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6. 24. 14:49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정체성

(로마서 6:3-4)

 

지난 시간 세례란 무엇인가?’를 통해 세례의 의미를 짚어 보았다. 우리는 세례를 매우 가볍게, 또는 이기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냥 교회의 멤버십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를 뜻하거나, 또는 세례를 통하여 내 죄가 씻김을 받고 구원 받았다는 것에 대한 징표로 생각한다. (나 세례 받은 사람이야! 1) 나 이 교회에 멤버십을 가지고 있어! 2) 나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사람이야!)

 

물론 세례는 그러한 의미도 있다. 그러나, 세례가 갖는 궁극적 의미는 나는 이제 예수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례를 생각할 때, ‘휘말리다(being swamped)’라는 동사를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사건에 휘말린다는 것은 그 사건과 더불어 내 인생의 살고 죽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무엇이든지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면재미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드라마를 볼 때도 거기에 휘말리지 않으면 그 드라마의 재미와 의미를 온전히 체득할 수 없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드라마에 휘말리기 위해서(몰입하기 위해서)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놓고 드라마 시청을 한다. (애 있는 집은 애들 재워 놓고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드라마를 시청하며 몰입한다. / 주부는 애들 학교 보내 놓고, 남편 출근시켜 놓고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드라마에 몰입하여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하물며, 예수 사건에 휘말리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례를 통하여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union/united)’하게 되는 신비를 이야기한다. 세례는 단순히 멤버십 획득과 구원 획득의 징표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연루되고 휘말리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한 이러한 신비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세례를 통하여 내가 이제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신앙 생활을 하는 것만큼 밋밋한 신앙생활도 없다. 그러나, 예수 사건에 한 번 제대로 휘말리고 나면 예수 사건에 휘말려 살아가는 것보다 흥미진진한 삶이 이 세상에 없으며, 그보다 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없다 것을 알게 된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것이 어떠한 삶인지 밭에 감추인 보화를 통해 알려준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13:44).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이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 자로서, 예수처럼 산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그리스도인)은 예수가 했던 일을 그대로 하며, 자기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기독교 신학은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세 가지(삼중직)로 이야기해 왔다. 예언자, 제사장, 왕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언과 제사장직과 왕권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가?

 

우선 예언자의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구약성경에 나오는 네 개의 대선지서와 12개의 소선지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그리고 열왕기상하에 나오는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의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언이라는 것이 단순히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준다.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그렇게 피가 토하도록 외친 것은 한 마디로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선포는 한결같다. “너희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느냐? 하나님께서 너희를 무엇이 되라고 부르셨는지 모르느냐? 너희는 여기 온갖 불평등과 불의와 타락으로 가득한 네 사회 속에 평안히 앉아 있구나. 너희가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 정말 잊었느냐?”(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36).

 

그러므로, “예언자는 그가 속한 공동체가 부름 받은 본래의 모습이 되도록 늘 도전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다.” (로완 윌리엄스, 36)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예언자가 되어 주고 있는가? 예언은 비난이나 잔소리가 아니다. 예언은 서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도록 서로를 일으켜 세워주는 따뜻한 사랑이다. 예언은 우리를 기본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존재의 이유를 상기시킨다. 우리가 이 예언의 일을 게을리하면, 우리의 인생, 우리의 가정, 그리고 우리의 교회 공동체는 산으로 간다.

 

둘째로, 제사장의 역할을 보자. 이것은 루터의 만인사제직설과 함께 약간 오해를 받는 역할이다. 루터가 왜 만인사제직설을 주장했는지,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한 좀 더 깊은 논의는 최주훈 목사의 <루터의 재발견>이라는 책에 나오는 만인사제직과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이라는 글을 참고하면 좋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는 놓은 사람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손상된 관계를 희생제물을 통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한다.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은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산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손상된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복시킨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가장 잘 못하며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르는 일을 보면서 하나님을 멀리한다.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리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다리 놓는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그러신 것처럼 자기를 희생할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왕의 직분을 보자. ‘이라고 하는 개념은 많이 오염되어 있다. 사람들은 왕이 되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왕이 되면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왕에 대한 오해이다. 왕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자가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왕의 개념은 그런 게 아니다.

 

왕은 하나님이 가진 권세의 대리인이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왕이 선한 왕인지 악한 왕인지에 대한 판가름의 기준은 이것이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 직무를 잘 수행했는지 아닌지에 따라 왕의 선함과 악함이 판단을 받았다. 왕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대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다. 그러나, 참된 왕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한다.

 

왕은 하나님의 법(율법)이 사회에서 현실화되도록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법은 정의이다. 그러므로 왕은 그가 통치하는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가 현실화되도록 그 권세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가 왕권을 가진다는 것은 권세를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존재로 살 수 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왕의 소명은 하나님의 정의에 맞추어 우리의 삶과 인간 환경을 가꾸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고, 나아가 세상에 참여하며 그 안에서 맺는 우리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자유, 곧 은혜롭고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증언하는 일이다. (로완 윌리엄스, 40).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리게 된 사람들은 그 이전에 어떻게 살아왔던 상관 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하고 계시는 일에 휘말리게 된다. 그 일은 예언과 제사장직과 왕권에 관한 것이다. 1)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우리들은 예언의 일을 하며 산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를 외친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를 외친다. 서로를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제공해 주는 삶을 산다.

 

2)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한다. 우리는 다리를 놓은 사람들이다. 화해를 이루고 다리를 놓고 깨진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산다. 3)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 우리들은 왕권을 수행한다. , 하나님의 정의를 현실화하려고 노력한다. 정의와 자유를 추구하는 삶, 그 자유로 인간 사회의 삶을 하나님의 지혜와 질서와 정의가 반영된 곳으로 만들기 위해 힘을 합쳐 일 하는 삶을 산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우리가 마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인양, 예수 사건에 전혀 휘말리지 않은 사람인양, 예수 사건에 휘말린 적이 없는 양, 우리가 얼마나 무기력 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받았으나, 여전히 죄인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최선을 다해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알아서 최선을 다했는데 생각만큼 성과가 없거나, 또는 자기의 정체성을 잘못 사용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예언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예언자의 삶, 제사장의 삶, 왕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서로를 일으켜 세워 보자. 실패하는 게 죄인이 아니라, 실패했는데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게 죄인이다. 서로 주저 앉히지 말고, 서로 일으켜 세워주자.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자.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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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6. 10. 08:41

세례란 무엇인가?

(로마서 6:3-4)

 

성령강림주일이다. 이런 날, 이러한 시를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성령강림주일에 세례를 생각해 본다. 세례는 성령의 사역이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본격적인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의 신앙은 매우 형식적으로 메말라가고 있다.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가 사라진 것 같다. 성령이 임한 성령강림주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떠한 기대를 품고 예배에 나왔는가.

 

위에서 시인은 말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정현종 선생님의 말투가 그대로 담겨 있는 문장이다. 약간 익살스러운 선생님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어마어마라는 발음을 할 때의 특유한 말투가 떠오른다.) 정현종 시인의 시 중에 이라는 시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아주 짧은 시이다. 현대인들의 삶을 표현한 시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외따로이 외롭게 산다. 외롭다 보니, 사람에 대한 갈망이 마음에 간절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섬에 가는 게 쉽지 않다. 사람에게 다가서는 일이 어렵다. 무섭다. 감당하기 벅차 한다. 한 사람이 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어마어마한 일을 감당하느니, 그냥 외롭게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갈수록 외로움에 몸부림 친다. 인생의 딜레마다.

 

한 사람이 오는 게 어마어마한 이유는 그 사람이 올 때,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에, 한 사람이 우리에게 오면 그 사람의 인생의 일부분만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귐을 갖는다는 것,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를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고 버거운 일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닫아버리고, 섬처럼 산다. 그래서 외롭다. 대부분 이렇게 산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로운 방식을 일러준다. ‘바람의 마음을 흉내 낸다면,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바람의 마음이란 한 사람의 마음을 섬세하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이해하고, 그의 삶 속에 그야말로 바람처럼 스며드는 것을 말한다. 바람은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지만 우리의 온 존재를 어루만진다. 바람은 없는 듯이 우리의 존재 안에 존재한다. 바람은 채워지지 않는 것 같이 우리 안을 가득 채운다. 그런 바람의 마음을 우리가 지닐 수만 있다면, 한 사람과의 만남은 고통이 아니라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성령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성령의 강림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한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2:3). 그렇게 바람 같은 성령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에게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는 너무나 강력한 것이어서 주변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조롱까지도 당할 정도였다. 성령의 임재로 인한 사람들의 변화는 이처럼 강력한 임팩트를 가져왔다. 그것을 능력이라고 하는데,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 다이나마이트의 어원이다. , 능력은 강력한 폭발력이다. 한 형태를 완전히 부수고 다른 형태로 바꾸는 힘이다.

 

이것은 예수 사건에 적용해 보면, 성령의 강림,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로서 예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자신들에게 오는 그 어머어마한 일을 온 생명을 다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의 마음, 성령의 마음은 이렇게 온 마음과 온 생명을 다한 환대를 창조해 낸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외롭게 섬처럼 사는 이유와 세상을 바꾸는 능력(두나미스/다이나마이트)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관문인 세례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선 이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 교회를 다니다 세례를 받으라라 하니까, ‘세례라는 것을 받아야만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나보다, 또는 교회법을 보니, 세례를 받아야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일종의 교회 내의 프로모션이 가능하니까, 그래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멤버십의 획득또는 멤버십의 강화정도로 생각하며 세례를 받는다.

 

게다가 요즘에는 자기가 받은 세례에 대하여 갱신할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다. 교회마다 세례 받는 이가 드물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탄생하지 않고, 교인의 수평이동이 심하다. 마치, 아기의 탄생이 없는 시골 마을 같고, 귀농한 인구만 늘어나는 것과 같다. 아이가 태어날 때, 거기에는 생동감이 넘치고, 인생에 대한 환희와 생명에 대한 경외, 그리고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넘쳐나는 법이다. 세례 예식이 적어도 일년에 한 번(주로 부활절) 있어야 그 예식에 참여하여 세례 받는 이를 축하하면서 내가 받은 세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세례를 갱신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각 교회에서 이러한 풍경을 보기 힘들다. 우리 모든 교회의 과제이다.

 

세례란 무엇인가? 형식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세례란 몸을 물속에 잠그거나, 머리에 물을 붓거나, 머리 또는 몸에 물을 뿌리는 행위를 말한다. (침례교는 몸을 물속에 잠그는 방식을 고수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침례라는 용어 사용하기를 강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은 침례보다는 머리에 물을 붓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세례는 그러한 형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관련된 운명을 말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기를 구하는 제자들(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 지금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시는 중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으로 나아가시면서 그것을 세례라고 표현하신다. ,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면서 그것에 푹 잠기고’, 그것에 휘말리거나 빠져드는것처럼 말씀하신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삶과 연결된다. 세례는 단순히 교회의 멤버십을 갖기 위한 입단 의식이 아니라,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심연, 그리고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현실에 휘말린다(being swamped)”는 개념이다. (로완 윌리웜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24).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예수의 사건에 휘말리게 하는 것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을 패더디해서 세례를 표현하면 이런 것이 되겠다. 세례란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무엇인가에 휘말리는 인생 사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을 두고, 그만큼 거리를 두고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계층을 만들고, 담을 쌓고, 경계를 지어, 삶의 구역을 정비한다. 우리는 이것을 사유재산, 개인주의, 또는 프라이버시라는 말로 미화하기도 한다. 이렇게 살다보니, 현대인들/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바람의 마음을 갖는다면, 한 사람이 오는 어마어마한 일도 필경 환대가 될 수 있듯이, 성령을 받는다면,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세례가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다. 성령이 임재하기 전,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엉뚱한 것을 구하기도 했고, 예수를 배반하기도 했고, 예수의 죽음을 보고 도망치기도 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도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그 갈 길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갔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후,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일, 바로 거기에 생명이 있음을 깨닫고, 그들의 모든 인생을 예수 사건의 휘말림에 바쳤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 (받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예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이 함께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간다. 세례 받은 우리는 이제 예수로산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삶이다. 그 삶에 참생명과 영광이 있다. 이것을 믿는 자, 그들의 세례는 필경 예수 사건의 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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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6. 7. 07:11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

(사도행전 2:1-13)

 

매우 영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영적이라는 말은 역사의 심층적인 영역을 들여다보는 일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 너머에는 눈에 안 보이는 영역이 있는데, 거기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지를 알면,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살지 않게 된다.

 

종교는 표층적 종교가 있고, 심층적 종교가 있다. 표층적 종교는 기복신앙을 기본으로 해서 물질적/육체적 풍요를 갈망하는 선에서 머물지만, 심층적 종교는 그것을 넘어 역사의 심층적인 영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탐구한다. 흔히, 고등종교라 불리는 종교들은 심층적 종교이기 때문에 기복신앙을 넘어 진리를 추구한다. 기독교는 정말 놀라운 심층 종교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증언을 통해서 역사의 심층에서 어떠한 일을 행하고 계신 지 계시(revelation)’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시에 대한 반응은 둘로 나뉠 수 있다. 본문에서도 드러난다. 성령의 강림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놀라워하는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보고 조롱하는사람이 있다. 그 역사를 보고 놀라워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오죽하면, ‘예정(predestination)’이라는 용어를 써서, 그러한 현상을 설명하려 하겠는가.

 

하나님의 큰 일을 듣고, 또는 보고 놀라워하는반응을 보이는 자들에게 큰 복이 임할 것이다. ‘하나님의 큰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 하나님의 큰 일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큰 일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해서 매주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일을 일상에서 날마다 경험하는 사람의 예배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예배의 질은 같을 수 없다.

 

우리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의 큰 일을 경험하고 놀라워하는 마음으로, 찬양하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마음으로, 또 그러한 하나님의 큰 일이 우리의 삶 가운데 계속하여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모이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면 예배가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

 

오순절이 이르매에서 이르다는 말은 헬라어로 숨플레로오인데, 이는 꽉 차다의 뜻을 지닌다. 누가복음 55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를 굳게 결심하시고”(9:5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르시기로 결심한 이유를 적고 있다.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은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간다. 왜냐하면, ‘승천하실 기약이 차갔기 때문이다.

 

승천은 물리적인 뜻이 아니다. 슈퍼맨이 대기권을 뚫고 저 우주로 날아가는 것과 같은 상상을 하면 안 된다. ‘승천은 예수님이 하늘에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이러한 표상을 생각해 보면 쉽다. 이무기가 지상에서 천년의 세월을 보내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 이무기의 승천은 이런 뜻이다. ‘이무기가 이제 하늘에 받아들여졌다.’ 이무기가 땅에서 천년을 보내고 용이 되면 뭐하나? 하늘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용이 된 들, 헛고생인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하늘에 받아들여졌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이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매우 신학적인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기서 아들이라는 말도, 하나님과 그 본질(homo ousious/호모 우시우스)이 같다는 뜻이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생물학적 관계를 규정하는 말이 아니다. ‘승천의 신학적 의미를 잘못 알면, 기독교를 우스운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승천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중 첫 번째 사역이 바로 성령을 보내신 일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사역으로 성령강림의 일을 하셨을까?

 

이 일은 홀연히일어났다. 홀연히는 헬라어 아프노를 번역한 말인데, ‘갑자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성령 강림 사건은 제자들에 의해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주권적으로 행하신 역사임을 말하는 것이다. 제자가 되면, 제자가 행해야 할 일들에 대한 모든 준비를 제자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제자로서 사역을 해나갈 때, 우리는 아무런 걱정과 두려움이 필요 없다. 이것은 복음서 전반에 걸쳐 반복하여 전해지는 메시지 중 하나이다.


마태복음 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누가복음 12: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의 결과로 성령이 임했다. 여기서 임하다는 동사는 헬라어의 에카씨센인데, ‘앉히다’, ‘왕국을 주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내어드리게 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이들은 이제 성령의 통치를 받는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신학적으로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을 통한 성령의 통치는 창세기의 기사와 연결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6:3). 이 창세기의 말씀은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심판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근심은 깊어만 간다. 그래서 창세기의 말씀은 이어서 이런 기사를 전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5-6).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노아의 홍수 이야기이다. 인간의 죄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을 떠나게 만들었다. 죄가 가득한 인간의 마음에 거룩한 하나님의 영은 머물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니 인간은 육신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하고 겨우 살아야 120년을 사는 존재로 하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인간의 처참한 현실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승천하여 천상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를 다스리시게 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영을 다시 인간과 연합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성령이 임했다고 할 때, ‘에카씨센은 구약에서 주로 왕이나 하나님이 통치 보좌에 앉는 것을 나타내는데, 성령께서 각 사람 위에 좌정하셨다는 것은 이제 성령이 각 사람을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을 말한다. 인간의 죄 때문에 철회되었던 성령의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 것이다.

 

종말은 피조세계의 파멸이 아니라, 피조세계의 완성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심층에서 피조세계의 완성, 즉 구원을 이루어 가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 큰일을 지금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내고 계시다(revelation).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역사의 심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역사의 종말에 어떠한 위대한 일을 행하실 지 알려주고 계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종말의 선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종말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앞당겨서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세상에 소망을 전하신다. 종말의 때에 우리는 파멸당하는 것이 아니라, 잃었던 성령의 임재를 다시 얻게 되어 하나님의 영(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영원히 누리며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심층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미리 알고 그 영광을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신적 통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나타났던 현상은 언어의 상실이었다. 바벨탑 사건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죄로 인해 성령의 신적 통치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언어의 혼잡으로 인해 하나님의 큰일 말하는 것을 상실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옳은 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여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악한 일들만 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성령 강림 사건은 바벨탑 사건과 정반대의 사건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아 역사의 역전을 경험하고, 언어의 혼잡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상의 사역을 통해,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이 이루어졌다. 이 기이한 일에 마음을 열어 성령에게 자기의 보좌를 내어주는 이들은 놀라움과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겠지만,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에 여전히 마음을 닫는 자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어떠한 부류들처럼 제자들이 새술에 취했다고 오해하며 조롱할 것이다.

 

역사의 심층에서 벌어지는 이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그리스도의 통치/성령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 삶의 물질적/육체적 풍요만 바라며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세워나가느라 힘들고 어렵게 사는가, 아니면, 성령의 종말론적 귀환에 삶을 내어드리고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성령께 삶을 내어 맡기고 평안과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가?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제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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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6. 3. 12:31

헨 (일치/하나됨)

(요한복음 17:20-26)

 

부활절기 마지막 주일이다. 교회력에 따라, 우리는 부활절기를 마치며, 승천일을 지나 성령강림절로 들어선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고별기도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시며 이 기도를 통해 제자들을 축복하셨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특별한 이야기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0). 예수님은 자신의 고별기도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밝히신다. 고별기도는 지금 현재 직접 고별기도를 듣고 있는 제자들 뿐 아니라, ‘미래의 제자들을 향한 기도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제자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을 직접 만나 교제하며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어 제자가 된 사람들(보통 사도라 부른다)이 있고, 둘째,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예수는 그리스도다!)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나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이나 동일하게 생각하신다.

 

이것은 제자됨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기도이자 말씀이다.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제자의 말을 통해 제자를 삼는 것이 기독교 전도의 방식이다. 나는 누구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나는 제자인가? 나는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고, 나의 말을 통하여 누군가를 제자삼고 있는가?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제자됨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말 한 마디, 그리고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게 된다. 주님은 (우리)’를 제자 삼으시고,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또다른 제자를 탄생케 하신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기독교의 선교, 하나님 나라의 전파는 바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지는 기도는 제자들의 하나 됨에 대한 기도이다. 여기서 제자들이란 처음 제자들과 그 제자들에 의해서 제자 될 이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점에서, 현재의 제자들과 미래의 제자들의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하나 됨은 동시대의 제자들의 하나 됨 또한 말하는 것이다. 동시대의 제자들의 하나 됨이 없으면, 다음 세대의 제자들과의 하나 됨도 묘연해진다.

 

요한복음은 이라는 헬라어를 써서, 예수님의 하나 됨(일치)’의 기도를 펼쳐 보인다. 유대인 공동체인 에센 파의 쿰란 문헌에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야하드라는 히브리어를 단어를 써서 표현한다. 여기서 히브리어 야하드는 헬라어의 이다. 우리 나라 말로는 일치/하나됨을 뜻한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공동체는 자신들 자체를 ’, 일치/하나됨의 공동체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Church)’라는 말에는 근본적으로 일치/하나됨의 뜻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21절에서 23절까지 이어지는 제자들의 (일치/하나님)’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3개의 기도 내용으로 구성된다. 예수님은 1) 제자들과 다음 세대 제자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고, 2)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도록 기도하며, 3)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 받은 분임을 세상이 믿도록 기도하신다. (생명의 삶 플러스/20153월호, 82). , 1)2)를 통해 3)이 이루어지는 구조의 기도이다.

 

제자들이 하나 되어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이 복음의 논리를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일치/하나됨)’이 왜 중요한가? 왜 우리는 하나됨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하는가? 우리가 일치할 때, 우리가 하나 될 때, 복음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복음이란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다!’는 메시지의 전파이다. 이것이 우리의 선포(말씀)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의 (일치/하나됨을 통하여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다라는 선포를 믿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우리처럼 제자가 되지 않을까? 물론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작용하겠지만, 무엇보다,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보면, 우리가 제자로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동시에, 우리가 제자로서 일치, 하나됨을 이루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회사를 공부해보면, 교회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이기도 하다. 교회는 세포 활동이 왕성한 젊은이처럼, 엄청난 분열을 해왔고, 하고 있다.

 

리가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계속하여 최선을 다해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교단과 교단 간의 일치, 교회와 교회 간의 일치, 그리고 무엇보다, 한 교회 안에 있는 교회 구성원들(제자들) 간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일치/하나됨)’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보통 우리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 의견이 좀 다르더라도 상호 존중하고 인정하는 모습, 아니면, 함께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 또는 어떤 통일 기구를 만드는 것 정도를 생각한다. 그러한 것도 일치/하나됨을 위한 방안일 수 있으나, 본문에서 말하는 일치/하나됨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매우 독특한 교리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우리의 이성을 무력화시키는 교리가 아니다. 이것은 신비이자, 우리 교회(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시는 매우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모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21).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은 상호내주(페리코레시스)’라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상태를 교제(코이노니아)’라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교제 한다는 것,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알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교제알아가는 것을 말한다.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하지 못하면 인정하지 못한다.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무관심한가? 서로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얼마나 교제가 없는가? 자기 자신을 내보이려 하지 않고, 다른 이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서로를 잘 모르니,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제자라면, 무엇이 두려워 교제 나누는 것을 피하는가? 제자는 교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교제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요즘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두려움이 팽배하다. 서로 알아가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가 너무도 부족하다. 두려움 때문이다. 감출 것이 많아서 그런 것인가?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의 아름다운 교제가 나온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2:43-47).

 

제자들은 아무 것도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들의 재산까지도 감추지 않았다. 모두 내어 놓고, 나누었다. 서로를 깊이 아니까, 사랑하게 되고, 서로를 인정하게 되니, 자기의 것(개인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삶의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하나님 안에서 공적인 삶을 살았다. 이렇게 일치와 하나됨을 이루었더니, 오늘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그를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요즘, 기독교는 위기에 처해있다. 많은 이들이 교회가 죽어간다고 안타까워 한다. 왜 현대의 교회는 죽어갈까? 한 마디로 (일치/하나됨)’이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몸소 보여주신 교제가 우리 안에 없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만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려져 혼이 떠나니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5:1-5). 이후에, 아나니아의 죽음과 같은 죽음이 아내 삽비라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감춘다는 것은 그 안에 교제가 없다는 뜻이다. 감춘다는 것은 일치와 하나됨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거기에 죽음밖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감춘다는 것, 일치와 하나됨이 없다는 것, 교제가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뜻이다. 죽음 밖에 없다는 뜻이다. 서로를 알아가지 않으니,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니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다 보니, 거기에는 생명이 없고 죽음만 남게 된다.

 

우리는 제자인가? 어떠한 제자인가? 말씀 선포와 하나됨을 통해 생명을 이 세상에 가져오는 제자인가? 아니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교제를 벗어난 감춤을 통해 생명을 잃어버리고 죽음을 가져오는 세속적인 사람인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어머니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신 (일치/하나됨)’의 기도를 마음 깊이 새겨듣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한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계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슨 수로 우리가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세상이 알도록 전하겠는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일치할 때, 우리가 하나 될 때,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알아갈 때, 서로 사랑할 때, 서로 인정할 때,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신 것처럼 우리가 그러한 교제안에 있을 때,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우리는 제자인가? 그렇다면 무엇이 두려워서 서로를 감추는가? 그럴 필요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서로 더 깊이 알아가자. 서로 더 깊이 사랑하자. 서로 더 깊이 인정하자. 그것 자체가 교회'이다. 그런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된 일이요, 우리에게 또한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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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5. 30. 10:29

부흥의 원리

(사도행전 6:1-7) 

 

그때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1).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제자였다. 우리는 제자인가? 제자는 스승의 인격과 삶, 그리고 사명을 몸소 배워, 스승의 뒤를 이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다. 부흥의 제 1원리는 제자됨에 있다. 제가 되는 것 자체가 부흥이고, 제자가 되야 다른 이에게 스승이 되어 다른 이를 제자삼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믿고 전파한다. 우리는 예수의 메시아(그리스도) 되심에 대하여 진지한 고백을 먼저 해야한다. 예수가 참으로 메시아(구원자)라면, 우리는 구원자 되신 예수에게 우리의 삶을 걸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먼저 되어야, 그 다음 일도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교회가 부흥하려면, 그리스도인 됨, 제자 됨에 대한 진지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회는 제자들이 모여 제자를 길러내는 곳이다. 교회가 이것 외에 다른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인가? 그리고 우리는 제자를 길러내고 있는가? 우리는 교회로 모여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교회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이 질문을 날마다 하며, 제자 됨을 생각하고, 제자를 길러내는 것에 대한 진지한 사역이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사람이 많아지면,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부부 사이에도, 가족들 간에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문제 발생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나의 군 경험 / 장군으로부터 배운 것: 문제는 발생하게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이다.)

 

초대교회에도 사람(제자 / 제자가 되어도 여전히 문제는 발생한다.)가 늘어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두 집단이 한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에 발생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1b). 초대교회의 리더십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류였다. 그렇다보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대한 구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서 불만이 흘러나왔다.

 

6.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이 모임을 갖는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제자들(교회 구성원들)을 모아 놓고 이런 제안을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2-4).

 

사도들은 제자들이 불어남과 동시에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소홀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신 구제하는 일, 접대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썼다. 사도들은 일차적으로 문제가 여기서 발생했다고 파악했다. ‘접대봉사와 재정 출납을 의미한다. 봉사와 재정 출납은 하찮은 일이 아니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은 집사들이 감당하고, 사도들이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은 봉사와 재정 출납의 일이 아니라,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있다는 말하는 것이다.

 

열 두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할 때, ‘마땅하지 아니하다에서 쓰는 헬라어 아레스톤기분 좋은이라는 뜻이다. , 그러한 일은 교회 공동체에게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교회 공동체에서 기분 좋은 일은, 사도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집중하고, 접대와 재정 출납(봉사)은 집사들이 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이러한 진단과 제안에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했다고 성경은 전한다.

 

교회 부흥의 제 2원리사역의 적절한 분리와 협력이다. 목회자에게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이 가장 중요한 노동이다. 목회자로서 이 노동에 실패하면 직무유기다. 집사(집사/권사/장로)에게는 봉사(접대와 재정 출납)가 가장 중요한 노동이다. 집사로서 이 노동에 실패하면 직무유기다. 목회자와 집사의 직무가 온전히 실행되는 것 자체가 부흥이고, 그 직무가 온전히 실행되면 교회는 실제로 부흥한다.

 

일곱 집사가 선출된다. 5절은 한 구절로 되어 있지만, 세 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는 스데반에 대한 진술이다. 한글 성경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 문장은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they chose Stephen, a man full of faith, and of holy Spirit”. 스데반은 공동체 내에서 신망이 특별히 두터웠던 것 같다. 다른 이들에게는 이러한 수식어가 따로 붙지 않는데, 스데반에게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특별히 붙는다.

 

사실, 나는 이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잘 판단이 안 선다. 왜냐하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특별히 마귀의 표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초대교회에 박해가 있을 때, 최초로 순교한 사람이 스데반 집사이다. 왜 박해의 때에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를 처음으로 공격했을까? 그 사람이 중요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무너뜨리면 공동체가 와해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헛되게 놓아두지 않으신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는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의 울타리를 넘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는 도화선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스데반의 죽음은 허무한 죽음일 수 있으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스데반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이 복된 죽음이고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죽음이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어떠한 사건을 믿음의 눈으로 볼 줄 아는 능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복음의 능력이 세상에 드러난다.

 

스데반에 대한 특별한 수식어 다음에, 다섯 명의 집사 이름이 열거된다.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가 그들이다. (이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교회 집사들(성도들)의 이름을 다 아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집사로 소개되는 니골라에 대한 수식어가 나온다. 그는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헬라어로는 프로셀뤼톤’, 영어로는 ‘proselyte’라는 수식어를 쓴다. 문자적으로는 새로 온 사람’, ‘나그네’, ‘이방인인 뜻하고,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을 의미한다.

 

일곱 집사의 특징은 모두 헬라파 유대인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으로서 구별/차별을 강조했던 이들이, 이제 모든 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배려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흥 원리의 세번째 요소이다. 초대교회 안에 생긴 처음 문제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차별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러한 차별적 요소를 해소하고자 교회의 리더로 헬라파 사람들을 세웠다.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배려할 때, 교회는 부흥한다. 정말 중요한 교회의 덕(virtue)이다.

 

14. 공동체에 어떠한 갈등이 발행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가 형편없는 공동체라는 뜻이 아니라, 그 공동체에 어떠한 요구(need)가 발생했다는 싸인(sign)이다. 갈등은 나쁜 게 아니다. 인간은 갈등 없이 성장할 수 없다. 갈등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분명하게 보이게 해준다. 갈등이 발생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서로 협력해서 그 갈등을 해결해 나아야 한다. 그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갈등해결의 절차를 보면, 갈등이 발생하고(매일의 구제에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가 소외됨), 그것에 대한 바른 진단이 나오고(사도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집중하지 못하고 구제(봉사와 재정 출납)에 몰두하는 일은 공동체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 그에 대한 대안(봉사의 일을 감당하는 일곱 집사 선출)이 제시된다. 그리고, 모든 무리가 모였고, 그 모임 가운데서(예배 가운데서), 사도들은 그렇게 선출된 집사들에게 기도하고 안수했다. 서로 기쁨으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받아들였다.

 

마지막, 7절에서 교회 부흥의 네 번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복음)에 복종하니라”(7). 교회를 부흥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 ‘허다한 제사장이 예수의 복음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사장의 무리(오클로스 톤 히에레온)란 매일 성전 봉사를 위해 일정 기간 예루살렘에 머무는 제사장들을 의미한다. 역대기에 보면, 다윗 시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숫자를 32,000명으로 잡는다(대상 23:2-5). 이 중에서 성전 봉사자는 24,000명이었고, 성전 문지기는 4,000, 성가대는 4,000명이었다. 그러나, 32,000명이나 되던 제사장들은 포로기 이후 느헤미야 시대 때는 그에 비해 5%대로 떨어진다.

 

느헤미야 11장에 기록을 보면, 성전 맡은 자로 스라야 및 그 형제들이 822, 아다야 및 그 형제들이 242, 아맛새 및 그 형제들이 128명이었고, 하나님의 번 바깥일을 맡은자, 말씀 인도하는 자, 버금 등을 맡은 자가 284명이었고, 성 문지기로 172명이 봉사했다. 그래서 총 1,648명이었다.

 

그리고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은 네 개의 조가 있었는데, 한 조당 5,000명이었다고 한다 (Josepus, History of Jewish People I, 219-220).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는 20,000명 정도가 제사장으로 봉사했다는 통계가 나온다. 이 숫자가 정말 정확한 통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벨론 포로 이후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의 숫자가 많이 증가한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유대교 성전 예배의 중심축이었던 제사장 그룹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사장 그룹의 해체가 진행됐다는 뜻이고, 유대교 체계에 심각한 위협이 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교가 이제 막 시작한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복음)은 견고해 보이는 그 어떤 것도 허무는 힘이 있다.

 

배우자나 자녀의 완고한 마음, 이웃의 완고한 마음, 어떠한 체계의 완고함을 허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제자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에 흠뻑 젖어 있는 사람이다.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에 흠뻑 젖어 있는 공동체이다. 교회 부흥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고 협력하는 것이 제자의 첫째 임무이다.

 

부흥의 원리를 다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제자됨

2) 사역의 적절한 분리와 협력

3) 자기 이익을 포기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

4) 하나님 말씀의 왕성함

 

부흥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이다. 부흥하려면 위의 네 가지가 교회 공동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위의 네 가지 원리가 충만한 교회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부흥한다. 부흥이 안 되는 게 이상한 거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부흥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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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5. 27. 03:16

21세기 하늘나라 부부

(에베소서 5:15-33)

 

에베소서 5장과 6장에는 가정 준칙(household codes/haustafel/마르틴 루터의 용어)’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성경 시대의 가정은 남편과 아내, 자녀들, 그리고 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서의 가정 준칙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가정 준칙을 시작으로,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가정 준칙, 주인과 종 사이의 가정 준칙 순서로 그 가르침이 전개되고 있다.

 

지금의 가정 구성은 성경시대의 가정 구성과 많이 다르다. 우선, 종들이 가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더 이상 노예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엔 가정에 아빠와 엄마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편부모 가정도 많다. 편부모 가정이라도 법적인 보호를 받는다. 소년소녀 가장이 있는 가정도 있다. 모두 법적인 보호를 받는다. (게다가 요즘 한창 사회적 이슈인 동성결혼 문제가 대두되고 있어, 가정을 이룰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전제하는 것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위에서 간략하게 나마 보았듯이, 사회는 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하여 변한다. 이것을 사회변동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러한 사회 변동의 흐름 안에서 그것에 저항하기도 하고 적응하기도 한다. 인간 관계나, 사회적 관계나, 그 속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이유는 인간이나 사회가 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그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면 갈등이 깊어지는 것이고, 변화를 감지하고 그 변화에 대처를 잘 하면 갈등을 피해갈 수 있다.

 

한국 사회가 드라마틱하게 변한 시기는 구한말 시기이다. 1884년 갑오개혁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는 근대사회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도가 사라졌고, 무엇보다 남성와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에 대한 사회적 위상이 달라졌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사회 안에서 남성 외에 여성과 어린이는 존재감이 없었다. 특별히 어린이는 완전히 부모의 소유물로서 자기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어린이라는 말도 근대에 생긴 신조어이다.


한국 사회가 변하면서 부부 관계의 다이나믹도 바뀌었다.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1906년에 발행된 한국 최초의 여성지요, 가정지인 <가정잡지> 창간호에 실린 부부의 십계명을 보면, 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물론, 100년이 훨씬 지난 요즘 사람들의 시선에는 이게 뭐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으나,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이것을 보면서, 113년 지난 우리들은 그당시 사람들보다 부부관계에서 나아진 게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것도 재미난 일일 것이다. 1계명부터 5계명까지는 남편에 대한 계명이고, 6번부터 마지막 10번까지는 아내에 대한 계명이다.

 

부부의 십계명

(1906625, 한국의 첫 여성잡지, 가정지 <가정잡지> 창간호)

(UCLA 옥성득 교수 블로그에서 인용 / 원본에서 현대어로 바꾼 것은 장준식)

 

1계명

남편 되는 이, 밖에서 불편하던 얼굴로 집안 식구를 대하지 마오.

 

2계명

남편 되는 이, 무단이 나가 자거나 밤늦게 돌아오지 마오.

 

3계명

남편 되는 이, 자녀 있는 데서 그 아내 허물을 책하지 마오.

 

4계명

남편 되는 이, 친구의 접대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마오.

 

5계명

남편 되는 이, 의복으로 잔말 마오.

 

6계명

아내 되는 이, 남편의 부족한 일이 있거든 조용히 남편에게 권할 것이요 결단코 군소리(잔소리) 마시오.

7계명

아내 되는 이, 물건이 핍절한 소리 내기를 절조있게 하시시오.

 

8계명

아내 되는 이, 남편이 친구하고 담화할 때 뒤로 엿보지 마시오.

 

9계명

아내 되는 이, 함부로 남편에게 의복 구하기를 일삼지 마시오.

 

10계명

아내 되는 이, 항상 목소리를 크게 하여 역하게 마시오.

 

113년 전의 부부 십계명인데, 부부 사이에 여전히 개선이 안 된 것들이 발견된다. 물론 그 부분은 각 개개의 부부마다 다를 것이다. 113년 전의 문헌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어떻게 부부 사이를 세워 나가고 있으며, 사회 변동에 맞춰 어떻게 대처해 나가고 있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사회 변동으로 인해 사람들의 가치관은 계속하여 바뀐다. 최근 한국의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가정에 대하여 지난 몇 년간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특별히,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부모 부양 책임자 인식 변화에 대한 자료이다. 연구 결과의 데이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자료는 쉽게 말해서, ‘부모가 늙고 병들면 누가 책임을 져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대답한 것이다. 2002년도만해도 부모 부양의 문제는 가정의 문제로 여겨졌다. , 부모는 자녀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불과 16년만에(2018년도 자료) 사람들의 생각이 드라마틱하게 바뀌었다. 부모는 자녀가 책임져야 한다는 비율은 현저하게 낮아졌고, 부모는 국가가 책임지거나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비율이 현저하게 높아졌다.

 

가정에 대하여 보수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는 한국 사회가 이 정도니, 가정에 대하여 진보적인 생각을 지닌 미국 사회는 얼마나 더 심하겠는가. 이 통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 부모 세대가 깊이 깨닫고 대처해야 할 사실(fact)더 이상 자녀들에게 노후를 기댈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부모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들인 부모의 지극정성 때문이다. 한국 부모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아이들을 힘들게 키웠으니 아이들이 크면 우리한테 효도할거야.’

 

그런데, 그것은 부모 세대의 생각일 뿐, 자녀 세대들은 부모의 노후에 대하여 아무런 인식도 없고 관심도 없다. 괘씸하지만, 사실(fact)이다. 부모 세대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아 괘씸한 놈이라며 감정을 낭비하고만 있을 수 없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게 현명한 부모이다.

 

가장 현명한 대책은 부부가 서로에 대한 마음을 새롭게 정비하는 것이다. , 세월이 지날수록, 늙어갈수록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배우자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갖는 것이다. 이뻐 죽으며 정성스럽게 키운 자녀들은 부모의 노후에 관심이 없다. 웬수 같이 싸우며 살았지만, 결국 배우자 외에는 나의 노후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현명한 부부라면, 어떻게 서로에 대한 마음을 새롭게 해나가야 할까?

 

그런 측면에서, 에베소서의 말씀은 사회 변동이 심한 현대를 살아가는 부부들에게 엄청난 의미로 다가온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가정 준칙의 근본 원리는 상호 복종이다. 이것은 그당시로서도 굉장히 ‘advanced’된 사상이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매우 진보된 생각이다. 남편이 아내 위에서 군림하던 시절, 자녀들의 존재감이 전혀 없던 시절, 종들에게는 인권이 전혀 없던 시절을 생각할 때, 남편과 아내의 상호 복종, 부모와 자녀 간의 상호 복종, 주인과 종 간의 상호 복종은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복종이라는 말은 헬라어의 휘포타쏘라는 말의 번역이다. ‘타쏘명령하다라는 뜻이고, ‘휘포아래의라는 뜻이다. 둘이 합쳐져 휘포타쏘가 되면, 이것은 명령 아래에 있다’, 복종하다의 뜻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휘포타쏘를 부부관계에, 부모와 자녀관계에, 주인과 종의 관계에 적용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성령의 충만함을 불러 오는데, 본문에 의하면, 성령의 충만함은 다음과 같은 삶을 불러 온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19-21).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은 기쁨과 감사와 피차 복종함이 넘친다. 이 원리가 사람들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상호 복종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느냐에 따라, 즉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깊이에 따라서 그 깊이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성장을 간구하는 게 부부관계를 살리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다른 말로 해서, 부부가 서로의 배우자에 대한 소중함’, ‘귀함을 깨닫고 그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돈독히 쌓아가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으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복종(자발적 순종)의 축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주님께 대하여 복종할 때, 즉 자발적인 마음으로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1) 그 나라는 영원히 견고하게 된다 (대상 28:7 대하 7:17-18), 2) 평강이 강과 같고 의가 바다 물결 같이 된다 (48:18), 3) 성령을 주신다 (5:32), 4) 의롭게 된다 (6:25, 2:13), 5)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삼상 15:22)

 

이 원리에 따라서 하나님께 한량없는 복을 받은 세 명을 꼽자면, 아브라함, 노아(복의 근원, 당대의 의인(다른 이들 멸망할 때 유일하게 구원 받은 자), 예수님(모든 인류를 구원함/ 구원하는 자가 된다. 얼마나 복된 인생인가. 폐 끼치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가.)을 들 수 있다.

 

‘21세기 하늘나라 부부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부부라는 뜻이다. 21세기 하늘나라 부부는 현실이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현실을 이겨낸다. 21세기 하늘나라 부부는 영원하지 않은 것을 붙들어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려는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영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노후를 준비한다. 21세기 하늘나라 부부는 하나님이 주신 자녀를 최선을 다해 키우지만 그들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신앙 안에서 주님께서 맺어주신 배우자를 더욱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긴다.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 지혜를 깨닫는 부부는 노후가 행복할 것이다. (당신 밖에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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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5. 23. 09:52

압도적 회심 경험

(사도행전 9:1-9)

 

524일은 웨슬리회심기념일이다. 그래서 한국 감리교회에서는 이 주간에 각 지방별로 웨슬리회심기념집회를 여는 곳이 많다. 나는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오기 전까지, 거의 매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초지방에서 열리는 웨슬리회심기념집회에 참석했다.

 

장로교 출신인 아내는 이러한 감리교의 풍경이 낯설었던 모양이다. 장로교는 장 칼뱅의 신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교단이기 때문에, 장 칼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장 칼뱅의 회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교단 차원에서 그러한 집회를 열지 않는다. 그러나, 감리교는 웨슬리의 회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차이점이 낯설었던 것이다.

 

감리교회가 웨슬리의 회심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의 회심일에 그것을 기념하여 집회를 여는 이유는 웨슬리의 사역이 회심 경험 후에 드라마틱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1738524일 저녁, 그의 나이 35살이던 때, 그는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모라비안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가 다음과 같은 회심을 경험한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 45분 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회심이라고 하는 주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회심의 경험은 그 사람의 삶을 완전히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회심 전과, 회심 후의 삶은 같을 수 없다. 회심 전에는 안 보이던 것이, 회심 후에는 보이기 때문이다. ‘회심은 정말 신비한 일이다.

 

성경의 인물 중, ‘회심 사건의 대표적인 인물은 사울(바울)이다. 그의 회심은 너무 강력하여, 사도행전에 무려 세 번이나 언급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사울(바울)의 회심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의 눈에 그 사건이 진기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은 성경을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사울이 변하여 사도 바울이 된 것에 대한 그의 회심 이야기에 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울이 사도 바울로 거듭나기까지의 회심 이야기는 매우 기이하다.

 

스데반 사건(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사건)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흩어졌다’. 사도들 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의 다른 지역, 사마리아와 이방지역에까지 흩어지게 되었다.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박해 사건(스데반의 죽음)이 오히려 복음을 전하게 되는 역전을 일으켰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일하신다. 그러니,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고 낙망하고 절망할 필요 없다.

 

누가가 사울의 회심을 세 번에 걸쳐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회심할 가능성이 적었던 인물이 회심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된 게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행하신 일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사울은 초대교회의 가장 강력한 이었다. 그는 유대교 체계에 대하여 빈틈없는 이론과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고, 더불어 의지적 결단력과 실행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사람은 이기기 힘들다.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이유는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다. 그가 보기에 예수는 국가반란죄(유대교의 측면에서 봐도, 로마제국의 측면에서 봐도)로 사형 당한 죄수에 불과하다. 그러한 자를 메시아로 믿으며 추종하는 자들은 그의 눈에 광신자로 밖에 안 보였고, 유대교의 체계를 허무는 불한당으로 보였다.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체계의 바이러스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살기등등하게 박해한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의 박해는 단순히 개인적인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그의 신앙을 실천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 체계 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박멸해야 할 적으로 간주했다. 그런 마음에 의해서 그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사람을 죽였다. 그리스도인을 죽이면서 그는 아무런 죄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을 죽이는 일은 의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울의 열심은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아니, 유대교 지도자들은 사울의 그러한 열심을 이용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하기 원했다. 그러던 차에, 사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이방 지역에 있는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받아, 이방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할 생각으로 우선 다메섹을 택한다. 다메섹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는 첩보를 접한 것 같다.

 

그는 무장한 군인들을 대동하고 다메섹으로 향했다.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에 거의 다다랐을 때, 신비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3).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울은 그 빛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비춰오는 하나님의 빛이었다. 그래서 그는 땅에 엎드린다. 엎드림은 하나님의 임재에 반응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 이게 참 이상한 문구이다. 사울은 그가 생각하는 (/Lord, 하나님)’를 박해한 적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을 뿐이고, 그리스도인들이 따르던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서 처단되었다. 사울은 어리둥절하여 묻는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Who are You, Lord?”(5). 그런데, 정말 청천벽력 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5).

 

사울은 자신 앞에 빛으로 나타나신 분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이사야의 하나님, 다니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예수와 동일시 되고 있고, 더나아가, 그 예수는 그가 핍박하던 교회와 동일시 되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충격이다. 정말,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교회와 동일시 된다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한 사울의 일은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 압도적 회심의 경험 후에, 사울은 살기등등한 가장 힘 센 자에서, 주변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가장 약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사울이 의지하던 함께 가던 사람들(군인들)’은 그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이지 않아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을뿐이다(7). 가장 약한 자가 된 사울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성령 밖에 없다.

 

그의 압도적인 회심 경험은 곧 죽음의 체험과 같았다. 그는 3일동안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회심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죽음 경험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이 발생한다. 이 경험은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렇게 압도적인 회심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은 이전의 삶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지 않으면, 그 죽음을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회심의 경험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회심을 경험하고 나면, 세 가지가 바뀐다. 첫째는 신념이 바뀐다. 사울의 회심에서도 드러난다. 유대교의 시각에서 십자가를 바라보았던 사울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명기 21). 그러나, 회심하고 나서, 그는 십자가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바꾸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회심을 경험하고 나면, 둘째, 소속이 바뀐다. 사울은 유대인 공동체 소속이었다. 그래서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지령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살기등등하게 핍박했다. 그러나, 사울은 회심 후에 예수에게 소속된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손과 발이 되어 예수의 뜻에 따라 산다. 세번째로, 행동양식이 바뀐다. 회심 전, 그는 살기등등했다. 그러나 회심 후, 그의 삶과 글에 드러나듯이, 그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

 

기독교의 위기는 회심의 위기에서 비롯된다. 회심의 경험이 없으니,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회심의 경험이 없으니, 오직 자기 신념 가운데만 여전히 살고, 회심의 경험이 없으니, 예수에게 소속되지 못하고 예수의 손과 발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좇아가며 세상의 손과 발이 되어 온갖 불의한 일을 여전히 지으며 산다. 회심의 경험이 없으니, 행동양식을 바꾸지 못하고, 분노와 혈기 속에서 산다. 사랑이 없다. 자기의 것을 내어주지 못한다. ‘Live in’ 하기만 하고, ‘Live out’ 하지 못한다.

 

회심은 내가 조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회심을 안 했는데, 회심했다고 말하는 것은 영적 사기다. 회심은 단 번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평생에 걸쳐 일어나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나는 회심하였는가. 나의 회심은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회심이 날마다 일어나길 간구하고 있는가. 주님은 회심한 자를 통해 일하신다. 회심이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참 생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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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5. 15. 03:10

어머니의 잠언

(잠언 31:1-9)

 

어머니라고 하는 용어에는 자식은 둔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어머니란 무엇인가자식을 둔 여자를 뜻한다. 이런 말이 있다. “결혼은 연애의 업보요, 설거지는 취식의 업보요, 자식은 부모의 업보다”(김영민 칼럼,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 자식은 부모의 업보다. 그래서 이왕 부모가 된 거, 부모는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한다.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싶은가?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아이가 어떻게 컸으면 하는 바람이 부모의 언어에 담겨 있다. 대개 부모는 아이를 공주님, 왕자님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것은 연애할 때의 남녀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다.) 아이가 어렸을 때 공주님, 왕자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커서 왕 같은 인물이 되기를 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메타포이다. 지금은 왕이 존재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가 왕처럼 컸으면 좋겠다는 뜻은 왕처럼 존귀한 존재로 컸으면 좋겠다는 소망일 뿐이다. 요즘은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나의 어린 시절과 다르다. 요즘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유튜버나 연애인, 또는 운동선수 등이 수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장래 희망은 단연 대통령이었다.

 

사실, 우리가 어렸을 때의 장래 희망은 매우 전형적이고 일괄적이었다. 나는 조지아에서 목회하며 왜 그러한 일이 발생했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목회하던 지역에서 불과 1시간 남짓한 곳에 지금도 생존해서 세계 평화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생가가 조지아에 있었다. 교회 VBS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지미 카터의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엄청난 비밀을 발견했다.

 

지미 카터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매일 같이 조회시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너희들 중 누군가는 이 다음에 대통령이 될 것이다.” 지미 카터는 그 말을 듣고 학창시절부터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너희들 중 누군가는 이 다음에 대통령이 될 거야!’라는 말은 그 교장 선생님만의 특별한 비전 제시가 아니라, 그당시 미국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미국의 문화를 많이 수입한 한국에는 장래 희망에 대한 문화도 수입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통령을 장래희망 1순위로 생각했던 것이다.

 

대통령이든, 유튜버든, 연애인이든 운동선수든, 사람들이, 아이들이 그러한 장래희망을 가지고 사는 이유는 자신들의 눈에 그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존귀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존귀한 자가 되고 싶어하고, 부모라면, 특별히 어머니라면 아이를 존귀한 자로 키우고 싶어 한다.

 

본문에 등장하는 르무엘이라는 왕은 존귀한 자의 대명사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 부모라면 아이들을 르무엘처럼 키우고 싶은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르무엘은 왕이었다. 부모는 아이를 르무엘처럼 존귀한 자로 키우고 싶다. 또한, 르무엘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 속한 자/하나님께 바친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아이를 키울 때 단순히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존경을 받는 존귀한 자로 키우고 싶은 동시에, 하나님에게 속한 자,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우고 싶어한다.

 

아이를 존귀한 자,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 키우고 싶은 부모, 어머니는 잠언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겨 들어야 한다. 르무엘의 어머니가 르무엘을 존귀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 자로 키우기 위하여 그의 아들 르무엘에게 가르친 교훈은 세 가지이다. 부모는 자식을 훈계해야 한다. 부모의 훈계 없이 아이는 존귀한 자로, 하나님께 속한 자로 저절로 성장하지 않는다.

 

교훈하기에 앞서, 르무엘의 어머니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내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내 태에서 난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 서원대로 얻은 아들아 내가 무엇을 말하랴”(2). 이 고백에는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간절한 사랑이 담겨 있다. 아이가 잘 크기를 바라는 마음, 그 애타는 심정이 잘 녹아 있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아이를 존귀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냥 낳은 아들이 아니라 서원대로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첫걸음은 아이에 대한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다. 그 간절한 마음은 아이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존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지만, 대개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최근 한국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끈 스카이캐슬이라는 드라마에서 그 상황을 잘 묘사했다. 부모들은 자식을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도구로 삼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말로, 자식에게 부모는 업보가 된다. 그래서 자식은 태어나자마자 자신들이 원하지도 않는 과도한 학업을 감당하느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산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가 가득 차 있다. (공부 못해 억울해 죽은 조상 귀신이 아이들에게 붙어 있는 것 같다.)

 

최근, 정우성과 김향기가 주연을 해서 호평을 받은 <증인>이라는 영화가 있다. 거기서 김향기는 자패아로 나오고, 정우성은 자패아 김향기가 목격자로 연루된 사건을 담당한 상대편 변호사로 나온다. 자패아로서 법정에서 증인으로 서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때 정우성이 자패아 엄마에게 이런 말을, 무심코 내뱉는다. “아이가 자패만 아니라면 좋을텐데요.” 그때, 엄마는 정색하며 이렇게 대꾸한다. “아니요. 우리 아이가 자패가 아니면 우리 아이가 아니죠!”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부모로서 우리는 아이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자꾸 우리의 욕망을 투영해서, 아이가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면서, 괜히 아쉬워하고 속상해 한다. 이러한 태도는 아이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더 나아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태도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자라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좌절된 것 같은 분노나 서운함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아이를 존중해 주는 성숙한 믿음이 필요하다.

 

르무엘 왕이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훈은 세 가지이다. 첫째 교훈은 이렇다.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하지 말지어다”(3). 이 구절은 약간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히브리어의 원래 의미를 반영해서 다시 직역하면 이런 뜻이다. “왕들을 멸망시키는 여자들에게 힘(재물, 성적인 관계)을 쏟지 말라.”

 

이것을 좀 더 깊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존귀함/인간성을 헤치는 세력과 어떠한 모양으로든 관계를 맺지 말라는 뜻이다. 특별히, 재물(money)과 성(sexuality)은 존귀하게도 만들어주지만, 존귀함을 가장 손쉽게 해칠 수 있는 것들이다. 힘을 엉뚱한데 쏟으면 안 된다. 성경에서 힘을 엉뚱한 데 쏟은 대표적인 예가 다윗 왕이 밧세바를 범한 사건이다. 다윗은 자신의 힘을 엉뚱한 데 쏟는다. 그래서 자신의 존귀함도 무너지고, 무엇보다 훌륭하고 충직한 장수인 우리아의 목숨을 빼았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한다. 그 일로 인해서 존귀함이 무너진 다윗 왕에게 얼마나 많은 시련이 닥치는가.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첫 아들이 죽고,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고, 가정사에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부모는, 어머니는 끊임없이 자녀를 교훈해야 한다. 네 힘을 엉뚱한 데 쏟아 너의 존귀함을 해치지 말라!”

 

두번째 교훈은 이렇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4). 여기에는 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부정어가 쓰이는데, 동사의 부정사형이 뒤에 나올 때에는 권유의 의미로 해석된다. 그 당시 포도주(지금도 그렇지만) 식사에 동반되는 음료였다. 술을 완전히 금하는 게 아니라, ‘독주즉 취한 상태에 이르지 말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5절 말씀은 왜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는지, 즉 왜 취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워니라”(5). 그러면서 독주는 죽게 된 자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나 주라고 권면한다. 술취하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왕같이 존귀한 사람,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사람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독주는 잠시라도 고통과 절망을 잊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독주는 일시적인 유익을 줄 수 있을 뿐, 존귀한 삶을 살기 원하는 자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바르게 통치하고, 다른 이들을 돕는데 독주는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부모는,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독주(술 취하는 것)를 피할 것을 가르쳐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잠깐 동안만 위로를 주는 독주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법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술 마시는 것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잊어보려는 부모를 둔 아이는 나중에 그 모습을 따른다. 부모님이 그랬으니까, 자신들도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내 친구 중에 그런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가 매일 술마시고 집에 들어와 추태를 부리고 엄마를 못살게 구는 것을 보면서, 맨날 울면서 우리 친구들한테 말했다. 나는 이 다음에 커서 절대 술 안 마실거야. 그런데, 그 친구가 커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증오하던 아버지처럼 반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서 술을 안 마시면 잠자리에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이 세계의 전부다.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독주를 마시며 술취하는 것을 통해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보여주면, 아이는 그것이 고통을 벗어나는 마땅한 방법이라고 학습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와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부모님이 보여주신 그 모습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눈물로 기도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절절한 경험이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교회에 가서 밤새껏 기도하셨다. 나는 그때 엄마가 왜 그렇게 밤새껏 추운 예배당 안에서 기도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왜 그런지 안다. 나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예배당에서 기도한다. 이것은 우리 집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 장모님도 집사람 어렸을 때부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다른 곳에 가지 않으시고 예배당에서 밤새껏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예배당에서 함께 기도한다. 한 사람이라도 다른 것을 통해 힘들고 어려운 일을 극복하려 했으면 갈등이 심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복 내려 주셔서,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의 동일한 경험을 주셨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의 존귀함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독주(술취함)을 피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로 만이 아니라, 몸소 가르치라.

 

마지막 세 번째 교훈은 이것이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8). 르무엘의 어머니는 이것을 다시 반복하여 이렇게 바꾸어 말한다.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9). 여기서, ‘말 못하는 자고독한 자는 언어장애를 가진 자를 뜻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말한다. 권력과 돈이 있는 자들의 말은 무시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난한 자(권력과 돈이 없는 자)는 법정에서조차도 충분한 변호를 받지 못한다.

 

우리는 대개 이러한 세상의 현실을 아이들에게 말해주며, ‘권력과 돈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가르친다. ‘세상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 되어야 해!’ 이러한 가르침은 존귀한 자’, 특별히 하나님께 속한 자’, 그리스도인들이 가르쳐야 할 삶의 교훈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도 부지불식 간에 이러한 세속적인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준다.

 

성경은 끊임없이 강조한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신원하시는 분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은 사회적 약자와 함께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대변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력과 돈을 주시는 이유는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 (세속적)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주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력과 돈을 주시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를 섬기라고 주시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말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것은 권력과 돈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과 돈이 있으면 사회적 약자를 섬기기 보다는 오히려 타락하기 쉽다. 우리가 존귀한 자이고,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뜻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가 있다는 뜻인데, 하나님에게 마음이 가 있는 존귀한 자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는 사회적 약자에게 그 마음을 둘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부모는, 어머니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불의한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르쳐야 한다.

 

어머니라는 말에는 자식이 있는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자식을 둔 어머니는 자식을 잘 교훈해야 한다. 잠언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부모가, 어머니가 어떻게 자식을 가르쳐야 하는 지에 대한 지혜를 배웠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름과 같다.

1) 아이를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라. (부모의 욕망을 아이를 통해 이루려 하지 말라)

2) 네 힘을 엉뚱한 데 쏟아 너의 존귀함을 해치지 말라!

3)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의 존귀함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독주(술취함)을 피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로 만이 아니라, 몸소 가르치라.

4)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불의한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르쳐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아이들을 부모로서, 어머니로서 존귀한 자로’, ‘하나님께 속한 자로아름답고 훌륭하게 키워내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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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5. 2. 08:43

성장

(누가복음 2:39-52)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난 지 팔 일만에 받는 할례의식, 그리고 첫째 아들이 드려야 하는 대속제사 등을 전하고 있다. 주의 율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친 예수님은 나사렛으로 돌아와 유년기를 보낸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유년기를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40).

 

누가복음은 네 개의 동사를 이용하여, 예수님의 육체적, 지적, 그리고 영적 성장을 그리고 있다. 그는 자랐고, 강해졌고 (이것은 육체적 성장이다), 그리고 지혜가 충만해 졌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머물렀다. 특별히, 지혜는 대개 소피아로 표현하는데,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지혜를 표현할 때, ‘소피아말고 쉬네시스’(47)라는 말로 예수님의 지혜를 표현한다. 예수님의 지혜는 소피아와 구별되는 총명함’, ‘고도의 이해력을 말한다.

 

예수님의 성장을 나타내 주는 증거는 유월절 순례 도중 일어난 일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유대인에게는 3대 절기가 있다(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3대 절기 때가 되면, 13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하나님께 얼굴을 보여야 했다.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23:17).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일 년에 세 번만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ETC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Easter, Thanksgiving, Christmas에만 교회 와서 얼굴을 보이는 사람들을 말한다.)

 

유월절 순례를 마치고, 예수님의 가족은 다시 고향 나사렛으로 가는 중이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도중에 12살 먹은 어린 아들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들은 놀라서 오던 길을 되돌아 갔는데, 사흘 뒤에, 성전에서 아들을 발견한다. 거기서 예수는 율법 선생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에게 말한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So, why have you treated us this way? Behold, Your father and I have been anxiously looking for you.”(48).

 

이에 대하여, 예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Why is it that you were looking for Me? Did you not know that I had to be in my Father’s house?”(49). 누가복음은 이렇게 말하는 예수의 말을 그의 부모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가장 대비되는 것은 예수의 어머니가 ‘your father’라고 한 것과, 예수가 ‘my father’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your father’는 요셉을 가리키고, ‘my father’하나님을 가리킨다. 두 개의 ‘fathers’가 절묘하게 교차되고 있다. 누가복음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이라는 말에서 해야 마땅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데이라는 동사를 써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고 정당화하는 예수님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다. 예수님에게 있어 성장은 두 가지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육신의 아버지가 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 외에, 하늘 아버지가 계신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게 성장이다. 육신의 아버지는 영원히 우리를 돌보아주지 못하지만,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영원히 돌봐 주신다.

 

육신의 아버지의 역할이 이런 것 아니겠는가. 자기 자신이 영원히 돌봐 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영원히 돌봐 주시는 하늘 아버지에게 그 소유권을 넘기는 것이다. 육신의 아버지가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해주려 하기 보다, 계속하여 하늘 아버지에게 양육권을 넘기는 것이 중요하다. 육신의 아버지의 성숙은 이런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성숙은 육신의 아버지가 아닌 하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분께 계속하여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매우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다. 육신의 아버지는 영의 일을 자식에게 가르치지 못하고 육의 일을 가르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육의 유산만 남겨주어 육신의 죄를 짓게 만들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양육(돌봄)을 사모하도록 훈련된 자식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영의 일을 배워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무엇보다, 기도를 드릴 때, 하늘 아버지에게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법을 배워, ‘아버지라는 용어가 가슴 속 깊이 남아, 육의 아버지가 죽어 이 세상에 없더라도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성장의 두 번째 요소는 사명의 발견이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꾸중에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성장이란 자신이 어떠한 일을 마땅히 해야 하는지 깨닫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또는 주변사람들에게 가장 답답한 상황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를 때이다. 자신이 마땅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그 사명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열정이라는 것이 있다. 열정은 돈을 100만불 줘도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자신이 마땅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사명을 발견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영혼의 힘이다.

 

성장하는 사람, ,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는 것자신이 마땅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인식하는 것은 다음의 결과를 낳는다. 52절의 말씀이 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성장해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 우리 인간을 내적으로 풍성하게 해 주는 요소는 인정과 사랑이다. 인정과 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영혼의 목마름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러나, 인정과 사랑을 풍성히 받은 사람은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생명의 풍성한 열매는 나누며 산다.

 

우리는 성장을 경제지표와 숫자지표로 표현하고 인식하는 데 너무도 익숙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엉뚱한 것을 성장의 지표로 삼아 생명을 허비한다. 누가복음이 말하는 성장은 예수님의 보여주신 성장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이 성장이다. 나는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가. 그 성장 가운데,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가. 그 풍성한 생명에서 맺히는 열매는 아낌없이 나누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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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4. 16. 08:47

나귀겉옷

(눅 19:28-40)

 

종려주일이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사건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1). 여기서 이 말씀은 무엇인가? 열 므나의 비유이다. 열 므나 비유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

 

므나는 헬라의 화폐 단위이다. 우리가 잘 아는 데나리온 단위로 바꾸면, 한 므나는 100 데나리온이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의 하루 품 삯이다. 한 므나는 장정의 100일 치 품삯에 해당한다. 한 므나는 적지 않은 돈이다. 므나 이야기는 달란트 비유와 비슷하지만, 므나 비유 이야기의 핵심은 왕권의 인정에 대한 것이다.

 

므나의 비유에서 그 백성들이 한 귀인의 왕 됨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왕 됨을 원하지 않고, 그의 왕 됨을 거부할 것에 대한 예견이다. 예수님은 므나의 비유를 통해서 사람들이 당신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갈등이 극에 달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을 하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앞서서가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한 것이다. 이 아이러니한 사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전, 베다니와 벳바게에 이르러 한 나귀를 준비한다. 예수님이 그냥 걸어 들어가지 않고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것은 스가랴 99절의 예언에 기초한 것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있다. 금색 옷을 걸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큰 성공을 이룬 뒤에 멋진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사람을 일컬어 금의환향한다고 한다. 대개 그 당시 금의환향은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문을 통해서 돌아오는 장수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나귀 새끼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왔다. 말은 전쟁의 승리를 말한다. 그러나, 나귀 새끼는 평화를 말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금의환향과 거리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기억할 때, 사람들의 환호를 떠올린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21:9). ‘호산나라는 말은 주여,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호산나는 주님, 지금 당장 우리를 구원해주세요!’라는 탄식이다.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본문은 호산나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호산나는 히브리말이기 때문에, 누가복음의 청중인 이방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이 잘 알아듣도록, ‘호산나라는 말을 빼고,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는 말을 쓴다.

 

종려주일에 외치는 이 찬송의 핵심은 예수가 왕이다!”라는 선포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그렇지 않고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지는 것이다. 그 당시, 자기 자신을 왕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모두 처형을 당했다. 로마제국에 대한 정치적 반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무리 중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한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라고 부르는 것을 조심하고, 그러한 용어를 쓰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말에 이렇게 대답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 예수님이 이라는 사실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인정한다고 예수님이 왕이 되고, 그들이 인정 안 한다고 왕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그 선포를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그것은 그 선포를 듣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앞서 므나의 비유 이야기에서 예견했듯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이것은 종려주일 이후 전개되는 고난주간과 성금요일 사건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도 선택지를 우리 앞에 던져 놓는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우리는 그 선포 앞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미미한 존재들에 대해서 보려고 한다. 우선, 나귀 새끼를 보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나귀 새끼를 통해서 예수님의 왕권이 드러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말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팡파르를 울리며 성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시선을 주겠지만, 예수님은 말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셨다.

 

이 보잘것없는 존재인 나귀 새끼가 예수의 왕권을 드러내 주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나귀에게 주목한 한 노래가 있다. “행복한 나귀라는 노래이다. 노래의 가사를 보면 이렇다.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세상의 욕심에,

죄에, 나 자신에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그리고 주님을 섬기게 하세요

 

주님을 등에 업고 살게 하세요

 

그러면 세상은 나를 보지 않고

내 등에 업힌 주님을 보게 되겠죠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예수님의 왕권을 드러내 주는 것이 또 있다. 겉옷이다.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나귀에 태웠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가실 때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 그들은 안장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 화려한 레드 카펫을 준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들이 입고 있던 겉옷을 펴서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왕권을 드러내 주는 것은 돌들의 외침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 바닥의 돌들도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외치는데, 하물며 우리들이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몰라본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왕권을 선포한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의 왕권은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것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에게 속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례도, 예배도 모두 그것에 대한 고백이다. 주님,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왕의 일차적인 의무는 자기에게 속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들(특히 블레셋)의 괴롭힘 때문에 힘들어 했고, 그들은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께 을 요구했다. 그래서 뽑힌 왕이 사울 왕이다. 사울 왕은 살아 있는 동안 왕으로서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특별히 블레셋과 힘써 싸웠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힘껏 보호한 왕으로 칭송 받는 유일한 왕은 다윗 왕 뿐이다. 다른 왕들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을 유린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성을 보시고 우신다. 그들의 앞날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앞날에 어려움 닥칠 것을 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자기의 앞날에 닥칠 일을 알지 못했고,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 와 있는 자기들의 진정한 왕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성전을 오히려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자기들의 왕이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왕 앞에 엎드려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은 마땅히 간구해야 할 구원은 간구하지 않고, 왕이 와 있는 것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그저, 자기들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성전조차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어둠에 있으면, 보살핌을 받는 날(구원)을 알지 못한다. 어둠에 있으면, 지금 여기에 와 계신 왕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그 왕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다. 구원을 희망하면서, 구원자()를 십자가에 매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자는 종려주일이 백번을 지나가도, 부활주일이 백번을 지나가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여기에 그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시 한 편이 있다.

 

물이 들어오는 해변에 아이들이 있다

 

신이여 아이들을 버리소서

세상이 이미 아이들을 버렸습니다

못 박힐 순결한 손이 필요 없나이다

 

집채만 한 파도가 아이들을 삼켰다 어둠이 하는 일을 어둠은 끝내 알지 못하므로

당분간 종려주일은 없을 것이므로

ㅡ 이원 시집 <사랑은 탄생하라>의 시검은 모래의 일부

 

‘어둠이 하는 일을 어둠은 끝내 알지 못한다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매우 신학적이다. 어둠 속에 함께 있는 한, 어둠이 하는 일은 알 수 없다. 어둠의 일을 알려면, 빛으로 나아와야 한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어둠의 존재를 빛의 존재로 탈바꿈시켜주는 빛 그 자체이다. 어둠 속에 있으면서 종려주일을 수백 번 맞으면 무엇하는가. 어둠 속에 있으면서 부활주일을 수백 번 맞으면 무엇하는가. 어둠 속에서 하는 일은 의로워 보이더라도 결국 어둠의 일일 뿐이다. 빛으로 나와야 한다.  빛으로 나오면, 맞이하는 하루하루가 모두, 종려주일이고 부활주일이다.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지금 그 분이 우리 앞을 지나고 있다. 우리를 그분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 그는 우리의 왕이신가? 그렇다면, 우리의 겉옷을 벗어 그분을 경배하자. 그리고, 외치자.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지금 나귀 타고 우리 앞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알아보지 못하면, 우리에게 종려주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종려주일이 의미가 없으므로, 부활주일도 우리에게 구원의 날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선포하고 찬양하는 자에게 종려주일은 구원을 간구하는 날이요, 부활주일은 구원이 임한 복된 날이 될 것이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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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4. 9. 05:13

인생의 목표

(빌립보서 3:4-14)

 

요즘 아이들에게 콩쥐가 되고 싶냐, 팥쥐가 되고 싶냐?”라고 물으면, “팥쥐가 되고 싶다!”라고 대답한다. 콩쥐처럼 어려움에 처해서 고생하며 살기 싫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못된 인간으로 불리더라도 누릴 거 누리면서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넘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물었다. “살면서 고생했지만 죽어서 천국 간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으냐, 아니면 거지 나사로를 무시해서 지옥 간 부자가 되고 싶은가?”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살아서는 부자처럼 살고 싶고, 죽어서는 거지 나사로처럼 천국 가고 싶다!”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고,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인생의 목표는 중간중간 점검해주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인생의 포인트이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인생의 말년에 감옥에 갇혀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4).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까? “, 나는 기쁘다!”라고, 기쁘지도 않은데, 기쁜 척 한다고 기뻐지는 것을 아닐 것이다. 기쁨은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기쁨은 늘 우리에게 선물처럼 온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기쁨을 말하는 이면에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시킨 복음이 자리 잡고 있다. ‘복음이라는 것이 원래 기쁜 소식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사도 바울도 육체의 성취를 기쁨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가 얼마나 육체를 신뢰할만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는지 5, 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5, 6).


이것은 자신의 외적 스펙의 나열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이런 뜻이다. “, 육체의 성취로는 금수저야!”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모든 육체의 성취가, 자신의 인생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육체의 성취들이 모두 도리어 해가 되었고, 배설물로 여겨졌다고 고백한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안 된다. 예수를 믿으면, 외적인 노력은 전혀 필요 없으며, 공부 안 해도 되고,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단무지 신앙(단순, 무식, 지랄)’의 근거로 삼으면 안 된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인생의 목표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예수 안에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봤다는 것이다. 일단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이 최고의 지식이라고 말한다. 요즘 사람들이 이거에 동의할까?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최고의 지식은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는 지식을 말한다. (요즘엔 밥 사주는 사람이 형이고, 돈 많은 사람이 형이고, 인기 많은 사람이 형이다. / 나 같은 사람은 동생 중의 동생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체의 그 모든 성취를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해 보았는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무슨 노력을 해 보았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밝힌다. 지금 그는 인생의 말년에 들어섰고, 감옥에 갇혀 있으며,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기쁠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인생이지만, 그가 기쁨이 충만하여, 자신이 왜 그렇게 쉴 새 없이 달려왔는지 그 이유를 말한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그의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부활이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어떤 육체의 성취가 우리의 목표라면, 결국 그 끝은 허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육체의 성취는 필경, 자신의 육체 뿐 아니라, 다른 육체에게도 상처를 주는, 상처 뿐인 영광일 것이다. 육체의 성취는 다른 생명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 아이가 하버드 대학교 들어가는 게 인생의 목표라면, 그래서 우리 아이가 하버드 들어갔다면, 우리 아이가 들어간 것 때문에, 하버드에 들어가고 싶었던 다른 아이는 하버드 입학에 실패하여 낙심할 것이다. 육체의 성취의 특징은 나의 기쁨이 다른 이의 슬픔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활이라고 하는 인생의 목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부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빌립보서 25절 이하에 나온 그리스도 찬가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이것은 전문용어로, ‘케노시스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가장 잘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이다. 이것은 겸손(humility)’이다. 육체의 성취가 왜 나쁜 것이냐면, 그것은 늘 자기 초월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니버는 인간의 자기 초월에 대한 시도’, 이것을 죄라고 말한다. 위에서처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인간이 되려고 하시는데, 인간인 우리는 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겸손해지는 것(낮아지는 것), 신이 되려 하지 말고 인간이 되는 것,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게 참 아이러니한 것이다. 우리가 인간인데, 그래서 인간은 그 한계성에 의해서 겸손해져야 하고, 인간이 되어야 하고, 죽기까지 순종, 즉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신의 경지에 오르려 하는 교만에 빠진다. 인간인 우리가 인간이 되는게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 겸손해지는 것(낮아지는 것), 인간이 되는 것,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삶의 모든 가치를 사랑에 두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 내가 하는 모든 일의 가치의 뿌리를 사랑에 두면 하는 모든 일에서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여와 사랑이 연결되는 것을 본다. 인생의 목표를 부활로 설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고, 모든 것의 가치의 뿌리를 사랑(그리스도의 사랑)’에 두기 때문에, ‘항상 기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보라. 기쁨이 넘칠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의 목표가 부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 묻거든, ‘부활이라고 대답하라. 교회는 바로 부활이 삶의 목표인 사람들(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는 기쁨이 충만할 수밖에 없다. 부활이 삶의 목표가 아닌 사람이 교회에 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번지 수 잘못 찾은 것!)

(삶의 목표가 뭐세요? 부활이요!) 서로에게 기쁨 충만한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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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오디세이 I2019. 4. 1. 15:27

세 번의 유월절 

-의식rituals의 중요성-

(여호수아 5:9-12)

 

2013년도, 내가 마흔이 되던 해, 나는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있었다. 나이 마흔을 흔히 불혹(미혹되지 않는다)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이 마흔을 지낸 사람들은 모두 공감하는 것이겠지만, 나이 마흔은 불혹의 나이라기 보다, 미혹의 나이인 것 같다. 불혹은 무엇에도 홀리지 않는 것을 뜻하지만, 미혹은 무엇인가에 홀린 것을 뜻한다. 공자가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고 말한 이유는 나이 마흔이 되면 미혹되는 게 많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 마흔이 되면, 무엇보다 일상의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살만큼 살았고, 또 살아가야 할 날이 살아온 날만큼 길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이 마흔에 느끼는 일상의 지루함은 복에 겨운 감정이다. 여느 사람들처럼, 마흔의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있을 때, 나는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아니, 책을 통해 한 사람을 만났다. CBS 라디오 PD로 활동 중인, 정혜윤이 그다. 그는 그의 책에서 줄기차게 지루한 일상은 삶의 전부다라는 메시지를 말하고 있었다.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있던 나에게 그녀의 메시지는 또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 지루한 일상이 삶의 전부라니. 그렇다면, 뭔가 다른 일상을 꿈꾸기 보다, 지루한 일상 자체를 사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삶의 전부인 것을 내팽치고 다른 것을 꿈꾸하는 인생만큼 불행한 인생이 어디 있나. 나는 그렇게, 그의 책을 탐독하면서 나의 지루한 일상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지루한 일상이 너무 좋다. 지루할수록 더 좋다.

 

지루한 일상을 사랑하게 되면서 만난 또 한 권의 책, 그리고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수도사, 안셀름 그륀이 그다. 그의 책 <내 삶을 가꾸는 50가지 방법>에는 지루한 일상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의식(rituals)에 대한 방법이 열거되어 있었다. 그는 의식(rituals)’을 이렇게 정의한다. “의식은 우리 삶에 활력을 주며, 정당하고 올바른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13).

 

그는 말한다. “의식은 하나의 문을 닫고 또 다른 문을 연다”(13). 의식은 시간 자체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의식은 인간이 가진 상상력의 산물이다. 인간에게는 상상력이라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의식을 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령, 우리는 의식을 통해 하루의 문을 닫는다. 낮에 행했던 일에 대한 의식적인 문닫음이 없으면, 우리는 밤을 온전히 맞이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평안한 잠자리에 들 수 없다. 우리는 하루의 문을 닫지 않고 밤을 맞이하고, 또 그렇게 잠자리에 들기 때문에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생각하느라 근심 걱정에 휩싸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

 

지루한 일상은 내가 어떻게 열어젖히느냐에 따라서 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가령, 하루를 시작할 때, 아무런 의식(rituals)없이 시작한다면, 그 날은 어제의 연속에 불과하고,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불안한 하루가 되고, 불확실한 미래를 던져두는 괴로운 하루가 된다. 그러나, 하루를 시작할 때, 의식을 행하면, 그 하루는 어제와 같지도 않고, 내일(미래)을 열어주는 의미 있는 하루가 된다.

 

나는 안셀름 그륀의 책을 만난 뒤, 매일 아침 이런 의식(rituals)을 한다. 두 팔을 벌려 기도하며, 시작된 나의 하루를 축복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오늘 만나게 될 사람(그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 때로는 만날 사람이 정해져 있지만)을 축복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축복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만나게 될 사람들에 대한 마음 가짐이 달라진다. “주님, 내가 오늘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주님의 복을 입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오늘 하루 내가 만나게 될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축복 받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을 믿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내가 지금 억압당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날 수 없다는 억압, 자유의 상실이 우리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준다. 우리를 억압하는 것은, 마쳐야 할 일, 가슴에 남아 있는 분노, 서운함, 이루지 못한 소망, 불확실한 미래 등, 한 겹, 두 겹, 세 겹,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얽어 매고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근심 걱정은 없다.” 어떻게? 그것도 의식(rituals)’을 통해서 가능하다.

 

가령,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간단한 의식을 통해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떨쳐 버릴 수 있다.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일어서기 전, 일하던 자리에 잠시 동안 머무르며 심호흡을 하는 것이다. 숨을 깊게 내쉬면서, 하던 모든 일을 내려 놓는 의식을 한다. 이게 효과가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주 큰 효과가 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의식적으로 하루의 일을 문 밖에 두고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선다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잠자리에 들 때, 두 손을 접시처럼 하늘로 내밀어 벌리며,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문제를 맡기는 의식을 행하면서 간단하게 이러한 기도를 드리면 참 좋다. “주님! 나의 모든 문제를 주님 손에 맡깁니다. 그리고 저는 평안히 잠자리에 들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우리의 삶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지는 것을 경험한다. ‘거룩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하기오스(hagios)’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안셀름 그륀, 59).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는 거룩함을 입게 되는데, 그 실제적인 결과는 우리의 모든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성경은 온통 의식(rituals)’로 가득 차 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각종 절기, 그리고 예배는 의식의 전형이다. 의식은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관계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 결국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오늘 말씀에서 여호수아도 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삶이 다른 단계로 들어섰음을 공포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의 삶과 실제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유월절이라는 의식을 중심으로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긴 여정은 세 번의 유월절 의식을 통해서 한 단계씩 다른 단계로 옮겨 가고,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게 된다.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의식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유월절 의식은 출애굽기 12장에 등장한다. 그 첫번째 유월절 의식을 통해서, 그들은 애굽의 오랜 종살이에서 벗어나 애굽을 나오게 된다. 그들의 두 번째 유월절 의식은 광야에서 거행된다. 두 번째 유월절 의식을 통해 그들은 출애굽이 이루진 것에 대한 감사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된다.(민수기 9장) 만약, 이러한 의식이 없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유리하는 백성으로, 왜 그들이 광야에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하는 지, 모르고 광야에서 죽어갔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유월절 의식을 행함으로 자기들이 지금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깨달았다.

 

본문에서 세 번째 유월절 의식이 행해진다. 그들은 지금 출애굽의 긴 여정을 마치고,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길갈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 의식을 행한다. 그 의식을 행한 뒤 벌어지는 일을 보라.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12). 그들은 유월절 의식을 통해서 그들의 삶의 변화를 감지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새로운 삶을 열어젖히고 시작한다. 그들은 더 이상 애굽에 있지 않다. 그들은 더 이상 광야에 있지 않다.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만나가 필요하지 않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만나를 찾고 있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왔으면서도 여전히 광야에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애굽 사람들이 던져 주던 고기국이 필요하지 않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애굽 사람들이 던져 주던 고기국을 찾는다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왔으면서도 여전히 애굽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 번째 유월절 의식을 통해서, 그들이 더 이상 애굽에 있는 것도, 광야 있는 것도 아닌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땅에 도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복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마주하며, 우리도 그들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자유케 하시는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자유케 하심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면, 이제 우리는 그의 구원과 자유가 우리의 삶에 실제로 역사하도록 간구하고, 그리고 실제로 역사하고 있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의식(rituals)’이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주일 예배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다. 전형적인 의식(rituals)’이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일주일(창조의 시간)은 같지 않다. 우리는 주일 예배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창조의 역사를 우리 삶으로 받아 들인다. 그 새창조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왔다. 우리는 주일 예배 의식을 통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새창조의 역사를 우리의 삶으로 받아 들인다.

 

우리는 주일 예배 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더 이상 애굽에 있지 아니함을, 즉 그 어디에도 억압당하지 않고 자유함을, 우리는 주일 예배 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광야를 지나고 있는 것 같으나 반드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을, 그리고 우리는 주일 예배 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그 약속의 땅의 소출을 먹고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경험한다.

 

그리스도인의 일상은 지루한 것 같지만, 지루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자유케 되었으며, 주님의 약속을 이미 성취하여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마다 두 팔 벌려 기도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소망을 품는다. “나는 무엇을 하든, 이를테면 일 하거나 기도하거나 말 하거나 글을 쓰거나, 모든 일에서 사람들에게 하늘을 열어주고 싶다!”(안셀름 그륀, 29).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와 살며, 그 기쁨을 누리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을 열어주고 싶은 인생, 그것이 예배 의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에게 안겨 주시는 주님의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지루한 일상이 인생의 전부인 우리의 삶, 그 삶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신비로 가득 차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의 삶에 창조되길, 두 팔 벌려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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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3. 30. 03:41

암미와 루하마 

자기 정체성 찾기

(호세아 11:1-11)

 

호세아는 주전 8세기(BC 740년경),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기 전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다. 호세아는 12 소선지서의 첫 번째 책이다. 호세아서는 극적으로 전개된다. 호세아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그의 개인적인 삶이 전면에 등장하는 이유는 그의 삶과 이스라엘의 삶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 그의 삶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된다.

 

호세아의 뜻은 야웨께서 구원하신다이다. 호세아의 이름에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들어 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인생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그 어느 민족보다 이스라엘에게 잘 드러나는 마음가짐이어야 했다. 그러나,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은 야웨께서 구원하신다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우상숭배하고, 힘 있어 보이는 애굽과 앗수르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신랑과 신부, 그리고 결혼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할 때 사용되는 대표적인 은유(메타포)이다. 성경이 결혼에 비유하여 하나님과의 신앙의 관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결혼은 성스럽게 여겨진다. 유교문화권에서도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유교문화권에서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녀 출산의 문제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문화권에서 결혼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메타포이기 때문에 성스럽게 여겨졌다.

 

호세아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이러한 말씀을 받는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1:2). 호세아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의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서 크게 음란함이니라”(1:2).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창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직업여성)과 결혼을 한다. 그 여인의 이름은 고멜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세 명의 자녀를 낳는다. 첫째는 아들인데,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지었고, 둘째는 딸인데,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사랑받지 못하는 자)라고 이름을 지었고, 셋째는 아들인데,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이름 지었다.  

 

아내는 원래 사랑 받아야 하고, 자녀도 사랑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호세아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내 고멜이 낳은 세 자녀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으나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편에게 신실하지 못했고, 다른 남자를 만나 바람을 피고, 집을 나가고, 남편을 버리고, 가정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세아는 부모님 앞에서 이혼을 선언한다.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2:2).

 

이것은 호세아의 삶에 일어난 실제 상황이다. 사람들은 호세아의 가정을 보면서 어떤 말을 했을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그런 모습을 보며 손가락질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얼굴이 찌그러지고, 끔찍하다고, 불쌍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떻게 저런 여자와 결혼하여, 애들 셋이나 낳고,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 사냐고, 뒤에서 수근수근 대며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호세아에게 이런 말을 하며 떠나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니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하였음이라”(2:5). 그래서 호세아의 가정은 파탄이 났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어떻게 해야할까?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이런 말씀을 주신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3:1). 그래서 호세아는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고멜을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지불하고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이렇게 타이른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3:3).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또 뭐라고 했을까? 아마도, 호세아를 가리켜 등신이라고 했을 것이다. 다른 남자 좋다고 집 떠나서,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음란한 여인값을 지불하고다시 자신의 집으로 들인 호세아를 이해 안된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신앙 상태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호세아서 1장부터 3장까지는 호세아의 개인의 삶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다, 호세아서 4장부터는 이스라엘 전체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본격적인 예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예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4:1-2).

 

호세아에게로 향하던 손가락이 자신에게로 돌아서는 순간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한다. 남에게는 손가락을 뻗기 쉽지만, 자신에게 손가락을 뻗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언제나 우리의 모습을 비춰준다. 그들은 왜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로루하마(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되었을까?

 

이스라엘의 원래 정체성은 암미(내 백성이다)’루하마(사랑을 받다’)이다. 호세아서에서도 언급되고 있듯이,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에 의하여 애굽에서 구원받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언약백성이 되었다. 그런데, 왜 이들의 정체성은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로루하마(사랑을 받지 못하다)’로 바뀐 것일까?

 

호세아는 절규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4:6). 여기서 지식은 단순히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결혼함으로 얻어진 혼인 상태의 친밀함에서 나오는 지식’(레노바레성경, 1259)을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결혼, 즉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오는 신비한 생명의 능력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새사람에 관한 지식이기도 하다. 새사람과 대비되는 것은 옛사람이다.


신앙이란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결혼하는 것이다. 결혼은 서로에게 속하게 되는 언약이다. 결혼은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어 준다. ‘나는 이 사람에게 속해 있다.’ , ‘암미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나는 너에게 속해 있다. 너는 나에게 속해 있다.” “너는 나의 백성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결혼은 서로 속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튼다. “나는 너의 사랑을 받는다. 너는 나의 사랑을 받는다.” 그래서 루하마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 사랑은 내어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통해 우리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선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경험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결혼, 하나님과의 합일을 통해서 이것을 경험한다. 우리는 그 지식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결혼을 통하여 합일을 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내어줌’, 즉 사랑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내어줌, 사랑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선다.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고, 그러한 상태에 들어선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연합에 들어서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서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열망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 즉 우상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상에게는 사랑의 능력, 즉 자기를 내어줌의 능력이 없다. 그러한 우상숭배의 정황을 호세아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가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4:12).

 

이스라엘의 음행은 고아를 생산해 내고, 불임을 생산해 낸다. , 그들은 엉뚱한데 가서 은총을 바라고 구원을 갈망한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로암미로루하마로 불릴 뿐이다. 나에게 속해 있지 않고, 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은총과 구원이 없다. 하나님에게 속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은총과 구원이 없다. 빈손만이 있을 뿐이다.

 

호세아는 외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번제나 제사가 아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과 그 사랑의 신비 안에 있으면 어떠한 놀라운 일이 창조되는 지 아는 지식이다. 그 지식이 없으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그 인생이 빈손이 될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그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풍요를 모두 나누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11:4). 하나님이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며 우리를 부르신다. 이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자는 그 사랑 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 암미(내 백성이다)와 루하마(사랑 받는 자이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자들이다. 우리의 이러한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어느새 고멜처럼 자신에게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들주는 자를 따라 나서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는도다”(2:8).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 하나님과의 혼인관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지식이 없는 백성은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로루하마(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이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언약관계, 하나님과 혼인관계,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자는 정체성을 바로 갖게 될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암미(내 백성)’루하마’(사랑을 받는 자)’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 은총과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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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3. 24. 06:11

보이는 것을 보는 눈

(아모스 5:4-15)

 

아모스서를 보면,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생각난다. 원래 제목은 임금님의 새옷The Emperor’s New Clothes’이다. 임금님은 옷에 욕심이 많았는데, 새옷을 맞추기 위해 고용한 재단사가 임금님의 새옷으로 쓸 옷감을 구제불능 바보에게는 안 보이는 옷감이라고 못박아 말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구제불능 바보에게는 안 보이는 옷감이라는 말에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게 된다. 왕을 비롯한 신하들은 옷이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안 보인다고 말하면 구제불능 바보가 될까봐, 그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게 된다. 왕은 눈에 보이지도 않은 옷을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신하들은 그 옷을 입은 왕을 칭찬하고, 하녀들은 옷을 입히는 시늉을 하고, 임금은 그 옷을 입는 시늉을 한다.

 

그 거짓을 깨는 것은 어린 아이였다. 임금님의 행차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 오직 어린 아이만이 보이는 것을 보는 대로 말할 수 있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 아모스는 그 시대의 이 어린이와 같았다. 아모스가 살던 시대는 주전 8세기로, 남유다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에서는 웃시야가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아모스는 남유다 사람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아모스는 남유다에서 활동한 것이 아니라,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아모스가 활동할 당시, 남유다나 북이스라엘이나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풍요를 누리고 있었을 때였다. 그렇다보니, 눈이 가려 그들의 사회 안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들은 보지 못했다. 위의 동화에 빗대서 말하자면, 그들은 벌거벗은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비극은 거기서 시작된다.

 

아모스의 고향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8km 정도 떨어진 드고아이다. 거기서 그는 과수원과 양 떼를 소유한 자영업자였다. 아모스는 이사야처럼 왕족도 아니었고, 예레미야처럼 제사장 가문 출신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남 유다 출신으로서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북이스라엘에 얼마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이 없었으면, 남유다에서, 그것도 시골에서 농사짓고 양 치는 농부가 그러한 역할을 맡았겠는가. 그야말로, 아무런 힘 없은 어린 아이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모스의 예언은 북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이다. 그렇다고, 그 당시 남유다가 잘 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북이스라엘을 향해서 아모스가 예언을 했지만, 아모스와 동시대의 예언자는 호세아가 있었고, 남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는 이사야가 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 출신의 예언자는 호세아 밖에 없었다. 다만, 남유다 출신으로서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아모스의 예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는 열방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다(1:1-25).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주변의 6개 나라(다메섹,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를 향해 예언의 말씀을 전한다. 주변 나라의 심판을 예언하는 이유는 반면교사를 위함이다. 다른 이들에 대한 심판은 나의 의로움이나 안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뜻은 그 심판에 나에게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 주변의 여섯 나라에 대한 심판은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서막이다.

 

둘째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다(2:6-6:14).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을 전하며, 그들이 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이 애써 눈을 떠서 보지 않고 있는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외친다. 북이스라엘은 인신매매를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창녀와 통간하며, 술취함과 탐욕으로 하나님의 법을 조롱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종교적 위선은 극에 달했다. 이들은 벧엘, 길갈, 브엘세바와 같이 여호와를 찾는 곳으로 알려진 성지를 찾아가는, ‘성지순례를 적극적으로 시행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호화로운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고, 본토에서 나지도 않는 상아를 공수해 여름 별장과 겨울궁을 지으며 호사를 누리며 살았다. 그들은 날마다 범죄를 더하면서도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다.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가 없는 상태에서 드려지는 호화로운 제사는 하나님이 가장 역겹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아모스 선지자는 외쳤다. 이것은 남유다를 향해 예언한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과 같기도 하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5:22).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정의(미쉬파트)는 법률적인 정의를 말한다. 법정에서 공성정과 사회정의를 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억울한 자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 정의이다. 억울한 자가 하소연을 하면 그 억울함을 들어줘서 정의를 세워야 하는데, 그들은 그들의 억울함을 쓴 쑥으로 바꾸었다(7).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고, 힘 있는 자들 편에서 재판을 왜곡하고, 힘 없는 자들의 눈에 피눈물 나게 했다.

 

공의(체다카)는 인간관계에서 보여야 할 적합한 태도를 말한다. 아모스는 그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힘 없는 자를 밟고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둔 것을 제시하고 있다(11). 여기서 밀(바르)은 거래용 농산물을 말한다. 소작인들에게 벌금을 받거나 빌려준 곡식에 대하여 과중한 세를 받는 행위를 꼬집는 말이다. 지배층은 거짓된 재판으로 의인을 학대하고,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며, 그들이 그렇게 모은 재산으로 공들여 지은 집에서 살지 못하게 하시며, 아름답게 가꾼 포도원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포하신다.

 

셋째로, 북이스라엘이 지금 어떠한 벌거벗은 상태에 있는지를 드러낸 다음, 아모스는 다섯가지 환상(1) 메뚜기 환상, 2) 불 환상, 3) 다림줄 환상, 4) 여름 과일 한 광주리 환상, 5) 벧엘 성전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한다(7:1-9:10). 아모스는 이러한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에 대하여 그 마음을 돌이켜 주시길 간구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간청을 거부하며 심판을 준비하신다.

 

특별히,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은 네 번째 환상에서 볼 수 있다. 네 번째 환상인 여름 과일 한 광주리환상은 기근에 대한 심판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근보다 더 심각한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이것은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에 대한 말씀이다.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지만, 결국 얻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기근 때문에 양식이 없어, 물이 없어, 배고파 죽고, 목말라 죽는 것이 아니라, 기근에서 살려 달라고 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사실, 기근은 큰 문제가 아니다. 창세기의 말씀이나, 민수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기근의 때에, 양식이 없어 고생하고, 물이 없어 고생할 때, 그의 백성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물을 주셔서 살려 주셨다. 더 큰 문제는 기근의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심판이 북이스라엘에게 임한다고 하니, 얼마나 섬뜩한 심판인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세간의 헛된 말에 속아,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척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주님이 전도 나갔다, 승리하고 기쁨으로 돌아온 제자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10:23). 우리는 우리가 벌거벗은 것을 감추기 위해서, 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보이는 것을 보고, 그것을 고백하며, 돌아서면 될 텐데, 그렇지 못하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면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아모스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썩은 북이스라엘의 벌거벗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말해준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6). 정의와 공의가 없는 예배는 여호와를 찾는 게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14), 그리고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니라”(15)이다. ‘어린 아이와 같이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자는 악이 무엇인지 보이고, 선이 무엇인지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 보이는 대로 행하면 된다. 그게 여호와를 찾는 길이고, 그게 생명을 얻는 길이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자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그러한 자는 어느 상황에 있든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에서 구원하셔서, 그 삶을 복되게 하신다.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진, 복된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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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3. 19. 08:54

라오디게아 교회?

(계 3:14-22)

 

요한계시록 묵상을 잘 하고 있는가? 이번 요한계시록 묵상의 목표는 요한계시록 건전하게 이해하기이다. 성경에 대한 건전한 이해가 건전한 신앙을 낳는다. 기독교는 사실 처음부터 경전의 종교가 아니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한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다. 불교는 한 사람(붓다)의 깨달음이 종교의 핵심이고, 이슬람교는 한 사람이 받은 계시(꾸란)가 핵심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한 사람의 깨달음도, 한 사람이 받은 계시도 핵심이 아니고, ,그 한 사람이 핵심이다.

 

기독교의 경전은 한 사람의 깨달음을 전하는 책도 아니고, 한 사람이 받은 계시를 전하는 책도 아니다. 성경은 한 사람에 대한 증언이다. 그 한 사람의 이름은 예수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우리가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한 사람에 대한 이름을 넘어, 우리의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임박한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재림)을 믿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살아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예수에게 가지고 있던 신앙을 퇴보 시키지 않았다. 예수를 직접 만났던 사도들을 포함하여 제자들이 하나 둘 씩 (순교 또는 늙어서, 또는 다른 이유로) 세상을 떠나고 있을 때, 그들에게는 또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예수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게다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무신론자로서 핍박을 받았다.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행해진 황제숭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무신론자라 칭함을 받으며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 당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황제가 주님,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가 주님이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지켜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신앙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을까?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면 참 좋을텐데예수님이 바로 오늘 여기에 재림하시면 좋을텐데…” 이러한 생각을 신학적인 용어로, 종말론적 비전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찰나에, 요한이라고 불리는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핍박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안을 열어 주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에 와 계신 것이 안 보이지만, 우리의 영안을 열어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바람대로, 지금 여기에 와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 타고 오시리라”(1:7). 중국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기보다, 손오공을 먼저 떠올린다. 예수가 무슨 치키치키차카차카 초코초코초하면서 구름 타고 날아다니던 손오공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이 구절은 다니엘 713절의 말씀에서 가져온, ‘인자 같은 이’, 즉 메시아에 대한 표상이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7:13). 그리고 그가 구름타고 오시리라할 때의 오시리라라는 동사는 헬라어로 에르케타이라고 하는데, 이는 직설법 중간태 3인칭 단수 현재의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잠깐 헬라어의 용법을 살펴보고 넘어가고자 한다. 문법에 (Voice)’라는 게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태에는 두 가지, 능동태와 수동태가 있다. 능동태는 주어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고, 수동태는 주어가 무엇인가를 당하는 것이다. 영어로 I wrote a letter내가 그 편지를 썼다의 뜻이 된다. 이것은 능동태이다. 그런데, A letter is written by me이면, ‘그 편지는 나에 의해 씌어졌다라는 수동태 문장이 된다.

 

그런데, 영어나 한국어에는 능동태와 수동태만 존재하지만, 헬라어에는 이 태(voice)외에 중간태라는 게 존재한다. 중간태는 주어가 그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받거나, 그 행동에 자기 자신이 깊이 관여된 것을 나타낼 때 쓴다. 이것을 그가 오시리라에 적용해서 설명하면 이런 뜻이다. 일단 현재성을 나타낸다. 예수는 지금 여기에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오심은 스스로의 주권적 행동에서 온 것이라는 뜻이다. 현재성과 주권성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주권은 자유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주권은 어떠한 행동의 동기가 외부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유는 주권이 없으면 자유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엄청 중요하게 생각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성매매 또는 성폭력이 강력한 처벌을 받는 이유는 성매매/성폭력이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기 때문이다. 성은 철저하게 주권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성행위의 동기가 외부에 있으면 안 되고, 자기 자신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매매와 성폭력은 성행위의 동기가 자기 자신에게서 오지 않고, 외부에게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성매매와 성폭력은 개인의 자유를 빼앗는 행위이기 때문에 죄질이 대단히 나쁜 것이고, 강력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 (강력한 처벌을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예수의 현재적 오심(그가 구름 타고 오시리라)은 예수님의 주권적 행동이라는 뜻이다. 외부의 어떠한 요소가 예수의 현재적 오심을 유발시키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핍박 가운데 있는 것이 예수의 오심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예수께서 지금 여기에 오신 것은 예수님의 주권적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와 계신 것은 은혜가 되는 것이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흥부는 다리 다친 제비를 보고 제비를 치료해주었다. 그때 흥부는 다리 다친 제비를 보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제비를 고쳐준 것이지,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어떠한 외부적 요소의 영향을 받아 제비의 다리를 고쳐준 것이 아니다. 그래서 흥부의 행동은 은혜다. 그 은혜에 감동을 받은 제비는 외부의 어떠한 요소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서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주었다. 흥부와 제비 사이에 일어난 일은 자유와 주권의 이야기이고, 그 가운데는 은혜가 넘친다.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흐뭇하다.

 

그런데, 놀부의 행동은 어떤가. 그는 욕심에 의해서 어떠한 행동을 한다. 제비를 다리를 고쳐준 동생 흥부가 부자가 된 것을 보고, 자신도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 즉 외부적인 요인에 의하여,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제비의 다리를 치료해 준다. 그에 대한 제비의 반응은 무엇인가? 은혜가 아니라, 재앙이다. 박씨를 물어다 줬지만, 그 박씨 안에서 나오는 것은 놀부를 심판하는 도깨비들이었다.

 

정리해서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 부재중이 아니시고, 핍박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현재 와 계시다. 그러므로, 박해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안을 열어서 보면, 그들의 바람(소망)처럼 예수는 그들 가운데서 그들이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이것에 대한 복음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지금 박해 당하고 있는 우리 곁을 떠나 (시간적 공간적으로) 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기쁜 소식’, ‘복음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근본적으로미래의 역사적 시나리오가 아니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믿음으로 모인 교회는 어려움을 수동적으로 참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겨낸다. 요한계시록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기는 자는 예수가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고 어떠한 어려움에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그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이겨내는 믿음의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로서, 우리는 이것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은 기본적으로 소아시아의 7교회에 보내는 편지이다. 소아시아는 그 당시 로마제국의 최대 속국으로서 각 도시마다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에서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고백하며 제사를 드리는 우상숭배의 행위가 횡행했었다. 그 제사에 참여하여 제사를 드리고, 제사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그 도시에서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풍요롭게 살아갔지만, 황제 숭배의 제사를 거부하고 제사 음식을 함께 먹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구멍 가게 하나 열지 못했다.

 

소아시아의 7교회는 그러한 척박한 삶 속에서 나름대로 신앙을 잘 지켜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았다. 현실에 부딪혀 배교자들이 생겨나고, 현실 타협론자들이 생겨났다. 황제 숭배도 하고, 드려진 제물도 먹고, 그리고 예수도 믿고,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런 것 아니겠냐는 회유적 가르침이 스멀스멀 교회를 엄습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니골라당,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 그리고 이세벨이라고 칭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은 지금 주권, 자유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었다. 외부의 요인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7교회 중에, 가장 심각한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앞의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와 매우 큰 대조를 이룬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교회였다. 아주 작은 교회(요즘 말로하면, 미자립교회)였지만, 그들은 그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했다. (‘소박한 인내글 참조)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선포하신다. 기둥은 지진이 나도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 , 어떠한 시험에도 결코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키고 주님의 교회를 지킨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는 달리 큰 교회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7a).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이렇게 책망하신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17b). 내가 소아시아의 7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집중하는 이유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꼭 오늘날의 (미국이나 한국) 교회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이렇게 평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 교회가 미지근한 물과 같다는 것은 이들의 태도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하다는 뜻이다(이병학, 요한계시록). 이 교회에는 딱히 니골라당이나,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나, 또는 이세벨 같은 자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우상 숭배적인 사회에 동화되는 것에 대하여 반발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자신들이 외적인 부요함과, 부족함 없음에 만족하면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나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나와 우리교회를 포함하여) 오늘날의 교회의 잘못을 조목조목 따질 위치에 있는 것 아니고, 그리고 자격도 없다. 그저, “너나 잘하세요!”라는 음성이 귓가에 맴돌 뿐이다. 하지만, 설교자로서, 나의 주장이나 의가 아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만은 성실하게 하고 싶다. 주님은 바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내가 너를 권하노니 네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6, 18, 19).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문 밖에 서서 우리 마음의 문을, 또는 우리 교회의 문을 두드리시며, 문을 열어 달라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와 있는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겠다고 하시는, 이 음성이 들리시는가! 저 멀리 계시는 지 알았는데,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말씀을 지키는 자는 지킴을 받는다(요한계시록 3장 묵상 중).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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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