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19. 8. 24. 06:25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이사야 40:1-8)


성경을 배운다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 것이고, 언어를 배우는 것은 세계를 배우는 것이다. 성경에는 언어가 있고, 그 언어를 배우고 나면 세계가 눈에 들어온다. 성경을 통해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그 언어가 가리키고 있는 세계를 볼 수 없다.

 

기독교인이 이사야서를 배운다는 것은 의무이자 감사한 일이다. 이사야서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기독교의 언어가 가리키는 세계를 온전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장부터 39장까지의 이사야서와 40장부터 66장까지의 이사야서이다. 후자는 또다시 두 개로 쪼갤 수 있다. 40장부터 55, 그리고 56장부터 66장까지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세 부분은 나누어진 이사야서를 제 1 이사야, 2 이사야, 3 이사야라고 부른다.

 

이사야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 이유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과 그것의 배경이 되는 시대, 그리고 문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의 전반 부분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다. 그러나, 이사야서 후반 부분에는 이사야선지자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사야서의 전반 부분은 아하스왕과 히스기야 왕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후반 부분은 150년 뒤인 바벨론 포로기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내용도 다르다. 전반 부분은 이스라엘과 그 주변 나라들의 외교적 다이나믹 가운데 심판의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후반 부분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사야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전반주의 마지막 이야기는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에게 국고를 열어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장면과 그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으로 끝난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이랬다.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39:6).

 

이사야서 후반부(40-66)는 이 예언이 성취되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것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끔찍한 예언이었지만, 그 예언은 이루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 나라의 포로로 잡혀가 끔찍한 삶을 살았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위로이다. 그래서 이사야서 40장은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박성을 위로하라”(40:1). 몇 년 전 TV 음악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불러 다시 주목을 받은 여러분이라는 대중가요가 있다. 이 곡은 원래 윤복희가 부른 곡이고, 윤항기가 작사/작곡한 곡이다. 임재범이 멋진 퍼포먼스를 동반해 부른 여러분은 그 이후 여러 가수를 통해서 반복재생되었고, 지금도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 해서 부른다.

 

여러분의 핵심 내용은 이사야 40장의 말씀과 닮아 있다. 핵심 메시지는 위로이다. 그리고 그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선율이 없는 독백이다. “만약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노래에서의 대답은 여러분!’이다. 아마도 작사가 윤항기는 이사야서를 바탕으로 이 노래를 작사한 것 같고, 신앙적 측면을 확대시켜 위로의 메시지를 대중화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라가 멸망하여 모든 것을 빼앗기고 목숨만 부지하여 남의 나라에서 포로 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위로가 없었다. 위로가 없는 상태, 나를 위로해 줄 존재가 없는 상태 만큼 힘든 삶이 있을까. 누군가의 위로가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만큼 보람찬 인생도 없다.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좋겠다. 사람은 어렵고 힘들어서 죽지 않는다. 위로 받지 못할 때 죽는다.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해야할 가장 근본적인 일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과도 같은 이 세상이 던져진 존재들이다. 얼마나 외롭고 힘든 세상인가. 위로가 없다면, 우리는 모두 존재하기를 그만 둘 것이다. 그러나, 위로가 있다면, 우리는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로하신다. 이사야서의 언어는 애틋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이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위로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존재하기를 그만 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을 위로하신다. 무엇보다 그 백성이 위로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씀하신다. 첫째, 예루살렘의 노역의 해가 끝났다. 둘째, 예루살렘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 셋째, 예루살렘이 죄에 대한 벌을 배나 받았다. 여기서 죄에 대한 벌을 배나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지은 죄에 비해 벌을 지나치게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치러야 할 벌을 충분히채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로 하시러 직접 오신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40:3). 이 말은 여호와의 위로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선포이기도 하다. 광야는 낮은 골짜기와 높은 산들로 구성된 울퉁불퉁한 지형을 되어 있다. 그 광야의 길을 가는 것은 그 자체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낮은 골짜기가 높아지고, 높은 산들이 낮아져서 광야에 평평한 대로가 생긴다면, 그 길은 걸어가기 쉬운 길이 될 것이다.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에 대로가 생겨서 그 길을 곧장 가게 되는 것처럼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여호와의 영광이 모든 육체에게 드러날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모든 육체는 어떠한 존재인가?

 

선지자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말해준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40:6-7). 광야의 풀과 꽃은 건조하고 뜨거운 동풍이 부는 여름이 되면 마르고 시든다. 샌프란시스코 배이 지역에 사는 우리들이 매년 보는 풍경이다. 인생에 동풍 같이 찾아오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육체의 아름다움은 정말 보잘것없고 별 가치가 없다.


선지자는 인생의 가장 깊은 진리를 드러낸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인간 존재가 이 진리를 진실로 깨닫고 그것을 겸허하게 인생에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성경의 언어를 충분히 배우지 못하면, 우리가 실로 풀로 존재하는 세계를 보지 못한다. 위로는 이 진리를 진실로 깨달았을 때 온다. 구원은 이 진리를 진실로 깨달았을 때 온다. 우리가 실로 풀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위로와 구원이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마르고 시든 풀과 같은 인생으로 규정하기 보다, 아름답게 피어 오른 꽃으로 규정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자에게는 위로와 구원이 없다.

 

마지막 8절은 그야말로 위로와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마르고 시드는 풀과 같은 인생에 위로와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는 없다. 하나님 이외에 그 어느 무엇도, 그 어느 누구도 의지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이 위로와 구원을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바이블 오디세이 I'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역의 의미  (0) 2019.08.29
언약 공동체 - 나는 사랑하기로 했다  (0) 2019.08.27
영적 전쟁  (0) 2019.08.22
생태계를 바꾸는 교회  (0) 2019.08.19
공부하는 교회  (0) 2019.08.17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