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1. 21. 06:44

열망과 절망

(욥기 23:1-14)


수능일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길 기도한다. 고등학교 입시 시험 때, 시험 당일 아침 내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나랑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덕에, 우리 아버지한테 기도 받고 가서, 답안지 밀려 썼는데, 오히려 시험을 더 잘 봐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기도 받는데 엄청 신비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런 결과를 낳았다고, 엄청 고마워하고, 좋아했다.

 

종교적 체험은 참 신비할 때가 있다. 페북에 딸이 수능을 보는 것에 대한 글을 올린 친구가 있어, 이렇게 복을 빌어줬다. “찍은 거 다 맞아랏!” 모두모두에게 좋은 결과가 있기를 소망한다. 언제쯤 입시 지옥이라는 말이 없어질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그 지옥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 그 지옥이 없어질 텐데, ‘자기의 노력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런 지옥을 삶으로 들이는 것 같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욥은 처절한 지옥을 경험하는 중이다. 부인만 빼고, 삶의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송두리째 사라졌다. 부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욥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축복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그 이후에 보면, 욥은 다시 회복하여 자식을 낳아 더 큰 복을 누리며 살았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애굽 왕이 모자란 것은 유대 민족의 부흥을 걱정했다면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하면 안 되고, 여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했어야 한다. 한국이 인구절벽을 경험하고 있다. 이번에 수능시험 치르는 학생이 55만명 정도 되는데, 이 중에 고3 재학생은 40만명 정도다. 정확히는 39424명이다. 역대 가장 적은 수험생이다. 이러한 인구절벽을 극복하려면, 여성에 대한 정책과 복지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은 모든 생명의 희망이다.

 

욥기는 장대한 지혜문학이다. 구약성경 중 가장 심오한 철학과 신학을 담고 있다. 구성도 드라마틱하다.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소발, 빌닷은 그 당시(지금도 여전히 우세한 생각이지만) 만연했던 사상을 대표한다. 그 사상은 보상교리이다. ‘라고 하는 요소를 통해서 인간론을 생각하는 히브리인들의 사고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 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악한 일들은 모두 죄의 결과로, 하나님의 벌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대조적인 사고를 지닌 문명은 헬라문명이다. 그리스/로마신화를 통해서 보듯이, 인간과 신은 한 데 어우러져 세상의 악을 구성하고, 악과 맞서 싸운다. ‘라고 하는 개념이 인간론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도덕적이고 절대적인 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운명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 운명을 극복하고 신적인 경지에 오른 사람을 영웅이라고 한다. 지금도,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과 헬라인들의 사고방식은 지구인들의 사고방식 안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다.

 

보상교리는 매우 실존적인 고민이다. 욥의 재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욥의 세 친구(엘리바스, 소발, 빌닷)는 욥을 정죄한다. 니가 이렇게 고통에 처하게 된 것은 너가 의롭지 못하고, 너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굉장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그런 와중에 나오는 말씀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말씀이다. 빌닷이 욥을 정죄하면서, 회개하라고 촉구하면서 한 말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싶어한다. 지금 이렇게 힘들고 어렵지만, 내가 회개하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아 의인이 되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심히 창대해 질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런데, 실제의 삶 속에서는 회개를 통한, 의로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죄 용서함을 받고, 심히 창대해지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러면,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인가? 이러한 신앙의 갈등, 아이러니, 역설 등으로 인해서,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무엇보다, 정죄 당하는 아픔, 밀려오는 죄책, 흔들리는 믿음, 이러한 삶의 요소들이 우리를 사납게 흔들어 댄다.

 

욥은 보상교리에 온 몸을 다해 저항한다. 욥의 세 친구는 보상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욥을 온 몸 다해 정죄한다.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까? 당연히 하나님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본문은 열망과 절망을 담고 있다.

 

욥은 절망 속에 있다. 세 친구들에게 사납게 당하고 있는 정죄가 절망이다. 사람은 죄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 때문에 죽는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상대방을 가리키는가. 그 행위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인지 모르고,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너무도 쉽게 한다.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질이 아니라, 따스한 마음이다. 내가 손가락질 하지 않아도, 죄는 그 속성상 심판을 이미 담고 있다.

 

욥은 죄가 없다. 손가락질 당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는 지금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절망이다. 그런데, 그는 절망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는 절망 속에서 열망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하나님과 대화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가 하나님을 움직여 복과 저주를 내리게 할 수 없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욥은 하나님의 자유/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고백한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절망 가운데 있는 욥의 열망이다.

 

욥의 처절한 열망은 이 구절에 오롯이 담겨 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12). 우리는 보통 말씀이 밥 먹여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우리의 생명은 우리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책임져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죽을 처지에 놓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내 앞에 밥과 말씀이 있다. 무엇을 먹겠는가? 밥을 먹겠는가? 말씀을 먹겠는가?

 

엘리야의 이야기가 오버랩 된다.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모두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살리기 위하여 보낸 곳이 사르밧 과부의 집이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아들과 더불어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한 끼 밥을 해 먹고 굶어 죽을 작정이었다. 그때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도착하여, 그들이 먹고 죽으려 했던 음식을 자신에게 달라고 한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의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3-14).

 

보통,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양식을 택하지, 말씀을 택하지 않는다. 만약 사르밧 과부가 말씀을 택하지 않고 양식을 택했다면, 그와 그의 아들은 한 끼 음식을 먹고 죽었겠지만, 사르밧 과부는 말씀을 택함으로, 그 어려운 가뭄의 때에 구원을 경험한다. 매우 도전적인 놀라운 말씀이다.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양식과 말씀 중, 무엇이 더 귀한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은 사람, 즉 진리를 아는 사람은 욥의 고백처럼 정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여길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진리의 경지, 신앙의 경지에 오르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신앙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유를 줄까?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싶어하는 열망 가운데 있는 욥에게는 또다른 절망이 있다. 그 절망은 바로, 욥의 그러한 열망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숨어 계신하나님 때문에 발생한다. 그 절망은 이 구절에 담겼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뵐올 수 없구나”(8-9).

 

욥에게는 꽉 막힌 절망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절망이 욥의 열망을 막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열망은 희망으로 피어나고 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He knows the way I take, when He has tried me, I shall come forth as gold.”

 

욥의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열망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삶은 이런 저런 절망이 너무 많다. 그 절망을 우리가 일일이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절망 투성이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 절망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우리에겐 욥과 같은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겠다는 그 열망! 말씀이 정말 밥 먹여 준다! 그 열망이 우리에게 있는 한, 절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인생은 충분히 희망적이다.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 우리를 단련하소서. 우리가 정금같이 나오겠나이다. 아멘.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1. 4. 13:40

그리스도인의 표지 (signs of Christians)

(사도행전 2:42-47)

 

베드로의 설교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이 되었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회개하고, 죄사함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그 결과 초대교회가 태동이 되었다. 교회는 이렇게 성령의 능력 안에 있어야 태동되는 것이고,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교회 다니는 신앙인들이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 무엇이 나를 일반인들과 구별해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무엇인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을 때, 성경은 초대교회의 처음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다. “They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 and to fellowship, to the breaking of bread and to prayer”(NASB).

 

헬라어 성경은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프로스카르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εω)’라는 단어를 쓴다. 우리 말로는 오로지힘쓰니라로 번역을 했고, 영어로는 ‘continually devoting’으로 번역했다.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끊임없이 헌신하다, 반복해서 계속하다의 뜻이다.

 

회개하고, 죄사함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어떠한 일에 전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일에 전념하는 사람이 된다. 그것들에 전념하고 있는 지, 아닌 지를 보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에 끊임없이 헌신하고 전념하는존재인가? 본문은 네 가지를 말하고 있다.

1) 사도들의 가르침 Apostles’ teaching (Bible study, Bible Reading)

2) 교제(나눔) fellowship

3) 만찬 breaking of bread (성만찬+성도들 간의 식사 교제(만찬하늘 잔치의 모형)

4) 기도 prayer (pray to God in the name of Jesus Christ)

 

첫째, 사도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다. 그러면서 구약의 말씀을 면밀히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성경공부를 통해서 사도들의 가르침 배우기를 계속하여 전념하고 있다. 성경공부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시간이거나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세상 사람과 구별해 주는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둘째, 교제이다. 교제는 흔히 친교라고 부르는 것이고, 영어로 ‘fellowship’이라고 부른다.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라고 한다. 그런데, 교제(코이노니아)는 문자적으로 나눔(sharing)’을 뜻한다. 이것은 서로 주고받은 일, 서로 필요한 것들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물질 뿐 아니라 정서적 교감까지도 우리는 모두 나눌 수 있다.

 

본문에서 나눔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44-45). 매우 급진적인(radical) 본문이지만, 이 본문이 오용되기도 한다. 특별히, 이단들은 이 본문을 들어 교인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일까지 벌인다. 이단이 아니더라도, 마치 믿음을 가지면, 그리스도인이 되면 재산을 가지면 안 되고,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오해 받기도 한다.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나눔이 무엇인지는 그 당시의 상황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 각지에서 모여든 디아스포라유대인들이었다. 오순절이 되면, 예루살렘의 주민들은 성문을 활짝 열어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유대인들을 맞아들였다. 그들이 예루살렘 주민이 아니고 세계 각국에서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었지만 환영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이었고, 또는 유대인으로 개종을 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엄연히 말하면, 여행객이었다.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집을 개방하여 맞아주지 않으면 묵을 곳도 없고 밥 먹을 곳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그들의 위치는 달라졌다. 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환영 받는 순례객이 아니라, 예루살렘 주민들의 미움을 받는 이방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집으로 들여 재워주고 먹여주어야겠는가?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갈 곳이 없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 하지만 이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된 그들을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주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배척 받는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의 집으로 들였고, 거주 공간이 부족하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거주 공간을 마련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공간을 제공했고, 공적인 모임은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의 뜰 같은 곳에서 가졌다.

 

예수 믿으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일은 정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성을 상실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우리도 그렇지 않겠는가? 먼 곳에서 여행을 왔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에게 잠 자리를 제공하고 먹을 것을 내어주지 않겠는가? 그 수효가 너무 많아서 우리들 거처에 수용하지 못하면, 호텔방이라도 잡아주지 않겠는가? 재산과 소유는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아주 이성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나눔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합리적이다. 그 합리적인 나눔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지금 여기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무슨 나눔을 실천해야 할까? 레위인처럼, 제사장처럼 그냥 지나치는 것은 나눔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기의 손으로 수고하며, 자기의 소유를 들여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나눔이다. 물질의 풍요로움이 있다면 그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마음의 풍요로움이 있다면 그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고, 믿음의 풍요로움이 있다면 그것을 필요한 사람과 나누는 사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 나눔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셋째는 만찬이다. 초대교회는 떡을 떼는 것에 전념했다. 이것은 성찬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성찬을 하지 않는다. 성찬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식사의 원형이다. 그리스도인은 성찬 때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먹는 모든 식사를 그리스도와의 마지막 만찬으로 생각한다. 형식상 일반 식사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먹는 모든 식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것을 기억하는식사다.

 

이러한 식사를 종말론적인 식사라고 부른다. 이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라는 의미다. 한 번 생각해 보라. 내가 먹는 식사가 이 세상의 마지막 식사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마지막 식사를 허투루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의 식사라는 의미다. 다른 말로 천국 잔치이다. 얼마나 기쁜 식사인가. 그리고 얼마나 복된 식사인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했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그토록 화를 냈던 이유는 예수님이 거룩한 천국 잔치를 더럽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천국 잔치에는 세리와 죄인들은 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종말론적인 식사를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식탁 교제가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롭고 거룩하겠는가. 이 식탁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우리가 이것을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식탁 기도) 이러한 기도가 저절로 나올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마음으로 성만찬을 시행하기를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식사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만찬은 그리스도인의 표지다.

 

마지막으로, 기도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기도에 끊임없이 헌신하고 있는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왜 이렇게 쉬지 말고 기도해야하는가?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그리스도인이다. 그 뜻 가운데 하나가, ‘쉬지 말고 기도하기이다. 우리는 그 뜻대로 살고 있는가?

 

기도에 관해서라면, 며칠 밤을 새도 모자랄 정도로 할 말이 많다. 우리는 누구에게, 누구의 이름으로 매일같이, 쉬지 않고, 기도 드리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기도하고 있는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기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기도하라. 필요할 때, 생각날 때, 시간 날 때 하는 게 아니라, 기도에 끊임없이 전념하라.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프로스카르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εω/proskartereo)’. ‘끊임없이 헌신하다/전념하다라는 뜻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러한 열정이 생긴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데 열정이 생기고, 나눔에 열정이 생기고, 떡을 떼는 일에 열정이 생기고, 기도에 열정이 생긴다. 다른 열정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열정이 세상을 바꾼다. 이 열정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는 당신,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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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31. 07:12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편 142:1-7)

 

한국교회가 실패하고 사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한 이유는 만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성육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신앙이다. 그런데, 어느덧 한국교회의 신앙은 (말씀)’말 있고 육신이 없어졌다. 형체가 없는 말은 유령일 뿐이다. 형체가 없으니, 거룩한 것 같고 신령한 것 같으나, 결국 그 실체가 없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실체를 만들어 퍼뜨린다. 말만 난립하고 있다.

 

복음은 성육신을 말하는데, 실제 기독교인의 삶은 탈육신을 지향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복음은 일상의 언어를 요구하는데, 실제 기독교인은 자신들만의 은어를 사용한다. 은어를 아는 사람들끼리는 좋고, 은어를 알아들으니까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는 지는 몰라도, 결국 이것은 성육신이 되지 못하고 탈육신이 된 유령의 복음을 생산하고 만다.

 

본문은 마스길이다. 잘 구성된 지혜의 시라는 뜻이다. 이 시는 기도이다. 전형적인 탄식의 기도이다. 다윗을 내세워, 기도를 구체화시킨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엔게디 동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라고 구체화시킨다. 이렇게 구체화시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더 자극시켜 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이 기도를 구체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자는 소리 내어기도한다. 2절에서 토로라는 단어를 쓰는데영어로는 ‘pour out’이라는 단어를 쓰고, 구약성경적 의미는 전제를 말한다. 기도자는 소리 내어 기도를 하는데, 마치 전제를 붓듯이 하나님께 쏟아 놓는 것이다. 기도자의 기도는 그냥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예배의 의미를 담은 기도인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이렇게 전제를 붓듯이 하나님께 쏟아 놓을 때,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예배가 된다는 것을 알면 좋다.

 

기도자의 절망은 매우 깊다. 3절에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했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아타프를 번역한 것인데, ‘아타프약해지다, 사라지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기도자는 그의 영, 즉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용기, 열정 등이 약해져서 사라졌다는 뜻이다. 이것만큼 절망이 없다. 사람은 몸이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마음이 힘들어서 죽는다. 용기와 열정이 사라지면, 사람은 급격하게 약해진다.

 

기도자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유대인들에게 오른쪽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기도자는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돌보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오른쪽은 법정에서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변론하시기 위해서 서시는 자리이다. 가난한 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스스로 도울 힘도 없고, 도움을 청할 여력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냥 억울하게 죽고 만다. 우리가 가난한 자 되기를 싫어해서 그렇지, 사실은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기도자는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세 가지의 도움의 손길이 없다고 호소한다. 첫째, 아무도 기도자를 아는 사람이 없다. 여기서 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나카르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의 뜻이다. 기도자는 하나님께 호소한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셨으면 하고 간구한다.

 

둘째, 기도자에게는 아무런 피난처가 없다. 아무도 피난처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적들이 죽이려고 쫓아오는데, 아무도 숨겨주는 이가 없다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셋째, 기도자에게는 아무런 돌봄이 없다. 누구 하나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 매우 적막한 인생이다. 외로움에 죽을 것 같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기도자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께서 기도자의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분깃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분깃은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땅 분배를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분깃은 분배받은 땅이라는 뜻이다. 분배받은 땅이 없다는 것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과 같다.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모른다. 그러나, 기도자는 하나님이 자신의 분깃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는 없을까? 우리는 하나님께 분깃을 달라고 요구하지, 하나님 자체가 분깃이라고 고백하지 못한다.

 

이 세상의 삶은 마치, ‘분깃을 차지하려고 혈안인 전쟁터 같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다. 분깃을 차지하여, 생명을 보존하려고, 우리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가. 그러한 모습을 스스로 돌아볼 때, 자신이 괴물 같기도 하고, 초라하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시라는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정말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선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기도자는 탄식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분깃이 되어 주셔서, 생명을 보존해 주실 것을 믿는다. 기도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욕망의 표출로 보면 안 된다. 하나님 잘 믿으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벌이는 분깃 전쟁에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셔서,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살게 해 주실 것이라는 욕망의 표출로 보면 안 된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눈을 구체적인 삶의 현실로 돌려야 한다. 기도자가 탄식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는 외롭고 쓸쓸하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오클랜드 주유소 정차 중 만난 흑인 아저씨 이야기 다짜고짜 차를 닦아준 이야기 무슨 대가를 바라면서 한 건 아니지만, 끼니를 얻어보고자 한 최선의 행위 그래서 돈을 약간 건네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육신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 말씀이 임한 성육신의 몸이 되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구성원들끼리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서로 지켜보아야 한다.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한다. 서로 돌봐 주어야 한다.

 

기도자가 고백하는 마지막 기도가 마음에 다가온다.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7절). 의인들이 누구인가? 관심 가지고 지켜봐 주고 돌봐 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전혀 없었는데,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생긴 것 자체가 구원 아니겠는가. 의인은 쉬운 말로 하면, 좋은 사람들이다. 좋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 그것만큼 삶을 살아가는 데 든든한 언덕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의 삶에, 나를 둘러주는 좋은 사람이 많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든든한 언덕이 되기를 바란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줄 때, 우리의 삶은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지 않겠는가. 말만 하지 말고,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삶,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좋은 사람이 되어 주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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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29. 05:38

여인들의 반란

(출애굽기 1:15-2:10)

 

종교개혁주일이다. 종교개혁주일은 우리 개신교인들에게는 참 특별한 날이다. ‘개혁을 했다는 말은, 살면서 뭔가 잘못된 것을 발견했다는 뜻이고,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뜻이고, 그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뜻이다. 서양사에서는 종교개혁Reformation’이라는 말이 굉장히 넓은 의미에서 쓰인다. 종교개혁은 단순히종교하나 만의 문제를 발견해서 개혁한 사건이 아니다. 중세의 삶에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와 신앙의 문제만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의미를 다루고자 한다.

 

종교개혁의 3대 원리는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오직 믿음 sola fide”, 그리고 오직 은혜 sola gratia”이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러한 개혁의 원리를 말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던 역사적 맥락은 없어지고, 우리에겐 위의 세 개의 개혁의 구호만 남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구호만 외칠 뿐, 그 구호가 담고 있는 개혁의 의미를 묻지 않고, 그 구호가 신앙을 규정해 주는 배타적 기준으로만 자리잡았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오직 성경을 외치지만, 살면서 삶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의 삶을 가꾸어 나갈 때, 우리는 무엇을 통해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얻으며, 무엇을 삶을 가꾸어 나갈 자양분으로 삼는가? 직접적인 형태로 질문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가, 아니면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생명책인가? 무엇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게 하는가?

 

또한, ‘오직 믿음을 외치면서, 우리는 정말 믿음 있는 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히브리서에 이르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정말 우리의 삶의 원리를 믿음으로 삼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개혁은 구호가 아니라 현실이다. 개혁은 현실을 바꾸겠다는 의지이다. 개혁은 구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건 아닌 것 같아!’라고 하는 현실인식과 (생명)의 가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와 사명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 개혁은 성공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삶의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는가? 다른 말로 표현해서, ‘왜 사는가?’ 우리는 삶의 가치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 즉 왜 사는지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한심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는다. ‘왜 사니?’ 스티브 잡스 이야기를 해야겠다. 잡스는 굉장히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세운 회사에서 해고를 경험했다. 그러다 다시 그 회사에 취직한다. 11년 만에 애플로 다시 돌아온 잡스는 직원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자신의 핵심 가치, 회사의 핵심 가치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다. 애플의 핵심 가치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다니는 Fitness 센터(24hous Fitness)의 사명이 이렇다. 러닝머신 위에 있는 TV에 매일 같이 뜬다. “We are passionate to help people change their lives through fitness.” 나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한다. 그들의 사명이 정말 맞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이유도 삶을 바꾸어 보려고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나의 사명,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도 묵상한다. 뛰면서 묵상한다.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내려놓을 수 없는 엄청난 신앙의 가치가 있다. “신앙을 가지면 자기의 인생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본문은 신앙을 가진 이들의 믿음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본문은 신앙이 있는 자, 다시 말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한 자들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대결이 그려지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는 애굽의 지존 바로()였고,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는 힘 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힘 센 애굽의 왕(바로는 이름이 아니라, 애굽 왕의 칭호이다.)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지만, 힘이 없던 여인들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다. 우선 등장하는 여인들의 이름은 십브라와 부아(Shiphrah and Puah)’이다. 애굽 왕은 힘 없는 히브리 여인들이었던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이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16).

 

한 나라의 왕에게서 이러한 명령을 받으면, 보통 사람 같으면 왕의 말을 두려워 하여 왕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애굽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다”(17).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다른 누가 아닌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만을 두려워 하는 것! 애굽 왕은 자신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며, 갓 태어난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생명의 출산을 돕는 산파들은 생각이 달랐다.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애굽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나는 남성이지만, 나는 자주 여성은 참 위대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성 산파들이 애굽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한 이유는 그들의 생명에 대한 원초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 아이를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워 산고와 함께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이 갖는 생명의 경험과 그러한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하는 남자가 갖는 생명의 경험은 절대 같을 수 없다. 남자가 철이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물론 여성이 사회성이 부족한 이유는 군대를 안 갔다 와서 그렇다’,는 속설도 있다.)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생명에 대한 책임 의식이 훨씬 높다. 그래서 생명을 돌보는 일에 대한 여성의 책임은 위대하다.


애굽 왕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산파들을 불러 위협한다. “왜 내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려 주었느냐?”(18). 왕의 위협 앞에서도 여인들의 기지가 대단하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19).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왕 앞에서도 이렇게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 산파들이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Fear of God)’ 때문이었다.


여기서 누가 생명을 보듬고 살리고 있는가? 스스로 힘이 있다고 생각한 애굽 왕이 생명을 보듬고 살리고 있는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생명을 헤치고 죽이려 했다. 생명을 보듬고 살리는 존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한여인들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 구원의 위대한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 여인들의 믿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그 신앙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애굽 왕에 대한 여인들의 반란을 이끌어낸다.

 

애굽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여, 생명을 보듬고 지켜낸 산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떠한 은혜를 내리시는지 보라.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신지라”(20-21). 여기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고 할 때, ‘그들의 집안은 영어로 ‘the house of the mother’이다. 우리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이상한 속담이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성경은 완전히 다른 말을 한다. 그들의 집안이 잘 된 것은, 그들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어머니 때문에 잘 되는 집안, 여성들 때문에 잘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본문에서 또다른 여인을 본다. 그의 이름은 요게벳이다. 히브리 여인들이 가진 믿음은 요게벳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산파들은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중년의 여성들이었겠지만, 임신한 요게벳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산파들에게는 삶의,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있었겠지만, 요게벳은 그러한 것이 별로 없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요게벳 또한 산파들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신앙을 가진 히브리 여인이었다.

 

그도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애굽 왕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리고 세 달 동안이나 살려 두고 아기를 감춘다. 그러나 더 이상 아기를 감출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무시무시한 결단을 한다. “아기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에 떠나 보낸다. 이것은 아기를 죽음에 내모는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아기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다. 본인이 데리고 있으면 아기는 죽게 되겠지만, 하나님께 맡기면 살게 되리라는 믿음에서 온 결단의 행위이다.

 

신앙은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다. 인간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돌보려는 의지이다. 부모의 가장 큰 죄는 자식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신이 자식을 좌지우지 해보겠다고 하는 의지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보지 못하니, 신앙은 점점 수그러들고, 삶의 고민만 늘어가는 것 아닌가.

 

요게벳의 믿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경험하게 이끄는지 보라. 본문에는 또 한 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바로의 딸(하젭수트 / 성경에는 그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이집트 문헌을 통해 학자들이 밝혀낸 이름이다.)이다. 바로의 딸은 누구보다도 애굽 왕의 명령을 준행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나일강에 발견한 히브리 남자 아기를 죽이지 않고, ‘건져내어살린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바로의 딸이 나일 강 가를 거닐 때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5-6).

 

히브리 사람의 아기인 것을 알았다면, 상식적으로 바로의 딸은 그 아기를 죽였어야 한다. 그러나, 그 아기를 보았을 때 바로의 딸의 마음은 강팍해진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겼. 이것은 요게벳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요게벳이 어떻게 바로의 딸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나. 바로의 딸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다!

 

세상을 바꾼 일,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는 이렇게 힘없는 여인들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힘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여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신앙이 세상을 바꾼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가치이다.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무엇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신앙)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담대함을 주고, 지혜를 주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과 생명 자체를 맡길 수 있는 믿음(보이지 않지만, 어떻게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을 준다. 바로 그 믿음이 세상을 바꾼다.

 

나는 이 이야기가 종교개혁의 가치인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한 개혁이라고 생각한다. 1) 산파들은 오직 성경의 가치를 구현했다. 그들은 애굽 왕의 말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했다. 2) 요게벳은 오직 믿음의 가치를 구현했다. 요게벳은 아기를 나일강에 띄우면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아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다. 3) 바로의 딸은 오직 은혜의 가치를 구현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바로의 딸은 아기를 죽이지 않고 살렸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아기 모세는 물에서 건져냄의 은혜를 입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권했다.

 

우리는 신앙의 가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신앙이 나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오직 성경!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 하라! 오직 믿음! 하나님께 맡기라! 오직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가진 신앙의 가치를 힘써 지켜 나가자. 하나님은 힘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워 가시는 게 아니라, 신앙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워 가신다.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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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26. 02:52

순례자를 위한 노래

(시편 121:1-8) 

 

시편 120-134편의 열 다섯개의 시편은 순례 시편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순례를 떠나는 이유는 120편에 나오는데, 그는 고달픈 삶에 지쳐 있어, 순례를 떠나 하나님을 만나 삶의 평안을 회복하고 싶어한다. 특별히 120편은 그 사람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 때문에 마음 속에 큰 생채기 생기고 가시가 생겼다. 평화(샬롬) 가운데 살고 싶었으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샬롬을 잃어버린 그 사람은 순례를 통해 잃어버린 평화(샬롬)을 회복하고 싶어한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우리 모두는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다. 삶이 고달프다고 손쉽게 생명을 놓을 수는 없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평화를 갈망하고 이룰 때 우리는 고달픈 인생을 이겨내며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인생을 그냥 흘러가듯이 사는 사람과, 고달픈 인생이지만 인생을 순례라고 보며 인생의 길을 가는 사람의 인생은 같을 수 없다. 우리는 순례를 떠난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하나님을 만나면, 그리고 그 길 가운데서 복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래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평화를 이루면, 우리의 삶은 복된 삶이 될 것이다.

 

시편 121편은 혼자서 부른 노래가 아니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주고 받는 노래이다. 순례자가 순례를 떠날 때, 어떤 다른 이가 그의 순례의 길을 축복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제 순례자는 여장을 꾸리고 순례를 떠난다. 그는 순례의 여정을 시작하며 눈을 들어 앞에 있는 산을 바라본다. 대개 그 산은 하나님이 계신 시온산’, 예루살렘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는 이유는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삶의 여정 가운데 도움(에제르)’를 찾기 위함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

 

3절에서 시점이 바뀐다. 도움을 찾는 순례자에게 축복하는 또다른 사람이 등장한다. 순례를 나선 이에게 따뜻한 격려와 축복의 메시지를 건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120편에서 말했듯이, 이 순례자는 삶의 자리에서 사람들 때문에 평화(샬롬)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삶의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에게 따뜻한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를 건네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순례자에게 위로와 평안이 되기에 충분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받은 상처는 사람들 사이에서 치유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치유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위로와 축복의 메시지를 건네 줄 수 있는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고, 위로와 평안이 있는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순례의 길 가운데, 인생의 길 가운데 위로와 평안을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위로와 평안을 받는 자보다, 위로와 평안을 주는 자에게 더 큰 복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다. 주님, 인생의 여정에서 주님이 보내주신 이들로부터 위로와 평안을 받게 하시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이 누군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주의 복된 자녀가 되게 하옵소서.”  (순례자의 기도)

 

5-8절은 순례자를 향한 격려와 축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언제나 축복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가장 중심이 되는 구절은 여호와께서 너를 지키신다는 선언이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지켜 주시길 바라는 것일까? ‘무엇7절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환란’, 온갖 불행(-라아)’이다. 복을 빌어주는 사람은 순례자가 그 여정 가운데 만날 수 있는 온갖 불행으로부터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지키심은 그늘과 같다. 이것은 낮의 해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유대땅은 매우 건조하다. 건조한 기후를 일으키는 낮의 해는 사람의 목숨까지도 앗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늘이 매우 중요하다. 엘리야도 이세벨을 피해 도망치다가 로뎀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었다. 로뎀나무는 별로 크지 않다. 아주 작은 그늘을 만들어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건조한 사막 기후에서는 그 그늘이 사람의 생명을 건진다. 크고 시원한 그늘이 아닐지라도, 생명을 건질 수 있는 작은 그늘에도 감사하는 순례자의 모습을 본다.

 

둘째, 하나님의 지키심은 오른쪽에서 동행하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오른쪽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오른쪽에서 구원하시고, 오른손으로 구원하신다. 여기서 오른쪽에서 동행한다는 뜻은 적을 물리치는 든든한 수호자를 뜻하는 동시에, ‘법정 변호인을 뜻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를 해하려는 수많은 적을 만난다. 그리고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오른쪽에 동행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타포적으로, 시시때때로 우리의 오른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동행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 지금 제 오른쪽에 나와 함께 동행하시지요?”

 

셋째, 낮의 해와 반대되는 표현은 밤의 달이다. 그 당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달 신이 사람들에게 재앙과 열병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다. 재앙이나 병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 주는 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재앙과 병을 신이 주는 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현듯 찾아오는 재앙과 병을 예측하거나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재앙과 병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른편에서 동행하시며, 불현듯 찾아올지 모르는 재앙과 병을 막아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지키심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너의 출입은 공간적 개념이고, ‘지금부터 영원까지는 시간적 개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는 신앙 위에서 베푸는 축복의 선언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지키신다. 지켜주시는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에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켜주신다.

 

이러한 축복의 말씀을 들으며 순례를 떠나는 순례자의 마음이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그리고 그는 이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간절하게 마음에 새겼겠는가. 이 축복은 매우 구체적인 축복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구체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지키심이 있다. 그러한 것들을 위해서 서로 구체적으로 축복하며 순례의 길을 가는, 복 있는 순례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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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22. 02:18

우리가 어찌할꼬

(사도행전 2:22~41)

 

요즘은 카카오톡 안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문맹률이 낮고, 스마트폰(컴퓨터) 보급률이 높기 때문이다. 문자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근본적으로 이러한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자만큼 소통하기에 편리한 것이 없다. 그런데, 문자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아낼 수 있지는 못하다. 그게 문자의 한계다. 가령, 카톡을 할 때 문자로 미묘하고 깊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다 담아내기 힘들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이모티콘이다. 이모티콘은 문자의 그러한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게 끔 도와준다.

 

문자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때, 이모티콘을 적극 활용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문자는 보낸 이의 감정보다는 받는 이의 감정이 더 쉽게 개입되기 때문이다. 문자 소통 방법은 문자를 보낸 이의 감정과 상관없이, 받는 이의 감정에 따라 문자가 해석될 여지가 너무 높다. 그래서 보내는 이는 자신의 감정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이모티콘을 활용하면 좋다. 그래야 문자 소통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며 소통에서 생기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다.

 

성경은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고 성경 문자에 이모티콘이 들어가 있어서 그 문장이 담고 있는 감정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례로, 본문에서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직후 그의 설교를 들은 예루살렘의 거류민들(유대인들)이 한 말을 적은 우리가 어찌할꼬의 문자에서 우리는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는가? ‘뭐 어쩌라고?’의 감정이 느껴지는가? 아니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질문처럼 느껴지는가? 아니면, 급박함이 느껴지는가? 문자 소통은 화자보다는 청자의 입장에서 해석될 여지가 너무 많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다. 상상력은 완전히 다른 세상을 구성한다. 인간이 지금 이렇게 동물과 차원이 다른 문명 세계를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상상력때문이다. 그 가장 큰 두 가지의 예가 국가와 돈에 대한 상상력이다.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에 국가의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국가와 돈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개념적인, 상상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국가를 실재처럼 상상하고, 돈을 실재처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국가를 이루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 생명을 바친다. 굉장히 기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본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을 동의한 유대인들이라고 상상하며 말씀을 들어보라.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상상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면, 베드로의 증언(설교)을 듣고 나면 어떤 마음이 들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입에서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질문이 동일하게 나올 것이다. 왜 그런가?

 

본문은 성령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행한 증언(설교)이다. (설교는 태생적으로 증언이다.) 예루살렘의 주민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던 자들(그리스도인)’에게 발생한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현상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이 어찌된 일이냐?”(2:12). 이에 대해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서서 이 일이 어찌된 일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 앞에서 증언(설교)을 한다.

 

베드로가 증언(설교)을 위하여 인용하는 성경은 요엘서이다. 요엘서는 말세(종말)’에 대한 예언을 다루는 선지서이다. 요엘 선지자는 종말에 벌어질 일들에 대하여 말한다. 종말에는 하나님의 영(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고, 하늘과 땅에 어떠한 기사와 징조들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참된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베드로의 증언의 핵심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승천을 종말론적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사건은 종말의 시간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깨달음이고 생각의 전환이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줄 알았는데 거꾸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고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혁명)’이라고 부른다. 베드로는 지금 그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예수의 사건은 시간의 질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종말이 이 시간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우리는 더 이상 그냥 시간을 살지 않고, 종말의 시간을 산다.

 

종말의 시간이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한 새 창조의 시간이다. (종말은 멸망의 시간이 아니다. 심판은 존재를 새롭게 하기 위한 과정이지, 존재를 괴롭히는 멸망의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부활은 하나님이 전 우주에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사망을 무력화시킨 사건이다. 더불어 예수가 누구인지 드러나는 사건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다!

 

베드로는 이 일을 다윗이 예언자로서 증언했다고 논증한다. 그 논증을 위해 쓰인 말씀은 시편 16편의 말씀이다. 베드로가 인용하고 있는 시편 16편의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윗은 고백하기를,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하게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9-10)라고 한다. 베드로는 이 부분이 다윗의 예언이라고 말한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지만, 그의 고백대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게 아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다윗은 죽지 않아야 한다. 다윗은 죽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말씀이 다윗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 거룩한 자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 거룩한 자당신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자(하씨드카)’라는 뜻이다. 또한 여기서 은총은 문맥상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몸과 영혼을 분리해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지금 증언한다. 하나님께 그 은총을 받은 자, 주의 거룩한 자가 바로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증언(설교)를 통해서 예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밝힌다. 첫째, 부활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말한다. 둘째, 부활을 통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 지금 오순절 아침에 여러분이 본 사건(광경),은 하나님이 여러분이 십자가에 위에서 죽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자신의 우편에 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성령을 받아, 모든 육체, 모든 만민에게 부어주셨다!” 이게 바로 요엘서와 시편에 예언된 것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큰 일이라는 것이다. 성령이 오신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및 그의 주 되심의 사건에 대한 증거이다.

 

,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처음 시작할 때, 주문했다. 자신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을 동의한 유대인이라고 상상해 보라고. 그러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의했던, 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던 청중들이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다! 그들이 주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그들은 큰 일 난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말하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태복음 21:33-40)와 같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태복음 20:1-16)과 헷갈려서는 안된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천국이 무엇인지를 비유를 설명하신 것이고,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유대 지도자들과의 권위 논쟁을 할 때 하신 비유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우선시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런데,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그들이 행한 일이 어떤 일인지 낱낱이 드러난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들을 농부들에게 주고 떠났다. 시간이 지나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 열매를 얻으려고 사람을 보냈다. 처음에는 종을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종을 잡아 죽였다. 그렇게 몇 번을 주인은 종들을 보내 포도 열매를 얻으려 하지만, 농부들은 그 종들을 다 죽인다. 그러자 주인은 마음을 바꾸어 자신의 아들을 농부들에게 보낸다. 그런데 농부들은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라고 말한 뒤, 주인의 아들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여버린다. 이 이야기를 마치며 이런 질문이 뒤따른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은 어떻게 하겠느냐?” 여러분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농부들이고, 마침내 주인이 포도원을 찾았을 때, 여러분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겠는가?

 

베드로의 증언(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이렇게 반응했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 말이 어떻게 다가오는가? ‘뭐 어쩌라고고 다가오는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지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질문처럼 다가오는가? 아니면, ‘아 큰 일 났구나.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 망했구나.’라는 탄식이 섞인 급박함으로 다가오는가? 이러한 급박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사건이 여전히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사건이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는 차원이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급박하여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38). 이것은 대단한 역전이다. 무지 가운데서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자신들이 죽인 바로 그 예수가 자신의 구원자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성경이 쓰여진 이유는 바로 예수의 사건을 소상히 보면서 우리에게도 무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이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의 급박한 질문을 던졌던 것과 동일한 질문을 던지게 끔 하기 위해서이다.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또는 그 증언을 동일하게 전하는 설교자의 증언을 통하여 우리가 어찌할꼬?”의 긴박한 마음을 가지게 된 분들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려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사망 권세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 받은 자 답게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라. 죽음이 두려워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죽음이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삶을 살라. 그러다 죽어도 괜찮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성령의 능력 안에서 부활하게 될 테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난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사하다. 이렇게 멋진 삶을 살게 해 주신 주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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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17. 09:04

잃은 양의 시편

(시편 119:105-112) 

 

제목을 정하고, 마음이 흐뭇했다. 원래 119편은 토라시로 불린다. 그런데, 내가 119편을 잃은 양의 시편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마지막 절 때문이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119176). 무리를 떠나 길을 잃은 양이 길을 찾아 무리로 돌아가기 위해 얼마나 애타는 심정이었겠는가. ‘살려달라고 내지를 수 있는 가장 간절하고 큰 소리로 구원을 호소했을 것이다. 또한, 잃은 양을 찾아나선 부모와 무리의 심정을 어떠했겠는가? 동일한 마음으로 살려달라고 내지를 수 있는 가장 간절하고 큰 소리를 구원을 호소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구원을 간구하는 잃은 양이다.

 

시편 119편은 가장 긴 시편이면서,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이다. 일명 토라 시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총 22연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토라즉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모함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편 119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119편은 크게 다섯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단락(1-24)복 있는 자에 대한 노래를 담고 있다. 첫 단락에서 시인은 묻는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우리 인생은 모두 행복을 찾아 나선 방랑자와 같다. 각자 나름대로 삶 속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찾아 누리며 산다. 그런데 시인은 이 노래를 통하여 누가 행복한 사람인지를 알려준다. 사실, 이것은 비밀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귀 기울일 만하다.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주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며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정작 행복한 사람이 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알려주지도 않는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지혜의 비밀을 알려준다.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주의 말씀을 사모하라!” 시편 1편도 같은 말을 한다. “복 있는 사람은(행복한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이것을 우리는 얼마나 실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실생활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렇지만,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 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며 사는가? 세상은 물질에 압도되어물질을 많이 가지면 행복할 거라고 가르친다. 전혀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물질을 많이 가지게 된 것 때문에 자신이 행복한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삶이 갑자기 무너진다. 이런 빈곤한 인생이 없다. 물질은 신기루와 같아서 마치 우리가 행복한 것인 양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에 취해 살다가 어느 순간 삶이 무너지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게 현대인들의 불행이다.

 

모두 다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다.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는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행복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까이 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나의 인생은 왜 이럴까, 한탄만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에게, 우리의 자식들에게 비밀의 지혜를 가르치자.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 주야로 묵상해 보라.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 신비하게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자녀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

 

두번째 단락(25-48)말씀이 가리키는 길에 대한 노래가 담겨 있다. 우리는 지금 길을 걷고 있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좋은 메타포이다. 그런데, 이 길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 줄지 몰라 우리는 날마다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한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이라는 길을 걸으면,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번째 단락(49-88)기억하고 지켜야 할 말씀에 대하여 노래한다. 시인은 기억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쓴다(49, 52, 55).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다. 말씀을 기억해 두면, 고난과 시련의 시간에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면 죽는다. 실패한다.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기억하면 산다. 성공한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에 대한 보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스마트폰 때문에 현대인들이 기억력은 스마트하지 않다. 기계에 의존하게 된 포스트 휴먼(Post-human)은 생명을 얻고 있는가, 잃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전화번호를 기억해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다 돼서 스마트폰을 켤 수 없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가? 구글 맵이 없으면 길을 모르는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암송의 전통이 사라진 것을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려 하지 않는다. 키워드만 넣으면 어렵지 않게 스마트 폰을 통해서 원하는 말씀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기억인가?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기계에 맡겨 놓고 무슨 일을 하면서 사는가? 기억을 맡겼다는 것은 생명을 맡겼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정말 생명이 있는 존재인가?

 

기억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되다. 그러나 기억된 순간 우리는 그 기억으로 인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생명을 살리겠다는 교회가 가장 중요한 생명 살리는 일을 안 하면 모순인 것이다. 한 구절만이라도 외워보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 그리고, 나 자신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는 것에 대한 사모함과 열정을 쏟아보자. 우리가 말씀을 붙들면,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말씀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 정말 그렇다. 그 경험을 하고 나면,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 구원의 밧줄인지 깨닫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네번째 단락(89-144)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노래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혜롭고 값지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자신을 노인보다 지혜롭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순금보다 값지다고 노래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길을 비추시는 빛이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깜깜한 길을 온전히 걷지 못한다. 위험에 처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시기에 우리의 길을 안전하게 인도하신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락(145-176)말씀과 기도에 대하여 노래한다. , 의인의 삶에 대하여 노래한다. 말씀과 기도는 의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단락 중에 있는 이 말씀이 눈에 들어 온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니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147-148). 의인은 말씀을 묵상한다. 의인은 묵상한 말씀에 근거해서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한다.

 

그냥 아무렇게나 주저리는 기도는 의인의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기도다. 의인은 말씀에 기대어 기도한다. 말씀과 기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지만, 말씀 없이 기도할 수 없다. 말씀을 사모하여 묵상하는 자는 그 말씀에 기대어 기도하게 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말씀은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기도를 불러온다. 기도가 안 나오고 기도를 못하는 사람은 말주변이 없어 그런 게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지 않아서 그렇다.

 

시편 119편은 지루하게 긴 시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귀하고 값진 것이라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절절하여 그 절절한 마음을 오롯이 담아내느라 길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말씀의 귀함을 어떻게 다 담아내겠는가. 그 간절한 마음이 마지막 176절에 담겨 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잃은 양이라고 말한다. 서두에 밝혔듯이, 자기 자신을 잃은 양으로 생각하여 구원을 갈망하며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은 반드시 잃은 양을 찾으시는 구원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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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10. 08:03

토브와 헤쎄드

(시편 118:1-9)

 

시편 118편은 제의 시편으로 분류된다. , 이스라엘 공동체가 다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던 시편이라는 뜻이다. 제의 시편이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고, 서로 주고 받는 교독의 형식이 나타나는 것도 특징이다. 두 무리가 서로 마주 보고 서로 주고 받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서, 제의를 이끄는 제사장이 1절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한 뒤,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이라고 선창하면, 제사장 무리들을 뒤따르는 모든 회중이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후창한다. ,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이라고 하면, 제사장 무리들이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한다.

 

이들은 왜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일까? 이들의 감사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토브와 헤쎄드이다. 토브는 선하다는 뜻이고, 헤쎄드는 인자하다라는 뜻이다. 선함과 인자함(사랑)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이다. 이것은 신앙의 대원칙이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며 산다.

 

5~9절은 인도자의 독창이다. 인도자의 고백은 개인의 고백이기도 하고 공동체의 고백이기도 하다. 인도자가 독창을 하고 있지만, 이 예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대신한 고백이기도 하다. 예배는 같은 경험을 한 자들의 모임이다. 같은 경험을 한 자들이 모였을 때 예배는 더 깊은 감사와 찬양이 넘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어떠한 연대성이 묻어난다. 그것만큼 공동체를 끈끈하고 든든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5절의 말씀이 인상적이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5). 우리말 번역에는 히브리어의 문학적 기교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반의적 평행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고 있다. 우리말로 고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메차르비좁은 곳이라는 뜻이다. 이 뜻을 살려 다시 번역하면, “내가 비좁은 곳(메차르)에서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메르하브)에 세우셨도다이다.

 

이 구절을 현대인들의 심상으로 읽으면 탐욕스럽게 변한다. 요즘 현대인들은 비좁은 곳’, ‘넓은 곳’, 이러한 심상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비좁은 평수의 집, 넓은 평수의 집, 또는 작은 차, 큰 차,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위의 구절을 이렇게 오해한다. “내가 좁은 평수에 사는 것에 대한 고통을 아뢰었더니, 주님께서 응답하셔서 큰 집으로 이사하게 하셨다!” 성경을 자기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데 쓰는, 명백한 오용이다.

 

이 구절은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의 심상을 가지고 들여다 보아야 한다. 유목민들에게 넓은 곳은 소와 양을 먹일 수 있는 목초지의 심상을 가지고 있다. 이 구절은 오히려 시편 23편의 구절이 떠올라야 한다.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에게 넓은 곳이라는 뜻은 매우 긍정적인 심상이다. 이것은 절대 탐욕의 표출이 아니다.

 

이 심상을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의 이야기에 적용해 볼 수 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여 살아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셔서 키우는 양떼와 소떼의 수가 많아지게 하셨다. 그때 발생한 문제는 좁은 목초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 더 넓은 곳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넓은 곳으로 간다는 의미는 욕망의 발로가 아니라, 생명이요 축복의 의미였다. ‘넓은 곳의 심상은 그들에게 구원을 의미하기에 좋은 심상이다.

 

또한, 6절과 7절에서 조심해서 해석해야 할 구절이 등장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이기심의 고백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이다.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고백하며, 여호와는 언제나 나의 편에 계시다는 신뢰의 고백이다. 이러한 내 편의 신앙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은 경험을 했다. 그러나, 그런 경험 가운데서도 예수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자신의 영혼을 맡겼다. 이게 바로 여호와는 내편이라고 하는 신뢰의 고백이 담고 있는 뜻이다.

 

7절 말씀은 짧지만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독창자는 내 편이 되신 여호와께서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원수들이 지켜보고 있다. 고통을 당하는 자의 고통은 자신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그 고통으로 인하여 이웃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 함께 예배 드리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토브)과 인자하심(사랑, 헤쎄드)을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사랑)은 나에게 전해지지만, 나를 통해서 고통 당하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 공동체는 하나님의 토브와 헤쎄드를 구현하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렇게 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7절의 짧은 말씀 안에는 반전이 담겨 있다. 7절의 앞 문장은 원수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나와 이웃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면, , 원수들이 고통 당하는 우리들을 지켜보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면, 7절의 뒷 문장은 하나님의 토브와 헤쎄드로 인하여 상황이 역전된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들이 보응(고통) 당한 원수들을 지켜보게 된다는 것이다. 시선의 역전이 이루어졌다.

 

8절과 9절을 통해서 독창자는 이러한 구원의 역전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온전히 하나님께 돌린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고관을 의지하는 자는 이러한 구원의 역전을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나 고관은 토브와 헤쎄드가 영원하지 않거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이러한 구원의 역전을 창조해 내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 예배 공동체는 사람을 의지하거나 고관을 의지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한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내 편 되심을 의심하지 말고,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옮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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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10. 8. 02:22

이것은 예언의 성취다

(사도행전 2:14-21)


오순절에 발생한 일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이 있었다. 한 부류는 그 일을 보고 놀라서 당황했고(amazement and great perplexity), 다른 부류는 그들이 술에 취했다며”, 조롱했다. 인간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우리는 대개 이러한 반응을 보인다.

 

본문은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에 대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사도들이 사람들 앞에 서서 이 일이 어떠한 일인지에 대한 증언을 전하고 있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사람들 앞에 서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14).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우선, 베드로는 그들이 조롱하고 있듯이, 이 일은 술 취해서 일어난 일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그 근거는 시간이었다.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15). 3+6하면, 오전 9시가 된다. 물론 아침부터 해장술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아침부터 집단적으로 술을 마시는 일은 그 당시의 문화 뿐만 아니라 지금의 문화에서도 없는 일이다. 술 취한 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니 베드로는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말한다.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구약성경의 예언서 중 하나인 요엘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가 요엘서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것은 술 취해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한마디로,이것은 예언의 성취다!”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베드로와 열 한 사도는 어떻게 이것이 예언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이다.  유대인들이 보는 구약성경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약성경이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약성경은 히브리인들에게는 ‘Hebrew Bible’이라고 불리고, 그들은 히브리어로 그것을 타나크(Torah, Nebiim, Ketuvim)’라고 한다. 모세오경과 예언서, 그리고 성문서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르는 것이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이 일에 대하여 이것은 예언의 성취다라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이들이 성경공부를 진지하게 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물론 명시적으로 제자들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더라같은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다나엘(바돌로매)의 일화에서 보듯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이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수 사건에 휘말리고 나서, 제자들은 당연히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이게 뭐지?”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그들은 성경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베드로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다. 지금 자기의 인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에게는 영적분별을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했다. 그리고,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들에게 발생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예언의 성취였던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들어면서, ‘, 지금 목사님이 성경공부 하자고, 성경공부에 들어오라고 말씀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나는 여러분의 자유를 존중한다.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여러분의 자유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성경공부에 들어오라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열한 사도는 어떻게 자신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하여 예언의 성취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예수의 사건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배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의 유익을 준다. 아주 실질적인 유익이다. 첫째,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둘째,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결국, 성경을 깊이 알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


내가 몇 번 증언했지만, 여러분이 얼마나 귀담아들으시고, 그것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실천하시는지 모르겠다. 내가 조지아에서 이곳 캘리포니아로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첫째, 사도행전 169절의 말씀 때문이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씀 때문에 나의 삶, 우리 가정의 삶이 바뀌었다. 그리고, 두번째, 우리교회와 연결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은 에스겔 166절의 말씀이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이다. 이 말씀을 듣고, ‘, 이 교회가 힘들구나. 그러나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구나라는 생각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왔다. 이 말씀 때문에, 나는 이곳에 왔고, 여기서 아주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간다.

 

성경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나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져야, 그래야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 있게 살 수 있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라. 베드로가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서 이것은 예언의 성취다라는 증언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삶은 의미로 채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성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사도행전의 말씀을 몰랐고, 에스겔의 말씀을 몰랐다면,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 예언의 성취’,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고, 아직도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른 채,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 찬송을 참 좋아한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찬송가 347 1). 산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이다. 힘들고 어려운 게 참 많다. 그런데, 나는 참 행복하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어, 나의 마음은 늘 뿌듯하고 평안하다. 마음이 낙심되지 않고, 희망이 넘친다. 왜 그럴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은 그냥 아무렇게나 사는 삶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공부한다는 것,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삶을 바꾼다. 내 인생에 벌어지는 그 수많은 사건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그 사건들 속에서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에, 삶 자체의 질이 다르다.

 

이것은 예언(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야”,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삶의 사건이 있는가? 우리 삶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예언의 성취인지 아닌지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 사건들이 예언의 성취인지 아닌지 알려면, 그것을 알아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을 바꾸고, 질이 다른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면, 성경공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렇게까지 증언했는데도 성경공부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는 분까지도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주 안에서 날마다 승리하고 행복하기를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바라며, 불철주야 여러분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가며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이 부족한 종의 이 절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느껴지시는 분은, 마음을 돌이켜 발걸음을 돌려보시라. 성경공부는 교회의 이벤트/행사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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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9. 30. 13:23

성령과 방언

(사도행전 2:1-13)

 

본문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한 사건을 전하고 있다. 이때만 해도 성령이 어떤 분인지 잘 몰랐다. 기독교 역사/신학에서 성령론이 자리잡은 것은 성령강림절 후 3,4백년이 지나서이다. 특별히 329년에 태어나서 390년에 죽은, 갑바도기아의 교부 중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에 의해서 기독교의 성령론은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성령론을 영어로 ‘pneumatology’라고 한다. 헬라어로 성령을 프뉴마라고 하기 때문이다. 성령론은 성령이란 무엇인지’, 성령의 본성에 대하여 논하는 분야이다. 성령론의 발전은 기독론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고, 성령론의 발전과 함께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 발전된다. ,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person)이다. 이것을 아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정말 중요하다. 이것을 모르면, 성령을 어떤 귀신이나, 또는 알라딘 램프에 나오는 지니 같은 존재로 취급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알 수 없듯이, 성령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본문에서도 성령의 임재를 묘사할 때 모두 비유를 들어서 설명할 뿐이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이라든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등은 비유적인 표현이다.

 

성령의 임재를 묘사하는 낱말 중, 가장 중요한 낱말은 홀연히(아프노)’이다. 홀연히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아프노갑자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의 뜻을 가지고 있다. 성령은 우리가 임하라고 해서 임하는 분이 아니다. 알라딘 램프의 지니는 램프를 문지르면 나타난다. 램프의 주인인 알라딘이 소환하면 지니는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 그런데, 성령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이여 임하소서!’라고 주문을 건다고 성령이 임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성령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다. 성령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은 홀연히임한다.

 

홀연히라는 말은 우리의 신앙에 두 가지 큰 의미를 준다. 하나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간구할 때에 그것이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홀연히의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홀연히의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자칫 잘못하다간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실망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주실 때, 우리는 낙심하여 하나님이 안 계신가보다한다. 그런데, ‘홀연히의 믿음의 입장에서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낙심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처럼 ~’하고 나타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실 의무가 하나님에게 전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교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 ‘홀연히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홀연히나타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가 더 이상 안 된다고 할 때, 더 이상 소망을 갖지 못할 때, 더 이상 무엇인가를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홀연히나타나셔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하신다. 이러한 홀연히의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섣부르게 낙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홀연히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홀연히 나타나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홀연히의 믿음을 너무 좋아한다.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소란을 떠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이 아니라, 온유와 겸손으로 잠잠한 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삶을 돌보신다. 지금 이곳에서도 그러한 홀연히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지만, 좀 더 세월이 지나서 그 은혜를 나누기로 하고, 한 가지, 조지아에서 경험한 홀연히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교회 건축할 때, 기도 의자를 만들면,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기도하는 시간만큼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다. 내가 1시간 기도하면 하나님은 1시간 일하실 것이고, 내가 10시간 기도하면 하나님은 10시간 일하실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만큼 일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상관 없이 일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홀연한 역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땅에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다.

 

기도 의자를 만들고, 그 기도 의자를 의지하여 교회 건축을 위해 2년을 기도했다. 부족한 게 많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기도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기도 의자에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를 시작하면, 대개 2시간 정도 기도를 했다. 그렇게 2년을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다. 마음에 약간 낙심이 왔다. 그래서 하나님께 넋두리를 했다. “주님, 이렇게 응답을 안 주십니까? 낙심되지만, 주님께서 더 기도하라고 하시는 줄로 믿고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하박국의 말씀을 묵상했다.

 

그런데, 하박국 23절의 말씀을 읽는 중이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순간,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성경에서 매직 아이처럼 한 건물이 떠올랐다. 그래서 수련목 전도사님에게 차를 대라고 하여 그 매직 아이처럼 떠오른 건물이 있는 곳에 가 보았다. 그랬더니, 그 건물과 부지가 For Sale로 나와 있었다. 간판에 적혀 있던 전화번호로 곧바로 전화를 했는데, 가격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러면서 교회 건축 프로젝트가 진행이 되는데, 정말 홀연히임한 하나님의 은혜였고, 수많은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다른 일들은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나누겠다.)

 

우리가 홀연히의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또한 걱정 근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홀연히역사하실 것이다. 이것을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있는 삶을 사는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자의 입술에는 감사와 찬송, 그리고 간증이 늘어간다. 누군가에게 들려줄, 그리고 누군가 들었을 때에 흥미진진한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홀연히 임한 성령이 제자들에게 건네 준 것은 방언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된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방언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이지, 방언이 곧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방언이 엉뚱한 증명서가 된다. 방언을 하면 마치 성령을 받은 것처럼, 방언을 하지 못하면 마치 성령을 받지 못한 새내기 신앙인처럼 취급하는 데 잘못 쓰인다.

 

많은 이들이 이런 의심을 갖는다. “목사님, 저는 방언을 못합니다. 방언을 하고 싶은데, 방언이 나오질 않습니다. 저는 성령을 받지 못한,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요?” 이것은 방언만이 성령의 역사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령과 방언은 별 상관관계가 없다. 물론 성령께서는 방언이 필요한 이들에게 방언을 주시지만, 방언이 곧 성령의 임재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을 접하면서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을 때, 왜 방언을 했을까?”

 

방언은 자기 자랑의 도구가 아니다. 방언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다. 방언하는 사람이, ‘나 성령 받았나봐. 나 신앙이 좋은가봐하면서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는 신앙인처럼 생각한다면, 오히려 방언을 받지 아니함만 못한 것이다. 본문에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이 방언을 하게 된 이유는 11절에 나와 있다. 열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인 사람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듣고 자기들끼리 한 말이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제자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내린 이유는 오순절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열방의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게 끔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울리는 꾕과리와 같은 소음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때로 이러한 불경한 생각을 한다. ‘성령이 계시다면, 나에게 임하셔서 내가 방언을 할 수 있도록 한 번 해 보세요!’ 방언은 내 의심을 종식시키는 도구이거나, 하나님을 시험하는 도구가 아니다. 방언은 오직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기 위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선물)이다.

 

처음, 제자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 그들이 성령을 통해 받은 은사는 방언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제자들은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 우리가 초대교회 제자들처럼 방언을 받게 될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게 필요하다면 방언을 받겠지만, 아마도 방언보다는 다른 은사를 주어서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게 하실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이미 구글통역기가 받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성령은 홀연히 임하신다. 그리니,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달라고 자해수준으로떼쓰지 말라. 잔잔하고 묵묵히, 성실하게 신앙생활하다 보면, 성령은 홀연히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아니, 우리가 묵묵히 성실하게 맡은 바 사명을 다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 안에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실 지 모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큰일을 증언하고자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성령은 때와 상황에 맞게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은 은사를 주어, 그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큰일을 열방에 증언하도록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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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9. 24. 00:32

부활과 사도

(사도행전 1:12-26)

 

어떤 사건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렇다고 동일한 사건 경험이 동일한 행동을 낳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일제 시대를 경험했으면서도 그에 대한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다. 일제에 부역하거나, 무관심 하거나, 또는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거나.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였겠는가.) 사건의 경험은 그 사람의 본성/본질을 드러내 준다.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적인 경험은 사뭇 다른 반응을 불러온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충격적인 절대 경험을 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경험했고, 무엇보다 부활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승천을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경험들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그들에게 믿음을 넣어 주시지 않으면 경험을 하고도 경험하지 못한 신비로운 경험들이다.

 

아무튼, 그들은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적인 경험을 예수의 사건을 통해 경험했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결단을 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그들을 아주 특별한 삶으로 이끌었다. 그들이 그러한 삶을 주도적으로 선택했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성령에 이끌려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

 

주체’, ‘자기 생각’, ‘너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상황일 수 있다. ‘내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현대인들에게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는 개인권리에 대한 침해 정도로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적인 경험은 나와 너사이의 구분을 없앤다. 그 순간이 바로 구원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나와 너의 사이를 구분 짓는 온갖 경계를 허무는 사건이다. 구원의 순간에는 나와 하나님사이의 구분도 허물어진다. 구원은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일치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살면서 그러한 구원의 순간을 잠깐 잠깐 경험하면서 산다. 바로 사랑의 순간이다. 사랑은 그래서 위대한 거다. 우리의 죄성이 그 사랑을 지속시키지 못해서 그렇지, 사랑을 통해 우리는 잠깐의 구원을 경험한다. 사랑하면 나와 너를 구분 짓는 경계가 허물어지고, 사랑은 나와 너를 하나 되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경험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돌아왔다.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의 명단을 열거한다. 그 명단에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와 여자들(여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들(어머니와 형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거기에 머물렀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그 자체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행동적 선포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경우, 어느 도시에서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가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그 아내나 남편, 부모는 그 도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다른 장소로 이주해야 했다. 그들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 임한 저주가 그 도시에 머무르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명의 삶 플러스, 20186월호, 30). 신명기 2123절에 이런 말이 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 당시,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랬다. 십자가 처형은 일종의 낙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동생들은 다른 도시로 이주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은 너무도 명백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알고 있었던 주변 사람의 시선이 얼마나 따가웠겠는가. 게다가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처형시킨 당국의 당사자들은 얼마나 그들이 불편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과 가족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떠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들이 유하고 있던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했다. 이들이 한 곳에 모인 이유, 그리고 그곳에 모여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한 이유는 부활때문이었다. 부활의 경험은 이렇게 일치된 마음과 행동을 낳는다. 이들 모두 한 성령에 이끌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일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이루어 한 곳에 모여 기도하며 예배하고, 봉사하는 한 가지 절대적인 이유는 예수의 부활 경험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들이 모여서 한 마음으로 기도한 뒤, 행한 행동 또한 매우 특이하다. 이것 또한 예수의 부활에 대한 행동적 선포이다. 그 행동을 촉발한 이는 사도 베드로다. 베드로가 촉발한 행동은 가룟 유다가 배반함으로서 공석이 된 열두 번째 사도의 자리를 채우는 일이었다. 베드로는 그것이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69:25),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109:8). 이 말씀은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다른 사도가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으면, 사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부활이 없었다면, 이들은 그냥 모두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부활 경험이 없는데, 이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사내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 없었다.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에겐 부활을 증언할 사도가 필요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대신할, 열 두 명의 사도 말이다.

 

베드로는 열 두 번째 사도를 선출할 필요성을 말한 뒤, 사도의 조건과 직무를 말한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21-22a)여야 한다. 사도는 다른 열 한 명의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해야한다(22b).

 

사도의 직무는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자이다. 다른 말로 해서, 사도는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자이다. 그러나, 한 명의 사도를 뽑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당시에 적어도 500명은 되었기 때문이다(고전 15:6). 그러면 그들 중에 누가 사도의 직무를 수행할 조건을 갖춘 사도가 될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이 열 두 사도(제자)를 부르실 때,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와 똑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26). 수많은 후보 중에 최종 후보로 올라간 이는 두 명이었다. 바사바(Barsabbas)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Justus)라고도 하는 요셉(Joseph)과 맛디아(Matthias). 이들은 제비 뽑는 방식을 통해서 이 둘 중에 맛디아를 열 두번째 사도로 선출한다. 이들이 제비를 뽑았다는 것은 주사위 놀이하듯, 운명, 행운에 사도 선출을 맡겼다는 뜻이 아니라, 사도의 선택이 그리스도/하나님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의 선택 원리는 자격(qualification)아니라 선택(calling/부르심)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선택 때문이다.

 

부활 경험은 하나님이 다가오시는 절대 경험이다. 그러한 절대 경험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우리는 그 경험에 압도되어 다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어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을 했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흩어질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부활을 증언하기 위하여 모였으며, 다른 열 한 사도와 더불어 함께 부활을 증언할 열 두 번째 사도가 필요했다. 그들은 주님께 기도했고, 주님의 선택에 맡겼다. 열 두 번째 사도로 뽑힌 맛디아는 주님이 선택한 사도가 되어, 주님의 부활을 증언했다.

 

우리는 지금, 사도의 증언을 듣고, 그 증언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사도의 증언을 듣는다는 것은 그냥 어떤 사람의 증언을 듣는 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는 것과 같다. 그게 바로 사도에게 주어진 권위이다. 교회는 사도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사도의 증언을 담고 있는 성경은 그래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사도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다. 우리는 사도의 증언을 듣고,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다. 사도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그 일치가 구원이다. 예수의 부활과 사도의 증언,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도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 우리들은 하나님께 선택 받은 자들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이 부활의 은혜를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사도들과 더불어 증언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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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9. 2. 02:49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유다서 1:1-25)

 

유다서의 저자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이다. 예수님의 동생 중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또다른 동생 유다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초대교회를 지켜온 인물 중 한 명이다. 신약성경(특별히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배척 받으시는 장면을 기록하며 그의 동생들 이름이 거론될 뿐이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으냐”(13:55). 이런 정황을 볼 때, 유다는 예수님의 막내 동생이었던 것 같다. (아닐 수도 있다. 성경은 예수님의 가족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1절에서는 두 가지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저자 유다가 특별히 야고보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유이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일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이 야고보이다(12:2). 대신,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초대교회의 기둥 중 한 명이었다. 유다가 야고보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유는 야고보의 권위에 기대어 말씀을 전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야고보의 권위를 인정했기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이 서신 또한 그들에게 진중하게 읽혔을 것이다.

 

둘째, 인사를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1b). 이것을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소유로 보존된(완료형 분사)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 번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계속 주님에 의해 거룩함이 보증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하여 논쟁이 되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 받은 사람은 그 이후에 어떠한 죄를 지어도 그 구원을 보장 받느냐, 아니냐, 에 대한 논쟁이다.

 

유다가 이렇게 야고보의 권위에 기대어 교회를 위하여 편지를 쓰는 이유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권면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권면하는 근본적인 이유, 즉 초대교회가 직면한 문제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때문이었다. 표현이 참 재밌다. 이 사람들은 왜 가만히들어왔을까?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그들이 교회에 들어와 조금씩 성도들에게 다가가 인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애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 말은 이제 그 가만히 들어온 이들이 신뢰를 얻어 그들의 말과 행동에 영향력이 생겼다는 뜻이다. 영향력이 생긴 그들이 어느 순간 잘못된 가르침을 교회 공동체에 퍼뜨렸던 것이다.

 

가만히 들어온 이들의 잘못된 생각은 교회 공동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위에서 이야기한 구원의 보장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도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믿음으로 인하여 단번에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물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있는 것을 확신하면서, 신독(누가 있든 없든 성실하게 그 일을 행하는 것)에 힘쓸 것이다. , 믿음에 합당한 삶(윤리적인 삶)을 살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온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논리는 매우 신앙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방탕한 것이었다. , 그들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구호를 외치듯,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방탕한 삶을 살아도 괜찮은 양 교회 공동체를 흔들었다. 이렇게 믿음의 도를 엉뚱하게 해석하고 그 믿음의 도를 가지고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무리들을 일컬어 유다는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고(8), 특별히, 그들을 일컬어 본능에 충실한 이성 없는 짐승이라고 말한다.

 

유다는 그들을 구약에 등장하는 몇 명의 인물에 빗대어 폭로한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11). 유대교 전통에서 가인은 불경의 선조, 궤변을 사용하는 악행의 대명사로 묘사된다(필로, 요세푸스의 기록). 발람은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 했다(23:4-5, 13:2). 또한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만들었다(2:14). 고라는 다단, 아비람과 함께 당을 짓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한 인물이다(16:1-35, 26:9-19, 106:16-18). 유다가 구약에 등장하는 최고의 악당들을 동원해서 가만히 들어온 이들을 폭로하는 이유는 그들이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교회의 권위있는 가르침에 도전하여 교회 공동체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가만히 들어온 자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16). 다른 말로, 이들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나, 사실 이들에게는 믿음의 도가 전혀 없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초대교회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대교회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재림 지연이었다. 이것은 마치, 성춘향이 직면했던 문제와 같다. 성춘향과 이몽룡이 사랑을 키워가던 중, 남원 부사였던 몽룡의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임명되면서 몽룡도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이몽룡을 돌아와서 자기와 혼인해 주기만을 기다리던 성춘향은 큰 문제에 봉착한다. 기다리던 이몽룡이 생각처럼 빨리 돌아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어느날 이몽룡이 돌아왔는데, 거지꼴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춘향은 정절을 지키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남원부사 변학도의 횡포가 심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상황이 마치 성춘향과 같았다. 돌아온다던 그리스도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시고, 주변의 핍박은 늘어가는 상황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의 역사가 2천년이 된 지금 더 심각하다.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실 것처럼 생각하여, ‘먹고사니즘귀차니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정절을 지키기 포기한 방탕한 성춘향이 된 것은 아닌가.

 

믿음의 도를 굳게 붙들며 살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 유다는 이렇게 권면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17, 18). 우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신뢰하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다음의 말씀을 우리 각자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의 심장에 새겨야 할 것이다.

 

(함께, 거룩하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읽어보자.) “사랑하는 자들아 /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 성령으로 기도하며 /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20-23).

 

성춘향은 정인 이몽룡이 돌아올 것을 믿었기에 정절을 지킬 수 있었다. 만약, 변학도가 성춘향의 그 거룩한 마음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다면, 성춘향한테 몹쓸 짓을 저지르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변학도가 암행어사가 언젠가는 와서 자기의 죄를 드러내어 심판할 거라는 것을 마음에 품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감히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학도는 성춘향의 거룩한 마음도 헤아리지 않았고, 암행어사가 출두하게 될 거라는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본능에 충실한 이성 없는 짐승'처럼 행동하며 남원의 선량한 백성 공동체를 괴롭히고 무너뜨렸다.

 

그리스도께서 오고 계신다. 아니, 그리스도는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시다. 이것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깨닫고 그 진리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도의 질이 달라진다. 우리의 믿음의 도의 질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영원히 지키신다. 그러나 이것을 오해하는 사람은 그 구원에 머물지 못하고 그 구원을 오히려 타락시킨다. 그러한 불경한 마음이 들거든, 유다서의 말씀을 굳게 붙들라. 생명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축복한다.

 

여러분을 지켜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기쁨 가운데 그분의 영광 앞에 흠 없이 서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우리 구주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능력과 권세가 만세 전부터 그리고 지금과 영원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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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8. 29. 05:05

동역의 의미

(빌립보서 2:18-30) 

 

제목을 동역의 의미로 정하고 보니, 김창완의 노래 너의 의미가 떠올랐다. 최근 아이유가 불러 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너의 그 한 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바울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생각했을 때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향한 바울의 마음은 너무도 애틋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 빌립보 교회는 그런 바울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의 옥바라지 자금을 댔고, 그를 돌볼 사역자도 파송했다. 그렇게 빌립보 교회의 파송을 받고 로마에 와서 바울을 돌본 사람이 에바브로디도다.

 

본문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바울,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로디도. 이 세 동역자는 빌립보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사역을 같이 한 사람들이다. 바울은 빌립보 지역에 복음을 최초로 전한 사도이고, 그를 통해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실한 동역자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로 파송한다. 그러면서 바울을 디모데를 그 교회에 파송하는 이유를 밝힌다.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이유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이유는 20절에서 사용된 동사 생각하다에 잘 드러난다. 이 동사는 염려하다의 뜻을 담고 있는데, 바울은 이 동사를 써서 디모데만큼 자신과 같이 한마음 한뜻으로 빌립보 교회를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염려하고 걱정할 자가 없음을 강조한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그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염려하는지 알았기에, 디모데가 바울과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칭찬하는 동시에 그 당시의 다른 사역자들에 대한 책망을 아울러 한다. 디모데가 그 당시의 다른 사역자들과 다른 점은 두 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그가 바울을 마치 자식이 아버지를 대함과 같이 바울을 섬기고 사랑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많은 사람이 자기의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지만,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일, 그리고 그분을 위하는 일에 우선하고 자신의 일들을 포기하고 희생했다고, 바울을 디모데를 높이사면서 당시의 다른 사역자들을 비판한다.

 

바울은 내심 못마땅한 당시의 다른 사역자들을 그들이라고 칭하며, 그들의 이기적인 패역함을 비난한다. 바울은 복음 사역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중식적으로 사는 사역자들에 대한 불편하고 섭섭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이기적인 사역자들에 비하면 디모데는 칭찬 받아 마땅한 실신한 일꾼이다. 그런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파송하니, 그를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이 바울이 디모데를 파송하며 부탁한 것이다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바울의 칭찬


다음으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 에파브로다이터스)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무엇이라고 표현하는지 한 번 보자. “믿음 안에서 한 형제요, 동역자요, 복음을 위해 영적 싸움을 함께한 그리스도의 군사!” 실로대단한 수식이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표현이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 출신이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옥바라지를 위해 파송한 사역자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옥바라지를 그만두게 하고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로 되돌려 보내려고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가 빌립보 성도들을 몹시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가 중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서 바울의 옥바라지를 하는 중, 중병이 들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병을 치유해주셨다. 이것은 에바브로디도에게만 은혜가 아니라 바울에게도 은혜였다. 자기를 돌보다, 사역하다, 그렇게 중병 들어 죽으면 얼마나 허무한가. 에바브로디도가 죽었으면, 그를 파송한 빌립보 교회가 얼마나 애통해 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니,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를 존귀하게 여기라는 바울의 부탁이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충성과 헌신한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력을 다해 바울을 돌봤는데, 그는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도를 서로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이다. 에바브로디도는 여러가지 형편 상 로마까지 올 수 없는 빌립보 교인을 대표하여, 또는 대신하여, 옥중에 있는 바울을 돌보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병이 들었는데,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셔서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 그 기쁨과 간증을 가지고 에바브로디도는 다시 빌립보 교회로 복귀했다.

 

동역의 의미


일련의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동역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동역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동역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 동역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결실을 기대하는가?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로디도의 동역을 통해 알 수 있는 동역은 서로를 기뻐하고, 서로를 귀하게 생각하고, 서로를 돌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동역은 아름다운 것이다. 동역하면 기쁘고, 동역하면 서로를 귀하게 여기게 되며,동역하면 서로를 돌보게 된다. 그리고 동역을 하면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열매를 맺는다. 동역을 통해 복음의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큼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 교회가 빌립보 교회처럼 기쁨과 열매가 넘치는 좋은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바울이 되고, 디모데가 되고, 에바브로디도가 되어, 서로를 기뻐하고, 서로를 귀하게 생각하고, 서로를 돌보는 동역자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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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8. 27. 09:10

언약 공동체 (나는 사랑하기로 했다)

(잠언 10:12 / 벧전 4:8)

 

미움은 다툼들을 일으키거니와 사랑은 모든 죄를 덮느니라” (10:12).

무엇보다도 서로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8).

 

3년 전, 2016821일 주일 예배를 마치고 조지아를 떠나 6일동안 대륙횡단을 하여 캘리포니아에 827일 토요일에 도착했다. 우리 교회 처음 와서 인사한 날이 828일 주일이었다. 그날의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보면, 비상대책회의를 하느라 교회 오기 전 데니스에서 이응기, 김형한, 김덕수 권사님을 만났다. 생각해 보면, 나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살려내라고 특명을 받고 이곳에 보냄을 받았던 것 같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예배당의 분기위는 매우 어수선했다. 블라인드가 내려 있어 햇볕이 깊숙히 들어와 눈을 부시게 만들었고, 창문이 열려 있어 바깥 소음이 무질서 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예배 자체는 매우 간절했다. 사회를 보시는 분은 눈물을 흘렸고, 예배에 참석한 분들의 마음은 자비를 간구하는 종의 모습이었다.

 

나는 교회를 사랑한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교회이다. 나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믿는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믿음과 생각은 나만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보편적인 믿음과 생각이다.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21주년이다. 참 기쁜 날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 창립의 의미는 매우 독특하다. 길지 않은 지난 21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는데, 우리 교회의 창립 기념은 마치 개천절과 같다. 지난 2017430일 주일 예배 때, 교회 이름을 세화교회로 정하고 내가 정식으로 세화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할 때에 많은 논의가 있었다. 왜냐하면, UMC에서 교회 closing letter를 받고 교단의 공식 결정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전 교회를 closing하고 새롭게 교회를 여는 차원에서 교회 이름을 바꾸고 담임목사 취임식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technical하게 말해서, 우리 세화교회의 역사는 2017430일부터 시작된다고 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5월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화하늘축제를 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한 공동체의 역사에는 질곡도 있고, 눈부신 영광의 순간도 있는 것이다. 발생한 역사를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이다. 우리는 정말 잘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역사를 존중하여, 8월에 있는 교회 창립기념일을 개천절성격을 지니고 지키고, 5월에 있는 세화하늘축제를 제헌절성격을 지니고 지킨다. 대개 나라들이 다 그렇다. 대한민국도 나라가 처음 열린 날을 기념하기 위해 103일에 개천절을 지키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정체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717일에 제헌절을 지키지 않는가. 역사는 품어내야 하는 것이지, 밀어내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우리 교회의 역사를 분명히 했으면 좋겠다. 8월의 교회 창립기념일은 개천절’, 5월의 세화하늘축제는 제헌절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에 대해 교회 공동체 모두가 공감하면 좋겠다.

 

이처럼 교회창립기념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날, 우리는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은 교회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들어 설명하고, 신약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또는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묘사하여 설명한다. 이러한 비유를 써서 교회를 설명하는 이유는 교회가 세상의 어느 공동체와는 구별된 언약 공동체인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언약(covenant)’와 대비되는 개념은 계약(contract)’이다. 보통 계약은 집을 계약할 때, 또는 직장과 계약할 때 쓰는 개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언약도 계약의 일종이지만,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 계약은 그 계약서에 써 있는 조항 대로 서로 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그러다가, 그 조항에서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책임을 물으며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 그러나, 언약은 계약처럼 그 언약의 조항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조항에서 어긋나는 것을 했다고 해서 계약처럼 책임을 물으며 파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표적인 언약이 결혼이다. 물론 요즘에는 계약결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결혼의 세속화일 뿐이지, 결혼이 지닌 신성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혼할 때 신랑신부는 마주보며 서로에게 서약한다.

 

, 000은 그대 000을 남편(아내)로 맞아 이제부터 평생토록 즐거우나 괴로우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어떤 환경 중에서라도 그대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에 따라 죽음이 우리를 나눌 때까지, 이 약속을 지키기로 하나님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약합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징표로 대개 반지를 교환한다. 계약의 기초는 이익이지만, ‘언약의 기초는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을 맺은 사람들끼리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냉정하게 갈라서지만, 언약을 맺은 사람들끼리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의 언약을 맺은 관계는 즐겁고, 부하고, 건강할때만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괴로울 때도, 가난할 때로, 병들었을 때도상배방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한다.

 

이러한 언약적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이러한 사랑을 구약은 헤세드의 사랑이라고 한다. 영어는헤세드‘steadfast’라고 번역한다. 우리 나라 말로는 영원불변한사랑이라고 한다. 신약성경에서 증거되고 있는 복음은 그 하나님의 헤세드 사랑, steadfast love, 영원불변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났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구원 받았다. 바로 계약적 사랑이 아닌, 언약적 사랑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 사랑 위에 세워진 교회는 본질적으로 언약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다. 복음을 전하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목사로서 나는 날마다 이 언약에 대하여 생각한다. 나는 교회와 계약을 맺은 게 아니라 언약을 맺었다. 나는 그래서 즐거우나 괴로우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어떤 환경 중에서라도 교회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에 따라 죽음이 우리를 나눌 때까지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매일 같이 다짐한다.

 

교회는 언약 공동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부흥이란 근본적으로 숫자의 부흥이 될 수 없다. 뭐가 부흥인가? 교인 숫자 늘어난 게 부흥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늘어나 내 옆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풍성해진 것이 부흥이다. 그러면 교회는 건강하게 숫자적으로도 부흥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데, 교회가 숫자적으로 부흥하지 않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로마서의 이 말씀을 기억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우리에게 사랑할 만한 구석이 있어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할 만한 구석이 없어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언약이란 이런 것이다. 사랑할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듯이, 미움은 다툼들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모든 죄를 덮는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로 모인 우리들에게우리는 언약 공동체이다라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 그래서 나는 사랑하기로 했다라는 결단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소음에 불과하고, 허무한 일이 될 것이며,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무익한 것이 될 것이다. 방언과 천사의 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예언하고, 높은 지식을 쌓고, 굳건한 믿음을 가지는 게 중요하지 않다. 넉넉하게 되어 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는 것, 그리고 열심을 다해 헌신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일이다. “나는 사랑하기로 했다.” 이 결단이 먼저 우리의 영혼을 울리지 못한다면, 우리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일 하지 말고, 사랑하자. 사랑하면 해야 할 일이 보인다. 그 일을 하면 서로에게 만족과 기쁨이 온다. 우리는 언약 공동체이다. 언약 공동체가 언약에 따라서 서로 사랑하는 일에 전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사랑하기로 했다.” 우리 모두, 이 결단 위에서, 행복이 넘치는 언약 공동체, 세화교회를 세워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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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9. 8. 24. 06:25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이사야 40:1-8)


성경을 배운다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 것이고, 언어를 배우는 것은 세계를 배우는 것이다. 성경에는 언어가 있고, 그 언어를 배우고 나면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성경을 통해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그 언어가 가리키고 있는 세계를 볼 수 없다.

 

기독교인이 이사야서를 배운다는 것은 의무이자 감사한 일이다. 이사야서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기독교의 언어가 가리키는 세계를 온전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장부터 39장까지의 이사야서와 40장부터 66장까지의 이사야서이다. 후자는 또다시 두 개로 쪼갤 수 있다. 40장부터 55, 그리고 56장부터 66장까지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세 부분은 나누어진 이사야서를 제 1 이사야, 2 이사야, 3 이사야라고 부른다.

 

이사야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 이유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그것의 배경이 되는 시대, 그리고 문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의 전반 부분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다. 그러나, 이사야서 후반 부분에는 이사야선지자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사야서의 전반 부분은 아하스왕과 히스기야 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후반 부분은 150년 뒤인 바벨론 포로기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내용도 다르다. 전반 부분은 이스라엘과 그 주변 나라들의 외교적 다이나믹 가운데 심판의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후반 부분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사야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전반주의 마지막 이야기는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에게 국고를 열어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장면과 그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 끝난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이랬다.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39:6).

 

이사야서 후반부(40-66)는 이 예언이 성취되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것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끔찍한 예언이었지만, 그 예언은 이루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 나라의 포로로 잡혀가 끔찍한 삶을 살았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위로이다. 그래서 이사야서 40장은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박성을 위로하라”(40:1). 몇 년 전 TV 음악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불러 다시 주목을 받은 여러분이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이 곡은 원래 윤복희가 부른 곡이고, 윤항기가 작사/작곡한 곡이다. 임재범이 멋진 퍼포먼스를 동반해 부른 여러분은 그 이후 여러 가수를 통해서 반복재생되었고, 지금도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 해서 부른다.

 

여러분의 핵심 내용은 이사야 40장의 말씀과 닮아 있다. 핵심 메시지는 위로이다. 그리고 그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선율이 없는 독백이다. “만약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노래에서의 대답은 여러분!’이다. 아마도 작사가 윤항기는 이사야서를 바탕으로 이 노래를 작사한 것 같고, 신앙적 측면을 확대시켜 위로의 메시지를 대중화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라가 멸망하여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만 부지하여 남의 나라에서 포로 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위로가 없었다. 위로가 없는 상태, 나를 위로해 줄 존재가 없는 상태 만큼 힘든 삶이 있을까. 누군가의 위로가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만큼 보람찬 인생도 없다.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좋겠다. 사람은 어렵고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위로 받지 못할 때 죽는다.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해야할 가장 근본적인 일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과도 같은 이 세상이 던져진 존재들이다. 얼마나 외롭고 힘든 세상인가. 위로가 없다면, 우리는 모두 존재하기를 그만 둘 것이다. 그러나, 위로가 있다면, 우리는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로하신다. 이사야서의 언어는 애틋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이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위로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존재하기를 그만 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을 위로하신다. 무엇보다 그 백성이 위로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 예루살렘의 노역의 해가 끝났다. 둘째, 예루살렘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 셋째, 예루살렘이 죄에 대한 벌을 배나 받았다. 여기서 죄에 대한 벌을 배나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지은 죄에 비해 벌을 지나치게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치러야 할 벌을 충분히채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로 하시러 직접 오신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40:3). 이 말은 여호와의 위로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선포이기도 하다. 광야는 낮은 골짜기와 높은 산들로 구성된 울퉁불퉁한 지형을 되어 있다. 그 광야의 길을 가는 것은 그 자체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낮은 골짜기가 높아지고, 높은 산들이 낮아져서 광야에 평평한 대로가 생긴다면, 그 길은 걸어가기 쉬운 길이 될 것이다.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에 대로가 생겨서 그 길을 곧장 가게 되는 것처럼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여호와의 영광이 모든 육체에게 드러날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모든 육체는 어떠한 존재인가?

 

선지자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말해준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40:6-7). 광야의 풀과 꽃은 건조하고 뜨거운 동풍이 부는 여름이 되면 마르고 시든다. 샌프란시스코 배이 지역에 사는 우리들이 매년 보는 풍경이다. 인생에 동풍 같이 찾아오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육체의 아름다움은 정말 보잘것없고 별 가치가 없다.


선지자는 인생의 가장 깊은 진리를 드러낸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인간 존재가 이 진리를 진실로 깨닫고 그것을 겸허하게 인생에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성경의 언어를 충분히 배우지 못하면, 우리가 실로 풀로 존재하는 세계를 보지 못한다. 위로는 이 진리를 진실로 깨달았을 때 온다. 구원은 이 진리를 진실로 깨달았을 때 온다. 우리가 실로 풀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위로와 구원이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마르고 시든 풀과 같은 인생으로 규정하기 보다, 아름답게 피어 오른 꽃으로 규정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자에게는 위로와 구원이 없다.

 

마지막 8절은 그야말로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마르고 시드는 풀과 같은 인생에 위로와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는 없다. 하나님 이외에 그 어느 무엇도, 그 어느 누구도 의지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이 위로와 구원을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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