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5

잔치는 시작되었다(The feast has just begun)

(아가서(Song of Songs) 2:10-13)


한국(동양문화권)에서 결혼은 인륜지대사(major life event)’라고 한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큰 일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인륜지대사인 결혼은 개인이 감당하지 않고 집안이 감당한다. 그런데, 서양문화권에서는 인륜지대사인 결혼은 결혼 당사자들(개인)이 감당한다.

In Korea (Asian culture), marriage is called 'major life event'. It means 'one of the big things that people have to do while living.' In the Asian culture, the marriage is not covered by the individual but the family. However, in the American cultures, the marriage is held by the married couple (individuals).

 

이것은 각 문화권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인륜지대사를 공동체가 감당하는 것이고, 서양문화권에서는 공동체보다 개인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인륜지대사를 개인이 감당하는 것이다.

This reflects the ideas of each culture. In the Asian culture, the community carries the 'major life event' because it cares more about the community than the individual. In the American culture, the individual cares for the 'major life event' because it cares more about the individual than the community.

 

여기서 무엇이 더 낫다, 옳다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그 일을 감당하느냐 보다, 그 일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큰 일 중에 하나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It is pointless to ask 'what is better, right' here. The important thing is that it is one of the big things that people have to do while living.

 

성경에 나오는 결혼에 대한 가르침은 이렇다. 결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성경 중간 어디쯤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나온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그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한다고 판단하시고, 아담(사람)을 위해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신다.

The Bible teaches the marriage like this. The Bible's teaching about marriage does not appear anywhere in the middle of the Bible. It is in Genesis, the beginning of the Bible. Genesis 2 tells us that after God created Adam(human), it is not good for him to live alone, and he made a helper for Adam(human).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의 돕는 배필을 지으실 때 다른 무엇에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돕는 배필을 만드신다. 이것은 여자(하와)가 남자(아담)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와(여자)는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아담(사람)에게서 왔다.

By the way, when God makes the helper suitable for Adam, he does not make it from anything else, but makes a helper for him by taking one of Adam's ribs. This is not a verse that says that a woman (Eve) is a subordinate to man (Adam). This tells us that Adam and Eve are essentially the same. Eve (woman) came not from another, but from Adam (human).

 

(사람)의 돕는 배필을 지으신 하나님은 그를 아담 앞으로 이끌고, 아담이 그 돕는 배필의 이름을 짓게 하신다. 아담은 그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뜻으로 여자라고 부른다. ‘여자라는 의미는 남자, 여자라고 부르는 성적인 구별 이전에 사람이라는 의미가 먼저 앞선다. 그 말은, 남자와 여자는 사람으로서 평등하다는 뜻이다.

God, who made the helper of Adam (man), leads him to Adam, and Adam makes the name of the helper. Adam calls it "a woman" in the sense of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 meaning of 'woman' means 'human' before the distinction between men and women. That means man and woman are equal as human.

 

그 후에,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는다( 3:20). 이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무엇인가? 아담은 자신의 돕는 배필인 여자를 자신의 생명처럼 생각했다는 뜻이다. 성경은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결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25).

After that, Adam names the woman Eve (Genesis 3:20). It means 'life'. What is this? Adam meant that he thought of the helper 'woman' as his own life. The Bible tells this story and says about marriage as follows. “For this reason, a man wi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be united to his wife, and they will become one flesh. The man and his wife were both naked, and they felt no shame”( 2:24-25).

 

 

그렇다. 남편와 아내는 부모를 떠나 결합한 한 가정이고 인격체이다. 이제 그들은 한 공간에서 벌거벗고 있어도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벌거벗으면 부끄러운 법이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 앞에서, 아내는 남편 앞에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Yes. A husband and wife are a family and a personality that leave their parents. Now they are naked in one space, but they are not ashamed of one another. Isn’t it? It is a shame if a person is naked. By the way, a husband is not ashamed of his nakedness in front of his wife and the same with the wife in front of her husband. It is very strange if husband and wife are ashamed of being naked.

 

우리 시대는 결혼을 선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결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말씀)이다. 그야말로 인륜지대사이다. 그러나, 이것을 공동체가 감당하느냐, 개인이 감당하느냐가 문화마다 다를 뿐이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선택의 문제는 우리 인류에게 달려 있다.

Our time tends to think of marriage as an option. However, the Bible does not. Marriage is not a matter of choice but an order of God. It is indeed a major life event. Of course, the question of whether or not to obey God's command depends on our humanity.

 

오늘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말씀)에 따라, 결혼하기로 결단한 줄로 믿는다.

Today, I believe that both of you are determined to marry to each other according to God's command (Word).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들은 모두 생명을 풍성하게 한다. 생명을 헤치는 법은 하나도 없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 중에 최고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서로 사랑하라!” 나는 이 법의 최고의 결과물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은 All the laws God has ordained enrich life. There is no law in God's law to harm life. In the Bible, the best law that God has ordained is the law of love. "Love one another!" I think that the best result of this law is "marriage." Marriage is the greatest fullness among the fullness of life. So marriage is called a feast.

생명의 충만함 중에서도 최고의 충만함이다. 그래서 결혼은 잔치라고 부른다.

 

잔치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잔치 때 아끼는 사람은 잔치를 모독하는 것이다. 결혼은 사랑의 잔치이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은 무엇보다 사랑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결혼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아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랑을 왜 아끼나? 아낌 없이 쏟아 부어야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부부끼리 사랑만큼은 탕진해도 된다.

What is the greatest feature of the feast? It does save nothing. The person who save things in the feast is blaspheming the feast. Marriage is the feast of love. Therefore, married people should not save love more than anything else. It is strange that married couples save love one another. Why do you save love? You have to pour out love for one another. You can squander love for one another as you are married.

 

요즘 미국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 중 한 명인 팀 켈러 목사가 쓴 <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팀 켈러 목사는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분석하면서 ‘prodigal’이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하여, 하나님을 탕부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There is a book <The Prodigal God> by the Rev. Tim Keller, one of the most famous pastors in the American church, There, Rev. Tim Keller analyzes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of Luke 15 and applies the word "prodigal" to God, calling God "The Prodigal God".

 

‘prodigal’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이다(탕부 하나님, 20). 누가복음 15장의 소위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아버지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게사랑하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 그래서, 하나님은 탕부 하나님이시다.

'Prodigal' do not mean 'recklessly extravagant', but rather 'having or giving something on a lavish scale'. It means 'having spent everything'. (The Prodigal God, p. 20). As you see in the so-called Parable of the Prodigal Son in Luke 15, the father loves his little son and his great son like 'having or giving something on a lavish scale’, and he 'has spent everything' in order to save them. So, God is 'the prodigal God'

 

결혼은 잔치다. 찬치에서는 무엇이든지 아껴서는 안 된다. 결혼은 사랑의 잔치다. 그러므로 결혼생활을 하면서 사랑을 아껴서는 안 된다. 탕신랑이 되고, 탕신부가 되라.두 사람은 이제 한 몸이 된다. 두 사람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잔치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되는 사랑의 잔치에서 두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무한대로 풍성해지기를 소망한다.

Marriage is a feast. You should not save in the feast. Marriage is the feast of love. Therefore, you should not save love while married. Be a prodigal husband and be a prodigal wife. Both of you are now one body. Both of you have just begun the feast in the fence of family. At the beginning of the love feast, I bless that the lives of you two will be enriched as infinitely as God wants.

 

오늘 우리가 읽은 아가서의 말씀처럼, 두 사람의 결혼, 이제 시작된 사랑의 잔치를 통해, 두 사람의 인생 가운데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며, 비가 그치며, 그 삶 가운데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며, 열매가 익고 향기를 발하며, 그 입술에서 사랑의 속삭임이 끊이지 않는 아낌없는 사랑의 축제가 되기를 소망한다.

Through the marriage of you two, the feast of love that has just begun, as in the Song of Songs we read today, I bless that the winter is past, the rains are over and gone, flowers appear on your married life, the season of singing has come, the cooing of doves is heard in your land, the fig tree forms its earl fruit, and the blossoming vines spread their fragrance in your love.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속삭여 보자.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주님의 은총을 빈다.

Whisper to each other like this. “Arise, come, my darling; my beautiful one, come with me.”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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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12. 16:32

빛은 어둠을 이긴다 

(요한복음 8 12-20)


이스라엘에는 7대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가 있다. 유대인의 절기는 유월절에서 시작해서, 초막절에 끝난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 있고, 오순절(칠칠절)은 곡식의 첫 수확과 관련 있고, 초막절은 광야에서 장막에 거한 것을 기념하며 곡식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절기는 기본적으로, 감사의 축제이다. 눈을 떠서 제대로 보면, 이 세상은 감사할 일 천지다. 불평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늘 말씀의 시간적 배경은 초막절이다. 초막절을 맞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가셨고, 그곳에서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결을 펼치며 가르침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에고 에이미의 형식을 빌어 세상에 드러내시는데, 오늘은 특별히 자기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예수님이 뜬금없이 자기를 빛으로 소개한 것은 아니다. 초막절 축제 때 행하던 빛의 의식에 빗대서 자신을 빛으로 소개한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초막절 축제 때 젊은 제사장은 사다리에 올라 여인의 뜰에 있던 4개의 황금 촛대에 불을 붙였다. 이 빛은 온 예루살렘을 비춘다는 것을 상징했다. 시편 27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스라엘에 광야에서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대적자의 손에서 건져 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현현하실 때 빛으로 나타나신다. 빛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특별히, 이사야서 60 19-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성경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특별히, 빛이라는 상징은 매우 강력한 상징이다. 요한복음 1장은 빛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복음을 전한다. 특별히 요한복음 1 5절 말씀은 이렇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과 어둠이 대비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어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빛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고 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보니, 빛과 어둠이라는 상징을 통한 성경의 메시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에 오기 전 겨울의 끝자락, 그러니까, 2003 2월 어느 날, 나는 사촌형과 함께 설악산 등산을 했다. 우리가 설악산 등산을 하기로 마음 먹는 날은 대설주의보로 인해 흰 눈이 온 산을 덮었던 때였다. 산행금지가 풀린 시간은 오전 11시였고, 사촌형과 나는 계획대로 설악산을 올랐다. 오색 약수터 쪽 등산로를 이용하여, 죽을 고생을 하며 설악산 정상인 대청봉에 올랐는데, 그때는 이미 시간이 오후 5 30분 경이었다. 너무 추워서, 정상에 5분도 못 머물러 있고, 곧바로 하산 했는데, 산을 내려오면서 그만 해가 지고 말았다. 그런데, 너무 감사한 것은 그날 반달이 하늘에 떴다. 설악산 꼭대기에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앙상한 나뭇가지로 비추는 반달의 빛 때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빛의 위력은 대단하다. 생명을 살린다.

 

위에서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도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에서 는 애굽을 의미하고, ‘은 바벨론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질곡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하는 사람은 이 뜻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은 주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힘 센 애굽에 붙었다, 더 힘 센 바벨론에 붙었다 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애굽바벨론을 빛으로 여기며,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서 고된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라!” 빛이 되어 줄줄 알았던 애굽과 바벨론은 이스라엘에게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빛은 그들을 괴롭히고 멸망시켰다. , 그것은 참빛이 아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빛이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슬픔의 날을 끝내실 수 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다!”

 

요한복음 1 5절도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깨닫지 못하더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카타람바노이다. 이 말은 붙잡다, 깨닫다, 이기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새번역은 이 구절을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 어둠은 빛을 붙잡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빛과 어둠은 어울릴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초막절에 세상을 비추는 등불에 빗대어, 자기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요한복음 기자가 예수님을 빛으로 증언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갈망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실 때 빛으로 오시는데, 빛으로 오신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신다. ,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은 언제나 구원의 은혜가 임한다. 슬픔의 날이 물러가고, 기쁨의 날이 온다. 그 기쁨이 지금 이곳에 임했다. 왜냐하면, 빛이신 예수님이 바로 이곳에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이었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하다. 어둠은 빛을 붙잡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빛은 누구(무엇)인가? 애굽인가? 바벨론인가? 우리에게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빛인 것이 깨달아지는 자에게는 구원의 빛이 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을 마음에 붙들고, 어둠을 이기며 살 것이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빛인 것을 믿고 의지한다면, 이 세상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 빛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구원의 빛을 날마다 비추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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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6. 07:24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마가복음 15:33-41


십자가 상에서의 칠언 (가상칠언)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저들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23:34)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 19:26-27)

4)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27:46, 15:3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5) 내가 목 마르다 ( 19:28)

6) 다 이루었다 ( 19:30)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 23:46)

 

마가복음에는 십자가 상의 칠언 중, 4언인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만 나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을 외치고 죽었다. 예수님의 이 외침은 시편 22편에서 왔다. 극한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 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그만큼 말씀이 내면화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에 걸쳐 이루어 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얼마큼 말씀이 육신이 되는 내면화 과정에 들어서 있는가? 희로애락의 상황에서,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무엇인가? 세상적인 신음과 욕설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시편 22편의 1, 2절은 이렇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옛날에 짚신 장사를 하는 부자가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짚신은 잘 팔리는데, 아들 짚신은 잘 팔리지 않았다. 아들은 자기가 만든 짚신이 왜 잘 팔리지 않는지, 잘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병에 걸려 돌아가시게 됐다. 아들은 죽어가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울며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 짚신은 잘 팔리는데, 내 짚신은 왜 잘 안 팔려요? 아버지 짚신과 내 짚신의 차이는 뭐에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이라고 한 마디만 남겼다. 아들은 아버지를 고이 묻어 드린 뒤, 아버지가 남기신 한 마디 이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아버지 짚신과 자기 짚신의 차이점을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흐린 뒤, 아들은 아버지가 남기신 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바로, 아버지의 짚신은 털 한 가락 나오지 않은 부드러운 짚신이었고, 아들의 짚신은 털이 삐쭉빼쭉 튀어 나왔던 것이다. 그 이후, 아들을 아버지가 만든 짚신처럼 털 한 가락 나오지 않은 부드러운 짚신을 만들어 내다 팔아, 잘 먹고 잘 살았다, 라는 이야기가 있다.

 

예수님이 시편 22편의 첫 번째 구절만 외치신 것은 시편 22편의 말씀 전체를 하나님 앞에 아뢴 것과 똑같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면서,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시편 22편의 말씀 전체를 외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한 구절, 또는 한 단어만 외쳐도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담기는 법이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죽어가면서 짚신 잘 만드는 법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라마 라마 사막다니를 외치신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것에 대한 원망이 아니다. 시편 22편은 원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건지실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 “여호여와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22:19-21).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송의 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라마 라마 사막다니를 외치신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자기를 버리신 듯한 하나님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외침인 것이다. 이 외침은 믿음과 찬송의 외침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응답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닌 구원의 죽음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나타내 보이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이 세상의 역사를 본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 놓여 있다.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간다. 그것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구원사라고 한다. 그냥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 놓여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한마디로,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른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은 구원자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이루신 그분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기름 부음 받은 자인데,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룬 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단순히 구원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의 깊은 차원을 만난다. 구원이라는 말이 세속적으로 바뀌면 번영이라는 말이 된다. 사람들은 번영하기 위하여 아우성 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자체가 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다른 말로, ‘순종이라고 한다. 구원은 순종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신적인 은혜이다.

 

스펄전 목사는 타 도시에서 자기가 돌보는 런던의 고아들을 위해 300 파운드를 모금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그 돈을 조지 뮬러 목사에게 갖다 주라는 음성을 들었다. “! 주님, 저희 고아들도 이 돈이 필요한데요그러나 그 음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그 돈을 들고 뮬러에게 갔다. 뮬러는 무릎을 끓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지, 하나님께서 내가 모금한 300파운드를 당신에게 주라고 해서 가져 왔소.” “스펄전 목사님, 저는 지금 바로 300파운드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요.”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함께 기뻐했다. 스펄전 목사가 사무실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편지가 하나 와 있었는데 300기니의 헌금이 들어있었다. “주여, 300파운드에 이자까지 보태서 주시는군요!” 그는 감격하여 감사를 드렸다.

 

이것은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언 19:1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순종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그것에서 구원의 은혜가 나왔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면,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가 넘쳐나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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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6. 6. 07:21

예배 - 주께 돌아옴

룻기 1

(룻기 1:1-14) 


5월 한 달 동안 진행되었던 세화하늘축제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우리 모두가 경험했다. 나경화 선교사 초청 집회, ‘지금은 세화시대를 외치며 출전했던 북가주 지역 교회간 친선 탁구대회 (응원상), 브라이언 킴 초청 집회, 그리고 장윤식 목사 초청 부흥성회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보았고, 세화의 미래를 보았다.

 

특별히 부흥성회에 큰 은혜가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부흥회 시작하는 날, 핸드폰과 지갑을 분실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방해도 있는 법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내가 초보 목사였으면, 핸드폰과 지갑을 분실한 것에 마음을 빼앗겨 부흥회를 그르쳤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든 근심 걱정을 내려놓고, 부흥회에만 집중했다.

 

이 세상에는 빛도 있지만, 어둠도 있다. 현대인들은 이것을 자꾸 까먹는다. 도시의 불빛은 이 세상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도시의 불빛에 너무 취해 있으면 안 된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방해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멀쩡히 주님 앞에 나와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리스도인은 연어와 같다. 세상과 같은 망망대해로 나갔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 연어의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강 상류이지만, 우리의 고향은 그리스도의 품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돌아온다.

 

연어가 강 상류로 돌아가 그곳에서 알을 낳고 죽기까지 많은 시련이 있다. 돌아가는 일은 모험이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연어가 위험을 떠안고 모험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의 삶의 이유이고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이유이고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이것을 깨달은 상태이다.


이것에 대해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찬미함으로써 향유하라고 일깨우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합니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합니다라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쉴 때 비로소 평안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는 우리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즐비하다. 이런 노래가 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정말 잔치에 갈 수 없어 장가 가야 하고 소도 사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할 일도 많아 내 어이 하리 죄송해요 한 어느 마을에 멋진 집에 살던 사람이 큰 잔치를 벌여놓고 손님 청했네 그가 널리 이웃더러 오라 했더니 그때 모든 사람들이 대답하는 말~”(14)

 

우리는 오늘 나오미의 삶의 여정을 본다. 룻기 1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사시들이 치리하던 때가 어떤 때인지, 우리는 사사기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살아가기 쉽지 않은 시대였다. 무질서하고 혼탁한 시대, 삶의 터전이 매우 빈약한 때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국가로서의 어떠한 문화와 정치적 체계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때였다. 그때,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 그때에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다.”

 

베들레헴은 집을 의미하는 베트와 떡을 의미하는 레헴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다. ‘떡집이라는 뜻이다. 떡을 굽는 마을로서 베들레헴은 양식의 집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양식의 집을 떠나 모압 땅으로 거류하러 갔다. 거류한다는 히브리어의 구르라는 말인데, 이는 이방인, , 난민으로서 눌러 앉다, 거주하다라는 뜻이다.

 

2절에는 한 사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었고,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였고,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었다. ‘엘리멜렉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이고, ‘나오미는 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이들의 신앙과 삶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던 엘리멜렉 가정에는 기쁨이 넘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의 삶에 시련이 닥친다. 우리는 그것을 그의 아들들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 엄마의 이름과는 달리, 두 아들이 이름 말론과 기룐은 그렇게 좋은 이름이 아니다. 말론의 뜻은 병약한 자이고, 기룐은 폐결핵, 또는 멸망이라는 뜻이다.

 

이 두 아들의 이름에서 풍기는 불길한 기운이 모압 땅에서 현실화 된다. 푸른 꿈을 안고 어렵게 결심한 이주인데, 모압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는다. 그리고 나오미의 두 아들은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 첫째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인데, 그 뜻은 목덜미라는 뜻이고, 둘째 며느리의 이름은 인데, ‘원기회복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10년 후에 두 아들도 마저 죽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오미는 모압 거류민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오늘 말씀에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6).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양식을 주시는 분이다. 돌봄과 양식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양식의 집베들레헴을 떠난 이유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거류민이 되었다. 그런데, 양식을 구하러 간 곳에서 양식을 구하지 못하고, 그들이 얻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오미는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되돌아 오려고 하고 있다.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1절의 라구르(거류하기 위해)7절의 라슈브(돌아오려고)가 대비되고 있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 떠났던 나오미가,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실제로 이민생활(거류민)을 하고 있는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아주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거류민으로 이곳에 살면서, 양식을 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거류민으로 살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하다. 그래서 한인이민자들은 교회를 다니는 비중이 매우 높다.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단순히 신앙의 장소가 아니라, 쉼과 우정과 회복의 장소이다. (이민자들의 교회는 종교집회 장소의 의미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이민자들에게 교회는 물리적인(physical) 마음의 고향이다. 고향의 언어와 문화와 사람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이민교회는 매우 중요하다. 쉼과 우정과 회복이 있는 거룩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겐 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주께 돌아와 있기 때문이다. 피터 셰퍼의 연극 에쿠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예배하지 않으면 움츠러들게 될거야. 그만큼 잔인한 일은 없지.” 여러분은 어떤 음성을 듣고 이 자리에 돌아와 있는가? 나오미가 들었던 음성이 여러분의 귀에도 날마다 들리시길 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예배는 주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예배는 사랑의 언어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경험하는 것이고,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반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를 쓰고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놓여 있더라도, 이겨내고 기를 쓰고 돌아오라. 그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굴복하지 말라.

 

왜냐하면, 양식이 다른 데 있지 않다. 생명이 다른 데 있지 않다. 예배는 그러한 신앙고백이 담긴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거기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배는 사랑의 언어이다.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양식이 있습니다. 주님께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돌아옵니다.”

 

록펠러의 십일조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성실한 신앙인이 된 데에는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다. 록펠러의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아들 록펠러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너는 예배 30분전에 도착하여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가장 정성껏 예배를 드려라.”

 

나는 지금 록펠러 이야기를 하면서 예배 잘 드리면 록펠러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라는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를 사랑하는 자, , 주님께 돌아올 줄 아는 자는 주님께서 돌보시고 그에게 양식(생명)을 주신다는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복음이 여러분의 귀에 들렸으면 좋겠다. 우리 서로 귀에 들리게 이렇게 말해보자. “예배 잘 드립시다! 주님께로 돌아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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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5. 8. 14:59

나와 당신 (I-Thou)

(눅 10:25-36)

 

비와 벌

 

처마 밑을 맴돌던 벌 한 마리가

주저 앉다 말고 갑자기

빗속으로 뛰어 들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곤충심리학자가 아니라서 잘 모른다

 

다만 빗속에서 비 맞고 돌아다녔다고

나처럼 그 벌도 엄마한테 혼날까봐

그것이 걱정된다

 

빗속으로 뛰어드는 벌을 보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다

나도 앞뒤 가리지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비를 흠-뻑 맞고 집에 돌아와

엄마한테 혼나고 싶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고, 스승의 날도 있다. (물론 미국에는 어린이 날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어린이에 대한 인권이 충분히 확보되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어린이 날이 생긴 계기는 어린이의 존엄성과 지위 향상을 위한 것이었고, 또한 3.1운동을 시작으로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

 

국제적으로 어린이의 인권 보호 운동은 1925년 제네바에서 있었던 아동 복지를 위한 세계 회의(World Conference for the Well-being of Children)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각 나라에서는 어린이날을 지정하여 지키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나라가 어린이날을 지정하여 지키고 있지는 않다. 그 중에서 특이한 것은 한,,일 세 나라에 어린이날이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세 나라는 문화적 영향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의 어린이날도 실제로 소파 방정환을 비롯한 일본의 유학생들 중심으로 제정되었다. 이들은 1923 5 1, 색동회라는 조직을 구성하여 어린이 운동을 펼쳤다.

 

동양문화권에서 어린이의 인권이 이슈가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 말에서도 어린이라는 낱말이 등장한 것도, 소파 방정환 선생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젊은 사람을 젊은이라고 하듯이 나이가 어린 사람도 어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린이'라는 용어를 널리 보급하는 데 힘썼다.

 

어린이날이 아동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제정된 것과는 달리,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은 인권 향상의 의미보다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제정된 날이다. 19565 8, 원래는 어머니 날만 시행되었다. 그러다, 아버지들의 반란 때문에 1973년부터 어머니와 아버지의 날이라는 뜻으로 어버이날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날 제정이 일본의 영향이라면, 어버이날 제정은 미국의 영향이다. 게다가, 어버이날이 되면 부모님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풍습도 미국에서 온 것이다. 100여 년 전, 어느 한 소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하기 위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어느 모임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그러한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카네이션의 꽃말은 건강을 비는 사랑이라고 한다.

 

스승의 날은 상당히 자생적인 기념일이다. 그리고, 그 날짜 지정도 굉장히 특이하다. 처음에는 국제연합 가입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했다가, 1965년부터 세종대왕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 지키고 있는 5 15일은 스승의 날이지만, 세종대왕 탄신일이기도 하다.

 

지금 시대를 보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인권이 없어 특별히 어린이날을 제정하여 인권을 외쳐야 했던 어린이는, 현재 처럼 대우 받는다. 그러나, 인권의 최상위에 있었던 부모님과 스승님의 인권은 날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어린이날을 없애고,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의 취지를 바꾸어야 할 판이다.

 

우리는 관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관계가 위태롭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부부의 관계, 그리고 나와 이웃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모든 것이 위태롭다. 어린이날, 부모가 자식을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어버이날, 자식이 부모를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스승의 날, 제자가 스승을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신앙인으로서, 주일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하루만 기억하면 되는가?

 

어느 날,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을 다른 말로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이런 것이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교사와 예수님 간의 대화에 의하면, 구원을 얻는 길은 이렇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10:27, 19:18, 6:5).

 

이 말씀에 의하면, 구원의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구원은 사랑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우리가 얼마나 구원에 가까이 살고 있는지, 아니면 구원에서 멀리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율법교사는 더 나아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 주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집으로 가려고 여리고 쪽으로 내려 가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발가벗겨진 채로(그 당시에는 옷도 귀해서 옷도 빼앗아 갔다) 거반 죽은 상태가 되어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

 

그때 마침, 세 종류의 사람이 그곳을 지나친다. 제사장,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거반 죽게 되어 길가에 버려져 있는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친다. 결국, 강도 만난 자를 구해 준 것은 사마리아인이었다.

 

별다른 설명이 없는 것을 보니, 강도 만난 자는 유대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 만난 자를 구해주어야 마땅한가? 같은 유대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 제사장 또는 유대인인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구해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형제,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그들이 평소에 원수로 생각하고 사람취급 안 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해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문처럼,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관계의 위태로움을 목격하게 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 그와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 것과 같다. 자신이 제사장이고 레위인이고, 특별히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이고, 유대인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관계를 물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해 주었을 것이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관계를 질문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자각했던 사람이다.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바라보았을 때,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겼. 이 능력(상대방을 인식하는 능력)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능력이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존감을 상실했다는 데서 온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 일본의 소설가 나스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난 죽기 전에 단 한사람이라도 좋으니까 남을 믿어보고 죽고 싶어요. 학생은 그 단 한 사람이 돼 줄 수 있겠습니까?” 자존감의 상실은 나도 못 믿고, 남도 못 믿는 비극을 불러 온다.

 

자존감을 상실하는 이유는 마땅히 받아야할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마땅히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 자식은 마땅히 부모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사회에서는 이게 잘 안 된다. 부모는 자기 자신을 높여주는 자식만 사랑한다. 엄마의 학대(공부학대)에 참다참다 못참아 엄마를 죽이고 감옥에 간 한 학생의 글이다. “부모는 멀리 보라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합니다. 부모는 함께 가라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하고 학부모는 꿈을 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부모인가, 아니면 학부모인가?

 

자식은 마땅히 부모님을 사랑해야 한다. 부모는 마땅히 자식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자식은 부모가 경제력이 없으면, 부모 취급도 안 하고, 그마저 부모가 늙으면 갖다 버린다. 얼마 전, 신문에서 버림 당하는 치매노인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기사는 이것을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명명했다.

 

요즘 사회를 능력 사회라고 한다. 능력 있는 사람이 사람 취급 받는 사회라는 뜻이다. 능력 있는 자식이 사람 취급 받고, 능력 있는 부모가 사람 취급 받고, 능력 있는 스승이 사람 취급 받고, 능력 있는 남편, 아내가 사람 취급 받는다. 능력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예일대학교의 생화학자인 헤롤드 J. 모로위츠는 인체의 화학물질을 계산해 보면, 인간생명은 600만달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헤모글로빈은 그램당 285달러, 인슐린은 그램당 47달러, 효소 트립신은 36달러, 탑즙색소 빌리루빈은 12달러, DNA 76달러, 콜라겐은 15달러, 알부민은 3달러, 덜 알려진 물질로 효소를 활성화시키는 아세테이트 키나아제는 그램당 8,860달러, 알칼리 포스파타테는 225달러, 이할루론산 교착물질은 175달러, 브래디키닌아미노산 12,000달러, 젖샘의 젖 생산을 자극하는 호르몬 프로클랙틴은 그램당 175만달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체중 1그램의 가치는 평균 245달러라는 결론을 내린다. 모로위츠 박사는 자신의 체중이 168파운드인데 68%인 물을 빼고 계산하면 24,436그램으로 24,436×245달러는 6,000,015.44달러가 된다는 것이다.

 

안구 하나 구입하려면 1억 이다. 눈 두개를 갈아 끼우려면 2억이 들고, 신장 바꾸는 데는 3천만원, 심장 바꾸는 데는 5억원, 간 이식 하는 데는 7천만원, 팔다리가 없어 의수와 의족을 끼워 넣으려면 더 많은 돈이 든다. 지금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몸에 약 51억이 넘는 재산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을 물로 보면, 인간은 5리터의 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값어치는 3달러 정도 밖에 안된다. 사람을 물로 보면 안 된다.

 

나와 당신(I-Thou)’는 유대인 철학자(신학자) 마틴 부버의 용어이다. 그는 인간 간의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나와 그것(I-it)’의 관계로 가지면, 그저 육체적인(physical) 피상적인 관계에 머물러 착취의 관계 머물게 되지만, 그것을 나와 당신(I-Thou)’의 관계로 발전시키면 영적인 관계에 도달해, 상대방을 착취의 관계가 아닌 사랑(교제, 친교)의 관계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그저 나와 그것의 관계로 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와의 관계를 나와 당신의 관계로 발전시켜 영적인 관계, 사랑의 관계로 그를 바라보게 되어, 그를 바라볼 때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바로 그러한 관계가 구원을 가져 온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한 것이지, 우리가 능력 있는 존재라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관계가 위태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관계에 대하여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올바로 맺는 길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27. 15:46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이가

(마가복음 10:35-45)


한국에서는 권력투쟁이 한창 중이다. 사극 같은 데서 보면, 권력투쟁이 발생하면 피바람이 분다. 권력은 그만큼 생사를 가를 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은 사회제도가 민주화되어 옛날처럼 권력투쟁이 발생한다고 피바람이 불지는 않는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의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현대 사회를 떠 받치고 있는 두 개의 큰 기둥은 정치와 경제이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출세의 길을 가려면, 정치나 경제 분야로 가야 한다. 다른 말로 해서, 권력과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출세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느 분야나, 권력과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속한 세상을 호령한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던 중 발생한 사건이다. 자신이 고난 당할 것에 대하여 세 번째로 말씀하신 뒤, 제자 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무엇인가를 청한다. “선생님,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주세요!” 그들이 구한 것은 이것이었다.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

 

이것은 명백하게, 야고보와 요한이 권력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권력의지를 드러냈다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과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권력투쟁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이 옛날의 다윗 왕처럼 (다윗의 자손으로서)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방인들(로마제국)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권력을 다시 찾아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아니라, 그 당시 일반 대중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중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앞서가고 뒤따르며)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9).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그들은 조상 다윗의 나라가 그의 자손 예수를 통해서 오게 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이 기대하던 다윗의 나라는 오지 않았다(오지 않았다기 보다, 그들이 기대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왔다). 이방인(로마제국)을 몰아내고 다윗의 나라를 세워줄 것으로 기대했던 다윗의 자손 예수는 이방인(로마제국)의 손에 처참하게 죽는다. 이것은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리칠 것으로 기대했던 다윗이 골리앗에게 처참하게 죽게 되는 형국과 같다.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그들이 힘없이 고난을 당하는 예수에게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성낸 것이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욕을 해댄 것은, 그들의 기대가 허탈하게 무너진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실망이 커지면 분노가 표출되는 법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권력의지를 드러내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38).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에, 그들은 라고 대답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인지 알지 못했다.

 

정치는 개인(공동체)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이고, 경제는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것이 실현된 사회를 정의사회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사회 덕목은 정의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경제적 풍요로움이 불평등하다고, 부정의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교회는 성경의 메시지를 통해서 어떠한 해결책을 내 놓아야 할까? 우리는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권력의지를 드러내자, 다른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41). 그들은 왜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을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야고보와 요한의 무지를 향해 화를 낸 것일까? 아니다. 그들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들보다 먼저 권력의지를 예수님께 전달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시샘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권력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권력의지를 나무람과 동시에 어떠한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주신다. 권력을 가지려고 권력의지를 드러내는 자들은 권력을 손에 쥐고 권세를 부리기 위함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42). 여기서 임으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린다는 뜻은 권력을 잡은 자는 자기 마음대로 무슨 일이든지 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맘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자유라고 한다. , 권력은 자유를 극대화시킨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자유를 극대화시키려 할까? 그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크면 클수록 사람은 생명이 커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위해서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자유는 권력을 잡을 때 오는 것이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 방식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물론, 권력을 잡은 자는 최고의 자유를 누려서 좋긴 한데, 권력을 잡지 못한 이들, 권력을 잡은 자에게 부림을 당하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를 빼앗긴 박탈감과 상실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사회는 평등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권력의지를 완전히 뒤집어 엎는 말씀이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이 말씀은 그런 식으로 생명을 성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생명의 성취는 권력의지를 드러내서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데서 오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상대방을 섬기는 데서 생명의 성취된다는 가르침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3-44).

 

어떤 목사님이 SNS에 연회 참석 후기를 올렸다. 귀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 공유한다. (비문은 약간 손 봤다.)

 

지난 주 00연회가 있었다. 올 해는 감리사 선거가 있는 연회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연회는누가 감리사가 되느냐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점차 아니 전적으로 연회나 총회의 존재 목적이 감리사나 감독을 뽑는 것으로 고착되었다. 감리교회의 정체성이나 본질은 뒷전이다. 무엇보다 영적 지도자로서 지녀야 할 영성과 믿음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언급도 없다. 오로지 회무처리(그게 그리도 중요한가 보다), 그것도누가 장을 맡고, 누가 중요한 자리에 앉는가가 중요하다(돈이 안 되는 자리에는 관심도 없다).

 

감리교회가 마치 감리사나 감독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감리사와 감독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이 존재하는 것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감리사와 감독의 조건을 봐도 그 사람(영성) 자체보다 감리사나 감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규모가 되는 교회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영성보다 규모가 중요하다. 교회의 규모를 나타내는 재정과 교인수가 중요하고 절대적인 조건이다. 돈이 없는 교회, 즉 돈을 내는 교인이 적은 교회는 감리사나 감독 (자리)에 눈길도 주지 말라는 것이다. 재물을 섬기는 감리교회이다. 재물이 곧 능력이고, 재물이 곧 지도자의 조건과 기준이 되었다.

 

이는 마치 서열다툼을 하였던 제자들과 똑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길을 가고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누리게 될 세상적 명예와 출세를 위한 자리다툼을 하였던 것과 같이 현 감리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보다 따르는 흉내만 낼 뿐, 실상은 제자들처럼 세상적 명예와 출세를 위한 자리다툼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

 

"나는 메소디스트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단지 능력 없는 종교의 형태만을 갖고 있는 죽은 단체로서 남아 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만약에 메소디스트들이 처음 출발할 때 가졌던 그 교리와 그 정신 그리고 그 훈련을 다같이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 존 웨슬리

 

세상은 권력과 재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세상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권력과 재물을 통해 생명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제자도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생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상도를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도를 따르고 있는가!

 

이 말은 정치와 경제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정치이고, 무엇이 올바른 경제인가에 대해서 반드시 물어야 한다. ‘정치와 경제정의가 올바로 세워지고 있는가,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제자도의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제자도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제자도를 내 삶의 자리에서부터 실천해야 한다.


제자도 관점에서의 정의는 섬김이다. ,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제자는 섬김의 종이어야 한다. 웨슬리의 주장처럼, 이것이 살아 있으면 그리스도의 교회(하나님 나라)이요, 이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교회(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종교를 세워 나가고 있는가.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24. 15:30

도마가 마주한 현실

(요한복음 20:24-29)


도마(Thomas)는 아람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다. 헬라어로 쌍둥이는 디두모이다. 도마는 쌍둥이였다. 그런데, 도마는 예수님의 열 두 명의 제자 중 한 명으로서 유명한 성경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때문이다. 도마에게 늘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이다. 우리는 도마를 흔히, ‘의심 많은 도마(doubting Thomas)’라고 부른다.

 

의심 많은 도마는 믿음이 없었던 것처럼 호도되어 왔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흔히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의심신앙의 적(enemy)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의심은 나쁜 것인가? 의심은 죄인가? 의심하면 신앙인도 아닌가? 의심하면 믿음이 없는 것인가?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의 부활기사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처음은 막달라 마리아(부활을 경험한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 있었던 마가복음의 기사와는 달리 요한복음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한다)이고, 다음은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요한 추정)’이고, 그 다음은 안수 첫날 저녁 때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몸을 숨긴 곳으로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 그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도마가 동료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시 왔을 때, 제자들은 도마에게 우리가 주(예수님)를 보았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도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도마의 의심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는 그저 나도 너희들처럼 예수를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구체적으로 의심한다.

 

도마의 의심이 있은 후 여드레(8)가 지나 그의 의심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마침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신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씀하신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그리고 난 후의 도마의 반응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제가 제 손가락을 주님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넣어 보았으니, 이제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도마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성경은 이 후의 도마의 행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에 생성된 문헌이나 전설을 보면 도마가 그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 준다. 성경에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은 짧게 나오나, 기독교 전통에서 마리아 복음서가 생길 정도인 것을 보면 그가 복음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도마복음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도마가 복음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도마복음서)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여 인도의 마라폴이라는 곳에 묻혔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인도가 힌두교나 불교가 강한 나라라고 알고 있지만, 인도의 기독교는 아주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도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매우 독특한데,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긴 세월(기독교 태동과 역사를 같이 하는)을 보내며 주변 종교(힌두교나 불교)와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대학마다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강의가 있다. 하버드에서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가 유명하여 얼마전 유명세를 탄 일이 있고, 예일대에서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철학적 죽음)’에 대한 강의를 한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이 유명하다. 내가 한국에서 다닌 학교에서는 한태동 교수의 강의가 학생들에게 가장 큰 인가를 누렸는데, 그 이유는 이 분이 박사학위가 네 개나 있는 데다가, A 폭격기로 소문 나 있었고, 금요일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라고 수업을 안 하고, 비 오는 날은 비(아닐 비) 온다고 수업을 안 해서 그랬다.

 

에모리대학교에서 신학 공부할 때, 그곳에도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던 강의가 있었다. 토마스 탕가라지 교수의 <Image of Christ>라는 수업이었다. 조기 등록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강의였다. 그런데, 그분의 이름에서도 살짝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인도 출신 신학자였는데, 다름아닌,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복음을 전한 인도의 마을 출신이었다. 그분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인도의 전통 악기를 연주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선율이 귀에 선하다.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매우 독특하고 우주처럼 넓고 깊었으며, 그것을 통해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가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떤 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도마는 실증주의자이다. 그의 의심은 믿음 없는 의심’, ‘냉소적인 의심이 아니라, 마주한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더 잘 믿기 위한 거짓 없는 신앙, 진실한 신앙의 자세였다는 것이다. 일찍이 회의(의심)’는 철학에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철학적 방법으로 인식되어 왔다. ‘회의의 방법을 써서 상대방이 진리에 도달하게 도운 대표적인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이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 있다는 이 말, ‘그노티 세아우톤(너 자신을 알라)’이라는 말도 결국 그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질문)’을 가지라는 뜻이다.

 

의심(회의, 질문)을 통해 자신이 마주한 현실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인생의 현실에 파묻혀 의심하는 것을 잊고 산다. 괜찮지 않은데 왜 괜찮다고 현실을 외면 하는가. 문제가 있는데 왜 문제가 없는 듯 태연하게 있는가. 아픈데 왜 안 아픈 것처럼 있는가. 믿어지지 않는데 왜 믿는 척하는가. 그러니까, 불의한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고,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린 채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안데르센의 동화 중 <미운 오리새끼>라는 것이 있다. 그 동화를 보면, 오리의 무리 중에 유독 미움을 받는 오리 한 마리가 있다. 그 오리는 하도 미움을 받아서 절망에 빠진다. 그래서 미운 오리새끼.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을 우아하게 날고 있는 백조를 본다. 그것을 보며, ‘나도 저렇게 날았으면 좋겠다고 미운 오리새끼는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미운 오리새끼는 성장했고, 어느 날 호숫가에서 백조 한 마리를 만난다. 그 백조는 미운 오리새끼에게 엄청난 사실을 알려 준다. ‘너는 오리가 아니라 백조야!’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미운 오리새끼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의심(회의, 질문)’해보지 않았다. ‘나는 누구일까?’ 그런데, ‘의심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난 후, 미운 오리새끼는 더 이상 미움 받는 오리가 아니라, 하늘을 우아하게 나는 백조가 되었다.

 

도마가 마주한 현실은 부활의 현실이었다.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대개 자신이 마주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외면하려는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 반응은 세 가지이다. 1)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주변을 안 보거나, 2) 꿩처럼 두려워서 고개만 파묻고 있거나, 3)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술이나 마약 같은 것에 의존한다.

 

그러나, 도마가 보인 반응은 마주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주한 현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진실과 진리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을 잃어 버린 자는 인간성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마는 부활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그 현실을 적극적으로 파악하여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무엇인지 올바로 깨닫고, 그 현실에 순종하여 이교도의 땅에 가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다.

 

여러분이 마주한 현실은 무엇인가? 부활의 현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여기에 와 있고, 몸의 부활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이 선포 앞에서, 이 현실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교육은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준비시켜, 현실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활동이다. 부모로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마주한 현실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 현실을 잘 뚫고 나갈 수 있도록 이런 저런 것을 대비시켜 주면서 살고 있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면 살 수 없는 현실이 왔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배우도록 독려하고, 대학교를 나오는 것이, 그것도 이왕이면 좋은 대학을 나오면 현실을 더 잘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도록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이제, 세상은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제 4차 산업 혁명 시기로 들어섰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도마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우리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에 대하여 도마처럼 의심(회의, 질문)’을 품고 있는가? 그 부활의 현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수용하기 위하여, 도마처럼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도마처럼, 우리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에 대하여 의심(회의, 질문)’을 통해 진실과 진리를 깨닫게 되면, 우리의 입술에서도 도마와 같은 고백이 동일하게 나올 거라는 것이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현실이 아니라, 바로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고 그것을 깨달아, 진실이요 진리인, 부활의 삶, 하나님의 나라, 몸의 부활을 나의 삶의 현실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 우리도 도마처럼 우리가 마주한 부활의 현실에 대하여 의문(회의, 질문)’을 가져보자. 거룩한 실증주의자가 되어 손가락을 주님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넣어보자. 그리고, ‘부활의 현실을 참으로 믿는 자가 되어보자.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올바로 살아가는 진리요 길이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도마처럼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기를 간구하는 기도

 

주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어떠한 현실이니이까.

우리가 마주한 근본적인 현실은

부활의 현실인 줄 믿나이다.

도마는 자신이 마주한 부활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의심하였나이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의심이 필요하나이다.

거룩한 실증주의자가 되어

우리의 삶 가운데 발생한

부활의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믿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도 도마처럼 부활의 현실을 마주하여

이렇게 고백하게 하옵소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24. 15:27

성령님, 예수님, 그리고 우리들

(마가복음 1:9-20)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시험에 대한 마가복음의 기록은 매우 간략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시험에 대한 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것들이다 (특별히 마태).

 

마가복음의 이야기 흐름을 보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신앙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매우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으로부터 복음서는 시작한다. 마가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해, ‘오실 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오실 이를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리고 나서, 예언된 그 오실 이가 실제로 등장한다.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다. 그가 바로 그 오실 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그가 세례 받을 때 하하늘부터 들려온 음성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1).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음성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지를 세상에 드러낸다. 그는 곧하나님의 아들이다.

 

런 후, 이야기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 받은 나사렛 예수는 세상으로 나가서 구원을 곧바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로 이끌려 시험을 받는다.

 

그가 받은 시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을 떠올리게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의 시험을 견디지 못하여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나머지 이스라엘은 모두 출애굽 2세대들이다. 1세대들은 여호와께 불순종함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다른 이들과 함께 계신 것이 아니라, 들짐승들과 함께 계셨고, 천사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사탄을 흔히 나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통 사탄을 표현할 때 뿔 달린 흉측한 모습으로 그린다. 사탄이 하는 기본적인 일은 시험하는 일이다. 욥기서에 나오는 사탄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은 기소하는 일을 한다. , 어떠한 존재의 의로움을 달아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실, 사탄의 기소에 안 넘어갈 사람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때문이다.

 

사실 사탄의 기소를 통해 공격당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기소에 맞서 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것보다는, 그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당하시며 그 시험을 이기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마가는 그것을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반대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시험 당할 때 실패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험 당할 때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애굽을 바라보았다. 애굽으로 돌아가면 시험에서 벗어날 줄로 잘못 생각했다.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시험 당할 때, 우리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일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험 당할 때,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대는 것이 필요하다.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통과하신 예수님은 이제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 복음을 전하며, 제자를 세우시고, 세상의 악(더러운 귀신)과 싸우신다. 이 일련의 이양기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은 우연히, 어쩌다 오신 것이 아니라, 예언에 의해서 오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예언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것을 예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한 자기 인식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제자도의 퀄러티를 가르는 요소이다. 예를 들어, 실수로 낳은 자식과 예언, 또는 예정된 자식을 대하는 자세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그 자식이 부모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해보자. “너는 실수로 낳은 자식이야! 너는 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 자식의 자존감을 무너질 수밖에 없고, ‘자기 인식에 대한 왜곡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이가 부모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생각해 보자. “너는 예언된 자식이야. 너는 예정된 자식이야. 너는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야.”

 

성경에 두 가지 경우에 해당하는 예가 존재한다. 하나는 가룟 유다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 요한이다. 유월절 만찬 때 예수님은 제자 중 하나가 자기를 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를 일컬어 이렇게 평가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6:24).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가룟 유다가 결국 목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27:3-10).

 

그러나, 세례 요한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은 그가 하나님의 예언과 예정가운데 태어난 것에 대하여 찬송을 지을 정로도 기뻐했다 ( 1:67-79). 그 찬송 다음에 나오는 세례 요한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1:80).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몸된 교회의 지체로 부르셨다는 자기 인식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퀄러티를 다르게 한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렀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언하시고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고,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믿으시는가?

 

예수님이 자기 스스로 세례를 받고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광야에 나가서 시험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0),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1).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의해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여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고, 세상의 악과 싸우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우리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은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된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성령에 의해서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도 성령의 충만함 없이는 어떠한 일도 감당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어떤가? 성령의 충만함 없이 어떠한 일을 하면, 사탄에게 기소 당하기 딱 쉽다. 거기에는 육신의 일이 가득하게 되어, 우리의 죄된 본성이 드러나게 될 뿐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가룟 유다를 보라. 성령의 충만함 없이 그가 저지를 일을 보라. 그리고, 저지른 후에 그가 행한 처신을 보라. 사악함과 죽음만이 넘쳐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이 가득한 상태에서 행하는 일에는 당연히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2-23).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일은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 충만함을 받았는가?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든 성령 충만함 가운데 행하고 있는가? 무슨 일을 행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들짐승과 함께 있는 적막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천사가 거들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성령 충만함 가운데 머물게 된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때 우리는 담대한 마음으로 나아가 성령의 열매 가득 맺히는 일들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는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8. 11:36

오늘날 우리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마가복음 16:1-8

(부활주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옛날 사람들은 적어도 일년에 두 번은 교회에 갔다. 그것이 언제인가? 부활절과 성탄절이다. 부활절에는 계란을 줘서 갔고, 성탄절에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줘서 갔다. 요즘 사람들은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교회를 가는 게 아니라, 결혼식과 장례식이 있을 때 교회에 간다. 웃픈 현실이다.

 

부활절이 중요할까, 성탄절이 중요할까? 부활절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아예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부활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우리 아파트에서 지난 주에 부활절 이벤트가 있었다. 그런데, 광고를 보니, 부활절 이벤트를 하면서 특별 손님이 방문한다고 되어 있었다. 누군가 봤더니, Easter Bunny였다. 상업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종교성을 퇴색시키고 그것을 상품화한다는 것이다. 성탄절이 상품화된 지는 이미 오래됐다. 성탄절에 우리에게 오는 것은 아기 예수가 아니라, 산타 클로스이다. 부활절에 우리에게 오는 것은 부활의 주님이 아니라, Easter Bunny. 이러한 상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 오는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가 될 수 밖에 없다.

 

성금요일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은 예수의 죽은 시체를 무덤에 장사 지내는 것이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예수가 무덤으로 옮겨지고, 예수가 장사된 것을 확인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안식 후 첫날, 향품을 들고 예수님의 장사된 무덤을 처음 찾은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이다.

 

성경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훌륭한 제자였던 것 같다. 그녀는 예수님이 처형될 때 그 자리에 있었고, 예수님의 장례식에도 함께 했고,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기도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곁에는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수많은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불후의 명작 <지저스 크라스이스 슈퍼스타>의 여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거기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이러한 유명한 노래를 부른다. “I don't know how to love him. What to do, how to move him.” 10여년 전 전세계를 강타했던 <다빈치 코드>라는 책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인으로 등장한다. 그 책에는 그녀가 예수님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고, 그 자손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게다가, 성경(정경)에 포함되지 않는 외경에 보면, ‘마리아 복음서라는 것이 있다. 거기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최고의 제자 자리를 놓아두고 사도 베드로와 대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과 관련된 이런 저런 이야기에 막달마 마리아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던, 훌륭한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무엇이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하게 만들었을까?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는 내 인생 가운데 예수님과 관련된 어떠한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가? 예수님 때문에, 내 삶의 어떠한 부분이 극적으로 바뀌었는가? 예수님 때문에 내 삶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 있는가? 예수님 때문에 포기하게 된 어떠한 것이 있는가? 그분 때문에 내 삶에 행복이 왔는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기대하지 않았던(못했던) 어떠한 신비로운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때는 고등학교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러 가던 날 아침, 몇몇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아버지의 기도를 받고, 우리 아버지가 태워주시는 차를 타고 시험 함께 갔다(상문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봤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친구는 나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당연히 떨어질 거야라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결과가 나왔을 때, 그 친구는 기쁜 얼굴로 나에게 와서 고등학교 시험에 붙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기를 자기가 시험에 붙은 이유는 딱 한 가지라고 했다. “나 답안지 밀려 썼다. 그래서 붙었다!” 그리고 나서, 그 친구가 해 준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너네 아버지가 기도해 주실 때, 정말 마음이 이상하더라. 그리고, 나한테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어. 그래서 내가 답안지를 밀려 쓴 것 같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 때문에 내 친구는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했고, 나와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다.

 

동일한 일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죽은 시체가 무덤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체에 바르는 향료를 가지고 무덤에 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덤을 막고 있었던 큰 돌은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 들어가자, 무덤 안에 앉아 있는 흰 옷을 입은 청년(천사)을 보았다. 그 청년이 무덤에 온 여자들에게 말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이 이야기를 들은 여자들은 놀라서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다. 그리고 그들은 무서워서 누구에게도 아무 말 못했다. 왜냐하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기대치 못한 일을 당하면 할 말을 잃는 법이다.

 

무덤은 비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부활이라고 부른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 세워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한 일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이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옳은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갈망했고, 예수님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자기의 몸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이 세상의 죄 때문에 불의하게, 그리고 불쌍하게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내어 놓았다.

 

오늘 우리도 성경을 통해 빈무덤을 본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라서 못 믿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된 것을 간접적으로 들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러분이 다리에서 주워 온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How do you know that you are not a child picked up under the bridge? 이것은 한국의 조크인데, 영어회중이 이해할지 모르겠다. 만약 무슨 말인지 잘 모르면 부모님께 물어보라. 나 다리에서 주워왔어?) 여러분은 여러분이 엄마 뱃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이 세상에 나올 때 엄마의 자궁을 통해서 나온 것을 보았는가?

 

성경 말씀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경험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서라고 하는 장르를 통해 그 당시 최고의 매체라고 불리는 종이에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비어 있는 무덤을 보았다.

 

그 당시, 빈무덤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 이런저런 변화를 겪었다.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노래한 것처럼, "I've been changed, yes really changed. In these past few days, when I've seen myself, I seem like someone else. 나는 변했어요, 맞아요 정말 변했어요, 최근 며칠간 나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나도 다른 사람처럼 보여요.”, 빈무덤을 경험했을 때, 다른 말로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우리는 그들의 변한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본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빈무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여러분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아무 것도 아닌가? 아니면 무엇인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떻게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켰는가? 시간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가지기를 소망한다.



English Version


What does the resurrection mean to us today?

 (Mark 16:1-8)


1. Even if they did not believe in Jesus, people went to church twice at least a year before. When is it? Easter and Christmas. They went to church on Easter Sunday for an egg, and Christmas for a Christmas present. Nowadays, people do not go to church on Easter or Christmas but go to church when they have weddings and funerals. It is a ridiculous reality.

 

2. Is Easter important, or is Christmas important? Easter is more important. Because, without the resurrection, we would not have known about Jesus. No, we would not have been interested in Jesus at all. Because of the resurrection, we are also interested in the birth of Jesus.

 

3. There was an Easter event in our apartment last week. By the way, when I saw the advertisement, it was said that a special guest was visiting at the Easter event. It was Easter Bunny. The biggest problem of commercialism is to fade religiousness and commercialize it. It has been a long time since Christmas has been commercialized. Coming to us at Christmas is not Baby Jesus, but Santa Claus. Coming to us in Easter is not the Lord of resurrection, but Easter Bunny. The question that comes to our Christians living in this era of commercialization is 'what does resurrection mean to us today?'

 

4. The last event on Good Friday was to burial the dead body of Jesus in the tomb. It was Mary Magdalene and Mary the mother of Joses who confirmed that Jesus was buried by a man named Joseph of Arimathea and that Jesus was buried. By the way, as we read today, the first day after the Sabbath, Mary Magdalene was the first to find the burial place of Jesus with the spices.

 

5. In the Bible, Mary Magdalene seems to have been one of the best disciple of Jesus' disciples. She was there when Jesus was executed, at the funeral of Jesus, and on the first day after the Sabbath, she visited Jesus' grave. In other words, there was always Mary Magdalene by Jesus. So, in Christian history, Mary Magdalene has become the heroine of many legends.

 

6. Typically, Mary Magdalene emerges as the heroine in the immortal classic musical, Jesus Christ Superstars. Mary Magdalene calls these famous songs with the love of Jesus. "I do not know how to love him. What do to, how to move him." In a book called <The Da Vinci Code>, which struck the world more than a decade ago, Mary Magdalene appears as the wife of Jesus. The book contains a statement that she had a daughter with Jesus and that her offspring are still alive.

 

7. Furthermore, among the apocrypha that are not adopted as the Bible, there is also ‘the Gospel of Mary’. There, Mary Magdalene comes to the story of competing with the apostle Peter for the position of Jesus' best disciple. It is evident that she was one of the best disciples who loved Jesus when we see the names of Mary Magdalene in the stories related to Jesus in these various forms. What made her so love Jesus Christ?

 

8. Thinking of Mary Magdalene, who appears in so many stories related to Jesus, we look back on ourselves. What kind of life story do I make about Jesus Christ? What part of my life has changed dramatically because of Jesus? Is there something that has been changed because of him? Have you given up on something because of Him? Has happiness come to my life because of Him? To me, what does the resurrected Jesus Christ mean?

 

9. Have you ever experienced mysterious things beyond expectations? When I went to high school, I had to take the exam to go to high school. It was not easy for us to go into a high school then. On the morning of my high school entrance exam, a few of my friends came to my house and got my father's prayer and went to a school (Sang-mun High School) where we took the admission test by my father's ride.  By the way, among them, there was a friend who thought, "Of course, I will fall out of high school entrance examination." When we took the test and the results came out, he was so happy that he came to me and told me that he passed the high school exam. He told me that there was only one reason why he went to the high school entrance exam. "All answers were pushed in writing, so I passed the exam. Then, what the friend told me is still unforgettable. "Your father prayed on the morning of the test, and I was really feeling different. Then, I believe what a mysterious thing seemed to happen. By the way, that was why all answers were pushed in writing." Because of the unexpected thing, my friend passed the exam and went to high school with me.

 

10. The same thing happened in the text we read today. They naturally thought that the dead body of Jesus would be in the grave. So they went to the grave with spices to the body. By the way, an amazing thing happened. The large stone that was blocking the grave had moved, and when they got inside, they saw a young man (angel) in a white dress sitting. He said to the women who came into the grave. "Do not be alarmed. You are looking for Jesus of Nazareth, who was crucified. He has risen! He is not here."

 

11. The women who heard these words were amazed and fled from the grave. And they were terrified and could not tell something to anyone. It was because something unexpected happened. It is a way of losing a word when one meets unexpected event.

 

12. The grave was empty. That means Jesus was raised. In Christianity, this is called the Resurrection. 'Resurrection' does not mean simply that the life is back from death, but 'raised up again by God'. This means that God has justified what Jesus did. This means that the way of the cross that he has walked is the righteous thing that God wanted.

 

13. Something changed happened to those who met Jesus Christ who walked in the right path God recognized. They longed for the justice of the kingdom of God like Jesus, and loved their neighbors just as Jesus did. They did not consider their own bodies theirs like Jesus, but gave up their bodies for many who died unjustly and poorly because of the sins of the world.

 

14. We also see an empty tomb today through the Bible. You do not believe it because you did not see it with your eyes? The person who says it is deceiving himself/herself. Most of what we currently know is not what we have seen. They are all indirectly heard of what was discovered by someone. How do you know that you are not a child picked up under the bridge? Did you see yourself in your mother's womb and when you came to the world through your mother's womb?

 

15. The Word of the Bible is a testimony to the experience of what has happened, not a fictitious story. The disciples who followed Jesus experienced the resurrection of Jesus. So they recorded what they saw and heard in a form of a literary genre called the Gospel on paper, the best medium of the time. They obviously saw the empty grave.

 

16. At that time, people who had seen the empty grave experienced some kind of change in their lives. As, in the Jesus Christ Superstars, Mary Magdalene said, "I've been changed, yes really changed. In these past few days, when I've seen myself, I seem like someone else. I have changed, it is true, it has changed. When I look back at myself for the past few days, I look like someone else.", when they experienced the empty grave, or, after meeting the resurrected Jesus, they had changed someone else. We see their change in the Bible, Acts.

 

17. I want to ask you. What does 'the Empty Tomb' mean to us today? Today, what does the resurrection mean to us? Is it nothing? Or what? How did the resurrection of Jesus change your life? I hope that you will have time to meditate deeply 'the resurrection of Jesus' on your own life.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8. 11:31

 

하나님 나라, 인자 그리고 몸의 부활

베드로전서 3:18-19

(고난주간 토요일)

 

 

 

고난주간의 끝은 성금요일이 아니라, 성토요일이다. 교회의 전통은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죽으신 뒤 토요일에는 ‘하데스(지옥)’에 내려 가셔서 그곳에 있는 의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믿는다. 그러한 믿음은 우리가 예배 시간에 공동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어로 번역된 사도신경에는 그 부분이 빠졌다. (왜 빠지게 되었는지는 오늘 말씀의 요점이 아니므로, 나중에 기회 있을 때 하기로 한다.)

 

 

 

사도신경에서 빠진 부분은 “그는 지옥에 내려가셨다(He descended into hell)”라는 고백이다. 우리는 흔히 죽으면 지옥에 내려간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서 지옥은 죄 지은 자들이 멸망 당하여 가는 곳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 머무는 곳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기 때문에 여느 사람들처럼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가셨다.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동화 같은 이야기이나, 억울하게 죽은 의인이나 죄를 짓고 영영 형벌에 처해질 것을 두려워하는 죄인(죽은 죄인)에게 이보다 기쁜 소식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구원해 주시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순교 직전에 개입하셔서 목숨을 살려 주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순교 이후에 그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더 바라시는가? 물론 죽기 전에 개입하셔서 목숨을 살려 주시는 것일 것이다.

 

 

 

성경에 보면 그런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이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시피, 다니엘과 세 친구는 사자밥이나 뜨거운 불 속에서 죽을 처지에 놓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의 죽음을 막아 주신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보는 이나 당사자나 은혜롭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이 죽음에 처하게 되는 경우는 어떠한가? 구약의 인물 중, 처음 의인은 아벨이다. 신약의 인물 중, 처음 의인은 세례 요한이다. 그후, 스데반을 비롯하여 허다한 의인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죽은 자, 의로운 자의 부활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당연히 발견할 수 있는 소망이다.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성경만큼 권위를 가진 외경 중에 ‘마카베오기’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 보면 어떤 어머니와 그녀의 일곱 아들들이 고문을 당해 죽는 순간조차도 하나님을 부인하고 토라를 불순종하는 것을 거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머니의 두 번째 아들과 세 번째 아들은 죽어가면서 그들의 고문당한 몸들이 하나님의 미래의 정의에 의해서 그들에게 되돌아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부분을 보면 이렇다.

 

 

 

(둘 째 아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못된 악마, 너는 우리를 죽여서 이 세상에 살지 못하게 하지만 이 우주의 옹(주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위해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셋째 아들이 또 고문을 당하셨다. 그는 혀를 내밀라는 말을 듣자 곧 혀를 내밀 뿐 아니라 용감하게 손까지 내밀면서 엄숙하게 말하였다. “하나님께 받은 이 손발을 하나님의 율법을 위해서 내던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 손발을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받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마카베오 하권, 7장 9-11절)

 

 

 

이렇게 고난 받는 의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이며 생명을 다시 살려 주실 거라는 강력한 희망을 가진다. 예수님의 토요일은 바로 그러한 자들의 희망을 이루신 날이다.

 

 

 

마가복음은 크게 세 가지를 주장한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2) 인자는 이미 왔다. 3) 몸의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다. 여기서 ‘인자’라는 말은 다니엘서에서 온 용어이다. 다니엘서 7장 13-14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가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예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 인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한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인자에게 주어지는데,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맞이하게 될 인자(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몸의 부활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의인이 갈망하는, 모든 인류가 갈망하는 새로운 세상이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은 지옥을 포함한 온 우주에게 복된 소식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신 날’인 토요일은 고요한 침묵의 날이면서 모든 만물의 무한한 희망의 날이다. 의로운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롭게 죽은 의인을 어둠 가운데 가만히 놓아두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찾아 오셔서 그 어둠에서, 그 죽음에서 의인을 구원해 주신다.

 

 

 

이러한 믿음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의로운 삶을 살겠는가? 우리가 믿음의 ‘허다한 무리’처럼 그리스도의 의에 힘입어 의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 이유, 그렇게 살아도 손해 볼 것 없고, 오히려 영광인 이유는 의로운 죽임을 당하신 주님, 인자,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 ‘허다한 의인’의 믿음이 바로 우리들의 믿음이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5. 05:08

백부장의 고백

마가복음 15:34-41

(고난주간 금요일)

 

우리는 예수님이 죽임 당하신 금요일을 ‘Good Friday’라고 부른다. 사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God’s Day라고 부른 것이 그렇게 바뀌었다는 설도 있고, 실제로 ‘Good Friday’라고 불러서 그것이 그렇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죽임 당하신 금요일을 ‘Bad Friday’라고 부르지 않고, ‘Good Friday’이라고 부르기를 원한다.

 

이것이 사실 상식적인 생각은 아니다. 남의 죽음을 놓아두고 좋다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무병장수하다가 별세한 노인의 죽음을 호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죽음을 놓아두고 잘 죽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예수님은 무병장수로 죽은 경우도 아니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대로 예수님은 한창 나이(33)이 죽었다. 그것도 그 당시 가장 끔찍한 처형 방법이라고 알려진 십자가 처형에 의해서 죽임 당했다. 이러한 비참한 죽음을 놓아두고, ‘좋은 날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간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왜 예수님이 죽임 당한 날을 ‘Good’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마가복음은 성금요일에 일어난 예수의 죽음 사건을 정확하게 세 시간 단위로 구분하여 이야기 한다. 오전 6시부터 오전 9시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오후 3시부터 오후 6시까지.

 

첫 번째 세 시간(오전 6시부터 9시까지)에 일어난 일은 빌라도에 의한 심문과 군중들의 바라바 석방 요구,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적인 명패를 붙인 후 로마병사들이 예수님을 능욕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오르는 길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강제로 십자가를 진 것이다.

 

두 번째 세 시간(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에 일어난 일은 예수님을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세운 일, 병사들이 예수님을 옷을 나누어 가진 일, 그리고 두 강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일,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양 옆의 강도들이 예수님을 조롱한 일이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일반 범죄인에게 적용된 처형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반역한 자에게 가해지던 처형이었다. 예수님의 양 옆에서 함께 처형된 강도는 남의 물건을 훔친 죄를 지은 자들이 아니다. ‘강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레이스떼스는 보통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던 게릴라 전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마지막 일주일> 255).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식적인 죄명은 명패에 써 붙인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이었다.

 

세 번째 세 시간(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에 일어난 일은 온 땅에 어둠이 덮인 일이다. 어둠은 비탄과 심판을 동시에 상징한다. 어둠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지만, 우주조차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마지막 일주일> 258). 그러므로, 우리에겐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충분히 묵상할 여유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주적 죽음이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큰 죽음은 없다. 오늘 하루쯤은 일상에 파묻혀 그리스도의 죽음조차 묵상할 시간 없다고 핑계를 대기보다는 일상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죽음을 묵상하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네 번째 세 시간(오후 3시부터 오후 6시까지)에 일어난 일은 예수님의 죽음과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의한 장례이다. 오후 3시에, 예수님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부르짖는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시편 22편의 말씀이다. 왜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시편 22편의 말씀을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을까? (시편 22편에 대한 해석은 <마지막 일주일>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시편 22편은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시편 22편을 보면, 엄청난 고통과 강한 적개심을 경험하는 어떤 사람을 묘사한다. 고난 당하는 그 사람은 그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유를 욥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어왔던 하나님에 의해 버림 받았다고 느낀다. 그는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신뢰해 왔지만 이제 극한 상황에서 멸시를 당하고 조롱을 당한다. 시편의 화자가 어떻게 부르짖는지 보자.

 

나는 쏟아진 물처럼 기운이 빠져 버렸고 뼈마디가 모두 어그러졌습니다. 나의 마음이 촛물처럼 녹아내려,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의 입은 옹기처럼 말라 버렸고, 나의 혀는 입천장에 붙어 있으니, 주님께서 나를 완전히 매장되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무리가 나를 에워싸고 내 손과 발을 묶었습니다.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 셀 수 있을 만큼 앙상하게 드러났으며, 원수들도 나를 보고 즐거워합니다. (시편 22:14-17)

 

그런 다음에는 시편의 분위기가 변한다. 전반부의 절망적인 고통과 괴로운 버림받음이 후반부에서는 구원과 보호에 대한 감사의 기도로 바뀐다. 이 두 부분들이 결합되어 고통과 구원의 시, 즉 처음에는 고난을 당해 부르짖다 후에는 하나님에 의해 정당함이 입증되는 고난 받는 의인에 대한 시가 탄생한다. ,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시편 22편의 말씀을 연결시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은 이 세상의 권력에 의해 정죄되었지만, 하나님에 의해 그 정당함이 입증된 의로운 사람의 고난과 죽음이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입증하는 두 가지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일어난다. 하나는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폭으로 찢어진 것과 다른 하나는 백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성전의 휘장은 성전의 가장 깊은 곳인 지성소와 다른 곳을 구분하는 휘장이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특별한 장소였다. 그곳은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일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의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뜻이다.

 

또한, 백부장은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백부장에게 주님과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섬기는 로마황제였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다. 이것은 굉장한 고백이다. 세상의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혁명과도 같은 고백이다.

 

성금요일,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나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 우리는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죽음이 나에게 어떤 죽음인지를 진지하게 묵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묵상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의 입을 빌려 묻는다. 백부장의 고백처럼, 우리도 참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가?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고 있는가?

 

렇다면, 1922년도에 Rhea F. Miller 부인에 의해 쓰여졌지만, 1946년 이후 줄곧 빌리 그레이엄 전도팀과 함께 전도여행을 다니면서미국의 사랑 받는 복음 가수(America’s beloved gospel singer)’로 유명한 George Beverly Shea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의 찬송이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기를 소망한다. 이 찬송이 오늘 하루 여러분의 입술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I’d rather have Jesus than silver or gold; I’d rather be His than have riches untold;

I’d rather have Jesus than houses or lands; I’d rather be led by His nail-pierced hand

금이나 은보다 난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엄청난 부를 가지는 것보다 오히려 주님의 것이 되고 싶다네. 큰 집들과 넓은 땅을 가지는 것보다 난 주님을 가지고 싶다네. 오히려 주님의 못자국 난 손으로 이끌림을 받으려네.

<Refrain>Than to be the king of a vast domain, or be held in sin’s dread sway;

I’d rather have Jesus than anything. This world affords today.   

<후렴> 넓은 영토를 지닌 왕이 되는 것보다, 끔직한 죄악의 힘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난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이 세상은 오늘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5. 05:06

이 잔을 마시라

마가복음 14:12-16

(고난주간 목요일)


예수님의 마지막 목요일은 극적인 사건으로 가득 찬 날이었다. 목요일에는 세 개의 사건이 크게 놓여 있다. 유월절 만찬, 겟세마네 기도, 그리고 당국에 의한 체포이다. 이 세 개의 사건에 놓인 아픔은 네 가지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고,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부인을 당하고, 나머지 제자들에 의해 버림을 당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당시 권력자들에 의해 사형 선고를 당한다. 한 인간으로서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겹쳐 있다.

 

우리는 흔히 고난주간 중에서 목요일과 금요일 앞에 자를 붙여, 성목요일(Maundy Thursday)과 성금요일(Good Friday)이라 부른다. 성목요일은 세족 목요일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마가복음에는 세족식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요한복음 전승에서 온 이야기이다.

 

목요일에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몇 가지 다른 관점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전한다. 첫째, 두 복음서는 날짜 계산이 다르다. 마가는 만찬을 벌인 날이 유월절이라고 말하는 반면, 요한에게 목요일(만찬 한 날)은 유월절 전날이다. 요한은 특별한 신학적 이유를 가지고 날짜를 다르게 계산하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가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으로 보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새로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둘째, 두 복음서는 모인 일(만찬)에 대하여 분량의 차이를 보인다. 마가복음은 14 17~25절까지, 9절에 걸쳐 전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13장에서 17절까지, 5장에 걸쳐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만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긴 설교(고별설교)가 실려 있다.

 

셋째, 두 복음서는 그 날 일어난 일에 대해서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마가는 만찬을 통해 요즘 우리가 성만찬으로 부르는 의식이 행해진 것을 말한다. 그 만찬의 핵심은 이 말로 집약된다. “이것은 내 몸이고, 이것은 내 피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이야기를 전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목요일을 세족 목요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목요일을 영어로 ‘Maundy’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그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Maundy’명령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은 새로운 계명을 가리킨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34).

 

유월절 만찬은 두 명의 제자에 의해 은밀하게 준비된다. 비밀리에 준비된 이유는 가룟 유다 때문이다. 그가 만찬 장소를 미리 알면 안 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유월절 식사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그 식사가 마칠 때까지 유대의 방해가 있으면 안 된다. 유월절 만찬은 세 가지의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1) 그들은 유월절 음식을 함께 먹었다. 2) 예수님은 임박한 배신에 대해 말한다. 3)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에 그의 임박한 죽음과 관계된 의미를 부여한다.

 

그 당시 공동식사는 하나의 문화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동식사는 그 당시 보편적인 공동식사와 다른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함께 식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외된 자들과 버림 받은 자들과 함께 식사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평등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함께 식사 함으로써 상대방을 나의 형제로, 자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다가 빵과 포도주는 실제 빵과 포도주로서 한끼의 식사를 의미한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이었다. 먹을 게 없어서 고통 받고, 빚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이 그 당시 서민들의 애환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의 요점도 이것이다. 떡과 물고기가 기적적으로 많아진 것이 요점이 아니라,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눔을 통해서 배고픈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우리도 그러한가? 우리도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고동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가?

 

유월절 만찬이 끝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자리를 옮긴다. 예수님은 어두 컴컴한 그곳에서 체포된다. 그만큼 가룟 유다와 유대와 로마의 당국자들이 하는 짓이 어두운 짓인 것을 알 수 있다. 죄악은 모두 어두운 데서 일어나는 법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를 통하여 그 잔을 마시기로 결단하셨을 그 때,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군사들은 들이닥치고, 제자들은 도망친다.

 

목요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제자)과 거짓 그리스도인(제자)에 대한 분별의 눈을 가지게 된다. 만찬은 일종의 예배의식이다. 거기에는 말씀(요한복음-고별설교)과 성례전(이는 내 살이요, 내 피다)이 있다. 그 자리에 제자들은 함께 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겟세마네까지 갔다. 그곳은 기도의 자리였다. 제자들은 예배의 자리에 이어, 기도의 자리까지 함께 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마시기로 한 잔을 함께 마시지 못하고, 도망친다. , 그들은 십자가까지는 함께 못 갔다. 이 지점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제자)과 거짓 그리스도인(제자)가 갈리는 지점이다.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보자. 우리도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에는 예수님과 함께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마신 그 잔을 함께 마시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했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에 앉혀 앉혀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함께 마실 수 있느냐?”

 

우리는 이것 때문에, 부활절까지 밀고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잔을 마실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온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을 꼭 거쳐야 한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예배와 기도의 자리까지 밖에 못 갔던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이 잔을 마시고, 십자가의 길을 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제자동의 완성은 예배와 기도의 자리를 넘어, 예수님과 함께 이 잔을 마시는 데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가 된다.

 

마가복음 자체는 AD 66-74년 경 유대땅에 있었던 대환란 기간 동안 가혹한 박해를 당했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여진 성경책이다. 박해를 당하면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처럼 이 잔을 마시고 끝까지 예수님을 붙든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잔을 마시지 못하고 베드로처럼, 그리고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배교) 친 사람들도 있었다.

 

복음서는 예수를 닮은 사람들에게는 찬사이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닮은 사람들에게는 회개와 용서의 희망을 안겨주는 위안이 되었다. 가장 큰 죄는 예수를 부인하거나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면 언제든지 용서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의 상실이다.

 

지금 당장은 예수님처럼이 잔을 마시는 것에 실패했을 지라도, 절망에 빠질 필요 없다. 우리는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의 능력을 입어 예수님처럼 이 잔을 마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할 때 우리에게 온전한 구원이 임함을 잊지 말고, ‘이 잔을 마시라는 주님의 요청에 아멘으로 믿음으로 화답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3. 05:56

최고의 제자? 최악의 제자?

마가복음 14:1-11

(고난주간 수요일)


마지막 일주일 중, 수요일, 예수님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에게 일주일의 시간 밖에 안 남는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나도 예수님처럼 좋은 사람들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 것이다.

 

베다니는 예수님께 매우 특별한 곳이었다. 그곳은 예수님의 주 사역지였던 갈릴리와 비슷한 곳이었다. 도시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소외된 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 바로 베다니였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살았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언니 마르다가 동분서주한 것을 보면, 그 남매는 부모님을 일찍 여읜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예수님은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일이 있어 갈 때마다 베다니에 들러 거기에 거주하는 좋은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셨다. 월요일과 화요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이런 저런 일을 겪으신 후, 수요일에는 베다니에 머물며 그곳에 있는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셨다. 같은 시간,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매우 대조되는 모습이다. 한 쪽은 생명이 넘치고, 한 쪽은 죽음이 넘친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오늘 이야기는 그때 일어난 사건을 전한다. 식사 중, 한 여자(마가는 그 여자의 신원을 자세히 밝히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이야기와 헷갈리면 안된다. 장소도 다르고, 시간도 다르고, 의미도 다르다.)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pure nard)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다.

 

이 향유의 값은 삼백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는 설명이 나온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렇게 비싼 향유를 깨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은 것을 본 어떤 사람들은 그녀를 힐난한다. 그들이 힐난하는 것도 나름 의로운 이유였다. 그것을 팔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가난을 구제하는 데 쓰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힐난과는 달리 그녀의 행동을 칭찬하신다.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유례 없는 특별한 칭찬을 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9).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중 하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이 시간 이 여인에 대해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를 기억하면서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된다. ‘왜 그녀는 그토록 유례 없는 특별한 칭찬을 받은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알려면, 가이사랴 빌립보를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 위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을 언급해야만 한다. 그 사건은 세 번에 걸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 예언이다.

 

예수님의 수난 예언은 세 번에 걸쳐, 8, 9, 10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세 번째 수난 예언이 가장 자세한데, 그것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수난 당하게 될 것인지 예견할 수 있다. 그 말씀은 이렇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을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10:33-34).

 

성경을 펴고 천천히 확인해 보라. 이 예언은 실제로 14장에서부터 16장에 걸쳐 하나씩 이루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수난 예언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다. 마가복음은 수난 예언이 세 번에 걸쳐 나올 때마다 그 예언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기록하고 있다.

 

세 번째 수난 예언을 예로 들어 그것을 설명하자면, 예수님의 수난 예언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세 번째 수난 예언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서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 10:35-37).

 

세 번에 걸쳐서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언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수난 예언을 하시며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들도 자신처럼 죽음과 부활의 길(폭력과 불의에 맞서 싸우며 하나님 나라(정의)를 살아내는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분명한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8:34-35).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는 데 실패한다. 그러니 자꾸 딴 소리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실패하는 제자들과는 다른 한 존재가 등장한다. 그가 바로 예수님께서 유례 없이 특별히 칭찬한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이다. 열 두 제자를 포함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세 번에 걸쳐서 수난 예언(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는 길에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들이 가는 길에만 관심을 가졌다.

 

오직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한 여인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다. 이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그녀를 유례 없이 칭찬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녀는 빈 무덤이 발견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첫 번째 기독교인이었다.

 

오늘 말씀에는 이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이야기가 동시에 등장한다. 그것은 예수를 팔아 넘길 음모를 꾸미는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의 이야기다. 그는 그냥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가 아니다. 마가복음은 그를 콕 짚어서 열둘 중 하나라고 말한다 (10).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도상에서 세 번에 걸쳐서 수난 예언(죽음과 부활)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믿음을 갖지 못했던 열두 제자들 중 하나였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보면, 가슴이 더 아프다. 마태복음은 가룟 유다가 제사장들을 찾아 갔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26:15).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가 무엇을 받았는지. 그는 예수를 넘겨준 대가로 은 30냥을 받는다.

 

마음이 무뎌져 있으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이는 자기 자신을 멸망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위험에 빠뜨린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중 수요일 밤, 가룟 유다가 딱 그랬다.

 

우리도 지금, 도상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하시면서, 그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우리는 어떤 제자인가? 우리는 도대체 어떤 제자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한 여인처럼 최고의 제자인가, 아니면, 열두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수난 예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크냐논쟁하며, 영광의 자리에 앉을 생각만 하는가? 더 나아가, 30냥에 예수를 팔아버린 가룟 유다처럼 “내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내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라고 말하며 세상과 타협하고 있는 최악의 제자는 아닌가?

 

마지막 수요일, 예수님은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셨다. 바라건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그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바로 그 좋은 사람들’, 그 좋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최고의 제자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최고의 제자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주님, 우리는 어떤 제자이니이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제자이니까?

우리는 주께서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을 정도의

좋은 사람들이니이까?

주님, 우리도 값비싼 향유를 주의 머리에 부은 한 여인처럼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함께 기억되는

최고의 제자가 되고 싶나이다.

무뎌진 이 마음을 깨워 주옵소서.

주의 말씀을 믿고

주께서 가신 죽음과 부활의 길,

그 십자가의 길에 동참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폭력과 불의에 맞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살아내는

최고의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1. 13:52

내 신앙의 화요일

마가복음 11:20-25

(고난주간 화요일)

 

예수님의 마지막 화요일은 굉장히 피곤한 날이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간의 기록 중 화요일에 대한 기록이 가장 길다. 화요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3장에 이르고, 절수로는 115절이나 된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부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논의들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화요일의 기록 중에서 3분의 2는 성전관리들,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과 예수님이 충돌한 이야기가 담겨 있고, 나머지 3분의 1은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에 대한 묵시와 임박한 인자의 도래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예수님과 대결한 세력들은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 그룹이었다.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각자 다른 질문을 통해 예수님과 대결을 벌이는데, 그들의 질문은 궁금해서 묻는 것, 가르침을 받으려는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 예수님을 군중의 지지로부터 떼어 놓은 후 죽이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성전관리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권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여기서 이런 일은 전날 있었던 성전정화 사건을 말한다. 예수님이 성전의 환전상과 제사제물 공급 상인들을 내쫓은 일은 그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이익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괘씸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그러한 일을 벌인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일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영업을 재개하려고 했다.

 

중세의 종교개혁 당시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의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신학화 작업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면벌부를 팔아 자금을 모았다. 이에 반발한 어거스틴 수도회의 사제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걸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행하고 있는 잘못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자, 교황청에서 마틴 루터에 대한 제재를 가했다. 그의 문제제기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응에 의해 그들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다른 기득권 세력이 예수님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 위하여 달려든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이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이것은 외통수 같은 질문이다. ‘세금을 바치라고 말하면 유대민중들의 공분을 살테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하면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다음의 말로 대응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구절은 기독교 역사에서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에는 종교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적 의무와 정치적 의무가 다르다는 것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이 말씀을 들이대곤 했다. 대표적으로 히틀러는 이 구절을 들이대며 독일국민에게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따를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치열한 논쟁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이 구절은 이 세상의 영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마커스 보그와 도미닉 크로산의 주장이 그렇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뜻은 무엇일까?

 

만약 예수님이 이 세상의 영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대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는 자들의 치부를 드러내어 그들을 물리침과 동시에 무엇이 진리인가를 밝히 드러내고자 다음과 같은 절차를 밟으신다.

 

우선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동전 하나를 보여 줄 것을 요청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가이사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동전을 꺼내어 보여준다. 그들의 주머니에서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위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두 가지의 동전이 시중에 유통되었다. 하나는 가이사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나 동물 등 어떤 상도 새겨지지 않은 동전이었다.

 

유대교에서는 어떠한 형상을 새겨 유통시키는 것을 신성모독죄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여호와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면, 당연히 이들은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은 동전을 가지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가지고 다녔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 황제를 두려워하고 섬겼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오히려 그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황제에게 속한 것이며,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냐?” 이 말의 뜻은 이 세상에는 황제에게 속한 것이 따로 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 따로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선언하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선언이다. 특별히 레위서는 이렇게 선포한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5:23).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것이고, 성실하게 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이 땅, 우리의 시간, 우리의 모든 존재는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아래 그 모든것을 자유롭게 누리되, 훼손하면 안 된다. 탐욕은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을 필요 이상으로 착취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공격에서도 실패를 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달려든다. 이들이 지닌 비장의 질문은 사후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유대인의 수혼제도를 통해 사후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에 대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져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시도한다.

 

사두개인은 그 당시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 이들은 부와 권력을 모두 쥔 기득권층이었다. 다른 유대인들이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을 성경으로 인정한 반면에, 이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예언서는 권력을 가진 부유층에 의해 주도된 사회제도의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성경이다. 한마디로, 예언서는 부와 권력을 쥔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담고 있는 성경이다. 그들은 당연히 예언서의 말씀이 듣기 싫었을 것이다.

 

이들은 또한 사후 세계를 안 믿었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동시에 부활도 믿지 않았다. 사후 세계에 대해 관심도 없으면서 사후 세계를 질문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이들은 그저 이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 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을 가하기 때문이었다.

 

부와 권력은 최고의 영적 장애물 중 하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늘 나라에 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신실한 영성가들은 부와 권력을 등지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후 세계에 대하여 질문하는 사두개인들에 대한 대응을 통해 이러한 교훈을 주신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가 중심이라는 것이. 사후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사후의 종교가 아니라, 현재의 종교이다. 우리는 과거의 아픔과 미래의 불안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고,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지, 죽은 자의 하나님, 먼 과거나 미래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과거의 아픔이나 미래의 불안 때문에 죽은 것처럼 사는 자는 산 자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

 

화요일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어느 율법학자와의 대화이다. 모든 기득권층이 예수님께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위에서 본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사악한 의도를 가진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듣고 싶어서 던진 진물이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하나님의 도)은 무엇입니까?’

 

어느 대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과목이 있었는데, 그 중에 노자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한 학기 노자에 대한 강의를 마치고, 그 수업을 담당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험 문제를 냈다. ‘노자의 사상을 논하시오!’ (나도 대학시절 이스라엘 역사를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기말시험 문제가 이것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하여 논하시오!’) 그런데, 노자에 대한 기말시험을 친 학생 중 당당하게 100점을 맞은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의 답안지에는 이러한 답이 써 있었다. “”. 노자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무(nothing)이다.

 

1세기 바리새파 율법사 중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이 있었다. 샴마이와 힐렐이다. 어떤 이가 이들에게 찾아와 위의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한 것과 똑 같은 것을 질문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샴마이는 율법을 어떻게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느냐고 타박을 주며 그 사람을 쫓아냈다고 하고, 힐렐은 율법을 다음과 같이 한 마디로 정리했다고 한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 그것이 율법의 전부이며, 나머지는 그에 대한 주석이다. 가서 그것을 배우라.”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을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해 말씀하셨다. 첫째는 신명기 6 4-5절 말씀인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레위기 19 18절의 말씀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모든 것(우리의 가슴, 영혼, 마음, )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가이사(황제, 이세상)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차별을 거부하고, 상대방을 나와 똑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고 대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힐렐의 해석과도 맥을 같이 한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차별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은 차별 받기 싫어하면서 자신이 가진 다른 사람과의 다른 어떠한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율법학자의 반응이 참으로 놀랍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12:33). (To love him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understanding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to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s more important than all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의이다. 이것이 바로 예배보다 정의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깊은 설명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화요일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하루였다. 하지만 매우 의미 있는 하루였다. 그렇다면, 내 신앙의 화요일은 어떤가? 나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그의 가르침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나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 속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사는가? 나는 모든 차별을 거부하고, 한 명의 겸손하고 다정한 인간으로 서 있는가? 이것은 내 신앙의 화요일에 진지하게 던져봐야 하는 질문들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4. 11. 13:50

예배보다 정의

마가복음 11:12-19

(고난주간 월요일)


어제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고난주간이 시작되었다.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을 묵상하는 절기이지 우리가 고난 당하는 절기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메조키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고난 당했으니까, 예수님처럼 우리도 고난 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한 번 보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5).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평화와 나음이지,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정(Passion),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수난(Passion)의 자리로 이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수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수용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힘에서 오지 않고, 정의에서 온다.”는 말씀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래서 어제 말씀에서 이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참된 평화가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 힘을 가지면 평화가 올 거라고 사람들은 흔히 잘못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부와 권력)을 위해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힘을 갖는다고 평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왜 우리는 그토록 힘을 갖기 원하는가? 그래서 은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하면 점점 죽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마약을 찾게 되는 원리와 같다.

 

성경은 힘에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서 평화가 온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성경은 오직 그것에 대한 증거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로마서의 언어로 옮기자면, 하나님의 정의는 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로마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는 가 어디에 나타났다고 말하는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정의()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평화는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서 온다. 그래서, 의인(평화를 누리는 자)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오늘 말씀은 복음서의 말씀 중에 가장 기괴한 말씀이다. 예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오늘 말씀을 본 이들은 분명 예수를 성질 더러운 이로, 도대체 따르기가 힘든 위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저주와 폭력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오늘 이야기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하고 있다. 베다니는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뜻을 지녔다(물론 슬픔의 집이라는 뜻도 있다.). 베다니 동네에 무화과나무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무화과나무와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다니를 떠날 때 배가 고프셨다고 한다. 저 멀리 서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니 잎이 무성하여 그 나무에는 무화과 열매가 많이 맺혀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나무 가까이 가셨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하신 예수님은 이해가 안 되는 저주를 무화과나무에 퍼붓는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어떠한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와 같은 말씀이 곧바로 등장한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에 무화과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 잘못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그토록 심한 저주를 퍼붓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한 실마리는 이어지는 성전정화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화과나무 사건에 이어 나오는 성전정화 사건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또 한 번 깡패처럼 행패를 부리시는 장면을 연출한다.

 

성전에는 돈 바꾸어 주는 자들과 비둘기 파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국의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영업을 한 것이다. ‘성전신학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영업이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기원전 900년 경에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성전신학을 발전시켰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이 세상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곳이라는 신학을 펼쳤다. 성전은 단지 하나님의 거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매개해 주는 곳이기도 했다. 성전은 희생제사가 드려지는 유일한 장소였고, 희생제사는 용서의 매개 수단이었다.

 

성전신학에 따르면, 어떤 죄는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를 통해서만 용서될 수 있었으며, 어떤 종류의 부정한 것들은 단지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를 통해서만 정화될 수 있었다. 용서와 정화의 매개체로서 성전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열어 주었다. 정화되고 용서받은 상태로 성전 안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마커스 보그, 도미니크 크로산, <마지막 일주일>, 25)

 

이러한 성전신학에 따르면, 당연히, 성전은 신앙의 중심지로 여겨졌고, 순례의 목적지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부정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먼 곳에서 순례를 온 이들에게 돈을 환전해 주고 제사용 제물을 공급해 주는 일은 오히려 그들의 편의를 생각한 좋은 일이다.

 

그렇게 칭찬 받아야 할 법한 환전상과 제사 용품 공급 상인들은 내쫓으시면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7). 예수님의 책망은 만민이 기도하는 거룩한 집인 성전을 사람들은 강도의 피난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레미야서 7장의 말씀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예레미야서 7 11절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강도의 소굴, 피난처)으로 보이느냐?” ‘강도의 소굴, 강도의 피난처가 무엇인가? 강도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몸을 숨기는 곳이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들은 책망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세상에서 온갖 강도같은 짓을 저지르며 살면서 성전에 오면 자신들이 행한 불의한 일들이 감추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은 정의와 예배를 동시에 강조하지 않고 예배보다 정의가 더 우선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거듭해서, “내가 너희의 예배를 거부하는 것은 너희에게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으며, “너희의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에 너희의 정의를 거절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결코 없다. 이를 증명하는 구절들이 여럿 있다. (마커스 보그, 도미닉 크로산, <마지막 일주일>, 90)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 21-24)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 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세아 6 6)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 6-8)

 

예수님은 성전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을 잘못 사용하는 자들이 더 이상 성전을 욕되게 만들지 못하도록 그들의 출입을 막기 위하여 성전을 폐쇄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통해서 마가복음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수는 기분 내키는 대로 신적인 능력을 남용하는 사람이거나 비이성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처럼 성전이 타락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예배가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과격한 용어를 써 가며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예배에 목숨 걸어라!”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이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의 왜곡이다. 예배와 정의는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정의가 없기 때문에 예배를 안 받아 주시지, 예배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의 행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열정을 보이면, 예수님처럼 수난(Passion) 당하기 마련인데,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에 열정(Passio)을 보이지 않으면, 그러한 것을 등한시 하면서 예배만 드리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베다니에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성전이 성전되게 하는 것은 정의이다. 예배가 예배 되게 하는 것은 정의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못살게 구는 메조키스트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새벽예배는 극기훈련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께서 목숨 걸고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우리 삶 가운데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 일을 하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은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이루어 내기에 불가능하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으시고, 예배를 예배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 삶 가운데 이루기 위하여, 그래서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