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에 해당되는 글 580건

  1. 2017.01.30 라마 나욧 같은 교회
  2. 2017.01.26 네가 어디 있느냐?
  3. 2017.01.26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 1
  4. 2017.01.19 창조와 신앙
  5. 2017.01.19 들으라
  6. 2017.01.19 세례와 시험
  7. 2017.01.02 세례 요한의 죽음 2
  8. 2016.12.20 현몽
  9. 2016.12.17 불신과 믿음의 변증법
  10. 2016.12.06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11. 2016.11.30 믿음이 있다는 것 1
  12. 2016.11.22 최고의 감사
  13. 2016.11.17 들을 귀
  14. 2016.11.13 주님께 비스듬히 기대기를 간구하는 기도
  15. 2016.11.13 비스듬히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30. 19:17

라마 나욧 같은 교회

(사도행전 6:1~7, 사무엘상 19:18~24)

 

역동적인 교회를 세워 나가는 데, 66권의 성경 중 사도행전만큼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성경도 드물다.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지나면 메너리즘에 빠지고 원치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잘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때마다, 우리는 멈추어 서서, 자신의 내면과 외면을 면밀히 살펴 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초대교회도 처음에는 매우 순탄하게 성장하는 것 같았다. 예수님의 승천 후,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120 여명의 열 두 사도와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능력에 힘 입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복음을 힘차게 전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투옥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했다. 가는 곳 마다 거침 없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했고,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도 고쳐주는 기적을 베풀었다. “금과 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은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내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능력인 줄로 믿는다! 삶에 어려움이 있거든, 능력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라! 하나님의 크고 비밀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일어날 줄로 믿는다!

 

초대교회의 절정은 432절 이하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4:32-35).

 

무서운 광경이다. 요즘, 이단들이나 하는 일이,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일어났다. 신천지에 빠져서 재산을 탕진하고, 남편과 자식들까지 모두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요즘에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종말론적 신앙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분별이 필요한 말씀이다.

 

아무튼, 이렇게 무섭게잘 성장하던 초대교회에 어려움이 닥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어떻게 교회를 어렵게 했는지,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 한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이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3-4).

 

6장에 가면, 초대교회는 또다른 어려움을 만난다. 우리가 읽은 말씀이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교인이 많아졌다는 뜻은, 그만큼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그 당시 초대교회에서 하던 일 중에 구제 사역이 있었다. 과부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옛날 과부는 먹고 살기 정말 힘들었다. 성경에 단골로 등장하는 사회적 약자 삼인 방(나그네, 고아, 과부) 중 하나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이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 중심의 교회였다. 그렇다 보니, 구제하는 일에 히브리파 과부들이 헬라파 과부들보다 더 잘 챙김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헬라파 과부들의 마음이 상했다. 누구든지, 어떤 이유에서든 차별 받으면 마음이 상하는 법이다.

(일례로, 배식을 하는데, 히브리파 과부 식판에는 찡긋이 윙크하며 고등어 몸통 부분을 놓아주며 맛있게 드세요!’하면서, 헬라파 과부 식판에는 고등어 대가리나 꼬리 부분을 놓아주며 본 척 만 척 하면, 마음이 안 상하겠는가!)

 

무엇이든지, 몰입을 방해하는 3가지의 요인이 있다. 안정성의 위기, 의미의 위기, 활력의 위기가 그것이다. 이것을 신앙에 대입해 보면,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도 다르지 않다.

 

안정성의 위기란 이런 것이다. 직장에서 언제 잘릴 지 모르면, 그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게 쉽지 않다. 예전에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한국을 강타한 적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명 대사가 나온다. “회사는 전쟁터이지만, 밖은 지옥이다.” 미생은 지옥으로 떠밀리지 않으려고 전쟁터 같은 회사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계약직 직원의 삶을 그리고 있다.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몰입이 떨어진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이니까, 신앙에 몰입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꾸어 가야할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든든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이다. 교회 안에서 다툼이 있고, 차별이 있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면 안 된다.

(<시골교회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읽다 보니까, 시골의 한 교회 목사님이 동네 부녀회 회원들이 교회 일을 잘 도와주어서 교회가 잘 세워져 나가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라 동네 부녀회 회원들이 교회를 도와주는 이유가 자기들이 안 도와주면 교회가 망할까 봐 불쌍해서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그래서 세상을 걱정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도움을 주는 든든한 교회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사람도 보면, 어떤 사람은 걱정시키는 사람이 있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 ‘걱정시키는 사람은 안정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걱정해주는 사람은 안정성을 확보한 사람이다. 이렇듯,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겠는가? ‘걱정시키는 교회’? 아니면, ‘걱정해주는 교회’? 우리는 할 수 있다. Yes, we can!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의미의 위기이다. 의미의 위기는 지금 현재 이 일을 왜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위기도 여기서 온 것이다. 그들이 왜 구제사역을 시작했는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의미를 잃어버리니까, 히브리파 과부들과 헬라파 과부들을 차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춘기 때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이 의미이다. ‘나는 누구니? 나는 왜 살지?’ 사춘기 때는 엄청 고독하다. 그러면서 성장한다. 사춘기를 보내면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인생이 참 힘들어진다. 부모나 선생님은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다른 무엇보다 삶의 의미를 스스로 잘 찾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의미의 위기가 와서 신앙의 몰입이 안된다. “내가 지금 왜 교회에 나오고 있지? 내가 지금 교회에서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이것에 대한 확실한 의미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지 않으면, 신앙의 몰입은 굉장히 힘들다.

 

오바마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한 어느 인터뷰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독서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기독교인에게 의미는 다른 데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고대교회 교부였던 제롬은 이런 말을 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여 신앙의 의미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오늘 말씀 7절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의미를 충만히 찾아가는 교회를 세워가자.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세 번째 위기는 활력의 위기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가 구제사역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가 정확히 나온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2). 제자들이 말씀도 전하고 구제도 하고, , 이것저것 하느라 너무 분주하다 보니, 이것도 제대로 못하고, 저것도 제대로 못해서 결국 활력을 잃은 것이다.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것이다. “과도한 업무에 몸과 마음이 지쳤다.” 신앙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도 마찬가지다. 교회 사역을 과도하게 하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지친다. 사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행한 일이 바로 일곱 명의 집사를 세운 일이다. 교회는 공동체이다. 공동체는 누구 하나의 헌신으로 세워가는 곳이 아니다. 공동체는 더불어 함께 하는 곳이다. 요즘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헌신이 몇몇 사람들에게만 집중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큰 교회에 몰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큰 교회 가면 헌신 안 해도 되니까. 앉아 있으면 다 해주니까.

 

갈라디아서 6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의 법은 혼자서 성취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짐을 질 때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서로 짐을 질 때 교회는 활력이 생긴다.

 

우리가 이제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세워 나가야 할 교회는 안정성 있는 든든한 교회, 세상을 걱정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로해 주는 교회, 그리고, 지금 왜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아는 교회, 또한, 서로 짐을 지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 나가는 활력 있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는 한 마디로, ‘라마 나욧 같은 교회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나와 여러분이 함께 꿈꾸고 세워 나가야 하라 교회의 비전이다. 사무엘상하의 말씀은 다윗 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중에서 19장은 다윗을 시기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라마 나욧이라는 곳으로 도망친다. 그는 그곳에서 선지자 사무엘과 함께 은신하여 생활한다. 그때도 정보 기관이 있었다. 사울은 정보통을 통하여 다윗이 라마 나욧에 은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전령(특공대, 델타포스, 네이비실)을 보낸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사울의 전령들이 라마 나욧에 이르면 이상하게도 그들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 잡혀 갑자기 예언을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전령들은 다윗 죽이기라는 작전을 수행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그들의 삶이 변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세 번 연거푸 벌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울 왕이 직접 간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도 라마 나욧에 도착하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런 속담도 생겨났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나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 교회만 오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교회! 성경의 말씀이 성취되는 교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 생명을 살리는 교회! 우리 모두 열심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나가며 연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라마 나욧같은 교회를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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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6. 11:08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8~2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진술이 가장 중요하다. 이 진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뜻과, 하나님의 뜻에 종속된다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부정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은 모두 선하다(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어떠한 이유에서 건 미워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죄의 개념이 생긴다. 죄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과 3장의 언어로 다시 옮기자면, 죄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해 보자.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지 판단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는 선악의 판단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자기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악이다.

 

(어제 최순실이 특검에 출두하면서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 자백을 강요하고 있어요!” 이 뉴스를 접하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페이스북에 한 마디 남겼다. “그러면 자신이 한 짓은 민주주의인가?”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하면 선이고, 자신에게 불리하면 악이 된다.)

 

아담과 하와의 죄는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했다는 데 있다. 그들에게 선은 '내 욕망의 성취'일 뿐이며 욕망이 성취되지 않고 좌절되면 그것이 악이다. 죄는 선과 악의 기준이 사사로워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악이 판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과 악이 사사로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선을 선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으로 규정한다. 이제 인간은 악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악으로 규정한다. 이게 바로 죄이다.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나온다. 몹시 배고픈 여유가 길을 가다가 포도나무를 발견했다. 여우는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포도를 따먹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포도가 너무 높이 달려서 결국 그것을 못 따먹었다. 여유는 포도 따 먹는 것을 단념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 포도는 분명 신포도일거야!”)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나는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할 때는 따먹고 싶은 맛 있는 포도였다가, 자신에게 불리하고 따먹지 못하게 되니까 신포도가 되는 것이다. 포도는 그대로인데,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위치냐에 따라서 그 포도의 선과 악이 갈린다.

 

결국 동산 중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된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져처음 본 것은 자기들이 벗은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보였다는 뜻이다. , 자기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나스키소스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그 이야기에서 나르시스즘이 생겨났다.

 

(나르키소스는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모습에 매료되어 결국 우물에 빠져 죽는다. (이 외에도 여러 판본이 있다. 그것이 우물에 비친 모습인 것을 알고, 굶어 죽었다는 판본, 또는 자살했다는 판본) 나르키소스의 뜻은 또는 무감각이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은 잠을 자는 것처럼 죽은 모습이고, 자기 이외에 타자 또는 사물에 대하여 무감각해진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해져 자기 자신 밖에 안 보인다.)

 

죄에 빠지면, 즉 선악을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자기애에 충만해지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불화와 두려움과 죄의식과 핑계가 그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거니셨다. 그들이 죄 짓기 전에는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죄를 짓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숨는 행위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들은 죄의식을 느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가 그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 그들은 벗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즉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핑계를 댄다. 아담은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죄를 전가 시킨다. 이들이 왜 이렇게 핑계를 댈까? 자기애 때문이다. 자기 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이것도 선과 악에 대한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선과 악의 판단이 사사로워진 것이다. 자기는 선하고, 남은 악해 보이는 것이다. 아니, 자신은 선하게 판단하고, 남은 악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자기는 잘못 없고, 남이 잘못한 것이다.

 

이게 참 비극이다. 왜 그런가? 아담과 하와가 어떠한 관계인가? 2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시고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신다. 하나님은 잠이 든 아담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어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돕는 배필을 보고 아담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가 결혼식 때 선포하는 말씀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죄가 들어가니까 아담에게서 하와가 분리된다. 이들은 더 이상 한 몸이 아니게 된다. 아담은 자기 살겠다고,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인 아내를 팔아 먹는다. 이런 현상이 하와에게서도 발견된다.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자신은 선한 것으로 판단하고, 뱀은 악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보았듯이,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31절에서도 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한다.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죄란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부정하게 한다. 죄는 선한 것을 악하게 만든다.

 

죄는 결국 불화를 조장한다. 죄가 없을 때는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 모든 것이 불화가 조성된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하와와 뱀, 즉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구원이란, 화해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이 말씀에서부터 시작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21). 화해란 다른 말로 해서, 자기애 때문에 자기 자신만 보던 눈을 나 아닌 다른 피조물(타자)에게로 돌리는 것, 피조물을 넘어 나를 지으신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구원이란, 화해란, 주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물으실 때 숨어서 자기 자신만 보는 게 아니라,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서 그들을 돌보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두려움 없이 뵙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회 공과 3과에서 묻는) “네가 어디 있느냐?”의 질문은 위치 정보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존재 정보를 묻는 질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구글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필요한 것이다.) 불화 가운데 있냐, 화해 가운데 있느냐. 탄식하는 피조물 가운데 있느냐, 나 몰라라 하고 있느냐.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뵙고 있느냐, 숨고 있느냐.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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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6. 11:06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

(고린도전도1:10-18)

 

에큐메니컬 주일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

 

요즘 굉장히 이 용어가 오해 받고, 잘못 쓰인다. 복음주의의 반대인 것처럼 쓰인다. 그래서 복음주의 진영(WEA)과 에큐메니컬 진영(WCC)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복음주의는 예수만이 구원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보수주의고, 에큐메니컬은 예수 외에 다른 것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진보주의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2013 WCC 총회가 한국 부산에서 열렸을 때 한국의 보수교단에서는 WCC 총회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오해고 무지에서 비롯된 웃픈일이다.

 

에큐메니컬의 진정한 의미는 복음을 위해’ (분열된) 교회가 연합하고 일치를 이루자는 뜻이다. 공산당처럼 커다란 한 덩어리 조직을 만들자는 의미가 아니다. 연합기구를 만들어서 무슨 조직처럼 힘 자랑하자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계속 분열의 아픔을 겪었다. 교회는 예루살렘교회가 효시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유대교의 한 분파였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고스란히 지키며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면서, 유대교 율법과 전혀 상관 없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율법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문화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유학 와서 에모리에서 수업 듣는데, 재채기 하면 옆 사람이 왜 그랬슈?”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왜 그랬슈가 아니고, ‘갓 블레슈였다. 미국인들은 재채기 하면 영혼이 날아간다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갓 블레슈해준단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다. 우리는 그저 재채기를 시원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채기는 힘차게 해야 제 맛이다. 이처럼, 문화가 다른 사람한테,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예루살렘 모교회에서 분리된 교회가 안디옥 교회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모교회이지만 유대인들이 주를 이룬 교회였고,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들이 주를 이룬 교회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의 한 분파로 머물지 않고, 완전히 분리되어 하나의 종교가 된 것은 이방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다. 그러한 일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사도 바울이다. 일부러 분열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유대인들 중심의 복음서이지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이방인들 중심의 복음서이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의 복음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이방인들(헬라철학)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용어들이다. (로고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 없이 많은 교회의 분열이 있었다. 그 중에는 곱틱교회와 영지주의 교회도 있다. 곱틱교회는 쉽게 이집트교회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는 곱틱어를 썼는데, 그 때문에 고틱교회라 불린다. 이들은 단성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라는 주장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정통교리는 양성론을 주장한다. 이는, 예수는 100% 인간, 100% 신이라는 주장이다. Vere homo, vere deus라고 한다.

 

영지주의 교회의 실체는 이집트의 나그함마디라는 곳에서 발견된 문서 때문에 주목을 받았는데, ‘나그함마디 문서는 복음을 영지주의적으로 해석한 문서를 말한다. 이집트 곱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사해문서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발견 중 하나라고 불린다.

 

그 이후, 교회는 계속 분열한다. 가장 유명한 분열은 1054년에 있었던,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의 교회 간의 분열이다. 이것을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뜻이다. 그 당시, 동로마제국의 교회와 서로마제국의 교회는 성령이 어떻게 발출하느냐는 논쟁이 한창이었다. 동로마제국의 교회는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발출한다고 주장했고, 서로마제국는 성령이 성부와 그리고 성자로부터발출한다고 주장했다. 서로의 입장을 받아들이 수 없는 나머지, 서로의 교회는 서로를 파문한다. 즉 서로 이단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동방정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분열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바, 1517년 로마가톨릭교회는 또 한 번의 분열을 겪는다.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태동인 종교개혁이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년 되는 해인데,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 중이다.

 

개신교는 그 이후에 엄청난 분열을 겪는다. 루터의 신학을 따르는 루터교가 생겼고, 칼빈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주의(우리가 잘 아는 장로교)가 생겼고,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 때문에 생겨난 교파가 바로 영국의 성공회이다. 앤 볼린이라는 여인을 사랑한 헨리 8세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본처인 캐서린과 이혼한다. 그것을 교황청이 인정해주지 않자,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여 만든 교회가 성공회이다.

 

영국의 성공회 신부로서 18세기 타락한 영국사회를 변화시킨 메토디스트 무브먼트(Methodist Movement)를 일으킨 존 웨슬리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감리교회다. 원래, 존 웨슬리는 메토디스트 무브먼트를 영국 성공회에 남아서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운동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하나의 교단이 되었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미국에서 가장 크고 발달되어 있다.

 

한국에 개신교는 1884-5년에 들어왔는데, 미국 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교회의 아펜젤러가 함께 인천 제물포 항을 통해서 들어왔다. (누가 먼저 땅을 밟았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정황을 미루어 보아, 아펜젤러 목사가 먼저 한국 땅을 밟았을 거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 당시 아펜젤러 목사는 결혼한 상태여서 부인과 함께 왔다. 미국의 Lady First 문화를 생각할 때, 아펜젤러가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을 것이다.) 아펜젤러는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갔다.

 

이 둘이 서울에 세운 첫 교회가 각각 새문안교회(장로교)와 정동제일교회(감리교)이다(1887). 그후, 한국 감리교는 분열을 안 하는데, 한국 장로교는 수도 없이 분열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WCC 가입 문제로 예장통합(장신대)과 예장합동(총신대)이 나뉜 것이다. 그 후로, 현재 한국의 장로교는 200여개 넘는 교단으로 나눠져 있다.

 

개괄적인 역사를 통해 교회가 어떻게 분열되었는지 살펴보았지만, 교회의 분열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위협으로 다가왔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대표적으로 그것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의하면, 고린도교회는 크게 네 개의 파벌이 존재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베드로파), 그리스도파.

 

이들 파벌은 모두 특징이 있다. 바울파는 유대교 율법주의와 전통적인 헬라 철학 사상에 거부감을 가졌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볼로파는 학문적 성향이 강해서 철학과 수사학을 중요시했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마 이들은 설교 잘하는 목사를 좋아했을 것이다.) 게바파는 유대교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사람들의 그룹이다. (아마 율법 전통을 중요시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파는 쉽게 말해 중도파, 또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파였을 것이다. 특정 인물에게 속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그룹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이들은 성령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직접 교제하는 삶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름으로 볼 때는 가장 정통 같지만, 성향으로 볼 때는 이단적인 경향이 가장 강한 분파이다. 직통계시 같은 거 하는, )

 

이러한 분파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근본적으로 시끄러웠다. 교회가 시끄러운 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제다. 그러니, 교회가 시끄러운 것 가지고 너무 낙담할 필요 없다. 오히려, 안 시끄러운 게 이상한 거다. 교회가 시끄러운 거 가지고 낙담하고 시험에 드는 사람은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잘 모르고, 성경을 잘 모르는 것이다. 교회가 시끄러운 거 가지고 너무 낙담하지 말고 너무 시험에 들지 마시라. 원래 사람이 모이는 곳은 다 시끄러운 법이다.

 

다만, 에큐메니컬 주일을 맞아,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얻었으면 좋겠다.

 

고린도교회의 분열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 핵심은 이거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따라해 보자.

 

그런데, 이게 가능한가?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게 인간인가? 우리가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아니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공산당원인가? 우리가 김일성 어버이 수령님 모시는 북한 주민인가? 도대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게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일차적으로, 이들의 분열은 단순히 파벌 문제가 아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성경에 정경으로 채택된 복음서도 4개나 된다.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복음서도 엄청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언급한 영지주의 문서(나그함마디 문서)도마복음서이다. 중국집에 가면, 짬뽕 먹고 싶은 사람이 있고, 짜장면 먹고 싶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이어야 하니까, 우리가 함께 중국집 가면 짬뽕이든 짜장면이든 하나로 통일해서 먹어야 하는가?

 

본문에서 쓰인 분쟁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스키마이다. 이는 , 간격, 분열, 불화를 뜻한다. , 어떠한 이슈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 때문에 서로 미워하는 것(불화)’이 문제인 것이다. 중국집 갔는데, 짬뽕 먹는 사람이 짜자면 먹는 사람보고, 짜장면 먹는다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짬뽕을 안 먹고, 짜장면을 먹어? 이 상종 못한 놈!”이러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쓰인 합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다르티조이다. 이것은 원문에서 분사 완료 수동태의 형태(과거의 한 시점 표현)로 쓰여졌는데, 이는 그들이 분쟁 이전의 온전했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을 바라는사도 바울의 마음을 담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합하라라는 말은 짬뽕 먹을지, 짜장면 먹을지 통일해서 한 가지만 먹어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리고 이것은, 서로 양보해서 그냥 모두 짬짜면먹으라는 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짬뽕 먹는 사람은 짜장면 먹는 사람을 인정해주고, 짜장면 먹는 사람은 짬뽕 먹는 사람 인정해 주라는 뜻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왜 먹느냐는 것이다. 중국집 가서, 짬뽕 먹는 사람이나, 짜장면 먹는 사람이나 왜 그것을 먹는가? 짬뽕을 좋아해서? 아니면 짜장면을 좋아해서?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이 중국집 가서 짬뽕이든 짜장면이든 먹는 이유는, 배고파서이다.

 

, 그리스도인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아주 근본적인 것, 십자가의 도 때문이다. 에큐메니컬이란 그런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해서 서로 연합하고 일치하는 것이다.

 

엘까미노 리얼에 있는 옛날 짜장면집에 가서 우리 모두가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서로 묻는다. ‘여기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묻는 거 자체가 참 이상한 일이다. 중국집에 왜 왔겠는가? 식당에 왜 가나? 배고프니까 가는 거다. 그런데, 밥을 먹다 보니, 김 집사가 내가 먹는 짬뽕을 안 먹고, 짜장면을 먹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가서 따진다. ‘당신 왜 짬뽕 안 먹고 짜장면 먹어? 정말 웃겨? 웃기는 짬뽕이네!’ 그러면서 둘이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갈라선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렇게 물어보자. 교회에 왜 왔는가? 교회 와서 서로에게 여기 어쩐 일이세요?’라고 물으면 정말 이상한 것이다. 교회에 왜 왔는가? 오늘 말씀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십자가의 도때문에 우리 모두는 교회에 온 것이다.십자가의 도를 위해서, 연합하고 일치하고,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것이 주님의 뜻 아니겠는가?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은 복잡한 개념이 아니다. 어떤 이념처럼 생각하지 말라. 복음주의 진영, 에큐메니컬 진영, 이런 큰 개념을 생각할 것도 없다. 에큐메니컬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의 도를 위해서 서로 연합하고 일치하고 협력하고 양보하고 용서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다. 다른 생각을 갖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문제다.

 

짬뽕 좋아하시는 분? 짜장면 좋아하시는 분? 짬뽕 좋아하시는 분들만, “짜장면 맛있게 드세요!” 짜장면 좋아하시는 분들만, “짬뽕 맛있게 드세요!” 다 같이 따라해 봅시다. “우리, 탕수육 같이 시켜 먹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점심, 맛있게 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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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6

창조와 신앙

(창세기 1:1-5)

 

요즘은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성경과 관련된 배경지식이 엄청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는 창세기의 말씀만 해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발전된 창조신화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아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통치하던 지역의 문명을 말한다. 요즘의 이란, 이라크 지역이다. 그 지역에서 발전된 문명을 이해하지 않고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 요즘 학계의 정설이다.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발견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와 관련된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를 담고 있는 에누마 엘리쉬, 구약성경의 최고본인 사해사본’, 그리고 영지주의 문서인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가 그것이다.

 

이 문서들은 20세기 성서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에서 에누마 엘리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잠깐 살펴보면 이렇다.

 

위로 하늘이 아직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고 아래로 땅이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을 때 태고의 압수, 그들의 아버지, 그리고 그들 모두를 낳은 모체, 티아맛이 그들의 물을 하나로 섞고 있었다. 그때에는 들판도 형성되지 않았었고, 갈대밭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신도 나타나지 않고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않았고, 운명도 결정되지 않았을 때 신들이 그들 가운데서 창조되었다.

 

에누마 엘리쉬를 보면 마르둑과 티아맛이라는 신들이 등장하는 데, 그 이야기에 의하면 세상은 이 두 신의 전쟁을 통해 창조된다. 창조와 질서의 신 마르둑이 혼돈의 신 티아맛을 물리치며 탄생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마르둑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다. 마르둑을 통해서 그들은 세상의 지배를 꿈꾼 것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기 때 문서화되기 시작했다. 바벨론의 에 굴복된 유대인들(이스라엘)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자신들의 신, ‘야훼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 굴복된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이스라엘)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마도, 많은 이들(일반인들, 대중들)은 바벨론의 질서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바벨론이 힘에 의해 재편한 세상에 순응하면서 사는게 상책(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부류가 있었다. 특별히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그들을 P문서 그룹이라고 한다. P문서는 Priest, 즉 제사장 문서이다. 이들은 바벨론이 이 세상의 질서, 절대적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던 때에, 그들을 향해 “NO”를 외친다. 그들의 용감한 외침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태초에 마르둑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하며 세상 질서를 편입한 바벨론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이다.

 

이러한 일은 오랜 세월이 지나 또 한 번 일어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고, 헬레니즘 문명이 왔을 때, 세상은 로마라는 나라의 힘에 의해서 질서가 재편되었다. 그들은 그 세상을 팍스 로마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낸 이는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로 불렸다. 그는 온 세상의 신으로 불렸다. 그는 주피터(제우스) 신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았다.

 

그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이 생산한 문서 중에 복음서가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는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1-3).”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똑 같은 고백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창세기에서도 그렇고, 복음서에서도 그렇고, 이 세상은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고백이다. 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단순히 과학적 사실의 근거로만 삼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이 세상(하늘과 땅)에 대한 긍정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도 그냥 아무렇게 존재하는 것이 없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존재는 신적인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는 거룩한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것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거룩하게 보지 못하고, 폄하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이미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창조신앙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어떠한 면 때문에 그 존재를 무시하고 차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불경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국제사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IS 대원들의 테러를 보면, 그들은 테러를 저지르기 전에 알라 아크바를 꼭 외친다. 이는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뜻이다.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테러를 저지르면서 그가 예수는 위대하다, 예수 믿으세요!’라고 외친다면, 그것이 납득되는 일인가?  증오속에는 구원이 없다.

 

우리가 상대방(존재)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의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그 존재를 보면서 꼴보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떠한 존재(생명)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그 일 때문에 인상이 찌푸려지더라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때문이다. 자연재해나 질병, 인간의 이기심, 탐욕, 배신감, 잔악성 등은 세상을 선하게 바라보기 참 힘들게 하는 요소들 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일을 통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가? 바로 창조신앙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는 것 외에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은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창조되었다는 고백이 가지는 두 번째 의미는 세상의 절대화에 대한 거부이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살면서 그들의 힘과 문명을 경험하면서 바벨론 세계의 절대성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중 대부분은 바벨론에 동요되어 그들의 힘을 숭배하고 그들이 심어준 가치관에 순응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똑 같은 일이 로마제국 시대, 즉 예수님 시대에도 반복되었다. 유대인들(이스라엘)은 로마제국(황제)의 힘에 압도되어 그들에게 순응하면서 살았다. 지도자 그룹(사두개인)도 있지만 그보다 서민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사케오이다. 사케오는 로마의 세금징수법에 순응해서 그들의 세금징수원으로 살았다. 그것이 그의 삶을 안락하게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케오는 예수님을 만난 뒤 그러한 삶의 방식(로마제국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을 따라 살게 된다.

 

우리가 흔히 이렇게 행동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흔히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일례로, 요즘 부모들이 왜 그렇게 자녀들 교육에 신경을 쓰고, 자녀들을 소위 명문대에 들여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가? 그렇게 해야지만 자신들이 경험한 절대적인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수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때에 아버지와 함께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재를 창조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구속되면 안 된다. 우리는 다분히, 현재 내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서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이것은 철저하게 기복신앙에 불과하다.

 

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인간이 보기에 좋은 것으로 바꿔 놓는 것이다(속회공과 2).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좋은 것이라 여기며,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못살게 구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한 고백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활동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어느 것도 무시하거나 차별하고 증오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내가 경험하는 세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하는 세상에 함몰되어 그것이 절대적인 양 얽매이지 않는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창조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나와 우리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속회공과 2과 질문)”,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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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4

들으라

(신명기 6:4-9)

 

주룩 주룩 내리는 비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오랫동안 비가 안 오다, 이렇게 비가 계속 오니, 사람들의 생활은 불편할지 모르나, 만물들은 얼마나 좋겠는가? 산들이 기뻐 푸르게 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푸르름은 그들의 기쁨이다.

 

아모스서의 이 말씀이 생각났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니리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12).

 

요즘 시대를 말해주는 말씀이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다. 요즘, 먹거리가 풍부하다고 그것이 인간의 건강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먹는 게 풍성해서, 오히려 비만과 암이 옛날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늘었다. 정말 안전한 먹거리를 우리가 생산해서 먹는가? 대기와 땅과 바다가 모두 오염되어 버렸는데?

 

요즘, 기독교 신자들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인터넷에 널린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가지고 말씀이 풍성하다고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만 늘었다. 육신의 건강이 먹거리가 풍성해져서 음식을 많이 먹는 데서 오는 게 아닌 것처럼, 심령의 건강이 설교말씀을 전자기기를 통해 아무 때나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데서 오지 않는다.

 

이렇게 물어보자. (속회공과 1과에서도 묻는 질문이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려고 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 자녀들에게 막상 신앙을 가르치려고 하면 걸리는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교회도 오래 다녔고, 말씀도 많이 들은 것 같 같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치려니,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들통날까봐, 말씀을 못 가르친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막상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되어 있는데, 왜 우리는 놀러가?”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가르쳐 놓으니, 아이가 이렇게 질문한다. “아빠, 엄마, 말씀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데, 왜 아빠, 엄마는 맨날 욕만해?” 사실, 이런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게 겁난다. 자기 자신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씀의 기갈이, 다른 게 기갈이 아니다. 요즘,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설교)말씀에의 접근성이 쉬워졌다 할지라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설교가 인터넷에 모아졌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다가와, 히브리서 412절의 말씀처럼, 나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못하고, 내 마음이 생각과 뜻을 주님의 생각과 뜻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말씀의 기갈을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풍성함에 빠져, 온전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말씀을 보면, 몇 가지 동사가 나온다. 처음에는 들으라(hear)’는 동사가 나온다. 그리고 사랑하라(love)’, ‘새기라(be upon your heart)’, 가르치라(impress), ‘강론하라(Talk about them)’, ‘(손목에) 매라(Tie)’, ‘(미간에) 붙이라(Bind)’, ‘기록하라(Write)’가 나온다. 이 동사들은 모두 일맥상통하는 단어들이다. 이중에서, ‘새기라는 것은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고, 자녀에게 가르치라는 것은 자녀에게 각인시키라는 뜻이다. 강론은 언제든지 말씀에 대하여 토킹라는 뜻이다.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세 가지를 잘 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한다. 듣는 행위는 귀로 하는 게 아니다. 듣는 행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말씀은 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머물러야 한다. 엔터테인먼트와 훈련의 다른 점은, 엔터테인먼트는 귀를 즐겁게 하지만, 훈련은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이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나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 말씀을 듣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는 곳)’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말씀을 듣는가! 누가복음 645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과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 들고,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지 않으려면, 우리는 종교적 엔터테인먼트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요즘 아이들은 먹을 게 너무 많으니까, 음식 귀한 줄 모른다. 누가 먹을 것을 줘도 감사할 줄 모른다. 너무 흔해서 탈이다. 똑같다. 말씀에 대한 접근성이 쉬워지니까, 말씀 귀한 줄 모른다.

 

둘째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 뉴스를 보니, 소비부진의 주범이 사교육비라고 한다. 한국 가정은 애들 공부시키기 위해 사교육비 지출을 최대한 확보하느라, 먹고, 입고, 노는 것을 다 줄인다고 한다. 고등학생 자녀 둘을 둔 가정에서는 사교육비가 한 달에 평균 500만원 정도가 지출된다고 한다.

 

그만큼 세상이 힘들어졌다는 뜻이고,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기 힘든 환경이라는 뜻이다. 대입시험에 성경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적으로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기회와 명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디모데 후서의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 시절이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아이들 세대의 기독교인구가 줄어드는 이유는 아이를 덜 낳아서 인구가 감소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사는지, 아니면 말씀의 풍요로움 가운데서 사는지를 판단해 보려면 현재 부모로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가정 일이니 일일이 알기는 힘드나, 여러분 각자가 판단해 보면 알 것이다.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말씀의 기갈에서 벗어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려면, 또는 내가 지금말씀의 기갈이 아니라, 말씀의 풍성함 가운데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려면,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는 말씀은 바깥으로 보이는 행동을 말한다. 더욱이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도 써서 불이라는 말씀은 신앙을 드러내 놓는 것을 말한다.

 

마음 속으로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하면 뭐 하겠는가? 마음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사실 이게 가장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요한1서에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1 3:18).

 

<아빠의 한 시간을 사고 싶어요>라는 웹툰이 있다. 아이가 아빠한테 묻는다. “아빠, 아빠는 한 시간에 얼마를 벌어요?” “?” “그냥요!” “아빠는 한 시간에 20달러 벌어.” “아빠, 10불 있으세요?” “?” “그냥요, 뭣 좀 사려고요!” “쓸데 없는 것 사면 안 돼!” 얼마 후, 아이가 20불을 들고 아빠에게 왔다. “아빠, 20불 드릴 테니, 아빠의 1시간을 저에게 주실 수 있죠? 아빠랑 1시간만 놀고 싶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는 것 같지만, 실은 말씀의 기갈 가운데 살 때가 많다.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산다는 것은, 1) 말씀을 듣는 것, 단순히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에 새겨서, 그 말씀으로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 2) 자녀들에게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 3) 말씀대로 행하는 것, 이 세가지가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말씀의 풍요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기갈 가운데 있으면서 풍요롭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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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19. 18:41

세례와 시험

(마태복음 3:13-4:11)

 

오늘은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다. 16일이 주현절인데, 주현절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드러난 일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세상에 드러나는 일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성경은 동방박사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세상에 드러났는지를 알려준다. 왕의 별을 보고 헤롯 대왕을 찾아가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냐고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세상에 드러냈지만, 그 일 때문에, 아기 예수님은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천사의 현몽으로 인해 위기를 모면한다.

 

주현절기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이다.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은 누구인지 그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내신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굉장히 모순된 일이다. 세례는 일반적으로 죄 씻음의 행위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았다는 것도 굉장히 모순된 일이다. 시험은 일반적으로 연약한 피조물이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시험을 받으셨을까?

 

우선, 다른 이들이 세례를 받았던 이유와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던 이유에 차이가 있다. 다른 이들은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았지만,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은 이유는 15절 말씀 때문이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죄 씻음을 위한것이 아니라,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는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그 분의 뜻을 가리킨다. 그게 무엇인가? 구원이다. 예수님은 세례 받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이제 그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를 행하시는 분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건 사람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말하는데,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과 동일한 한계를 갖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는 표시이다. 세례는 단순히 죄의 씻김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결단해야만 한다. 그 운명은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복음서는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를 뜯어 말린 이야기를 보도한다. 그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례를 거부할 수도 있었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고, 십자가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게 그런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순종했다. 그래서, 세례는 순종과 똑같은 말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 바로 뒤에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세례를 통하여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예수님이 시험 받으신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세상에 정체가 드러나면 시험을 당한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전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서 많은 시험이 닥치는 것을 종종 본다. 조그마한 일에서 감당할 수 없는 큰 일까지 일어난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교회 가다 큰 사고를 당해서 두 딸은 잃은 분도 있다. 그분은 교회 가다 그런 일을 당해서 무서워서 더 이상 교회를 못 다니겠다고 말한다. 처음에 말했듯이, 예수님도 아기 예수 때 동방박사를 통해 세상에 정체성이 드러났을 때 죽을 위기에 처해졌었다.

 

교회 오는데 아무 일 없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적어도 여러분은 예수 믿는데 있어 마귀의 극심한 방해를 벗어난,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 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평생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시험 받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본다.

 

첫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배고플 때,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이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생각나게 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픔을 느끼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그들을 죽이려 한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리면, 우리는 쉽게 신앙을 포기하려 든다. 그러한 유혹은 우리의 신앙을 끊임 없이 괴롭힌다. 그럴 때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둘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성전 꼭데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였다. 우리도 끊임 없이 이러한 유혹을 받는다. 특별히 예수를 잘 믿는 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오류이다. 주의 일을 하면서 우리는 수도 없이 하나님을 시험한다. ‘하나님, 내가 주님께 헌신했으니까, 나한테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요구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을 안 들어 주면, 교회를 떠나겠다고 협박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 또는 헌신을 빌미 삼아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불경스러운 일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늘 말씀에서도 나오지만, 시편 9111절과 12절에서 하나님은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신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편 91:11-12). 이것 뿐만이 아니다. 주님께서 해 주신 약속도 있다.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시험한다. 그러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세 번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이다. 예수님께 드리운 시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불의하지만 손쉬운 길을 택하느냐, 아니면 그 길을 단호하게 거부하느냐의 문제이다. 이스라엘은 끊임 없이 이러한 시험을 받았다.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신을 택할 것을 끊임 없이 유혹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이야기 이다. 그들의 제사장과 하나님의 제사장 엘리야가 한 판 대결을 벌이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이 아닌 것에 경배하도록 유혹 받고 강요 당한다.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자꾸 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이루어 보겠다는 놀부 심보에 불과하다. 그런 마음이 들면,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우리 스스로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물어보자.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은 단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정말 그런가? 정말로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인가?


사람은 무엇인가에 정신이 팔리는 이유는 그것을 할 때, 그것을 통해서, ‘살아 있다고 느끼지 때문이다. 마약하는 사람이 왜 마약하는가? 그거 할 때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돈 버는 데 미친 사람이 왜 돈돈하는지 아는가? 돈을 셀 때, 돈 냄새 맡을 때 살아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라. 왜 그 일을 하는가? 그거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기 때문이 아닌가? (~ 살 것 같아.)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와 광야에서 시험 당하신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과 그 이후에 우리가 어떠한 일을 겪게 되는 것과 그 결과가 무엇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정체를 밝히면, 시험을 당한다. ‘저는 시험을 안 당하는데요라는 분은, 두 가지 중 하나다. ‘귀신이거나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거나.’

 

시험을 당하거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보다 먼저 시험을 당하신 주님께서 도우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 1)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2)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3)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리의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온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했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를 세례를 받은 것이고, 시험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긴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것에서 구원을 경험시켜 주겠다고 하는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언제나, 어느 때든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선포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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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 2. 16:57

세례 요한의 죽음

(마가복음 6:17-29)


이것은 피에타 상이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의 시체를 안고 있는 조각상이다. ‘피에타는 라틴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25세 때 제작한 작품이며,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새겨진 작품이다. 그 후로,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세상 어디에도 그분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셨는데…”라며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품의 특징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보다 젊다는 것이다. 이는 신성한 처녀인 동정녀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이다.

 

지금, 어머니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했다. 자식을 잃었다. 피에타상을 바라보며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한 어머니 마리아에게 위로를 받으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신학적으로 비판 받는 일이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군가의 위로 없이는 살 수 없는 큰 슬픔을 저마다 안고 살아가는 가냘픈 생명이다.

 

죽음은 언제나 슬프다. 오늘 말씀도, 죽음이 등장한다. 세례 요한의 죽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례 요한의 죽는 장면을 볼 때다, 그의 탄생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더 큰 슬픔과 안타까움과 의문이 몰려든다. 물론, 마가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어쩌면, 마가복음만 읽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죽는 이야기를 접하면서 덜 슬플 수도 있다. 그러나, 4개의 복음서를 받아 든 우리들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뒤늦게 아들(늦둥이)을 얻는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해 보라. 금이야 옥이야 키웠을 것이다. 특별히, 사가랴는 요한의 탄생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아들 요한의 탄생을 놓아두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가까지 지어 불렀다. 그 중에서 아기 요한을 이렇게 말하는 장면은 가슴 찡하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니리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1:76-78, 80).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요한이 태어났을 때 너무 기뻤으며, 그가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존귀한 자라고 믿었다.

 

세례 요한이 죽을 때, 물론, 나이 많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들의 자식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는 것을 목격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허무한 죽음을 보면서도, 여전히 요한이 태어날 때처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릴 수 있었을까?

 

세례 요한의 죽음은 허무하다. 그의 탄생과 그의 사역에 비추어 보면 정말로 그의 죽음은 허무 그 자체다.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비참한 죽음, 참으로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말씀에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이다. 이 사람은 헤롯 대왕과 말타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다. 이 사람에게는 큰 윤리적 잘못이 있었는데, 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의 아내와 이혼했을 뿐만 아니라, 동생에게서 아내를 빼앗아 결혼했다.

 

이 일로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부도덕한 일을 비판하는데,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 그나마 헤롯 안티파스는 요한을 참 선지자로 생각하여 그의 메시지를 무서워했는데, 오히려 헤롯의 부인이 된 헤로디아는 요한에 대하여 이를 갈았다. 그래서 그를 죽일 명분을 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헤로디아는 헤롯의 생일을 맞아 음모를 꾸민다. 헤롯의 생일 잔치에서 자신의 딸 살로메가 신명나는 춤을 추게 만든 뒤, 헤롯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여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는 약속을 받아 낸다. 이때를 기회로 삼아, 헤로디아는 살로메에게 주문하기를 헤롯 왕에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라고 지시한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큰 소리 뻥뻥 친 헤롯은 차마 자신의 체면을 구길 수 없어,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요구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소반에 얹어가져다 준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자신을 미워한 한 여인의 음모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에서 이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전도 여행을 보내신 이야기에 삽입되어 나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대한 가벼운 차림으로 전도 여행에 나설 것을 주문하신다. 사실 가진 게 많으면, 그거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칠 수가 있다. 제자들의 사명은 복음(하나님 나라) 전파에 있지,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지 않다. 물론 너무 없어도 그거 신경 쓰느라 본질을 놓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굴의 기도를 날마다 드려야 한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언 30:8).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인생의 짐들을 최대한 간편하게 하는 게 좋다. 이게 좀처럼 쉽지 않겠지만,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한 자들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서 간편한 삶(simple life)을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의 영성으로 여겨져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말라 고쳤다”.

 

여기서 회개하라고 전파한 것은 단순히, ‘회개하시오!’라고 말한 게 아니라, 복음을 전파했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선포는 예수님의 왕 되심과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믿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왕 되심과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그분을 따라 그 나라를 사는 자들은 삶이 간편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은 먹고 마시는 것’, ‘소유하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이 주신 계명의 핵심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 ‘는 쉽게 말해, 하나님과 잘 지내는 것이고, ‘평강은 쉽게 말해,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희락이 온다.

 

그런데, 하나님과 잘 지내고, 이웃과 잘 지낼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데서 온다.

 

세례 요한의 죽음과 관련하여 꼭 인지해야 하는 말씀은 다음 구절이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12-14).

 

복음을 전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친 것은 제자들인데, 이름이 드러난 것은 제자들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이다. 이것을 기독교적 도덕(미덕)으로 보지 말라. 제자들(우리들)의 이름은 없고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은 단순히 도덕적인 일, ‘미덕과 겸손이 아니다.

 

우리는 겉말로는, “우리의 사역을 통해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정작 속으로는 나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내가 행한 사역을 통해서 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을 때, 우리가 그토록 가볍게 시험에 드는 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드러내고 싶으면 드러내라.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데 좀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면 어떤가! 괜찮다. 서로 이름을 드러내고 많이 칭찬해주시라. 지금 나는 기독교의 도덕(미덕)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이런 말씀, 너무 식상하지 않나? “집사님, 권사님, 집사님(권사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마시고,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세요!” 이렇게, 예수의 이름과 나의 이름 드러내는 일을 경쟁이라도 하듯 동일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은 단순히 겸양과 겸손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우리의 이름이 드러나면, 우리는 겨우 우쭐해지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에서만 끝나지만,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즉 예수의 이름은 구원 사건이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으로보았을 때 매우 허무한 죽음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의 죽음을 그냥 그렇게 허무하게 그린 것이 아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예수의 이름이 드러남과 연관되어 묘사된다. 앞서 말했듯이, 세례 요한의 죽음 이야기가 제자들의 파송 이야기에 삽입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의 이름, 즉 하나님 나라의 드러남 앞에서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어떤 죽음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죽음은 인간적인 슬픈 죽음,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드러난 것에 대한 복음 증거의 죽음인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허무해보여도, 하나님 안에서는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죽음이다.

 

요한복음에서 묘사되고 있는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제자도의 마지막 길은,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예수의 이름은 흥하여야 하고, 나의 이름은 쇠하여야 하는것이다. 나의 이름은 아무리 드러나고 흥해 보았자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수의 이름은 세상을 구원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구원하는 이름, 예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내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과는 비교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드러내며 사는가?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내 이름만을 드러내고 죽는 것만큼 허무한 인생은 없다. 내 이름이 비록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나를 통하여 예수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면, 그렇게 세례 요한처럼 죽음을 맞이한다면,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구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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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20. 05:26

현몽

(마태복음: 1:18-25)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아예 없고,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이 땅에 오신 일)을 매우 형이상학적으로 묘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1-4 ㅡ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공부가 필요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조차 일관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우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잘 된 일이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다각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전해진다. 마리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마리아 주변에서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말해준다 (세례요한과 그의 엄마 엘리자베트, 그리고 그의 아버지 사가랴). 그 뿐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신실하게 붙들고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발생했는지도 보여준다 (시므온).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인 마태복음은 마리아의 남편요셉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오늘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결혼은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된다. 첫 단계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부모(아버지)에 의해서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는 신랑과 신부가 어렸을 때 진행되는 일이다. ‘네 딸하고, 우리 아들하고 결혼시키자.’  둘째, 신랑과 신부가 성인으로 성장해 실제 결혼이 가까워졌을 때, ‘약혼이라는 단계를 거친다. 이때부터는 서로의 관계가 법적 구속을 받는데, 이 관계를 깰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적인 약혼 파기로만 가능하다. 약혼 기간은 대개 1년 정도 되며, 약혼 기간에 신랑과 신부는 육체적 접촉을 하지 않으며, 서로의 순결을 지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실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다. 이때 신랑은 큰 잔치를 벌이며,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을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 이 문구에서 성령으로라는 말을 빼면,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에서 요셉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임신했다는 뜻이 된다.

 

요즘과는 달리,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혼 기간에 여인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임신하는 일은 통탄할 일이었다. 이것은 모세율법에 의하면 간음죄에 해당하는데, 이 죄는 죽음으로 다스려진다. 그 당시 약혼 기간에 간음죄를 저지른 여인은 돌에 맞아 죽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하여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상식과는 다른 행동을 선택한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9). 이 문장 자체는 매우 비논리적이다. ‘의로운가만히 끊고자 하여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구절이다.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킨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그가 취해야 하는 행동은 간음한마리아를 돌로 쳐 죽였어야 한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간음한 마리아를 돌로 쳐죽이는 것을 선택하는 대신, ‘그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의로움이란 단순히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은 율법의 문자를 넘어서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사람이다. 율법은 생명을 살리는 법이지, 생명을 죽이는 법이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면 살릴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성이라고 증거한다.

 

그의 의로움의 절정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이 엄청난 일을 앞에 놓아두고, 요셉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그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마리아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정말 의로운 사람은 어떻게 살릴까를 고민하지, 어떻게 죽일까를 고민하지 않는다. 진실과 지혜는 바로 그 때 뜻밖으로하나님의 선물로 다가온다.

 

요셉은 이 일로, 아마도, 잠 못 이루며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고민에 지쳐 잠들었을 것이다 (영어로, drift off to sleep, 스르르 잠들다). 바로 그때, 요셉은 꿈을 꾼다. 성경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20). 요셉의 꿈 속에 주의 사자가 나왔다. 그리고 현몽한 사자는 요셉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니리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20-21).

 

문제적 심리학자, 프로이트라면 이것은 요셉의 무의식에 대한 표출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곤혹스러운 일에서 해방되고 싶은 요셉의 욕망이 표출되고 해방된 순간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경건한 심리학자, 융이라면 이것은 집단무의식에 대한 표출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최근에 발전한 뉴로사이언스는 이것을 잠자는 동안 일어난 마리아 임신 사건에 대한 요셉의 기억 통합 작용(memory consolidation process)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은 요셉의 꿈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에서 꿈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은 어떠한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실체가 드러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다. 우리는 늘 실체를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 실체가 드러나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가령,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실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최순실 국정논단 사건이 일어났지만 그 실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그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한국의 역사는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것이다.

 

현몽을 통해 마리아 임신 사건에 대한 실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간음 사건이 아니라, 성령 사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를 세상에 보내신 사건이다. 이것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렇게 보충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2-23).

 

마리아 임신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뜻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은 꿈 같은 일이었다. 구약성경을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했다. 구원은 그들에게 언제나 꿈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꿈 같은 일이 꿈을 통해서현실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이제부터 벌어진다. 꿈을 통해 진리가 드러났다. 그리고 요셉은 잠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24).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잠에서 깨어난 요셉이 이제 어떻게 행동하게 할까라는 것이다. 요셉의 의로움은 그러한 계시(하나님의 뜻이 드러난 일)를 받은 것이 아니라(물론 의로운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계시도 받았겠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시가 의로운 사람들에게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그 계시를 받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서 완성된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행동했다.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25). 참 조마조마한 이야기이다. 만약,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참 이상한 꿈이 다 있군하면서 그 꿈을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그리고 율법대로 마리아를 돌로 쳐 죽였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역사가 바뀌지 않는 건, 또는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는 건, 꿈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는데도, 그것을 우리가 삶의 현실에서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책임공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힘들고, 사는 게 힘든 것은 모두 너 책임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로움’, 믿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약속 따로, 믿음 따로,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 안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요셉은 행동의 근거를 경건(율법 또는 자기 의)이나 문화에서 찾지 않고, 믿음에서 찾았다. , 그는 믿음으로 행동했다. 그는 하나님에게 믿음을 두었고, 하나님의 뜻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으로 인해, 그는 마음을 바꿨고, 행동을 바꿨고, 역사를 바꿨다. 믿음은 내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도 바꾸는 일이다. 만약 요셉이 마음만 바꿨다면, 그는 마리아를 데리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요셉이 마음은 바꾸지 않고 외적인 행동만 했다면, 그는 마리아를 데리고 왔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살다가 마리아에게 무슨 짓을 했을 지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믿음은 마음과 행동을 모두 바꾸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평화의 촛불을 켰지만, 왜 우리는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요셉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각의 변화, 마음의 변화 없이 하는 행동은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이고, 상대방에게도 상처가 된다. 거기에서는 어떠한 새로운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령, 우리가 교회 공동체니까 교회 공동체 내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왜 교회 공동체 내에 평화가 없는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5:23-24).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진리이고 실체이고 하나님의 계시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요셉은 진리가 드러났을 때, 실체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났을 때, 그것을 받아들여 마음(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역사를 바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진리의 말씀을 듣고, 형제에 대한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서, 역사를 만들며 사는가? 말씀을 통해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하는 행동만큼 허무하고 공허한 게 어디 있는가? 마음을 바꾸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행동으로만 마리아를 데리고 오니까, 평안도 없고 역사도 안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나와서 예배드리는 행위만 하니까 예배 드린 후에도 여전히 삶의 문제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고민 가운데 있고, 그 고민을 놓아두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어떠한 현몽(말씀, 계시, 실체)’을 받으셨는가? 성경에서 요셉은 현몽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지만, 우리는 일차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 삶의 문제가 있고, 구원이 간절하시거든, 우선 성경을 보시라.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뜻밖에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셨거든, 요셉과 같이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 보시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인,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시라. 주님께 마음을 두고, 주를 의지하는 자, 주께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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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17. 12:45

불신과 믿음의 변증법

(마가복음 5:35-6:6)

 

오늘 말씀은 믿음과 불신이 충돌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본다. 믿음은 한계(불신, 죽음, 친숙함)를 뛰어 넘어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다.

 

이야기 전개는 회당장 야이로의 이야기, 그 사이에 낀 혈루병 여인, 그리고 다시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회장당 야이로는 예수님이 혈루병 여인을 고치는 장면을 보고, 희망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얼른 가시면 우리 딸이 죽지 않을거야.’ 그러나, 가는 도중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저 절망에만 휩싸였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곁에선 예수님은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 “두려워하지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à 절망적인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이 위로가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하여, 기억해 두면 좋은 말씀이다.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 상황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였다.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떠드는 것으로 번역된 말은 원래 훤화함으로 번역되었던 단어이다. 그리고 영어로는 ‘commotion’이라고 번역한다. 이는 마음에 근심이 있거나 두려울 때, 정신적인 동요나 흥분이나 소란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다.

 

성경은 이러한 상황, 사람의 마음을 예수님이 봤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한계 상황에 부닥쳤다. 그들은 더 이상 그 뒤나, 그 이후를 못 본다. 절망은 그때 다가온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는 데서 오는 것이 절망이다. 그들은 야이로의 딸에게 임한 죽음을 보고, 절망했다. 그 뒤나, 그 이후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포기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신적 혼란을 느끼며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봤다.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39). 여기서 떠들며 우느냐는 왜 시끄럽게 우느냐는 뜻이 아니다. 이는 왜 너희들이 한계 상황에 부닥쳐 그 뒤를 보지도 못하고, 왜 그렇게 두려워하고, 왜 그렇게 절망하며 안절부절 못하느냐는 말씀이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정말 멋진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르게 보셨다.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굉장히 멋진 일이다. 좀 일이 안 되면, 좀 일이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절망하고 실망하고 시험에 들지만, 우리가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상황을 충분히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씀을 비웃는다. 그들의 비웃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은 그들의 불신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비웃음이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한계를 경험했을 뿐이다. 그들이 경험한 한계는 죽음이다.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것 때문에 불신에 쌓인다. 그들의 불신은 그렇게 얼토당토한 것만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은 법이다.

 

이것은 먹을 게 없으면 굶어야 했던 노인 세대와 먹을 게 없으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는 젊은 세대와의 간격보다 더 큰 간격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어렸을 때는 먹을 게 없어서 굶었어. 손자: 먹을 게 없으면 라면이라도 드시지 왜 굶으셨어요?

 

이러한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한계를 경험한 자들에게 박힌 불신과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행하실 거라는 믿음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이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구인가?

 

40절 말씀을 보자.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은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고 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사…” 그렇다. 아이의 부모와 예수님의 핵심 제자였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들이 바로 그 말씀을 믿는 자들이었다. 아이의 부모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간절함이 있게 마련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간절함이 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어떠한 일을 벌이실 거라는 간절함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말씀을 간절히 믿었다. (우리도 우리 교회에 대하여, 부모와 제자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드디어, 불신과 믿음의 간격이 메워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예수님의 이 한마디이다. “달리다굼” – ‘소녀야 일어나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우리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이 소녀를 살리신 일은 단순히 죽은 소녀를 살게 해서 그의 부모를 기쁘게 하고,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복음이다. 12살 먹은 여자 아이가 죽었다 다시 살아났지만, 그는 머지 않아 다시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궁극적인 복음이 될 수는 없다. 12년 사나, 120년 사나,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다른 게 뭐가 있는가? 우리에게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신과 믿음 사이를 메워주는 궁극적인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다음 전개되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고향에서의 활동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고향으로 간다. 우리는 거기가 나사렛이란 동네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사람들은 놀란다. 그런데, 그들의 놀람은 믿음의 놀람이 아니라 불신의 놀람이었다.

 

예수에 대한 의문의 서술들이 펼쳐진 후, 마지막에 예수님에 대한 불신의 단어가 등장한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배척하다는 믿음과 반대되는 반응이다. 고향에서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예수님의 직업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라, 고향 사람들은 그와 어려서부터 함께 컸기 때문에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6:4).이는 다른 곳에서 존경 받는 선지자라 할지라도 고향에서는 존경 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친숙함이 모욕을 가져온다.”는 말이 있다. 친숙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진가를 몰라볼 때가 많다. 특히 가족들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가장 인정을 못 받는 부류가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은 참으로 특이한 집단이다.

 

또한 가족 외에, 나와 더 친숙한 부류가 있다. 누구인가?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도 친숙하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어떠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모른다.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지 말라. ‘못해요, 안돼요하던 사람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을 때 어떤 일을 감당하게 될지, 아무도, 나 자신도 모르는 법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의 한계를 보았다. 그 한계는 불신을 가져왔다. 그것은 죽음친숙함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개의 한계는 똑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죽음에 친숙하거나, 또는 친숙해서 죽어 있거나,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토록 깨어 있으라!”고 성토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친숙하거나, 친숙해서 죽어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복음이 현실성 있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을 깨워보자. , 죽음의 한계(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갇히는 것)에 부닥쳐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고 있었다면, 너무나 친숙해져서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죽어 있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면, 그 한계 상황을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우리의 존재를 던져 보는 것은 어떨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Do not be afraid any longer, only believe.” 그러면, 분명, 오늘 말씀처럼,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인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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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2. 6. 14:50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누가복음 2:25-33)

 

작년에 한창 화재가 되었던 오스트리아 출신 여자 선교사 두 명이 있었다. 소록도에서 평생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과 마가레트(70) 수녀다. 그들은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피다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떠났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다.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에 헌신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그런데,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다.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했다

 

그들은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 오후엔 손수 죽을 쑤고 과자도 구워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마을을 돌았다. 10여년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 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 개만 들려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70세가 된 마리안 수녀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 왔을 땐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

 

이 두 분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40년이 된 것이다. 할 일은 지천이었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40년의 숨은 봉사... 이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져서,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 봐 조용히 떠났다고 한다.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20대부터 40년을 살았던 소록도였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이제 돌아가 고향 오스트리아는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오히려 낯선 땅이 되었다. 두 사람의 방문 앞에는 그들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말로 써 있다고 한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신문 기사에서 발췌 및 편집)

 

존경스러운 사랑의 삶을 사신 이 두 분들 앞에서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사랑에 대한 이런 찬양이 생각난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

 

어떤가? 사랑은 이런 것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런 것에 머무는가? 이것은 굉장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오해할 요지가 있다. 사랑을 도덕으로 생각할 요지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도덕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도덕적인 삶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Love is eternal. No matter how short it was. That's the mystery of love." - Reverend Junsik Chang *

“사랑은 영원하다. 그것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 장준식 목사

 

* 이것은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한 후배의 문병 중에 내가 말씀을 전하며 한 말이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던 후배에게사랑의 영원성이 가슴에 와 닿았던 모양이다. 후배는 이 문구를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 남기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오늘 말씀을 보자. 유대인은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은 난지 팔 일 만에 할례 받으러 성전에 간 것이다. 그때에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약속하신 구원을 보는 장면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래서, 도덕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 자체가 구원이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한 아기가 태어난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으로 들어오신 사건이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핵심 중의 핵심 교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은 상대방에게시간을 기꺼이 내주는 행위요, 상대방의 시간을 침범해도 된다고 허락 받은 일종의 자격증이다. 그러므로 남의 시간을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 상대방의 시간에 침범하려면 먼저 그를 사랑하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의 시간에 침범하는 것은 그의 자유를 빼앗는 범죄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은)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영원을 경험하게 한다. 즉 초월을 일구어 낸다. 초월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 사랑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합일을 이루는 통로이다.

(요즘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면,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라.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가? 부인을 사랑하고 있는가? 자녀를 사랑하고 있는가? 또는 여러분 주변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친구나 이웃이 있는가?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얼마나 많은 미움 가운데 사는가.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합일의 상태로 인도한다. 영생 (하나님의 생명), 영원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말에서 (spirit)’은 하나님을 말한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이고, 영원은 하나님의 시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그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다가선다. 그래서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 사랑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한다. 그 사랑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실천한다. 물론 우리의 사랑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때론 성공하고, 때론 실패한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라.”

 

우리가 위의 소록도 수녀님들의 사랑의 삶을 보면 그냥 멋지기만 하지만, 본인들은 그렇게 멋지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엄청난 인간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목원대학교를 세우신 Charles Stokes(도익서 박사)의 사모님(이명은, Marilyn Stokes)이 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선교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늘 고향이 그리워서 갈등하고, 삶의 환경이 힘들어서 갈등하고, 그렇게 인간적 갈등 가운데서 선교 사역을 하다가 은퇴하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위의 소록도 수녀님들도 똑 같은 고백을 한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빕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고, 무엇보다 위험한 일이기까지 하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어두운 면이 보이는데, 그것을 껴안고 보듬어 주는 일은 어렵기도 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을 얼마나 많이 먹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달라진다. 어릴 적 사랑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어린 아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주라.

 

나는 목회자로서 누군가에게 잘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맡겨주시고 만나게 해주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잘 해주는 일은 굉장히 힘들고 어렵다. 그런데 사랑하면, 그 사람의 필요가 보이고, 그 사람을 위해서 무슨 기도를 해줘야 하는지 보이고, 해야 할 일이 보인다.

 

나는 부교역자들에게 늘 이런 주문을 했었다. ‘교회 일 잘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일만 잘하려고 하지 말고, 담임목사를 사랑해 달라.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보일 거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에서 일 하려 들지 마시라. 일 중심으로 교회를 섬기면, 문제가 생긴다. 일 중심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남이 나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 꼴보기 싫고, 내가 한 일에 대하여 기대했던 리워드가 안 오면 시험에 든다. 교회에서 일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말고, 교회를,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시라. 사랑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눈에 보인다. 그리고 유익을 구하지 않기에 시험에 들 일도 없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차이가 그것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일을 하려고 했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했다. 예수님이 무어라 하시는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한 가지가 무엇인가? 사랑이다.


가인(농부)과 아벨(목자)의 제사 중,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는가? 가인은 곡식 바치고,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려서? 대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아무 것이든 자신의 것을 주님께 드리면 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사랑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아니냐의 문제, 사랑으로 제사(예배)를 드렸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가인은 자기가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리워드가 안 오자, 동생을 죽인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동생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 열심이 결국 살인으로 간다. 그렇다고 뺀질 대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WORK’ 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의 두 아들의 비유로 가르쳐 주신다. 큰 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하니, 큰 아들이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고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되,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 뉘우치고 갔으니,” 둘 중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사랑은 말이 아니라 ‘WORK’ 이다. 여러분의 시간과 몸을 주는 행위가 사랑이다.

 

사랑은 ‘WORK’ 이다. 사랑은 시간과 몸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다(성육신).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몸을 주셨다(대속).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몸을 먹는다. (살모사, 사마귀 등)

 

그리스도의 사랑은 도덕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좌절하고 눈물 흘리는 일이 있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런 시가 있다.


꽃에 해 둔 메모

- 김용과 김경주의 만남


오래도록 너무 많은 별을 보아서 불행한 꽃,

그 꽃에 해 둔,

웃는 얼굴이 유난히 슬펐던

한 사내의 메모,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하느라 눈물을 글썽여야 한다.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슬픔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멀리서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눈물을 글썽이신다. ?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눈물을 글썽이는가? 사랑하느라, 눈물을 글썽이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사랑하다, 눈물 글썽이며 세상을 떠나는 자가 되자. “사랑아, 글썽이다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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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30. 12:34

믿음이 있다는 것

(마가복음 4:30-41)

 

오늘 말씀에는 한 개의 비유와 한 개의 이야기(narrative)가 나온다. 비유는 겨자씨 비유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그 씨에서 나온 나무는 새가 깃들 정도로 커진다.

 

비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반발과 공격이 심해졌을 때 시작되었다. 비유는 믿음 있는 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장치이다. 믿음 없는 자가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지만, 믿음 있는 자가 들으면 진리를 깨우치게 된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발과 공격때문에 비유로 씌어진 대표적인 책이 <요한계시록>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조작하는 것도 이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기본적으로 박해 상황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한 복음이지, 점쟁이처럼 알 수 없는 미래를 예언한 예지서가 아니다. 한마디로, 요한계시록은 비유와 상징을 이용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이다. 이것을 오용, 또는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 없는 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반발과 공격을 가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공격한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원형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선포했다.

 

이는 배제와 포용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배제너는 불의하고 나는 의롭고, 내가 너와 같지 않은 것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감사를 말한다.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핀잔을 자주 듣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배제의 공동체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 그들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 했는지는 바로 이 기도에 잘 나타난다.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12).

 

이에 반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포용은 다음의 기도와 말씀에 잘 드러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8:13-14a).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하나님 나라는 바리새인과 같이 배제의 틀에 갇힌 자들에게 임하지 않고, 오히려 포용의 자세를 갖춘 자들에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자. 우리는 배제하는 사람인가, 포용하는 사람인가? 우리는 너는 불의하고 나는 의롭고, 너와 같지 않음에 감사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배제 당하는 이들, 소외 당하는 이들과 연대(solidarity)하며 그들과 친구되는 사람인가? 참 쉽지 않은 자기 판단이고 과제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 가지를 더 배우게 된다. 상황은 이러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중이었다. 배가 바다(호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을 때, ‘광풍이 불어왔다. 갑작스런 광풍에 제자들은 기겁을 했고,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은 이 상황에서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Do you not care that we are perishing?”(38). 여기서, 우리는 광풍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광풍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원래 일상적으로 지진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문자적으로는 흔들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날마다 흔들림(광풍)’을 경험한다. 신앙인들에게 흔들림이란 단순한 어려움이 아니고, 신앙을 져버리게 되는 흔들림을 말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그 흔들림은 당연히 박해였을 것이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했지만, 박해가 가해져 오자 그들의 신앙은 흔들렸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신들 곁에 없으시고, 그저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 같아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박해의 상황에서 울부짖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고, 그것 때문에 인생이 망하게 됐는데, 주님, 그것을 신경 쓰지 않으십니까?” 신앙인으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런 울부짖음이 끊이질 않는다. 여러분은, 오늘, 어떠한 일 때문에, 잠 자고 있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시는가?

 

제자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깨어나자마자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 믿음 없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두려움이다. 믿음의 반대말은 믿지 않음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반대로, 믿음 있는 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생기는 게 아니라, 어떠한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두려움과 관련된 구약의 대표적 인물은 여호수아이다. 그는 가나안 전투를 앞두고 두려워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이렇게 위로해 주신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1:6).

 

두려움과 관련된 신약의 대표적인 인물은 베드로이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두려워)’ 물에 빠졌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물에서 건져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4:31).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심리를 치료하신 것이 아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하나님, 베드로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그들의 심리를 치료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치료하신다. 심리적 두려움을 치료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은 두려움을 이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믿었어야 했고, 베드로는 물 위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어야 했다. 그들이 두려움에 젖어 든 것은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였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것이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두려움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두려움은 불의와 비리를 낳는다. 한국 사회에서 끊임 없이 일어나고 있는 병역비리 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군대 가는 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는 자는 불의와 비리를 저지른다. a) '귀신이 보인다'며 정신질환 행세하며 병역 기피, b) 커피를 마시고 괄약근과 팔에 힘을 주는 수법으로 순간적으로 혈압을 높여 4급 판정을 받아 병역 기피 c) 소변검사를 조작해 사구체신염 판정 받아 병역 기피 d) 멀쩡한 무릎을 수술하고 병역 면제 판정 받아 병역 기피 (수술 직전까지 스키 타는 거 즐겨)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의 인생에 부는 광풍(흔들림)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삶의 흔들림 속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 앞에서 두려워 그것으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오히려 그것을 꾸짖어야 한다. ‘믿음 있는 자는 광풍(흔들림, 삶의 어려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와 비리를 저지르지 않고, 그것을 꾸짖으며 헤쳐나가는 자이다. “광풍아, 잠잠하라!”(함께 외쳐보자.)

 

요즘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는 정유라의 이야기에 빗대서 설명해 보자면, 믿음 없는 자는 광풍앞에서 두려워 비리를 저지르게 된다. 대학이라는 광풍 앞에서 믿음 없는 자는 정유라처럼 비리를 저지르겠지만, 믿음 있는 자는 그 광풍을 꾸짖으며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능력에 맞는 학교를 선택하여 겸허하게 그 학교에 들어갈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든가, 자신의 수준에 맞는 학교를 겸손하게 선택하든가)

 

믿음 있는 자는 궁극적으로 이런 자가 아닐까 소개한다. 최근(2015)에 만들어진 영화 <The mountain man>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다스라트 만지가 그이다. 인도의 오지에 살던 그는 아내가 다쳤는데, 그녀를 제 때에 읍내의 병원으로 옮기지 못해 아내가 죽자, 마을을 막고 있던 돌산을 뚫어 길을 냈다. 그는 마을을 가로막고 있던 돌산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가려면 직선거리로는 병원까지 1Km 밖에 안 되지만, 산 때문에 72Km를 돌아가야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물? 눈물도 안 나왔어. 그저, 길이 없어서 그랬다, 읍내로만 갔으면 죽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만 들더구만. 장례를 어찌어찌 치르고 나선 정을 들고 바위를 쪼기 시작했지.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어야 된다는 그 생각 하나로 매달린 거지.” 그는 정과 망치만 가지고 총 915미터의 길을 뚫었다. 그렇게 돌산을 뚫는데 꼬박 22년이 걸렸다. 그는 길이 완공된 뒤 정부에서 수여하겠다고 나선 상도, 그가 살던 비하르주에서 주겠다는 표창장과 상금도 모두 거부했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상을 왜 주는지 모르겠더군, 도통. 내 할 일을 한 거야 나는. 게다가 사지 육신 멀쩡한데 뭐 하러 돈(상금)을 얻어 쓰나. 이제껏 하루 벌어 하루 먹기에 불편한 것 없이 살았어. 더 가질 필요가 뭐가 있나.”

 

오늘 말씀에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두 가지를 배운다. 첫째는,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삶의 흔들림앞에 두려워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꾸짖으며 헤쳐나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 한 편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려 한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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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22. 12:35

최고의 감사

(렘 23:1-6 / 23:33-43 / 1:15-20)

 

오늘은 추수감사절이기도 하지만, 교회력에 의하면 그리스도 왕 주일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왕 주일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교회력인데, 반기독교 정권이나 세속적 정부에 의해 핍박 받는 교회를 위하여 제정된 교회력이다.

 

이라고 하는 개념은 현대 헌법적 민주주의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1789714일에 촉발된 프랑스대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된 민주주의의 권력에 대한 기본 개념은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을 받아들여 민주주의국가를 이룩한 나라에서는 더 이상 왕권의 개념은 없다.

 

민주주의의 개념이 발전되기 전의 왕권의 기본개념은 왕권 신수설이었다. , ‘왕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사상을 근간 삼아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대표적인 왕이 프랑스의 루이 14세이다. 그런데, 이것은 민주주의의 권력개념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개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은 대의제도와 선거제도를 통해 권력을 대표(President, 대통령)에게 양도한다. 대통령의 임무는 국민이 양도해준 권력으로 나라의 살림을 국가의 모든 국민이 만족하도록 운영해 나가는 것이다. , 대통령은 국민을 섬기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지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헌법과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왕권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으로 고백하고 있는데,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 기독교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상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세속적 왕권과 헷갈리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세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타락한 왕권이 아니라, 예레미야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는 우리의 공의이시다라는 고백을 담고 있는 거룩한 왕권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들은 공직을 잡긴 했으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직을 수행하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그들은 이방 신 숭배를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우상숭배 방관 및 조장). 이게 전부가 아니다. 왕은 모든 사람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정의에 접근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정의 구현 실패). 그들은 자신의 삶이나 백성들의 삶 가운데서 의로운 삶을 보여주지 못했다(본이 되지 못했다, 성결 실패). 그들은 군사적, 정치적 수단으로 국토를 방어하는 데서 만 약간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하나님의 뜻이나 백성들의 유익보다 자신의 이익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이 왕들은 백성들을 돌보는 데 게을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의 삶을 파괴하고 삼켜버렸다.

 

왕들이 자기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을 갖는 것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들었고,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자기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왕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23:5-6).

 

지도력의 부재로 인해 나라가 어려울 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악행을 저지르는 지도자는 심판하시고, 대신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지도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우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우리가 어디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누가복음의 말씀은 이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약속의 말씀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믿고 고백한다. 예수는 다윗에게서 난 한 의로운 가지이다. 그를 통하여 유다와 이스라엘이 구원 받았고, 온 인류가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 예수의 이름은 바로 임마누엘’,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는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에서는 예수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가 등장한다. 해골(골고다 언덕)이라는 곳에 십자가가 세 개 세워진다. 예수님은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시고, 두 행악자 중 한 명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다른 한 명은 예수님의 왼편에 달린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자가 써 있었다.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던 관리들과 군인들은유대인의 왕이라 써 있는 패를 보면서 예수님을 희롱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메시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한 명도 예수님을 희롱했다. “네가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예수님의 왼편 행악자와 오른편 행악자 중 누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른다. 다만, 우리는 오른편 행악자가 구원 받았다고, 다른 말씀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와 대화한 이야기도 누가복음에만 나올 뿐이다.)

 

이들은 여전히 세속적 왕권의 틀에서 예수님의 왕권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힘의 구원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왕권의 개념은 로마 황제를 통해서 획득한 것이었다. 로마 황제는 그 당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고, 메시아로 불렸고, 왕으로 불렸다. 이 모든 것은 바로 힘과 폭력에 의해서 성취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보며 예수도 로마 황제처럼 힘과 폭력에 의해서 자기들과 자기 자신을 구원할 것을 기대하고 요청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왕권은 그들이 생각한 힘과 폭력에 의한 왕권이 전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매달았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이유는 예수님의 양 옆에 달린 행악자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한 명의 행악자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23:41).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죄를 위한 죽음이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에 의한 폭력적 죽음이 아니라, 죄의 폭력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죽음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누가복음 본문에서 확인한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를 이렇게 구원하신다. 행악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간구한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예수님은 그의 간구에 이렇게 응답하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어떤 어린 아이가 빵을 주워 먹는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문제를 냈다고 한다. “다음 그림을 보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그림 속의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5분간 그림을 보며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생각해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명쾌하게 대답한 아이의 답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남의 아픔을 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같이 아픔을 해결해 주려 하고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될 것이다.” 정말 멋진 대답이다.

 

우리의 감사는 어떠한 감사인가? 생각해 보면, 우리의 감사는 다른 이와 비교해서, 비교 우위에 선 것에 대한 감사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심각한 경쟁사회이다. 그렇다 보니, 경쟁에서 이긴 것에 대한 감사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어떤 교회의 감사헌금봉투에 적힌 내용이다. 1) “수습 잘 끝내고 정식 계약하게 하심 감사합니다.“ 2) “그 크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LG트윈타워 통합물류 입찰에 주님의 회사인 당사를 선정케 해주신 나의 주님께 감사 또 감사 드립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 없는 자연스러운 감사이다. 그러나, 뒷면을 잠시 들여다보면 얼마나 심각한 감사인지 금방 알게 된다. 수습을 잘 끝내고 정식 계약을 하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나, 수습직원들이 이 사람 한 명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사람과의 경쟁에서 져서 정식 계약직을 얻지 못한 탈락자가 있을 것이다. 입찰 건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가 독점 입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경쟁회사를 물리치고 입찰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자기 회사는 입찰에 당선되어 좋겠지만, 입찰 경쟁에서 진 회사는 회사 운영이 힘들어졌을 것이다.

 

나를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우리의 왕이신가? 물론 힘과 폭력을 쓰는 로마 황제 같은 구세주와 왕이라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고, 우리를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분이 왕이 아니시다. 만약, 여러분 중 비교우위에 올라서게 하시고,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왕으로,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분이 있다면 예수님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낸 문제 중에 이런 문제도 있었다. 1) “옆집 아주머니께서 사과를 주셨습니다. 뭐라고 인사해야 할가요?” 답은, “감사합니다.”이다. 그러나, 한 초등학생은 이렇게 답을 적었다. “뭘 이런 걸 다~” 2)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답은, “우리를 낳아주셨으니까.”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 초등학생은 이렇게 답을 적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것은 요즘 사람들이 감사해야 할 것에 대하여 얼마나 온전히 감사하고 있지 못하며 사는지를 보여주는 풍자이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왜 감사하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이와 비교해서 내가 우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다른 이와 경쟁해서 내가 이겼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그러한 감사는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감사는 아닌 것 같다.

 

온전히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를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비교우위에서 떨어졌을 때, 경쟁에서 졌을 때, 우리는 어떠했는가? 그래서 감사한 적 있는가? 그럴 때 하나님께 감사하다며 감사헌금봉투에 감사의 이유를 적어 헌금을 드린 적이 있는가? 비교우위에 올라섰을 때, 경쟁에서 이겼을 때 감사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 비교우위에서 떨어졌을 때, 경쟁에서 졌을 때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무시당하고 핍박당하고 죽어도 괜찮다. 우리에겐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는 쩨쩨하게 우리를 남과의 비교우위에서 올라서게 하시고,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골로새서가 증언하고 있듯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 모든 왕권들과 주권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보다 먼저 계신 분이고, 교회의 머리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고,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분이시다. , 주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분이시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감사이시다. 이 최고의 감사를 모르면서, 이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르면서, 다른 감사가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최고의 감사이신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라는 찬양이 저절로 나올 것이지만,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감사로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로 인해 일희일비(자신이 생각하기에 좋은 일 있으면 막 감사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나쁜 일 있으면 절망했다)하며 감사를 모르며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여호와 우리의 공의라는 이름의 왕을 주셨다. 그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왕이신 것을 고백하고 선포한다.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는 구원을 받겠고 평안히 살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감사 또 감사가 넘치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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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7. 10:26

들을 귀

(마가복음 421-29)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의 비유가 나온다. 등불비유와 부지중에 자라는 씨 비유다. 앞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22절 말씀은 번역을 어렵게 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이것을 쉬운 말로 옮겨 보면 이런 뜻이다. “무엇이든지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무엇이든 감추어진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조금 역설적이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숨겨져 있는 것 같고, 감추어져 있는 것 같으나, 결국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 말씀은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경우를 말한다. 두 문장이 그것을 밝히고 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그리고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이다. ,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귀 없는 사람은 없다. 특별한 문제를 가지고 타고난 사람이 아닌 이상, 모두 귀가 있다. 그런데,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뜻이 무엇인가?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 안 된다. 쉬운 말로 옮기면 이런 말이다. “너희는 듣는 말을 새겨들으라. Take care what you listen to”. 우리의 일상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건성으로 듣는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듣더라도 새겨듣지 않는다.

 

기독교 전통의 영성훈련에 기도어린 경청(Prayful listening)”이라는 말이 있다. 영성가들이 한결 같이 강조하는 것은 영성훈련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자기의 마음과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 ‘기도어린 경청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기도하는 심정으로 듣는 것을 말한다. 기도어린 경청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자기의 자아를 죽이면서 듣는 것을 말한다. 기도어린 경청이란 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라기보다도, 타자가 오롯이 나에게로 다가 올 수 있도록 나의 전 존재를 온전히 개방하는 것을 말한다. <에큐메니안,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③> ‘기도어린 경청김오성 목사>

 

성경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기도어린 경청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그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지식에 예수님의 말씀을 비추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거부한다. ,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예수님께 온전히 개방하지 못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들음은 단순히 귀를 상대방의 입에 가져다 대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존재를 여는 행위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지금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그림을 보면서 설명하면 좀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음 그림은 Giovanni Battista Caracciolo(지오반니 바티스타 카라촐로)가 그린 <The Young Saint John in the Wilderness, 광야의 젊은 세례 요한>이다. (그림)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the Lamb of God)이로다”(1:29).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이것은 라틴어로 “Ecce Agnus Dei”(Behold the Lamb of God)라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젊은 세례 요한은 “Ecce Agnus Dei”라는 글자가 써 있는 지팡이를 발 앞에 내팽개치고,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원래 세례 요한의 영성은 이 한마디로 표현된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 세례 요한의 손가락 또는 삶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그림에서는 세례 요한의 손가락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이것은 배교나 다름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 그림을 보고 추적하기 쉽지 않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들음에서 멀어지면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의 세상에 갇혀 산다. 자기 자신의 세상에 갇혀 사는 자들은 정의와 평화, 사랑과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지 못하고, 그 나라가 자신의 삶에 임하게 되는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그는 그렇게 멸망 당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고 그 나라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구원이 임한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비유는 부지중에 자라는 씨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부지불식 간에 씨에서 싹이 트고 이삭이 나고 곡식이 맺히는 것처럼 부지불식 간에 그 나라를 사모하는 자의 삶 속에서 임한다. 농부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싹이 자라고 열매가 맺는 것은 전적으로 땅의 힘에 달려 있다. 그처럼, 하나님 나라가 그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의 삶에 임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만을 사모하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는 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우물 안 개구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그러나, 마음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의 삶 속에 임하는 소망을 꿈꾼다.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기도 하지만, 현재적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사역은 그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귀신을 내어쫓고, 죄를 사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지금 나의 삶에 임하기를 소망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축귀와 용서, 그리고 치유의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야 한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하는가? 예를 들어, 1) 암 병 환자는 암 병이 없는 몸을 기대할 것이다. 2) 마음이 아픈 자는 눈에 눈물 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기대할 것이다. 3) 가난한 자(돈이 없어 고통 받는 자)는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할 것이다(돈 때문에 고통 받지 않았으면 할 것이다). 4) 이런 저런 이유로 차별 받는 자들은 차별 없는 세상을 기대할 것이다. 5)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는 죽어서라도 그 자식을 다시 만나기를 기대할 것이다. 6) 땀흘려 일군 농작물을 빼앗기는 가난한 농민에게는 자기가 땀흘려 일군 농작물을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고 가족들과 배부르게 먹는 것을 기대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것(하나님 나라, 물론 우리의 좁은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귀 있는 자만 그의 말씀을 듣고 이러한 소망을 품고 살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야 한다. 존재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고, 그 안에서 기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거라고 하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불성실한 태도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기대를 품고 희망 가운데 사는 자와 자기 자신에게 갇혀 아무런 기대도 없고 희망을 갖지 못하는 자의 삶은 같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소망이 가득하길 바라신다. 소망이 가득한 삶, 생명이 가득한 삶의 첫 발걸음은 들을 귀를 갖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도어린 경청을 꼭 실천하고 실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부지중에 반드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각자의 삶 속에서 경험하며 사는 신실한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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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3. 18:11

주님께 비스듬히 기대기를 간구하는 기도

(21:5-19)

 

주여, 주께 비스듬히 기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가 기대어 있는 생명의 토대가 흔들려

우리의 삶도 흔들리고 있나이다.

살아가려면 기대어야 할 것이 많은

연약한 생명이오나,

오직 우리가 영원히 기댈 수 있는 것은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주님 밖에 없사오니

주께 비스듬히 기댄 우리를 밀어내지 마시고

우리를 주의 영원한 생명으로 품어 주옵소서.

생명을 위협하는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며

때로는 혼란스럽고

때로는 겁에 질리지만

주의 약속을 말씀을 굳게 붙잡고

거짓 선지자들의 허황된 유혹을 물리치며

영원한 생명의 토대이신 주께

살포시 비스듬히 기대오니,

주여,

그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여 주옵소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주여,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인내하고 또 인내하겠사오니,

우리의 영혼을 평온케 하시고

생명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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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6. 11. 13. 18:02

비스듬히

(누가복음 21:5-19)


비스듬히

/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1. 생명은 강인하기도 하지만 연약하다. 생명에는 강인함과 연약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존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기대는 것이 많다. 의연하게 서 있는 나무도 실은 땅에 기대고 서 있는 것이고,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것이다. 땅이 흔들리면 나무도 흔들리고, 허공이 흔들리면 나무도 흔들린다. 기대고 있는 것이 삐끗하면 생명도 삐끗한다. 그래서 생명은 연약하다.

 

2. 살면서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참 그렇다. 어느 날은 좋다가도 어느 날은 흐리다. 그럴 때면 마음이 변덕스럽고, 신앙이 변덕스러운 것 같아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믿는 자라면 언제나 맑은 날만 가득해야 하는데, 흐린 날이 오면 믿음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가하고 의심이 들기도 한다.

 

3.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을 목격하고 박해를 경험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사역 중이었고, 특별히 헤롯성전을 중심으로 막바지 사역이 한창 중이었다.

 

4.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5).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성전이라 불렸다. 헤롯성전은 로마 황제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받은 헤롯대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고자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지은 어머어마한 규모의 성전이었다.

 

5. 헤롯이 그토록 성전 건축에 공을 들인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직 정치적 목적만이 존재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평생 적으로 생각했던, 에돔(이두매) 출신 정치가였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정치술로 로마의 유력한 정치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그 세력을 등에 업고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으로 인정을 받았다.

 

6. 헤롯성전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서쪽 벽만 남아 있는 상태다. 현재 예루살렘에서 빛나고 있는 건물은 무슬림 사원(바위 사원)이다. 헤롯성전은 바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예언했듯이, 서기 70년경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무너뜨려졌다. 이것은 참으로 허무한 일이었다. 헤롯성전은 BC 20 년경 공사가 시작되어, AD 63 년경 공사가 완료될 정도로 공사 기간이 80여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완성한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7. 헤롯성전은 오늘 말씀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성전 외부 뜰은 한꺼번에 40만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고, 그 치장이 아름다울 데 그지 없었다. 사실 BC 20년에 시작된 외부 공사는 9년만에 끝났지만, 내부 공사 때문에 공사 기간이 80 여 년이나 흘렀던 것이다.

 

8.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유대인 신앙의 특징은 성전신앙이다. 그들은 성전에 기대어 살았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성전과 관련된 민족의 크나큰 아픔이 있었다. BC 587년 바벨론에 의해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민족적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았다. 그런데, 그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9.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이미 그것을 한 차례 경험한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도 어떠한 재해가 임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10. 2004년도에 인도양에서 쓰나미(지진해일)가 발생하여 인도네시아와 태국 등지에서 23만 여 명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 당시 한국의 어느 설교자는 그 사건을 우상이 판 치는 동남아시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2005년도 뉴올리언즈를 덮쳤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뉴올리언즈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교한 미국과 오스트리엘리아의 설교자도 있었다. 이렇듯, 기독교인들은 자연재해든, 질병이든, 개인이나 가정에 나쁜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

 

11. 재해가 발생하면, (신앙인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불안해지는 법이다. 마음이 극도로 약해지고, 정신적인 패닉이 온다. 거짓 선지자는 그 틈을 파고 든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거짓 선지자를 섣부르게 따라 나선 것 때문에 더 심한 멸망의 길을 걷는다. (요즘 한국사회의 최고 핫 이슈인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의 관계가 바로 이런 관계다. 엄마 아버지를 잃고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박근혜에게 교묘하게 다가선 것이 최태민이라는 사람이고, 그의 거짓 예언에 속아 더 심한 멸망의 길을 걸은 사람이 박근혜이다. 자신만 망한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12. <유대 전쟁사>를 쓴 유대인 출신의 유명한 로마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요세푸스는 헤롯성전이 로마의 침략을 받기 전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전쟁의 소문에 불안해 하던 유대인들에게 그 거짓 선지자들은 성전으로 피신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메시지를 듣고 성전으로 몸을 피했다가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단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유대인들의 슬픈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13.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8). 재해 뿐만이 아니라, 신변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또는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또는 욕망이 생기면 사람들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법이다. 사탄, 또는 사기꾼들, 또는 거짓 선지자들은 그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마음을 적당한 타이밍에 꿰차고 들어오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14. 대한민국에서 점집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강남이다. 욕심 많은 부자들의 욕망 때문이다. 점집이 가장 잘 되는 시기는 법조인들(,검사)의 승진 심사를 앞둔 시점과 입시를 앞둔 시점이다. 그리고 점집을 간절하게 찾는 모든 사람들은 신변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발생한 사람들이다.

(한국 다녀와서 표정이 밝아진 어느 교인의 이야기 목사님, 점쟁이가 그러는데, 내년부터 좋은 일이 있을 거래요~).

 

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자연재해나, 신변에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는 못된 습관부터 버려야 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주님으로 신실하게 섬겼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신변에 일어나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6. 오늘 말씀은 그들이 처했던 상황을 매우 아포칼립틱(묵시적, 무시무시한 언어)하게 전하고 있다. 우선, 성전이 무너진다고 한다. 그리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가 있으리라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라고 말한다.

 

17.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게 심판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거든 너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러한 일이 발생하거든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라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다.

 

18. 그렇다. 우리의 주변, 또는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때로는 이해 안 되는 힘들고 어려운 일’, 우리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일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증거가 되는 일이다. 우리는 그러한 일이 발생했을 때 두려워 하거나 무서워 하거나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나쁜 일(안 좋은 일, 힘든 일)이 생겨도 두려워하거나, 거짓 선지자들을 따라 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것을 불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려움은 내가 믿는 바를 증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19.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박해는 불평의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믿는 바를 증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당하며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간절히 믿는 데 왜 이러한 박해를 당하게 하세요?’라고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박해 앞에서 그들이 믿는 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어떤 것에 기댄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 우리가 매일 같이 경험하는 세상은 악하고 불의하다. 한국의 정치상황이나, 미국의 정치상황, 이렇게 크고 거창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불의하고 악한 것들로 즐비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심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계신데,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해? 세상 살기 정말 힘드네. 먹고 살기 왜 이렇게 힘드냐!”

 

21.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기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와야 한다. ‘왜 하나님이 계신데, 이렇게 세상이 악해?’가 아니라, ‘세상은 이렇게 악하지만, 하나님이 계셔서 다행이야가 우리의 희망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22.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는 실제로 어디에 생명을 기대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 정치? 가족? ? (건강)? 순실이?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것들이다.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헤롯성전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졌다. 임금과 집권자들이 박해자로 어느 순간 돌아설지 모른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우리를 죽이고 넘겨 준다.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더군다나,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순실이도 구속되고 말았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생명을 기대어 살고 있는가?

 

23.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말 못할 어려움을 안고 산다. 그것 때문에 실제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산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새로운 힘과 소망을 얻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현재 삶의 자리에서 겪는 어려움이 여러분에게 도리어 여러분이 믿는 바에 대한 증거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24.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1-4).

 

25. 오늘 말씀도 같은 것을 증거하고 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9). 환난(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들) 중에서 우리가 구원 받는 방법은 인내하는 것이다. 이 인내는 무조건 아무 생각 없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한 인내이다. 오늘 말씀 가운데서는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위에서 살펴본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서,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

 

26. 특별히, 로마서의 말씀 중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에서 우리 말로 연단으로 번역된 것은 영어로 ‘character’이다. 환난은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는 ‘character’를 만들어 낸다. ‘Character’는 우리 말로 성격, 성품, 인격, 신분등의 뜻을 갖는다. , 어떻게 인내하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 성품, 인격, 신분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하며 인내하는 그리스도의 성격, 성품, 인격, 신분은 분명 소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어떤 것에 생명을 기대어 살지 않고, 영원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생명을 기대어 살기 때문이다.

 

27. 내가 좋아하는 폴란드의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쉼보르스카의 시 <지도>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 잔인한 진실과 마주할 기회를 허용치 않으니까.” 이 시는 쉼보르스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라고 한다. 삶의 마지막,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세상을 들여다 보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 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삶의 회한들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인생의 굴곡과 질곡이 없는 이들에게서 나올 수 없는 고백이다. "나는 지도가 좋다. 거짓을 말하니까."

 

28. 우리는 날마다 '잔인한 진실'을 마주하며 산다. 너무 잔인해서 어떤 이는 눈을 감아버리고, 어떤 이는 딴청을 피우고, 어떤 이는 스스로 생명을 마감하기도 한다. 혹시, '잔인한 진실' 때문에 삶이 힘들고 어렵거든 쉼보르스카처럼 지도를 펼쳐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그가 이 시의 다른 곳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듯이, 세상은 사실 별개 아닐 수 있으니까. "밀림은 나무 몇 그루로 표시되어 있어 그 속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29. 혹시, 삶의 현실 앞에서 여러 가지 일로 (사업(직장) 때문에, 가정 때문에, 자녀 때문에, 질병 때문에, 정치 때문에, 또는 순실이 때문에)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건너고 있는 분이 있다면, 삶의 지도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눈 앞에 펼쳐놓기 바란다. 그리고 그분께 살포시 비스듬히기대어 보시라.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토대이신 우리 주님께서 비스듬히기대어 있는 바로 당신(여러분)에게 위로와 사랑이 가득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속삭여 주실 것이다.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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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