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에 해당되는 글 580건

  1. 2018.08.27 교회총행복(Gross Church Happiness)
  2. 2018.08.13 예수, 떡, 영생
  3. 2018.08.10 성도의 자기 인식
  4. 2018.08.06 man-hû (만-후) - Manna (만나)
  5. 2018.08.03 말: 마음의 초상
  6. 2018.07.17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7. 2018.07.10 파레시아
  8. 2018.06.29 거룩한 낭비
  9. 2018.05.18 열매와 행함
  10. 2018.05.07 거듭난다는 것
  11. 2018.04.30 내 사랑 내 곁에 2
  12. 2018.04.10 두려움, 숨, 평강
  13. 2018.03.31 가상칠언
  14. 2018.03.30 새언약: 에클레센과 엑케오
  15. 2018.03.30 죽음은 생명이다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8. 27. 13:31

교회총행복(Gross Church Happiness)

(요한계시록 2:1-7)


어느 신문 기사 보도에 따르면, 세계 500대 기업의 평균수명은 40~50세 정도이고, 미국의 경우 매년 50만개의 기업이 탄생하나 10년 후에는 그중 4%만 살아남는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10년 후 기업생존률이 18.3%라고 한다. 대한상공회의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코스피 상장기업 686개의 평균수명은 약 32.9세로, 하나의 기업이 탄생해서 생존하는 기간이 약 33년이라고 한다.

 

기업 생존율 상황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SK 최태원 회장이 말한 것에 따르면,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서든데스(sudden death·돌연사)할 수 있다고 하며, 기업수명이 15년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일반 기업들에게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한 목회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개척된 교회가 생존할 확률은 10% 미만이고, 아무런 지원 없이 개척된 교회의 생존률은 0.4%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도 기업과 마찬가지로 평균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고, 갑자기 사라지는 교회가 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창립 20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요한계시록 2, 3장에는 소아시아의 7개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 우리는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말씀을 읽었다. 이들 교회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현실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교회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이 목숨을 바쳐 세웠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교회들 중, 현재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교회는 없다.

 

그렇다고교회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신비롭게도 교회는 생명체와 같아서 한 교회의 수명이 다해서 없어질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또 생겨나며 여전히 살아 숨쉰다. 한 사람의 생명은 일정 기간 존재하다가 사라지지만, 생명 활동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개체 교회는 일정 기간 존재했다 사라지지만, 교회를 존재케 하는 성령의 활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의 외형이 아니라, 교회가 지닌 스피릿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느 나라가 잘 사는 나라인지 아닌지를 물을 때, GNP(Gross National Product)를 본다. 그 나라가 어떤 경제활동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유형의 생산을 했느냐를 따진다. 기업들을 평가할 때도, 그 기업이 가진 지적재산, 기업문화, 브랜드 가치등 외적인 것을 먼저 따진다. 교회를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교회의 유형자산(교회 건물, 교인 수, 재정)을 따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러한 것이 과연 나라와 기업과 교회의 온전한 평가 잣대인가?

 

이러한 의문을 가진 역사적 인물이 있었다. 부탄의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 왕이 그랬다. 1972, 17세의 나이로 부탄 왕국의 왕위에 오른 그는 인도순방을 하는 동안 인도 기자에게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 “부탄은 국내총생산(GNP)이 얼마입니까?” 이런 질문은 받은 부탄의 왕은 사람들이 왜 국가의 총생산에만 관심을 가지고, 국가의 총체적 행복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그래서 그는 GNP가 아닌, GNH(Gross National Happiness) 지수를 말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부탄은 왕추크 왕의 국가총행복의 관심 덕분에 다른 나라가 이루지 못한 국민의 행복을 이룬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도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우리는 지금 교회를 교회답게 잘 세워 나가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교회를 세워 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목표를 잘 설정하는 게 중요하다.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이 아니라방향이다.

 

산업혁명 이후 국가에서 GNP의 성장을 목표로 하여 국가를 경영했을 때 생긴 부작용이 너무도 현저하게 드러나 있다. GNP가 성장하여 국민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살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행복도는 현저하게 하락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GNP 성장과 맞물려 여러가지 물질적 혜택 속에서 교회의 외형적 성장이 있었으나, 요즘엔 교회가 사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듯하다. 이런 말이 있다. “가톨릭 교회는 성 때문에 망하고, 개신교회는 돈 때문에 망한다.”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것인가?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우리 교회가 GNP가 목표가 아니라, GCH(Gross Church Happiness)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총행복! 물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교회가 어느 정도 경제적 부흥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Poverty(가난)는 일종의 병 같아서 존재를 죽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너무 가난하면 생존하느라 아무 것도 못하는 불쌍사가 벌어진다. (그러니 전도 열심히 하자.)그러나 분명한 것은 Gross Church Product(교회총생산)에 방점을 두면 안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GCH(Gross Church Happiness)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과학기술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있다. 어느 책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저자는 예전에 교사는 지식전달자였으나, 이제는 멘토, 코칭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선생님을 통하지 않고도 배울 수 있는 길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You Tube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나는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 중세시대 때, 성경(복음)의 전달자는 성직자가 독점하고 있었다. 라틴어로 된 성경만이 유통되었고, 라틴어로 예배를 드렸으며, 일반 신자들은 라틴어를 몰랐기 때문에 성직자가 해주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다. 성직자를 통하지 않으면 성경을 알 수 없었다. 성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했다.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성경에 대한 성직자의 독점을 깬 사건이다.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일반 신자들이 성경을 직접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다. 엄청난 혁명이다. 그 이후, 성경은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성경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교말씀은 자신이 속한 교회의 담임목사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담임목사(자신이 속한 교회의 목사)를 통하지 않고도, 설교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You Tube에 들어가 듣고 싶은 설교자의 설교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 물론, 나는 High Quality의 설교말씀을 제공하려고 노력하지만 내가 여러분을 향해 말씀을 독점할 수 있는 구조가 더 이상 아니다.

 

나는 목사님 설교만 들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실제로,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유명하시다는 분들의 설교를 듣고 있지 않은가. 들으시라. 괜찮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들으시라. 다만, 부작용을 조심하시라. 담임목사의 설교가 아닌, 다른 분들의 설교는 우리 교회의 Context, 그리고 우리 삶의 Context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일례로, 강남이나 분당의 대형교회 목사님이 그 교인들을 상대로 하는 설교의 내용이 이민교회의 작은 교회를 다니는 우리들에게 오히려 어려움을 안겨 줄 수 있다.

 

더군다나, 그분들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의 말씀 듣기는 나의 신앙을 오히려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들은 여러분을 위해서 단 한 마디도 기도하는 분이 아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옳은 말을 해도, 여러분에게 젖을 물리지 않은 사람은 여러분의 엄마가 될 수 없다. 신앙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신앙은 생명의 깊이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 현장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의 설교를 들으실 때, 이러한 점을 조심하면서 들으시라. (얘기하다 보니,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 것 같다. 아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들으시라. 다만, 분별력을 갖고 들으시라 조언한 것이다.)

 

목사의 역할은 이제 지식 전달자(교사)’를 넘어, 인격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교회 모든 구성원의 풍요로운 생명을 위한, 행복을 위한 멘토와 코치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목사는 소통과 화합의 징검다리이다.

 

한국 사람은 교육에 관심이 많다. 자신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고등교육을 받는 일에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한다.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는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고등교육을 받는 의미는 일자리를 찾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한 일자리, 이 사회에 필요한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함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펙 쌓으러 유학 나온 사람들이 가장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목회자 세계에서도 보면) 스펙 쌓아서 기성교회(좋은교회) 들어가려고 한다. 스펙 쌓아서 세습하려고 한다. 나는 유학 나와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내가 공부하는 이유와 목적은 분명하다. 일자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필요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창출(세워나가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나는 목회학석사학위를 마치고, 33살에 과감하게 개척했다. (나는 내 젊음을 바쳐 이 현실 세계에 교회 하나를 세웠다. 너무 감사하고 뿌듯한 일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 내가 사도 바울이 된 것처럼 기쁘다.)

 

내가 2년전 이곳에 오기 전, 교회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어느 교회에도 원서를 넣지 않았다.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곳에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지금 와서 말이지만, 이곳에 올 때, 내가 갈 수 있는 교회가 3군데 더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곳에 서 있다.) 교회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누군가는 내가 한 일에 대한 가치(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주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됐다라는 말을 쓴다.)

 

나는 기존의 일자리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시대에, 이곳 Bay지역에 세우기 원하시는 교회를 창출(세워나가기)하기 위해서 왔다고 믿는다. 이것은 나만의 과제가 아니라, 우리 교회로 부름을 받은 우리 모두의 과제가 아니겠는가?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보다, 아는 것을 얼마나 실행하는 실행력이다. 우리는 세상적으로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우리는 신앙적으로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공부를 하는 이유는 아는 것을 늘려 가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공부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을 차별하기 위함도 아니다. 성경공부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책을 심어주기 위함도 아니다. 성경공부를 더 하나, 안 하나,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우리는 이미 모두 주님의 자녀이고, 세화인이다. 우리가 함께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아는 것을 더 확실히 알아, 실행하기 위함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많은 칭찬을 받는다. 1) 실천과 수고와 인내가 다른 지역의 교회와는 구별된 헌신적인 교회였다. 2)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도덕적인 기준이 높았던 교회였다. 3) 자칭 사도라고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을 검증하고 검증되지 않은 자들을 퇴출했던 신학적인 교회였다. 4)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오래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진실하고 성실한 교회였다. 5) 육체의 악행을 조장한 니골라 분파에 동화되지 않은 경건한 교회였다. (한병수, <교회란 무엇인가, 에베소서 강해>, 20)

 

다시 정리하면, 에베소 교회는 헌신적인 교회, 도덕적 기준이 높았던 교회, 신학적인 교회, 성실한 교회, 경건한 교회였다. 정말 멋진 교회다. 이런 교회를 지금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주님께 이러한 책망을 받는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

 

나는 이러한 에베소 교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헌신적인 교회, 도덕적 기준이 높았던 교회, 신학적인 교회, 성실한 교회, 경건한 교회인데, 막상 그러한 교회를 세워 나가면서 그들에게는 행복이 없었던 것 아닌가. 왜냐하면,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장 핵심적인, 목표 그 자체인, ‘사랑이 그 교회에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사랑하면 성장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세상의 지식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성장시킨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우리도 에베소 교회처럼 헌신적인 교회, 도덕적 기준이 높은 교회, 신학적인 교회, 성실한 교회, 경건한 교회를 세워 나가면 좋겠다. 그러나, 아무리, 헌신과 도덕과 신학과 성실과 경건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교회가 된다. 교회총행복의 알파와 오메가는 사랑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를 세워 나감에 있어, 어떠한 순간이든, 사랑을 선택해야 한다.

 

창립 20주년 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I am not here to preach you. I am not here to teach you. I am not here to heal you. But, I am here to love you. 물론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치유는 목회자의 고유한 영역임으로 게을리 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보다, 더 어려운 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일을 위해 쓰임 받고 싶다. 그 일은 바로, 사랑하는 일이다.

 

이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시키기 위해 우리를 교회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부르신다. 나는 사랑이 교회총행복이라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만남이 거듭될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러한 고백이 우리 입술에서 터져 나와야 한다고 믿는다. “형제님, 자매님,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 교회는 에베소 교회처럼 책망을 받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기쁨이 충만한 교회는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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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8. 13. 11:20

예수, , 영생

(요한복음 6:51-58)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성경은 왜 기록되었을까? 사도들(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증언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또는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성경이 증언하는 예수가 누구인지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사도들이 기록했다. 사도란 누구인가?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선택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흔히 그들을 열 두 사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중에 바울 자신도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선택된 사도라고 주장한다.

 

도의 직접적인 뜻은 히브리어의 샬리에와 같다. , 영어로는 messenger의 뜻을 가지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와 같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사도는 사적인 신분을 가지지 않고, 공적인 신분을 가진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기 자신의 뜻이나 의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을 공직자라고 부른 것과 같다. 공직자는 스스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선택하여 뽑아주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공직자가 법에 의해 어떠한 권위를 가지듯, 사도는 성령의 법에 의해 어떠한 권위를 갖는다. 사도는 교회를 세우고 다스리는 권위가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말하고)하고 기록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법에 의해 부여된 권위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다스렸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우리는 현재 그들이 기록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읽고 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는 예수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If anyone eats of this bread, he will live forever.)”(51).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의 중요 단어와 그들의 관계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 , 그리고 영생이다.

 

우선 분명한 것은, 사도는 예수를 구약(출애굽기)에 나오는 만나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만나는 먹거리였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그 광야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도록 한 것은 하나님께서 매일 같이 하늘에서 내려 주신 만나였다. 구약성경에서도 명시되고 있는 바, 만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고, 그것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렸다.

 

사도가 예수를 만나와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말할 때, 우선적으로 예수는 생명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먹을 때만가능하다. 그래서 사도는 예수를 먹는 것, 이라고 명시한 뒤, 그것을 먹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정황이 52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이러한 오해가 실제 한국 기독교 역사에도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이런 소문이 파다했다. “야소교인들은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종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얘기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반응이나, 한국 기독교의 초기 시기의 반응이나, 또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모르는 현대인들의 반응이나, 다르지 않다. 어떻게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나? 그리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을 먹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실천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성찬식을 발전시킨다. 성찬식에서 쓰이는 빵과 포도주는 성찬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순간 더 이상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성찬식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복음을 전하는 핵심 전례가 되었다. 성찬식에서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받아 먹는 게 아니라, 예수의 살과 피를 받아 먹는 것이다. ? 그것이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생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잘 모르거나, 오해한다는 것이다. 대개 영생은 영어로 ‘eternal life’라고 한다. 생명(life)‘eternal’이라는 게 붙어서영원한 생명이라고 번역한다. ‘eternal’은 헬라어 원어로 ‘eis ton aiona’이다. 사도가 이 단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죽은 이후의 영원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죽은 후 천국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을 미래적인 사건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다.

 

‘Eternal, eis ton aiona’의 의미는 신적인이라는 의미이다. ‘영원은 미래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인 사건이다. , ‘영생하리라죽은 후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생명을 살 것이다라는 뜻이다.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을 자기 마음대로 이해한 사람과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을 온전히 이해한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영생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 생각하는 사람, ‘죽은 후 천국에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벌어지는 일은 현실부정이다. 그들에게 현실은 악한 것이고, 현실은 벗어나야 하는 것이고, 현실은 가치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의 일에 대하여 등한시하고, 죽은 후에 천국가는 일만 생각한다.

 

대개 이러한 유혹에 빠지는 일은 현실 세계에서 고통을 겪거나, 영혼의 고독,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을 심하게 겪는 이들에게 나타난다. 사기꾼이 속여 먹기 가장 좋은 사람은 누구인가? 절실한 사람이다. 건강이 나빠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가장 속여 먹기 좋은 것은 약장사이다. 약장사는 이 약을 먹으면 병이 금방 나을 수 있다고 속인다. 영혼이 곤고한 사람들은 이단에 쉽게 빠진다. 그래서 그들은 가정과 직장, 친구들을 버리고, 즉 현실을 부정하고, 영생을 보장하는 그 집단에 들어가서 산다.

 

삶의 여러 가지 문제가 절실할수록 조심해야 한다. 평소에는 시덥지 않게 보이던 것도, 절실한 상황이 오면 그것이 나의 생명을 구원해줄 것처럼 왜곡되어서 보이는 법이다. 쉬운 예로, 평소에는 로또 전광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면 로또 전광판이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로또를 사는 데 열광한다.

 

삶의 문제가 절실할수록, 가장 좋은 솔루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문제가 절실할수록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기도만 하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그리고, 평소에 건전하고 선한 공동체에 속해서 그들과 사귐을 가지며 그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신뢰를 쌓아야 한다. (내가 우스겟소리 같이 한 이야기를 잘 기억해 두라. “교회는 집 가까운 곳에 있는 데를 다니는 게 아니라, 성경에서 가까운 곳을 다녀야 한다.”)

 

사도가 말하는 영생은 미래적인 의미가 아니라, 현재적인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으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에서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여기에서 영혼의 고독,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긴다는 뜻이다.

 

사도가 말하는 ‘eternal’의 속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사도(적 공동체)요한 사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 사도(적 공동체)에서 말하는 ‘eternal’, 즉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그러므로 예수라는 만나’,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에 접근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통찰이 있다.

 

사랑의 역사(work of love)

 

언제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타자(상대방, 또는 사물)를 착취하지 않게 될까? 온갖 착취가 행해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어떠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분명 이 세상과는 다른 '착취가 없는 세상'이다. 착취가 자취를 감출 때는 사랑이 지배할 때뿐이다. 그리스도로 온전히 옷 입는다는 것은 그의 사랑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삶의 방식이란 '사랑의 역사(work of love)'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임하는 종말에는 이 세상의 모든 불의한 착취가 사라지겠으나,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는 일에 힘써 그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 외에, 우리에게 어떠한 희망이 존재하겠는가.

사랑하는 일을 멈추느니, 차라리 나에게 죽음을 달라.

(장준식)

 

사랑의 능력을 가진 자, 사랑의 능력을 회복한 자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가진 자는 영혼의 고독,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결핍이 아니라 넘침이고 나눔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마음에 충만한 자는 가정을 버리고 떠나지 않고 가정을 사랑으로 잘 섬긴다. 사랑이 마음에 충만한 자는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고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바라보며 공감할 줄 알고, 그 아픔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무엇이라도 헌신하려 한다. 사랑이 마음에 충만한 자는 자기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이를 착취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이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준다.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고 있는가. 우리는 사도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깨닫고 있는가. 예수는 생명의 떡이다. 그 떡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 그 영생이란 죽은 후 가는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말한다.

 

어느 누가 주는 소위 생명의 떡을 먹었더니, 가정에 소홀하게 되고, 가정을 버리게 되고,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되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게 되던가? 그것은 사이비가 주는 떡이다. 그리고, 지금 당신의 영혼은 곤고한 것이다. 그러니, 그 떡을 토해내라.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을 위해서 기도하라.

 

사도가 주는 생명의 떡은 사랑의 능력을 갖게 해주고, 사랑의 능력을 회복시켜 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게 한다. 생명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내 안에 나누어 줄 사랑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사도가 주는 생명의 떡을 먹으라. 참 생명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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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8. 10. 00:26

성도의 자기 인식

(벧전 2:1-10)

 

키에르케고르와 동시대에 살았던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주옥 같은 다수의 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그의 작품은 그의 삶의 반영인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서 <성냥팔이 소녀>는 가난했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쓴 것이고, <눈의 여왕>은 나폴레옹 전투에 참전했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자 눈의 여왕이 데려간 것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쓴 것이고, <미운 오리 새끼>는 작가 데뷔 후에 그의 출신 때문에 홀대 받던 시절을 생각하며 쓴 작품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벌거숭이 임금님>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명작이다.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임금님을 백성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환호했지만, 그 중에서 한 아이가 현실을 말한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사람들은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본대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살지만, 어린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대로 말할 줄 아는 순진한 마음과 용기를 지녔던 것이다.

 

<미운 오리 새끼>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명작이다. 한 백조가 오리 알 가운데 섞여 있어 오리들과 같이 태어나고 오리들과 같이 성장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백조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기쁨과 자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오리들 가운데 섞여 오리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자란 백조의 서러움이 한 순간에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진실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우리는 백조임에도 불구하고 오리 가운데 섞여서 온갖 구박을 받으며, 신세 한 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성도의 자기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온전히 인식한 자만 자신의 신분에 걸맞게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오리 가운데 섞여 자신이 오리인 줄 잘못 알고 살았던 백조는 어느날 백조들의 모습에 반해, ‘나도 저렇게 우아한 백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런데, 한 백조가 다가와 오리인 줄 착각하고 있는 백조에게 너는 백조야라고 말해 주었을 때,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처럼 훨훨 하늘을 날아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오늘 말씀은 성도, 즉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성도의 자기 인식이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 나는 돈까스를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맛보았다. 형 친구 만나러 대치동에 따라 갔다가 그때 먹은 돈까스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중학교/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가장 많이 간 곳이 돈까스 파는 식당이었다. 은광여고 입구, 말죽거리에 있는 뜨라레라는 곳에서 돈까스를 엄청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큰 아들이 돈까스를 엄청 좋아한다. 그것까지 닮은 게 신기하다. 물론, 지금은 내가 나이 들어서 그런지, 돈까스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무엇인가 맛보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나면, 우리는 그것을 맛보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1a).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본 자들은 더 이상 몹쓸 말과 몹쓸 짓을 하는 세상사람들처럼 살 수 없다. 돈까스를 맛본 아이가 계속 돈까스를 찾듯, ‘주의 인자하심을 맛 본 사람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되어 있다. 거기에 주의 인자하심이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듬뿍 들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고 자란 성도는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나는 아이들처럼 자란다. 그의 자람은 구원에 이른다. 구원에 이른 자는 이제 신분/정체성이 완전히 바뀐다.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뛴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9).

 

누군가에게 택함을 받는다는 것을 참 고맙고 신비한 일이다. 나는 동물의 왕국 보는 것을 좋아하는 데, 숫사자들이 암사자에게 택함을 받기 위하여 싸우는 모습을 보면 처절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싸움에서 승리한 숫사자만이 암사자에게 택함을 받는데, 싸움에서 진 숫사자는 갑자기 그 위용이 사라지고 쥐구멍으로 들어갈 것 같은 자세와 감정을 보인다.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것은 참 비참한 일이다.

 

그런데, 성도는 맹수처럼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한 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것이다. 무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고맙고 신비한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큰 고마움과 신비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누군가(사람이나 조직/회사)에게 택함 받으면 엄청 기뻐하고, 택함 받지 못하면 분노를 보이지만, 하나님께 택함 받은 것에 대하여 기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택함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다.

 

본인이 또는 자녀가 좋은 학교 /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구원 받은 것처럼 기뻐한다. 그런데,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은 좋은 학교나 좋은 직장이 아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유익을 가져다 줄지, 아무도 모른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사는 잠시의 기쁨과 만족을 줄지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명 자체를 구원하지 못한다.

 

인간사가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러한 것들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해 주신 그 은혜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러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한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b).

 

성도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10). 이러한 자기 인식이 확실한 성도(그리스도인)는 다른 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나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나를 긍휼을 입은 자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삶을 산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순간순간, ‘나는 누구인가를 수없이 물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이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우리는 긍휼을 입은 자들이다. 이러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는 결코 세상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삶이 힘에 겨워, 비록 처지는 머슴 같을 때가 많아도,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마님처럼 배짱과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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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8. 6. 15:29

man-hû (-) - Manna (만나)

(출애굽기 16:2-4, 9-15)

 

출애굽기에서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는 14장에 나온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출애굽 시키실 것에 대한 의지를 전하시고, 마지막 열 번째 재앙 때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신 후, 결국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다.

 

어딘가에 묶여 있던 곳 (유형이든 무형이든)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에도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따르는 것 만이 살 길이다.

 

이스라엘은 어렵사리 출애굽하여 길을 나섰다. 그러나, 그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왔다. 그러한 상황에서 망연자실할 만한 일이 발생한다. 길 앞에 바다(홍해)가 놓여 있었다.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한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홍해를 가르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예상치 못한 도우심에 힘입어 무사히 출애굽에 성공한다.

 

출애굽 사건의 긴박함을 전하는 14장이 끝나고, 이스라엘은 이제 살았구나안도의 한 숨을 쉰다. 그리고 입술에서 저절로 찬송이 나왔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의 입에서는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나오는 법이다. 모세와 이스라엘의 감사와 찬양의 시가 15장에 나온다. 모세와 남자들만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미리암과 여인들도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그야말로 모든 이스라엘이 이제는 살았구나하며 안도의 한 숨을 쉬며 기뻐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들어선 곳은 수르 광야라는 곳이었다. 광야에 이르자, 그들의 입에서 나오던 감사와 찬양의 노래는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그 입에서 원망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르 광야의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그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다.

 

그리고, 장면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출애굽기 16장으로 넘어간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있던 엘림을 떠나, 신 광야로 들어선다. 그때가 출애굽을 한지 45일쯤 된 때였다.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또다시 원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원망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3).

 

우리는 흔히 이렇게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실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철 없다 거나,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원망(탄식)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정말 나쁜 것은 힘들고 어려운 데도 (주님 앞에 나아와) 원망(탄식)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원망과 탄식을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연약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일종의 권리 또는 의무 같은 것이다.

 

왜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는데, 원망(탄식)을 하지 않는가? 성경은 온갖 원망(탄식)으로 가득 차 있다. 대표적인 성경이 시편이다. 시편은 원망(탄식)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실 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과부와 재판장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과부는 원한이 있어 재판장에게 매일 같이 나아가 재판장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조른다. 결국 재판장은 의로워서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찾아오는 과부가 귀찮아서 그의 원한을 풀어준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18:7-8).

 

힘들어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것을 마음에 담고 있으며 속앓이 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와 원망을 늘어 놓으라. 그 문제가 풀릴 때까지 주님 앞에 나아와서 원망을 늘어놓으라. 괜찮다.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는 일은 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다. 주님께서 속히 우리의 원망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돈이 필요한가? 은행 찾아가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으라. 몸이 아픈가? 병원만 가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으라. 마음이 아픈가? 상담사나 친구만 찾아가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아라. 속상한 일 있는가? 엄한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주님 앞에 원망을 늘어 놓아라. 나는 우리 교회가 원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거든, 차라리 나를 찾아와서 원망을 늘어놓아라. 그리고 함께, 주님께 나아가 그 원망을 늘어 놓아보자.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지 않겠는가. 나는 우리 교회가 너무 점잖고 조용한 것이 마음 아프다. 교회 의자를 너무 뽀송뽀송 하게 놓아두지 말고, 교회 의자를 눈물로 적시라.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 그런 교회가 하나님이 긍휼하게 여기시는 교회가 아니겠는가.)

 

4절 말씀을 보라. 광야에서 물이 없어 원망하고, 먹을 게 없어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벌을 내리시는 게 아니라, 그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려 주신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4).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을 꾸짖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원망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원망이 전혀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진짜 문제인가? 이스라엘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는 다음 구절에 나온다.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에 응답하셔서 그들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4).

 

하나님이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시며그들에게 내리신 명령은 이것이었다.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게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16). 그리고 이어서 이런 명령을 내리신다.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19).

 

이러한 명령을 주신 후,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하늘에서 양식을 비와 같이내리신다.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만나이다. 만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잘 못한 일, 또는 우리가 잘 못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우선,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을 지켜,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보내 그들에게 고기를 먹게 하시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내리게 하고, 그 이슬이 마른 후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은 것이 놓이게 하신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것이 무엇인지 못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15절을 보면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만나의 히브리어는 ‘man-hû -이다. ‘man’ ‘from’이라는 뜻이고, ‘hû’‘he or it’이다. 히브리학자들은 ‘man-hû’‘what is it?’ 이라고 번역된 것에 대해서는 이집트어의 영향이 컸을 거라고 말한다. 그들은 지금 이집트(애굽)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는 잡다한 족속, 이집트 사람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이집트어로 ‘man’ ‘what’이다. 그리고 ‘hû’ ‘it’이다. 그래서 ‘man-hû’‘what is it?’이라고 번역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히브리어로는 명확히 다르게 번역될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man’ ‘from’이라는 뜻이고, ‘hû’‘he or it’의 뜻이기 때문에, 이른 번역하면, ‘From Him’이 된다. 여기서 ‘Him’은 누구를 가리키겠나?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이다. ,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그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 지 그들은 몰랐다.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비 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 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이 이것이 무엇이냐 (what is it?)”이라고 물었을 때, 모세는 그들에게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고, 콕 짚어서 이야기를 해 준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원망을 해서 하나님께서 그 원망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응답을 해 주셨는데, 그래서 지금 내 삶 가운데 만나가 지천에 널려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으로 내려 주신 만나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원망을 원망으로 머물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을 감사와 찬송으로 바꾸어 주신다. 문제는 우리의 원망을 들으시고 그 원망을 감사와 찬송을 바꾸어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내려 주신 만나를 우리가 몰라보고, 여전히 원망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이것 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만나를 거두는 법에 대하여 지침을 내리신다. 그 지침은 간단하다. 각자 먹을 만큼만 거두고, 절대로 내일을 위하여, 또는 필요 이상으로 먹기 위하여 남겨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 하나님은 만나를 오늘만 내리실 것이 아니라, 그들이 광야의 여정을 마치는 동안, 매일 같이, 성실하게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내일을 위하여, 더 많이 먹으려고, 만나를 불필요하게 모은다. 그러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가? 그 만나에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 그들은 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만나를 더 거두어들였을까?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4).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거두어 들이면서 서로 이렇게 속삭였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우리가 믿냐? 이 만나가 내일 또 내리리라는 법이 어디에 있어? 이 광야 한 가운데서나는 못 믿겠어! 그러니, 나는 내일을 위하여, 그리고 내 배를 더 부르게 하기 위하여 모을 수 있는 한 많이 모을거야!.

 

이처럼, ‘만나(만후)’는 믿는 자에게는 ‘From Him,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뜻이 되지만, 믿지 못하는 자에게는 ‘What is it?, 이게 뭐야?’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요한복음은 6장에서 예수님을 만나와 대비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증거한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48-5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내렸던 만나와 비교될 수 없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이다.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From Him)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안 자들은 그 분을 따랐다. 그 분을 믿었다. 그래서 그분의 제자가 되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떡인지 몰라보고, 그분에게 -, What is it? 이게 뭐야?’라고 한 사람들은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man-hû -’, 지금 여러분 주변에 주님께서 놓아주신 만나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알아보고 있는가? (배우자, 자녀, 교회, 목회자, 친구, 직장, 동료 등,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만나인가, 아니면, 어디서 온지 모르는 이게 뭐야?’의 만나인가. 혹시, 원망스러운 것이 있거든, 그 원망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하라.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 알려주실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은 원망을 감사와 찬송으로 바꾸어 기쁨으로 살고 있는가?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고, 그분의 살과 피를 먹으며,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의 원망(탄식,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만나를 내려 주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으라.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평안히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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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8. 3. 15:44

: 마음의 초상

(야고보서 3:1-12)

 

야고보서는 믿음와 행함의 관계에 대하여 말한다. 그 관계란, ‘믿는 바 대로 행하라, 또는 믿는 바 대로 살라라는 뜻이다.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야고보서가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특별히 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주장의 일관성을 생각해 볼 때, 말은 믿음과 큰 상관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저명한 철학자인 에머슨은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말도 행동이고 행동도 말의 일종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말은 행동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와 믿음과 말함의 관계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말에 관한 여러 격언을 알고 있다. 그 중에서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들을 몇 개만 보면, 다음과 같다.

1) 죽마고우도 말 한마디에 갈라진다

2)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3) 말 많은 집은 장 맛도 쓰다

4) 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5) 말은 행동의 거울이다

6) 혀 아래 도끼 들었다

7) 입과 혀라는 것은 화와 근심의 문이요, 몸을 죽이는 도끼와 같다. – 명심보감

 

티베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말이란 토끼와 같이 부드러울수록 좋다.” 말에 대한 이러저러한 속담이나, 그리고 야고보서에서 신앙생활에 있어 말조심을 특별히 강조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잘 보여준다. 약간 길지만, 중요한 부분이므로 인용해 본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치적 동물이다.… 어째서 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들, 그리고 꿀벌이나 군집 생활을 하는 다른 동물들보다 한층 더 정치적인가 하는 점도 분명하다.… 동물들 중에서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소리라면 그것은 기쁨이나 괴로움을 표시하는 징표이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유리한 것이나 해로운 것, 따라서 올바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점, 즉 선, , 올바름, 사악함 등에 대해서 지각을 가진다는 점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정이나 국가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선, 악 등에 관한 공통된 지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의해서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이 공동체를 떠나서 살 수 없는 두 가지 이유 중, 첫째는 생존 때문이고, 둘째는 인간의 인간 됨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할 수 없다. 서로 돕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자기 혼자 장 봐서 자기 혼자 밥 먹고 살 수 있으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장의 구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사람은 공동체 내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위의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주장하는 바, 언어는 인간의 고유 능력이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언어나 의사소통, 또는 윤리적 실천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능력을 고유하게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사람이 공동체 내에서 성장하지 않고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자기 실현을 할 수 없게 된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기 실현이다. 그런데, 그 말은 반드시 공동체를 세우는 덕스러운 말이어야 한다. 말은 공동체를 세워야지 무너뜨리면 안 된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자기 자신도 더 이상 사람으로서의 자아 실현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통찰을 신앙에 적용해 보면, 신앙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자아 실현(이것을 성서적 용어로 표현하면 구원인데)은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인간의 고유 능력인 언어와 의사소통, 그리고 윤리적 실천이 원활하게 이루질 때 충만해진다.

 

쉽게 말해서, 야고보서가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충고한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선생이 되면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말을 많이 하다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말실수를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선생(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말을 할 때 지혜가 있어야 하고 절제가 있어야 하며 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말 하기 전에 그 입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반드시 해야 한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온전한 사람(perfect man)’은 소위 많이 배우고, 집안 좋고, 외모가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온전한 사람말에 실수가 없는 자이다(2).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간과한다. 그러다 보니, 학력을 높이는 일에, 돈을 많이 버는 일에, 외모를 가꾸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온전한 사람’,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이다.


야고보서는 말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예로 든다. (horse)과 배와 불이 그것이다. 말을 타기 위해서 사람들은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말을 조정한다. 배를 움직이는 것은 작은 키이다. 혀도 작지만 인생 전체를 세울 수도 있고 망칠 수도 있다. 작은 불이 온 산을 태운다. 그처럼 작은 혀가 온 몸을 더럽힐 수도 있고 온 몸을 불사를 수도 있다.

 

야고보서는 혀 아래 도끼 들었다는 말과 같은 말을 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 우리는 온갖 동물을 길들여, 그것을 통해서 이익을 얻고 산다. 지금은 환경단체의 맹렬한 비판 때문에 없어졌지만, 씨월드에 샤무 쇼(Shamu Show)가 있었다. 우리는 바다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포식자인 범고래(Killer Whale)를 길들여 쇼를 만드는 위대한 인간이지만, 정작 자기 혀를 길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음을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며, 형제자매(이웃)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산다고 아버지를 찬송하면서, 어떻게 나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형제자매(이웃)을 저주 할 수 있는가. 한 입에서, 어떻게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나올 수 있는가. 자연의 샘물은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동시에 내지 않는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고,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는다.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정말 대단한 능력이 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나온다.

 

그것은 자연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자연보다 못하다는 증거일까. 아마도, 자연보다 못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샘물보다 못하고, 무화과나무, 또는 포도나무보다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기보다는, 그저 자연(하나님의 피조물)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은 마음의 초상이다” (J. 레이).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다. 그러나, 방법이 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의 생김새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외모는 자기 자신이지만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말에 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은 입이 하나 귀가 둘이 있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 더하라는 뜻이다.” 결국 이 말도, ‘말조심하라’, ‘필요한 말만 하라는 뜻이다. 야고보서는 말한다. ‘믿는 바 대로 행하라, 믿는 바 대로 살라.’ 우리가 믿는 바는 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말은 마음의 초상이요,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온전한 사람(perfect man)’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자기의 혀에 마땅히 굴레를 씌울 줄 아는 믿음의 자녀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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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7. 17. 05:49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삼하 6:1-19)

 

여호와의 법궤는 블레셋 족속과의 전투에서 빼앗긴 후 버려져 있었다.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긴 일로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망하고,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아간 블레셋에게는 재앙이 닥쳤다. 신앙(여호와의 법궤)을 빼앗긴 자도 망하고, 신앙을 빼앗은 자도 망한다! 여호와의 법궤 이야기는 사무엘상 6장까지 나온다. 그 이후로, 여호와의 법궤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다, 본문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여호와의 법궤 이야기가 다윗의 이야기와 더불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다윗은 신앙에 기대어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앙은 삶을 일으켜 세우고,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 교회를 일으켜 세우고,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신앙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버려져 있던 여호와의 법궤를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은 것은 다윗이었다. 다윗과 같은 은혜가 우리의 삶에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버려진 신앙을 제자리에 옮겨다 놓는,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신앙을 구석에 처박아 두고 살지 말라.

 

여호와의 법궤를 옮겨 놓는 일은 세 단계에 걸쳐서 진행된다. 첫째, 다윗이 삼만 명을 택한 백성을 거느리고 아비나답의 집을 찾아가 그곳에서 법궤를 가지고 나오는 이야기, 둘째,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 , 웃사의 잘못으로 인해 법궤가 곧바도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는 이야기, 그리고 셋째,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다윗이 다시금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가지고 나와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야기 순으로 진행된다.

 

본문의 이야기를 봐서 알지만, 좋은 마음,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무슨 일을 진행해도 그것이 생각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을 때가 있다. 대개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든, 인내와 지혜와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첫 단계 이야기에서 다윗은 법궤를 운반해 오기 위해 장정 3만명을 선별한다. 두 사람에서 네 사람만 있으면 들 수 있는 법궤를 옮기기 위해 장정 3만명이나 필요할까? 효율성을 따지는 게 아니라, 중요성을 따져야 한다. 다윗은 그만큼 여호와의 법궤를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한 두 사람만이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집안의 모든 사람들, 모든 이들, 모든 민족이 해야 하는 일이다.

 

교회는 한 두 사람의 열심, 헌신으로 세워지면 안 된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세워 나가야 한다. 그만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 대표만 보내서 그 일을 처리하는가? 그렇지 않다. 집안의 모든 이들이 그 일에 동참한다. ?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중요하고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참여하고 동참해야 한다.

 

예배는 여호와의 법궤를 운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예배는 언제든지 모든 성도들이 나와 드리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출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문제, 신앙의 중요성의 문제이다. 우리가 이러한 저러한 일 때문에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예배에 나온 이들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은 지체들까지도 품는 마음으로, 그들이 모두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예배 드리고 있다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도 비록 몸은 지금 다른 곳에 있지만, 성령 안에서 그 영혼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거룩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영화롭고,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는 풍요로운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법궤를 빼앗길 당시 전쟁터에서 죽은 장정이 3만명이라는 사실이다. 그때와 똑같이 3만명을 이끌고 법궤를 찾으러 갔다는 것은 흥미롭고 의미심장하다.

 

본문에서 우리의 흥미를 가장 끄는 이야기는 법궤를 옮기는 중에 발생한 웃사의 죽음사건이다. 웃사는 왜 죽었을까? 웃사는 최선을 다 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죽고 말았다. 웃사의 잘못은 무엇일까?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 방문 중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본의 아닌 듯 하나) 무례를 범해서 영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그 이유는 영국 왕실 의장대의 사열을 받을 때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앞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여왕의 앞길을 막는 것는 영국 사회에서는 굉장히 무례한 일이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도 공식행사에서 함께 걸을 때 몇 발짝 뒤에서 따른다.

 

웃사의 잘못은 그와 같다. 여호와의 가는 길을 막아섰다. 여호와께 벌어지는 일을 자신이 조종, 또는 조작하려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보기에 좋아보이는 상태로 이끌려 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법궤가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놓아두었어야 하는데, 웃사는 그것이 자신이 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무슨 일을 할 때,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부흥회를 자주 다니시는 어떤 목사님의 일화이다. 그 분은 부흥회를 가면 교회에서 제공해주는 숙소에서 자지 않고, 부흥회 기간 내내 집회가 열리는 본당에서 자면서 부흥회를 인도하신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분은 교인들에게 자신과 함께 교회에서 함께 자면서 철야할 사람을 모집한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참 열심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 어떤 교인 한 명은 나에게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분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부흥강사라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했다. 그러면, 부흥회 하면서 교회에서 자는 강사는 훌륭한 강사이고, 교회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자는 강사는 부족한 강사인가?

 

대개, 열심은, 자기의, 자기만족일 때가 많다. 그 분도, “나는 부흥회 기간 동안 여러분이 제공한 숙소에서 자기 않고, 교회의 맨바닥에서 자면서 기도합니다!”라고 이야기는 것은, ‘나는 이런 부흥사야!’라는 자기의와, 그렇게 해야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자기만족이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도, 지난 13년간의 담임목회를 돌아보며, 반성할 때가 많다. 내가 정말 열심히 했는데, 그게 어떠한 열심이었나. 자기의와, 자기 만족을 위한 열심은 아니었다,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담임목회 초년 생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설교를 열심히 준비했다. 그때 설교의 주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열심히 전하면서, 나는 거기에 내 의를 실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그랬다. 나는 나 스스로 부모를 잘 공경하고 있다는 자기의를 내세워 (사실 그렇지도 못하면서), 설교를 통해서 부모를 잘 공경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목소리에 너무 힘을 주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전했다.

 

어떤 결과가 왔을까? 부모 공경을 잘 안 하던 사람이 회개하면서 부모 공경을 잘 하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던 집사님 가정이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났다. 그러면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시집 식구랑 잘 지내지 못하는데, 제가 시부모님을 잘 못 모셔 죄송합니다.”

 

담임목회 초년생 때, 개척교회 할 당시, 한 사람이 귀하고 아쉬운 그때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열심히 교회 일을 하시던 집사님 가정을 잃고, 크게 깨달았다. ‘나의 의를 드러내는 일과, 자기만족에서 오는 열심은 아무런 덕이 되지 못하는구나.’ 그 이후, 설교하면서 나의 의, 나의 만족, 나의 열심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늘 노력한다. 그냥 주님이 말씀하시는 통로로만 쓰임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성경에 보면, 엘리야도 같은 경험을 했다. 850명의 바알/아세라 선지자와의 대결에서 큰 승리를 거둔 뒤, 이세벨의 살해 위협이 무서워서 브엘세바로 도망을 친 엘리야는, 사환을 남겨두고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정신을 차린 엘리야는 호렙산에 이르러,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0).

 

엘리야는 열심이 유별났었다. 그런데, 그는 그 열심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열심 때문에 실의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고, 죽을 위기에 처해진다. 엘리야의 열심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열심이었는가!

 

여기서 12절 말씀을 보자.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한지라”.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열심을 보였던 웃사는 허무하게 죽고 말았는데,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오벧에돔은 왜 복을 받았을까? 오벧에돔이 복을 받은 이유는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는 길을 가로막지 않았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다한 웃사가 복을 받게 될거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오벧에돔이 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참 기이한 일이다.

 

우리는 복 받기 위해서 때로는 너무도 많은 열심을 낸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 결국, 자기 만족, 자기의 가 아닌가! 웃사처럼 손을 뻗어 떨어지는 법궤를 잡으며, 주님, 내가 이렇게 몸을 날려서 법궤를 잡았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회 건축하면서, 애들 돌반지, 예물로 받은 금, 모두 다 교회 건축 헌금으로 바쳤다. “주님, 제가 이렇게 금 다 바쳤어요!” 자기의, 자기만족?)

 

(이스라엘 광야에서 금송아지 만들 때, 성막 만들 때, (땅 파서 채굴한 것이 아닌)그들이 낸 금으로 만든 것! 급하게 나오면서 금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챙겨 나왔는지! 우리가 금을 바쳤으니, 물 줘!, 고기 줘!, 안전하게 가나안 땅에 데려다줘!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금을 바쳤는가!)

 

요나, 처음에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일 당함 ? 그의 열심 때문에! 그가 생각하기에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느니웨를 망하게 놓아두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의 열심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는 길을 막아 선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요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열심을 내지 않는다. 그저 마지못해 니느웨 성에 이끌려 성을 걸으며 열심도 없이 그냥, 몇 마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온 성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지금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열심 내지 말아야지, 라는 말인가? 아니다. 다윗을 보자. 어떻게 했나?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힘을 다했다는 것은 진실한 마음의 표현이고, 춤을 추었다는 것은 사랑과 기쁨의 표현이다.

 

내가 주님을 향해서 하는 일은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그 일을 하면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고, 기쁨이 넘치는가? 어떤 사람은 그러한 모습을 미갈처럼 업신여기는 사람도 있다. 진실을 몰라주는 사람은 꼭 있다. 그런 사람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주님이 갚아 주신다. 여호와를 향한 다윗의 진실한 마음을몰라주고 비웃었던 미갈은 부끄러움에 처하게 된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심(섬김)에는 반드시 복이 따른다. 그 열심은 자기의와 자기만족을 뺀, 다윗과 같은 힘을 다해 춤을 추는진실한 열심,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열심이다. 그러한 열심에는 반드시 오벧에돔에 내렸던 복처럼, 그리고 다윗에게 내린 복처럼, 나만 복 받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복을 나눌 수 있게 된다. “모든 백성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 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19).

 

하나님의 가는 길을 막아 서지 않고,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복을 받은 오벧에돔처럼, 진실한 마음에서, 그리고 사랑과 기쁨의 표현으로 힘을 다해 춤을 추었던다윗처럼, 주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주의 자녀들이 되어서, 오벧에돔처럼, 다윗처럼 복을 받는 믿음의 자녀들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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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7. 10. 15:19

파레시아

(요한 14:11-21)

 

우선 11절의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 ‘이같이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의 내용은 두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다. 모노게네스(독생자)와 힐라스모스(화목제물)가 그것이다. ‘모노게네스는 요한복음 316절에서도 나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모노게네스)를 주셨으니에서 모노게네스유일한, 하나의뜻을 가진 모노스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되다, 완성되다의 뜻을 가진 기노마이를 합해서 만든 단어이다.

 

헬라어 모노게네스는 풍부한 뜻을 지니고 있는데, 성경은 그것을 외아들(독생자)’로 옮기고 있다. 특별히 유교문화권에 속한 한국에서 외아들(독생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경향이 모노게네스의 뜻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축소시키는 면이 있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아들을 낳기 위한 하나님의 배우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생각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모노게네스는 하나님의 가족관계를 따지기 위한 단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가족관계를 따지려 한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이 모노게네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유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유비적 표현은 우리 인간에게 익숙한 것을 비유로 들어서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는 것을 설명하려는 표현방식이다. ‘모노게네스는 유비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모노게네스를 단순히 외아들(독생자)’로만 이해서는 안 되고, 그것이 가지는 풍부한 뜻을 통해 모노게네스를 파악해야 한다. 거기에는 유일하다는 뜻과 시작과 완성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것은 딥쉬코스(두마음)’라는 단어의 반대말이기도 한데, ‘딥쉬코스와 비교하면 모노게네스한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딥쉬코스는 선악과를 따먹고 두 마음을 품게 된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인데, 이것과 대조적으로 모노게네스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으로 살다 하나님에게로 돌아간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힐라스모스(화목제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마음인 우리가 한 마음이 되도록 그 길을 열어주셨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한마음(모노게네스)’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독생자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두마음을 떠나, 한마음을 가지는 것이 구원이다. 두 마음을 떠나서, 사랑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상호거주(메노)하는 것, 이 상태가 구원이다.

 

그것을 이루게 해주는 두 가지 요소는 믿음과 사랑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독생자-모노게네스 / 주님/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러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 안에서 사랑이 솟아난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들이 있다. 첫 번째, 하나님이 보인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12). 사랑하면, 하나님이 보인다!

 

이뿐 아니다. 사랑하면 비로소 상대방(타자)이 보인다. 자식은 부모가 제일 잘 안다. ? 사랑하니까. 친구는 친구가 가장 잘 안다. ? 사랑하니까. 아내는 남편을 / 남편은 아내를 가장 잘 안다. ? 사랑하니까. (살다보면, 잘 모르는 순간이 온다. ‘저 사람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 사랑의 적신호? / 옛날에는 결혼 안하고 사시는 신부님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사시는 목사님들이 더 대단한 거다. 결혼관계를 행복하게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자식 키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사랑하지 않으면, 감히 안다고 말하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 대해서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다.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관계만 더 나빠진다. 반대로, 무슨 말을 하려거든 절대적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하라. 다른 마음이 들어가면 시험에 든다. 부모가 자식에게 100만번 잔소리해도 자식은 부모에게 절대로 시험에 안 든다. ?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는 남들에게 무슨 말 할 때는 사랑의 마음으로 말하기 보다는 의로운 마음으로 한다. 그래서 시험에 드는 거다.

 

왜 믿음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가? 그래야 구원 받으니까? 맞는 말이다. 그런데 구원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모호하다. 구원이 확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구원이 무엇인지, 즉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사랑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상호거주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은 모든 생명이 완성을 이루게 되는 종말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믿는 일과 사랑하는 일이 중요한가? 이게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왜 믿어야해요? 왜 사랑해야해요?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믿는 일이나, 사랑하는 일이나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믿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더라도 믿는 일에,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 말씀에 나와 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17).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본성이 있다. 식욕, 성욕 등으로 대표되는 욕망과두려움이 인간 본성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욕망과 두려움의 문제가 은혜롭게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죄인으로 전락한다. 욕망과 두려움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본성을 나쁘다 할 수 있나. 나쁜 것은, 인간의 본성인 욕망과 두려움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이다.

 

후배 중에 SNS IRS 사칭 사기(scam)를 당한 사례를 올린 친구가 있다. ‘IRS 직원인데 세금을 얼마얼마 빚지고 있는데 그거 빨리 안 내면 당장 체포(arrest)하겠다.’는 전화였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이용한 전형적인 사기행각이다. 요즘엔 사기 전화(scam call)이 많이 온다. 얼마 전 나도 사기 전화(scam call)에 당한 적이 있다. 쓰레기 처리 회사(Republic)이라며, 미지급 대금(unpaid balance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처리해야 하니까, 카드번호 알려달라고 했다. 의심 없이 알려줬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Republic 회사에 전화 걸어서 확인해 보니까, 그 전화는 사기(scam)였다. 곧바로 카드 정지시키고, 새 카드로 바꾸었다.

 

세상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우리의 두려움을 이용해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고, 우리를 타락하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자극하고 선동하고 이용하는 방식으로 돌아간다. 어떠한 제품을 향한 욕망, 또는 어떠한 것을 가지지 못하면, 구비하지 못하면 뒤처진다는 두려움을 조장해서 우리는 죄짓게 하고 가난하게 하고, 못살게 만든다.

 

학교를 예로 들면, 하버드(Havard)를 향한 욕망을 말할 수 있다. 그런 명문대를 안 나오면 사회에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두려움이 우리 사이에 팽배해 있다. 그런 욕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고, 욕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산다. 아무리 이렇게 얘기해도, 하버드를 향한 욕망과 이 사회에 대한 두려움은 안 없어질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도, 마치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래도 하버드 가야지! 내 자식은 거기 보내야지!’ 그럴 것이다. 그만큼 욕망과 두려움은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욕망과 두려움을 해결하는 이 세상의 방식도 우리 안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는 이유는 욕망두려움때문이다. 그 앞에만 서면, 인간은 작아진다. 여호수아서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작은 성 아이와 싸울 때 이스라엘은 왜 졌는가? 한 사람의 욕망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렸어야 하는데 (헤렘법), 한 사람의 욕망이 그것을 망쳤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이름이 뭔가? 아간이다. 그가 묻힌 아골 골짜기는 욕망의 무덤이다.

 

복음서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에게 왜 꾸지람을 들었는가? 한 달란트를 가지고 이윤을 남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아무 것도 안 해서 그렇다. 한 달란트 받은 종 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25:24-25). 이처럼 두려움은 사람은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정말 생뚱맞은 짓을 하게 만든다. 어떠한 사람이 황당한 일을 하게 되는 이면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어떻게 될까봐…’

 

두려움의 반대말은 담대함이다. 담대함이 바로, 헬라어로 ‘파레시아이다. 내가 성경의 말씀 중 가장 좋아하는 두 단어는 파루시아파레시아이다. 담대함(파레시아)을 가진자는 이 세상을 파루시아(종말)처럼 산다.

 

타락한 종교와 거룩한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타락한 종교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한다. 반면에, 거룩한 종교는 욕망과 두려움을 넘어서도록 도와준다.

 

그렇다면, 타락한 신앙인과 거룩한 신앙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타락한 신앙인은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사람들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한다. 이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반면에 거룩한 신앙인은 욕망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산다. 이 세상이 조장해 놓은 욕망과 두려움의 덫에 걸려 허덕거리지 않고 자유롭게 산다.

 

믿음과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 두려움과 믿음은 공존할 수 없다. 두려움과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욕망과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지어, 죄인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믿는 일과 사랑하는 일에 날마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만 중요한 일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에서 중요하다. 우리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심판 날이 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우리는 이미 그 마음에 담대함(파레시아)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불쌍한 자녀는 부모 앞에서 담대하게 서지 못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자녀들이다. “아빠 100원만!”이라고 말할 때, 아이는 내 앞에서 당당한가, 아니면 두려워하는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느니라”(18).

 

믿는 일에,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예수 그리스로를 구주(독생자 / 모노게네스)로 시인하는 일, 믿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주하게 되시는데, 사랑 안에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상호거주(메노)하면, 거기에서 생겨나는 사랑이 담대함을 만들어 내고, 그 담대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믿음의 자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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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6. 29. 09:26

거룩한 낭비

(마태복음 26:1-16)


가끔, 낭비와 소비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낭비의 반대말은 절약이고, 소비의 반대말은 저축 정도가 될 것 같다. 낭비는 주관적인 가치이고, 소비는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경제적 가치이다. 1997IMF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절약이나 저축이라는 말은 꼬리를 감추었다. 대신에, 소비가 미덕인 사회가 되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카르페 디임 (Seize the day)”이라든지, Yolo족 같은 개념이 생긴 것은 소비가 미덕인 사회가 구축되면서이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저축이 사회의 미덕이었다. 은행의 저축 금리도 높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돈을 보며 행복해 했다. 그러나 요즘 저축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금리가 낮거나, 그리고 은행에 돈을 맡기면 오히려 관리비를 받는다. 그래서 요즘은 소비나 투자가 사회의 미덕이 되었다. 사회 경제체제가 소비자나 투자자를 환영한다.

 

오늘날의 이러한 경제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은 낭비한 것일까, 소비한 것일까, 투자한 것일까?

 

본문에는 예수님을 둘러 싼 세 부류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나는 종교 지도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가룟 유다이고, 또다른 하나는 이름 모를 향유를 부은 여인이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는 이야기와 향유를 붓는 이야기, 그리고 가룟 유다가 종교 지도자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은 30 세겔에 넘기는 이야기가 섞여 있다.

 

이야기가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다. 예수를 죽일 궁리를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이야기와 그 궁리에 맞장구를 쳐주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 중간에,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우리는 끔찍한 이야기만 보는 게 아니라, 그 끔찍한 이야기 가운데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본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셨을 때에 한 여인이 찾아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부었다. 베다니는 여리고로 가는 길에 있던 마을로 감람산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와 여리고로 가려면 베다니를 거쳐야만 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외곽에 위치한 동네였는데, 히브리어로 베트 아니야, ‘가난한 자의 집’, ‘고뇌자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동네였다. , 베다니는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밀려난 가난한 자들이 사는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을 보고 제자들이 분개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무슨 의로도 이것을 허비하느냐?”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9). 맞는 말이다. 가난한 동네에서 이렇게 비싼 향유를 쏟아 붓는 일은 부적절해 보인다.

 

마태복음에는 향유 한 옥합이 얼마의 값어치를 지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향유의 값어치는 3백 데나리온으로서 노동자의 1년 치 임금에 해당하는 값을 지니고 있었다. 여인은 1년 치 월급을 한 순간에 쏟아 부은 것이다. 이 얼마나 낭비인가!

 

이와 대비돼서 전개되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에서 그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를 팔아 넘기는데 그 값으로 은 30세겔을 받는다. 이것은 소가 어떤 사람의 종을 들이받았을 때 그 종의 상전에게 지불하는 금액이다(21:32). 값어치로만 보더라도 향유 한 옥합과 은 30세겔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그 의미는 더 크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려 그분의 고귀함을 표현했지만, 종교 지도자들과 가룟 유다는 예수를 노예() 취급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나무라는 제자들을 오히려 나무라신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 그 여인의 행동이 왜 좋은 일일까? 제자들이 보기에 그 여인의 일은 헛된 일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 여인의 일이 좋은 일인 이유는 이렇다. “그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2).


그 여인이 예수의 죽음을 미리 알고 향유를 부은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값진 것을 드려 그분께 감사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킨다. 이처럼 우리가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거룩한 행동이 된다.

 

요즘 경제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그 여인의 향유 사건은 낭비가 맞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신앙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낭비이다. 경제적 가치로 따졌을 때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사람들은 자기 계발 또는 휴식을 위해서 일요일을 쓰지만, 우리는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린다. , 시간의 거룩한 낭비가 예배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투자 가치가 있는 것에, 이윤을 창출하는 곳에 재물을 쓰지만, 우리는 그 재물을 주님께 드린다. , 재물의 거룩한 낭비가 헌금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 곳에 생명을 쓰지만, 우리는 사명을 위해 생명을 쓴다. , 생명의 거룩한 낭비가 예수의 죽음이고 우리의 헌신이다.

 

사랑은 낭비를 낳는다. 사랑하면 쓸데없이 마음을 쓰게 된다. 그래서 시간을 쓰게 되고, 재물을 쓰게 되고, 생명을 던지게 된다. 이게 가장 어려운 것이고, 가장 고귀한 것이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요즘엔 그러면 집사람한테 욕 먹지만, 연애할 때는 그렇게 꽃을 많이 사다 바쳤다. 하루 지나면 시들 꽃인데,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꽃 외에는 다른 것으로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현금 가져다 주는 것을 가장 기뻐하지만.)

 

여인은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낭비라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을 칭찬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 당신의 장례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장례, , 예수님의 죽음은 가장 귀한 향유를 부어 예배하고 찬양할 만하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죽음은 여느 사람의 죽음과 같은 죽음이 아니라 모든 세상을 구원하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는 투자 또는 소비를 넘어서 낭비를 하며 산다. 정말 그렇다. 자신은 낭비가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는 낭비한다.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시간이든 재물이든 생명이든, 남들 눈에 보기에, 낭비할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가 드리는 헌금, 우리가 드리는 헌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좋아해서,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거룩한 낭비가 아니라, 그저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우리는 오늘도 거룩한 낭비를 한다.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시간과 재물과 우리의 몸을 드려 거룩한 낭비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낭비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거룩한 낭비를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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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8. 5. 18. 09:17

열매와 행함

(마태복음 7:15-27)

 

기형도라는 시인이 있다. 1960년 생인데, 28살의 나이로 요절한 시인이다. 그는 중앙일보 기자이기도 했다. 그의 시집은 그가 죽은 후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는데, 한국 문학평론계의 거장 김현 교수가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으로 1989년도에 출간했다.

 

한국인으로서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 치고 기형도 시인의 시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의 시는 많은 문인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 중에서 목사인 나의 시선을 사로 잡은 시가 있다. (아마 나 뿐 아니라 그의 시를 읽은 모든 목사들이 이 시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이다.

 

우리 동네 목사님/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서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우리 동네 목사님이 평소에 강조한 것은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이 말에 교회 집사들은 분노한다. 왜 그들은 목사님의 말에 분노했을까? 그들은 반대로, 생활이 아니라 성경에 밑줄을 긋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우리도 범하는 오류이다. 우리도 성경에는 열심히 밑줄을 그으면서, 생활에는 밑줄을 잘 긋지 않는다.

 

오늘 말씀은 소위 산상수훈의 마지막 교훈이다. 마지막 교훈에서 예수님이 강조하는 것은 열매행함이다. 이것과 관련된 핵심 구절은 이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20)는 말씀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자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이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된다. 열매로 안다는 것은 결과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열매, 즉 결과만 좋으면 다 용서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면 이상한 거다. 팥 심었는데 콩이 나면 이상한 거다.

 

열매는 정직하다.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는다. 자연은 정직하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겉보기와는 완전히 다른 열매를 맺는다. 우리 나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은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어떤 신문 기사를 보니 한국 바다에서 백상아리가 잡혔다 한다. 양식을 하기 위해 쳐 놓은 정치망에 상어가 걸려 죽은 채로 발견된 것이다. 그 기사를 접한 사람들의 댓글이 참 재미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이제 바다도 마음대로 못 가겠네.” 그랬더니 그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상어들이지요! 인간들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 죽는 상어가 얼마나 많은데사람이 백상아리한테 물려 죽는 비율은 로또에 맞는 비율보다 적어요. 그러나, 얼마나 많은 상어가 사람들의 손에 죽습니까?”

 

정말 맞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여느 맹수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은 스스로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위험하다고 손가락질 하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지 자신과 세상에 선언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앉아 숨쉬기와 그냥 가만히 있기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라고 생각한다. 숨만 쉬어도 공해를 만들어 내고, 뭣 좀 해 본다고 손만 대면 망치고 죄를 생산해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거듭나게 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거듭난다는 말을 열매와 행함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겉과 속이 다른 가장 위험한 짐승의 탈을 벗고, 겉과 속이 같은, 즉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고,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가 열리듯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의 열매(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선한 열매)를 맺는 참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은 사도 요한이 강조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요한은 요한1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 3:18). 사랑은 말과 혀로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다. 사랑은 행함의 문제이지, 말함의 문제가 아니다.

 

논어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ㅡ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而學文" (학이편 6)

자왈, "제자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증이친인. 행유여력, 즉이학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는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집을]떠나서는 우애로우며, 삼가고 믿음이 있으며 널리 대중을 아끼면서도 어진[] 사람을 가까이한다. [이것들을] 실천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곧 글(학문)을 배운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공자의 인간론의 핵심은 인()인데,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또는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다움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서 학문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열매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주여 주여외쳐도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천국에 못 간다. 열매와 행함은 거듭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귀한 말씀이다. 우리 주님은 구원의 열매를 맺으셨고, 행함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가 참인간이고 참그리스도인이고, 참 거듭난 피조물이라면, 선한 열매를 맺을 것이고 사랑의 행위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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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5. 7. 02:22

거듭난다는 것

(요한복음 3:1-16)

 

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많다. 마태, 마가, 누가는 히브리적인 사고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요한복음은 헬라 사고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헬라 사고의 원류는 플라톤이다. 그래서 조금 어려운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이런 말이 있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이것은 플라톤의 저작이 후대 철학의 일반 개념들 형성에 풍부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과정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이다. 그가 말한 원문은 이렇다.

 

The safest general characterization of the European philosophical tradition is that is consists of 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 I do not mean the systematic scheme of thought which scholars have doubtfully extracted from his writings. I allude to the wealth of general ideas scattered through them.

- A. N. Whitehead, (New York: Free Press, 1985), p.39

 

"유럽의 철학 전통을 가장 일반적이고 무난하게 규정하자면 그 전통이 플라톤에 대한 잇따른 각주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마구 발췌하여 꿰맞춘 학자들의 도식적 사고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나는 플라톤의 저작에서 퍼져나간 일반 개념의 풍부함을 말하는 것이다." 

 -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2부 제1사실과 형상셋째 단락.

 

플라톤 철학의 특징은 이원론이다. 이원론이란 세계를 존재(의 세계)와 생성(의 세계)로 이원화하고, 전자를 후자에 대한 존재론적인식적가치적 우위를 두는 사유 방식을 말한다. 존재의 세계를 이데아라고 부르고, 생성의 세계를 현상 세계라고 부른다. 우리가 현상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존재의 세계에 이데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는 존재의 세계에 인간의 이데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사상 체계를 지닌 헬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의 사상 체계를 이용하는 복음서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이 기독교의 복음과 결합하면서 많은 문제를 낳은 게 사실이다. 플라톤의 이원론을 적극 수용하여 복음을 전한 극우파의 대표적인 예는 영지주의이다. 지금은 우리가 영지주의자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닌 자들로서, 그리고 그러한 세계관을 지닌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다. (그들만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보았는가? 우리는 너무도 쉽게 그들을 정죄하는 경향이 있다.)

 

플라톤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기독교는 플라토니즘의 대중화다.” 니체는 기독교의 맹렬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비판한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아니라, 플라토니즘을 통해서 왜곡된 기독교였다.

 

니체가 플라톤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리고 플라토니즘과의 결합 때문에 많은 부작용을 생산해내고 있는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하여 사용한 테제는 이것이다. “신은 죽었다.” 이 말은 니체가 쓴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 나오는 선언이다.

 

우리가 알아 둘 것은, 기독교는 플라토니즘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은 누군가가 죽었다라고 선포한다고 해서, 존재가 없어지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이 진리인 것을 끊임없이 우리의 삶으로 증명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룩한 의무를 지녔다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는 정말 알아듣기 어렵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한 밤 중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누가 행하겠습니까?” 이 말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거듭나야 한다는 이 말 (Born again)! 우리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니고데모는 다음과 같이 나이브하게 묻는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아주 진솔한 질문이다. 진리를 알아가려면 이렇게 어린 아이와 같이 질문해야 한다.

 

거듭남에 대한 대화에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물과 성령은 물질과 영을 말한다. 물은 물질이고, 성령은 영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플라토니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말이다. 만약, 기독교의 복음이 플라토니즘이었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물질 세계를 부정하고 영의 세계를 갈망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것은 전형적인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이다.

 

그리고, 나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 거하게 되는 회심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요한복음은 이러한 복음을 전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요한복음은 거듭남을 사랑과 연결시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사랑(아들)을 내어주신다. 그리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은 자들은 이 세계와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하는 자로 다시 태어난다.

 

사랑은 요한복음서와 요한의 서신의 중심 주제이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요한은 이런 말도 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이 말은 이런 뜻이다. “사랑은 책임을 낳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피조물을 끝까지 책임지신다. 사랑은 책임을 낳는다.

 

사랑하면 책임이 생긴다. 나쁜 사람들은 책임지지 않으려고 사랑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들은 책임지지 않으려고 미워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아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과 이 세계(이웃),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사랑의 사람이다.

 

영어로 책임은 Responsibility이다. 이것을 풀어서 보면, 책임은 Response + Ability이다. , 책임이란 반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성경에는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하나님에게 반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아 거듭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일례로, 선한 사마리아인은 거듭난 사람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거반 죽게 되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이웃에 반응한다. 그러나, 레위인과 제사장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이웃의 아픔에 반응하지 않고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못 본체 하고 지나친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반응한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 부탁을 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 전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이다.

 

복음서에 보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 나라에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변명이 나온다. “밭을 샀는데, 밭에 나가봐야 합니다.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시험하러 가봐야 합니다. 장가 들어서 못 갑니다.”

 

우리는 나 자신과, 이 세계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며 사는가? 나 자신에게 반응 잘 하고 있는가? 건강을 잘 살피고 있는가? 몸이 살려달라고 요청하는데,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몸매가 장난, 장난 아닌 사람, 육신을 돌보지 않다가 병에 걸린다. 마음이 살려 달라는데, 신경 안 쓰다가 자살하는 것, 병으로 넘어가기 전에 반응 좀 하라.)

 

5, 가정의 달을 맞아, 특별히, 가정을 돌아보자. 부부 간의 갈등의 발단은 서로가 서로에게 반응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 남편은 반응이 없어요, 사람이랑 사는 건지 시체랑 사는건지모르겠어요.” 남편이 아파도 부인이 반응하지 않는 이유는 저 인간은 그냥 저렇게 아파서 죽어도 싸니까?’ 반대로, 남편들은 부인에게 열심히 반응해야 한다. 여성들이 하는 말은 잔소리가 아니라 모두 진리다.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불만은 여자들이 조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군대를 안 갔다와서! 남자에 대한 여자들의 불만은 남자들이 철이 없다는 것이다. ? 애기를 안 낳아봐서! 남자들은 생명 태생의 원초적 경험이 없기 때문에 원래 철이 없다. 그러니, 남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잘 듣는 게 좋다.)

 

아이들이 부모님들에게 가장 스트레스 받아 하고, 가장 서운해 하는 것도, 반응이 없는 것이다. 대개 부모님들은 자녀가 학교에서 성적을 잘 받아 올 때만 반응한다. (찬유 성적표) 성적을 잘 받아와도, 칭찬보다는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경고를 한다. (성적 잘 받아오면 놀라운가, 아쉬운가? 한국 부모들은 아쉬워한다. 조금 더 잘 했으면 올 100인데, 1등인데, 하면서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빠가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보고 있어! 긴장 늦추지 말고 조금만 더 열심히 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물질과 영, 즉 전인적인 거듭남을 말한다. 플라토니즘은 이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 이 세상은 진실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모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말하는 거듭남은 하나님의 본질을 우리가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다. ,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의 일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육의 일에도 변화가 온다.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게 되면,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을 끝까지 책임지셨듯이, 우리도 나 자신과 이 세계와 하나님에 대하여 책임지는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사랑은 책임을 낳는다. 책임은 반응하는 능력이다. 반응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거듭남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세계에 대한 책임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 세상(이웃)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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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4. 30. 14:54

내 사랑 내 곁에

(딤후 4:9-22)

 

역사를 보면 독신으로 산 위인들이 많다. 그 중에서 몇 명만 꼽자면, 우선 니콜라 테슬라가 있다. 우리 교회 옆에 있는 테슬라 자동차 회사는 테슬라의 업적을 기리며 그의 이름을 따와서 회사 이름을 지었다. 니콜라 테슬라는 토머스 에디슨의 라이벌로 유명하다. 에디슨는 직류시스템을 주장한데 반해, 테슬라는 교류시스템을 주장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적대관계가 되었다. 물론, 토머스 에디슨이 워낙 위인으로 소개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리고 현재는 테슬라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판명났고, 그래서 현재 전류시스템은 교류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베토벤과 아이작 뉴턴 같은 위인들도 독신으로 살았다. 철학자 중에서는 플라톤이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세계 3대 악처(소크라테스의 크산티페, 모차르트의 콘스탄체, 톨스토이의 소피아)가 있는데, 그 중의 제일은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이다. 유명한 철학자 중에는 독신으로 산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들은 철학을 공부하면서 소크라테스의 악처에 대한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바울 사도는 독신으로 살았다. 독신으로 산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 때에 누가 보고 싶을까? 가족이 있는 경우는 물론 배우자나, 자식들이 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독신의 경우에는 가족이 없으므로, 동료나 친구가 보고 싶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그 모습을 바울에게서 발견한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9). 여기에는 스푸타솔그리고 타케오스라는 헬라어가 쓰이고 있는데,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모든 노력을 다해, 재빨리 오라는 뜻이다.

 

모든 노력을 다해, 재빨리 오라고 말하고 싶은, 이렇게 간절히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또는 이렇게 보고 싶다고 말할 때, ‘모든 노력을 다해 재빨리와 줄 사람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산 것이다.

 

바울의 마지막 소망과 인사가 담긴 본문에는 신앙생활 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들어 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신앙생활은 삶과 분리된 어떠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우리의 삶, 현실이기 때문이다. 실제 신앙생활(교회생활)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신앙을 후퇴시키지 말라. 사회초년생은 이런 질문을 한다. “세상이 왜 그래요?”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다. 사랑의 아픔을 겪는 청춘남녀는 이런 말을 한다. “ 사랑이 왜 그래요?” 사랑은 원래 그런 곳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왜 그래요?” 교회는 원래 그렇다.

 

바울 사도의 신앙의 여정을 보면, 그는 꽃 길만 걷지 않았다. 가시밭 길도 수도 없이 걸었다. 지난 날의 신앙의 여정을 돌아볼 때, 바울에게는 좋은 동역자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동역자도 있었다. 바울은 그러한 것들을 회고하면서, 마지막 인생을 보내고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는 한때 그의 동역자였던 데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는 단순히 바울을 떠난 것뿐 아니라 신앙을 저버린 상황이다. 매우 가슴 아픈 상황이다. 바울은 그레스게와 디도에 대하여도 언급한다. 같이 있어주길 바랐지만, 이들은 사역이 바빠서 함께 있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중에서, 디도는 참 훌륭한 목회자이다. 개인적으로 동질감을 가장 많이 느끼는 목회자이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고 소아시아 등 유럽지역을 다니며 전도할 때 가장 목회하기 힘든 곳은 크레타 섬이었다. 그런데, 디도는 그곳에서 목회를 했다. 그뿐 아니라, 디도는 초대교회(바울 당시) 중에서 가장 어려움이 많았던 고린도 교회에 가서 고린도교회를 정상화시킨 목회자이다. 그는 열심을 다해서 교회를 섬겼던 신실한 목회자이다.

 

바울은 누가와 마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현재 누가는 바울의 곁에서 바울을 보살피는 중이다. 누가는 바울에 의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바울과 함께 끝까지 동역한 신실한 사람이다. 그는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도 계속하여 바울을 돌봤다. 그뿐 아니라,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써서 복음을 기록하고 알렸다.

 

마가복음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가는 제 1차 선교여행 때 바울 일행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인물이다. 아마 그 때는 몸도 마음도 어려서 그랬던 것 같다. 그 일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툰 후 갈라서는 일이 발생했다. 나중에 마가는 회개하고 열심히 사역해서 바울에게 인정받는 일꾼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하고 있다. 원수 같은 놈이었는데, 이제는 보고 싶은 사람이 된 것이다.

 

바울의 인생에는 정말로 원수 같은 인간도 있었다. 그 중에서 본문에 언급되는 인물은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이다.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니라.” 알렉산더는 구리로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복음 때문에 우상을 버리는 사람이 늘어나자, 알렉산더는 바울이 자신의 사업을 방해한다는 생각에 바울을 죽도록 괴롭혔다. 바울은 그에 대한 심판을 주님 손에 맡기고 있다.

 

인생 말년에 바울은 사람만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물건도 보고 싶었다. “내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13). 여기서 말하는 책은 성경책이다. 바울 당시의 성경책은 필사본으로, 두껍고 무거워서 휴대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전도여행을 다닐 때 휴대하지 못했지만, 그는 소중한 성격책을 죽기 전에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보이고 있다.

 

나에게도 소중한 성경책이 있다. 나의 스승이신 Ted Runyon 선생님이 선물로 주신 성경책이다. 1985년 한국 개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정판으로 만든 성경책이다. 그 당시 Runyon 선생님은 정동제일교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그때 받은 성경책을 보관하고 계시다가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 (2005). 성경책이 이러한 문구를 써서 주셨다. “To Junsik Chang, With great wishes for God’s blessings and your success in your further studies. Theodore Runyon” 해석하면 이렇다. “하나님의 복을 빌고, 앞으로의 공부에 큰 성과가 있기를 빈다.” 2016, 선생님은 추천서를 써서 나를 GUT에 보내주셨다. 그리고 1년 후 (2017511), 선생님은 소천하셨다.

 

바울은 가슴 아픈 경험을 털어 놓는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16). 어렵고 힘들 때 도와주는 이 없이 모두 떠나 버렸다. 아마도 이것이 독신의 어려움이 아니겠는가. 가족이 없었던 바울의 아픔이 아니었겠나.

 

아픔을 말하면서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감동적인 교훈을 준다. 목회 도중(신앙생활 도중)에 사람들의 배신이나 버림받음을 섭섭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고 용서하는 자세를 보일 것을 주문한다. 왜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일까? 바울의 신앙고백은 이렇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힘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맡겨진 사명을 능히 감당하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제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인사를 전하고 있는 네 사람을 주목해보자. 우선 그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인사를 전한다. 그들 부부는 바울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헌신적인 동역자였다(16:4). 다음으로 바울은 오네시보로를 언급하고 있다. 오네시보로의 이름의 뜻은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특별히 디모데후서 116-18절은 오네시보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바울은 그를 마음을 다해 축복한다. “그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바울이 오네시보로를 이렇게 특별히 생각하는 이유는, 감옥에 갇혔을 때, 오네시보로는 수소문해서 그 먼 길을 찾아와 준 고마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에베소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한 신실한 일꾼이었다.

 

바울은 에라스도와 드로비모를 언급하고 있는데, 에라스도는 고린도에서 구제금을 모이며 주의 일에 헌신한 일꾼이고)19:22), 드로비모는 에베소 교회 출신으로서 에베소 교회의 구제금을 가지고 바울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동행했던 인물이다(고후 8:18). 드로비모와 예루살렘 성내에 있던 바울은 드로비모를 데라고 성전에 들어와 성전을 더럽혔다는 오해를 받고 체포된다 (21:30). 바울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드로비모는 지금 병들어서 밀레도에서 요양 중이다.

 

바울 사도가 인생 말년에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은 성경과 사람들(동역자들)이었다. 그는 성경을 사랑했고, 동역사들을 사랑했다.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은 것이 인생을 돌아보는 사람들의 인지상정이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 곁에는 지금 무엇이 있는가? 사랑, 아니면 다른 것?

 

개인적으로, 세화교회 공식 취임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목회하기 시작한 지, 20개월이 되었다. 오늘 나는 나름대로 언약을 갱신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한다. 일년, 또는 20개월을 돌아보며 감사한 것이 참 많다. 우선,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내 곁에 놓아주신 사랑이다. 또한 내가 하나님께서 여러분 곁에 놓아주신 사랑이길 소망한다.

 

앞으로, 그리고 인생을 돌아볼 때, 서로가 서로에게 늘 함께 하고픈, 디모데, 마가, 누가, 브리스가와 아굴라, 오네시보로, 에라스도, 드로비모가 되기를 소망한다. 바울 사도가 이러한 동역자를 곁에 둔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행복해 했던 것처럼, 나도 여러분이 내 곁에 있어서 행복하다. 우리 함께 힘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이 시대에 크게 쓰임 받는 세화 공동체를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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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4. 10. 04:33

두려움, , 평강

(요한복음 20:19-23)

 

4개의 복음서는 모두 빈무덤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전하는 방식이나 시각이 약간씩 다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그 사건을 전하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다른 것과 같다. 다만, 복음서 저자들이 전하는 것은 빈무덤이다.

 

빈무덤사건에 대해 전하는 방식은 복음서마다 다르지만, 빈무덤 사건이 불러온 제자들의 반응은 같다. 두려움과 의심이다. 본문은 빈무덤 사건이 발생한 날 저녁 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을 닫고 숨어 있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이유는 그들도 자기의 스승처럼 잡혀가 죽임을 당할까봐서이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대인 당국자들에게 오해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다. 같은 빈무던 사건을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보면, 빈무덤 사건에 대한 유대인 당국자들의 음모가 등장한다.

 

유대인 당국자들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가 생전에 했던 말,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했던 말을 전하며 사흘동안 예수의 무덤에 경비병을 세워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무덤 앞에 경비병을 세워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빈무덤 사건이 발생하자, 그들은 경비병을 매수하여 이런 증언을 하게 한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대인 당국자들이 꾸민 음모의 주범으로 지목된 제자들은 유대인 당국자들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인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음모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거나 죽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처한 두려움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으나 실제적인 고통을 가져온다. 두려움이 주는 가장 큰 고통은 본문에서도 표현하고 있듯이, ‘문을 닫게 만든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조심하게 만드는 순기능도 있지만, 두려움이 깊어지면 무엇보다 삶은 그 자체로 문을 닫아 버리고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두려움은 가던 길을 멈추게 만들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든다. 두려움은 생명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창살 없는 감옥과 같다.

 

성경은 두려움과 맞서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생명을 꽃피운 이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와는 반대로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을 닫아버리고 그 안에 갇혀 허무하게 생명을 허비하고 마감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이다. (11:27-32)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원래 갈대아 우르에 살았다. 그곳에서 그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그 중에서 하란은 일찍 결혼하여 룻을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데라의 아들이자 아브라함의 형제인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부모님과 형제들보다 먼저 죽는다. 자식을 잃은 아픔을 당한 데라는 남은 자녀들과 손자 룻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고자 한다.

 

그런데, 데라는 무슨 일인지, 가나안 땅으로 가던 중, 중간에서 멈추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곳에 정착해 죽을 때까지 그곳에 산다. 그곳의 이름은 하란이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하란 땅에 정착하여 인생의 문을 닫고 그곳에서 살다 죽은 일에 대하여 여호수아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24:2).

 

그렇다. 데라는 자식을 잃은 두려움, 그리고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인생의 문을 닫고 우상의 쾌락에 빠졌던 것이다. 이처럼 두려움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생명의 꽃을 피우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인생의 문을 닫아버리게 만든다.

 

제자들에게도 두려움이 닥쳤고, 그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문을 닫고 있었다. 그런데, 두려움에 떨고 있던,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두려움은 평강을 잃은 상태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이 잃은 것을 되찾아 주시고자 한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린다. 평강이 없다. 그래서 표정이 어둡고, 행동이 거칠고, 말에 독이 묻어 있다. 우리는 문을 닫고 산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서기 쉽지 않은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처럼, 내면의 발전도, 관계의 발전도, 신앙의 발전도 이루지 못하며 산다. 생명은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하고 답답하게 갇혀 그 자리를 맴돌다 철 지난 꽃처럼 시들고 만다. 인생의 허무함과 공허함만 묻어날 뿔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생명을 가두고 있는 두려움을 깨부수고 문을 열 수 있을까? 본문에 의하면, 문을 닫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들에게 을 불어 넣어 주신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실제적인 일이다. 두려움이 닥치면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일단 숨이 잘 안 쉬어 진다. 두려움에 처한 사람의 숨소리와 평강 가운데 있는 사람의 숨소리는 다르다. 건강한 사람의 숨소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숨소리는 다르다.

 

무엇인가에 놀란 사람을 안정시킬 때 가장 먼저 하는 게 무엇인가? 숨을 고르게 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치면 숨을 정상적으로 쉬지 못하기 때문에 신체는 자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셧다운시킨다. 그것이 기절이다. 기절은 무의식으로 들어가 신체가 원래 지니고 있는 정상적인 숨의 운동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의 보호장치이다.

 

두려움에 갇혀 문을 닫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1, 22).

 

두려움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동안 제자들을 모으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훈련시키신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기위해서였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두려움에 갇혀 문을 닫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 두려움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다.

 

성경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하나님 나라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처럼 두려움에 갇혀 하란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란(두려움)을 박차고 나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모세도 처음에는 자신이 행한 일 때문에 죽을까봐 두려워 광야로 도망쳐서 그곳에서 문을 닫고 살았지만,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애굽으로 가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여호수아도 모세의 뒤를 이어 영도자가 되었을 때, 가나안 전쟁을 앞두고 두려웠지만,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을 깨고 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에게 땅을 분배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두려움은 문을 닫고 아무 일도 못하게 하지만, 두려움을 물리쳤을 때, 우리는 문을 열고 나가 큰 권능으로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주시며 두려움을 물리치도록 이끄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세를 보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3). 두려움을 깨뜨리는 숨을 쉰다는 것,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그대로 행할 수 있는 권능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이겨내는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기도의 자리에서 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몸소 가르쳐 주셨다. 예루살렘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을 걸으셨다. 십자가의 죽음 앞두고 예수님에게 닥쳐 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이 닥쳐왔을 때 예수님이 행한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

 

우리는 기도를 오해한다. 기도는 단순한 경건생활이거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리고 무엇인가를 응답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어떠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큰 능력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기도는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기도이고,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경건생활을 위하여, 원하는 것을 아뢰기 위하여, 무엇인가 응답받기 위하여, 또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작두 타는 사람들이 오히려 기도를 통하여 더 큰 능력을 받는다.)

 

기도는 (루아흐, 성령, 생명의 영)’을 받는 자리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재능(gift)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권능을 받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재능이 없거나 권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다.

 

아주 조그마한 예를 들자면, 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이유는 언어에 대한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다. 영어(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망신당할 까봐에 대한 두려움 등 때문이다. 이 외에, 크고 작은 일이든 우리가 선뜻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능력이 없거나, 권능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무엇인가를 하지 못한다.

 

13년 살던 조지아를 떠나야 한다는 내적인 소명이 왔을 때 가장 먼저 나를 괴롭힌 것은 재정 문제가 아니다. 돈은 어차피 없는 인생이라, 그러한 것은 별로 신경 쓰고 살지 않는다(그 문제에 무책임하거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두려움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두려움,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생활해야할 지에 대한 두려움, 모든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런데, 그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때문인데, 그 숨은 기도의 자리에서 받았다. 30대 초반에 이민교회를 개척해서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교회를 세워 나가며 한 가지 깊이 깨닫은 진리는 기도에 대한 것인데, 기도는 두려움을 물리치는 을 쉬게 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 숨은 다른 숨이 아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숨이고, 그 숨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불어넣어주신 생기, 생명의 숨이고, 그 숨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다. 그 숨은 담대함이다.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고 꼭꼭 숨어 있어,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사명을 전혀 감당하고 있지 못하던 제자들이 을 쉬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라.

베드로가 열한 사도들과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창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2:14-21).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있는가! 그것 때문에 문을 닫고 있는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을 받으라. 그 숨은 여러분을 멈추어 서게 만든 두려움을 물리쳐 줄 것이고, 묻을 열고 나와 하나님의 주신 재능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능으로 크고 위대한 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어 보자. 그 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겨내고 평강을 줄 것이다. 그 숨이 우리의 생명인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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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31. 14:27

가상칠언

(마가복음 15:34)

 

첫째 말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3:34).

둘째 말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3:43).

셋째 말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19:26-27).

넷째 말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번역하면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27:46; 15:34; 22:1).

다섯째 말씀: “내가 목마르다”(19:28).

여섯째 말씀: “다 이루었다”(19:30).

일곱째 말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23:46).

 

예수님은 제 삼시(오전 9, 성경의 시간 계산은 플러스 6을 하면 된다.)에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고통 당하시다, 제 구시(오후 3)에 운명하셨다.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는 유대인의 시간 계산을 적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헬라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시간 계산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냥 사건만 기록할 뿐이다.

 

흔히 말하는 가상칠언(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셨다는 일곱 가지의 말)4복음서에 흩어져 있는 말을 모아서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떠한 순서로 그런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하셨는지, 정확한 순서는 아무도 모른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같은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네번째 말씀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나니를 십자가 위에서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시편 22편의 말씀에서 따온 말로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구약의 예언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의 성취다.


누가복음은 가상칠언 중 세 개의 말씀이 나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3:34)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23:43), 그리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23:46)이다. 순서로는 첫째 말씀과 둘째 말씀,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십자가 상의 말씀은 매우 따뜻하다. 원래, 누가복음은 시선이 따뜻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누가복음을 좋아한다. 누가복음의 십자가 상의 말씀에는 용서와 사랑이 깊이 베어 있다. 우리가 알지못해서 잘못을 저지르는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한 것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시는 예수님의 시선이 너무 감사하다. 그러한 시선은 정말 닮고 싶은 시선이다.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것도 너무 감동적이다. 또한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그 신뢰도 강한 인상을 준다.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예수님처럼 마음이 따뜻하고 넓어질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에도 누가복음처럼 가상칠언 중 세 개의 말씀이 나온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19:26-27)와 “내가 목마르다”(19:28), 그리고 “다 이루었다”(19:30)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십자가 상의 말씀은 매우 인간적이다. 제자에게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는 말씀, 그리고 목 마르다고 하시는 말씀, 모든 게 다 끝났다고 하시는 말씀, 이 모든 것이 매우 인간적이다.

 

요한복음이 이렇게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요한복음은 헬라철학과 영지주의와 대결하는 복음서이다. 요한복음은 헬라철학의 개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고, 영지주의의 도전에 맞서고 있다. 특별히 영지주의는 예수님의 실제 죽음과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는데, 요한복음은 그것에 맞서 예수님의 실제 죽음과 육신의 부활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 굉장히 중요한 믿음이다.

 

가상칠언은 각자 복음서의 관심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다. 가상칠언에 담긴 의미만 잘 파악해도, 복음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가상칠언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는지를 알수 있다. 가상칠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최고의 두 계명,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고난주간, 특별히 성금요일에 가상칠언을 묵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두 가지의 계명,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이 우리 안에서 더욱더 활짝 피어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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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30. 12:37

새언약: 에클라센과 엑케오

(마가복음 14:22-25)

 

우리는 종종 농담으로 이런 질문을 주고 받는다. “만약 마지막 식사를 하게 된다면 무엇을 먹고 싶은가?” 참으로 낭만적인 대화다. 실제로는 우리가 언제 마지막 식사를 하게 될지도 모를 뿐더러, 마지막 식사는 우리의 바람처럼 우리가 먹고 싶은 것을 먹게 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먹고 싶은 것 많이 먹으면서 사는 게 좋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라기보다는 신학적 만찬이라고 해야 옳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율법을 토대로 한 언약을 체결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한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셨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명절인데, 유대인들은 그날 온 가족이 모여 유월절 만찬을 먹으면서 그날 어떻게 하나님의 그들을 구원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월절 만찬과 출애굽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토대였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특수한 역사의식을 가졌다.

 

유월절 만찬에서 유대인들은 세 가지의 음식을 먹었다. 누룩 없는 빵, 양고기, 그리고 쓴 나물이 그것이다. 유월절 만찬에서 가장은 포도주 잔을 들고 4번에 걸쳐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들이 출애굽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교를 한다. 그렇게 그들의 신앙은 세대와 세대에 걸쳐 전수되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특별한 날,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요즘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유산을 많이 잃어버렸다. 유대교 회당에는 친교실이 없다고 한다. 밥은 집에 가서 가족들과 먹으며, 가정에서부터 신앙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한국교회나 이민교회는 특수한 상황이 있어 교회에서 함께 식사하며 친교를 나누지만, 가정에서 식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실행하는 신앙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만찬은 새언약을 제정한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세워질 새로운 언약에 대하여 유월절 만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설명하신다.

 

우선, 22절의 말씀 중,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에서 떼어라는 말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떼어는 헬라어 에클라센을 번역한 것이다. ‘에클라센깨다, 부수다, 조각으로 부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채찍질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창에 찔리시는 몸을 가리킨다. 이 고난은 언약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24절의 이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흘리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엑케오의 원뜻은 쏟아내다, 부어주다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로 번역된 휘페르 폴론많은 사람 위에로 번역 가능하다. 이 원뜻을 살려 위의 말씀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이것은 많은 사람 위에 쏟아 부어 주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구약에서 말하는 구원은 법()적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 백성이 된 것은 언약(covenant)’ 때문이다.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법이다. 그 법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되어, 구원 받게 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미국에서 불법체류자들이 고통 받는 이유는 그들이 미국의 법 테두리 안에 들어오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불법체류자들을 영어로 ‘undocumented immigrants (서류가 미비된 이민자)’라고 한다. 여기서 서류는 법적인 서류를 말한다. 구원은 매우 법적인 용어이다.

 

신약의 대표적인 복음인 사도 바울의 로마서 또한 법적인 용어를 이용하여 구원을 설명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가장 중요한 용어는 칭의(Justification)’이다. 이것은 법적인 용어이다. ‘칭의란 의롭지 못한데, 의롭다고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을 말한다. 불법체류자로 예를 들면, 그들이 서류를 제대로 구비하지 못했는데, 구비가 됐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면서, 새언약을 체결하신다. 그의 살과 그의 피가 새언약의 법전이다. ‘새언약즉 예수 그리스도의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옛언약인 율법과 새언약인 그리스도의 법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증한다. 바울의 요점은 이것이다. 율법은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낸다. 그래서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만든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다.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법은 사람을 죄인 만들지 않고, 의인을 만든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칭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8:1-4).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칭의로 구원 받는다. 우리는 이것을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다’(2:8)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살과 피로 맺은 새언약은 옛언약과 비교해 하나님의 급진적인 은혜와 긍휼(자비, 사랑)(Radical Grace and Mercy(Love))을 보여준다. ‘은혜는 햇볕과 같은 것이다. 죄인이나 의인이나 동시에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공공재를 말한다. 은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때로는 의인처럼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없는 죄인의 자리에 설 때가 많다. 만약, 우리가 의인이었을 때 누리던 하나님의 돌보심을 죄인이 되었을 때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은혜는 그런 것이다.

 

긍휼(자비,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을 말한다. 일반적인 관심이 친절함과 애정은 다르다. 우리는 살면서 애정을 갖게 되는 상대를 만나기 쉽지 않다. 우리가 결혼하게 되는 이유는 애정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애정을 갖게 되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일들을 하게 된다. 거의 100세를 사신 김형석 교수가 어느 방송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람이 평생 젊을 때 서로에게 갖던 애정을 가지고 살지 못한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배우자에게 애정은 사라지고 인간으로서 동포애를 갖게 된다고 한다. 그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우리를 영원히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긍휼(Mercy)라고 한다. 처음에 애정을 가질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거나,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애정이 사라진다. 흔히 우리는 그것을 정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정 떨어진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끝까지 책임지신다. 이것을 사도 바울의 법적인 용어로 옮기면, ‘칭의라고 하는 것이다. ‘의인이 아니지만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 이것이 애정이다. (내 자식이 죄를 지었는데, 남들은 다 손가락질해도, 부모는 내 자식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새언약을 제정하시고, 그 새언약을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살과 피로 이루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살이 찢겼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쏟아 부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새로운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그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구원 받았다라고 하는 것이고, 그 법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에게 효력이 발생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공동체로서 나누는 성만찬은 새언약의 갱신이다. 우리는 성만찬을 나누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새롭게 세우신 새언약을 생각한다. 그 언약은 에클라센(살이 찢기고)과 엑케오(피를 쏟아 부으신)’의 행위를 통해서 세워진 값비싼 것이다.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유월절 식사를 하며, 출애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목요일(유월절 만찬 나누던 때)에 성목요일 만찬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위에서 찢기신 살과 쏟으신 피의 의미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리를 가지면 좋겠다. 더 나아가, 매 식사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올리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언약을 세우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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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30. 05:25

죽음은 생명이다

(마가복음 14:1-11)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죽음은 인류 최후의 원수이다. 인류는 죽음이라는 실존과 함께 살아 왔고, 살아가야 한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죽음에 대한 대항 또는 저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나,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르는 것이 죽음이다.

 

종교는 죽음에 질문을 통해서 탄생했다. 그러므로, 어느 고등 종교이든지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답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그리고, 신은 죽음을 경험하는 인간과는 달리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의 신 이해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우리가 증거하다시피,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서 발생한 종파도 있다. 대표적인 종파가 영지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가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더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그러한 도전과 난점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발전된 교리가 삼위일체교리이다. 삼위일체교리는 신의 죽음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다. 삼위일체교리로 인해, 기독교는 신이 죽었다는 것신이 살아 있다는 두 가지의 주장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 이야기에는 온통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예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까 음모를 꾸몄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이름 모를 여인의 행동에도 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것이었고,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가룟 유다도 죽음의 음모에 동참하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모두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다. 이 말에 빗대서 죽음을 설명해 본다면, ‘죽는다는 본질은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이해는 저 마다 다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는 크게 네 사람이 등장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향유를 부은 여인, 가룟 유다, 그리고 예수님이다. 우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죽음은 어떠한 의미일까?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이 그러한 음모를 꾸민 이유는 예수가 자신들의 삶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자기 자신의 지위를 지키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죽음은 그냥 도구일 뿐이다. 이런 자들에게 죽음은 폭력의 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들에 의하면, 죽음은 폭력에 불과하다. 죽음에 대한 최고의 저급한 이해이다.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여인은 값비싼 나드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다. ‘나드는 인도산 최상품 발향성 기름이다. 매우 값비싼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머리에 나드를 부은 이유는 예수님의 설명대로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이다. 그녀에게 죽음은 매우 신성한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값진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신성한 것이다.

 

이것은 보통 인간들이 죽음에 대하여 갖는 마음이다. 죽음에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성함이 들어 있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에는 트로이 전쟁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22권에 보면,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이 나온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아들의 시체를 내어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은 장례를 지내는 동안 전쟁을 멈추기로 협의한다. 그들이 전쟁을 멈춘 이유는 그것이 죽음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을 숙연하게 한다. 넘어설 수 없는 신성함이 죽음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에게 죽음은 다른 의미를 지녔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의 음모에 가담하여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주려 한다. 가룟 유다가 음모에 가담한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같아서가 아니다. 가룟 유다는 젤롯당원이었다. 젤롯당은 무력을 통해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민족을 구원하길 바랐다. 가룟 유다가 희망한 메시아 상은 예수가 스스로 드러낸 메시아 상과 달랐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죽음에 몰아 넣음으로 예수가 자신들의 원하는 메시아 상의 모습을 보이기 바랐다. , 가룟 유다에게 죽음은 어떠한 일을 추진하기 위한 동기(Motive)로 작용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도 사람들이 보통 갖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무슨 일을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또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큰 동기를 불어 넣어 준다. 대개 인류 역사에서 큰 업적을 이루어 낸 위인들은 죽음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넘어섰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그 죽음과 같은 열악한 신체 조건을 넘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곡들을 작곡했고, 모차르트는 생활고에 시달려 굶어 죽지 않으려고 열심히 악보를 썼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음악을 낭만적으로 듣고 있지만, 그들이 지어낸 음악은 낭만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죽음은 어떠한 의미였을까?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왜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시고, 고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 그게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불가사의 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그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이 삶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이해를 가지고 살아간 것을 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고난과 죽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우리에게 건네 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아니 그야말로 새창조의 사역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기 전까지, 제자들이 죽음에 대하여 보인 반응은 일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죽음을 무서워했고, 그들은 죽음을 이용했고, 그들은 죽음을 신성시했다. 그래서 그들은 도망쳤고, 그들은 배반했고, 그들은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을 때, 그들은 죽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죽음은 단순히 인간의 삶과 분리된 부정의 영역, 즉 하나님의 통치 바깥에 있는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영역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위에서 말했듯이,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과 죽음은 상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자리를 피해서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의 한 가운데서 그 죽음을 당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말은 죽음 또한 하나님에게 속한 생명의 활동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은 여느 사람이 비방하듯 자살행위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가장 부정적인 것(죽음)을 가장 긍정적인 것(생명)으로 새롭게 창조한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 이후,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죽기 때문에 부정으로 떨어지지 않고 긍정으로 승화되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여 숨어 있지 않았다. 죽음을 불의하게 이용하지도 않았고, 죽음 때문에 배반하지도 않았으며, 죽음을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여 멀리서 바라보지도 않았다. 사도행전은 부활 이후에 그들이 어떻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꼭꼭 숨어 있던 제자들은 광장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2:14). 제 삼시는 오전 9시다. 이 시간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생계를 위하여 부지런히 움직일 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에게는 죽음도 생명이다.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을 더럽게 이용하지도 않을 뿐더러, 죽음을 두려워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새창조에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죽음으로 불리지 않고 생명으로 불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참 자유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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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