 병이 나으면 복음서를 읽게 되니 닭은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한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그 닭이 가져다 준 달걀이야말로 하나의 큰 선물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가난하던 시절, 달걀 하나만 먹어도 영양이 보충되던 때에 달걀이 가져다준 의미는 매우 컸다. 옛날 옛적 어린 시절, 달걀은 그 자체가 부()의 상징이었다. 도시락에 계란 프라이라도 들어있으면 행복했다. (소풍 갈 때 빼놓지 않은 메뉴가 삶은 달걀이었다.)

 

복음은 언제나 이렇게 그 지역의 문화를 그릇 삼아서 전파된다. 이것을 복음과 문화(기독교와 문화, 또는 토착화 신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성례전신학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공식적인 성례전은 두 가지 (가톨릭은 7가지)인데, 그것이 세례와 성만찬이다.

 

성례전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 끔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은혜의 경험을 말한다. 육신을 가진 우리 인간에게 경험이란 아주 절대적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 즉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져보거나 하지 않은 것을 믿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오해한다. 가장 오해가 많은 기독교 용어가 믿음이다. 바로 이 말씀 때문에 그렇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굉장한 오해이고, 틀린 말이다. 기독교는 망상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경험의 종교이다. 왜 그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성육신 한 하나님이다. 성육신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헛되이 믿는 허망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보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이는 것을 믿느냐 못 믿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오히려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믿기 때문이다. 그것을 욕심 또는 욕망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안데르센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어른들의 모습과 같다. 그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벌거벗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니, 벌거벗은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야 임금님에게 벌 받지 않으니까.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이는 어린아이다. 그래서 성경은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할 정도로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이 복된 눈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부활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 허망한 것이 아니다. 예수를 통해 눈에 보이게 끔 드러난, 하나님의 생명을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인류는)는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신, 2천년 전 유대 땅에서 태어나시고, 갈릴리에서 활동 하시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라는 한 사람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했다.

 

성경에 ‘yadah(야다)’라는 단어가 있다. ‘안다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인데, 이 말은 경험하다’, ‘성관계를 맺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통달하다는 뜻과도 같다. 누가 나를 가장 잘 알까? 부모님과 남편(아내)이다. 부모님은 나를 통달하고 있다. 나를 낳으셨기 때문이다. 남편(아내)는 나를 통달하고 있다. 서로 알몸을 드러내놓고 서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메타포를 이용해서 표현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부부관계(결혼관계)로 표현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경험한다, 통달한다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간다. 부모님은 우리를 통달하기만 하셨는가? 부부끼리는 경험만 하는가? 아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부부끼리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은 통달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경험하고, 그리고 그 경험한 것을 사랑할 때 비로소 그 상대를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나느냐?” 사도 바울은 말한다. “예수의 부활이 전파되었다.” ‘전파되었다는 것은 15절 전반부에서 말하고 있듯이,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셨다는 뜻이다. , 제자들과 몇몇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했다.

 

부활의 증언을 듣는 우리들도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들도 부활한 예수의 몸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는 위에서 어느 누가 제게 카톡으로 문제제기를 했듯이 이교도의 풍습을 지키는 우상숭배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게끔,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해 경험하기 위함이다. 문제는 그것을 눈으로, 모든 감각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한 마음에 있는 것이다.

 

야로밀의 질문이라는 글이 있다.

야로밀이 물었다.

"네 안에는 어떤 세계가 있니?"

.

.......

.

"내 안의 세계?"

.

나에게 돈이 얼마나 있는지 묻는 사람은 있었어도 내 안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

야로밀이 말했다.

"너는 불쌍한 아이로구나."

.

한 번도 나는 나를 불쌍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나는 내 안에 어떤 세계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안에 있는 세계 대한 목마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

"네 바깥 세상은 네 안에 있는 세계에 비하면 누추하고 재미없단다. 네가 만약 네 안에 있는 세계를 발견하고 나면 이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거란다. 네 안에 있는 세계 이외의 세계는 모두 신기루란다."

야로밀이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나면, , 하나님의 참 생명을 경험하고 나면, 이 세상의 일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 거다. 여기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있다. 눈으로 보여주는 데도 믿지 못하는 믿음 없는 자들이 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눈에 보이게 끔 해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참 생명을 경험해 보시라.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라. 그러면, 여러분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정말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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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11. 11:02

눈감고 눈뜨기

(행 9:1-6 / 21:15-17)


우리는 예수의 부활 이후의 삶을 산다. 부활 이전의 삶과 부활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 성령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 세상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지난 주에 말했다.

 

잠시 눈을 감아보자. 다시 떠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아무 것도 안 보이는가? 이번에 다시 눈을 감아보자. 다시 떠보자.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예수님이 보이는가?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오늘 설교를 마쳐도 된다.

 

어디에 눈뜨고 있었는가? 대개 우리는 자기 일에 눈 뜨고 산다. 대개 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먹고 사느라 바쁘다. 다른 곳을 돌아볼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자신도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거라고 위안을 한다.

 

1년 동안 한 권의 책 이상 읽은 비율을 따지는 것을 독서율이라고 한다. OECD 국가 중 한국의 독서율은 74.4%(2013년 기준)이다. 이것은 15세 이상의 사람들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성인을 기준으로 하면, 독서율은 65% 정도다. 다른 말로 하면, 성인 10명 중, 3-4명 정도는 일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은 책을 잘 안 읽는다. 그런데, 서점가에서 유독 잘 팔리는 책이 있다. 바로 자기계발서이다.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살다 보니, 남들보다 더 뛰어난 그 무엇인가를 계발하기 위해서, 자기계발서를 줄기 차게 읽는다. 자기계발서의 기본 철학은 자기 자신을 들들 볶아서 남들보다 한 수 위의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되자이다. 그러면서, 성공은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는 자의 것이라 자기 의를 부추긴다.

 

자기 의라는 말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자기 구원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기 구원을 실현한 만큼 자신이 행복할 수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고,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자기 의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다.

 

그런데, 자기 의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 특별히 무한경쟁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신기루같은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경제체제에서 자기 의를 통한 자기 구원은 절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몇몇 성공한 사람들을 토대로 권세 잡은 자들이 일반대중에게 던져주는 떡밥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속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의는 한마디로 헛일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소위 영적인 일이라는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특별히 신약성경)은 이 점을 줄기차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르고, 아직도 현실 생활에서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자기 의를 쌓는 데 여념이 없다.

 

자기 의가 헛일이고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각 나라에서 통용되는 돈을 예로 들어 보자. 한국에서는 원화를 쓰고, 미국에서는 달러화를 쓴다. 각 나라마다 자신들이 쓰는 돈이 다르다. 한국에서 원화를 아무리 많이 모아도, 그것을 미국에서 쓸 수 없다. 미국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우리가 모아야 하는 것은 달러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미국에 살기를 바라면서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원화를 모으기만 한다면, 그것은 헛일이다. 원화를 아무리 많이 싸 짊어지고 미국으로 와도 그것을 달러로 바꾸지 못하면, 그가 모은 원화는 종이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헛일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이다. 예수 만난 후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는 사울은 자기 의를 쌓는 데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 사람이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혈통이 좋다),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으며(학식이 좋다), 바리새인이었다(권력이 있다). 게다가 그는 열정이 넘쳐났다. 혈통 좋고, 학식 있고, 권력이 있는 자에게 열정이 넘쳐나면, 그가 어떠한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예상치 못한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역량을 나사렛 예수 일당들을 때려 잡는 데 썼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 일을 하는 중에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예수 일당을 모두 때려 잡고, 지방에 숨어 있는 예수 일당을 때려 잡기 위해 대제사장(공의회)에게 공식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의기양양하게 길을 떠났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굳게 믿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의를 쌓아 하나님께 인정받고 구원 받은 백성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에게 참으로 신비한 일이 벌어진다.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자신에게 비추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눈이 먼다(눈을 감게 된다). 그 상태에서 그가 들은 음성은 이런 것이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 이 음성을 들은 사울은 질문한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그가 들은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 이 사건을 겪은 이후에, 사울은 자신이 행하던 헛일자기 의를 내려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한다.

 

지금 우리는 부활절 이후의 삶을 살고 있다. 사울의 이 사건도 예수의 부활이 있은 후에 벌어진 일이다. ‘자기 의를 쌓기에 열심이던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졌는데, 우리에게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있는가? 먹고 살기에 바빠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가? 그러한 일은 먹고 살기 바쁜데 방해가 되는 쓸데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부활의 사건 후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눈감기의 순간이 꼭 있어야 한다. 이전의 것에 대하여 눈을 감지 못하면, 새로운 것에 대하여 눈을 뜰 수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이전 것을 보고 있으면서, 예수의 부활로 인해 새로워진 세상을 보기 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갔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의 부활로 인해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에 눈을 떠야 한다.

 

사울을 보라. 눈감기 전과 눈감았다 떴을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나. 눈감기 전에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그 일에 아주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그에게 구원은 어떻게 왔는가? 눈을 감았다 떠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게 되었을 때에 왔다. 그는 눈을 뜬 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의 열심이 그도 구원하고, 다른 이도 구원했다.

 

오늘 또다른 본문인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 (특히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눈감기 전과 눈을 떴을 때 그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나? 눈감기 전에 그는 그물을 던져도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21:3). 헛일을 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눈을 감고 헛일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히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5-6).

 

사울이 자기 의를 쌓는 헛일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도로 거듭나 참된 구원을 실현한 것, 그리고 제자들이 밤새도록 수고하여도 고기 한 마리도 못 잡는 헛일을 버리고 수많은 고기를 잡게 되는 일이 어느 때 발생하는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될 때이다.

 

우리는 어디에 눈을 뜨고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헛일이 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헛일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헛일에 대하여 눈을 감으라. 그리고, 나에게 참된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뜨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구원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뜬 후의 삶을 특징짓는 것이 바로 목양이라는 것이다. 대개 목양은 목사들이 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목양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 베드로와 예수께서는 이러한 대화를 나누신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21:15-17). 예수께서는 이것을 세 번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이것을 세 번 반복했다는 것은 목양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을 깊이 새기기 위함이다.

 

우리는 양을 잡아 먹는 자들이 아니라, 양을 먹이는 자들이다. 아직도 눈감고 눈뜨기를 못한 자는 양을 잡아 먹으며 자기 자신을 살찌우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지만, 눈을 감았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뜬 자들은 양을 먹이는 일에 자기 자신을 헌신할 것이다.

 

여러분은 누구인가? 어디에 눈을 뜨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자기 의’, 헛일을 하는가? 양을 잡아 먹고 있는가? 아니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에게 눈을 뜨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의 양을 먹이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아보자.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자기 의’, 헛일에 대하여 이렇게 눈을 감으라. 이제 눈을 떠보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는가?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 지금 여러분들이 눈을 떠 보고 있는 그 예수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이시다. 그러니, 예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그의 양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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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4. 4. 11:54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요한복음 20:19-23 / 사도행전 5:27-32


부활한 이후가 더 문제이고, 더 중요하다. – “진짜 그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껴? 또는 (줄여서) 이젠 어쩔껴?”

 

아이를 갖고 싶은 부부가 아이가 잘 안 생겨서 고생했는데, 어느 날은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아이가 생겼다고! 그러면 이제 그 부부는 어떻게 해야하는 건가? 당연히, 아이를 잘 키울 생각을 해야 하고, 이제 부모로서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이들에게 아이가 생겼는데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이를 잘 키울 생각도 안 하고, 부모로서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도 불쌍해지고, 부모도 불쌍해진다.

 

어떤 사람이 좀 몸이 안 좋아서 그 증상에 해당하는 병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암이었다. 너무 놀라서 그는 병원을 찾아 정밀검진을 받았다. 그런데, 다행히 암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하겠는가? ‘괜히 걱정했네.’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려했던 대로 위의 사람이 암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니야, 나는 암에 걸린 게 아니야. 병원 진단이 잘못 된 거야. 별 문제 없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잖아. 나는 암에 걸린 게 아니야. 그럴 리 없어.’하면서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받아 들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행복의 첫 걸음, 책임 있는 인생, 의미 있는 삶을 향유해 가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자신의 현실(현재)있는 모습 그대로받아 들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번민하는 이유는 자신의 현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신의 현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과 타협하고, 자포자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의사들에 의하면, 대개 암 환자들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 자체를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암환자에게 의사가 환자분에게는 암이 있습니다라고 전하면, 암환자의 처음 반응은 이런 것이다. ‘내가 왜?’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들도 똑 같은 반응을 한다. 사랑하는 이들(자식이든, 남편이든, 여기서 예외는 부모님이다.) 갑자기 죽었을 때, 또는 예상치 못하게 죽었을 때 사람들은 대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힘들어 한다. ‘? 내 아이가 왜? 내 남편이 왜? 내 아내가 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힘들어 하는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나 병에 의해서 자기 몸에 장애가 생긴 사람들이라고 한다. ‘내가 왜?’

 

어떠한 일들은 모두 가능성이다. 임신, , 갑작스런 상실(죽음), 장애. 문제는 그러한 가능성이 진짜 나의 현실에서 발생한 후의 삶이다. “진짜 그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껴? 또는 (줄여서) 이젠 어쩔껴?” 우리의 인생은 사건이 발생한 후에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불행과 행복의 갈림길에 여기에 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본인이 죽임을 당할 것과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게 될 거라는 것을 몇 번 말씀하신다. 그때만 해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냥 가능성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그 일이 정말로 벌어졌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것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 부활하셨다! 이것을 믿으시는가?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가? 그게 쉽지 않는 거다. 오늘 말씀에서도, 부활하신 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나타나신다.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붙잡혀 십자가 처형 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숨어 있었다. 바로 그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이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은 아마도 기절초풍했을 것이다.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당연하다. 두려워 떨고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강이다.

 

정말로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 부활하셨다. 현실이었다. 제자들이 그것을 있는 모습 그대로잘 받아 들였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매우 잘 알려진 의심 많은 도마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을 전한다.

 

우리도 얼마든지 의심 많은 도마가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나도 도마처럼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과 옆 구리에 난 창 자국을 손으로 직접 만져보면 믿을 수 있을 거야!’ ㅡ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거나,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하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 발생하면 우선 믿지 않는다. 위에서 충분히 말씀 드렸다. 현실 거부가 일어난다. 자신의 다리가 잘려 나간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다리가 잘려 나간 것을 믿지 않으려 든다.

 

우리는 의심 많은 도마의 이야기를 보면서 도마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거참,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더니 믿음이 별로 없네.’ 전혀 그렇지 않다. 도마는 훌륭한 사람이다. 도마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보고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다. 우리가 과연, 도마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는가?

 

그렇다면, 제자들은 다른 이들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부활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바로 그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자.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1, 22).

 

성령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도 통할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있는 모습 그대로볼 수 없다.

 

예수께서 일으켜 지셨다. 스스로 사는 게 아니다. 스스로 죽음에서 벌떡 일어서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 주시는 거다. ,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러니, 믿음 없으면 그 하나님의 일이 눈에 안 들어 온다.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보고도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다.

 

여러분에게 질문한다. ‘성령 받으셨는가?’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어떻게 아는가? 우선, 예수의 부활이 믿어지면, 벌어진 일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우리는 성령 받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인생을 살아간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생각해 보자.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죽었겠는가. 저 사람을 믿지 못하는데 나의 몸을, 나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가. 은행을 못 믿는데, 은행에다가 돈 집어 넣을 수 있나. 투자할 수 있나. 사기 당하기 십상이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세 가지가 생긴다. 평강, 담대함, 능력. 당연하다. 하나님을 믿는데, 이 마음에 평강이 없을 수 없다. 하나님이 손잡아 주고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데, 그런 능력의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데 평강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거다.

 

삶이 불안하신가? 평강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니, 불안해 하지 마시라. 마음에 평강이 오면, 그와 동반되는 것이 담대함이다. 담대함이 어떻게 표출되는지는 사도행전의 본문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 죽을까 봐 두려워서 숨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뒤, 그들은 담대하게나아가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들의 담대함을 보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거의, ‘죽일 테면 죽여봐라!’라는 태도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공회에 잡혀 갔던 베드로와 사도들은 담대하게 그들과 맞서 복음을 전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부활을 믿으면, 능력이 생긴다. 능력이란 창조성을 말한다. 없던 일이 생기거나, 안 되던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능력을 오해하면 안된다. 능력을 가지면,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하늘을 날거나, 복권에 당첨되거나, 돈을 많이 벌게 되거나, 잘린 손이 다시 생겨나거나, 암이 낫거나,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능력을 가지면,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땅에서 열심히 살게 되는 것, 복권에 당첨되지 않아도 되도록 열심히 일하는 것,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알뜰살뜰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 잘린 손이 다시 생겨나지 않더라도 나에게 손이 하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 암이 낫지 않더라도 그 암으로 인해 죽게 될 것을 인정하고 인생을 의미 있게 마무리 하는 것,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죽은 이의 넋을 기리며 그 사람의 몫까지 열심히 사는 것, 이런 것이 오히려 능력인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 부활의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 안에서 부활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예수님께서 그러셨 듯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받고,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변화, 능력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문제, 이웃의 삶의 문제, 이 세상의 악함,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일들, 이런 것들을 놓아두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잠을 이기게 되고, 게으름을 이기게 되고, 분주함을 이기게 되고, 세상의 정욕을 이기게 된다.

 

사도행전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한 시(한 시간, one hour)’도 깨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얼마나 기도에 힘쓰게 되는지 나온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3:1). 그러다, 이들이 다리 불구자를 고치는 역사까지 벌인다. 기도의 사람이 되는 능력이 임하길 바란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아시겠는가?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의 부활을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을 받아 예수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인 자의 삶은 그야말로 완전히 새로운 삶이 된다. 평강과 담대함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는다. “진짜 그 일이 벌어졌으니 어쩔껴? 또는 (줄여서) 이젠 어쩔껴?”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현실을 직시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는 믿음의 자녀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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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5. 10. 8. 05:37

야곱의 축복 II

ㅡ주권자와 장자, 그리고 그리스도인ㅡ

창세기 64

(창 49:8-28)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무리 예언을 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 예언을 이루는 일은 절대로 아무런 노력이나 어떠한 시련 없이 그냥 성취되지 않는다. 야곱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열 두 아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뜬금 없이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어가는 삶의 여정은 험난하다.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과 이삭의 삶의 여정, 무엇보다 야곱의 삶의 여정이 그것을 말해 준다.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고, 인내와 고통의 연속이다. 그 험난한 삶의 여정 가운데서 그들을 지켜 준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그들은 일찌감치 걸어가야 할 그 길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주의 길을 가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다. 주의 길을 가는 자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 주의 길을 가는 일이 쉽지 않다. 사방이 막혀 있을 때, 오직 바라 볼 것이 하늘 밖에 없다는 것은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기도 하다.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하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 앞에 놓쳐 있는 어려움을 알았다. 그 어려움을 막연히 안 것이 아니라 모든 오감을 통해 알았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더욱 간절할 수 밖에 없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주의 구원이 없다면 결코 걸어갈 수 없는 길, 주의 구원이 있기 때문에 기어코 갈 수 있는 그 길. 야곱은 열 두 지파를 이루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해 갈 자녀들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빌고 또 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자녀들의 발등에 불빛이 되어주는 건 그 무엇보다 아버지의 당부와 삶이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 부모님을 떠 올리며, 그분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생각해 본다.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은 앞으로 맞이 하게 될 어려움 앞에서 무엇보다 아버지의 구원의 간구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야곱의 열 두 아들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품어야 할 기도문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긴 말로 우리의 형편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 한 마디만 하면 된다. “여호와여, 나는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문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우리의 모든 형편을 우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이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강한 손을 펴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겠는가.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 드릴 수도 없고, 기도의 응답도 바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으며, 희망 가운데 살 수 있는 것이다.

 

자녀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자녀를 양육한 부모는 그 누구보다 자녀에 대해서 잘 알 수 밖에 없다. 야곱은 어려움 가운데 열 두 자녀들 낳아 키우며 그들 각자의 성격과 성향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 열 두 아들들을 향한 아버지 야곱의 축복은 뜬 구름 잡은 축복이 아니라, 바로 모태에서부터 살펴본 자녀들의 성격과 성향을 토대로 한 매우 구체적인 축복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28).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야곱의 축복 중에 유다와 요셉에게 한 축복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역대상 저자는 야곱이 유다와 요셉에게 한 축복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2). 성경은 유다를 주권자, 요셉을장자로 각각 부른다.

 

주권자장자는 기독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 복음서와 (바울과 일반) 서신서는 예수를 주권자(주님)’장자(맏아들)’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권자 유다에게 내려진 축복과 장자 요셉에게 내려진 축복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주권자이시며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야곱은 유다가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고 축복한다. 찬송의 대상이 되는 일은 매우 영예로운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구원사역)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나 찬송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나의 삶에 어떠한 이로운 영향을 실제적으로 베푼 대상에 대해 찬송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예배자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찬송의 대상이 되는 이유와 그리스도인이 찬송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으로서 찬송 받으시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찬송 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구원사역)을 최선을 다해 이 땅 위의 사람들에게 베푼다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함과 더불어 그의 제자들(a follower of Christ)을 찬송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과연 이 땅에서 찬송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좀 더 편안한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과연 이 땅에서 칭찬 받고 있는가? 사람들의 호감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물론 복음의 속성상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심판 그 자체가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복음이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우리의 삶으로 온전하게 전한다면 세상이 우리를 칭찬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나 굳이 여러 가지 예를 들지 않더라도, 현재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이미지는 바닥을 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찬송의 대상이 되신 이유는 그의 신분이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자동적으로 찬송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은 그 찬송의 대상에게서 어떠한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찬송 받으시는 이유는 그의 십자가 사역 때문이다. 그의 십자가 사역이 없었다면, 그에게 과연 부활이 있었을까? 부활이 먼저가 아니라, 십자가가 먼저였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부활을 믿고, 자기 자신을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줄 아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희생은 자기 연민이나 의협심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부활의 은총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희생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남들 위에 군림하는 주권자(주님)이 아니라, 남을 위해 생명까지도 내어놓는 섬기는 주권자였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그리스도인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이다. 군림하는 자가 받는 찬송은 억압된 찬송이지만, 섬기는 자가 받는 찬송은 자유한 찬송이다. 그리스도인은 찬송 받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 주었기 때문에 찬송 받는 것이다.

 

야곱은 주권자로서의 유다에 대한 축복뿐만 아니라, 풍성한 소출에 대한 축복도 한다. 빈곤한 자는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제적 가난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돈으로만 그 가치를 평가 받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이나, 야곱의 축복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를 말하지 않는다.

 

야곱은 유다에게 다름과 같은 축복을 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을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11-12). 포도나무가 얼마나 지천에 널려 있으면 나귀나 암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에 매겠는가. 포도주가 얼마나 풍성하면 빨래를 포도주로 하겠는가. 포도주가 얼마나 풍성하면 그것을 매일 마셔 눈이 포도주처럼 붉겠는가. 우유가 얼마나 넘쳐나면 그것을 매일 마셔 이빨이 다 하얘질 정도가 되겠는가.

 

포도나무와 포도주, 그리고 우유를 통한 비유의 축복은 모두 유다에게 임할 풍성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풍성함은 하나님이 유다에게 베푸신 은혜를 상징한다. , 이 풍성함은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 계신다는 징표가 된다. 풍성함을 단순히 물질적으로만 환산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 안 되는 징표일 수 있으나, 유다 지파에서 나온 다윗의 이야기나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 진짜 풍성함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유다에게 임한 풍성함을 가장 잘 표현한 신약의 말씀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우었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4:11-13).

 

사무엘 상하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는 바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그 말씀과 일치한다. 왕이 되기까지, 그리고 왕이 된 후에도 엄청난 시련을 겪었으나 풍성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만을 바라 보았다. 복음서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모든 인류를 배부르게 먹이시는 생명의 양식이셨지만, 머리 둘 곳 조차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면서도 결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으셨다. 그는 늘 하나님 안에 머무셨다. 이것의 그의 풍성함이었다.

 

그리스도인의 풍성함은 세상이 말하는 재물의 많고 적음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의 풍성함이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자는 가난할지라도 풍성한 자요, 하나님 안에 머물지 못하는 자는 부자라 할 지라도 빈곤한 자이다. 유다가 받은 풍성함의 축복은 그가 언제나 하나님 안에 머물게 되어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거라는 축복이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자는 언제나 풍성한 은혜를 누린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사야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43:1-2).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세상을 향해 자기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미 유다에게 내린 야곱의 축복과 같은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붙드시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이것은 유다에게서만 나타나는 축복이 아니라, 이제 살펴볼 요셉에게도 나타나는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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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