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8. 22. 07:38

영적 전쟁

(에베소서 6:10-18) 

 

(spiritual)’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뭔가 거룩해지는 것 같긴 한데, 그와 동시에 뭔가 모호해지기도 한다. ‘전쟁은 무엇을 뜻하는 지 알겠는데, ‘영적이라는 말이 들어간 영적 전쟁은 갑자기 무엇을 뜻하는지 모호해진다. ‘영적 전쟁’, 뭔가 거룩한 전쟁인 것 같은데, 어떠한 전쟁인지 손에 잘 안 잡힌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수도 없이 영적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하는 주님의 군사라는 말은 듣는데, 사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영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면 뭔가 거룩해 보이는 것 같지만, 영적이라는 말을 통해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다.

 

요즘 한국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어느 대형교회는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면서 영적 미세먼지로부터 보호해주는 특새 마스크를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며 특새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뭔가 거룩해 보이긴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참으로 모호하다. 서울에 미세먼지가 많은 것은 알겠는데, 영적 미세먼지는 무엇이며, 그 영적 미세먼지는 영적 마스크를 쓰면 물리칠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이처럼, ‘영적이라는 말은 참으로 무엇이든지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다. 본문은 영적 전쟁을 벌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지침으로 알려져 있다. 겉으로 보면 굉장히 은혜로운 말씀이지만, 잠시만 생각해 보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손에 잘 안 잡히는 말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12절 말씀이 가장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의 씨름(전쟁)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6:12). 어렴풋이, 우리의 씨름(전쟁)은 뭔가 영적인 세력들과 하는 것이구나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영적인 세력들은 통치자들, 권세자들이기 때문에 이 센 것 같다. 그래서 그들과 싸워 이기려면 우리에게도 그에 필적할 만한, 아니 그를 능가할 만한 힘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는 것 같다.

 

그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보인다. 첫째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고에서 보듯이,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고, 오직 주님의 힘이 우리에게 전가되고 부어졌을 때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라고 말한다. 그래야 마귀의 간계, 즉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 같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인 것 같다. 기도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는 것 같다.

 

도대체, 우리가 싸우는 영적 싸움의 실체는 무엇이길래, 이렇게 엄청난 영적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영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초월적인 어떤 힘을 떠올린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탈육신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플라톤 철학의 유령이다. 기독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육신을 말하는데, 이상하게 플라톤 철학의 유령에 사로잡힌 어느 기독교인들은 탈육신을 말한다. , 싸워야 할 대상을 불분명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엉뚱한 데로 돌린다.

 

영적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사람은 그의 삶을 들여다 보면 오히려 육적인데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개 교회 지도자들, 권력을 잡은 자들이 그렇다. 자신이 하는 일은 영적인 일이고, 영적인 말씀을 전해서 사람들을 영적인 데 관심을 두게 한 뒤, 자신은 육적인 것을 취한다. 사실, 이게 바로 마귀의 간계이다. 마귀의 간계는 우리의 정신을 다른 데 팔게 만든 뒤,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영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영적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실상, 자신은 육적인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두고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은 탈육신이 아니라, 오히려 성육신이다. ,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하여,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육신이 영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가장 아름다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본다. 영적이라는 말은 탈육신이 아니라, 성육신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여서 우리 인간이 인간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인간성을 그 창조의 질서대로 아름답게 지키고 가꾸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은 탈육신의 싸움이 아니라, 성육신의 싸움이다. 다시 말해, 영적 전쟁은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 우리 인간의 아름다운 인간성을 망치는, 짓밟으려 드는 모든 유무형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을, 인간성을 짓밟으려는 모든 유무형의 세력을 본문은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적 전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가슴 아픈 인류 역사의 한 장면이다.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 나치군은 유대인들을 잡아들여 수용소에 가두고 그들을 학대하며 학살했다. 독일 나치군이 유대인들을 죽이기 전에 먼저 행한 일은 유대인들을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일례로, 그들은 수 천명이 모여 있는 수용소에 화장실 하나 만을 설치한 뒤 그들이 아무데나 소변과 대변을 보게 만들어 분뇨와 뒤엉켜 살게 만들었다. 그러한 모습을 본 독일 나치군은 유대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짐승으로 생각했기에, 어렵지 않게 그들을 학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잔혹한 독일 나치군들도 오늘은 누구를 잡아다 죽일까궁리하며 유대인들 앞에 서서 죽일 사람들을 선발할 때, 사람의 얼굴을 한 유대인들은 차마 죽이지 못했다. 독일 나치군은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에게 하루 따뜻한 물 한 컵 씩을 제공했는데, 어떠한 유대인들은 그 물 한 컵으로 목욕을 하고, 수염을 깎고 하면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유대인들은 결국 독일 나치군의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나치 수용소 생존자 엘리 위젤의 이야기에서도 증언된 것이다.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통해 펼쳐지는 마귀의 간계는 집요하게 인간성을 파괴하여 인간의 아름다움을 망가뜨리려 한다. 그 마귀의 간계에 무너지는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가 인간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성을 저버린 짐승 같은 인간으로 타락하고 만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그 모든 추악한 일들은 아름다움을 상실한 가슴 아픈 사람의 이야기들이다.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것은 영적 전쟁에서 지는 것이다. 반대로, 아름다움과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아름다움와 인간다움, 즉 아름다운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탈육신이 아니라 성육신의 은혜, 하나님의 영이 날마다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그 성육신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 힘과 능력으로 강건해지지 않으면, 마귀의 간계를 이길 수 없다. 그 힘과 능력으로 강건해지지 않으면, 아름다움과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없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우리가 우리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무엇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진리, , 복음, 믿음, 구원, 성령이 그것이다. 여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다른 것에 마음을 두면, 우리는 우리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지켜낼 수 없다. 그러나 보라.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얼마나 우리의 관심을 딴 곳에 돌리게 하는지!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해서이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탈육신이 아니라, 성육신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무엇이 마귀의 간계인지 보이고, 무엇이 우리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지키는 것인지 보인다. 마귀의 간계는 자꾸 탈육신을 부추기지만,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성육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준다.


며칠 전, 신문 기사(2019816일 연합뉴스)를 통해서 독일 정부가 약 5천명의 나치 유대인 생존자들에게 매월 수백 유로씩 재정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스라엘에 현재 생존해 있는 나치 생존자들은 21만 명 가량 되는데, 2차 대전 이후 독일 정부가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를 반성하며 유대인들에게 배상한 금액이 현재까지 800억달러(93조원) 가량 되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독일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의 과거사를 반성한다. 그리고 그 피해를 입은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인들 뿐 아니라 유대인들을 돕다가 피해를 입은 비유대인들에게까지도, 그들이 죽을 때까지, 그리고 그 유가족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인간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지켜내는,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일이다.

 

이렇게 영적 전쟁은 손에 안 잡히는 싸움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싸움이다. 성육신의 은혜에 힘입어, 우리의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파괴하려 드는 모든 마귀의 간계를 물리치고, 십자가 위에서 그 아름다움과 인간성을 잃지 않으시고 하나님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아름다운 인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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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