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2. 05:41

어제보다 감사

(창세기 4:1-8) 

(추수감사주일 설교)


본문의 양의 첫 새끼라는 어구를 보니 이 시가 생각났다.

 

양 세 마리

-      박상순

 

풀밭에는 분홍 나무

풀밭에는 양 세 마리

두 마리는 마주 보고

한 마리는 옆을 보고

 

오른쪽 가슴으로

굵은 선이 지나는

그림 찍힌

티셔츠

 

한 장 샀어요

한 마리는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보고

 

풀밭에는 양 세 마리

한 마리는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 보고

오른쪽 가슴으로

굵은 선이 지나는

그림 찍힌 티셔츠

 

한 장 샀어요

 

한 마리를 옆을 보고

두 마리는 마주 보고

 

나는 이 시를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어 봤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소외가 발생한다.

그런데, 혼자 있으면

외로움이 발생한다.

인생은 그 자체가 함정이다.

 

<추수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옛날 사람들은 곳간을 들여다보며 한 해를 돌아봤지만, 요즘 사람들은 은행 어카운트를 들여다보며 한 해를 돌아본다. 곳간에 쌓인 것은 실물이지만, 은행 어카운트에 싸인 것은 숫자이다. 그래서, 요즘엔 인생을 돌아보며 하는 감사도, 계산적이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우리는 넓은 들에 익은 곡식 ~ 황금물결 뒤치며를 부르지만, 사실 별다른 감흥은 없다. 우리는 지금 농경사회를 살지 않고, 산업사회를 살기 때문이다. 추수감사절을 요즘 식으로 드리자면, 농산품을 쌓아 놓는 게 아니라, 공산품을 쌓아 놓아야 한다. 돈다발, 또는 고급 승용차 등을 쌓아 놓고 예배 드리는 게, 산업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 어울리는 감사절의 풍경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공산품을 쌓아 놓고 예배 드리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을 뿐더러, 그런 일을 행한다면, 그것을 세속적인 일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실제로 우리가 삶 속에서 추구하는 것, 얻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은 농산품이 아니라 공산품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 비를 내려 주세요. 하나님, 곡식이 잘 익게 해 주세요. 하나님, 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구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추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장사가 잘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경제사정을 좋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사업이 잘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경쟁에서 이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은 경쟁하느라 힘들다. 그리고, 감사의 이유는 대개 경쟁에서 이겼을 때 발생한다. 분노의 이유도 마찬가지다. 경쟁에서 졌을 때 우리는 분노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아벨의 후예가 아니라, 가인의 후예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본문에서 보듯이, 가인과 아벨은 예배 경쟁을 하는 듯 보인다. 가인은 농사꾼으로서 자신의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며 제사 드렸고, 아벨은 양치기로서 자신의 양을 하나님께 바치며 제사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다. 이 사건은 가인에게 분노를 안겨준다. 그래서, 가인은 분노에 압도되어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물론, 가인과 아벨 이야기 뒤에는 수많은 함의가 포진되어 있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그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경쟁은 본질을 잃어버리게 하고, 상대를 소외시켜 (내 삶의 바깥 영역으로 밀어내기) 제거 대상이 되게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분노가 발생하고, 폭력이 발생하고, 죽음이 발생한다.

 

마태복음(20:20-28)과 마가복음(10:35-45)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 세베대의 아들(야고보, 요한)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이렇게 구한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일은 다른 제자들의 분노를 산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와 다른 제자들은 동일한 관점에서 예수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를 바라 보았다. 그들은 경쟁을 통해서 예수께서 세우실 하나님 나라에서 한 자리씩 차지해 보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경쟁은 이처럼, 가장 거룩한 곳에서도 서로에게 분노를 발생시키는 부정적인 기운을 만들어 낸다.

 

포항의 지진 피해로 수능시험 날짜가 미뤄졌다. 한국의 아이들(대부분 선진국의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경쟁부터 배운다. 그것이 우리의 사회 구조다. 우리도 그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생득적으로 성적-경쟁에 민감하다. 자녀들을 있는 그대로보는 눈이 부족하고, 자녀들이 얼마나 성적을 잘 받아 오느냐(경쟁에서 이겼느냐)로 판단한다. 부모의 지갑을 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연 성적을 잘 받아 오는 것(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성적표 가지고 오는 날을 가장 좋아하거나, 또는 가장 두려워한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다. 특별히 큰 아들이 민감하다.)

 

학교에서의 성적 구분은 간편하게 A, B, C, D (수우미양가, 양가집 자녀 많다.)등으로 하지만, 원래 전통적인 성적 구분은 Summa cum laude, Magna cum laude, Cum laude, Bene 등의 라틴어로 한다. 그래서, 학교를 졸업 할 때, Summa cum laude로 졸업하면 최고의 영예가 되고, 나중에 이력서를 쓸 때도 반드시 그것을 표기한다.

 

그런데, 라틴어의 성적 구분을 보면, 마지막이 Bene이다. Bene‘Good’이다. , 라틴어의 성적 구분에는 부정적인 표현이 없다. 모두 긍정의 표현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성적 평가 방법인 것이다.

 

경쟁 사회에 살다보니, 우리는 남보다 잘 해야 된다는 생각에 익숙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목을 멘다. 그래서 우리는 남보다 잘 하지 못할 때 열등감을 느끼고, 분노를 느끼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이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남보다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갈까?

 

독일의 드레스덴 미술관에 가면, 라파엘로가 1513-1514년에 그린 <시스티나의 성모>라는 그림이 있다. 그림을 보면, 성모가 성자를 안고 있고, 교황 식스투스가 교황관을 벗고 성모자(聖母子)를 알현한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근엄하다. 그런데,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보면,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 두 아기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성경에서는 이 천사를 케루빔(Cherubim)’이라고 부른다. 두 아기 천사의 엉뚱한 표정 덕분에 다소 무거울 수 있는 그림의 이미지가 평온해진다. 그래서, 이 두 아기천사는 그 그림의 성모자나 교황 식스투스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끈다. (한동일, <라틴어수업>, 76-77)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이지만,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인생의 여정에 평안을 주는 생각의 전환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남보다 잘하는 것보다, ‘어제보다 잘 하는 것에서 만족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삶의 만족과 평안은, 남보다 잘 하는 것에서 오지 않고, 어제보다 잘 하는 것에서 온다는 것이다.

 

감사절을 맞아, 우리는 왜 감사하는가?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남보다 좋은 처지를 감사한다. 다른 사람은 죽었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 있어서, 다른 사람은 굶고 있는데 나는 배부르게 먹어서, 다른 친구는 수능시험을 잘 못 봐서 대학에 못 갔는데 나는 대학에 합격해서, 다른 친구들은 좋은 부모님 못 만나서 고생하는데 나는 좋은 부모님 만나 호강해서등등, 우리는 수도 없이 남과 비교하여, 비교우위에 선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심지어, 우리는 이것을 위해서도 감사한다. 다른 이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 멸망 당하는 데, 우리는 예수를 믿어 구원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 구원도 비교(경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이 요즘 우리가 드리는 감사절의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이러한 감사들은 어느 순간, 분노로 바뀌기 십상이다. 누군가에 비해서 비교(경쟁)우위를 빼앗기면, 우리는 반드시 분노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에게 비교(경쟁)우위에서 뒤쳐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비교(경쟁)우위에 기반한 감사는 또다른 감사를 낳지 못하고, 결국 분노만 낳게 될 뿐이다.

 

리스도인은 가인의 후예가 아니다. 성경의 족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가인의 자손에서 오지 않고, (아벨을 대신 한) (Seth)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경쟁에서 오는 분노를 피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감사를 배워야 한다. 그것은, 남보다 잘 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잘 해서 감사한 것을 배우는 것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노래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를 공부하면 그의 동갑내기 4촌 형 송몽규가 등장한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 영화 <동주>를 참고하라.) 송몽규는 언제나 윤동주보다 앞서갔다. 윤동주는 앞서가는 송몽규에게 일종의 열등감을 느끼지만, 윤동주의 시에서 자주 보듯이, 그는 날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다. 송몽규에 비해 뒤쳐진 윤동주였지만, 지금 우리는 송몽규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윤동주를 기억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의 길을 걸어간 자는 반드시 기억된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가. 우리의 감사는 어떠한 감사인가. 경쟁에서 이긴 감사가 아니라, 어제보다 잘 한 것, 어제보다 나아진 것에 대한 감사의 삶이길 소망한다. 우리의 생명은 남보다 가치 있어 ‘Summa cum laude’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이미 ‘Summa cum laude’이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고, 어제 걸어온 길을, 오늘도, 내일도 힘차게 걸어가길 바란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 주실 것이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13. 23:02

더불어 함께

(느헤미야 1:1-5)

 

한국에백인제라는 분이 있었다. 의사였는데, 일제시대를 겪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 외과 주임교수 및 서울의사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김구 선생과 함께 여러 정치적 활동도 활발히 하신 분이다. 이 분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에 납북되었다. 그리고, 그의 조카 백낙환 선생은 백부인 백인제 선생의 뜻을 기려, 백병원와 인제대학교를 세운다.

(중학교 때, 친한 친구가 백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그곳에 자주 가곤 했다. 그리고, 백인제의 또다른 조카 백낙청은 하버드대학교 영문학 박사 출신으로,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지냈고, 문학잡지 <창작과 비평>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문학잡지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셨다. 한국에서 문학 공부한 사람 치고, 백낙청 교수를 모르면 간첩이다.)

 

의사 백인제 선생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의사 장기려 박사이다. 이분은 한국의 슈바이처 박사라고 불린다. 현재 부산에 가면, 장기려 박사 기념관 더 나눔이 있다. 이분은 한국전쟁 중 월남하여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개설하였는데, 이는 그의 서원에 대한 실행이었다. 기독교인(평양출신, 장로교)이었던 그는 경성제국대학교 의과대학 시험을 앞두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 학교에 입학시켜 주시면 한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이 몸을 바치겠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말 한대로 행하면서 살아가지 못할 때가 많다. 말과 행동의 일치는 인간의 평생 과제이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1). 이것은 느헤미야의 행동들이라고 번역 가능하다. 느헤미야는 언변에 뛰어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말 한 대로 실행에 옮기는 행동의 사람이었다.

 

기독교는 로고스(말씀)의 종교인 만큼,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은 행동이 있는 삶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신 수련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한 삶이다”(레노바레 성경, 주석). ,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을 듣고 행동을 통해 어떠한 형체로 보이게 끔 열매 맺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그래서 믿음만큼 창조적인 일도 없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생각하고, 결국 보이게 끔 만드는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의 고위관리였던 느헤미야는 어느 날 왕궁(수산궁)에 있었는데, 때마침 유다에서 온 하나니와 그의 동료들과 만남을 갖는다. 그는 그들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의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들로부터 슬픈 소식을 듣는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탔습니다”(표준새번역 개정판).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주저 앉아서 운다. 느헤미야 자신은 잘 먹고 잘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그냥 안타까운 마음만 표현하고 말아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 말을 듣고 난 뒤, 오늘 말씀이 전하고 있는 것처럼,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1 5절에서 시작하여, 11절에 끝나는데, 그의 기도는 단순히 그 소식에 대한 애통의 기도가 아니고, 회개의 기도이며, 무엇인가를 행하려고 하는 믿음의 기도이다. 그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는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간청하여, 그의 기도와 소망대로, 예루살렘에 가서 성벽을 재건하는 일의 기록이다. 그래서 우리는 느헤미야를 말의 사람이 아닌, 행동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즘, 편지를 써 본 적이 있는가. 지금은 테크놀러지가 발달하여 서로의 안부를 이메일, 메신저, 전화, 또는 화상통화 등을 통해 전하지만, 옛날에 서로의 안부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는 편지였다. 편지, 하면 떠오르는 옛노래가 있다. 어니언스(양파)가 부른 <편지>이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속 울려주는 눈물젖은 편지

 

하이얀 종이위에 곱게 써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 버렸네

 

멍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흐르면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노래를 보낸다

 

편지는 고대부터 내려오던 오랜 통신수단이다. 로마시대 때, 로마인들은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첫 문장으로 이러한 문구를 썼다고 한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시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 이것은 이런 뜻이다.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었네요. 나는 잘 지냅니다.” 로마인들은 타인의 안부를 먼저 물으면서, 이러한 문구를 썼는데, 이것은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라틴어 수업, 144)

 

우리는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잘 살아야지, 남이 어떻게 살든 그것은 나의 비즈니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위안하면서 산다. 그러한 생각이 우리의 삶에 들어온 것은 얼마 되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안부를 걱정했고,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생각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어느 순간부터, ‘더불어 함께라는 생각은 흐려지고, ‘각자도생이라는 표어가 삶에 자리 잡은 듯하다. 그래서 요즘 한국에서 가장 잘 되는 사업이 각자도생사업이다. ‘혼술, 혼밥을 위한 사업이 잘 된다.

 

나는 이곳 실리콘밸리로 이사 와서, 자책감을 느끼는 것이 있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 보도블럭 위에 사시사철 한 곳에만 앉아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한 노숙자(홈리스)를 볼때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사진) 그 노숙자는 비가오나 바람이 부나 날씨가 좋으나, 꼼짝 않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곳에 이정표처럼 앉아 있다. 아니, 그곳이 자신의 집이고 땅 인양 앉아 있다.

 

그 노숙자를 보면서 나는 무력감을 느낀다. 매일같이 그 노숙자를 지나치지만, 나는 그에게 말 한 마디 걸어본 적도 없고, 무엇인가 그에게 선행을 베풀어 본 적도 없다. 게다가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실리콘밸리 지역에서 아무리 세계 최고의 기술이 발명된들, 거리에서 붙박이처럼 살아가는 그 노숙자의 인생과 아픔을 조금이라도 보듬어 줄 수 없다는 것에 허무함을 느낀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을 나의 바깥의 풍경으로 만드는 것 같다. 그곳을 지날 때, 자동차를 타고 자동차와 신호등의 흐름에 따라 ~’ 지나가고 마니, 그 노숙자에게 말을 걸 시간과 기회가 전혀 없다. 그 노숙자는 그야말로, 내가 머물고 있는 자동차 바깥의 풍경에 불과하다. 내 바깥의 풍경을 향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누구를 위해서 사는가? 누군가에게 잘 지내십니까?’라고 진심어린 안부를 묻는 것도 어려운 시대에, 우리에게 느헤미야의 말씀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수산궁에서 편하게 사는 것을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동족(형제, 자매)이 예루살렘에서 고생하며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평안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에 몸소 가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감당한다.

 

의사 장기려 박사도 의사로서 돈을 벌어 자기의 안위만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환자의 평안이 곧 자신의 평안이라는 생각으로, 하나님께 서원했듯이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헌신한다.

 

우리가 모두, 느헤미야나 장기려 박사처럼 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시 한 번 이마음만은 추스르면 좋겠다.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 내가 평안하면 그만이 아니라,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한 것이라는 이 마음, 이것은 우리가 놓치고 사는 더불어 함께라는 삶을 일으켜 세우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마음이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안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안부를 묻는 이유는 그 사람의 삶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평안하지 않으면, 내가 안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연결된 공동체이다. 이것을 유기적 공동체라고 한다. 이것은 요즘 한창 이슈인 생태신학의 기본적인 사상이다. 인간들 뿐만 아니라,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생명체계가 망가지면 모든 유기적 공동체가 위험에 처해진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라. 책임감을 갖고 물으라.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물으라. 나에게 있어 올해가 가기 전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망 하나는 걸어서 내가 사는 동네를 돌아다녀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의 풍경을 나의 바깥의 풍경이 아니라, 내 안의 풍경으로 삼고, 그 풍경과 더불어 함께 어떻게 살아갈 지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숙자에게 다가가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고, 그에게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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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10. 16:17

인의 형통과 신앙

(시편 37:1-8)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사촌하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 하물며, 원수가 땅을 사면, 얼마나 배가 아프겠는가. 시편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룬다. 시편은 현실적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유진 피터슨)는 다윗의 영성을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본문에 나타나는 주제는 우리가 현실에서 매일같이 목도하는 문제이다. ‘악인의 형통이 그것이다. ‘이 존재하는 것도 이해 안 되는데, ‘악인이 형통하는 것은 더 이해 안 되는 현실이다. 악이 존재하는 것과, 악인이 형통하는 현실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원망하며, 어떤 이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며 그들처럼 악한 일을 저지르는 데 동참하려 한다. 본문에 의하면, 이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이고 행동이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의 문제를 놓아두고, 다음 단어를 처음으로 써서 우리의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게 한다. “악일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1). 여기서 쓰인 두 개의 동사는 불평하다시기하다이다. , 악인의 형통을 목도했을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불평하거나 시기하게 된다.

 

불평하다는 히브리어의 하라라는 말인데, 영어성경은 이것을 ‘fret’으로 번역하고 있다. ‘fret’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be constantly or visibly worried or anxious.” ‘불평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게,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가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끊임없이, 눈에 보이게, 걱정하고 근심한다고 해서 악인의 형통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불평은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만 할 뿐이다.

 

그리고, ‘시기하다는 히브리어의 카나인데, 영어성경은 이것을 ‘be envious’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부러움의 마음을 나타낸다. 사람이 어떠한 물건을 보고 그 물건을 사게 되는 심리는 부러움이다. 이처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면, 나도 모르게, 악한 일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불평하는 일이나 부러워하는 일은 결코 나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 그것이 악인의 형통을 바꾸지도 못한다. 결국, 악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못 끼칠 뿐더러, 나만 죄를 짓게 되어, 나도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시인이 악인의 형통을 불평하거나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악인의 형통은 잠시 푸르다 마는 풀과 채소 같아서, 곧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진리 때문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악인의 형통은 정당화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불평하는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부러워하는 마음)을 몰아내고, 그 대신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할까? 시인은 크게 네 가지를 제시한다. 1)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 2) 여호와를 기뻐하라, 3)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4)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3절에는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는 권고와 더불어, 참으로 시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가 그것이다. 이 말은 간추려서 표현하면, ‘성실을 먹으라는 말이다. 양이 풀을 뜯어 먹는 것처럼, 성실을 먹으라는 뜻이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요소는 세 가지이다. 식사, 운동, .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이다. 건강을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다. 건강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잠을 잘 자도, 결국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병은 먹는 것 때문에 생긴다. 먹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살려고 먹는데, 그게 오히려 나를 죽일 수 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 가장 먼저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은 식이요법이다. , 먹거리를 바꾸는 일이다. (이게 제일 어렵다!)

 

성실을 먹으라는 말에서 성실은 우리의 성실이 아니라, 푸른 초장에 펼쳐진 하나님의 성실이다. ‘하나님의 성실을 먹는 행위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믿음이라고 말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초장에서 무엇을 먹는가? 믿음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이다. 기쁨은 에너지와 같다. 에너지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듯이, 기쁨이 없으면 선을 행할 수 없다. 기쁨 없이 하는 모든 일은 고통이고 폭력이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찬양, 설교, 교제, 모두 기쁨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기쁨이 있다면,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선한 일, 만족을 주는 일, 행복을 주는 일,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 된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기쁨을 자신의 바깥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그렇게라도 기쁨을 찾으면 다행이지만, 불행하게도 바깥에서 찾은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것은 성냥불과 같아서, 바람에 의해 꺼지거나, 바람처럼 사라진다.

 

기쁨은 자신의 바깥에서 찾으면 안 되고, 자신의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는 말의 뜻이다. ‘(데레크)’은 삶의 여정, 태도, 소망을 의미한다. 이것은 외적인 요소가 아니다. 이것은 내 안에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나의 외부에 있는 어떠한 것에 맡길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만 존재한다. 이것을 여호와께 맡기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굴리다라는 뜻이다.

 

축구를 연상하면 이해가 쉽게 된다. 축구를 하면서 우리는 공을 상대방에게 패스한다. ‘맡기라는 말은 패스와 같은 이미지이다. 공을 패스하듯이, 우리 삶의 여정, 태도, 소망을 하나님께 패스, 굴리라, 맡기라는 뜻이다. 이러한 행위에서 발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쁨이다. 이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패스를 제대로 하면, 골을 넣는다. 그런 기쁨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시인이 악인의 형통을 놓아두고, 권면하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것을 두 자로 줄이면, ‘인내이다. 인내란 억지로 참는다는 뜻보다는 평정심을 가지고 가만히 있으라, 그러면서 희망하라는 뜻이다. 인내는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 해를 당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만, 인내는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준다.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쉽게 그것에 대하여 불평하고 부러워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영혼에 베어 있는 습관 같은 것이다. 자신이 어떠한 습관을 지니고 있는지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깨닫기 힘들다. 누군가 말해줘야 한다. 시인은 지금 우리의 기울어진 습관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 우리의 습관을 한 번 돌아보자. 악인의 형통을 보고, 우리는 얼마나 불평하고 부러워했는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을 악인의 길에 살짝 밀어 넣었는가.

 

이제 우리는 악인의 형통을 보고, 그렇게 반응할 필요 없다. 말씀을 통해서, 악인의 형통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얼마나 이슬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지, 얼마나 확실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살아가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장에서 성실을 뜯어 먹고, 나의 삶을 주님께 패스하고, 거기에서 발생되는 기쁨 가운데 선을 부지런히 행하고, 주님의 다스리심을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악인의 형통을 대하는 신앙인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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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6. 14:43

두려움을 떨쳐내고 죽는 밀알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

(요한복음 12:20-36)

 

주님은 계속하여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두려움 가운데 사는지요?

주님, 우리의 생명(인생)을 조여오는 두려움을 떨쳐내고자
주님께 찬송과 경배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두려움 때문에 죽는 밀알이 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는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두려움의 딱딱한 껍질을 깨고 나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두려움 없이 당당히 걸어가는

죽는 밀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제자도의 삶을 몸소 보여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영광스럽게 하실 줄 믿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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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언어

(예레미야 애가 5:1-22)


예레미야 애가는 에카로 시작한다. ‘에카슬프다는 뜻이다. 우리의 몸(피부)에는 보통 통증을 전달하는 세포와 신경전달물질이 있다. 이 체계가 망가지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통증은 사람에게 아픔또는 고통을 전달한다. 아픔, 또는 고통을 받으면 사람은 거기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신발이 변변치 않았다. 밑창이 얇은 운동화이거나 학교에서 신는 실내화 같은 게 많았다. 그리고 문제는 비포장 도로가 많다 보니 길 위에 놓여 있는 못 같은 거를 밟으면 그것이 운동화를 뚫고 들어와 발바닥에 박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때는 파상풍 주사같은 것도 발달되어 있던 시대도 아니라서 발바닥에 못이 박히면 상처를 불로 지지며 망치로 때리거나, 거기에 된장을 바르곤 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고통에 반응하는 것이다. 만약, 못이 발바닥에 박혔는 데도 그것에 대한 고통을 못 느낀다면, 그 사람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삼국지에서 명의 화타가 관우의 팔을 수술할 때 눈 하나 깜짝 안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관우의 용맹함에 대한 표현이지 관우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고통을 못 느끼니까 못이 박힌 발을 그냥 내버려둘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파상풍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물론, 고통의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파상풍 때문에 자신이 죽어가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대부분 육신에서 오는 고통에 대하여 대처하는 법을 배워서 알고 있다. 육신의 고통이 오면 어떻게 하는가? 병원에 간다. 병원에 가면, 의사를 만나게 되고, 의사를 만나면 자신이 겪고 있는 육체의 통증에 대해서 진술한다. 그러면 의사는 그것을 토대로 이런저런 검사를 한다. 그리고 문제를 발견해서 그것을 치료한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렇게 당연한 일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선, 자신의 통증을 인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인지를 하더라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전 뉴스에 보니, 중국의 한 시골에 살던 한 할머니의 뱃속에서 죽은 태아가 나온 사건이 있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 할머니는 자신의 뱃속에서 죽은 태아를 꺼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배가 나온 채로 그렇게 살았다. (고통에 대한 대처법도 학습되는 것이다. 우리 큰 아들도 어릴 때 눈이 나빠서 잘 안 보였는데, 눈이 잘 안 보이는 고통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아이는 그것이 자기가 대면하는 세상이고,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인줄로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이가 눈이 나쁘다는 것을 발견하고 안경을 씌워줬는데, 참 안쓰러웠다.)

 

그리고, 통증을 인지했더라도, 그 통증을 치료할 곳이 없다면, 그것은 또다른 비극을 낫는다. 통증을 치료해줄 의사나 병원시설이 없는 것도 문제이고, 의사나 병원시설이 있더라도 거기에 접근할 수 없는 시스템도 문제다. 일례로, 미국의 의료시스템에 비판이 가해지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의사와 병원시설이 있으면 뭐하는가? 돈이 없으면, 의료보험이 없으면 그림의 떡인데. (실제로 이민자들이 겪는 고통 중의 하나이다. 웬만큼 좋은 보험이 아니면, Deductible이 너무 많아서, 섣부르게 병원에 갈 수 없다. 특별히 응급실 가는 행위는 재앙이다. 나도 갑자기 요로결석이 와서 응급실에 갔었는데, 모르핀 주사 한 방 맞고, 의사 한 번 보고, 2시간 정도 있다 통증이 가라앉아서 나왔는데, 병원에서 날아온 청구서에는 8천불이 찍혀 있었다. 그거 해결하느라 엄청 애 먹었다. 그래서, 이민자들에게 다른 게 죄가 아니라 아픈 게 죄다. 이민자 뿐만 아니라, 치과보험에 들지 못한 미국 사람들이 치아 치료를 제 때 하지 못해서 죽는 사망자 수가 어마어마하다.)

 

육신의 병 때문에 오는 통증에 빠르게 대처해서 그 통증을 치료하여 몸을 보호하는 일도 이렇게 힘든데, 우리의 영혼(soul)에 오는 통증에 대해서 대처하고 치료하는 일은 얼마나 힘들까. 우리는 비교적 육신에 통증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데 반해, 영혼에 고통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멀쩡하게 생긴 놈이 왜 저래?” (physically)은 건강해 보이는데,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 어디 아픈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실제로, 사고는 몸 아픈 사람이 치는 게 아니라 영혼 아픈 사람이 친다. 흉악범들의 신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멀쩡하게 생겼다. 그런데, 왜 그렇게 흉악범이 되었는가. 자신의 아픈 영혼을 어쩔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영혼에 고통이 다가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가? 이 찬양이 저절로 나오는가?

 

감사해 시험이 닥쳐 올 때에 주께서 인도 하시니 두려움 없네

또 감사해 고통이 찾아 올 때에 주께서 지켜 주시니 승리하리라

나의 모든 생활 속에서 주님이 함께 하시니

주님의 성령 나를 인도하시리

시험이 나를 찾아올 때 주님이 지켜 주시리

주님의 성령 나를 인도하시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잘못 배운다. 이것이 내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의 언어를 배우기도 전에, 감사의 언어부터 배운다. 그야말로, 치료는 안 하고, 아편을 맞는 꼴이다. 시험이 닥쳐오고, 고통이 찾아 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감사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쳐온 시험과 고통을 놓아두고 감사하기 이전에, 탄식해야 한다.

 

나는 성경이 가지고 있는 가치들 중 가장 중요한 가치는 우리에게 고통의 언어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 이외에 고통의 언어를 가르쳐 주는 곳을 알지 못한다. 이 세상에 고통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언어들은 성공의 언어이지 고통의 언어가 아니다. 가는 곳곳마다 모두 성공의 언어만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각 시대마다 하이틴 스타가 있지만, 우리 시대 하이틴 스타는 단연 이미연이다.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이미연은 그 당시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불후의 명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찍는다. 그 영화에서 이미연은 전교 1등 여학생으로 등장한다. 거기에 그 여학생을 짝사랑하여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남학생 역할을 한 배우가 최근 의리로 유명해진 김보성(허석)이다. 그 영화에서 이미연은 전교 1등으로서 성공의 언어는 배웠지만, 자기 자신의 영혼에 불어 닥친 아픔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결국 자살을 택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그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주제는 영혼의 아픔이 아니다. 입시 때문에 고달픈 청소년들의 아픔을 고발하는 영화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성공의 언어만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고통의 언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자기의 고통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여 치료 받지도 못한다.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냥 고통 가운데 죽는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남의 고통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을 알아봐주고 적절하게 대응해 주지도 못한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내 인생의 비극만 아니라 관계의 비극도 경험하게 된다.

 

(인지부조화이론)

 

우리 몸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무엇인가? (생물 문제: 우리 몸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1) 한포 2) 두포 3) 세포 4) 네포 5) 대포 (문제를 바꾸어서, 김정은의 몸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무엇인가? : 대포) 세포이다. 의학적 발견에 의하면, 우리가 암에 걸리는 이유는 저산소와 저체온 때문이란다.

 

세포 내에는 Glycolytic system(해당계)와 미토콘트리아계, 두 개의 에너지를 만드는 시스템이 있다. 해당계는 당을 이용해서 에너지를 만드는데, 그 과정에서 산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토콘트리아계에서는 에너지를 만들 때 산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해당계는 세포분열을 촉친하고, 미토콘트리아계는 세포분열을 억제한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하고 바쁘게 움직일 때, 그리고 욱하고 화가 날 때, 저산소와 저체온의 상태가 되는데, 이는 해당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때 젖산(유산)이라는 것이 분비된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하고 바쁘게 움직이고 화가나면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해당계가 발달하고, 미토콘트리아계가 비활성화되어 우리의 몸은 저산소와 저체온 때문에 고생하게 된다. 바로 그때 암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암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저산소와 저체온이라고 하는 것이다. 암을 예방하고, 암을 치료하려면 유산소운동과 몸을 따뜻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의학계에서는 유산소 운동을 많이 하고,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암에 걸리는 이유도 똑같다. 저산소, 저체온 때문이다. 영혼이 아프면, 숨쉬기 곤란해지고, 알 수 없는 추위를 느낀다. 영혼의 저산소와 저체온증을 극복하는 방법은 고통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당뇨병 환자의 가장 큰 위험은 통증(고통)을 못 느껴, 돌연사하는 것이다. 한센병 환자의 가장 큰 위험은 통증을 못 느껴 반응하지 못해 죽는 것이다. 고통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어느 순간 영혼이 돌연사한다. 마음이 강퍅해지고, 마음이 강퍅해져 있기에 외부 세계의 어떠한 고통도 동감(sympathy)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죽고, 외부의 세계도 죽인다.

 

우리가 이처럼 예레미야애가나 시편 같은 성경을 열심히 들여다 봐야 하는 이유는 우리 영혼에 닥쳐온 고통을 올바로 치유하기 위해서이다. 고통의 언어를 배워 내 안에 닥쳐온 고통을 하나님을 향해 올바로 탄식할 때, 그리고 반드시 탄식의 과정을 거쳐야, 그 지난한 과정의 열매로 오는 은혜가 감사인 것이다. 감사는 고통의 언어가 맺는 열매, 또는 지향하는 목적이지, 고통의 언어로 가득 찬 탄식의 과정 없이 우리에게 오는 매직(마술)이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고통의 언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먹고 살려고 성공의 언어는 반드시 배우면서, 왜 나의 존재를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살려내는 고통의 언어는 배우지 않는가. 성공의 언어가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라, 고통의 언어가 우리를 살린다. (나는 주로 고통의 언어를 새벽시간에 설교하고 가르친다. 오직 성경에서만 가르쳐 주는 고통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면, 새벽예배를 나오라.) 고통의 언어를 잘 배워,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1. 2. 15:21

열심히 하면 죽는다

(요한복음 2:13-22)

 

본문은 소위 성전청결사건이라 불린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성질을 말하기도 한다. 예수님도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 성질을 부렸다며, 자신의 성질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우스운 일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성전은 헤롯성전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심장이었는데, 헤롯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성전이다.

 

헤롯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은 이유는 신앙 때문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는 복잡한 이력(이두매 사람)을 지닌 통치자였기 때문에 유대 땅의 통치자로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가장 소망하는 것을 충족시켜 줌으로써 그의 통치권을 인정 받으려 했던 것이다.

 

헤롯성전은 솔로몬 성전이나 초라했던 스룹바벨 성전에 비하면 그 규모가 엄청났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 주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제사장들과 산헤드린공의회 회원들의 집권을 강화시켜 주었는데, 성전으로 순례를 오는 사람들을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을 거둘 수 있었다. (한국의 불교가 굳건히 서 있는 이유, 그리고 그들 가운데 이권 다툼이 잦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거두는 문화제통행료 수입 때문이다.)

 

헤롯성전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직분이나 성별, 그리고 민족(유대인, 이방인)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 구분되어 있었다.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는 매매는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진 상업적인 매매는 합법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성전을 운영하는 유대당국의 이익에도 맞았고, 먼 곳에서 성전으로 순례를 왔던 순례자들의 편의에도 맞았다.

 

먼 곳에서 순례를 오는 사람들이 제사에 바칠 동물을 함께 데리고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전세를 내야 했는데, 이국에서 온 이들이 그곳에서 환전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외국에 갔을 때, 공항에서 빠져 나가기 전 그 나라의 돈으로 환전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한 마디로, 이방인의 뜰에서의 매매는 합법적이고 상식적인 일이었다.

 

유월절 때에 성전을 방문한 예수님은 그곳에서 장사치들을 내쫓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이에 해당하는 구약의 말씀은 없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이 추정하는 이 말씀에 해당하는 구약의 말씀은 스가랴서의 이 말씀이다.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니라”( 14:21). 여기서 가나안 사람은 상인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 성전청결사건이 가진 의미이다. 그 의미와 관련된 구절이 두 개 나온다. 하나는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라는 구절인데, 성전청결사건을 보고 제자들이 시편 69 9절의 이 말씀을 되돌아 봤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구절인데, 제자들은 이 뜻의 의미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깨달았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다.

 

성전청결사건을 감행한 예수님의 행동은 옳다. 시편 69 9절의 말씀이 그를 뒷받침해준다. 시편의 이 말씀은 다윗의 탄식이다. 하나님의 향한 자신의 열심 때문에 자신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다는 탄식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 때문에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던 성경의 인물 중 대표적인 인물은 다윗 외에도 비느하스와 엘리야가 있다.

 

비느하스 이야기는 민수기 25장에 등장하는데, 그는 아론의 손자이고, 엘르아살의 아들로서, 바알브올에서 발생한 이스라엘 남자들의 우상숭배 사건을 해결하는 신실한 제사장으로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모압 땅에 이르러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이에 염병이 돌아 많은 이들이 죽게 된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기 위하여 창을 들고 모압 여인과 음행하는 남자를 그 자리에서 죽인다. 그로 인해 염병은 멈추게 되는데, 이미 2 4천명이 죽은 후였다. 비느하스의 열심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바알브올에서 모두 죽었을 지 모른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열왕기상 19장에 나온다. 특별히 19 10절에 보면,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만국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이것은 엘리야가 바알선지자와 아세라선지자 850명과 대결한 후, 이세벨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여 낙심해서 호렙산에 머물 때에 하나님과의 대면을 기록한 구절이다. 엘리야의 열심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열심이 이스라엘을 구했지만, 엘리야는 그 열심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하나님의성전)을 사모하는 예수님의 열심이 예수님을 삼키게 될 것이다’. ‘삼킨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위험하다. 죽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보듯이,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

 

유대당국자들은 예수님이 행한 성전청결사건을 본 뒤, 예수님에게 와서 그렇게 행하는 표적이 무엇인지 묻는다. 유대당국자들은 이방인 뜰에서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매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를 예수님에게 물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에 대한 권위가 누구로부터 받은 것인지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46년째 지어지고 있는 성전을 헐면, 3일만에 다시 짓겠다는 게 무엇인가? 무슨 기적을 행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깨달았다고 본문은 전한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은 이런 뜻이다. “내 육체를 죽이라, 그러나 나는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육체가 죽어도, 그러한 자는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행하는 일에서 엄청난 고난과 고통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일을 옳다고 인정해 주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들이실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주의 일을 행하는 우리의 동력이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믿음을 찾아보는 일이 쉽지 않은 세상이 됐다.)

 

열심히 하면 죽는다. 그래도 괜찮다.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에 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정말 주를 위해 열심히 한 것 때문에, 무엇인가 손해본 것(죽은 것, 가령, 재산손실, 명예훼손, 가족관계 또는 부부관계 소원)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 없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부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열심을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믿음, 이러한 열심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31. 04:55

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 (Prima schola alba est)

(마태복음 11:28-30)

종교개혁500주년 기념 예배

                       

함께 경청한 클래식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 5 <Reformation>이다. 이틀 뒤, 10 31일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개신교 내에서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느라, 각 교단이 나름대로 바쁘다. 멘델스존은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곡을 만들었는데, 프랑스의 7월 혁명과 가톨릭 진영의 극심한 반대로 종교개혁기념일을 지키지 못하여 축제에 사용하지 못했다.

 

이 곡의 테마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지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에서 가져왔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585장이 그것이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찬송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역사를 모르면, 이단아가 되기 쉽다.)

 

멘델스존의 풀 네임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Felix Mendelssohn Bartholdy, 3 February 1809 – 4 November 1847, 38살에 요절)이다. 우리는 흔히 줄여서 멘델스존이라고 부른다. 멘델스존은 유대계 독일인(Jewish Germany)이다. 그의 할아버지 모제스 멘델스존은 유대교 계몽주의를 이끌었던 유명한 철학자로, 그 당시 이매뉴엘 칸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그 당시 유명한 은행장(현재 도이치방크의 전신, 히틀러 시절 빼앗김)이었다. 그래서 멘델스존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자랐다.

 

우리가 알다시피, 독일은 종교개혁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개신교(Protestants)가 발달된 곳이다. 그래서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아들 펠릭스의 앞날을 위하여, 유대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한다. 그래서 그는 멘델스존 위에 Bartholdy라는 성을 붙인다. 이것은 그의 가문이 더 이상 유대교인이 아니고 개신교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패밀리 네임(Family Name)이었다.

 

유대인인 멘델스존이 종교개혁 300주년을 맞아 축제 때 연주하기 위하여 <종교개혁>이라는 심포니를 작곡한 이면에는 그러한 스토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멘델스존의 <종교개혁> 심포니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짠하다. 무엇인가, 스토리를 알면 마음이 짠한 법이다. 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알아야, 이해도 하는 법이다.)

 

멘델스존은 이름도 개신교 식으로 바꾸고, 개신교 종교개혁을 기념하며, 자신이 개신교인인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살았다. 누구보다도 독일인이었고, 누구보다도 개신교인이었던 멘델스존, 그러나,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히틀러가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며 유대인 말살 정책을 펼쳤을 때 멘델스존의 그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히틀러는 멘델스존보다 4년 늦게 태어난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를 사랑했다. 그는 바그너야 말로 독일인의 정신을 고취시키는 음악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바그너의 음악을 우상화시켰고,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음악은 마구마구 짓밟았다. 히틀러는 박물관에 보관된 멘델스존의 모든 유품과 악보를 불태웠고,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멘델스존을 기념해서 게반트하우스 근처에 세운 동상도 철거시켰다. 한 사람의 미치광이 때문에 두 사람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바그너는 생전에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며 도망 다녔고, 멘델스존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추앙 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가진 여러 가지 좋은 배경을 바탕으로 빛을 못 보고 있던 수많은 음악가들을 발굴했다.

 

그 중 대표적인 두 사람이 바흐와 쇼팽이다. 멘델스존의 노력이 없었다면 바흐는 우리가 현재 인정하듯음악의 아버지가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쇼팽은 음악계 주변을 전전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지 모른다. 그러나, 멘델스존의 노력 덕분에 바흐와 쇼팽은 지금 우리에게 최고의 음악가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운명은 참 짓궂다. (나는 운명이라는 말보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하나님은 참으로 짓궂으시다.) 왜냐하면, 인간사에서 가장 행복한 날인 결혼식에 히틀러에 의해 명암이 갈렸던 바그너와 멘델스존을 만나게 하신 것을 보면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결혼식 때 전통적으로, 두 곡의 결혼행진곡이 연주되는데, 신부입장 할 때 연주되는 곡은 바그너의 곡이고, 신랑신부 퇴장 때 연주되는 곡은 멘델스존의 곡이다. 바그너의 곡은 그의 오페라로엔그린’ 3막에 나오는 혼배합장곡이고, 멘델스존의 곡은 그가 17세에 작곡한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중 결혼식 장면에 나오는 곡이다.

 

루터가 종교개혁 할 당시 근거가 되었던 성경구절은 로마서 1 17절의 말씀이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종교개혁 당시의 중세 유럽의 사회적 상황을 몇 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그 당시는 구원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 그들을 지배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소비에 대한 과도한 욕망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 나는 구원받았다. 고로 존재한다.)

 

루터가 가장 두려워 한 것은 하나님의 의였다. 의로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 루터(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다가서려고 엄청난 종교적 짐을 졌다. 일례로, 고해성사를 하루에도 수십 번 했고,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생각난 지은 죄를 고해하기 위하여 다시 고해성사실로 향하는 등, 의로움을 인정 받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고행(금식을 밥 먹듯이 했다)을 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만 더 드러날 뿐이었다. 루터는 매일 좌절했다. 그러던 중,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 이 구절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루는 게 아니라, 복음에 나타난 의를 믿으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구나!’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한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만약, 루터가 이러한 복음의 능력을 깨닫지 못했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직까지도 종교적 짐을 지우느라 헛된 고생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루터가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구원의 길에 대한 또다른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11:28-30).

 

오늘 설교 제목은 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이다. 이것은 라틴어인데, 우리 나라 말로 옮기면,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라는 뜻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첫 수업부터 빡빡하게 하는 선생님이 제일 싫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하며 첫 수업을 맞는데, 첫 수업부터 빡빡하게 하면 수업에 대한 부담이 엄청나다. 그런데, 긴장하고 첫 수업에 들어 갔는데, 과목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한 뒤, ‘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첫 수업은 휴강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순간 마음 속에 평안이 찾아 온다.

 

긴장하고 들어갔는데, ‘휴강이라는 말을 들으면 뜻밖에 잉여의 시간이 생긴다. 우리는 잉여의 시간이 생겼을 때 무엇을 하는가? 오랜만에 친구(부모님)에게 전화도 하고, 시장에도 가 보고, 길을 가다 껌을 파는 할머니의 껌도 하나 사드리고, 풀 밭에 누워 봄날(가을날)의 기운도 느껴보고, 이렇지 않을까?

 

극빈 3

ㅡ 저 들판에

 

아무도 없는 빈 들판에 나는 이르렀네

귀 떨어진 밥그릇 하나 들고

빛을 걸식하였네

풀치를 말리듯 내 옷을 말렸네

알몸으로 누워 있으면

매미 허물 같은 한나절이 열 달 같았네

배 속의 아가처럼 귀도 눈도 새로이 열렸네

함께 오마 하는 당신에겐 저 들판을 빌려주리

 

구원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모든 것이 자기 구원을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중세에는 지나가는 걸인에게 반드시 동정을 베풀었는데, 지나가는 걸인에게 동정을 베푼 것이 그들에게 의가 되어서, 그것이 자신들의 구원에 가산점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그 당시에는 전문 거지(homless)’ 그룹도 등장했다. 그 전문 거지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신들이 부자의 구원의 통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자들은 걸인들의 존재를 고마워했다. 걸인들이 있어 자신들의 구원이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말되 안되는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일이었다.)

 

잉여의 시간이 생기면, 우리는 마음을 풀고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첫 수업은 휴강이라는 데 바보처럼 교실에 남아서 공부를 하거나, 첫 수업을 휴강했다고 선생님을 비난하는 사람은 바보거나 인생을 잘못 사는 거다. 잉여의 시간이 생기면, 그것에 감사하며 그 시간을 보람차게 보내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루터는 구원에 있어,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복음을 외쳤다. 이것은 구원에 대하여 혁명적인 일이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이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 이처럼 불가능한 것이다. 불가능한 것이기에 그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구원을 우리에게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첫 수업은 휴강이다. 은혜다. 그러니, 나가서 공중에 나는 새도 좀 보고, 들판에 핀 꽃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건네 보고, 오랜 친구에게 오랜만에 전화도 걸어보고, 하늘도 좀 바라보고, 밤하늘의 별도 들여다보고, 무엇보다 나의 주변 사람들, 또는 나의 주변의 자연(동물, 식물, , 하늘, 바다)이 겪고 있는 고통도 들여다보라. 잉여의 시간이 사랑으로 꽃피우게 하라.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삶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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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26. 09:47

풍성한 하나님, 풍성한 인생

(시편 23편)


23편은 성경 중 가장 인기 있는 구절이다. 교회를 조금 오래 다닌 사람 치고 시편 23편을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빼어난 시적 표현을 담고 있고, 짧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내용 면에서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가장 필요한 구원의 요소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3Ps로 표현하고 싶다. Provision(공급), Protection(보호), 그리고 Presence(함께함, 동행)이 그것이다. 시편 23편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드러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위험(죄와 악)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분이고, 언제든지, 어디에 있든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다.

 

다윗은 이것을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목자이시고, 우리는 그의 양이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메타포(비유)이다. 메타포는 어떠한 중요한 요소를 말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빌려올 뿐이지, 그 비유의 대상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가령, 실제로 목자와 양의 관계는 시편 23편에서 비유되고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벗어난 현실이 있다. 실제로 목자가 양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들과 함께 다니는 것은 양에게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다. 목자를 양을 잘 키워서, 양의 젖이라든지 털, 또는 고기를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에게 비유되고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케 하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돌보시는 것이다. 사랑에는 어떤 목적이 없다.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로 그 풍성함을 통해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보호하시고, 동행하신다. 이것은 생명의 나눔이다. 그야말로, 잔이 넘치는 것이다. 그분에게는 인색함이라는 것이 없다. 그분에게는 억지로라는 것이 없다. 그분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그분에게는 흘러 넘치는 풍성함이 있을 따름이다.

 

풍성하지 못하면 나 자신도 목마를 뿐더러, 다른 이들에게 나의 것을 나누어 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은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정의와 사랑의 삶이다.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인지 아는 일은 그것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3Ps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길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 관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3Ps를 행하면서 살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인생(존재)를 풍성하게 해주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서로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며, 서로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은 인류가 도달해야 할 인륜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이 악한 이유, 세상을 살면서 힘들다고 느끼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의 인생(존재, 생명)을 위해서 서로 공급하고 보호하고 함께 하지 못하고, 자기 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만의 생존을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을 헤치며 남을 소외시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는 생존이 도덕이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렇게 잔인한 것이다. 자기의 생존을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한다. 구약의 열왕기하(왕하 6:28)나 예레미야애가(애가 4:10)에서 보듯이, 자기의 생존을 위해 자식을 삶아 먹는 일까지 벌인다. 아니, 이보다 더한 짓도 한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악마의 노예로 산다.

12.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아는 것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우리의 삶도 거룩해지기 위함이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는 분이고,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자기 자신의 안위만 위했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에게서 어떠한 언약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 역사의 성군이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경험한 뒤, 그도 하나님처럼 자기 백성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적의 위험(특별히 블레셋)으로부터 보호하고, 백성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았기 때문이다.

 

풍성한 하나님을 경험하면, 나의 인생이 풍성해질 뿐만 아니라, 나의 풍성함을 나누는 인생을 반드시 살게 된다. 풍성함을 축적만 하고 나누지 않는 것은 풍성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조엘 오스틴의 Prosperous Gospel은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1천만불(120)짜리 호화주택에 살면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아 자신처럼 살기 원한다고 말하는 복음은 도대체 어떠한 복음인가!)

 

악한 세대를 돌아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가까운 주변이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인생, 생명)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있는지,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가 함께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족끼리, 우리 교회 공동체가 3Ps를 잘 하고 있는지 돌아보야 한다.

 

어떻게 보면, Provision Protection은 잘 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Presence가 아닌가 싶다. 다윗은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여기서 다윗은 자기의 평생에 선하심(Goodness)’인자하심(Lovingkindness)’이 반드시 자신을 따를 것이라고 확신하다. 이것은 선하심인자하심이 의인화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메타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Presence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좋다, 행복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Presence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공급하고 보호하는 일은 내가 직접하거나, 다른 이가 해줄 수 있는 것이지만, Presence하는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반드시 내가 해야 한다.

 

사랑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공급하고, 나를 보호해주는 사람이랑 하는 게 아니라, 결국 내 눈 앞에 있는 사람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눈 앞에 있으려고, 상대방과 함께 있으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바로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쏟고 집중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게 복이고, 그러한 관계를 하나님이 복 내려 주시고 기뻐하신다.

 

풍성한 인생은 풍성한 하나님을 닮을 때 이루어진다. 그게 거룩한 삶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3Ps를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도 우리의 가족, 교회, 그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에 3Ps를 행하며 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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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16. 14:18

꿈보다 해몽

(창세기 41:1-8)


오늘 말씀은 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 심리학의 효시라고 불리는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의식보다 무의식이다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 책을 썼다. 그는 신경증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무의식의 세계, 즉 꿈에 집중했던 것이다.

 

성경이 쓰인 고대 사회에서는 꿈을 계시의 통로로 보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꿈을 꾸고 나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관심이 많다. 그러한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한 서적도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잠을 자면서 꿈 꾸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꿈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방향으로 오래 순종하는 것(Long obedient toward one direction),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성실성을 갖춘 자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요셉에게 기회가 왔다. 그가 만약 팔자타령 하면서 망가졌다면 기회가 왔어도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의 인생은 꿈 때문에 겪은 일이 결정적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은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샀다 (형들이 묶은 곡식 단이 요셉이 묶은 곡식에게 절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 결국, 이렇게 애굽의 노예가 된 것은 꿈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요셉은 꿈 꾸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요셉을 힘들게 한 것도 꿈이지만, 요셉을 세워 준 것도 꿈이다.

 

어느 날, 애굽의 왕 바로가 꿈을 꾼다.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에게 잡아 먹히는 꿈과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에게 삼킴을 당하는 꿈이었다. 바로는 이 꿈을 꾸고 이 꿈이 흉몽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번민하여 잠을 잘 못 잤다. 날이 밝자, 바로는 애굽에서 내로라 하는 점술가와 현인들을 불러 자신이 꾼 꿈을 말해주고 그 꿈의 의미를 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사실, 해석을 못한 게 아니라, 바로를 만족시키는 해몽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바로의 측근에서 바로를 섬기던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자신의 석방을 예견했던 요셉을 떠올린다. 그는 그때 자신이 감옥에서 나가게 되면 요셉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2)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바로의 꿈이 그로 하여금 요셉을 기억나게 했다. 꿈 때문에 요셉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바로 앞에 불려간 요셉은 바로의 꿈을 듣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 꿈은 애굽에 불어 닥치게 될 흉년에 대한 것이다. 7년의 흉년 전에 7년의 풍년이 있을 것인데, 7년의 풍년의 때에 흉년을 잘 대비하면 흉년이 오더라도 거뜬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내용의 꿈 해석이었다. 요셉의 꿈 해석은 바로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고, 그 결과 바로는 요셉을 총리대신에 세워 풍년 동안 흉년을 대비하는 일을 관장하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셉의 꿈 해몽의 핵심이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요셉은 역사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하여 선포한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다. 꿈은 사람이 꾸지만 그 꿈의 실현은 하나님께 있다!” (잠언 16:9).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꿈이란 무엇인가? 꿈이란 단순히 우리가 잘 때 꾸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꿈이란 자기 욕망의 실현도 아니다. 꿈이란 운명론도 아니다. 성경에서 꿈이란,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의 방향을 말한다. 꿈이란 생명, 즉 사는 일과 사는 길에 대한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30:15). 이 말씀에 나와 있는 도식을 보면, 생명은 복이고, 사망은 화이다. 우리는 돈과 건강과 명예가 복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인사를 할 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면서 새해에는 돈 많이 버시고, 건강하시고, 명예로운 일이 많길기원한다.

 

본문 가운데는 애굽의 점술가들이나 현인들이 바로의 꿈을 듣고 어떠한 해석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미루어 보아, 그들은 모두 바로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 꿈을 돈, 건강, 또는 바로의 명예와 관련하여 해석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의 일상에서 꿈을 꿀 때,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인가, 얼마나 건강하게 살 것인가, 얼마나 명예가 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한다.

 

그러나, 요셉은 바로의 꿈을 그러한 것들에 맞추어 해몽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의 꿈 가운데서, 창조주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의 방향을 발견했다.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집중, 그것이 요셉이 꿈의 해몽을 통해서 한 일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궁극적 생명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꿈 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그 분만을 바라는 이유는 그분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궁극적인 계시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궁극적 생명의 완성을 본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명을 완성해 가시는 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본다. 그러므로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내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돈이나 건강, 명예보다는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것이다.

 

우리는 무슨 꿈을 꾸는가? 꿈을 꾸었을 때 꿈 해몽의 핵심은 무엇인가? 요셉에게서 배우는 꿈 해몽의 핵심은 생명의 완성,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 집중하고 기대한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소개한다. 문태준의 시 봄볕이다.

 

봄볕

 

오늘은 탈이 없다

하늘에서 한 옴큼 훔쳐내 꽃병에 넣어두고 그 곁서 잠든 바보에게도

 

밥 생각 없이 종일 배부르다

 

나를 처음으로 쓰다듬는다

 

오늘은 사람도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

 

* 문태준의 시집 <그늘의 발달> 중에서

 

봄볕 아래서, 이러한 감수성을 발하다니, 대단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감수성이다. 꿈을 꾸면서 그 꿈이 나에게 어떠한 부와 건강과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한 헛된 꿈이 아닌, 꿈을 꾸면서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일, 그것은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 자리에 드는 행위 자체가 꿈을 꾸는 행위이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노예로 삶을 살 때,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가 희망을 잃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날마다 잠자리에 들면서 생명의 완성, 생명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해 집중하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흔히, 내가 하는 일, 또는 나의 처지에 정신을 빼앗긴다. 그러다 보니,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나는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내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희망으로 가득 찰 것이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우리가 행하는 일, 우리 교회의 현재 상황보다는(주보에 나오는 출석, 헌금 통계에 집중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그냥 통계일 뿐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인 우리 교회의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나는 잠 자리에 들기 전, 기도한다. 오늘 나에게 행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한다. 그리고 내일 나의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주께서 행하실 일에 대하여 기대하며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아침마다 일어나서 기도한다. “주님, 오늘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복내려 주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입게 하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우리 교회에 대해서도 날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하여 기대하고 감사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벅차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우리의 삶, 우리의 교회공동체) 하실 일을 기대하는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할 필요가 있는가? 나는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이런 생각을 한다. “그저, 싸우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열심히 꿈꾸자.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며 거기에 집중하자.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요, 식물이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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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12. 08:33

지성소로 나아가라

(시편 7:1-17 / 히브리서 9:1-12)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탈출한 역사만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출애굽기는 크게 세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있는데, 출애굽 하는 이야기(여기에는 홍해가 갈리는 이야기가 핵심)와 시내산 언약 이야기(여기에는 십계명이 핵심), 그리고 성막에 관한 이야기(성막과 제사장이 핵심)이다.

 

상징적인 관점에서 출애굽기를 보면, 출애굽기는 신앙인의 삶의 여정이 담겨 있다. 출애굽하는 일은 묶여 있는 어떠한 것(, 또는 악, 즉 생명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매트릭스> 영화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애굽에서의 삶은 기계가 인간을 가상현실에 가둔 것과 같다. 매트릭스에 갇힌 인간은 기계가 설정해 놓은 가상 현실에서 살아가며 자신이 실제로 살아 있다고 행복하다고 거짓 현실에 만족하며 산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매트릭스에 갇힌 인간은 기계에게 에너지를 강제로 빼앗기며 갇혀 사는 것에 불과하다.

 

애굽은 인간의 거짓된 삶을 고발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이 주는 고기와 밥을 먹지만, 그들은 그들의 노예로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생명을 조금도 누리지 못하며 산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것 자체가 죄이다.

 

모세는 그러한 거짓 현실을 애굽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 고발하고 그들을 깨우쳐 그곳에서 그들을 이끌고 나오는 역할을 맡는다. 매트릭스 영화에서는 모피어스가 그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모피어스는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갇혀 사는 니오에게 진실을 알리고 그를 가상 현실에서 빼 내온다.

 

죄악의 삶에서 나오기로 결단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부어진다. 그들의 앞을 가로 막는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경험한다. 우리가 살면서 죄악의 삶으로부터 떠나겠다는 결단을 못해서 그렇지, 일단 결단하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나오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주저 앉고 말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다음 단계로 가게 된 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시내산인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내산에서 벌어진 일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 사건이다. 계약은 당사자 간에 서로 인식 또는 인정(recognition)’하는 의식(ritual)이다. 이는 자녀가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엄마, 아빠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한 것은 다른 우상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누가 나의 구원자인가, 누가 나의 창조자인가를 인식, 인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데 가서 예배 드리게 된다.

 

그리고 계약은 하나님 입장에서 이스라엘이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자녀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과정이다. 그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내 백성, 내 자식인 줄 알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탄의 자식이면 어떡하나.

 

그리고, 등장하는 것이 성막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막은 가나안 땅 또는 하늘나라에 대한 눈에 보이는 형상(visible sign)’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나안 땅(나중에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하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 함께 창조의 원래 모습대로 선하고 아름답게 사는 나라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의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호소하는 시이다. 그가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다의로우신 하나님은 의인은 구원해 주시지만, 악인은 심판하신다. 그러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다윗은 자신의 의로움을 구원의 근거로 제시한다.

 

다윗은 이렇게 호소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아벨, 불의, 불공평, 폭력)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시편 7:3-4).

 

그러면서 다윗은 이렇게 간구한다.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시편 7:8). 성막(나중에 성전)은 이러한 의의 간구가 실현되는 곳이다. 성막은 의로움을 가리는 죄를 씻어내고 의를 회복하는 곳이요, 의로움을 회복한 하나님의 백성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히브리서는 구약적 제사와 제사장 제도에 익숙한 히브리인(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성경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구약의 제사와 제사장 제도가 어떻게 극적으로 바뀌었는지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죄를 씻고 의로운 상태로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나던 장소인 성막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리는 바깥뜰, 성소, 그리고 지성소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9장은 출애굽기 25장 이후에 나오는 성막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설명에 따르면, 첫째 장막 안에 있는 곳을 성소(the holy place)라 하고, 둘째 장막(휘장) 뒤에 있는 곳을 지성소(the most holy place)라고 한다. 히브리서는 둘째 휘장 뒤의 지성소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그 지성소에는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렇게 히브리서 저자가 장막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장막(성전)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토라 또는 부모님의 구전을 통해서 장막(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사는 시대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성소와 지성소를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시대였다.

 

히브리서 저자가 복음을 전하며 강조하는 것은 둘째 장막, 즉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곳은 말그대로 가장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밖에 못 들어가는 곳이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단 번에 이루시고, 우리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셔서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여셨다는 것이다.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해,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늘 나라를 말한다. 그곳은 바로 성막에서 지성소로 표현된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순례의 최종 목적지는 지성소이다. 그곳은 더 이상 거룩할 수 없는 가장 거룩한 곳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도달하여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인식되어,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향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때로 길을 잃고 방황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우리도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할 수 있지만,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안전하고 확실하게 지성소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그 길을 그의 피로 열어놓으셨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히브리서의 이 말씀을 소리내어 읽기 원한다.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지성소로 나아가라. 주께서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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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5. 09:34

복 있는 사람

(시편 1:1-6)

 

나는 쇼팽을 좋아한다. 쇼팽의 녹턴이나 왈츠를 듣고 있으면, 이런 생각까지 든다.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피아니스트가 될꺼야!’ 언제 이러한 메시지를 집사람한테 보냈더니, ‘유구무언이라는 답장이 왔다. (아마도, ‘그래서 뭘 어쩌라구?’이런 의미였던 것 같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쇼팽의 음악은 음악계의 시편과 같다.

 

성경이 마르지 않은 샘 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단연 성경에 시편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은 히브리어로 테힐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찬양의 노래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는 ‘Psalms’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 현악기인 프살테리온(psalterion)에서 왔으며, ‘현 반주를 곁들인 노래라는 뜻이다.

 

노래(찬양)는 기본적으로 예술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적 장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와 같이 시편은 노래(찬양)이기 때문에 많은 예술적(문학적) 장치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시편 1편의 예를 들자면, 시편 1편의 첫 단어는 아쉬레이고 마지막 단어는 토베드이다. ‘아쉬레복 있는 자이고, ‘토베드망하리로다이다. 그런데, ‘아쉬레는 히브리어의 첫 알파벳인 알레프로 시작하고, ‘토베드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알파벳인 타우로 시작한다. 이는 멸망하게 될 악인을 알레프에서 타우까지 먼 것처럼멀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이 대조를 이루어 전개된다. 시편 1편과 2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을 구성하는 시편으로서, 원래 한 쌍을 같이 봐야 한다. 시편 1편이 아쉬레로 시작하는데, 시편 2편은 아쉬레로 끝난다. 이러한 것을 수미쌍관(인클루지오)기법이라고 한다.

 

아쉬레복되다!’라는 뜻이다. 일단 아쉬레를 들으면, 그 다음이 궁금해진다. ‘무엇이 복되다는 것인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자,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자,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는 복되다!

 

구약성경에는 이라는 단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바라크( בּלק)’이고, 다른 하나는 '아쉐르'(אשר)이다. 나의 이해에 따르면, ‘바라크는 일종의 선행은총이고, ‘아쉐르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축복이다. 그러니까, ‘바라크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데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이고, ‘아쉐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무엇인가를 응답적으로 반응했을 때 얻게 되는 복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라사), 죄인들(하타임), 오만한 자들(레침)과 함께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 유죄로 정죄 받은 자들을 말하고, 죄인들은 율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가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가는 자들을 말하고,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들을 말한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로 갈수록 그 상태가 더욱더 악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 있는 사람(의인)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독야청청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주위에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언제나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이 세상에는 의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의인 곁을 우는 사자와 같이맴돌며 의인을 넘어뜨리려 한다.

 

어떻게 해야할까? 다음 구절이 그 대답을 주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서 보고자 한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하가이다. 하가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읊조리다, 으르렁대다, 그리고 꾸민다(plot, device)’이다.

 

우선, ‘읊조리다는 비둘기가 구구대면서 반복적으로 내는 소리를 연상하면 된다. 시편은 눈으로 읽으면 안 된다. (사실, 성경 말씀 전체가 그렇다.) 시편(성경)은 손으로 짚어가며 소리내서 읽어야 한다. 원래 성경은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손으로 짚어가며 소리내어 읽어서 마음에 새겨 외울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잘하지 못한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의 말씀 중에 시편을 인용한 것이 많은 이유는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시편(구약성경)을 암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시간에 다같이 성경을 소리내서 봉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예배의 과정이다.)

 

둘째, ‘으르렁거리다는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좋아서 그렇다. 이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와 같다. 우리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움켜잡고 으르렁거리며 즐거워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두 번째 이유는 주변에 경고하기 위함이다. 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듣고 사자에게 다가서는 동물은 없다. 그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사라처럼 으르렁거리며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과 싸워야 한다.

 

사실, 이것도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이다. 사자가 으르렁거리지 않으면 주변의 하이에나가 와서 먹이를 덥석 채 간다. 우리 주변을 맴도는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을 향해 으르렁거리지 않으면, 그들은 어느새 우리 곁으로 와서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 곁을 지나다 그 곁에 서게 되고 그들과 함께 앉게 된다. 이는 첫 말씀 복 있는 사람은 악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의 반대로 가는 것이다.

 

세번째, ‘꾸민다(Plot, Devise)’라는 말은 시편 21절에 표현된 것과 같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Plot, Devise)?” 내가 보기에는 ‘devise’라는 말이 더 적절한 것 같다. ‘Devise’‘plan or invent by careful thought’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심사숙고해서 어떤 것을 계획하고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묵상이 가진 깊은 의미를 들여다볼 수 있는데, ‘묵상이란 단순히 읊조리며 외우고, 기뻐하며 또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삶을 빚어가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읽을 때 두 가지 자세가 있다. 하나는 informational reading이고, 다른 하나는 formational reading이다.  Informational reading은 성경을 읽으며 그저 거기서 어떠한 정보를 얻으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고, formational reading은 말씀을 통해 나의 삶을 새롭게 빚어가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내 삶의 당면한 문제,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새롭게 하는 강력한 능력(power)이다. 시인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가까이 하는 자는 항상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말한다.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여기에는 미완료형 동사가 쓰였다. 영어로는 “He will be like a tree firmly planted by streams of water”라고 되어 있다. 시인은 미완료형 동사를 써서 복 있는 사람의 생명력과 풍성함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 순간, 삶이 죽어 있는 것 같고 메마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정신 차리고 보면, 나도 모르게 복 있는 사람의 자리를 떠나, 즉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악인들의 자리, 죄인들의 자리,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법 앞에서 죄인으로 추락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빗나간 화살처럼 내 마음대로 길을 가고, 추악한 말로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어느덧 나의 인생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한 없이 가벼워진다. 고통이 밀려오고, 허무가 밀려오고, 불안이 밀려오고,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러다 망한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꼭 받아야 한다. 그래서 생명력과 풍성함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가)해야 한다. 비둘기처럼 읊조리고, 사자처럼 으르렁대고,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빚어가야 한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무엇이 여러분을 생명력과 풍성함 가운데 거하게 한다고 믿는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긴다면, 왜 우리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가? 어떠한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께 기도드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또는 강퍅하게 살고 있으면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자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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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10. 5. 09:32

메타노이아 트라우마 넘어서기

(민수기 21:4-9)


메타노이아(metanoia)는 헬라어인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회개(repentence)’이다.  내가 굳이 우리나라 말인 회개를 쓰지 않고, 헬라어를 쓰는 이유는 회개라는 말이 오염됐기 때문이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회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언어는 역사와 컨텍스트를 가지기 때문에 그 언어가 지시하고 있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회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죄를 뉘우치는 것정도가 떠오른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를 그 정도로만 축소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죄의 뉘우침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메타노이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트라우마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말로 옮기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다. 어떤 일을 겪고 나서 얻게 되는 심적외상을 말한다. 사람은 외적인 손상이나 어려움을 경험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외적인 손상을 복구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마음의 손상을 복구하는 일이다.

 

오늘 말씀은 모세와 이스라엘이 받은 트라우마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일명 불뱀사건이다. 그들이 불뱀사건을 겪게 되는 데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그들은 출애굽하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 가면서 계속해서 일련의 외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불뱀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들이 겪은 네 가지의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미리암의 죽음 신광야 가데스에서 일어난 일

2) 므리바 물 사건 물이 없어서 원망: 모세와 아론이 엎드려 기도해서 반석에서 물을 얻는 은혜를 얻지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면서 반석을 두 번 치는 행위를 통해서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됨)

  3) 홍해로부터 다메섹에 이르는 왕의 길로 통과하지 못하게 됨: 에돔에게 정중히 부탁했으나 거절당해서, 배신감과 실망감을 안 게된다. 그들은 에돔이 이스라엘의 형제(에서의 자손)로 생각하고 당연히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으나 거절당한다.

  4) 아론의 죽음: 호르산에 이르러 초대 대제사장이요 모세의 평생의 동역자이자 친형인 아론이 죽는다. 상심이 얼마나 컸는지, 30일 동안 애곡한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트라우마를 안고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여 가고자 했는데, 길이 너무 험해서 그것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게 극심한 원망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마음이 상하고, 지쳐 있었다. 계속적인 실패와 죽음의 경험으로 인해, 고개가 숙여진 상황이었다.

 

<트라우마 한국사회>라는 책을 보면,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1) 우월감 트라우마: 사람대접 못받을까봐 외향에 치중하는 사회

2) 분단 트라우마: 빨갱이 전략, 어떤 모략에 걸릴지 몰라 두려워하는 사회

3) 변방 트라우마: 권력의 이익으로부터 소외되어 차별 받을까봐 몸사리는 사회

 

여기에, 세대별 트라우마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1) 1940,50년대 생: 좌절 트라우마 (너는 이 아버지처럼 살지 마라, 국제시장)

2) 1960년대생: 미완성 트라우마 (내 욕심만 좇느라 민주와 정의를 후퇴시겼구나)

3) 1970년대생: 혼돈 트라우마 세계화시대 – (신자유주의 체제내에서는 나의 개인적 꿈(소망)이 실현될 수 없다)

4) 1980년대생: 공포 트라우마 (당장 먹고사는 일이 걱정 낭만을 잃은 세대)

 

이스라엘은 에돔의 비협조로 인해 왕의 대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험한 길을 통과해야 하는 슬픈 현실을 맞닥뜨렸다. 그들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마음이 상하니라 (the people grew impatient on the way).”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향하여 이렇게 성난 함성을 질렀다. “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5).

 

이것은 가슴 속 깊은 곳에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표출이다. 그들은 절망했고, 불안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다. 트라우마가 가져다 주는 절망과 불안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것이 실제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불뱀의 등장이다. 불뱀의 등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목숨을 잃는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음악이 있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씌어진 소설이 있다. 음악은 작곡가 라벨이 지은 곡인데, 그는 '옛 스페인의 궁전에서 작은 왕녀가 춤을 췄을것 같은 파반느에 대한 기억'이라고 말했다. 소설은 박민규가 지은 것인데, 제목은 라벨의 음악에서 따왔고, 그의 소설 책 표지는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이란 그림에서 추녀 시녀에게 조명을 비추고 있다. 

 

박민규는 그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심한 트라우마에 대하여 고발한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심한 트라우마는 한 마디로, ‘인정욕구이다.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과 부끄러움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부러움과 부끄러움속에서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인정 받지 못한 자는 사회의 낙오자로 여겨져 도태되고 목숨을 잃는다. 20대 사망 원인의 제 1 순위는 자살이다.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하고, 일년에 14,000명 정도가 자살한다.


불뱀의 등장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때,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메타노이아였다. 메타노이아는 죄에 대하여 단순히 용서를 갈구하는 마음이 아니다. 죄 지은 것에 대하여 단순히 용서만 갈구하면 뭐하는가? 다음에 또 똑 같은 죄를 짓게 될텐데. 메타노이아는 현재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마음을 부수고, 다시 세우는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전부가 아니다. 다른 길은 반드시 있다. 다른 인생, 너머의 인생이 반드시 있다.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 부른다. 메타노이아란 현재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는 트라우마를 넘어서서 다른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삶의 도약을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본다. 탕자는 어느 순간 돼지같이 비천한 삶에서 괴로워하다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현재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 탕자는 메타노이아를 통해 새로운 삶,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삶이 있다! 불평과 원망, 트라우마 속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나가는 삶이 아닌, 생명을 얻는 삶이 그들에게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장대에 높이 걸려 있는 놋뱀을, 고개를 들어 쳐다보는 일이다. 장대를 보려면, 필연적으로 고개를 들어야 한다.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쳐다본 즉 모두 살더라!”(8, 9).

 

여러분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절망, 불안, 인정욕구 등, 그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내 눈에 보이는 이 현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고통, 어려움이 전부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주님이 준비하신 놋뱀’, 즉 주님이 준비하신 또다른 현실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트라우마는 우리를 두려움에 꼼짝 못하게 가두지만, 메타노이아는 그 두려움을 깨뜨린다. 현재 여러분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있다면, 눈을 들어 놋뱀(십자가)을 바라보라. 그리고 믿음을 가지라. 주께서 반드시 살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고개 들고, 어깨 펴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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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28. 17:43

노동의 의미 

(데살로니가후서 3:6-15)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살후 3:10)

 

이 말씀은 참으로 좋은 말씀이지만, 역사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에서는 매우 악용되어 온 구절이다. 다시 말해, 이 구절은 권력자가 피권력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가령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서구사회는 노예들에게 이러한 성경의 구절을 들이대며, 그들이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부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구절은 정말로 그런 뜻일까? 그렇지 않다. 이 구절만 뚝 떼어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쓰이는 것은 그야말로 성경을 더럽히는 신성모독 행위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일까?

 

버트런트 러셀(Bertrand Russell)이라는 영국의 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20세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데, 그의 이력은 매우 다채롭다. 특별히 이 사람은 수학과 논리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여러가지 공헌한 바가 커서 1950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지도교수로서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며 인류 학문의 발전에 공헌하도록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 쓴 유명한 저서가 많으나(<수학논리> 화이트헤드와 공저), 그 중에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과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왜 무신론자인지, 특별히 왜 기독교인이 아닌지에 대하여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그 중의 한 부분을 보면 이렇다.

"생각건대, 종교는 인간의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종교는 부분적으로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곤경과 분쟁에 있어 내 편을 들어줄 든든한 형의 존재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좋은 세계는 지식, 온정, 용기가 필요하지, 과거에 대한 애석한 동경이나 아주 오래전 무지한 사람들에 의한 자유로운 지성의 구속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Religion is based, I think, primarily and mainly upon fear. It is partly the terror of the unknown and partly, as I have said, the wish to feel that you have a kind of elder brother who will stand by you in all your troubles and disputes.... A good world needs knowledge, kindliness, and courage; it does not need a regretful hankering after the past or a fettering of the free intelligence by the words uttered long ago by ignorant men

 

한 사람이 어떠한 신념을 가지기까지는 다양한 영향이 미치지만, 그가 무신론자로 자신을 지시하기까지 그의 삶 속에도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나라에서 활동한 C. S. 루이스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이 어떻게 다른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그들의 삶을 추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책은 그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이다. 그냥 책 제목만 보면, 그가 게으름을 예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책 내용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는 평가절하 되어 있는 게으름과 평가절상 되어 있는 노동의 가치를 뒤집어 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 노동은 선한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게으름은 악한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 노동은 미덕이고, 게으름은 악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러한 관념을 뒤집어 보려고 시도한다. 그 책에서 러셀은 인간에게 삶을 향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노동의 시간은 대체로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4시간의 노동 이후의 남는 여가의 삶을 게으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칼 마르크스가 세상에 기여한 부분이 노동 해방이라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등장하여 노동자 해방 운동을 벌이기 전까지, 노동자는 자본가에 의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살았다. 노동자는 여가(게으름)’를 꿈 꿀 수 없었고, ‘여가는 자본가(권력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 이후에,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에 사회는 노동자들(일반 시민들)에게 여가를 선물해 주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여가를 사장님의 전유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노동자는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가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지금 시대는 버트런드 러셀이 경험한 20세기의 세상보다(그는 1872년에태어나, 1970년에 죽는다.) 훨씬 레디컬한 세상이 되었다. 웬만한 노동은 점점 사람이 아닌 로봇으로 대체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노동력보다 로봇의 노동력이 점점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세상 사는 우리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특히,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라는 말씀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가뜩이나 로봇에게 노동의 자리를 빼앗겨 가는 인류에게 이 구절은 로봇보다 못한 인간은 나가 죽어라!’는 말처럼 들린다.

 

성경은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오늘 말씀을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지침과 같은 의미로 보면 안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 이것은 굳이 성경을 안 읽어도 자기계발서에서 충분히 배울 수 있는 내용이다. 스티븐 코비의 불후의 명작,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나, 한 때 유행했던 <아침형 인간>(일본작가가 주장했던 것 같은데 작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이라는 책 같은 것을 보면, 성공하기 위한 핵심 사항은 위의 말 그대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라는 것이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라!” 그리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라는 말씀 등이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나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데살로니가전후서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게으름의 문제가 발생한 정황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극단적인 신학을 견지한 일부 사람들은 어차피 곧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세상이 끝날텐데, 무엇하러 이렇게 일하노!’라며 일하지 않는 사람이 생겼고, 또 다른 문제는, 교회 공동체가 베푸는 선행을 악용하는 무리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행전 2장 말미에서 볼 수 있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살았다. 이것이 악용된 것이다. 공동체 내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실천을 악용하여 악한 게으름이 생겨났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게으름은 현대 교회에서도 빈번히 발생한다. 특별히 소위 대형교회에서는 자주 발생하는 문제다. 대형교회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게으름이 있다. 교회에 가서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고 그냥 교회 문턱만 드나들어도 대형교회가 제공하는 온갖 영적인 상품들을 힘들이지 않고 혜택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명백한 현대판 게으름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게으름에 대해서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신학에서 온 것이든, 교회 공동체가 제공하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를 악용하는 것이든, 그 어떠한 것도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한 번 물어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누구인가?” 그리스도는 당신을 이미 구원한 구원의 완성자인가, 아니면, 이제 우리를 구원하러 올 미래의 구원자인가? 재림은 구원의 완성이지, 단순한 시간의 종말이 아니다. 재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오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새로운 창조이다.

 

종교개혁사 학자인 카터 린드버그는 루터의 신학을 진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이해한 복음의 핵심은 구원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기초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쏟았던 힘과 시간을 이제는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도록 자유케 되었다는 것이다”(유럽의 종교개혁, 203).

 

우리가 왜 수고해야 하는가? 왜 일하기 실어하거든 먹지도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삶의 토대이다.

 

여전히 구원이 삶의 목표인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삶의 목표가 되어 그것만 오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기대감에 현재의 삶을 도외시하며 게으름을 피우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을 이루고 구원을 삶의 토대로 삼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사도에게서 받은 전통대로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기 위하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자기계발서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그렇게 해야만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은 구원의 완성을 세상에 증거하는 복음의 빛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토대로 한 노동은 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한다. 우리의 노동이 비록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노동의 열매, 또는 노동의 질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가 어떻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정말로 자신의 삶의 토대라면,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오늘도 게으르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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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23. 07:35

나는 일한다

(요한복음 5:9b~18)


데카르트의 대표저서 <방법서설>에는 이런 명제가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그리고 후일, <철학원리>라는 책에서 이것을 이렇게 풀어서 설명한다.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명제를 다시 제시한다.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dubito, ergo cogito, ergo sum.” (근대철학의 인식론 문제)

 

나는 존재하는 존재일까?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신앙인이니까, 이렇게 질문해 보자.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자기 인식을 의심을 통해, 결국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 인식의 근거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자기 인식에 도달 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은혜의 집) 연못에 날마다 기거하던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시는 이야기이다. 이 사건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더욱 죽이고자 했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예수는 안식일을 범했고,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고 주장하여 신성모독(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다)했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한 것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맞서 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My Father is always at his work to this very day, and I, too, am working.”(17).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의 명제를 만들어 보면 이렇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아버지(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인식, ,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한 근거는 바로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처럼 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제를 통해서, 이러한 명제를 다시 만들 수 있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아버지(하나님)가 일하신 것처럼 일 한 것을 본받아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일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하고 실행했던 성경의 인물은 단연 사도 바울이다. 그는 일했다.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결코 낙망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3-4).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 이 말씀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그 의미가 더 명확해 진다.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믿음을 가지면 해야 할 일이 보인다. 사랑하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소망이 있으면 인내하게 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었다. 믿음을 가지니까, 해야 할 일이 보였다. 38년이나 된 병자를 그냥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 병자를 사랑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수고를 아까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이루게 될 줄 믿었기에,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자기의 길(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인내하며 걸어가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데살로니가 교회나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각각 그리스도로, 사도로, 교회로 택하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처럼 일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몸으로 택하심(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간다.

 

내가 33살에 집사람과 단 둘이서 컬럼버스 조지아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을 때 만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여기에 어떻게 오셨어요?” 이 질문의 뉘앙스는 이런 것이었다. ‘젊은 부부가 이런 시골에 와서 고생이 많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와서 목회를 할까?’ 그것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의외로 매우 간단했다. “, 저희는 보내심(파송) 받아서 왔습니다!” 보내심(파송) 받아 온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견디고 그 가운데서 성령의 은혜를 깊게 체험하고, 열매를 맺는다

 

나는 부르심(파송) 받아 이곳에 왔다고 믿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교회 생각 뿐이다. 내 목표는 우리 교회를 영적으로(Spiritually), 그리고 물리적으로(Physically) 안전하고 평안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더위가 좀 가시고, 기분 좋은 가을 날씨가 찾아 왔다.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목회자로서 (도의적으로) 많이 죄송하고 속상했다. 이상하게 주일마다 폭염에 시달렸다. (그래서 날씨가 마귀인가 했다. 조지아에서 102개월 동안 목회하며, 주일에 비가 온 적은 기억에 세 네 번 밖에 없었다. 그곳은 비가 자주 온다.)

 

주일에 부르심을 받고 교회로 모인 우리들이 예배드리며 예배에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하며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날씨가 더운데다 에어컨이 없어서 예배 드리며 더위와 소음(문을 열어 놓다보니)과 싸우며 예배 드리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예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세요!”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주님 제가 돈을 좀 벌어서 에어컨 살 수 있는 헌금을 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냥 내 생각에 우버를 해서 돈을 좀 벌까?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라도 좀 해 볼까?’ 하며 별생각을 다 했다. ‘이젠 교회에 바칠 금도 없는데…’ 우리 애들 돌반지 받은 거 이미 컬럼버스교회 건축할 때 다 드렸다.

 

주님께서는 목사로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응답해 주셨다. 그게 바로 뉴비전 청년부 수련회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제가 얼마 되지는 않지만 돈을 벌어 왔다! (기도 응답이 너무 기뻐서, 사진 찍어놨다.)

 

조지 뮬러 목사님의 일화는 많이 알려져 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 고아원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뮬러는 400명의 고아와 함께 빈 식탁에 둘러앉아 손을 맞잡고 식사기도를 드렸다. 그의 기도가 끝났을 때, 한 대의 마차가 고아원 앞에 도착했다. 그 마차에는 아침에 막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가득했다. 인근 공장에서 종업원들 야유회에 쓰기 위해 주문했지만, 폭우로 취소되자 고아들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식으로 그는 평생 5만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조지 뮬러가 따로 있나? 기도해서 응답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특권이다. 믿음이 없고, 사용을 안 해서 그렇지, 우리는 누구나, 조지 뮬러가 될 수 있다!

 

예배는 단순히 우리가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해산하는 모임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뒤, 세상으로 파송 받는 의식(Ritual)이다. 우리는 예배로 부르심을 받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뒤, 세상으로 파송 받는다! 예배의 구성이 그렇다. 예배의 부르심 찬양 말씀 파송

 

파송 받은 자와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의 마음 가짐은 같을 수 없다. 여러분이 하는 직장의 일, 교회의 선교사역, 그리고, 각자의 삶에 자리에서 하는 확장된 사역(어머니학교, 빛과소금중창단, 히엘, 독서모임)은 모두 파송 받아 하는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어야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

 

우리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합해서, 우리 공동체의 Spiritual 한 부분과 physical 한 부분을 조금씩 reformation해 나가고 development 해 나가자. 급하지 않게, 조금씩,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 가랑비에 옷 젖듯이 ….

 

중요한 것은 반드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교회로 모여, 예배를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받고 파송 받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는 말씀처럼, 주님께 보냄을 받지 않고 하는 사역은 모두 무면허 사역이다. 그런 사역은 성령의 열매를 절대로 맺을 수 없다. 자기의 의만 드러날 뿐, 자기의 의는 죄의 냄새만 나게 한다.

 

돈을 내지 말라. 교회는 돈 내는 곳이 아니다. 믿음을 드리는 곳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해 보라. ‘내가 돈을 드렸는데, 시간을 드렸는데, 헌신을 드렸는데, 왜 나한테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그러면서 시험에 든다. 믿음을 드려야지, , 시간, 헌신을 드리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아버지(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믿음의 일이고, 사랑의 수고이고, 소망의 인내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어떻게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 증명할 수 있는가? 바로 우리가, 믿음의 일,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가운데, 아버지가 일하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을 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나와 세상에 증명할 수 있다. “나는 일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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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7. 9. 14. 14:53

잃어버린 질문

(데살로니가전서 5:1-11)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바울의 서신 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 바울 서신은 복음서보다 기록시기가 앞서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마태복음이 가장 먼저 쓰여진 성경책이라 쉽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게다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보고 신약성경이 예수님의 탄생부터 다룬 일대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대개 기원전 50여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대략 20년 정도 후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의 관심사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 관심사가 당연하다라는 말을 썼다.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가 성경을 봐서 알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에는 아래와 같이 8군데에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1) 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2) 계시록 1 7

보라, 그분께서 구름들과 함께 오시느니라. 모든 눈이 그분을 보겠고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분으로 인하여 통곡하리니 참으로 그러하리로다. 아멘

 

3) 베드로후서 3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4) 야고보서 5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5) 히브리서 9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6) 골로새서 3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7) 사도행전 1 10~11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으니라

 

8) 마태복음 26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재림이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죽지 않고 예수님의 재림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믿었던 성도들이 한 명씩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던져진 심각한 도전이었다. 첫째, 재림에 대한 믿음에 도전이 왔고, 둘째,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은 신앙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왔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궁금증을 사도 바울에게 질문했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이다. 그리고, ‘재림은 초대교회 공동체를 지탱해준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재림의 소망 때문에 그들은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고, 재림의 소망 때문에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소망 가운데 그들은 재림을 기다리며 세상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자매들이 한 명씩 죽어갔다. 당연히 믿음이 흔들리고, 소망이 수그러들어갔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였던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라는 질문은 이제 현대기독교인들에게는 잃어버린 질문이 되었다.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 때문에 현대기독교가 점점 소망과 긴장을 상실한 채 죽어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재림을 질문하면, 사이비 집단인 것처럼 호도되기도 한다. 하기야, 워낙 사이비 집단들이 재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흐려 놓은 면이 많다.

 

초대교회 전통에 부활절 전야제(Easter Vigil)라는 것이 있다. 개신교는 예전과 의식이 많이 약해서 교회 전통을 지키지 못하는 면이 많다. 이러한 부분은 반성하면서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 기독교 전통이 강한 교파에서는 아직도 부활절 전야제를 지킨다.

 

에모리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학교에 있는 캐논채플에서 열렸던 천주교의 부활절 전야제에 참석한 일이 있다. 나는 그때의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예배는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특별히 화려한 포퍼먼스는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읽고, 독창 또는 중창의 찬양이 이어졌다. 때로는 함께 부르기도 했다. 3시간 동안 자리를 뜨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진지했다. 자정까지 이어진 3시간 동안의 예배를 마친 뒤, 세례(세례성사)자들을 위한 시간을 가졌다. 모두들 세례반에 모여 세례 받은 이를 축하하고 환영하고 축복했다. 참으로 거룩하고 엄숙한 시간이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재림이 밤에 있을 것이고, 특히 부활절 전야에 주님이 오실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절 전야에 함께 모여서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소망했다. 이러한 전통은 유대인들의 전승에서 온 것인데, 기록은 보면 이렇다. “메시아는 애굽에서 유월절을 축하할 때 멸망시키는 자가 그들 위에 지나간 것처럼, 한밤중에 오실 것이라는 전승을 가지고 있었다. 유월절 철야제의 날, 성도들은 주의 재림을 기대하면서 자정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Jerome on Matt. 25:6: 생명의 삶 Plus에서 인용).

 

이러한 전통은 살려야 마땅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절대로 지키기 어려운 전통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되는, 세상을 이기는, 세상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교회는 이러한 거룩한 전통을 회복해 가는데 힘 쓰면 좋겠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이렇다. “알 수 없다.” 이 대답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책임한 대답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재림의 시기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 주권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재림의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재림이 돌연히 임할 것이라는 경고는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부분이다. 재림이 돌연히 임할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두 개의 은유를 들어 말한다.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것이다.”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갑자기 이를 것이다이다.

 

구약성경에는 주의 날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구약에서 주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과 보복의 날을 의미한다(1:15, 2:12, 30:7, 13:5, 5:18). ‘주의 날이 임하면 믿는 자(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지만, 믿지 않는 자(불의한 자)에게는 심판과 죽음의 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은 춘향전에 많이 비유한다.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나타난 이몽룡, 그의 사랑하는 여인 춘향에게는 그것이 구원의 날이지만, 포악을 일삼은 변사또에게는 심판과 죽음의 날인 것과 같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에서 평안과 안전은 로마시대의 정치적 슬로건이었다. Pax Romana! (로마의 평화!)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다시피, 로마의 정치적 슬로건은 얼마 가지 못했다. 5세기경 서고트인들(게르만족)에 의해서 로마는 점령당하여 불타고 만다. 그때, 로마가 이 땅의 천년왕국(하나님의 도성)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꿈꾸고 소망해야 할 하나님의 도성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집필한 책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이다.

 

재림은 이렇게, ‘도적같이’, 그리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방심할 때에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처럼 갑작스럽게 온다. 이것은 주권을 쥐고 계신 하나님의 갑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는 재림이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는 메타포는 빛과 어둠이다.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자고, 도둑은 밤에 온다. 6절에 나오는 이라고 하는 단어는 헬라어의 카쓰유데인이다. 이것은 도덕적 해이를 가리킨다. 단순히 도덕적 해이라기보다도,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는 세 가지 덕에서 멀어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그 세 가지 덕은 믿음의 일’, ‘사랑의 역사’, ‘소망의 인내이다(13). (your work produced by faith, your labor prompted by love,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정신차리고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루며 산다. 여기서 정신 차리다라는 말은 군대용어로, ‘밤에 깨어 보초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군대용어를 빌어 이렇게 덧붙여 말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경심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8).

 

호심경투구는 로마 군대의 전투 장비를 말한다. 사도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을 여기에 비유한 이유는 그만큼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함이다.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흐물흐물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이다.

 

재림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어느덧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벗어 놓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처럼, ‘평안하다, 안전하다를 외치며 살고 있는 듯 하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재림에 대한 소망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래야 우리는 벗어 놓은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위하여, 믿음의 일과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루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세상을 이기는, 세상을 넘어서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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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