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총행복(Gross Church Happiness)
(요한계시록 2:1-7)
어느 신문 기사 보도에 따르면, 세계 500대 기업의 평균수명은 40~50세 정도이고, 미국의 경우 매년 50만개의 기업이 탄생하나 10년 후에는 그중 4%만 살아남는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10년 후 기업생존률이 18.3%라고 한다. 대한상공회의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코스피 상장기업 686개의 평균수명은 약 32.9세로, 하나의 기업이 탄생해서 생존하는 기간이 약 33년이라고 한다.
기업 생존율 상황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SK 최태원 회장이 말한 것에 따르면,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서든데스(sudden death·돌연사)할 수 있다”고 하며, 기업수명이 15년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일반 기업들에게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한 목회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개척된 교회가 생존할 확률은 10% 미만이고, 아무런 지원 없이 개척된 교회의 생존률은 0.4%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도 기업과 마찬가지로 평균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고, 갑자기 사라지는 교회가 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창립 20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요한계시록 2, 3장에는 소아시아의 7개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 우리는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말씀을 읽었다. 이들 교회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현실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교회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이 목숨을 바쳐 세웠던,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교회들 중, 현재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교회는 없다.
그렇다고 ‘교회’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신비롭게도 교회는 생명체와 같아서 한 교회의 수명이 다해서 없어질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또 생겨나며 여전히 살아 숨쉰다. 한 사람의 생명은 일정 기간 존재하다가 사라지지만, 생명 활동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개체 교회는 일정 기간 존재했다 사라지지만, 교회를 존재케 하는 성령의 활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의 외형이 아니라, 교회가 지닌 ‘스피릿’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느 나라가 잘 사는 나라인지 아닌지를 물을 때, GNP(Gross National Product)를 본다. 그 나라가 어떤 경제활동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유형의 생산을 했느냐를 따진다. 기업들을 평가할 때도, 그 기업이 가진 ‘지적재산, 기업문화, 브랜드 가치’ 등 외적인 것을 먼저 따진다. 교회를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교회의 유형자산(교회 건물, 교인 수, 재정)을 따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러한 것이 과연 나라와 기업과 교회의 온전한 평가 잣대인가?
이러한 의문을 가진 역사적 인물이 있었다. 부탄의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 왕이 그랬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부탄 왕국의 왕위에 오른 그는 인도순방을 하는 동안 인도 기자에게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 “부탄은 국내총생산(GNP)이 얼마입니까?” 이런 질문은 받은 부탄의 왕은 사람들이 왜 국가의 총생산에만 관심을 가지고, 국가의 총체적 행복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다. 그래서 그는 GNP가 아닌, GNH(Gross National Happiness) 지수를 말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부탄은 왕추크 왕의 국가총행복의 관심 덕분에 다른 나라가 이루지 못한 국민의 행복을 이룬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도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우리는 지금 교회를 교회답게 잘 세워 나가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교회를 세워 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목표를 잘 설정하는 게 중요하다.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이 아니라 ‘방향’이다.
산업혁명 이후 국가에서 GNP의 성장을 목표로 하여 국가를 경영했을 때 생긴 부작용이 너무도 현저하게 드러나 있다. GNP가 성장하여 국민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살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행복도는 현저하게 하락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GNP 성장과 맞물려 여러가지 물질적 혜택 속에서 교회의 외형적 성장이 있었으나, 요즘엔 교회가 사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듯하다. 이런 말이 있다. “가톨릭 교회는 성 때문에 망하고, 개신교회는 돈 때문에 망한다.”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것인가?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우리 교회가 GNP가 목표가 아니라, GCH(Gross Church Happiness)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총행복! 물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교회가 어느 정도 경제적 부흥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Poverty(가난)는 일종의 병 같아서 존재를 죽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너무 가난하면 생존하느라 아무 것도 못하는 불쌍사가 벌어진다. (그러니 전도 열심히 하자.)그러나 분명한 것은 Gross Church Product(교회총생산)에 방점을 두면 안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GCH(Gross Church Happiness)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과학기술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고 있다. 어느 책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저자는 예전에 교사는 ‘지식전달자’였으나, 이제는 ‘멘토, 코칭’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선생님을 통하지 않고도 배울 수 있는 길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You Tube와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나는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 중세시대 때, 성경(복음)의 전달자는 성직자가 독점하고 있었다. 라틴어로 된 성경만이 유통되었고, 라틴어로 예배를 드렸으며, 일반 신자들은 라틴어를 몰랐기 때문에 성직자가 해주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다. 성직자를 통하지 않으면 성경을 알 수 없었다. 성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했다.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성경에 대한 성직자의 독점을 깬 사건이다.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일반 신자들이 성경을 직접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었다. 엄청난 혁명이다. 그 이후, 성경은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성경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설교말씀은 자신이 속한 교회의 담임목사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담임목사(자신이 속한 교회의 목사)를 통하지 않고도, 설교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You Tube에 들어가 듣고 싶은 설교자의 설교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 물론, 나는 High Quality의 설교말씀을 제공하려고 노력하지만 내가 여러분을 향해 말씀을 독점할 수 있는 구조가 더 이상 아니다.
‘나는 목사님 설교만 들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실제로,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유명하시다는 분들의 설교를 듣고 있지 않은가. 들으시라. 괜찮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면, 들으시라. 다만, 부작용을 조심하시라. 담임목사의 설교가 아닌, 다른 분들의 설교는 우리 교회의 Context, 그리고 우리 삶의 Context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일례로, 강남이나 분당의 대형교회 목사님이 그 교인들을 상대로 하는 설교의 내용이 이민교회의 작은 교회를 다니는 우리들에게 오히려 어려움을 안겨 줄 수 있다.
더군다나, 그분들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의 말씀 듣기는 나의 신앙을 오히려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들은 여러분을 위해서 단 한 마디도 기도하는 분이 아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옳은 말을 해도, 여러분에게 젖을 물리지 않은 사람은 여러분의 엄마가 될 수 없다. 신앙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신앙은 생명의 깊이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 현장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니 다른 누군가의 설교를 들으실 때, 이러한 점을 조심하면서 들으시라. (얘기하다 보니,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 것 같다. 아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들으시라. 다만, 분별력을 갖고 들으시라 조언한 것이다.)
목사의 역할은 이제 ‘지식 전달자(교사)’를 넘어, 인격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교회 모든 구성원의 풍요로운 생명을 위한, 행복을 위한 멘토와 코치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목사는 소통과 화합의 징검다리이다.
한국 사람은 교육에 관심이 많다. 자신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고등교육을 받는 일에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한다. 그러나, 고등교육을 받는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고등교육을 받는 의미는 일자리를 찾아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한 일자리, 이 사회에 필요한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함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펙 쌓으러 유학 나온 사람들이 가장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목회자 세계에서도 보면) 스펙 쌓아서 기성교회(좋은교회) 들어가려고 한다. 스펙 쌓아서 세습하려고 한다. 나는 유학 나와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내가 공부하는 이유와 목적은 분명하다. 일자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필요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창출(세워나가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나는 목회학석사학위를 마치고, 33살에 과감하게 개척했다. (나는 내 젊음을 바쳐 이 현실 세계에 교회 하나를 세웠다. 너무 감사하고 뿌듯한 일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 내가 사도 바울이 된 것처럼 기쁘다.)
내가 2년전 이곳에 오기 전, 교회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어느 교회에도 원서를 넣지 않았다.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곳에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지금 와서 말이지만, 이곳에 올 때, 내가 갈 수 있는 교회가 3군데 더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곳에 서 있다.) 교회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누군가는 내가 한 일에 대한 가치(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주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됐다’라는 말을 쓴다.)
나는 기존의 일자리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시대에, 이곳 Bay지역에 세우기 원하시는 교회를 창출(세워나가기)하기 위해서 왔다고 믿는다. 이것은 나만의 과제가 아니라, 우리 교회로 부름을 받은 우리 모두의 과제가 아니겠는가?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아느냐 보다, 아는 것을 얼마나 실행하는 ‘실행력’이다. 우리는 세상적으로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우리는 신앙적으로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공부를 하는 이유는 아는 것을 늘려 가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공부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을 차별하기 위함도 아니다. 성경공부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책을 심어주기 위함도 아니다. 성경공부를 더 하나, 안 하나,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우리는 이미 모두 주님의 자녀이고, 세화인이다. 우리가 함께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아는 것을 더 확실히 알아, 실행하기 위함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많은 칭찬을 받는다. 1) 실천과 수고와 인내가 다른 지역의 교회와는 구별된 헌신적인 교회였다. 2)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도덕적인 기준이 높았던 교회였다. 3) 자칭 사도라고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을 검증하고 검증되지 않은 자들을 퇴출했던 신학적인 교회였다. 4)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오래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진실하고 성실한 교회였다. 5) 육체의 악행을 조장한 니골라 분파에 동화되지 않은 경건한 교회였다. (한병수, <교회란 무엇인가, 에베소서 강해>, 20쪽)
다시 정리하면, 에베소 교회는 헌신적인 교회, 도덕적 기준이 높았던 교회, 신학적인 교회, 성실한 교회, 경건한 교회였다. 정말 멋진 교회다. 이런 교회를 지금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주님께 이러한 책망을 받는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
나는 이러한 에베소 교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헌신적인 교회, 도덕적 기준이 높았던 교회, 신학적인 교회, 성실한 교회, 경건한 교회인데, 막상 그러한 교회를 세워 나가면서 그들에게는 행복이 없었던 것 아닌가. 왜냐하면,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장 핵심적인, 목표 그 자체인, ‘사랑’이 그 교회에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사랑하면 성장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세상의 지식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성장시킨다. 그러므로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우리도 에베소 교회처럼 헌신적인 교회, 도덕적 기준이 높은 교회, 신학적인 교회, 성실한 교회, 경건한 교회를 세워 나가면 좋겠다. 그러나, 아무리, 헌신과 도덕과 신학과 성실과 경건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교회가 된다. 교회총행복의 알파와 오메가는 사랑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를 세워 나감에 있어, 어떠한 순간이든, 사랑을 선택해야 한다.
창립 20주년 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싶다. I am not here to preach you. I am not here to teach you. I am not here to heal you. But, I am here to love you. 물론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치유는 목회자의 고유한 영역임으로 게을리 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보다, 더 어려운 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일을 위해 쓰임 받고 싶다. 그 일은 바로, 사랑하는 일이다.
이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시키기 위해 우리를 교회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부르신다. 나는 사랑이 교회총행복이라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만남이 거듭될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러한 고백이 우리 입술에서 터져 나와야 한다고 믿는다. “형제님, 자매님,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일에 실패한 교회는 에베소 교회처럼 책망을 받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기쁨이 충만한 교회는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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