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 (일치/하나됨)
(요한복음 17:20-26)
부활절기 마지막 주일이다. 교회력에 따라, 우리는 부활절기를 마치며, 승천일을 지나 성령강림절로 들어선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고별기도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시며 이 기도를 통해 제자들을 축복하셨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특별한 이야기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0절). 예수님은 자신의 고별기도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밝히신다. 고별기도는 지금 현재 직접 고별기도를 듣고 있는 제자들 뿐 아니라, ‘미래의 제자들’을 향한 기도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제자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을 직접 만나 교제하며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어 제자가 된 사람들(보통 사도라 부른다)이 있고, 둘째,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예수는 그리스도다!)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나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나 동일하게 생각하신다.
이것은 제자됨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기도이자 말씀이다.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제자의 말을 통해 제자를 삼는 것’이 기독교 전도의 방식이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나는 제자인가? 나는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고, 나의 말을 통하여 누군가를 제자삼고 있는가?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제자됨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말 한 마디, 그리고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게 된다. 주님은 ‘나(우리)’를 제자 삼으시고, 주님은 ‘나(우리)’를 통하여 또다른 제자를 탄생케 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기독교의 선교, 하나님 나라의 전파는 바로 ‘나(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지는 기도는 제자들의 하나 됨에 대한 기도이다. 여기서 제자들이란 처음 제자들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 제자 될 이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점에서, 현재의 제자들과 미래의 제자들의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하나 됨은 동시대의 제자들의 하나 됨 또한 말하는 것이다. 동시대의 제자들의 하나 됨이 없으면, 다음 세대의 제자들과의 하나 됨도 묘연해진다.
요한복음은 ‘헨’이라는 헬라어를 써서, 예수님의 ‘하나 됨(일치)’의 기도를 펼쳐 보인다. 유대인 공동체인 에센 파의 쿰란 문헌에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야하드’라는 히브리어를 단어를 써서 표현한다. 여기서 히브리어 ‘야하드’는 헬라어의 ‘헨’이다. 우리 나라 말로는 ‘일치/하나됨’을 뜻한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공동체는 자신들 자체를 ‘헨’, 즉 ‘일치/하나됨’의 공동체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Church)’라는 말에는 근본적으로 ‘일치/하나됨’의 뜻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21절에서 23절까지 이어지는 제자들의 ‘헨(일치/하나님)’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3개의 기도 내용으로 구성된다. 예수님은 1) 제자들과 다음 세대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고, 2)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도록 기도하며, 3)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 받은 분임을 세상이 믿도록 기도하신다. (생명의 삶 플러스/2015년 3월호, 82쪽). 즉, 1)과 2)를 통해 3)이 이루어지는 구조의 기도이다.
제자들이 하나 되어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이 복음의 논리를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헨(일치/하나됨)’이 왜 중요한가? 왜 우리는 ‘하나됨’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하는가? 우리가 일치할 때, 우리가 하나 될 때, 복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복음이란 ‘예수가 그리스도다!’, 즉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다!’는 메시지의 전파이다. 이것이 우리의 선포(말씀)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의 ‘헨(일치/하나됨’을 통하여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다’라는 선포를 믿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우리처럼 제자가 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작용하겠지만, 무엇보다,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보면, 우리가 제자로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동시에, 우리가 제자로서 일치, 하나됨을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회사를 공부해보면, 교회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이기도 하다. 교회는 세포 활동이 왕성한 젊은이처럼, 엄청난 분열을 해왔고, 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계속하여 최선을 다해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교단과 교단 간의 일치, 교회와 교회 간의 일치, 그리고 무엇보다, 한 교회 안에 있는 교회 구성원들(제자들) 간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헨(일치/하나됨)’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보통 우리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 의견이 좀 다르더라도 상호 존중하고 인정하는 모습, 아니면, 함께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 또는 어떤 통일 기구를 만드는 것 정도를 생각한다. 그러한 것도 일치/하나됨을 위한 방안일 수 있으나, 본문에서 말하는 일치/하나됨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매우 독특한 교리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우리의 이성을 무력화시키는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신비이자, 우리 교회(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시는 매우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모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21절).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은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라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상태를 ‘교제(코이노니아)’라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교제 한다는 것,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알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교제’란 ‘알아가는 것’을 말한다.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하지 못하면 인정하지 못한다.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무관심한가? 서로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얼마나 교제가 없는가? 자기 자신을 내보이려 하지 않고, 다른 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서로를 잘 모르니,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제자라면, 무엇이 두려워 교제 나누는 것을 피하는가? 제자는 교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교제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요즘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두려움이 팽배하다. 서로 알아가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가 너무도 부족하다. 두려움 때문이다. 감출 것이 많아서 그런 것인가?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의 아름다운 교제가 나온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3-47).
제자들은 아무 것도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들의 재산까지도 감추지 않았다. 모두 내어 놓고, 나누었다. 서로를 깊이 아니까, 사랑하게 되고, 서로를 인정하게 되니, 자기의 것(개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삶의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하나님 안에서 공적인 삶을 살았다. 이렇게 일치와 하나됨을 이루었더니, 오늘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그를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요즘, 기독교는 위기에 처해있다. 많은 이들이 ‘교회가 죽어간다’고 안타까워 한다. 왜 현대의 교회는 죽어갈까? 한 마디로 ‘헨(일치/하나됨)’이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몸소 보여주신 ‘교제’가 우리 안에 없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만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려져 혼이 떠나니 …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행 5:1-5). 이후에, 아나니아의 죽음과 같은 죽음이 아내 삽비라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감춘다’는 것은 그 안에 교제가 없다는 뜻이다. 감춘다는 것은 일치와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거기에 ‘죽음’ 밖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감춘다는 것, 일치와 하나됨이 없다는 것, 교제가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뜻이다. 죽음 밖에 없다는 뜻이다. 서로를 알아가지 않으니,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니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다 보니, 거기에는 생명이 없고 죽음만 남게 된다.
우리는 제자인가? 어떠한 제자인가? 말씀 선포와 하나됨을 통해 생명을 이 세상에 가져오는 제자인가? 아니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교제를 벗어난 ‘감춤’을 통해 생명을 잃어버리고 죽음을 가져오는 세속적인 사람인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어머니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신 ‘헨(일치/하나됨)’의 기도를 마음 깊이 새겨듣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한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계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슨 수로 우리가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세상이 알도록 전하겠는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일치할 때, 우리가 하나 될 때,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알아갈 때, 서로 사랑할 때, 서로 인정할 때,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신 것’처럼 우리가 그러한 ‘교제’ 안에 있을 때,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우리는 제자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두려워서 서로를 감추는가? 그럴 필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서로 더 깊이 알아가자. 서로 더 깊이 사랑하자. 서로 더 깊이 인정하자. 그것 자체가 ‘교회'이다. 그런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된 일이요, 우리에게 또한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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