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0. 9. 1. 02:25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출애굽기 3:1-15)

 

나는 요즘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으로 성경을 읽는다. 한국의 천주교와 개신교가 교회일치운동 차원에서 1977년 부활절에 <공동번역 성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공동번역 성서는 천주교와 개신교 측에서 사용되지 않고, 대한성공회와 정교회에서만 사용한다. 개신교는 대개 <성경전서 개정개역판>을 사용하고, 천주교도 2005년에 자체 번역한 <성경>을 사용한다. 그러나, <공동번역 성서>가 가진 의미는 참 값진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던 천주교와 개신교가 교회 일치 차원에서 번역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렇게 계속하여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인식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말씀의 제목도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가 읽는 성경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되어 있지만, 공동번역은 내게 네 힘이 되어주겠다로 되어 있다. 공동번역은 의역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좀 더 쉽게 문장이 읽힌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과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듣는 이의 입장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각 문장을 합해서 해석하면 이런 것이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나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다.” 참으로 힘이나는 말씀이다.

 

모세의 이야기는 영감이 넘친다(inspiring하다). 그는 출생부터 남달랐다. 그의 출생을 보면, 그가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사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사람은 언젠가 하나님에게 크게 쓰임 받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손에 붙들린 사람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에겐 시련은 있지만 실패는 없기때문이다.

 

젊은 시절, 왕궁에서 부러울 것이 없이 자란 모세이지만, 자아가 형성될 때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혼란을 겪고(그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애굽의 왕자였다.), 살인사건에 휘말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그는 왕자로서 왕궁에 살았지만, 결국 아무도 그를 몰라보는 광야로 쫓겨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인(십보라)을 만나고 그 가정에 들어가 양치는 목자로 산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1).

 

어느 날 모세는 양떼를 치다가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나무가 타지 않았다. 주의 천사가 불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 광경이 하도 신기하여 불꽃이 이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다가섰다. 가까이 다가서자, 음성이 들렸다. “모세야, 모세야!”

 

신비한 경험은 하나님이 말을 걸어오시는 순간이다. 세상에는 온갖 신비한 일들이 많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신다. 병이 나으면, 그것은 신비한 일이다.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말을 거시는 순간이다. 우리는 병 나은 것만 신비하게 여기는데, 사실 거꾸로 병 드는 것도 신비한 일이다. 이뿐 아니라, 아픔을 겪을 때, 기쁨을 누릴 때, 안도의 숨을 쉴 때, 평안을 누릴 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수없이 많은 신비한 일들이 우리에게 발생한다.

 

중요한 것은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이다. 모세는 신비한 일을 경험했을 때 그곳에 가까이 다가섰다. 우리가 이런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뭔가 신비한 일이 벌어지면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 하나님이 나에게 말을 거시는구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들어봐야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서는 것이 중요하다.

 

모세는 불꽃이 일고 있으나 타고 있지 않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다가섰다. 거기서 모세는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

 

모세는 왕궁에서 살면서 자신이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광야에서 목동으로 양을 치는 사람이 되고 나서 스스로 존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지 못했다. 그러한 모세의 마음은 2장에 나오는데, 그가 십보라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붙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게르솜의 뜻은 내가 낯선 고장에 몸붙여 사는 식객이 되었구나라는 뜻이다. “나는 나그네구나. 나는 아무런 존귀함이 없는 사람이구나”, 이런 한숨이 베어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의 그러한 생각이 뒤집히는 경험을 한다. 왕궁이 거룩한 곳, 존귀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거룩한 곳, 존귀한 곳이다!

 

우리도 살면서 거룩한 곳, 존귀한 곳을 좇는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세상에서 거룩하다고 하는 곳, 존귀하다고 하는 곳에 다다르려고 엄청난 에너지를 쓴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 있었을 때 겉모습은 거룩하고 존귀했으나, 결국 그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He was nothing). 그러나, 그는 광야에서 나그네 되어, 남의 집에 식객으로 살아갔으나,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는 거기에서 뭔가 남다른 사람이 된다(He is something now).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곳에서 신발을 벗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내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곳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 신발 끈을 조여 맨다. 빨리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내가 있는 자리를 돌아보자. 나는 그곳에서 신발을 벗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거룩한 사람, 존귀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는 사람은 왕궁에서 사나 광야에서 사는 것처럼 척박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광야에서 사나 왕궁에서 사는 것처럼 거룩하고 존귀한 삶을 사는 법이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매우 이기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하나님을 만나면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나,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사명자가 된다는 뜻과 같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기 삶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마음이 나에게 들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다. 그래서 그는 신발을 벗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다. “하나님, 죽겠습니다. 왕궁에서 살던 내가 이렇게 광야에서 양이나 치는 존재로 하락했습니다. 나를 다시 왕궁으로 보내시면 안 되겠습니까?” 모세는 감히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저 하나님이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7).

 

모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참 대단하다. 모세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으나, 모세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모세의 소망을 이루어 주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분명 왕궁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모세의 소망을 이루어 주신다. 그를 왕궁으로 돌려보낸다. 그런데, 모세를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로서 돌려보낸다. 이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져 냄이다. 이제 그는 이집트 왕궁으로 돌아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는사명을 받았다.

 

같은 곳에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왕궁으로 돌아가지만, 모세는 왕궁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일을 한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모두 그런 것이다. 사업체를 운영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회사를 다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는 것이다. 배우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배우가 되는 것이고, PD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PD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다는 마음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삶의 질은 같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놓아두고,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이곳은 거룩한 곳인가? 내가 신발을 벗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가? 나는 이곳에 내 발로 걸어 들어왔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왔는가?”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만, 그 말씀을 모두 듣고 나서, 보이는 인간의 반응은 모세가 보여주는 반응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10). 그랬을 때, “, 알겠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이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사야 선지자 정도,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셨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했다.(6:8). 모두 모세와 같이 반응한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육적인 고뇌를 많이 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모든 기도가 그 고뇌에 대한 기도이다. 그러한 것은 이방인, 즉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하는 기도인데, 우리는 그러한 기도를 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너무도 많이 소비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명을 받아, 그것 때문에 고뇌하는 영적인 고뇌를 해야 한다. 성경의 기도는 대부분 영적 고뇌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명을 받게 되어 있는데, 그 사명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영적 고뇌를 보라. 나는 요나 선지자를 매우 좋아하는데, 그의 영적 고뇌가 너무도 크고, 그의 사역이 너무도 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요나, 얼마나 그 부르심에 영적 고뇌가 컸으면 하나님이 가라고 한 니느웨이 반대편인 다시스로 가기 위해서 배를 탔겠는가. 그의 영적 고뇌가 얼마나 컸으면, 그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3일동안이나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괴로움을 겪었겠는가. 그러나 결국 요나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니느웨로 가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한 것도 아니다. 그냥 대충대충 했다. 그런데, 얼마나 큰 역사가 일어나는가.

 

나는 영적인 고뇌가 큰 사람이다. 나에게 이런저런 육신의 어려움도 많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가지고 고뇌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때문에 고뇌한다. 나와 친해졌는지 아닌지를 판가름 하는 기준은 나의 영적 고뇌를 느끼는지 아닌지에 있다. 나의 영적 고뇌를 느끼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나와 가까이 지내는 것이고, 나의 영적 고뇌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나와 친해진 것이 아니다. 나는 영적 고뇌를 말로도 풀어내지만, 글로 많이 풀어낸다. 내가 출판한 책, 출판하려고 하는 책, 그리고 블로그의 글들(1,200개의 글들)은 모두 나의 영적 고뇌의 산물이다. 나는 여러분이 나의 영적 고뇌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영적 고뇌가 우리교회에 주시는 비전의 통로가 되기 때문 / 보냄받음)

 

나는 여러분이 육적인 고민에 휩싸여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육적인 문제는 주님께서 이미 해결해주신 줄로 믿고, 영적인 고민에 휩싸여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떠한 분인지를 아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 왕궁으로 다시 돌려보내면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는 사명을 주시며, 당신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드러내신다. “나는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나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15).

 

야곱은 이스라엘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낯선 존재가 아니라, 내 뼛속 깊이 새겨진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저 사람은 뼛속까지 000이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나는 뼛속까지 하나님의 자녀야! 나는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야!’, 이런 고백인 것이다. 우리의 뼛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는가? (자녀들의 뼛속에 하나님의 숨결을 남겨주기 위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노력하시라.)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는다는 것, 즉 하나님의 일을 대신해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영적 고뇌를 깊이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는 매일같이 느낀다. “나는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구나.” 그래서 나는 매일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예수가 십자가를 앞에 놓아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했을 때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예수님의 영적 고뇌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것과 같았다.


그러한 고뇌 가운데, 우리에게 들려오는 음성이 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12절의 말씀이다.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보내셨으니, 하나님이 역사하시겠다는 뜻이다. “내가 네 힘이 되어주겠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며 너의 힘이 되어주겠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며 너의 힘이 되어주겠다”라고 약속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인 고뇌 가운데서도 우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힘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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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8. 19. 04:45

교회(敎會)에서 교회(交會)

(요한일 1:3)

 

쇼펜하우어, 괴테와 니체가 천재라고 일컬었던 철학자, 톨스토이와 비트겐슈타인이 좋아했고, 아인슈타인이 유일하게 존경했던 철학자이다. 철학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규명하는 일을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악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의 삶에는 왜 이렇게 고통이 끊이지 않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가, 등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스스로의 자립과 상대와의 일체감이라는 두가지 욕망에 의한 딜레마를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딜레마를 설명하기 위한 용어인데, 인간은 서로 좋은 취지에서 만나 인간관계를 이루어 가지만, 어느 시점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이 용어는 바로 위에서 말한 쇼펜하우어의 저서 <여록과 보유>에 수록된 우화에서 비롯된 용어이다.

 

추운 겨울 어느날, 서로의 온기를 위해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모여있었다. 하지만 고슴도치들이 모일 수록 그들의 바늘이 서로를 찌르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추위는 고슴도치들을 다시 모이게끔 하였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수의 모임과 헤어짐을 반복한 고슴도치들은 다른 고슴도치와 최소한의 간격을 두는 것이 최고의 수단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 사회의 필요로 인하여 인간이라는 고슴도치들이 모이게 되었지만, 그들은 인간의 가시투성이의 본성으로 서로를 상처 입힐 뿐이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서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예의를 발견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서로의 거리를 지키기 위해 거칠게 말해지곤 하였다. 이 방법을 통해 서로의 온기는 적당히 만족되었으며, 또한 인간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릴 일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남을 찌를 수도, 자신을 찌를 수도 없었던 사람은 자신만의 온기로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Parerga und Paralipomena, Volume II, Chapter XXXI, Section 396 / 위키피디아에서 발췌)

 

우리는 모두 고슴도치 딜레마를 안고 산다. 이런 딜레마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서 더 빈번히 발생하고 경험하게 된다. 가족이 때로는 나에게 가장 큰 아픔을 주기도 한다. 친절을 베푼 사람이 돌을 던지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좋은 마음을 가지고 인간관계를 시작하나, 어디에서 잘못됐는지 모르게,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마치 가시에 찔린 것처럼 아프다.

 

스스로의 자립과 상대방과의 일체감, 인간은 이 두 가지의 요소가 모두 충족되어야만 행복하다. 다른 말로, 인간은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하고, 함께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이 두 시간이 적절하게 유지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이 말에 시선이 간다. “인간들은 서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예의를 발견하였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서로의 거리를 지키기 위해 거칠게 말해지곤 하였다. 이 방법을 통해 서로의 온기는 적당히 만족되었으며, 또한 인간들은 서로의 가시에 찔릴 일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남을 찌를 수도, 자신을 찌를 수도 없었던 사람은 자신만의 온기로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춥다. 온기 없이 살 수 없다. 그런데 그 온기는 다른 데서 구할 수 없고, 오직 인간에게서만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관계적 존재라는 뜻이다. 이러한 인간 실존에 대한 통찰은 철학서적이든 종교경전이든,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성경도 동일한 이야기를 한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이런 구절을 본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2:18).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함께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2:24).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저서 <정치학>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명제를 정립한다.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정치와 윤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도 그의 대표적 저서 <나와 너>에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런 철학자나 성경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깨닫는다. 언제 가장 행복한가? ‘인간관계가 좋을 때이다. 언제 가장 불행한가? ‘인간관계가 깨졌을 때이다. 오죽하면 잠언서에 이런 말까지 있겠는가.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언 21:9). (이것은 잠언이 남성 중심적으로 쓰여졌다는 증거다. 여성 중심으로 쓰여졌다면, “다투는 남성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라고 썼을 것이다.)

 

이 기사가 나왔던 2015년에 설교하면서 인용했던 것이 기억난다. 하버드 대학교 성인발달연구소 소인장인 로버트 월딩어(Robert Waldinger)1939년부터 2014년까지 75년 동안 추적한 성인의 건강과 정서적 안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지난 75년 동안의 연구를 통해 얻은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는, 좋은 인간관계가 우리를 보다 행복하게 하고 건강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구원 받아야할 가장 시급한 부분은 인간관계이다. 그러면, 인간관계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영어로 이렇게 표현한다. “If I have not love, I am nothing!” 우리 인간은 언제 가장 허무하고 힘드냐면, 바로 nothingness를 경험할 때다. 우리의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들까? 바로 사랑이 없어서다. 또는 사랑이 부족해서다. 성경은 이 상태를 일컬어 라고 한다. 죄란 사랑이 없는 상태, 사랑이 부족한 상태를 말한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얼마나 죄인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없는 상태, 사랑이 부족한 상태를 죄라고 한다면, 구원이란 반대로 사랑이 충만한 상태를 말할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도대체 구원 받은 사람인가, 우리 스스로 돌아볼 때, 부끄러울 따름이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사랑하며 살지 못하는가.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된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에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무엇이 구원인지를 생각해 볼 때, 신앙생활은 결국 우리의 삶 속에 사랑이 충만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구원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신앙을 통해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의롭게 된다는 말은 바른 관계에 놓이다라는 뜻이다. 미움의 관계는 바른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미워한다면 그것은 바른 관계가 아니다. 바른 관계는 화평을 누리는 관계이다. 이렇게 화평을 누리는 관계에 있어야 인간은 행복하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사랑이 충만해져서 관계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한국교회는 교회는 많은데, 교회론이 굉장히 부족하다. ‘교회란 무엇인가’, ‘왜 교회인가에 대한 질문이 매우 부족하다. 그래서 교회론 분야를 공부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가톨릭 신학자들의 책을 봐야 한다. 성경을 보면, 교회는 참 특이한 성격을 지녔다. 굉장히 초월적이다. 인종과 신분과 국가와 영역을 초월한다. 많은 이들이, ‘가정이 먼저냐 교회가 먼저냐이런 질문과 고민을 하는데, 사실, 교회는 가정의 비교대상이 아니다. 가정과 교회가 비교대상이고 가정이 먼저였다면, 사도 바울은 결혼생활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고, 독신으로 살면서 교회를 섬겼다. , 교회는 가정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가정을 내팽개치고 교회를 섬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적어도 가정이 먼저냐 교회가 먼저냐의 논쟁 같은 것은 불필요한 논쟁이라는 뜻이다. 가정생활도 충실히 잘 하고, 믿음 주시는대로 교회도 잘 섬기면 된다.

 

예수원을 섬기신 대천덕 신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성경의 교회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가르칠 교를 쓰는 교회()가 아니라 사귈 교를 쓰는 교회(交會)가 되어야 한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아주 뛰어난 통찰이다. 헬라어의 에클레시아’, 그리고 영어의 ‘church’교회(敎會)’로 번역한 데는 유교적 전통이 담겨 있다. 그리고 목사를 일컬어 가르치는 장로라고 말하는 장로교의 전통도 매우 유교적인 전통이 짙다. (물론 칼뱅의 생각도 반영되어 있지만) 이러한 생각이 반영되어 교회는 뭔가 가르침을 받는 서당 같은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그리도 성경공부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 훈장님(담임목사)이 학생들(교인들)을 가르친다.

 

문제는 이러한 관계의 구조가 기독교인 가정에까지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귐이 없고, 가르침만 있다. 그래서 교회나 가정이나 매우 권위적인 구조가 지배하고 있다. 가르침만 있고 사귐이 없는 구조는 예배에서도 나타난다. 한국교회는 예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제사 드리는 것 같다. 개신교인들은 유교의 제사 제도를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엄청 내면화시키며 산다. 예배에 집착하는 모습이 제사의 내면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의 선지서를 통해서 배웠듯이,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신다. 인애, 사귐이다. 하나님은 사귐을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여호와께 돌아가자를 외치며, 또 제사를 드린다. 하나님은 사귐을 원하시는데, 우리는 자꾸 제사만 드리고 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외로우실까 싶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한국교회를 보라. 예배에 너무 집착하니까, 전염병 도는 이 시대에,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가. 사귐을 우선한다면, 이웃에게 해를 끼칠지 모르는 일을 하려 들겠는가. 이런 것만 봐도, 한국 교회는 여전히 교회(交會)가 되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꾸 교회를 가르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 자꾸 가정을 가르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 서로 가르치려 드니, 다툼만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하지 말라, 이게 옳은 거다, 저게 옳은 거다. 내가 옳다. 당신은 틀리다.’ 이러지 말고, 그냥 좀 사랑해주면 안될까? 우리들 사이에 사귐이 충만했으면 좋겠다. 교회(敎會)에서 교회(交會)!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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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8. 16. 07:02

물 위를 걷는 법

(마태복음 14:22-33)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있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 앞마당에 여러 조형물이 있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장면을 조형해 놓은 것이다. 수많은 성경 이야기 중 그 이야기를 조형해 놓은 것이 궁금했다. 물론 관계자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물 위로 걸으시는 예수님의 조형물을 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묵상했을 것이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문제들을 아뢰며, 묵상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셨다. 그런데 이게 정말일까? 어느 순간부터 믿음의 의미가 변질되는데, 다름 아니라, 믿음의 문제가 이러한 성경의 진술을 문자적으로믿느냐 믿지 않으냐의 문제로 전락했다.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으면 신앙인이고, 안 계시다고 믿으면 신앙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믿음이라는 용어가 어느 순간부터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의 의미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혼란과 갈등이 증폭되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히려 최근의 일이다. 지식에 대한 과학적 방법과 근대과학을 낳은 계몽주의에 의해 탄생한 것이 바로 문자적 읽기성경무오설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히려 낯선 성경읽기 방법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대성은 성경읽기에 대하여 오해와 왜곡을 가져왔고, 그 결과로 인해 기독교는 오히려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여러가지 병폐를 낳는데, 첫째로 성경과 기독교의 의미를 축소하고, 획일화하며, 왜곡하기까지 한다(마커스 보그,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32). 이것은 필연적으로 기독교 파시즘을 낳을 수밖에 없다. 둘째, 세상과의 소통을 방해한다. 특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왜곡한다. 일례로, 문자주의의 영향 아래 발전된 창조과학은 일반적 과학지식과 충돌을 일으킨다. 창조과학은 창세기의 족보를 문자적으로 계산하여 지구 창조가 기원전 4004년에 발생했다고 말한다. , 지구의 나이를 약 6천년 정도로 본다.

(한가지 문제를 내겠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organism(생물체) 두 가지가 무엇인가? 나무와 박테리아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큰 아들 건유는 ‘God’ and ‘Jesus’로 답했다. 웃기지 않는가?)

 

문자적 성경읽기의 병폐 세번째는 기독교가 자꾸 사회적 갈등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이나 한국에서 보는 바이다. 미국에서는 보수 개신교회가 팬데믹인데도 불구하고 교회 문을 열어서 예배를 강행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예배드리는 우리들을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주실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예배를 강행했던 수많은 교회에서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갈등 대부분은 기독교가 촉발하고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대북정책과 평화통일문제(이념논쟁/빨갱이), 불평등문제(세습), 부채문제(건축으로 인한 대출), 종교평화문제(갈등) 등 사회갈등을 봉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만들고 심화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건전한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역사-은유적 읽기를 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적 읽기를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는 흔히 역사적 읽기 하면, ‘그거 역사적인 건가요? 그 일이 실제 일어났나요?’라고 묻는다. 그런데, 성경을 역사적으로 읽는다는 뜻은 성경과 기독교의 용어를 그것이 비롯된 과거의 역사적 상황 속에 놓는 것을 말한다(마커스 보그, 33). 일례로 이런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마태복음 공동체에서 이것을 무엇을 의미했을까를 묻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그때 거기에서무엇을 의미했는지를 물은 후, 그 이야기를 지금 여기로 가져와 지금 여기에서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만큼 쉬운 게 없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그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의 명령에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를 보며, ‘베드로는 참 믿음이 없었구나라고 생각하고 만다면,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우리가 물 위를 걷지 못하는 것은 베드로와 같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또한 성경은 은유적으로 읽어야 한다. 언어는 그 본질상 은유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은유적일 수밖에 없다. “은유란 언어가 지니는 잉여 의미에 대한 것이다”(마커스 보그, 36). 은유는 그 언어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의미가 중요하지, 그것의 사실성이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알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읽으면서 선한 사마리안인이 누구인지, 그 사람의 실제 존재를 따지지 않는다. 탕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21세기에 살면서 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온갖 혜택은 다 누리고 살면서, 성경을 읽는 방식에서 오히려 퇴보하여 문자적 읽기에 머물러 있어 성경이 주는 풍성한 영적인 혜택은 누리지 못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육신은 날로 살찌우고 있지만 우리의 영은 날로 빈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극인가. 이 시대 사람들의 물질적 풍요에 가려진 영적 빈곤은 처참하다. 오히려 본문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 물을 걷고 있다. 우리의 인생은 물을 걷는 것과 같다. 언제 빠질지 모른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빠져서 허우적대다 죽기 십상이다. 실제로 복음서가 쓰여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그랬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온 시간이 사경이다. 사경은 새벽 3~6시이다. 동트기 전, 가장 깜깜할 시간이다. 그들의 삶이 그랬다. 깜깜했고, 물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어둡고 험한 삶 가운데, 예수님은 다른 곳에 계시지 않고, 자신들과 함께 계셨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믿음이 베드로와 같았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특별히 마태복음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의 수장이다. 수장인 베드로조차도 물에 빠질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고, 믿음이 약해져 갔다. 그러니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것조차 없다.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칠흑 같은 밤에 놓인 것이고,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과 행동에서 그것을 배운다. 물에 빠져 가는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렇다! 우리는 어둡고 두려운 인생 가운데,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를 외쳐야 한다. ,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옅어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지면 물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지금 마태복음 공동체에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 가장 오해되고 있는 개념 중 하나는 자유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기자가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사람이 이런 말하는 것을 보았다. “코비드19을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니라, 자유를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나는 몇 번 이야기를 했다. 자유는 개인주의적 용어가 아니라 관계적 용어이다.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게 자유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하는데, 니가 무슨 상관이냐!’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 영적 빈곤을 불러오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자유에 대한 오해와 왜곡으로 인한 관계의 느슨함이다. 믿음도 우리는 자유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믿고 안 믿고는 내 마음이야. 내 자유야.’ 이러한 사고방식은 모든 관계를 느슨하게 만든다. 가족에 대한 관계도, 이웃에 대한 관계도, 친구에 대한 관계도, 하나님에 대한 관계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도, 교회에 대한 관계도,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도 느슨하게 만든다.

 

저명한 사회작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현상을 <액체근대>라는 말로 표현한다. 모든 것이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졌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미명 아래. 바우만은 우리의 시대를 분석하면서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견해를 거론하며, 우리 사회에 점차 변해가는 좀비 유형들’, ‘좀비 제도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특별히 가족제도를 이렇게 표현한다.

 

"오늘날 가족이란 것이 실상 어떠한지 자문해보라. 그 의미가 무엇인가? 물론 자식들, 내 자식들, 우리 자식들이 있다. 그러나 가족생활의 핵심인 부모의 역할은 이혼이라는 상황 때문에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들 아들딸들의 결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포함되거나 배제된다. 손자들의 관점에서 조부모라는 의미는 개인의 결정과 선택으로 결정이 나는 것이 되고 말았다."
(
지그문크 바우만, <액체 근대>, 14).

 

사실 이런 것은 뼈아픈 분석이다. 이 사회의 좀비 제도의 예로 가족제도를 대표로 들긴 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직장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직장에서의 관계의 느스함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다. 직장과 직장 동료들에게 무슨 애정을 가지는가. 그저 주어진 일 하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다. 애사심, 동료애, 그런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관계가 얼마나 느슨한가. 각자의 삶에 발생하는 삶의 문제를 진심으로 나눌 수 있는 끈끈한 형제애가 우리들에게 있는가? 오히려 우리들은 우리의 삶의 문제를 얘기해 봤자 구설수에 오른다고 생각한다. 약점 잡힌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삶의 문제에 대하여 서로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러한 관계를 부담스러워 한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이다. 나훈아의 갈무리에 이런 가사가 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도대체 왜 이런지 몰라 꼬집어 말할 순 없어도 서러운 마음 나도 몰라.” 마치 나 자신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나 스스로의 관계에서도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산다. 말 그대로,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며 산다.

 

이러한 일련의 관계의 느슨함 때문에 겪는 현대인들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인가? 불안이다. 이 불안이라는 감정은 딱 침범 당하기 쉽고, 이용 당하기 쉬운 감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황장애와 불안증, 그리고 우울증에 시달린다. 불안하니까, 자신의 불안을 잠재워줄 그 무엇에 쉽게 빠진다. 중독 현상이 판을 친다. 약물중독, 쇼핑중독, 종교중독!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물 위를 걷고 있다. 우리의 삶은 이미 사경 쯤에 물 위를 걷는 것과 같다. 그래서 두렵고 불안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정말 신앙이라면 가장 근본적인 관계부터 다시 새롭게 세워 나가야 한다.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찬송을 부른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찬송가 364). 그런데 정말 그런가? 우리는 기도를 하기는 하는가? 가장 즐거운 시간은 기도 시간이 아니라 혼자서 밥 먹으며 드라마 보는 시간 아닌가?

 

우리는 이런 찬송도 한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기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찬송가 382).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걱정 근심 가운데 살아가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주님 외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것이 많은가?

 

우리는 지금 물 위를 걷고 있는가. 아니면 베드로처럼 물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가. 현대의 소비문화는 우리들의 불안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우리를 불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불안에 대한 가짜 치료제를 주어, 불안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지 못하게 만든다. 불안이 계속 조장되어야지만, 물건을 계속해서 팔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중권세 잡은 자들은 우리의 관계의 느슨함을 이용하여, 거기에서 오는 불안을 이용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우리를 조종한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가족,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교회,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나 자신, 누가 가장 좋아하겠는가? 그리스도인이, 교회가 물 위를 걸어야 하는데, 물 밑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으니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영향력이 전혀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보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물 위를 걸어보자. “주 예수여, 나를 구원하소서!” 외쳐보자. 물 위를 걷는 우리들을 보고, 물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웃들이 힘을 낼 것이다. 물 위를 걸어야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할 것 아니겠는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면 어떻게 하는가. 물 위를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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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8. 4. 06:00

브니엘

(창세기 32:21-31)

 

브니엘하면, 이런 노래가 생각난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 하아얀 그 때 꿈을 /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이 노래의 제목은 무엇인가? <얼굴>이다. 그러면, 브니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얼굴이다.

 

아주 기초 훈련부터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성경을 함께 읽으며, 성경의 언어와 이야기에 익숙해지는 것을 하고 싶다. 성경의 세계에 친숙해지는 것은 어떤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 언어를 배우지 못하면, 그 세계에 융합되지 못하고 나그네처럼 산다. 저명한 성서학자 마커스 보그는 그의 책 <Speaking Christian>에서 요즘 미국에서 기독교의 언어가 낯설어지고 왜곡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잘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미국에 살면서 경험하는 것 / 언어가 낯서니까 삶 자체가 낯설다)

 

브니엘’, 그러면 하나님과 야곱의 씨름이 떠오르고, 야곱과 에서의 화해가 생각나야 한다. 그리고 브니엘’,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정기적인 소그룹 성경읽기 모임을 통해서 이러한 훈련을 해 나가는 습관/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의 실패는 이러한 기초적인 훈련에서부터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안 읽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님의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처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목숨을 내 놓았을 때, 오히려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을 만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놓았을 때 하나님을 만나고, 목숨을 다시 얻었다. 성경은 모두 이러한 이야기 아닌가. 목숨 내놓고 하나님을 찾았을 때, 하나님을 만나 참생명을 얻게 되는 이야기!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비한 방식으로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신다. 야곱은 두려움 가운데 있었다. 형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어떻게 될지 몰라 두려웠다. 형이 군사 4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형식이나 내용은 다르지만, 우리도 그런 두려움 가운데 산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매우 우연히이루어진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기엔 아무런 설명도 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그저 불쑥 나타난 어떤 사람과의 씨름을 말할 뿐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은 신비에 쌓여 있다.

 

하나님은 불쑥 나타나신다. 어떤 얼굴을 하고 나타나실지 모른다. 선하게 또는 악하게 나타난다. 악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제프리 러셀의 책 <데블 The Devil>에서 이런 말을 한다. “악마를 연구해보면 역사적으로 악마는 신의 현현이고 신성의 한 부분임이 드러난다”(34).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 불쾌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천사처럼 선한 얼굴을 하셔야지, 어떻게 악마의 얼굴을 하느냐고. 하지만 심층심리학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세 단계에 걸쳐 인식한다. 하나님은 처음에 미분화상태로 나타나고, 다음엔 자비로운 하나님과 악한 악마가 구분되어 악한 악마를 억압해 쫓아내다가, 마지막엔 하나님과 악마가 통합된다. 우리는 실제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 악을 통해 경험하는 경우가 더 많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악을 경험하게 됐을 때 보이는 우리의 영성이다. 대개 우리는 악을 경험했을 때, 절망하여 삶을 포기한다. 그러다 보니, 악 속에서 악마만 경험할 뿐,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악에 맞서 그 악을 뚫고 지나갔을 때 그 끝에 서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악이 악마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스토리를 잘 알고 있다. <욥기서>의 이야기다. 욥기에서 욥이 경험하는 하나님은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악마! 만약, 욥이 악을 경험하며 거기서 굴복하고 말았다면, 그래서 아내의 말처럼 하나님의 저주하고 죽었다면, 그에게는 무엇이 남을까? 정말 공허, nothing 밖에는 안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욥은 악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야곱이 보여주는 씨름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인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는 외롭고 힘들었다. 두려웠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한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런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신앙을 마음의 동의로만 생각하면 그처럼 쉬운 게 없다. 사실 이렇게 오해되기도 한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아 천국 간다.’ 이처럼 쉬운 구원도 없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구원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신앙은 씨름이다. 악마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고된 노동이다. 신앙은 그래서 위대하고 숭고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신앙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마음적, 또는 지적 동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객관적 동의로 말하지 않는다. 신앙을 이러한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이고, 그만큼 기독교의 언어가 요즘 세상에서 왜곡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야곱과 씨름하고 있는어떤 사람’, 낯선 사람을 보라. 우리에게 닥치는 일은 모두 다 낯선 일이다. 암에 걸리는 게 익숙한 사람이 어디에 있나. 수술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 어디에 있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일도 낯선 일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낯설다. 하물며, 우리는 살아본 하루를 살지 않는다. 우리에게 오는 시간은 모두 낯선 시간이다. 내일처럼 낯선 시간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한다. 그저 내일이 있다고 상상할 뿐이다.

 

낯선 사람과 씨름을 한 야곱, 그러나 그 낯선 사람이 야곱을 이기지 못한다. 야곱은 지금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저 붙들고 늘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씨름에서 상처를 입는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은 상처를 남긴다.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는 그것을 스티그마(Stigma)’라고 한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상처가 남았다. 우리는 그것을 성흔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것을 영광의 상처라고 말한다. 그러나 말이 영광의 상처이지, 그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픔이다. 야곱은 낯선 사람(하나님)과의 씨름으로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장난이 아니라는 뜻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니라 참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무거움?)

 

야곱이 끝까지 낯선 사람의 다리를 붙들고 안 놓아주면서 한 요구가 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는 악을 경험하면서 이러한 야곱의 신앙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것을 배우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없는 거다.

 

우리는 나를 괴롭히는 어떠한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계속하여 야곱이 낯선 사람에게 한 말을 해야 한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씨름에서 내가 상처를 입거나 또는 죽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악 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이미 구원이 임한 것이다.

 

지금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속에 있다. 낯설게 다가온 그 일들, 마치 악의 한 가운데 빠진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내 삶의 그 낯선 일들, 도저히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그러 일들, 나에게 깊은 절망과 아픔을 주는 그런 일들, 마치 지옥에 있는 것 같은 일들, 그것은 무엇인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우리는 그것과 씨름해야 한다. 신앙은 씨름이다. 악마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고된 노동이다. 우리는 그 노동 가운데서 이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 주께서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의 신앙 안에, 이러한 씨름이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씨름에서 이긴 야곱은 복을 받는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8) 축복을 받은 후에 비로소 야곱은 자신이 누구와 씨름하였던 것인지 알게 된다. 낯선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씨름이 있었던 바로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이름 짖는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얼마만큼의 브니엘이 있는가. 단 한 개라도 좋으니, “이것은 브니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의 씨름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한다. “주님, 주께서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주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브니엘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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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27. 09:56

우리 몸이 성전이라면
(로마서 8:26-28)


김승섭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 몸이 어떻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반영하는 지, 보건의학 데이터를 기반으로 예리하게 분석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 몸은 “(사회적) 불평등이 기록된 몸”이다. 우리의 몸은 “(사회적) 차별이 투영된 몸”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불평등과 차별이 어떻게 우리의 몸에 기록되고 투영되는지, 데이터를 기반으로 보여준다.

일례로, 그는 가난과 뇌의 발달이 어떤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득수준이 다른 영유아의 뇌를 시간 간격을 두고 MRI로 찍어본 결과, 뇌에서 정보처리와 의사 결정을 담당하는 학습 능력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대뇌 회백질(Total Gray Matter)의 크기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태어날 때 대뇌 회백질의 크기 차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대뇌 회백질의 크기가 더 크게 나타난다.

이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뇌의 번연계(Limbic System)에도 변화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번연계는 본능, 정서의 영역을 담당하는데, 그중 언어적, 의식적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Hippocampus)라는 기관”이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해마는 스트레스 호르몬의 영향을 받고, 스트레스 호르몬은 고용불안, 왕따, 성희롱과 같은 사회적 폭력에 노출될 때 증가하는데, 이때 해마의 세포가 변형된다고 한다. 가난으로 인한 경제적인 궁핍은 물론, 집과 학교에서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이 해마의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김승섭, 137쪽).

그가 보여주는 보건과학의 연구 결과물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사회과학이 아니라 의학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구조적 또는 제도적 불평등과 차별을 꼼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이 어떻게 인간의 몸에 영향을 미치는지, 뉴스의 보도를 통해서 많이 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의 비율은 가난한 지역에 사는 자들에게서 훨씬 높았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뉴스와 데이터, 또는 연구의 결과물을 접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잘 거리는 계층, 또는 지역에 살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에 분노하는가?

김승섭 교수가 그 책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제목에 나와 있듯이, 우리 몸은 그냥 단순한 몸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단순히 신체적 몸이 아니라 사회적 몸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슬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몸이 아픈 이유는 당신 책임이 아니다. 당신 몸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악의 희생자이다. 그러니, 너무 자기 자신을 탓하지 말고, 자신의 몸을 사랑해 주고, 보듬어 주라.”

보건의학은 우리의 몸이 ‘사회적 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성경은 보건의학이 말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간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의 몸은 ‘사회적 몸’을 넘어서 ‘신적인 몸’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거룩하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사회적 몸’이라는 것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며 산다. 그렇다보니, 고통을 받으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자책만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몸이 ‘신적인 몸’이라는 것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며 산다. 그렇다보니, 고통을 받으면서도 기도하지 못하고 자책만 한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슬프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뜻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신적인 능력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 신적인 능력이 무엇인지,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를 두 명만 뽑으라고 하면, 이구동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과 토마스 아퀴나스를 뽑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4,5세기의 사람이고, 아퀴나스는 13세기의 사람이다. 어거스틴은 아퀴나스의 존재를 몰랐지만,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사상에 신세를 많이 졌다. 하지만 둘의 신학방법은 달랐다. 어거스틴은 플라톤 철학에 많이 기대어 신학을 했지만,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대어 신학을 했다.

하지만 이 두 신학자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같았다. 그들의 신학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법(eternal law) 혹은 이성적 지혜를 세상 속에 두셨다. 그러나 그 지혜는 자신의 신적 성격 때문에 인간에게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인간의 과제는 너무도 자명하다. 이 세상에 두신 영원한 법 혹은 이성적 지혜를 발견하는 것이고, 그 법과 지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영원한 법과 이성적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까? 바로 기도를 통해서이다. 기도는 영원한 법, 이성적 지혜, 신적 지혜에 다가서는 수단이다. 우리는 연약하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과 지혜를 다 알지 못하여, 우리의 삶이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는 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하고, 죄도 짓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삶 가운데서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이 영원한 법(eternal law)에 닿을 수 있도록 기도를 통해 그 길을 여는 일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일컬어 이렇게 말하셨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마 21:13). 그렇다. 우리의 몸은 성전이다. 그리고 성전인 우리의 몸이 해야 할 일은 기도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너무도 잊고 산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슬프다.

기도는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말해주는 표지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몸 자체를, 우리의 삶 자체를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즐거워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할 때, 그 일이 하나님 안에 있기를 소망하고 확신하면서 기도한다. 어떠한 행위마다 잠시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밥 먹을 때도 기도한다는 것은 그 밥 먹는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게 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기도, 운전 하기 전에 드리는 기도, 또는 운전하면서 드리는 기도, 일을 시작하기 전에 드리는 기도, 또는 일을 하는 중에 드리는 기도, 회의를 하기 전, 가게 문을 열기 전에 드리는 기도는 지금 우리가 하는 바로 그 일이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게 하는 ‘짧지만 강력한 의식(rituals)’이다.

하물며 죄를 지으려 하기 전에도 기도해야 한다. 물론 자신의 몸이 ‘성전’인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겠지만, 우리는 때로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 구분 못할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지어도 남의 몸을 해치는 상해 죄를 짓겠는가.  기껏 죄를 지어봐야 양심을 속이는 죄 아니겠는가. 우리의 몸이 하는 모든 것, 일상의 일이든, 선한 일이든, 때로는 악한 일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도록, 기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몸은 그냥 몸이 아니라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몸이 ‘사회적 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몸은 나의 살아온 역사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불의를 기록한다. 우리 인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웃이 당한 불의는 곧 내가 당한 불의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별히 제1 세계, 소위 부강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잘 자각하지 못한다. 바로 우리다. 우리가 이렇게 그래도 건강하게 사는 이유는 우리가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부는 누군가에게 불평등과 차별을 안겨준다. 아프리카나 남미에 사는 사람은 우리와 같은 건강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의 몸은 그들의 세상을 기록한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몸이 같을 수 있을까? 같을 수 없다. 그 다름이 기도에서 나타난다. 물론 그 다름은 차별의 의미가 아니라, 깨달음의 의미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깨달은 것이고, 비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을 비난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깨달았으므로, 비그리스도인이 하지 못하는 ‘기도’를 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이다. 그리고 그 기도의 핵심적인 내용은 ‘탄식’이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인가를 알고 기도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은 무지 가운데서 기도한다. 그러나 괜찮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는 것, 그리고 기도할 때 우리가 연약하여 우리의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더라도, 성전인 우리 몸에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친히 탄식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사회적인 몸이다. 우리의 몸은 신적인 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몸은 아프지만, 동시에 우리의 몸은 거룩하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몸이 성전인 것을 기억하며 기도할 때, 우리의 연약하고 아픈 몸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 몸에 기록된 사회적 아픔이 하나님 안에서 위로 받고 치유 받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우리, 언제든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순간에서든지,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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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24. 04:00

참 벽돌 집

(마태복음 7:24-27)

 

아마도 누구든지 오늘 예배가 추모예배인지, ‘추도예배인지, 어떤 용어를 써야할 지 헷갈릴 수 있다. 추모(追慕)라는 말과, 추도(追悼)라는 말은 모두 한자어로, 그 뜻을 정확히 알려면 한자의 뜻을 알아야 한다. 추모에서 쓰이는 그리워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추모예배는 죽은 사람을 그리며 생각하는 예배라 할 수 있다. 추도에서 쓰이는 슬퍼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추도식은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예식의 뜻을 지닌다. (참고로, ‘사도세자에서 영조가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내린 시호로 유명하다. ‘사도는 생각할 에 슬퍼할 를 쓴다. 아들을 생각하면 슬픔만 가득하기 때문에, ‘사도세자라고 한 것이다. 참 슬픈 시호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추도예배는 그 뜻이 좀 다르다. 추도예배는 한국의 명절에 한국인들이 조상님들께 드리던 제사와 대비되는 예식이다. 기독교인은 조상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조상을 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제 1원칙이다.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졌을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제사논쟁을 겪었다. 그러면서 생겨난 용어가 추도예배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조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말하고 있듯이, 기독교에서 부모 공경은 가장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추도예배는 고인을 추모하고, 생전의 은덕과 뜻을 기리며, 가족들의 신앙을 독려하고 화목을 다지는 기회를 가지는 예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절에 드리는 예배를 뜻한다. 추석명절이나 설명절 같은 때에 드리는 예배가 추도예배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고인의 기일에 드리는 예배이므로, ‘추모예배라고 부른다.

 

우리는 지금,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며, 그리워한다. ‘그리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움은 그냥 감정낭비가 아니다. 그리움은 과거로 돌아가는 행위인데, 우리가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과거에서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발견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불확실한 우리의 미래를 열어젖히기 위해서이다. 이 작업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그리움은 그야말로 감정낭비에 머물고 만다. 감정을 소모한다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인가. 힘든 일을 했는데 아무것도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허무한 것이다.

 

나는 매일 글을 쓴다. 짧은 단상도 쓰고, 시도 쓰고, 공부한 것 정리하는 차원에서 글을 쓰고, 설교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그리고 일기를 쓴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이 지나면 모두 과거가 된다. 그리고 나는 가끔씩 나의 과거로 돌아가 그 글들을 읽으며, 생각에 잠기고, 거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늘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 인간은 매우 상상력속에 산다. 그 중에서 가장 믿음직한 상상력은 내일도 나는 눈을 뜰꺼야라는 상상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이 상상력이 언젠가는 틀리는 날이 올거라는 것을.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내일의 생명이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산다. 이러한 상상력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불안해서 하루도 못살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지만, 실제로 하루만을 살지 않는다. 1년 후, 5년 후, 10년 후, 그리고 노후도 생각하고 준비하며 산다. 먼 훗날을 생각하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늘 고민스러운 과제를 안고 산다.

 

성경에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가득하다.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모두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반석 위에 지은 집 같이 든든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소망은 같으나, 그 소망을 이루는 방식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자신의 집을 든든하게 하는 반석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기돼지 삼형제(The Three Little Pigs)라는 동화가 있다. 동화는 어린이들 위한 책이지만, 실은 동화만큼 어른이 읽어야 하는 책도 없다. 나는 언젠가 동화책을 쓰고 싶은 소망도 있다. 동화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유일한 책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한 시간이 바로 동화책을 읽는 시간이다.

 

아기돼지 삼형제, 동화이고, 간단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지만, 그 깊이는 대단하다. 아기돼지 삼형제는 모두 행복한 삶을 꿈꾸었다. 그들의 삶은 즐거웠다.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삼형제는 각자 자신이 가치 있는 것에 기대어 집을 지었다. 첫째 돼지는 지푸라기(straw)로 집을 지었다. 푹신하고 나름 살만 했다. 집을 짓는 데 그리 힘이 들지도 않았다. 둘째 돼지는 나뭇가지(sticks)를 가지고 집을 지었다. 지푸라기로 지은 집보다 든든했다. 그래서 둘째 돼지는 자신의 집이 첫째 돼지의 집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 셋째 돼지는 벽돌(bricks)로 집을 지었다. 셋째 돼지의 집은 차원이 달랐다. 지푸라기로 짓는 것보다, 나뭇가지로 집을 짓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웠다. 시간도 많이 걸렸다.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가 벌써 집을 다 짓고 놀고 있을 때, 셋째 돼지는 그들과 함께 놀 시간이 없었다. ‘내가 지금 뭐하는 가싶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벽돌도 만든 집을 완성했다. 행복했다.

 

어느 날, 동네에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의 속셈은 돼지를 잡아먹는 것이었다. 늑대가 친근한 목소리로 문을 열어 달라고 했지만 아기 돼지 삼형제는 자신들이 만든 집에 꼭꼭 숨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늑대는 본색을 드러내고 첫째 돼지가 만든 지푸라기 집을 바람을 날려버린다. 집이 순식간에 허물어진 첫째 돼지는 둘째 돼지 집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둘째 돼지 집도 늑대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둘은 셋째 돼지의 벽돌집으로 도망쳤다.

 

두 돼지의 집을 어렵지 않게 무너뜨린 늑대는 셋째 돼지의 벽돌 집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집을 무너뜨리려고 별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늑대는 결국 상처만 입고 아무런 소득 없이 쫓겨가고 만다.

 

오늘 본문은 아기 돼지 삼형제를 생각나게 한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같으니라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24-25).

 

우리는 실제로 벽돌 집에 산다. (물론 캘리포니아는 지진의 위험 때문에 집 지을 때 벽돌 대신 나무를 사용하지만).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자.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그 집이 정말로 우리들의 모든 것을 지켜주는가? 그 안에 있으니, 손톱만큼의 불안도 없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늘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는데, 불안을 조성하는 게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져보자는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며, 우리는 지금 단순히 우리의 감정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아버지가 살아생전 무엇을 가장 바라셨을까, 자식들을 생각할 때 바깥으로 표현은 하지 못하시고,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몰라 못해 주셨지만, 무엇을 해주고 싶으셨을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버지 방 치우다, 아버지가 쓰려고 남겨두신 돈을 발견했다. 그거 발견하자마다, 내가 원장님께 그랬다. ‘아 큰일 났네요. 이거 보도 딸들 또 울겠네요.” 아니나 다를까, 진주 자매가 펑펑 울었다.) 아버지가 돈을 남겨 주고 싶으셨을까?

 

부모의 마음이 다 똑같다고, 자녀들에게 벽돌 집을 지어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본인이 없더라도, 이 험한 세상에서 해를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벽돌 집’. 물론,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생이라, 아버지라 할지라도, 무엇이 진정한 벽돌 집일까, 모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리 방황하고 저리 방황한다. 그러나, 인생의 끝에 가서 무엇이 진정한 벽돌 집인지, 생득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을 극명하게 깨달은 사람이 여호수아가 아닌가 싶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4-15).

 

우리는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 순간 함께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하나님은 아버지와 함께 하셨다. 아버지를 품에 안아 그의 생명을 거두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아버지를 들이셨다. 하나님은 결코 그 어떤 존재도 외롭게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우리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는 아버지의 추모예배를 맞아,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장 원하셨던 벽돌 집’,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벽돌 집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추모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지혜를 얻는다. 참 벽돌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앙이다. 신앙은 지푸라기 또는 나뭇가지와 비교할 수 없는 벽돌이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주추를 반석 위에 놓는 것과 같다. 어떤 집이든 주추가 튼튼하지 않으면 폭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나면 휩쓸려 내려가고 만다. 신앙으로 지은 집은 집은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것과 같다. 신앙으로 지은 지은 셋째 아기 돼지가 지은 벽돌 집과 같아서, 늑대가 아무리 쳐들어오려고 해도, 들어올 수 없다. 그런 집에서 자녀들이 사는 게, 아버지의 소망 아니었겠는가.

 

자녀들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부모님을 중심으로 뭉치고 가깝게 지내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자녀들은 구심점을 잃는다. 가까운 거리에 살아도 관계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에 정비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은 아주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는데, 모든 거리를 초월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게 신앙의 신비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되는 것만큼 형제들을 행복하게 하는 게 없다. 돈이 많으면 분쟁이 일어나지만, 신앙은 있던 분쟁도 멈추게 하고 평안을 준다. 그러므로, 참 벽돌인 신앙으로 벽돌 집 짓기를 간절히 권면한다. 이것은 아버지의 1추기 추모예배를 드리며, 돌아가신 아버지와 그 돌아가신 아버지를 품에 안고 계실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바램이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지만, 그 간절한 바램이 모든 자녀들의 마음에 전달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기도문

 

주님, 우리는 고 이정헌 집사님의 1주기 추모예배에 모여,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아버지가 자녀들을 향하여 어떤 소망을 가지셨을까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하지만,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 큰 절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버지의 1추기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듯,

우리가 참 벽돌인 신앙으로 벽돌 집을 지을 때,

우리를 해하려는 그 어떤 늑대도 우리의 신앙의 집, 벽돌 집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주여, 이 험한 세상,

생명력 있게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만이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주춧돌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모든 형제들이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행복하게 사는,

고 이정헌 집사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족들을 붙들어 주실 줄 믿으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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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20. 09:35

일상의 부활

(창세기 28:10-19 / 로마서 8:18-25)

 

학창시절, 수학과 지구과학을 공부하고 나면, 으레 친구들끼리 하게 되는 계산이 있다. 지구의 자전속도와 공전속도를 계산하는 것이다. 지구둘레 4km24시간으로 나누면 된다. 자전속도는 위도에 따라 좀 다르다. 지구의 평균자전 속도는 시간당 1,667km이고, 한국의 자전속도는 1,337km이다. 그러면, 극지방의 자전속도는 얼마일까? 0(zero)이다. 지구의 평균 자전속도는 대략 마하 1.2 정도 된다.

 

그렇다면, 공전속도는 얼마나 될까? 공전속도 계산하는 방식은 좀 더 복잡하다. 복잡한 계산 방식을 생략하고 그 결과만 보면, 지구의 공전속도는 시속 107,160km이다. 이는 마하 87의 속도이다.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는 행성에 살고 있다.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아보아 알지만, 어떤 물체가 속도를 내서 달리면 거기에는 소음이 발생한다. 사실, 지구는 자전과 공전으로 인해 엄청난 소음을 내고 있지만,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음의 주파수는 20hz부터 16,000hz이기 때문에 그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소음을 들을 수 없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피조물에 대하여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피조물에 대하여 매우 신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22).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서 비롯되는 소리를 못 듣는 것처럼, 피조물이 내고 있는 탄식소리도 못 듣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엄청난 소리를 생산한다. 우리가 어떠한 장치를 개발하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장치를 통해서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내는 소리를 듣는다면 매우 신기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경외감 같은 것이 솟아날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우리가 평소에 듣지 못하는 피조물의 탄식에 대하여 말하며, 그 탄식이 무엇인지를 귀에 들리듯들려준다. 이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바울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19). 피조물은 탄식하고 있다. 탄식하는 자들에게는 그 탄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갈망이 있는데, 탄식하는 피조물의 갈망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익숙한 세대는 하나님의 아들들어벤져스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삶 속에서 어떤 히어로(hero)’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이유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는 자신을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피조물이 믿는 듯하다. 그렇다면, 피조물이 굴복하고 있는 허무한 것은 무엇일까?

 

20절에서 진술되고 있는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논증하고 있는 죄의 법을 말한다. 피조물은 죄의 법 아래 놓여, 죽음에 이른다. 실제로, 피조물은 모두 죽음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 존재가 사라진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죽음을 향해 간다. 그것은 바울의 말대로,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창조주 하나님)로 말미암은 것이다.

 

끝이 죽음인 피조물은 탄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생명 앞에서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할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바울의 논의에 따라,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부활을 경험한 자이다. 부활은 죽음의 극복인데, 부활을 경험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며 바라는 것은 부활이라는 것이다. , 죽음의 극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피조물이 바라는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생했고,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부활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발생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맏형으로 삼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로 피조물이 기다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왠지,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에 와 닿지도 않고, 오히려 부담스럽다. ‘하나님의 아들’, 그러면, 뭔가 좀 특별한 재능을 지니거나, 범상치 않은 인물이거나, 아니면, 높은 도덕성을 지녀야할 것 같은데,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는 여전히 실수투성이인 인간이고, 부족한 인간이고, 죄 많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를 꺼려하고 부끄러워한다.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게 먼저인 것 같다. 그러나 조금 힘을 내야할 것은 그렇게 실수투성이고,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로서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우리의 자기의로움이 구원하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복음의 부르심을 따라,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우리가 그 정체성을 입은 자들로서 해야 할 일을 인식해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선, 부활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는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사실, 부활을 두 가지의 종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좀 더 가깝게 인식하기 위하여 편의상 이렇게 나누는 것이 좋다. 이것은 나의 용어이다. 큰 부활(eternal life/종말의 부활)과 작은 부활(earthly(temporarily) life/일상의 부활)이 그것이다. 우리는 부활을 너무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부활을 삶 속에서 별로 경험하거나 실천하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하게 큰 부활/종말의 부활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만다.

 

우리가 현재의 삶 속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경험하는 부활은 큰 부활보다는 작은 부활이다. 부활은 죽음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죽어가던 것이 다시 살아나면 우리는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부활을 주는 존재인데,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주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조금만 신경 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부활이 무엇인지를 파악했다면, 이제, 바울이 자연에 대하여 매우 신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동일한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자연 속에서 사망의 고통 가운데 부활을 소망하며 탄식하는 피조물을 발견한 것처럼, 최선을 다해, 탄식하는 피조물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지구의 자전과 공전 소음을 관찰할 수 있듯이,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피조물의 탄식을 들을 수 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심층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나의 구원을 넘어서 피조물의 탄식을 듣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신앙의 개인성을 말하지 않고 신앙의 공공성을 말한다. , 구원은 내가 너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발견하고 인식하는 일이다. 내가 탄식하고 있듯, 다른 이(이웃)도 탄식하고 있다. 탄식하고 있는 내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은 탄식하고 있는 이웃에게도 전달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우리를 일컬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한다(23).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부활을 내재하는 열매다. 우리는 대개 성령의 열매하면,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떠올린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그런데,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다. 일차적으로 성령의 열매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령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성령의 열매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부활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부활을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주는 사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운명이고, 인간론이다.

 

부활을 품고 있는 우리들은 일상 속에서 부활을 잉태한다. 일상의 부활. 부활을 너무 큰 개념으로만 보면 우리는 부활을 잉태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활은 큰 개념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에서 발생되는 게 아니라 작은 개념을 통해서 발생한다. 일상의 부활.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는 모두 일상의 부활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누군가(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의 탄식에 귀 기울이는 것, 그래서 그 탄식하는 피조물에게 조금만 사랑을 베풀고, 눈물을 닦아주고, 용서하고, 조그만 선을 행하고, 인내하는 것, 그래서 그 피조물의 탄식이 기쁨으로 바뀌는 경험을 한다면, 우리는 이미 일상의 부활을 이룬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깊은 탄식 가운데 있는가. 매일 같이 죽음을 경험하면서 산다. 그리고 우리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험한 일을 당할까봐 걱정과 두려움 가운데 산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백신을 개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부활을 경험하는 게 더 중요하다. 가족끼리 서로 따뜻한 말 한 마디 주고 받는 것, 그리고 교회 공동체들끼리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안부를 물어봐 주고, 전화 통화를 하거나 줌 미팅을 통해서, 또는 SNS를 통해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등은 우리가 일상의 부활을 서로 나누게 되는 통로이다.

 

로마서 말씀과 같이 나눈,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 땅으로 도망가다 잠시 머문 벧엘에서 그동안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든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28:16).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부활을 경험한 우리들이 반드시 깨달어야 하는 진리이다.

 

부활의 열매들인 우리들은 야곱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든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는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계신 것을 보아야 하고,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인 것을 아는 것이 부활의 생명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하늘의 생명을 계속 퍼다 나르는 노동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일상에 즐비한 죽음을 몰아내고 얼마나 생명력 넘치는 일상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의 부활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피조물의 탄식이 들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드리운 죽음을 몰아내 줄 수 있는 부활을 품고 있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다. 피조물이 간절히 기다리는 존재, 죽음에 매어 있어 생명을 갈망하는 존재들에게 희망이 되는, 일상의 부활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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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14. 05:27

무겁게 여기는 자

(창세기 25:27-34)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의 특성이 공존한다는 뜻이다. 첫째는 인간이 동물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이것을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해 보면,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뭔가 두 개의 갈등을 일으키는 대립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두 대립적인 요소, 한 단어씩으로 표현하면, ‘영과 육이라는 것을 대한 이원론적인 요소로, 선과 악의 구조로 파악하면 영지주의에 빠지고 만다.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적인 면은 선한 것이고, 인간의 동물적인 면은 악한 것이라고 말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인 것은 선한 것이고, 육적인 것은 악한 것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은 기독교 2천년 역사는 끊임없이 영지주의와 싸워 온 역사인데, 아직까지 영지주의의 영향권에서 못 벗어난 듯하다. 이는 우리가 바이러스의 영향에서 못 벗어난 것과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만 무서운 게 아니라 사상의 바이러스 또한 그것 못지 않게 위험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몸을 죽이지만, 사상의 바이러스는 이성 또는 영을 죽인다.

 

여러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기독교 교육론은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교훈이다. 어거스틴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우리가 해야 할 네 가지의 사랑을 말한다. 첫째는 우리 위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둘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셋째는 우리 옆에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고, 넷째는 우리 아래에 있는 물질에 대한 사랑이다. 네 가지 사랑은 다 중요하다. 이 네 가지의 사랑은 우리 인간을 온전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적(또는 영적)’에 해당하는 사랑과 동물적(또는 육적)’에 해당하는 사랑은 어렵지 않게 나눌 수 있다. 이성적 또는 영적 사랑에 해당하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동물적 또는 육적 사랑에 해당하는 사랑은 자기 자신 사랑과 물질 사랑이다. 모두 다 중요한 사랑이다. 이성적 사랑도 중요하고, 동물적 사랑도 중요하다. 어느 하나가 모자라면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이상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성적/영적 사랑,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동물적/육적 사랑,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물질을 사랑하는 것보다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 아주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정서이다. 이러한 정서에 머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성적/영적 사랑과 동물적/육적 사랑은 모두 중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로 모순된 우리의 모습은 정서적으로 이성적/영적 사랑을 동물적/육적 사랑보다 가치 있게 여기면서도, 실제의 모습은 가치 있는 이성적/영적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가치 없다고 여기는 동물적/육적 사랑을 실천하는 데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마음으로는 그래 우리는 이성적인 존재니까 이렇게 살아야 해하면서도 겉으로는 동물적인 선택을 한다.

 

우리는 그 모습을 에서에게서 본다. 본문에서 두 개의 가치가 대립하고 있다. 에서에게는 이성적/영적 사랑이 존재한다. 그것을 본문에서는 장자의 명분이라고 말한다. 이와 동시에 에서에게는 동물적/육적 사랑도 존재한다. 피곤함과 배고픔이다. 요즘 말로, ‘먹고사니즘이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에 먼저 나오려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다가, 결국 에서가 먼저 나왔고, 그게 엄청 속상하고 아쉬운 듯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다. 그래서 이름도 야곱(Jacob, 발뒤꿈치를 붙잡은 자)’이다. 이 둘은 자라면서 당연히 장자의 명분에 대하여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장자의 명분을 가지게 된 에서는 내심 기뻐했을 것이고, 그것을 빼앗긴 야곱은 낙심했을 것이다.

 

그러한 심리가 반영된 듯, 에서와 야곱은 장성하면서 사뭇 다른 성향을 지니게 된다. 27절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27).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 두 단어, ‘익숙한조용한은 매우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익숙한이란 덫을 놓고 속이는데 익숙하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그가 익숙한 사냥꾼, 들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장자의 명분의 중요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우리가 논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에서는 자라면서 이성적/영적사랑을 소홀히 하고동물적/육적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뜻이다.

 

반면에 조용한으로 번역한 히브리어의 경건한, 완전한 순결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경건한성품을 야곱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하고 말하는 주석도 있으나, 야곱이 성경의 다른 인물, 노아와 같이 경건한사람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적어도 야곱은 성장하면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장자의 명분에 대한 갈망은 깊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 성장하면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게 되었지만,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기며 갈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 이성적/영적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변해갔다는 뜻이다.

 

사람은 참 묘하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은 잘 지키지 않는 경향이 있고, 또한 본인이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을 키우는 경향이 있다. 에서는 본인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지켰어야 했다. 야곱은 본인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없는 것을 위로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성품을 세워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둘의 운명은 얄궂게 엇갈린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판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큰 이야기들(거대서사)이 사라지고, 작은 이야기들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우리는 이렇게 큰 위기(팬데믹)를 맞이했다. 우리는 에서가 큰 이야기인 장자의 명분을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큰 이야기들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간다. 더 이상 우리들의 대화 속에는 큰 이야기들이 오고 가지 않는다.

 

TV 프로그램을 봐도 알 수 있고, 우리가 모여서 나누는 일상의 대화, 그리고 SNS에 올라오는 사진들을 봐도 알 수 있다. 얼마전 KBS개그 콘서트가 막을 내렸다. 그보다 훨씬 일찍 SBS웃찾사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것은 단순히 코미디 프로그램이 폐지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거대서서(큰 이야기들)’이 사라진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코미디 프로그램이 말하고 있는, 거대한 이야기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시를 메운 것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이다. 육아 예능, 연예인들의 잡담/잡기를 보여주는 예능, 또는 삼시세끼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에 가득 들어서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가장 큰 매력은 풍자이다. 특별히 정치적 풍자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희화시켜 꼬집으며 우리의 삶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러한 정치적 풍자는 거대서사에 속한다. 일상을 넘어선 큰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러한 큰 이야기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먹고사니즘에 찌들다보니, ‘장자의 명분같은 것을 지키고 생각하는 것을 피곤해하고 부담스러워한다. 딱 에서의 모습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 현상을 보자. 팬데믹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 인간이 큰 이야기들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에 온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부터 우리는 얼마나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사랑의 가치들을 소홀히 해왔는가! 지난 150년 동안의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러한 큰 이야기들은 내팽개치고, 오직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에만 전념했다. , 우리는 너무 작은 이야기들에만 몰두해 살았다.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일한 장 지글러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보면,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고, 매일 10만명 이상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5달러짜리 백신이 없어서 질병에 죽어가거나, 1달러짜리 모기장이 없어서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말라리아로 죽어가는데도, 우리는 그러한 거대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한 약자, 가난한 자를 돌봐야 한다고 말하는 이웃 사랑, 또는 하나님 사랑에 관심이 없다. 다만 우리는 개인의 일상에만 관심을 둔다. 먹는 거(SNS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사진이 음식 사진이다), 주거, 관광, 레저, 개인의 심리적, 성적 취향 등에만 관심을 둔다.


요즘 한국과 미국에서는 팬데믹 때문에 여러가지 사회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한 가지, 종교계와 관련된 것은 보건 당국이 발표한 소모임 금지, 또는 찬송 금지에 대한 기독교계의 분노가 만만치 않다. 이것은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문제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치가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기독교인들이 소모임 금지나 찬송 금지에 대하여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들의종교적 일상이 침범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예배를 드려야 살고, 소모임을 통해 친밀한 인관관계를 유지해야만 이 어려운 시기를 잘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행동인 종교적 예배와 소모임으로 나타나다 보니 매우 영적인 듯 보이나,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동물적이고 육적인 행동이다.

 

팬데믹은 거대서사다. 지금 내가 피곤하고 배고프다고, 장자의 명분을 헐값에 팔 수는 없다. 피곤하고 배고프더라도, 이성적/영적으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웃에 대한 배려를 위해서라도 자기의 일상을 자발적으로 헌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여전히, 자기 사랑에 파묻혀 자기 자신의 바깥의 이야기에 신경을 끄고 사는가.

 

우리에게는 무겁게 여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장자의 명분’, 큰 이야기기들(거대서사: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사랑, 지구환경, 통일)을 소홀히 여기며 살았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먹고사니즘에 빠져 작은 이야기들(먹는 거, 노는 거, 주거, 관광, 레저 등 소비하는 데만)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쉽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리는 에서들이 되었다.

 

작은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다가, 큰 이야기가 닥치니 우리는 모두 패닉에 빠진 듯하다. 그래서 저항이 만만치 않고, 사회분열이 극에 치닫고 있다. 어찌해야 할까. 그동안 우리는 너무너무 자기 사랑과 물질 사랑즉 동물적/육적 사랑에 치우쳐 살았다. 이제는 사랑의 균형을 맞추어 좀 더 온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즉 이성적/영적 사랑에 힘을 기울여야 할 때가 왔다. 그렇지 않으면, 2, 3의 팬데믹이 몰아쳐,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 우주에서 살아지고 말 것이다. 이 준엄한 현실을 무겁게 여기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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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7. 07:30

위로

(창세기 24:61-67)

 

창세기는 이야기들의 집합체이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얽히고 설켜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를 완성해간다. 창세기의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는 이야기는 호흡이 가장 길다. 이삭이 아내를 얻는 이야기는 이삭의 엄마 사라가 죽은 다음에 전개된다. 사라가 이삭을 얼마나 귀하게 키웠겠는가. 이삭은 엄마 사라에게 모든 것이었을 것이다.

 

아이를 늦게 낳은 사람일수록 자식을 귀하게 키운다. 자식을 일찍 낳으면 자식 키우는 즐거움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자신도 어리기 때문에 감당이 잘 안 돼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대개 자식을 늦게 낳은 부모는 자기 자식을 손자보다 더 사랑한다. 그런데, 자식을 일찍 낳은 부모는 자기 자식보다 손자를 더 사랑한다. 몰랐던 기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아내도 떠나가고, 늙어버린 아버지 아브라함은 뭔가 비장한 마음으로 아들 이삭의 아내를 얻어주려 한다. 그 비장함은 늙은 종을 불러 행하는 의식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데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그리고 의식(ritual)을 치룬다. 이삭에게 아내를 얻어주는 일이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요즘 결혼풍속도를 보면, 결혼이 매우 사적인 영역으로 떨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목회와 커피 장사를 겸하시는 지인 목사님의 보고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할 때 주례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결혼은 인륜지대사로서 인간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지만, 이제 그러한 통념도 바뀌고 있는 듯하다. 실로, 우리는 격동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거다.

 

준엄한 의식이 치러지고,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얻으러 하란 땅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준엄한 의식에 걸맞은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나며(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부른다), 모두의 마음이 기쁜 혼인이 성사된다. 물론 혼인성사의 과정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다르다. 종이 아내를 얻으러 하란 땅으로 갔고, 종의 증언을 듣고, 라반과 어머니는 딸을 내어준다. 그리고, 리브가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 이삭을 자신의 남편으로 삼겠다고 종을 따라 나선다. 연애를 통해 결혼에 이르는 현대인들에게는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기나긴 여정 가운데, 리브가와 이삭이 드디어 만나게 되는 장면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은 매우 뭉클하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67). 참 따스한 문장이고 장면이다. 자신을 귀하게 키워준 엄마를 상실한 슬픔이 컸던 이삭은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 받을 수 없었는데, 드디어 아내를 얻음으로 위로를 받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의 기쁨과 의미를 상실하게 될 때가 있다. 삶의 기쁨과 의미를 상실하는 일은 인간에게 참 치명적이다. 기쁨과 의미가 없는 삶만큼 힘들고 어려운 삶이 없다. 이삭이 리브가를 통해 위로를 얻었다는 뜻은 삶의 기쁨과 의미를 발견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위로가 삶 속에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메마른 삶이 될까.

 

성서정과에 의해 함께 읽어야 하는 바울의 서신서 중 하나인 로마서를 보면, 바울은 기쁨과 의미를 상실한 인간의 영혼을 매우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본다. 그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 기독교 인간론을 매우 극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아마, 이 구절을 접한 사람은 이 구절을 통해 자기 실존을 표현하길 즐길 것이다. 나도 살면서 실존의 비극을 경험할 때 입에서 저절로 이 말씀이 나온다. 그러면서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나를 구원해주세요.”

 

여기서 곤고한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탈라이포로스는 육체적인 고생으로 인해 겪게 되는 심한 고통이나 힘든 일을 겪는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이다. 어떤 절망의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다. ‘절망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왜 바울은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까?

 

바울은 자기 자신의 실존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내 안,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압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죄입니다. 내가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안에서 하나의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의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봅니다.”(7:18-20, 22-23 / 우리말 성경).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참 이상한 것을 경험한다.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 안다. 그래서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리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막상 행동을 하면, 이상하게 그토록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게 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된다. 왜 그럴까? 내 지체 안에 있는 하나의 다른 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 다른 법을 바울은 죄의 법이라고 부른다. ‘죄의 법’,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법이다. 온갖 악한 일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바울은 우리 인간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준다. 로마서 723절은 그것을 아주 잘 담아내고 있다.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 문장에서 쓰이는 단어는 모두 전쟁용어이다. “싸워라고 번역된 헬라어 안티스트라튜오메논적을 향해 군대를 이끌고 가다’, ‘전쟁을 일으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이다. 또한, “사로잡는 것을로 번역된 헬라어 아이크말로티존타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전쟁 포로를 사로잡다’, ‘적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다는 뜻을 지닌 동사이다.

 

바울은 이것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 마음은 실상 전쟁터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우리는 패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실존이 죄의 법에 의해 전쟁포로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전쟁도 끔찍하고 혼란스러운데, 그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혀 있다는 것만큼 절망도 없다. 바울이 살던 로마시대에 의하면, 전쟁포로는 무조건 노예가 되었다. 노예의 삶에 무슨 기쁨과 의미가 있을까. 노예는 죽지 못해 살거나,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지옥같이 보낼 것이다.

 

사랑하는 엄마를 잃고 상심해 있었던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얻음으로 위로를 받았다. 삶의 기쁨과 의미를 되찾았다. 그런데, 바울은 아주 근본적은 인간의 상심과 절망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이 실은 전쟁터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형편을 속이고 기만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드러나고 있다. 트럼트 대통령은 이번 연말에 있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지 못할까봐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팬데믹의 상황을 자꾸 속이고 기만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다. 트럼트 대통령의 행태는 겉으로 드러나고 그 술수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대놓고 욕을 먹는 것이지만, 실상 우리는 모두 그러한 기만을 부리며 산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형편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삶의 형편을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많은 선각자와 선지자들이 생태 위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경고해 왔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제인 구달이다. 1960, 26살의 나이로 탄자니아의 한 숲에 들어가 침팬지와 더불어 살며 침팬지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환경운동가로 변신하여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생태 위기를 전했다. 1980년대부터 생태 위기를 전했으니, 40년 동안이라 그 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렇게 팬데믹을 맞아 적나라한 우리의 삶의 형편을 경험하고 나니, 이제서야 그녀의 외침이 귀에 들어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제인 구달은 희망론자이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팬데믹으로 인해 사람들이 우리가 그동안 잘못 살아왔구나라는 것을 몸소 깨닫고 있기 때문에 미래가 희망적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형편을 정직하게 직면할 때 오히려 희망을 말할 수 있고 꿈 꿀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곤고함을 고백한다. 이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처절한 경험이다. 인간은 어떠한 일이든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삶의 형편을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지금 생태 위기를 사건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전보다 더 많이, 더 심각하게 생태 위기를 말한다. 이번에 준비를 잘 하지 못하면,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하면, 우리는 매우 치명적인 생태 위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삶의 방식을 이번에 바꾸지 못하면, 식량폭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식량이 부족하여 수많은 인류가 굶어 죽을 것이고,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이 발생할 것이고, 식량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 지금이 바로 행동할 때이다.

 

바울이 인간 실존의 곤고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유는 인간을 욕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본인이 지금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바랄 수 없다. 그리고 구원이 있다는 것도 모른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러나 자신의 곤고함을 안다면, 인간은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을 갈망할 수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누가는 누구인가?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구원의 갈망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30).

 

우리의 실존이 그 어느 때보다 절망에 놓여 있다. 우리의 실존이 그 어느 때보다 구원을 갈망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 마음이 즐거운 복음을 접했다.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기쁨과 의미를 상실한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위로 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기쁨과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삶에는 소망이 있는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배워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리의 입술에 두자. 그러면, 우리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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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7. 1. 05:04

선물

(창세기 22:1-14)


성경에는 괴상한 이야기들이 많다. 잔인하고 부도덕한 이야기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구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만 뽑으라면 단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이야기일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의 부활 사건일 것이다. 두 이야기 모두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여기에서는 윤리, 도덕, 상식이 안 통한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윤리, 도덕,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고, 하나님이 바치라고 했다 해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버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 길을 따라 나선 이삭도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온통 비윤리, 비도덕, 비상식이 판을 치는 이 이야기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히브리서 11장에 의하면,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이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7-19).

 

히브리서에 의하면,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려고 한 이 사건은 믿음의 행위였다.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잔인해 보이는가? 히브리서에는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믿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우리는 매우 비이성적, 비상식적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오해 받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몰지각한 행위를 일삼는 기독교인들도 더러 있다. 모두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기 위하여, 이 사건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시험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기 원하셨다. 시험은 뭔가를 입증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또는 믿음)알기원하셨다. 여기서 쓰인 알다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야다이다. ‘야다는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을 꿰뚫어볼 때 쓰는 단어이다. 그 사람의 진짜 마음을 알 때, ‘야다라는 단어를 쓴다. 우리는 상대방의 진짜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안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진짜 마음을 알고 나면, 평안하다.

 

삼위일체론을 공부해 보면, 그것은 수학이 아니라 심리학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단순히 어떻게 31이 되는가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질문과 답을 찾으려 하지만, 정작 삼위일체론은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수학놀이가 아니다.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각자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하나의 통일성을 갖출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현실 속에서 겪는 가장 심오하고 까다롭고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는 각자 인격이 있다. 우리는 각자 고유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각자의 인격이 자유롭게 드러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각자의 인격에 제한이 가해지면, 그것은 그 인격의 자유를 빼앗는 폭력이다. 그런데, 각자의 인격을 존중하고 서로가 생득적으로 지닌 자유를 누리는 일은, 어찌보면 쉬운 일이다. 문제는 각자의 자유가 어떻게 충돌하지 않고, 공공선을 이룰 것인가에 있다.

 

아주 쉬운 말로, ‘각자 인격이 있고 자유를 가진 너와 내가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너는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너와 내가 함께할 때이다. 우리는 이때, 어떻게 서로 각자 가진 인격과 자유를 존중하며, 폭력이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마음이 될 수 있을까? 정말로 쉽지 않은 문제이다. 삼위일체론은 이러한 깊은 심리학적 문제를 담고 있다. 고유의 인격은 개별성이라고 부르고, 인격의 연합은 통일성이라 부른다.

 

하나님도 인격이 있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에게도 인격이 있다. 아브라함 이야기로 논의를 좁혀서 다시 이야기해 보자면, 하나님도 인격이 있으시고, 아브라함도 인격이 있고, 이삭도 인격이 있다. 지금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세 인격이 충돌하고 있다. 아슬아슬하다. 그들의 관계에는 하이어라키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가장 불쌍한 희생자는 누구인가? 가장 힘 없는 이삭이 될 것이다. 결국 이삭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삭의 인격이 가장 처참하게 무시당하는 듯싶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보면서, 이삭처럼 희생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인격을 하나님처럼 힘 센 인격으로 키우고 싶어한다. 이렇게 인격들 간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 약자만 손해보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이기적인 생각을 뒤집는 이야기가 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다. 어떻게 뒤집히는지 한 번 보자.

 

교부 중에 오리게네스라는 분이 있다. 185년에 태어나 251년경에 돌아가신 분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불리는 오리게네스는 삼위일체론을 논하며, 삼위의 통일성을 의지의 연합(Unity of Will)’으로 설명한다. 이 의지의 연합이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시험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신다. 그리고 그 의지가 아브라함에게 전달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지대로 행동한다. 그리고 이삭도 아버지의 의지에 순종한다.

 

하나님의 의지 속에는 사실 어떠한 폭력이 들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의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지, 아들 이삭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의 의지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 즉 아들 이삭을 죽이는 것으로 잘못 오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이다. 우리는 대개 무엇인가를 행할 때 이해의 범위 안에서 행동하지 못하고, ‘오해의 범위 안에서 행동할 때가 많다. 그러면, 거기에는 뜻하지 않은 불순종 또는 폭력이 발생하기 쉽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지를 오해하지 않고 이해한다.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이해는 순종으로 나타난다. 이삭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오해하지 않고 이해한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아버지가 자신을 결박하여 번제단에 올릴 때, 반항하거나 아버지를 향해 욕을 퍼붓지 않는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할까? 나는 이러한 상황을 선물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싶다.

 

아브라함에게 신앙은 선물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어느 날 문득 아브라함에게 다가오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선물처럼 다가오셨다. 성경은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로 표현한다. 뜻한 것이 아니고, 갈망한 것도 아니다. 그냥 선물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가오셨다. 그러고 자기 자신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게되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온 것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 있을 때, 우리가 알다시피, 태가 끊어져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선물로 주셨다. 이삭은 선물처럼 아브라함에게 왔다. 이것은 이삭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아버지 아브라함을 선물로 주셨다.

 

선물은 굉장히 우연인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선물은 굉장한 의지이다. 선물에는 나의 의지가 담겨 있다. 선물만큼 나의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는가. 그 선물을 받는 순간, 우리는 의지의 연합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 발생하는 모든 것을 선물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선물을 준 누군가와 의지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선물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우리의 삶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져 있을수록 더 중요하다. ‘의지가 연합되지 않을 때, 거기에는 갈등이 발생하고, 갈등은 폭력을 낳는다. 폭력이 발생하면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선물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거기에는 의지의 연합이 발생해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 행복을 성경은 여호와 이레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가정 폭력이 늘었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증가했으며, 미래를 알지 못해 불안에 떨며 낙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실제로, 유명인들 중에서 자살한 사람까지 보도되고 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비이성적인, 비상식적인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분석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보듯, 내 삶의 현실을 선물로 인식할 줄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 발생한 어떠한 일을 선물로 본다는 뜻은 그것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팬데믹 현상을 오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해하고 있는가? 신앙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지금 팬데믹 안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연합을 이루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실제 사건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사건 속에 자신을 감추어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고통스러운 사건을 피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고통스러운 사건과 마주하는 데 있다.

 

지금 팬데믹으로 인하여 겪는 고통스러운 일들, 그리고 팬데믹이 아니더라도, 우리 삶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일들, 그것을 선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래서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의지와 우리가 연합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질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태초부터, 애당초, 선물이었다. 그러니, 선물 같은 인생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생이 선물이라는 것, 인생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이 선물이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는 선물 같은 인생을 하나님의 의지와의 연합 속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 그 은혜가 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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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3. 16. 08:15

예배자

(창세기 13:1-18)

 

John Donne(존 던/ 1572 1 24일에서 6 19일 사이~1631 3 31)‘No man is an lsalnd’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누구의 죽음도 나를 위축시킨다. 나는 인류에 포함되기 때문에 ... 그러니 누구 때문에 종이 울리느냐고(누가 죽었냐고)알려 하지 마라. 종은 바로 당신을 위해 울린다.

 

헤밍웨이의 소설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여기에서 빌려온 것이다. 존 던은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영국인으로서 16세기 종교개혁을 지나 성공회가 국교로 자리잡아가며 가톨릭 진영과 혈투를 벌이던 시대를 살았다. 그는 <유토피아>의 작가로 알려진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여동생의 손자이다. 원래 가톨릭 신자였던 존 던은 나중에 성공회로 전향하고, 성공회 신부가 된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삶의 애환이 담겨 있다.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 자기의 신념/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목숨을 내어 놓는 것과 같았다. 신앙을 지키느라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6세기, 17세기 유럽에서 발생했던 종교전쟁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개신교 진영(성공회 포함)과 가톨릭 진영이 싸우느라 말할 수 없는 생명이 희생되었고, 그 싸움의 앙금은 알게 모르게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 싸움과 전혀 상관없었던, 유럽인도 아닌, 동양인들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존 던은 그러한 격변기에 자기의 신앙과 신념을 지키며, 그 어려운 시기를 이길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길렀다. 종교전쟁을 보면서 그는 수많은 회의와 절망에 휩싸였다. 그러면서 그는 생명의 중요성을 점점 더 깨우쳐갔다. 그의 시 ‘No man is an island’에는 그러한 그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아무도 섬이 아니다

 

어느 사람이든지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본토의 한 부분이어라.

만일에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게 되면,

유럽 땅은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만일에 모래벌이 그렇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며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의 자신의 땅이

그렇게 되어도 마찬가지이어라.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나를 감소시키나니

나란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서 저 조종(弔鐘)이 울리는지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려고 하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므로.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예배를 생각한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릴까? 바이러스의 창궐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된 이 상황에서, 예배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오간다.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 실천을 통해 바이러스 창궐을 막아보겠다는 보건당국의 정책으로 인해 모든 교회가 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을 이용하여 예배를 드린다.

 

매일 같이, 자유롭게 하던 것을 강제적으로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신앙공동체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잘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평소에 교회 가는 것, 예배 드리는 것이 귀찮고 부담스러웠는데, 이 참에 좋은 핑계가 생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신앙인들은 예배 드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사람은 습관처럼 하던 것을 하지 못하면 불안해진다. 예배가 우리 삶의 일부이고, 습관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하는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기독교의 예배는 무엇인가? 존 던의 시가 우리에게 잘 설명해 준다. “No man is an island”. 누구도 섬이 아니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각 사람에게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이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본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예배를 통해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 볼 수 있다.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피신했던 아브람(아브라함의 이름을 받기 전) 일행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 기근 때문에 피신했던 애굽에서 아찔한사래사건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족 모두 몸 성히, 더불어 애굽의 왕으로부터 많은 재산도 하사 받은 상태에서 그들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

 

애굽에서 돌아온 아브람 일행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터를 잡고 거주한다. 이곳은 명당이었던 것 같다. 이들이 이곳에 거주하게 된 것은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첫 이주했을 때에 이어 두번째이다. 그런데, 그때와는 달리 문제가 발생했다. “소유의 넉넉함때문이었다. 아브람 일행은 소유가 불어나, 더 이상 그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없었다.

 

그때의 재산은 지금의 재산과 달라서, 그들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재산은 소나 양 같은 가축들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나 양들을 먹일 목초지였다. 한정된 공간에서 많은 가축들을 먹이다 보니,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브람과 조카 롯, 또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 등이 서로 많이 부대꼈다. 그들에게 다툼이 잦아졌다. 다툼이 잦아지면 함께 거주하는 게 어렵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서로 갈라서는 것 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누가 어디로 갈 것인가? 사람 마음이 다 똑같다. 좋은 목초지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우리가 현재 사회에서 하는 경쟁도 모두 이것을 위한 것 아닌가. 좋은 목초지, 즉 좋은 학교를 가지 위해서 경쟁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경쟁한다. 경쟁의 우위에 올라서려고, 사람들은 물불 가리지 않는다.

 

아브람과 롯은 삼촌과 조카 사이로, 좋은 목초지를 선택할 권리는 아버지와 같은 아브람에게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아브람은 그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양보한다. 물론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지녔기에, 넉넉한 마음으로 쿨하게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브람의 행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의 믿음에서 비롯된 결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 ‘제단을 쌓다라는 말은 예배드렸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가는 곳마다 무작정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예배를 드린다.

 

14.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다. 예배의 주도권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우리가 먼저 드려서 초월적 존재의 마음을 달래주는 기복의 행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은총)에 대한 반응(감사)이다. 이것을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고백과 감사와 평안이 담긴 신앙행위이다.

 

지금은 교회당에 종탑이 있는 교회 건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어렸을 적에 교회에는 종탑이 있었다. 긴 밧줄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것을 타고 노는 게 일이었다. 그리고, 주일 아침, 예배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정해진 시간에 교회의 집사님 중 한 분은 거르지 않고, 종을 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종을 왜 울렸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저, 교회의 예배 시간을 알리는 역할만 있는 줄 알았다.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는 (알람) 시계가 없었으므로, 일하다 예배 시간을 놓쳐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므로 종을 쳐서 동네 가득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여,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교회에 모여 예배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교회의 종소리는 단순히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한 기능만 있었던 것이 아다. 교회의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나?”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울린다. 종소리가 울릴 때, 우리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종소리는 나만 듣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족도 듣는다. 이웃도 듣는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알게 해주는 것이 종의 존재이다.

 

이러한 깊은 존재론적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교회의 종소리가 더 이상 울려 퍼지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종소리를 통하여,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는 은총 받은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아브람처럼 자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시절에, 나만 먹고 살겠다고 사재기를 하지 않을 것이고,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먼저 챙겨주는 온정이 넘칠 것이다. 귀찮게 교회 가지 않아서 편하다는 생각보다도,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 예배를 드리며 우리가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고 고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 누구도 섬처럼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는 은총 받은 사람이라는 뿌듯한 마음이 불안과 공포, 그리고 혐오를 몰아내고, 그 마음에 안에 감사만이 자리할 것이다.

 

우리는 예배자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이다. 그래서 예배는 그 자체로 감사(thanksgiving)’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돌본다.

 

그러니, 예배자 여러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들거든, 더 많이 예배를 드리십시오.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생명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살려 주시고,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풍성케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평안을 누리십시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예배 가운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십시오. 주님은 죽기까지, 죽음 이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평안 가운데 거하십시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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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3. 11. 07:08

내어줌 – 종의 노래 4

(이사야 52:13-53:6)

 

이사야서에는 4개의 종의 노래가 있다. 종의 노래의 특징은 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그 종의 생애를 통해 이스라엘의 꿈이 실현되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것 노래한다는 것이다. 종의 노래가 중요한 이유는 기독교에서 그 종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4개의 종의 노래를 요약한 것이다.

 

종의 노래 1: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과 이방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42:1-4)

종의 노래 2: 하나님의 종은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사명과 이방에 빛을 비추어 구원을 베풀 사명을 위해 부름 받았다 (49:1-6)

종의 노래 3: 하나님은 그의 종에게 원수의 공격에 견딜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이다 (50:4-9)

종의 노래 4: 하나님의 종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모욕과 멸시와 능욕, 고통을 받는 고난의 종이다 (52:13-53:12)

(출처: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종의 노래를 통해 보면, 기독교 신앙의 매우 독특한 특성을 발견한다. 한 사람에게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는 그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이게 참 신비로운 거다. 성경은 아주 독특한 책이다. 우리가 대개 성경, 또는 성서라고 부르지만, 보수쪽에서 성경, 진보쪽에서는 성서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보수쪽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진보쪽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은 매우 말장난 같다. 성경의 풀 네임은 성경전서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냥 보통 고전의 책이 아니다. 우리가 영어로 구약을 Old Testament라 하고, 신약을 New Testament라고 하는 것처럼, 성경은 궁극적으로 계약서이다. 법이다. 물론, 성령의 법이다.

 

이 계약이 성사되는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것을 믿으면, 그것이 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그대로 이루어진다.

 

네 번째 종의 노래인 오늘 말씀을 보면, 6절에 의 속성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어떠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말해준다. “우리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6). 양은 자기의 먹이에 집중하느라 쉽게 길을 잃는 속성이 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먹고사니즘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길을 잃는가? 이게 나쁘다기보다, 우리의 연약함이다. 그래서 목자가 없으면, 살려고 먹으려다, 맹수에게 어처구니 없이 오히려 잡아 먹히는 꼴이 되고 만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여시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다.

 

네 번째 종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우리 나라 말로 형통하리니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스킬이해하다, 성공하다, 지혜롭게 행하다, 헌신적으로 행동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 말로 번역된, ‘형통하다라는 말을 보면서, ‘그래, 우리가 잘 믿으면, 우리의 삶의 형통할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에게 적용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형통하다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뜻은 지혜롭게 행동하다이다. 종은 지혜롭게 행동함으로성공(형통)할 것이다. 여기서 지혜롭게 행동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뜻이다. 종의 형통은 순종이다. 여기서 순종은 내어줌을 뜻한다. 무엇에 대한 내어줌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자신을 내어줌을 뜻한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내어줌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내어주는 이야기가 가득 차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룻기서의 보아스 이야기이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지시에 따라 보아스와 가까워진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을 그냥 아무렇게나 아내로 맞이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룻을 향해 보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 지니라 하는지라”(3:12-13)

 

우리는 여기서 기업 무를 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보아스를 본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내어주었을 때에, 거기에는 구원이 발생했다. 룻과 보아스의 사랑은 축복 속에 이루어졌고, 룻과 나오미는 죽음과 같은 가난에서 구제 받았으며, 그들을(그들의 혈통) 통하여 다윗 왕이 세상에 왔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들의 혈통을 통해서 이 땅에 왔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자신을 내어준 신약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이다. 누가복음은 그 기사를 이렇게 전한다. 어느 날 가브리엘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으니라”(1:30, 31, 37).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마리아는 그 말씀에 자기를 내어준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리나”(1:38).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내어드리는 것이다.

 

요즘, 신천지 이단이 판을 치고 있다. 그들이 어떤 술수를 써서 사람들을 꾀어내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형편 없는 교리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시키는지, 등에 대한 것들은 이미 레위기 성경공부 마지막 시간에 나누었다.

(어제 그런 것들을 더 보충하여, 재촬영을 했다. 이제 바깥에 돌아다니기도 힘든 시기가 오는데, 시간내서 한 번 들어보시라)

 

이단과 정통을 구분짓는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내어줌의 문제이다. 이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들을 내어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러는 척 할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착취한다. 그래서 거기에는 생명과 구원이 있지 않고, 오직 죄악과 죽음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내어드린다. 그 말씀에 자기를 내어드려, 그 가운데서 생명과 구원이 창조된다.

 

내어줌’, 순종은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구원의 궁극적인 신비이다. 우리는 그것을 종의 노래를 통해 배운다. 외모(외적인 것)가 화려한 사람이 생명과 구원을 가져오는 게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가르친다. 외적인 것이 화려해야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거짓 가르침이다. 외적인 것을 화려하게 하는 것은 자기 만족에 대한 추구이고, 다른 생명에 대한 착취의 결과일 뿐이다.

 

종의 모습은 이렇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2). 그러다 보니,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질병)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슬픔)를 아는 자라”(3).

 

그런데, 4절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실로”, 이것은 히브리어 아켄을 번역한 것인데, ‘진실로, 틀림없이, 참으로라는 감탄사이다.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전개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4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떠한 예상치 못한 국면을 우리에게 드러내신다. 우리의 운명이, 우리가 멸시하고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 바로 그 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징계우리의 평화’, 그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우리는 나음을 얻었다는 것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종의 고난과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얻은 이유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종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어줌, 순종은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덕목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세요!’라고 말해도, 순종을 강요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믿음을 깨닫고 받는다면, 내어줌, 순종은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내어줌, 순종은 아주 작은 것이다. 절대로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주거나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만이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 주고, 구원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다. 그분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를 조금이라도 흉내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씩 조금씩 한 번 나 자신을 내어드려 보는 것이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우신다. 그러면, 우리의 자그마한 내어줌, 순종은 크게는 아니라 할지라도, 자그마한 파장을 불러 올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내어줌, 순종을 통해서 생명과 구원이 창조된다면, 그것만큼 우리의 삶을 보람차고 기쁘게 하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에 따라 지혜롭게 행하면, 우리의 인생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것도,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인생이 형통하길 바라는 자, 하나님의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내어드려 보라. 순종해 보라. 그 삶이 형통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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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25. 03:34

따뜻한 마음따뜻한 공동체

(레위기 19:9-18)

 

레위기가 법률이라는 것을 알면매우 차갑고 재미 없을 것이다라는 선입관이 생긴다. 물론 레위기 앞쪽에 나오는 제사법(제의)에 대한 부분은 현재 지구 상 어디에서도 실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레위기의 제사법은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된 바벨론 포로기 때, 그리고 제사를 경험한 적이 없는 많은 이들을 상대로 쓰여진 것이다.

 

인간에겐 다른 동물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인간은 경험을 하지 않아도, 상상력을 통해 무엇인가를 경험한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을 생각하고 창조해 낼 수 있다.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성경 공동체의 상상력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상적인 사회이다.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영국에서 살았던 토마스 모어는 성경의 이러한 이상적인 상상력을 자신만의 필치로 옮겨 적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유토피아>라는 책이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없다라는 뜻의 ‘ou’와 장소라는 뜻의 토포스가 합쳐진 말이다. 그래서 유토피아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사실, 어디에도 없는 장소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장소를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경험할 수 있다.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 ‘상상력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그저 동물의 왕국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렇게 문명 사회를 찬란하게 이룬 이유는 모두 상상력덕분이다.

 

상상력이 없으면, 일차적으로 경제생활이 불가능하다. 경제라는 구조를 유지해주고 지탱해 주는 제1 요소는 이다. 그런데, 이라는 것은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돈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지금 여기에 ‘100짜리 지폐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것이 100불이라고 굳게 믿고, 100불을 향해 탐욕을 내지만, 실상, 이 지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이 100불이라는 상상력을 부여하고, 그 모든 상상력을 우리 인간이 공유하며,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성막 안에서 벌어지는 레위기의 제의(제사법)는 엄청난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 상상력이야 말로 신적인 능력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제의(제사법)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다.

 

레위기에서 계속하여 상상하는 세계는 에덴동산이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하여 참된 생명을 얻는 그러한 세상이다. 무지막지하게 비참한 현실 속에서 고통 받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상상력을 통하여 그러한 비참한 현실 속의 고통을 넘어서고 있다. 지금 그들은 죽음의 영역에 던져져 버린 부정한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통하여, 죽음의 영역에서 건짐(속량)을 받아,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질 것(속죄)를 굳게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상상력 없이 절대 불가능하다. 두 눈으로 자신들의 처해진 상황만을 보고 말았다면, 그들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 눈으로 보이는 현실만 본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을 상상하고 갈망했다.

 

이스라엘이 상상한 에덴동산은 거룩한 세상이다. ‘거룩이라는 말은 굉장히 신학적인 용어이다. 속된 것이 제의를 통해서 정결해지는 것이고, 정결해진 것이 하나님의 성별을 통해서 거룩해진 것이다. ‘거룩하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뜻이다.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 품 안에 그의 생명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다.

 

레위기의 전반부, 그리고 절정을 이루는 레위기 16장은 죽음의 영역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인생들이 어떻게 제의(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지는 지, , 거룩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속한 인생으로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레위기의 후반부, 레위기 17장부터는 하나님께 속한 인생이 어떻게 생활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이 있다.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렐레스의 아들의 이름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에게 헌정한 책이거나, 아니면, 그의 아들에 의해서 편집된 책으로 여겨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 중에서 도덕적인 미덕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말한다. “도덕적인 미덕은 습관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시중에 나와 있는 습관에 대한 모든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라 보면 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서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좋은 삶/행복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증이라고 보면 된다.

 

헬라어로, 습관은 Ethos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런 미덕은 습관이라는 말을 조금 고쳐서 도덕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62). , 그는 Ethos(습관)에서 Ethics(도덕/윤리)가 왔다고 말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그가 주장하는 것은 도덕적 미덕은 어떤 것도 우리 안에서 저절로 생겨나지 않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도덕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따라, 많은 이들은 습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습관이 도덕/윤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습관을 통해 형성된 도덕/윤리가 좋은 삶/행복한 삶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레위기에서 말하는 좋은 삶/행복한 삶에 대한 생각은 많이 다르다. 레위기에서의 좋은 삶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거룩한 삶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습관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력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끊임없이 습관을 기를 것을 강조하지만, 레위기는 끊임없이 상상할 것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으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은 습관을 기를 것이다. 그들은 추수할 때 이삭을 많이 남겨놓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도둑질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거짓말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거짓 맹세와 하나님 모독을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억압과 착취, 그리고 임금 체불을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장애인에 대하여 배려하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불의하고 불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는 습관을 기를 것이고, 비방과 원망을 하지 않는 습관,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습관을 기를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은 습관을 기르기 보다, 계속하여 상상할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더 이상 아무런 걱정과 근심이 없고, 어떠한 욕심도 필요 없고, 절망과 눈물이 필요치 않는,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력 넘치는 삶에 대하여 끊임없이 상상할 것이다.

 

무엇이 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습관을 들이느라 고생하는 것보다, 상상력을 통해서 유토피아가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는, 그러한 거룩한 삶이 더 따뜻하고 창조적으로 보인다.

 

나는 이러한 상상력의 극치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그대로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 이 말씀을 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로 더할 수 있겠느냐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6:25~34).

 

우리가 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삭을 남겨두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도둑질하고 거짓말을 하는가? 우리는 왜 거짓 맹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가? 우리는 왜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임금체불을 하는가? 우리는 왜 장애인을 배려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불의하고 불공정한 재판을 일삼는가? 우리는 왜 비방하고 원망하고 원수를 미워하는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다는, 바로 그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하나님께 속한 자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당신의 품 안에 감추어두신 것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상하지 못하고, 그저 두 눈으로 보이는 것들에만 현혹이 되어, 내 생명이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며,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어떻게 좀 살게 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며 욕심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전반에 흐르고 있으며, 레위기가 우리에게 강력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그 거룩한 상상력을 배우자. 그 상상력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레위기를 공부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레위기에서 상상력을 배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속죄를 받아,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염려하는 비참한 인간이 아닌, 우리의 생명을 당신 품에 감추어두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누리며 사는, 좋은 인생, 행복한 삶을 사는 참으로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러한 따뜻한 마음으로, 따뜻한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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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21. 02:57

위의 것을 찾으라의 의미

(골로새서 3:1-17)

 

왜곡된 율법주의와 헬라 철학의 이원론이 만들어낸 헛된 사상과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금욕주의와 그릇된 겸손에서 비롯된 자기 폄하를 가져왔다. 이것의 문제는 율법이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구원하는 게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종교적 금욕이 자신을 구원하게 된다는, 이상한 구원론에 빠지게 된다.

 

이것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바울은 골로새 교회 지체들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고 권면한다. 1절에서는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고, 2절에서는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한다. 이 두 개의 말을 종합해 보면,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위의 것이란 무엇인가?

 

언뜻 보면, 2절 말씀에서처럼, ‘위의 것땅의 것과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땅의 것을 하찮고 저등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 여지가 높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2장에서 나오는 자기 폄하로 이어지게 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자기 폄하는 몸의 학대로 이어진다. 금욕은 몸의 학대가 아니라, 몸을 살리는 일어야 한다. 그런데, 잘못된 생각은 몸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몸을 학대하게 된다. 이 점을 늘 조심해야 한다.

 

바울(실제 저자는 바울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을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므로, 그냥 저자를 바울로 쓴다.)의 의도는 단순히 하늘과 땅을 공간적 의미로 대조하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현이다. 그것은 영적인 것이기에, ‘라는 말로 표상하는 것이다. 반면에, ‘땅의 것이라는 말도 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땅의 것이란 하나님 나라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이 실현되지 않는 영적 세계를 말한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왜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는 지에 대한 것이다. 그에 대한 실마리는 1절과 3절이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존재이다.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정말 위대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다. ‘감추어져 있다라는 말은 헬라어 크륍토의 완료 수동태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우리의 생명은 위에 계신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다. 그렇기에, 땅에 속한 자들(, 하나님의 통치 안에 머물지 않는 자들)은 볼 수 없고, 해할 수도 없다. 이그나티우스를 비롯한 초대교부와 순교자 유스티노스 같은 순교자들은 이것을 아주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이 하나님 안에 있기에, 그들은 이 땅에서의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느끼는 지에 대한 여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지금 이렇게 생명이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다라는 말을 설명하고 있는 나도 이것을 설명하고 있으면서,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예전에, 오히려 공부가 덜 됐을 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별 생각 없이 안다고 생각했으니, 이제 공부를 좀 더 한 지금, 오히려 그 신비를 잘 알지 못하겠다. 아마도, 그것이 신비인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신비를 안다고 말하는 게 교만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과, 우리의 생명이 진짜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동경과 함께,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 종말이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 타고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실체가 밝히 드러나는 때를 말한다. 그래서 바울도 4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나는 우리 인생의 소망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매우 혼란스럽고, 생명에 대한 신비가 풀리지 않은 상태라, 무엇이 참된 생명이고, 참된 삶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고독한 것이고, 때론 방황하는 것이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너무도 아는 게 없다. 그렇다고 알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생명은. 그것은 하나님이 종말에 자기 안에 품고 계신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revelation)’해 주셔야 아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좌우충돌하더라도, 그리고 너무 절망스럽더라도, 참고 인내하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견디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인생은 견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전쟁터 같다. 차라리 전쟁터이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아는 게 아닐까 싶다. 바울은 말한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5). 이것은 굉장히 영적인 말이다. 몸을 학대하라는 말이 아니다. 땅에 있는 지체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욕심, 탐심등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마음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보이는 것과 싸우는 것은 오히려 쉽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은 쉽지 않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이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보여지는 삶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워서 이기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을 나열하고 있다.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8-9).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서 지면, 실제로 보이는 삶은 망가진다. 무엇보다, 인간 관계가 깨진다.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고 보듬어야 할 인간이 인간의 가장 큰 적이다. 인간의 생명을 가장 심하게 훼손하는 것은 인간의 악독한 말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 진 사람의 말은 독을 뿜어낸다. 독사가 따로 없다. 그래서 그 말로 사람을 죽인다.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 즉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 안에 사는 사람,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자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12-14). 이것은 위에서 말한,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8-9)는 것과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위의 것과 땅의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 현실이 바로, 우리를 더욱더 위의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며, 갈망하게 만든다. 삶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 생명의 신비가 온전히 드러나, 모든 고통 속에서 해방될 날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삶을 살면서, 이러한 저러한 일들로 혼란을 겪고 고통스럽더라도,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에, 그리고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드러날 것이기에,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한 번 잘 견뎌내 보자. 우리가 실수하고, 죄를 짓고, 우리의 삶이 뒤죽박죽이더라도, 우리의 생명을 품고 계신 주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비록 거미줄처럼 가느다랗게 보일지라도, 그 희망이 우리를 살릴 것이다. 구원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숨기고 계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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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2. 21. 02:52

(생명)으로 가는 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34:1-8)

  

지난 주, 개인적으로 참 좋은 문서를 많이 읽었다. 기억에 또렷이 남는다. 첫째, 초대 교부인 이그나티우스의 편지가 기억에 남는다. 이그나티우스는 안디옥의 감독이었는데, 그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를 돌보며, 목회하다, 순교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살던 시대는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시대였다.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고, 로마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이중으로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늘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가 쓴 서신들(Letters) 중에서,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Romans)는 정말 압권이다. 길지 않다. 그런데, 거기에는 자신이 로마 당국에 죄수로 잡혀 곧 죽게 될 것을 알지만, 자신이 순교당하는 것을 막지 말라는 당부의 말이 나온다. 이그나티우스가 순교를 두려워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는 순교를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가는 것”, 이것은 진정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기에, ‘죽음(순교)’을 통해서, ‘생명에게 다가서고자 했던, 그의 열망을 볼 수 있다.

 

순교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불이여, 십자가여, 야수와 싸우는 것이여, 뼈들을 비트는 것이여, 사지를 토막 내는 것이여, 내 몸 전체를 분쇄하는 것이여, 악마의 잔인한 고문들이여, 오라, 나로 하여금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게만 하라!”(5:3).

 

순교는 순식간에 목숨이 끊는 행위가 아니라, 죽기까지 모진 고통을 당해야 하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그나티우스가 그러한 고통의 순간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갈 수 있다면, , 참된 생명을 얻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문서를 보고, 그냥 세 글자만 머리에서 떠올랐다. “미친놈!”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의 순교를 막지 말라고, 방해하지 말라고,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당부하며, ‘순교에 따른 고통을 감내하겠다고,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이그나티우스는 자신 안에 생수가 있는데, 그것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오라!”(7:2).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이것도 정말 대단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다. “저는 부패하기 쉬운 음식이나 이 세상의 맛좋은 것들을 전혀 즐기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그리스도의 육체인 하나님의 빵입니다. 음료수로는 저는 그분의 피를 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영원한 애찬입니다!”(7:3).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이그나티우스의 서신을 보고 놀라고 있는데, 또다른 문서를 만났다. 이사야서이다. 이사야 50장에는 세 번째 종의 노래가 나온다. 이사야서에는 네 개의 종의 노래가 나오는데, 이그나티우스의 서신을 마음에 품고 묵상하고 있는 동안 만나게 된 이사야의 종의 노래는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이그나티우스는 어떻게 그러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어떻게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것을 기뻐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이사야서에서 찾은 기분이었다.

 

이사야서의 세 번째 종의 노래학자들의 혀와 학자들의 귀를 주님께서 주셨다는 고백을 담고 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시고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이사야 50:4). 종은 고백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혀와 귀를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 종은 학자들의 혀를 가지고, 곤고한 자(지치고 약한자)에게 힘이 되는 말을 전한다. 종은 깨우쳐진 귀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종의 노래의 압권은 이 구절이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을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이사야 50:5-6).


이그나티우스만 그런 게 아니라, 이그나티우스는 이사야의 영성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 같았다. 물론, 이그나티우스의 영성은 이사야에게서 왔다기 보다는, 이사야의 종의 노래처럼 동일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시간 순서 상으로, 이사야가 먼저 있었고, 이사야의 말씀을 회당에서 낭독하며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이 다음에 있었고, 그 이후에 이그나티우스는 이사야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본받아 순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고난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면, 생명을 얻게 되는 데, 고난 받는 것을 불사하더라도, 그 생명에 이르겠다는 불굴의 의지(욕망)를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욕망을 어떻게 이루고 있는가 돌아볼 일이다.

 

우리는 생명을 갈망하고 있는가? 우리가 생명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일까? 우리는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사는 게무엇인지, 정말 알고 있는가?

 

마음에 남는 시를 한 편 읽었다. 이그나티우스의 서신과 이사야의 종의 노래로 씨름하고 있는데, 그래서 생명이란 무엇인지,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 시가 내게로 왔다.

 

<우리 명랑이랑 둘이>

ㅡ 황인숙

 

우리 명랑이랑 둘이

광화문을 다 걸어 보네

살랑살랑 햇살이

겨울을 어루만져 잠재우고

이상하게 조용한

한낮

우리 명랑이가

은행에를 다 들르고

버스에 다 타 보네

저 인간이 맨날

어디 나가나 궁금했지?

뭐하고 다니나 궁금했지?

버스를 내려

비탈길을 걸어서

알지, 명랑아?

우리 집이지?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네 계단,

한 층, 두 층, 세 층, 네 층,

다 왔네!

상자에 담겨 나갔다가

단지에 담겨 돌아왔네

, 우리 예쁜 명랑이……

 

이 시를 읽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한 동안 먹먹해서, 아무 말 못하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명랑이는 시인이 키우던 개다. 그런데, 그 개가 죽었다. 시인은 명랑이를 집에 놓아두고, 매일 집 밖을 나섰다. 물론 시인은 생명을 위한 일을 하러 돌아다니느라, 개와 함께 시간을 못 보냈을 것이다. 자신을 집에 남겨두고 집을 나서는 주인을 보며, 개는 궁금했을 것이다. “저 인간은 뭐하고 다니나?”

 

시인은 그런 개의 마음을 몰랐다. 그것을 알았다면, 자신이 어디를 가는 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지, 그곳에 개를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개와의 그 간절한 나들이는 개가 죽고 나서야 이뤄진다. 죽은 개를 상자에 담아, 시인은 그가 다니던 곳을 간다. 따스한 햇살이 드는 광화문도 가고, 은행도 들르고, 버스도 타고, 집 앞 골목길도 걷고, 계단도 오른다. 그런데, 그 계단은 ‘4에서 끝난다. 아마 시인은 죽음을 이렇게 표현하려고 한 것 같다. 시인의 개는 상자에 담겨 나갔다, ‘단지에 담겨 돌아왔다.


이 모든 문서를 읽으며, 동시에 들여다 본 문서는 레위기 신학이다. 이 문서는,이렇게 생명을 얻기 위하여 아등바등 살고 있는 우리네 인생이 사실은 죽음의 영역에 놓여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한 문서다. 레위기 문서에서 가장 마음을 두들긴 내용은 속죄에 대한 것이다. 레위기 공부를 통해서 속죄가 무엇인지,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은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배우겠지만, 그 속죄를 온몸으로 떠 안았던 모세의 삶이 내 심장을 파고 들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신명기의 마지막 장이다. 오경의 마지막 내러티브(이야기)이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저 멀리 보이는 가나안 땅을 보면서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드디어 가나안 땅에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을 축복하며 죽는다.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는 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며 의아해 한다. 흔히 우리는 그가 반석에 물을 내는 사건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냈기에, 그 죄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오경의 내러티브 구조에서, 모세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라, ‘속죄의 의미를 지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레위기 신학에 이런 문장이 있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을 신명기 전체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세의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심지어 모세는 고난받는 중재자이고, 가나안 땅 밖에서의 그의 죽음은 일정 정도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은 것으로 묘사된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우리는 모세의 죽음을 대세자장의 죽음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일 수 있다. 대제사장의 속죄 사역은 폭력적인 죽음과 결부된 피의 죄책으로부터 땅을 정화해 주고, 사람을 죽이고 도피성으로 피신했던 자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그 자신의 죽음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중재자였던 모세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이 그들의 유업인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마이클 모랄레스, <레위기 신학>, 321).

 

우리는 집(생명)으로 가고 싶어한다. 오경의 내러티브(이야기) 구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는 이미 에덴동산을 떠나 죽음의 영역에서 죽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다시 집(생명)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모른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 길을 잃고 집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살고 있는 우리가 집(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속죄이다. ‘속죄는 자기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이다.

 

시인을 깨우쳐 준 것은 명랑이의 죽음이다. 박해를 두려워 하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쳐 준 것은 이그나티우스의 죽음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깨우쳐 준 것은 종의 죽음이다. 가나안 입성을 압 둔 이스라엘을 깨우쳐 준 것은 모세의 죽음이다. 십자가 위에서 발생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우치고 있는가?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무엇을 이루려 하는가?

 

(생명)으로 가는 길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느 비즈니스의 점원이 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알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삶을 주님께 드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이다. 나는 생명을 얻었고, 우리의 이웃들이 그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명랑이가, 이그나티우스가, 여호와의 종이, 모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묻고 있다.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