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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14 Doing에서 Being으로
  2. 2020.12.07 사막에 길을 내어라
  3. 2020.11.30 구원된 일상
  4. 2020.11.23 마리아? 마르다?
  5. 2020.11.17 브니엘
  6. 2020.11.10 야곱의 귀향
  7. 2020.11.05 보배를 품은 질그릇
  8. 2020.10.29 레아와 라헬의 경쟁 1
  9. 2020.10.19 위대한 유산 (Great Legacy)
  10. 2020.10.12 복자
  11. 2020.10.07 별미 인생
  12. 2020.09.30 어빌리티
  13. 2020.09.23 그와 같은 싸움: 참여구원 1
  14. 2020.09.15 불기둥과 구름기둥
  15. 2020.09.08 의인의 기도 1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14. 10:04

Doing에서 Being

(데살로니가전서 5:16-24)

 

팬데믹은 현대인들에게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있다. 대림절 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만 적용해서 말해보자면, 우리는 함께 모여 촛불을 켜지 못하고 있다. 일상이었으면, 우리는 모여 세 번째 촛불을 켜며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촛불을 켤 수 있는 곳을 가지고 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가 마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깥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더라도 마음은 그 어느 것도 침범할 수 없는 나의 고유영역이기 때문이다.

 

올랜도 블룸이 주연한 영화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보면,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살라딘 군대에게 빼앗긴 후, 주인공은 예루살렘을 지키고자 했던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Your kingdom is here(머리), and here(심장). That kingdom can never be surrendered.” 팬데믹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비록 지금 함께 모여 촛불을 켜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우리 마음에 촛불을 켜고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대림절 세 번째 촛불은 기쁨(Joy)이다.

 

기쁨의 촛불을 켜고, 우리는 기쁨을 이야기한다. “항상 기뻐하라!” 성서정과(Lectionary)에서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바울서신과 함께 보게 끔 되어 있는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보아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61:10).

 

데살로니가전서와 이사야서에서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서신 중 가장 빠른 시기에 기록된 서신서이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은 굉장히 래디컬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종말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고 살았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의 기반은 매우 연약했다. 핍박이 심했지만, 자신들을 보호해 줄 어떠한 법적 장치나 체계적인 조직도 없었다. 이들에게야말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보이게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그들의 마음에 있었을 뿐이다.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지금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다고 말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이사야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기쁨을 입에 담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은 힘들고 어려웠다. 그러나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이 세 가지도 중요하지만,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라는 이 수식어가 사실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기뻐하고, 가끔 기도하고, 가끔 감사한다. 웃을 일이 없어 시체가 되어 간다. 기도는 가장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감사보다 짜증나는 일이 더 많다. 우리의 현실이 이렇다 보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씀을 들으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어, 우리 마음에 죄책감만 늘어간다.

 

19-21절은 번역상 오류가 있어 언급이 필요한 구절이다. 그 네 구절을 보면, 네 가지의 행위를 말하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는 한 가지의 아이디어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예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으로의 회귀이다. 헤세드, 즉 언약적 사랑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것이 예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맥락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된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서 나오는 말씀의 번역이 문제인데, 그리스어 원문에는 ‘but’의 접속사가 붙어 있다. 그것을 집어넣어 다시 번역하면 이런 뜻이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그러나(but), 범사에 헤아려(그 예언을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지 말라. 그러나 주의 말씀이라고 선언되는 것이 모두 옳다고 단정할 수 없으니, 그 예언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 지 분별하여서 좋은 것은 취하고 악한 것은 버리라.’

 

쉽게 말해서, 교회 간판 걸어놓고 거기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말씀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니, 잘 분별하라는 뜻이다. 이게 참 쉬지 않은 것이다. 얼마 전 이런 광고까지 본 적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 받는다. 부부갈등. 의처증. 의부증. 동성애. 뇌질환. 중풍병, 간질병. 정신분열. 우울증. 자폐. 치매. 고혈압. 당뇨병. 각종통증. 마음의 병. 남성 발기부전. 여성 오르가즘. 신종 코로나.” 이런 광고가 교회의 이름으로 버젓이 광고되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가 어두울수록, 사는 게 힘든 때일수록 이러한 거짓 예언악한 예언들이 판을 치는 법이다. 사람은 일단 어떠한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접한 최초의 정보를 옳은 것이라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특별히 미디어를 통해서 자주 접한 내용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크다. 잘못된 정보가 머리 속에 일단 들어가면, 그것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는 일은 쉽지 않다. 요즘 참 어려운 시대인 게, 옛날에는 정보를 접하기 어려워서 어떤 이슈에 대하여 잘못된 정보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잘못된 정보에 너무도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이것 때문에 아주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공부를 통해서 배웠지만, 바울이 사역을 하면서 가장 심하게 다투었던 교리적 논쟁이 무엇인가? 행위(율법)냐 복음이냐의 문제였다. 이 논쟁은 본문에 적용해서 풀어보면 이런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을 율법(행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래 주님이 항상 기뻐하라고 했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어.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어라고 생각하며, 기쁘지도 않는데, 기뻐하는 척하고, 기도하지도 않는데, 기도하는 척하고, 감사하지도 않는데, 감사하는 척할 것이다.

 

실제로, 한얼산 기도원에 가면(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예배드리는 내내, 찬양하는 내내, 탬버린을 들고 빙빙돌면서 춤추시는 분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보면서 와 저분은 뭐가 그리 기쁘셔서 저렇게 쉬지 않고 춤을 추시냐, 참 휼륭하시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개 우리는 그 분을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 때문에 그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서 순례를 떠난 사람도 있었다. 오래전 오강남 박사가 편역해서 옮긴 <예수의 기도>라는 책이 있다. 19세기 러시아의 한 청년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읽고,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지?’의 의문을 품고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순례를 떠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예수의 기도>라는 책이다.

 

그 책에서 가르쳐 주는 기도는 매우 간단하다. “주 예수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Jesus, Have mercy on me)”를 계속하여 외우는 것이다. 나도 참 좋아하는 기도라, 자주 이 기도를 드린다. 그런데, 그것을 해보면, 우리가 쉬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떤 목사는 ‘24시간 예수 바라보기운동을 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하다 보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핍박 가운데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있었을까?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포로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다르게 보았다. 우리는 시간을 다르게 보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시간을 다르게 보지 못한다. 근대의 자본주의는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땅따먹기 게임이다. 누가 시장을 넓게 확보하느냐가 성패의 기준이 된다. 여기서 시간은 땅따먹기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도 자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시간은 온갖 행위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시간을 다르게 보기 힘들어 한다.

 

교회도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교회가 땅따먹기 게임을 한다. 교회건물을 크게 짓고, 교인들을 많이 모으고, 선교지를 넓혀간다. 교회 건물이 크고,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선교하는 지역이 많은 교회를 성공한 교회, 그러한 곳에서 목회하는 사람을 성공한 목회자라고 말한다. 땅따먹기를 잘하기 위하여, 그들은 더 많이 예배드리고, 더 많이 모임을 갖고, 더 많이 선교를 한다. 사회 곳곳에, 지구 곳곳에 자기 교회의 깃발을 많이 꽂는 교회가 성공한 교회라는 인식을 한다.

 

사실, 데살로니가의 본문은 그러한 생각에 강력하게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예언(주의 말씀)’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며, 그것을 잘 분별하여 선한 것은 취하고 악한 것은 버리라는 이 말씀, 이것은 매우 강력한 브레이크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예배도 드리지 말고, 모이지도 말고, 선교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럴리가. 다만,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졌던, 포로기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시간을 다르게 보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춘향전 이야기를 통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춘향이는 이도령이 떠나자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변사또의 횡포에 춘향이는 결국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춘향이가 이도령도 떠나고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가장 연약할 때에 그녀가 붙잡은 것이 무엇인가? 이도령과의 약속이다. 그런데, 그 약속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했을 때, 춘향이가 이렇게 생각했을까? ‘그래 내가 온힘을 다해서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면 이도령이 이 마음을 알아주고, 나를 구하러 와 줄거야.’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의 행위가 이도령의 구원을 가져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춘향이의 삶에는 이미 약속을 통하여 이도령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포로생활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그들이 가장 연약한 때이다. 연약하니까, 한 가지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했을까? ‘그래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지만,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야!’ 아니다. 그들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서, 범사에 감사하니까, 그러한 행위(doing)를 하니까 주님이 오시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주님이 와 계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선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뭔가의 행위가 필요한 시간이 아닌, 이미 구원된 시간으로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being)’가 되는 그리스도인은 행위로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지 않고, 존재로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한다. 기뻐하는 행위, 기도하는 행위, 감사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의 존재, 기도의 존재, 감사의 존재가 된다. 이러한 존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 시즌,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사줄까(행위) 고민하지만, 우리가 정말 구원된 시간을 산다면, 어떤 선물을 사줄까를 고민하기 보다, 자기 자신이 선물이 될 것이다 (Buy a present à be a present). 성탄절, 곳곳에서 빛나는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light)를 바라보는(행위) 사람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빛나는 불빛이 될 것이다(Seeing the Christmas lights à Being the Christmas lights).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성탄절이 되었으니, 동방박사들처럼 주님 앞에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가지고 나오길 바라실까? 아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이미 구원된 시간 안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의 이 되기를 원하신다. 예배를 드리는 행위(doing)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 (being)예배 자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번 성탄절에 한 가지만 실천해 보자. 소중한 사람에게 뭔가를 사주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그 사람에게 선물이 되어보자. Doing을 통해서 소중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Being을 통해서 소중한 사람을 기쁘게 해보자. 이것이 가능한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요, 그렇지 못한 자는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이르기까지 한참 모자른 자이니, 주님의 은혜를 더욱더 간구하자. 소중한 사람에게 소중한 선물이 되어, 기쁨이 넘치는 성탄절 절기를 보내기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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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2. 7. 09:30

사막에 길을 내어라

(마가복음 1:1-8)

 

대림절(Advent)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마가복음인데,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이제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이야기이다. 세례 요한이 자기의 사역을 시작하며 선포한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선포하고 있는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게 될 것이다.

 

마가복음의 세례 요한과 이사야 선지자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말씀의 요지는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먼저 들어보자.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이사야 40:3-4)

 

사막에 길을 내어라.’ 성경의 언어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막상 깊이 묵상해보면 참 어렵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참으로 멋진 말이고 장엄한 말이지만, 이게 무슨 말인지, 막상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다. 사막에 길을 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오늘 이것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려 한다.

 

이사야서 40장은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로 시작한다. 북이스라엘은 BC 721년 쯤에, 남유다는 BC 586년 쯤에 망하고, 이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70년 정도의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사야 40장은 제 2 이사야로 불리는 선지자의 예언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을 때, 그들을 향해 선포된 예언의 말씀이다. 이사야는 구원을 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거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속박당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구원의 소식은 정말 복음(기쁜 소식)’ 그 자체이다. 지금 온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속박당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 이 때에 백신개발완료소식이 들려오는 것과 같다. 바이러스의 전파가 최고점을 찍어 모든 경제와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전세계인들이 손해가 막심함에도 불구하고 경제활동을 자제하면서 인내할 수 있는 이유는 곧 백신이 배포되면 모든 고통을 덜어내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속박에서 해방될 것을 믿는 소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막에 길을 내어라고 선포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 길을 내면, 그 길을 통하여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로 와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거라고 한다. 실제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통하는 길은 사막이다. 그들은 굽이굽이 사막 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강제이동을 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사막에 길을 내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들었을 때, 아주 실제적인 언어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등장하는 세례 요한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한다. 배경이 사막(광야)인 것은 같고, ‘그의 길을 예비하라는 메시지는 같으나, 세례 요한의 선포는 이사야의 선포보다 한층 더 영적이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한층 더 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세례 요한의 다음과 같은 선포 때문이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1:4/공동번역 개정판).

 

다시 말해, ‘사막에 길을 내어라고 했을 때,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가의 질문 앞에서 세례 요한은 그 방법으로 회개, 세례, 죄 용서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선포가 좀 더 영적인 표현이지만, 사실, 이사야의 선포도 세례 요한의 선포와 다르지 않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에게도 사막에 길을 내어라는 그들이 진짜 사막에 가서 작업을 해서 사막에 길을 내라는 뜻이 아니라(그렇게 할 수도 없다. 포로들이 어떻게 자유롭게 나가서 작업을 하겠는가), 뭔가 영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는 이사야와 세례 요한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방식은 영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영적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매우 실제적이다(육체적이다). 우리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는 방식과 우리에게 임하셔서 행하시는 구원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영적인 방식을 통해서 오시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은 매우 육적(실제적)이라는 뜻이다. 이 둘의 긴장관계를 잘 알아야 한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한 이스라엘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한 방식은 영적이다. 이사야의 말처럼 문자적으로하나님이 사막에 난 길을 통해서 그들에게 당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게 그들에게 온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즉 영적인 방식으로 그들에게 오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오심을 통해서 그들에게 임한 구원은 매우 육적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은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사막에 길을 내는 법이다. 물론, 세례 요한 당시의 이 선포는 영적이라기보다 매우 육적이었다. 실질적으로, 세례 요한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 땅에서의 구원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승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영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임하신다. 영적임재를 성육신처럼 실제적으로 느끼고 신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는가? 바로, 사막에 길을 내는 일, 주님이 오시는 길을 닦는 일, 이 불가능한 것 같은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방법은 바로 기도로부터 시작한다. 사막에 길을 내는 일은 이사야가 말하고 있듯이,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는 것, 절벽을 평지로 만드는 것,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는 것과 같다. 골짜기, 산과 언덕, 절벽, 비탈진 곳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다.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는 것, 절벽을 평지로 만드는 것,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는 행위를 일컬어 세례 요한은 회개라고 부르고 있다. 회개와 기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회개가 기도고, 기도가 회개다. 사막에 길을 내는 행동은 회개다. , 기도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기도하고 있는가. 기도를 얼마나 오래하느냐, 또는 얼마나 깊게, 진지하게 하느냐는 나중 문제이고, 우리의 삶에 기도 행위 자체가 존재하느냐를 물어보자.

 

우리는 매일 같이 아우성치며 산다. 사는 게 힘들다고. 나를 답답하게 하는 뭔가 모를 에서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힘듦과 답답한 삶을 놓아두고, 기도의 행위를 얼마나 진지하게 하고 있는가. 내 삶이 그야말로 사막 같아, ‘골짜기와 산과 언덕, 그리고 절벽과 비탈진 산골길로 가득 찼음에도, 그것을 평지로 만들어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러 오시게 만들어 주는, 사막에 길을 내는 기도를 얼마나 진지하게 행하고 있는가.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손쉽게 유튜브를 보지만, 기도하기 위해 촛불을 켜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사막에 길을 내는 일은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세례 요한이 말하는 회개이다. 그리고 나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를 받는 일은 일회적인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서 계속 영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세례는 존재의 거듭남이다. 존재가 거듭난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이사야는 우리 인간의 존재를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40:6-7).

 

기도의 행위로 들어가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하는 일은 세례를 받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잊어버리기 일쑤다. 바쁨 때문에, 그리고 세상의 부추김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바쁘게 사는 이유는 세상의 유혹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은 인간을 과도하게 긍정한다. ‘네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어!’ 마침 성경에 이런 구절도 있어서 우리는 그 세상 유혹에 금방 넘어가 나의 존재를 바쁨에 내어준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4:13). 이 말씀은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고 채워주는 말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용한다.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사막에 길을 내는 행위, 다시 말해, 나에게 실제적인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행위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이 겸손한 고백, 이 진실한 고백, 내 존재의 인식, 이것이 바로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는 것, 절벽을 평지로 만드는 것, 비탈진 산골길을 넓히는 일이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 용서함을 받으라고 말한다. 기도의 행위를 통해, 자기 존재를 인식한 인간은 이제 어떠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40:8/공동번역 개정판).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에는 그 뜻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 원어를 보면, ‘헤세드라는 용어를 통하여 인간과 하나님이 어떻게 다른 지를 비교하고 있다.

 

이사야 40 6절 말씀은 이렇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 여기서 아름다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로 헤세드이다. 인간의 헤세드(아름다움, 사랑)는 꽃에 비유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인간의 헤세드는 꽃이 시듦과 같이 곧 시들고 만다. 이와 대조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헤세드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로다!”(이사야 40:8/개역개정). 꽃처럼 금방 시드는 인간의 헤세드와는 달리, 하나님의 헤세드(언약적 사랑)은 시들지 않는다. 영원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로다할 때영원히 선다(야쿰 레올람)’는 말의 뜻은 세상의 어떤 권세도 하나님께 대항할 수 없다는 매우 정치적인 용어이다. 우리가 어떠한 권세(그것이 돈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를 욕망하는 것은 그것이 나를 구원해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세상의 어떠한 권세도 영원하지 못하고, 세상의 어떠한 권세도 하나님께 대항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구원자이시다.

 

대림절. 참 구원자이신 하나님, 어떠한 권세와도 견줄 수 없는 분이 오고 계신다. 그 분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방식(성육신)으로 오고 계신다. 그러니, 구원을 받고 자 하는 자는 그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방식은 매우 영적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구원은 매우 실제적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부활의 방식을 통하여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어떤 권세도 줄 수 없는 참된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 사막에 길을 내는 일이다. 이 진리를 깨닫고, 사막에 길을 내는 일에 나의 온 존재를 기울이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죄 용서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그렇다구원을 갈망하는 우리들은 사막에 길을 내어야 한다그래야 그 길을 통해 구원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주님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오신다그래서 그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방법은 영적이어야 한다회개(기도)와 세례와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이다그러나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은 매우 실제적이다그러므로 구원 받기를 갈망하거든촛불부터 켜야 한다기도 행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어느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소망해야 한다주님께서 우리가 예비한 그 길을 통해 오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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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30. 10:56

구원된 일상

(이사야 64:1-9)

 

잊고 살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국문과 대학원 종합시험 문제가 근대의 시간이해를 서술하시오.”였다. 근대란 모더니티(modernity)를 말하는 것인데, 이 시험문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시대마다 시간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혁명을 거친 이후의 사람들을 근대인이라고 불렀고, 근대인은 그 이전의 사람들과 시간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근대의 영향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근대의 시간 이해 안에서 시간을 향유한다.

 

그때 나는 무슨 답을 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정답을 적었을 것이다. 종합시험을 통과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답을 적는 게 아니라, 그 정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근대는 시간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우리는 근대(modernity)를 잘 알아야 하는데, 현재 우리의 삶의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발견이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개인의 주체, 권리, 인권이라는 개념은 모두 근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근대를 거쳤다는 뜻은 비로소 우리 인간이, 각 개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주체가 될 수 있게 되었고, 권리를 가지게 되었으며, 인권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근대 이전까지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향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사회를 봉건사회라고 한다. 독립된 (주체적인/권리와 인권을 가진) 개인이 없었던 사회를 말한다.

 

근대 이전의 사회인 봉건사회에서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당연히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을 당연히 각자 개인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봉건사회에서 사는 게 아니라, 근대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근대인이다. 근대인에게 시간은 개인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의 미래에 대한 이해이다. 근대인에게 시간의 과거가 중요할까, 현재가 중요할까, 아니면 미래가 중요할까? 과거와 현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래는 내 삶의 주체인 내가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 근대인은 시간을 가능성이 가득한 것으로 이해했고, 현재 내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따라서 그 가능성이 미래에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근대인들은 이러한 격언으로 표현한다. “시간은 금이다.” 시간 안에는 금이 감춰져 있다.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시간 안에 감춰진 금을 발견하느냐, 못발견하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그래서 근대인들은 당연히, 시간에 감춰진 금을 발견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 것이다. 그것을 성취라고 부른다.

 

이러한 근대인들의 생각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도 그러한 방식으로 발생할 거라 생각했다. 이성적인 인간이 도덕성을 갖추고,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면, 시간 안에 금처럼 감춰진 하나님 나라가 현실에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사회봉사를 많이 했다.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게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역사에 임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서로 죽이고 죽는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도래하는 것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대림절은 이 질문을 하기 참 좋은 절기이다. 그리스도인의 시간 이해는 근대인들의 시간 이해와 다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을 초월해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근대의 시간 이해의 영향 아래 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성취로 보지 않고, 선물로 본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 나라는 성취로 도래하는 게 아니라 선물(은총/은혜/grace)로 도래하고, 구원은 성취하는 게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본문은 구원을 갈망하는 이사야의 노래이다.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는 주님이 행하신 두려운 일들은 구원을 가리킨다. 그 구원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셨다”(3). 공동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좀 더 풀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은(구원)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근대인으로서 우리가 뭔가를 성취하기 위하여, 즉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하면, 그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 자기 구원적 행위이다.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조차도 자살하는 이유는 자기 멸망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한다.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행위로서 자살한다. 근대인들에게는 자살도 구원의 자기 성취이다. 이렇게 근대적 시간 이해는 인간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비극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우리는 자기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참 힘들게 산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결코 자기 성취가 아니다. 구원은 선물이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기 성취를 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것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곳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 공동번역 성서는 이것을 이렇게 좀 풀어서 말한다. “우리는 모두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개짐처럼 더럽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고 우리의 죄가 바람이 되어 우리를 휩쓸어 갔습니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개짐처럼 더럽습니다.” 아주 통렬하고 솔직한 고백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구원을 꿈꾸며,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나를 구원해 줄 거라 기대하며 최선을 다해보지만, 그 열심을 다한 최선이 나의 삶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삶을 망치거나 더 어려운 문제를 가져오는 것을 경험한다. 정말 그렇다. 기껏 잘했다는 것도, 나뿐 아니라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때 우리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냥 근대인들이 생각하는 시간 이해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살 것이다. 물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삶의 구원을 이루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소망은 참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대림절을 맞아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리스도의 구원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성취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복음)’을 전해줄 사명을 가지고 있다. 구원은 자기 성취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임을 알려야 한다.

 

구원은 선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이사야의 고백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8). 공동번역 성서는 이것을 이렇게 옮겼다. “야훼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사야와 똑 같은 고백을 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8-10). 공동번역 성서로 읽으면 이렇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이사야와 바울이 똑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자기 성취의 근대적 시간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못한다. 자기의 구원은 자기가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영광 받고,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시간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삶을 완전히 다르게 본다. 구원은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자신은 자기 성취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작품으로 고백한다. ‘포이에마’(하나님의 작품)는 여기에서 온 말이다.

 

근대인들(세상 사람들/세속)은 자기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살지만,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어진 구원의 일상을 산다. 구원을 자기 성취를 통해 이루려는 사람의 삶과 이미 선물로 주어진 구원을 일상으로 사는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다. 자기 성취를 통해서 구원을 이룬 사람은 얼마간 여유를 가질 수 있겠으나, 그 성취가 구원을 지속해 주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의 삶은 늘 불안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성취를 통해 구원을 이루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여유를 가질 수 있고, 구원된 일상을 살기 때문에 늘 기쁘다.

 

성취가 아닌,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즉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행위(선물)를 통하여 비천한 자에서 존귀한 자로 인생이 뒤바뀐 마리아의 찬가는 자기 성취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려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우리가 이 기쁜 소식(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삶 속에서 자기 성취를 통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허망한 신화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 구원된 일상을 기쁨으로 누리는 하나님의 작품(포이에마)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 (누가복음 2:46-55).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날마다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구원된 일상을 살게 하신 주님,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선한 삶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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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23. 17:44

마리아마르다?

(누가복음 10:38-42)


현대 개신교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하지 않으면 두 가지의 오류에 빠진다(물로 이것은 개신교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근대 사상(modernity)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들에게서 모두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하나는 이원론적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복음서 중 유일하게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위에서 말한 두 가지의 오류를 가지고 읽는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둘 중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종교개혁자(특히 루터)의 신학/신앙에 의존해서 읽는 것인데, 우리는 마리아를 마르다보다 바람직한 신앙의 모범으로 삼는다. 그 이유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진술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 신학적 명제에 집착하다 보니,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행위에 집착한 마르다보다 훌륭한 신앙인으로 추앙을 받는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고, 성경주석의 학문이 종교개혁 당시보다 훨씬 발달한 지금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말로, 왜 누가는 이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지, 그 의도와 의미를 잘 추적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워낙 흥미로운 이야기다 보니 기독교 역사에서 이름 꽤나 있는 신학자들은 대부분 이 본문을 해석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초대교부 중 한 명인 오리게네스이다. 오리게네스는 성서주석에 아주 큰 기여를 한 교부인데, 그는 이 본문을 관상(contemplation)과 행위(action)의 용어로 해석한다. 그런데 오리게네스는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았고, 헬라철학을 바탕으로 신학을 전개하고 성경을 해석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교부였기 때문에, 마리아의 관상을 마르다의 행위보다 높은 신앙의 경지로 해석한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영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였고, 마르다는 육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마르다처럼 육적인 방법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지 않을 수 없으나, 우리의 신앙의 지향점은 육적인 방법을 넘어 영적인 방법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리게네스의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다.

 

(당연히)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도 이 이야기를 해석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리게네스처럼 어떤 신앙이 더 좋은 신앙인지 차등을 두어 해석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안에 두 가지의 삶(죄를 넘어선 삶이다)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현재 시대(이 땅)에서 살아가는 교회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오는 시대(종말/창조의 완성)에 살아가는 천상의 삶이다. 마르다의 신앙은 현재 이 땅에서 살아가는 교회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고, 마리아는 오는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해석했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르다의 행위를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신앙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에도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서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는 해석되는데,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14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의 해석이다. 엑카르트는 마르다를 마리아보다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긴다. 엑카르트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가장 사랑 받는 마리아(the Beloved Mary, 가장 사랑 받는 마르다(the Beloved Martha)’라고 불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가르침만 받았지만, 마르다는 예수님께 가르침과 더불어 섬김을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엑카르트에게 가르침을 받고 섬김을 수행한 마르다는 가르침만 받고 아직 섬김의 수행에 이르지 못한 마리아보다 더 훌륭한 예수님의 제자였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대한 해석들을 논하면서 내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읽을 때 너무 이원론적으로 보거나 너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만 머물러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인들은 특별히 종교개혁신학/신앙의 전통 안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거기에만 너무 머물러 있으려다 성경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시(말씀)를 협소하게 왜곡한다. 이것은 전혀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다. 우리 인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우리 인간이 거해야 한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두어 둘 수 없다.

 

우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몇 가지 당황스러운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왜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을까? 왜 예수님은 불평을 늘어놓는 마르다에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으로 족하다고 말씀하셨을까? 그리고 왜 마리아는 침묵하고 있을까? 아주 짧은 이야기이지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많고, 쉽게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다 보니, 많은 신학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분명한 것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르다이지 마리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다에게서 보이는 문제가 누가복음 공동체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듯하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월등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이 많은 복음서이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이 많이 소개되어 있으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때도 남자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 다음에 어김없이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또한 예수님은 모든 사역에 앞서 기도를 하신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그 어느 복음서보다도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마르다의 불평은 우리가 교회의 일 또는 사역을 하다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갈등이다. 또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다보면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마르다의 현재 상황을 묘사하는 단어는 근심/염려/worry’이다. 근심(염려)이 사람을 압도하면, 사람은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무기력해지거나, 지나친 활동을 한다. 이는 현대인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반응이다. 요즘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살거나, 지나친 활동을 하면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르다는 지나친 활동으로 자신의 염려를 이겨보려고 했다.

 

그러면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무엇이 마르다는 이렇게 염려 속으로 몰아넣었을까이다. 마르다는 염려 속에서 분주하게 활동하면서 동생 마리아가 자신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 상황을 예수님에게 말한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40). 마르다는 갑자가 자신이 혼자 내버려 진것처럼 느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매우 위험한 요소이다. 인간은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 매우 공포스러워 할 뿐 아니라, 걱정과 근심과 염려에 쌓이게 되고,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지나친 활동을 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가 정말로 위기인 것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믿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밖에 없어 자기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는 자기계발서가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고, 가장 많이 팔리는 물건이 자기를 지키는(gun)’이고, 자기를 살게 해주는 것은 이라는 생각에 돈을 벌기 위해 영혼을 파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토마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유명한 명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The war of all against all”의 상황이 충만하게 연출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너무도 자명하다. 누구도 염려에 놓이게 하지 않는 신실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 마르다처럼 왜 나를 혼자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에게서 근심과 염려를 찾아볼 수 없듯이, 따뜻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은 근심과 염려(worry)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 먼 듯하여 안타깝다. (에휴, 하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르다야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2).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만, 또는 혹 한 가지만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마리아의 신앙(예수님 발치에서 말씀 듣는 신앙/믿음신앙)이 마르다의 신앙(행위의 신앙)보다 더 좋은 것이라는 오해를 낳는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택하였으니(choose)’라는 말이다.

 

선택의 신학은 구약성경에 면면히 흐르는 신학이다. 신명기 30장이 대표적이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30:15). 모세는 생명과 복의 삶과 사망과 화의 삶을 열거한 뒤에, 이 두 삶 중에 어떠한 삶을 택할 것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묻고 있다.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서 이러한 결단이 또 요구되고 있는데, 마리아는 좋은 것(good)’을 택했다. 이것은 믿음과 행위 둘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마리아가 택한 것은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것이었다. 주님의 말씀 듣는 것, 그 좋은 것을 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떠한 믿음인가? 우리는 분주하게 일을 하고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마르다처럼 아주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있다. 마르다는 섬기는 일로 바빴다. 섬기는 일로 바쁜 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섬기는 일로 좀 바쁜 그리스도인, 교회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섬기기 전, 우리는 먼저 주님(그리스도)에 의해 섬김을 받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의 섬김을 알기전에, 신적 섬김(디아코니아)을 하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마르다에게서 보는 것처럼 근심/염려에 노출되기 쉽다. 자신의 섬김이 세상을 바꾸는 줄, 전능감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교회 일을 하면서, 세상에 나가 사역을 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착각이다. 믿음이 없는 생각이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러 왔지, 우리에게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마르다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너무 많은 일을 하다보니, 자신이 주님의 섬김을 받았다는 것을 까먹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로부터 소외감을 느끼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헤세드) 안에 먼저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이 우리를 섬겨 주신 것이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이 역설적인 신앙에 머무는 것을 택하는 것이 좋은 것을 택하는 것이다.

 

마리아? 마르다? 우리는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며, 마리아의 신앙에 머물 것인가, 마르다의 신앙에 머물 것인가를 고민하면 안된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묻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공동체를 세우고 있으며, ‘좋은 것을 택하고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라도 염려/근심에 사로잡히게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한다. 공동체를 점점 파괴하여 사람들을 염려/근심속으로 몰아넣는 세상에 맞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고 힘을 내야 한다.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하여사역을 하면서, 자신이 먼저 주님의 섬김을 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주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여 불평을 쏟아 놓고 염려와 근심을 더하는 부족한 믿음을 내려놓고, 주님께서 나를 먼저 섬겨주셨고, 주님께서는 나를 섬기러 오신 분이지 나의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는 믿음’, ‘이 좋은 것을 항상 선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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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17. 05:16

브니엘

(창세기 32:1-32)

 

모든 감정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감정 에너지는 힘(power)으로 전환되어 그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을 실제적으로 움직인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이 있듯이,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하여움직인이유는 장자권에 대한 질투의 감정 때문이다. 질투의 힘이 실제로 야곱에게 장자권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장자권을 손에 얻고 난 야곱은 이제 다른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데, 그것은두려움이었다. 야곱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떠나서 먼 땅, 밧단 아람(하란 땅)으로 도망치게 한 이유는 두려움이라는 감정 때문이었다.

 

외삼촌의 집에서 야곱을 움직인 감정 에너지는 무엇일까? 두 가지였다. 외로움과 사랑. 외로움도 에너지다. 외로움도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사람은 외로울 때 더 활동적이고 창조적이게 된다(물론 반대의 사람도 있지만). 외로움도 사람을 그렇게 움직이게 하는데, 사랑은 말할 것도 없다. 외로움과 사랑의 힘은 야곱을 20년을 하루같이 보내게 했다. 이처럼 우리는 내 안에서 매일같이 창조되고 있는 감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엄청난 에너지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에너지를 통해 죽음()이 아니라 생명(/righteousness)이 창조되도록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과 미스바에서 언약을 맺은 야곱 일행은 이제 고향인 가나안 땅 입성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얍복강(요단강 지류)을 건너기만 하면 이제 고향 땅을 밟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에게 얍복강을 건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어려웠다.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두려움이었다. 얍복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에서라는 두려움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일이었다.

 

야곱은 먼저 종을 보내어 형 에서의 형편을 살핀다.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자신이 고향으로 되돌아왔으며, 혼자 온 것이 아니라 가족을 대동하고 왔고, 자신에게 많은 소유도 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야곱은 형 에서에게 화친을 청한다.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5). 20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이제 자신에 대한 노여움을 풀고 자신의 고향 입성을 환영해 달라는 간청이다. 종을 보낸 후 가슴 졸이며 형 에서의 답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 종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이렇다.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6). 이렇다 저렇다 답신도 없이, 형 에서가 군대 4백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은 야곱을 극심한 두려움에 몰아넣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7).

 

야곱은 극심한 두려움에 싸여 두 가지의 행동을 한다. 하나는 형 에서의 공격에 대비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가족들과 재산이 형 에서가 거느리고 오는 군대에 의하여 손실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그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두 떼로 나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다가서는 수단이다. 그리고 기도는 깜깜한 동굴을 통과하게 해주는 빛과 같은 것이다. 야곱의 기도는 기도의 정석을 보여주는데, 기도는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수단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수단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실재화(realization)되게 끔 하는 수단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좋은 기도는 내 머릿속에서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또는 녹여서)해서 드리는 기도다.

 

야곱은 자신의 소망을 먼저 아뢰지 않는다. 야곱은 기도하면서 다짜고짜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야곱은 자신이 고향을 떠나 하란 땅으로 가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을 뵙고 그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한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10). 야곱은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주신 약속을 기억했고, 그 약속 때문에 지팡이 하나밖에 없던 자신이 이렇게 큰 무리를 이루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약속에 기대어 기도를 했고, 기도를 마친 야곱은 형 에서를 위하여 자신의 소유 중에서 예물을 마련한다. ‘예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민하는 레위기에 자주 등장하는 희생제물’, ‘소제의 의미를 지닌 말이지만, 여기서는 선물’, 또는 조공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야곱은 선물을 통해서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던 것이다.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민하)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20).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 자신이 형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민하)’이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믿은 듯하다. 사실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였다. 우리가 알다시피, 잠언을 보면 선물의 효력에 대한 말씀이 몇 군데 나와 있다.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잠언 18:16).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잠언 19:6).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언 21:14). 야곱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해결해 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는 야곱의 기도가 야곱을 데리고 가고 있는 지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야곱이 기도하고 난 후, 이처럼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야곱의 지혜가 발휘되는 상황(선물준비)이지만, 기도는 야곱을 더 이끌고 나간다. 야곱은 예물을 앞서 보내고, 식구들을 강 건너 먼저 보낸다. 그런 후에 발생하는 사건이 중요하다. 24절은 이렇게 그 상황을 묘사한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24). 여기서 쓰이고 있는 문법은 수동 재귀형 동사이다. 풀어서 쓰면 이런 뜻이다. “야곱이 스스로 홀로 남겨지게 했다.” 야곱은 자신의 소유와 가족들을 모두 먼저 강 건너로 보내고, 의도적으로, 자신이 이 강을 건너기 20년 전과 같이 지팡이만 가지고 홀로 남겨지도록 했다.

 

기도가 우리를 마지막으로 데리고 가는 지점은 하나님 앞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지혜를 얻으면 만족하지만, 그것은 기도를 통해 가야할 끝을 가지 못하고 도중에 멈추는 것에 불과하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려서 다시 표현해 보자면,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홀로 남은 사람)”로 만든다. 야곱은 홀로 남았다. 야곱의 손에 있는 것은 지팡이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두려움보다 이제 외로움의 감정이 그를 더 짓눌렀다. 그때 야곱이 대면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스스로를 홀로 남겨지게 한 뒤 발생한 일은 신비 그 자체이다.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사람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자신을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야.” 언뜻 듣기에 이 진술은 신앙을 매우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신앙은 절대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그럴 수 없다. 신앙은 공동체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도 사회적이지 개인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하나님 앞에 실존적 개인(단독자)’으로 서야 하는가?

 

기도가 우리를 데려가는 종착점은 하나님 앞이다. 그곳에는 누구와 함께 갈 수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신앙은 개인적인 문제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은 공동체적인 문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홀로 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서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가감없이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는다는 뜻이다. 창세기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되어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채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자신을 보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리개(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로 자신을 가리면서 사는가? 그 가리개 뒤에 꽁꽁 숨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뀌기 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바뀌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가? 야곱이 기도하면서 소망했던 것도 이런 것이었다. 그는 선물을 형 에서에게 보내며 형 에서의 마음이 바뀌길원했다. 그러면서 야곱은 여전히 두려움이라는 가리개로 자신을 두르고 있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한다. 우리는 기도를 지혜를 얻는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만다. 그리고 기도해서 얻은 지혜로 얼마나 부단히 자신을 둘러싼 환경/조건을 바꾸려 하는가.

 

야곱의 기도는 야곱을 거기에만 머무르게 놓아두지 않고, 더 밀고 나가, 결국 하나님과 대면하게 만든다. 야곱이 홀로 남았을 때,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한다. 그 씨름으로 인하여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상하여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야곱이 씨름한 그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천사 또는 하나님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신비에 싸여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현현을 어렴풋이 경험할 뿐이다.

 

야곱은 그 사람과의 씨름에서 겨루어 이겨 축복을 받게 되는데,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는 축복을 받게 된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지만, 이스라엘은 문자적으로 그가 하나님으로서 다스리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권력을 가지다’, ‘우세하다’, ‘싸우다라는 뜻을 지닌 사라라는 동사와 하나님을 의미하는 이 결합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뜻은 야곱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왕이신 하나님의 권력을 가지고 다스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대면한 후,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바뀐 것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대면한다는 것은 가리개를 쓰고 그 뒤에 숨어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에서 자기 자신을 바꾸어 더 이상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 사람으로 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대면하기까지 우리에게는 쉼이 없다. 주변, 환경, 여건에 영향을 받아 그 현재적 상황들이 자신을 통치하도록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지혜를 간구하여 그러한 현재적 상황들을 통제하기 바쁘다. 그러니 우리 안에 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비로소 대면한 사람은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은 존재가 바뀌고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기에 더 이상 자기 존재의 바깥에서 오는 어떠한 위협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그 자리를 브니엘이라 이름을 짓는다. 브니엘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대면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영화(glorification/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입는 것)’한 야곱은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자신의 바깥에 있는 형 에서의 위협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본문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존재)이 바뀌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입게 된 상황(영화)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1).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더 이상 예전의 야곱이 아니었다. 밤새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하였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존재가 바뀐 야곱 앞에 뜬 해는 그에게 새롭게 펼쳐진 세상을 가져다 주었다. 이 얼마나 장엄한 신적 드라마(theo-drama)인가.

 

우리는 무엇이든지 나의 실존에 다가오지 않으면, 매우 무감각하게 산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어도 그것에 우리가 무감각한 이유는 그 고통이 나의 실존에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이라는 것이 실재하지만 그 암이 나의 몸을 파고들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 암이 실재하는 것을 안다. 그 전까지 아무리 암이 세상에 편만해도 암은 실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실재하지만, 그 죽음이 나에게 실제적으로 다가오기 전까지 우리에게 죽음은 실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편만하시지만, 그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가 되어야 한다.

 

야곱의 브니엘 사건에서 보듯이,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는 반드시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건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에는 마디가 있기 마련이다. 그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고 삶의 마디를 건너려는 시도는 (물리적이든 영적이든) 실패를 불러온다. 그리고 삶의 마디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기도하더라도, 기도를 통하여 지혜를 얻어 세상을 변화시켜보려는 데만 그치면 안 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을 대면하는 자리로 이끌어줄 것을 간구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실존에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으면, 우리가 이루는 성취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겨루어 이겨낸 성취가 아니라면, 그 성취는 나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어느 순간 오히려 나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성취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브니엘.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브니엘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 또는 공간이 있는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실제적 에너지는 무엇인가. 두려움인가? 외로움인가? 대개 사람들은 두려움이라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움직인다. 그러나, 인생에 브니엘을 가진 사람은 결코 두려움이라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브니엘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인생 앞에 놓여 있는 어려움을 이겨낸다(겨루어 이긴다).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겨낸다. 우리는 이제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형 에서를 대면하게 되는 이스라엘인 야곱을 보게 된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이다. 우리는 무엇을 전파하는 사람인가. 두려움인가, 믿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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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10. 06:38

야곱의 귀향

(창세기 31:1-55)

 

타향살이가 힘든 이유는 타향에는 원초적 기억이 공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초적 기억은 어렸을 때 생성된다. 원초적 기억이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어, 그 이후의 경험은 모두 상대화 된다. 캘리포니아의 타호(Tahoe)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어렸을 때 동네에서 처음 경험한 우물이나 저수지만 못하다. 우리는 어렸을 때 그 우물, 또는 저수지를 통해서 그것에 비친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얼굴을 아름다움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타호에 비친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얼굴은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원초적 기억을 불러올 뿐이다.

 

야곱에게도 이러한 원초적 기억이 있다. 그래서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귀향을 꿈꾼다. 다만, 원초적 기억에만 이끌려 귀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기억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기억에만 이끌려 귀향을 결심하면 현실 속에서 고통 당하기 십상이다. 원초적 기억의 자리로의 복귀(귀향)는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고 은총이 필요한 일이다.

 

야곱은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밧단 아람(하란) 땅으로 와서 20년을 살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그는 외삼촌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면서 매우 고단한 인생을 살았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40). 2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한 야곱에게 중간중간에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섣불리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성실하게 자신의 삶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 야곱은 귀향을 결심한다.

 

우리는 야곱이 귀향을 결심하게 된 두 가지의 이유를 본다. 첫째는 야곱에 대한 라반과 그 아들들의 시기이다.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1) 야곱이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야곱의 삶의 자리에 어느 순간 시기와 질투가 넘쳐들었다. 야곱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정당하지 못하다. 오해다. 야곱은 라반의 소유를 빼앗은 적이 없다. 오히려 라반이 야곱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바라보는 라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2)

 

자신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삶의 자리가 불편해졌다고 야곱이 섣부르게 귀향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접한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3) 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되었음을 알려 주는 말이다. 삼촌과 사촌 형제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마음 불편한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돌아보신다. 귀향을 결심한 야곱은 두 아내, 라헬과 레아를 불러 자신의 귀향 계획을 전한다. 그러면서, 장인 어른의 안색이 변한 것에 대하여, 이곳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열심이 일했음에도 자신이 당한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하소연한다. 남편의 귀향 결심과 이유를 들은 두 아내는 남편의 결정을 따르기로 한다.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6).

 

귀향을 결심한 야곱은 신속하게 행동하지만, 그 결심을 장인이자 삼촌인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시행하는 것은 참 의외이다. 그 의외의 행동이 또다른 긴장을 만들어낸다. 야곱은 아내들과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이끌고 고향인 가나안 땅으로 출발한다. 라반은 양털을 깎으러 멀리 떠나 있는 상태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야곱 일행이 떠난 지, 삼 일 후에나 이 소식을 듣는다. 야곱 일행이 기별도 없이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라반은 야곱 일행을 추격한다.

 

복잡한 심경을 마음에 품고 7일간 추격하여 야곱 일행을 따라잡은 라반은 야곱에게 따져 묻는다. 장인과 사위 사이의 갈등이 폭발을 한다. 라반은 야곱을 향하여 분노와 서운함을 쏟아낸다. 이에 맞서 야곱은 라반을 향하여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불평을 쏟아 놓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쏟아내는 분노와 불평만 보면 당장이라도 서로가 전쟁을 벌일 태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을 넘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온갖 분노와 불평을 쏟아내며 서로를 비난하면서도 이성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었다.


야곱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고 믿었다.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떳떳하지 못할 게 없다. 야곱이 라반에게 늘어놓은 불평은 라반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에 대한 저항이지, 신세한탄이거나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전혀 아니다. 또한 라반은 괴씸한 마음을 가지고 야곱을 해하려고 야곱 일행을 추격했지만, 추격 도중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29).

 

우리는 살면서 때로 갈등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야곱이 자신이 한 행동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면, 그리고 라반이 꿈 속에서 야곱을 해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이 둘 사이에 얼마나 끔찍한 일이 발생했겠는가. 그것도 장인과 사위 사이에. 한 집안의 몰락과 더불어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통해 펼치시려던 하나님의 꿈이 산산이 부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등이 발생했을 때, 그 갈등 자체에 압도당하여 인생을 그르칠 것이 아니라, 그 갈등과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라반과 야곱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라반과 야곱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택하고, 다툼이 아니라 조약을 맺는다.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43). 이들은 언약을 맺기 위하여 돌무더기를 쌓는다. 그리고 라반은 그 돌무더기를 여갈사하두다’(아람어 방언)이라 부르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Galeed)’(히브리어 방언)라고 부른다. 그 뜻은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이다.

 

증거의 무더기를 앞에 놓아두고 라반과 야곱은 언약을 맺는다. 그 언약의 내용은 이것이다.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49). 여기서 살핀다돌본다는 뜻이 아니다. 영어로 ‘watch’이다. , 너와 나 사이를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뜻이다. 좀 더 공격적인 뜻으로 말하자면, 너와 나 사이를 감시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라반과 야곱 사이의 무엇을 지켜보신다/감시하신다는 것인가?

 

라반은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야곱이 자신의 딸들을 학대하지 않고 잘 돌보는지 하나님께서 지켜보실 것이라 말한다. “만인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50). 둘째는 야곱과 자신 사이에 맺은 평화협정이 잘 지켜지는지, 하나님께서 지켜보실 것이라 말한다.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52).

 

여기서 재밌는 것은 라반이 야곱과 언약을 맺으면서 한 말들은 하나님을 이용한 협박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내 딸들 박대하지 말고 잘 돌보며 살아라, 그러는지 안 그러는지 하나님이 지켜보시니까 잘 해라는 뜻이고, 우리가 맺은 평화협정이 잘 지켜지는지 아닌지 하나님이 지켜보시니까 평화를 잘 지키자는 협박 아닌 협박인 것이다. 아주 앙증맞은 협박이다. 지금 라반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 야곱이 내 딸들 박대하는지 아니면 잘 돌보는지, 감시해 주세요!” 그리고 주님, 우리가 맺은 불가침조약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해 주세요!”

 

야곱은 이 언약을 미스바라고 칭한다. ‘미스바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라는 뜻이다. 미스바라는 명칭이 유명해진 것은 사무엘 때문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이자 사사가 된 뒤, 블레셋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삼상 7:5). 우리는 흔히 이것을 미스바 기도회라고 부른다. 그 미스바 기도회에서 사무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 것은 회개였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삼상 7:6).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장소가 아닌 미스바로 모이게 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사무엘이 보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보시니(watch)’, 그들이 블레셋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지켜보고(watch)’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스바에 모여 이스라엘이 한 일은 하나님의 시선을 다시 감지하고, 그동안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섬겼던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야곱의 귀향은 고향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물리적 귀향이기도 하지만, 야곱의 귀향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시선(watch)’으로 돌아가는 영적인 귀향이기도 하다. 우리는 쉽게 물리적 귀향을 꿈꾸고, 그것을 그리워 하지만, 그러한 귀향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야곱에게 귀향이 복된 이유는 나의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다. 야곱에게 귀향이 복된 이유는 그의 귀향은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시선안에 있는, 그리고 그것이 회복된 귀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귀향을 꿈꾸면서, 물리적인 것만 생각할 뿐, 우리가 잊고 사는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시선으로의 귀향을 꿈꾸지 않는다. 삶이 어렵고 힘들고 지치거든, 단순히 물리적 귀향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은 언제나 사는 데 지쳐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의 돌보심으로의 귀향을 꿈꿔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다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든지,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어떤 귀향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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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1. 5. 04:28

보배를 품은 질그릇

(고후 4:6-12)

 

만성절이다. 기독교의 거의 모든 문화가 자본주의에 잠식당해서 그 의미가 퇴색되어 절기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지만, 그러는 와중에서도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절기가 가진 의미를 마음 깊이 되새기는 일은 중요하다. 만성절은 영어로 All Saints Day라 한다. ‘우리 모두가 성인이다라는 뜻이라기보다, 기독교 역사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들, 성경의 인물이든, 기독교 역사의 인물이든, 그 사람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든, 아니면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 아니든, ‘성인(Saints)’이라고 불릴 만한 기독교 인물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성탄절 전야제가 가장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전야제의 풍습은 모든 절기마다 있다. 부활절에도 전야제가 있다. 그것을 Easter Vigil(이스터 비질)이라 부른다. 다만, 부활절 전에는 일주일 동안 고난주간이라는 것을 지키다 보니, 우리는 상대적으로 부활절 전야제를 소홀히 한다. 대신, 기독교 절기에서 성탄절 전야제 다음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이 만성절 전야제이다. 우리가 잘 아는 할로윈이다. ‘할로윈이라는 말 자체가 만성절 전야제라는 뜻이다. 요즘은 할로윈이 성탄절 전야제만큼이나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아졌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모든 이들이 성탄절 전야제를 소비하는 것처럼, 할로윈도 즐겁게 소비한다. 이런 게 바로 문화의 힘이다.

 

만성절이 111일인 이유는 만성절을 제정할 때 근거로 삼은 성경구절이 히브리서 11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히브리서 11장은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 즉 성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성인이라 불리는 이유는 히브리서 저자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살았기 때문이다. 1031, 만성절 전야제가 있는 날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인들의 믿음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 당시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별로 믿음과는 상관없는 신앙행태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성절 (전야제) 문화를 소비하며 웃고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인이 세상 사람들과 조금 다르게 만성절 문화를 소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만성절 전야제를 소비하느라 피곤하여 잠을 자고 있는 시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만성절 예배를 드리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성인들)을 기리며, 믿음을 갖는다는 것,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보듬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그것을 수행하기에 참 좋은 말씀이다. “어두운데 빛이 비치라”(6). 빛과 어둠의 메타포가 사용되고 있다. 전기의 발명으로 인하여 찬란한 밤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메타포는 아니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명하여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바꾼 사건은 1882년에 발생했다. 그 이후 인류는 어둠을 정복했다. 더 이상 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고, 더 이상 낮에만 일하지 않아도 됐다. 그 이전까지, 인류는 어둠()’이라는 두려움에 짓눌려 살았다.

 

현대인들에게 어둠()은 일종의 낭만으로도 작동하지만, 성경시대의 어둠은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였다.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두운데 빛이 비치라는 말씀이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 쉽게 깨달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한 말씀이다. 빛이 어둠 가운데 들어왔다.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은 그 빛으로 인하여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구원이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바로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의 빛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두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빛이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들어왔다. 빛과 어둠의 메타포를 통해서 전달되고 있는 복음이다.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를 두려워 떨게 만드는 어둠이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 떨지 않아도 된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아주 멋진 비유를 써서 표현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7). 보배와 질그릇은 어울리는 어휘가 아니지만, 이 둘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 보배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그러면, 질그릇은 무엇인가? 흙으로 만든 그릇이다. 이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의 반영이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바로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을 질그릇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빗댐이 아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깨지기 쉽다. 그리고 별로 큰 값어치가 없다. 이것은 바울의 인간이해(인간론/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바울에 의하면, 인간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주 귀중한 존재이기도 한데, 그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이 있다.

 

바울의 이러한 인간이해는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기도 하고, 겸손하게 만들기도 한다. 위대함과 겸손함,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사는 존재이다. 그러한 인간의 실존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 후반부). 너무도 멋진 통찰이다. 우리가 어떠한 큰 일을 해냈을 때 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무기력하게 살 필요 없다. 우리는 큰 일을 할 수 있다. 우리 안에는 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바울의 통찰이 바울과 그 일행의 삶 속에 어떻게 작동했는지, 바울은 아주 생생한 언어로 전달하고 있다. 쉽게 깨지는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빛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8-9) 않는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것은 진퇴양난의 상황을 가리킨다. 그러나, 싸이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과 같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영어로 ‘perplexed, but not despairing’이다. ‘perplexed’는 고급 영단어이다. 당황스럽고 난처하고 답답한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상황을 자주 접한다. 그러나 그 몸에 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일들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일찍이 절망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명명했다. 빛을 지닌 그리스도인은 절망에 이르지 않으므로 죽음에 처해지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핍박을 당할 수는 있으나 버림받지 않는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넘어질 수는 있으나, 멸망(destroy)당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언제나 다시 일어설 기회가 있다.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 쉽게 무너지고 절망하고 버림받고 망할 것 같으나, 그렇지 않고, 다시 우뚝 설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고백을 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10절 전반부). 바울은 자신들이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의 죽음에 사용된 헬라어는 네크로시스이다. 이 낱말이 지닌 뜻을 이해하는 게 중요한데, ‘네크로시스완전히 죽은 상태를 나타내는 싸나토스라는 말과 달리, ‘죽어가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 다른 버전으로 이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졌다는 말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죽어 감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가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 우겨쌈도 당하고 답답한 일도 겪고 박해도 받고 거꾸러뜨림도 당하고 그러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안에 채우는 일이기도 하고, 아직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빛을 전해주면서 당하는 수고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이렇게 증거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얻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바울이 증언하기를, 그들이 그렇게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이유는, 그렇게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 나아감으로써 예수의 생명, 즉 예수의 부활이 그들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신비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보배를 품은 질그릇, 즉 빛을 품은 인간, 빛을 품은 그리스도인이 감히 성인(또는 성도)’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이 고백은 참 마음을 짠하게 하고, 가슴 뛰게 하며,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고백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2). 성인 중의 성인이라 불리는 바울의 사랑의 역사가 담겨 있는 고백이다. 바울은을 전달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살았다. 그가 그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을 전달한 덕분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경험했다.

 

만성절(또는 우리교회로서는 임직식이 있는 날)에 우리는 성도로 불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제자도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생명을 얻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얻는 생명을 이웃들에게 잘 전달해 주고 있는가? 우리가 만약 자신의 복락만을 간구한다면,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는 것을 꺼려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기 꺼려한다면, ‘성도도 아닐 뿐더러,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질그릇이 없다면, 빛이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섬기는 이유(섬김에는 고난이 따른다)는 그들에게 생명을 전달해 주기 위함이다. 생명, 빛을 전달해 주는 것만큼 고귀한 삶이 있을까?


이것은 만성절 전야제(할로윈)을 소비하기만 하며 그 안에서 재미와 복락만 누리기를 원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 안에서 성인들믿음의 선조들을 기리며 이렇게 거룩한 예배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할 믿음의 삶이다어둠 속에서 빛을 경험한 사람은 그 구원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그리고 그 빛을 질그릇 같은 몸에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기 위해, ‘예수의 죽음을 기꺼이 몸에 짊어진다왜냐하면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이며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이기 때문이다이 신비를 깨닫는 자죽어도 살겠고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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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0. 29. 10:30

레아와 라헬의 경쟁

(창세기30:1-24)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은 야곱 인생의 역사가 담긴 이름이다. 엄마 태속에서부터 야곱은 치열한 경쟁을 시작했다. 장자로 태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형 에서에게 장자권을 빼앗긴 야곱은 못내 아쉬운 마음에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와 야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출생 후에도 야곱은 호시탐탐 장자권을 형 에서에게로부터 빼앗아오기를 꿈꿨다. 그 꿈은 장성하여 이루어지는데, 배고파 죽게 된 형에게 팥죽 한그릇을 건네며 빼앗아온 장자권은 그의 삶을 평안하게 하기보다 고달픈 인생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장자권을 지니고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네로 피신하던 중, 벧엘에서 하룻밤 유숙하며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야곱은 하나님께 장자권에 걸맞은 축복을 약속받는다. 그러나 그 이후 외삼촌네서의 삶의 여정은 고단하기만 했다. 가정을 꾸리기 위해 그가 한 고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쓰러움을 불러일으킨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외삼촌의 계략에 의해 외삼촌의 두 딸을 모두 아내로 얻게 된 야곱은 두 자매 간에 발생한 질투 때문에 아주 난처한 삶을 이어간다.

 

언니 레아는 야곱의 첫째 부인이었다. 그러나 레아는 원래 야곱이 원했던, 사랑했던 여인이 아니었던 터라, 남편 야곱에게 별로 사랑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러한 레아의 고통을 보시고 그녀의 태를 열어주셨다. 그리하여 야곱은 레아에게서 네 명의 아들을 얻는다. 그 네 명의 아들이 지니게 된 이름은 모두 레아의 남편에게서 사랑받지 못한 고통의 삶이 담겨 있다. 사랑받지 못해 고통의 나날을 보냈지만, 하나님은 레아의 고통을 신원하여 주시고, 넷째 유다의 이름에서 보듯이, 결국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될 만큼 위로 받는다.

 

그렇게 레아의 고통이 사라지고 야곱 가정에 평안이 찾아오는 듯했으나, 이번에는 레아의 동생이자 야곱의 둘째 부인이었던 라헬의 고통이 시작된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1). “부녀회한 (怀)은 오월비상(五月)이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음력 오뉴월이므로 양력으로는 7, 8월에 해당하는 한여름)에서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결연한 마음이 라헬에게서 보이는 진술이다.

 

자식이 없어 회한(怀)’을 품은 성경의 여성들이 몇 있는데,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가 있고, 엘가나의 아내였던 한나(사무엘의 엄마)가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라헬이 보이고 있는 이런 회한은 없다. 자식이 없는 것 때문에 라헬이 이렇게 전례없는 회한을 보이는 것은 언니 레아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 같다. 질투는 참 무섭다. 라헬의 회한이 얼마나 컸으면, 성경은 자식 없는 고통의 대명사로 라헬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보면 헤롯의 영유아 살해사건을 기록하면서 자식 잃은 여인들의 마음을 라헬의 마음에 빗대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독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2:18).

 

성경의 시대는 우리가 사는 시대와 다르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지 않는 지금 시대의 눈으로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제나 성경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 통용되는 상식과 윤리를 잠시 내려놓고, 성경의 시대로 들어가 그들의 상식과 윤리를 통해서 성경의 이야기를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성경 시대에나 통용되던 상식과 윤리를 가지고 우리가 사는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큰 불행을 안겨준다. 그래서 성경은 해석작업을 반드시 해야한다. 해석작업을 하지 않고 성경을 읽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불성실한 성경읽기다.

 

본문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를 보면 두 자매의 질투에서 시작된 경쟁은 막장 아침드라마를 보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그들의 서릿발 날리는 경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고 있는데, 그 기록은 다름 아닌 그들의 서릿발 날리는 경쟁으로 인해 태어난 7명의 아들의 이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이름은 그냥 이름이 아니라 역사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처음 네 아들의 이름에는 레아의 고통의 역사가 담겨 있고, 두 자매의 경쟁 가운데 태어난 7명의 아들의 이름에는 그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승리의 기쁨 등 다채로운 경쟁의 역사가 담겨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질투의 화신이 되어버린 라헬은 자신의 회한을 달래보려고 묘안을 생각해 내는데, 자신이 곁에 두고 있던 몸종 빌하를 남편 야곱에게 준다.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3). 야곱은 라헬의 요청에 응하여, 그렇게 안 하면 라헬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빌하에게로 들어가 아들을 낳는다. 그렇게 낳은 아들의 이름은 이다. 라헬은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내어주어 아들을 낳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래서 이름을 으로 지은 것인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풀어주셨다이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억울했는지, 그래서 라헬은 죽을 만큼 힘들었던 그 심정을 이라는 이름에 고스란히 남긴다.

 

몸종 빌하를 통해 아들을 낳았지만, 그래서 라헬은 어느정도 억울함을 풀었지만, 그래도 만족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단 출생 이후 야곱은 라헬의 몸종 빌하를 통해 두 번째 아들은 낳는데, 그 아들의 이름은 납달리이다. 라헬은 두 번째 아들을 품에 안은 후 매우 흡족했던 모양이다. ‘납달리이름의 뜻은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이다. 라헬의 질투가 얼마나 심했는지, 그리고 그 질투를 통해서 촉발된 언니와의 경쟁에서 얼마나 이기고 싶었는지, 라헬의 속마음이 그대로 담긴 이름이다.

 

자식이 없어서 죽고 싶었던 라헬이 이제 본인의 뱃속에서 난 아들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의 통념으로 자신의 자식이라고 인정받았던 두 아들, 단과 납달리를 품에 안고 기뻐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거대한 질투의 그림자가 야곱의 가정을 덮었다. 다름 아닌, 레아의 질투였다. 처음 네 아들을 얻은 후, 출산이 멈춘 레아는 동생이 아들을 연달아 슬하에 두자, 이미 네 아들을 자신의 슬하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심이 발동하여 아들을 더 낳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신의 태가 열리지 않는 것을 알고 레아도 동생처럼 자신의 몸종 실바를 남편 야곱에게 준다. 그렇게 연달아 태어난 두 아들의 이름은 아셀이다. ‘복되다는 뜻을 지녔고, ‘아셀기쁘다는 뜻을 지녔는데, 이미 네 명의 아들을 둔 레아의 여유가 드러나 보이는 이름이다.

 

이렇게 하여, 두 자매 간의 서릿발 날리는 경쟁은 끝나는 듯하였으나, 그들의 경쟁은 멈출 줄 몰랐다. 하루는 야곱의 장자 르우벤이 들에 가서 합환채(Mandrake)를 꺾어온다. 그런데 그 합환채때문에 두 자매 간에 한바탕 소동이 또 발생한다. 합환채가 뭐길래. 그러나, 합환채가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그러한 소통이 일어날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합환채는 가나안의 산삼으로 불리는 약초이다. 지금이야 산삼만큼 좋은 약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산삼을 굳이 찾아 먹는 사람이 드물지만, 고대 시대에 산삼 같은 약초를 찾았을 때 그 효능의 이익을 보고자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소동이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가나안의 산삼이라고 불리는 합환채는 산삼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약효를 지니고 있었는데, ‘정력에 좋았다. 무엇보다 임신을 돕는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자식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던 두 자매 사이에 합환채 쟁탈전이 일어날 만했다. 누가 더 간절했을까? 자신이 직접 아이를 낳지 못했던 라헬이 더 간절했다. 그래서 라헬은 레아의 장남 르우벤이 발견하여 가져온 합환채를 갖고 싶어했다. 르우벤이 발견하여 자기의 엄마 레아에게 준 것임으로 원칙적으로 합환채는 레아의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라헬은 언니 레아에게 가서 당돌하게 합환채를 얻기 위한 (deal)’을 한다.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14).

 

레아가 순순히 내어줄 리 없다. 레아는 라헬의 청구에 발끈한다.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15절 전반). 거의 분위기가 막장 아침드라마에서 유명세를 탄 김치 싸대기를 날릴 분위기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라헬은 의기양양했다. 라헬은 언니 레아가 거절 못할 제안을 던진다.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15절 후반). 야곱의 부인들이자, 서로 자매였던 이 여인들의 대화를 보면, 야곱이라는 남자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팠을 지 이해가 간다.

 

남편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살았던 레아는 라헬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레아는 그렇게 해서라도 야곱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레아에게 측은지심이 생기는 장면이다. 라헬의 제안을 받은 레아는 합환채를 라헬에게 넘겨주고, 남편 야곱과 사랑을 나눌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레아가 낳은 레아의 다섯 번째 아들의 이름은 잇사갈이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내게 그 값으로 주셨다이다. 잇사갈의 이름 속에도 어김없이 두 자매의 치열한 경쟁의 역사가 담긴 것이다. 그리고 잇사갈에 이어 레아는 자신의 여섯 번째 아들을 낳는데, 그 이름은 스불론이다. 여섯 번째 아들을 낳은 후 레아는 더 이상 라헬과 경쟁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매우 만족했던 것 같다. 스불론의 뜻은 후한 선물인데, ‘후한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브로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썼던 바로 그 단어이다. 레아는 여섯 번째 아들을 스불을 낳고 아주 흡족해 했으며, 이제 더 이상의 경쟁 없이 남편 야곱과 함께 평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고 그 후에 레아는 더 이상의 아들을 낳지 못하고, 대신 딸을 낳는데, 그 딸이 바로 디나였다.

 

이야기의 전개가 이쯤 되면, 우리는 궁금해진다. 남편을 언니에게 내어주고 합환채를 얻는 라헬은 어떻게 되었을까. 가나안의 산삼을 먹은 라헬은 어떻게 되었을까. 합환채는 라헬에게 어떤 효능을 안겨주었을까. 총 열 명의 자식을 낳는 동안, 라헬이 직접 낳은 자식은 한 명도 없었다. 몸종 빌하를 통해 두 아들을 품에 안기는 했지만, 라헬의 소망은 무엇이었겠는가. 본인이 직접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합환채를 그토록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라헬은 그 합환채 덕분에, 또한 자신의 과감한 지혜와 행동 덕분에, 드디어 자신의 태를 통해 아들을 얻는다. 그렇게 치열하고도 처절한 경쟁의 끝에 태어난 아들이 바로 요셉이다.

 

요셉을 품에 안고, 라헬은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23). 열 명의 자식이 탄생하는 동안 본인의 태에서 난 자식이 한 명도 없었던 라헬은 질투를 넘어서 자신을 더 힘들게 했던 감정인 부끄러움을 느꼈다. 라헬은 질투와 부끄러움의 복잡한 심정 가운데 살았다. 그러나, 어렵게 어렵게, 정말 어렵게, 본인의 태를 통해 얻은 아들이었지만, 그래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라헬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자신의 태를 통해 직접 얻는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 지어주는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 원하노라이다. 짧게 줄여, 요셉은 더함이라는 뜻이다.

 

라헬의 요셉 출산 이야기 이후로, 오랜 시간동안 더 이상의 출산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라헬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자신의 태를 통해 낳은 첫째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어주었지만, 더함이라는 소망이 이루어지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라헬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그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된다. 사실, 이것은 아주 슬픈 예감이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민족, 하나님의 백성, 나라는 아주 신비한 방식으로 세워져 갔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은 야곱의 두 아내이자 자매였던 레아와 라헬의 시기심에서 비롯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세워져 갔다. 시기심이라는 감정,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그리고 경쟁이라는 상황은 그렇게 긍정적인 감정과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아주 현실적인 감정이며 상황이다. 우리는 아주 많이, 시기와 부끄러움의 상태에 놓이며, 의지와 상관없이 경쟁에 휘말려 든다. 그게 인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희로애락 가운데 들어오셔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약속을 이루어가신다. 이것은 굉장히 고무적이고 신비로운 역사이다. 하나님께 뭔가를 이루어 드리려는 인위적인 거룩한 행동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 부끄러움과 경쟁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살아내려고분투하는 그 모습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는 것을 본다.

 

성경은 레아와 라헬의 이 막장 아침드라마 같은 경쟁을 어떻게 평가할까? 그 평가는 공교롭게도 룻기서에 나온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어 드디어 보아스와 결혼하게 된 룻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며, 룻기의 저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4:11).

 

성경은 레아와 라헬의 경쟁을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사건으로 해석한다. 아주 인간적인 치열한 경쟁이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신묘한 지혜가 들어있었다는 평가이다. 레아와 라헬은 그들의 마음 속에 어떤 거룩한 마음이 있지 않았다. 그들 마음 속에 어떤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경쟁해서 아들을 낳음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그 약속을 이루어 드려야지!’라는 거룩한 마음과 꿈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시기심과 질투 때문에 경쟁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인간적인 행동인, 아주 현실적인 행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집을 이룬 사건이 되었다니!

 

우리는 이 신묘한 하나님의 신비에 큰 위로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니리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11:28-29)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수고와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오히려 많은 거룩한 부담감을 몸과 마음에 지니고 산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그러나, 레아와 라헬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 그리고 치열한 경쟁은 그 거룩한 부담감을 진실로 내려놓을 수 있게 우리를 초대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주 존귀한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삶의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뜻때문에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때로는 시기와 질투가 나면 그대로, 경쟁하고 싶으면 그대로, 우리 인간의 현실을 그대로 살아도 된다. 왜냐하면,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너무 고통스러워 하거나 비참한 감정을 느끼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인생을 향유하며무소의 뿔처럼 그 길을 걸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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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0. 19. 12:00

위대한 유산 (Great Legacy)

(시편 71)

 

다윗의 기도는 여기서 끝난다.” 시편 72편의 마지막 구절이다. 시편 1(1~41)과 시편 2(42~72)은 흔히 다윗 시편이라고 부른다. ‘고백에는 자기 삶의 경험이 담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다윗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의 삶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다윗 시편을 읽을 때,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무엘상하의 성경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러면, 다윗 시편의 고백이 현실성과 활동성을 얻는다. 그냥 고백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살아 숨쉬는 고백으로 읽히게 된다는 뜻이다.

 

다윗의 시편이 끝나가는 마지막 두 번째에 놓인 71편의 화자는 노인이다. 다윗이 노년기에 쓴 시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본문의 진술을 통해서 시인의 나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늙었다고 이 몸을 버리지 마옵시고, 기력이 다하였다고 내치지 마옵소서”(9). “이제 이 몸은 나이 먹어 늙었습니다”(18). 그리고 이 시편에는 노인의 소망이 담겨 있다. “당신께서 팔을 펴사 이루신 일, 그 힘을 오고오는 세대에 전하게 하소서”(18).

 

24절의 짧은 구절 안에는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살았던 한 노인(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집약적으로 들어 있다. 시인의 인생은 고달팠다. 평생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자의 위협 아래서 살았다. 그리고 시인은 모태신앙이다. “모태에서부터 나는 당신께 의지하였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당신은 나의 힘이었으니, 나는 언제나 당신을 찬양합니다”(6).

 

이것은 굉장한 신앙고백이다. 모태에 있을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그때부터 하나님은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셨다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은 참 아름다운 것이다. 더 나아가 시인은 7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이상히 여겼지만 당신만은 나의 든든한 의지였습니다”(7). 나는 이 진술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이상히 여겼다!”


살면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시선이다. 우리는 살면서 사람들이 나를 이상히 여길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시인은 고백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히 여겼다고. 왜 사람들은 시인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겼을까? 71편 면면히 흐르는 고백을 보면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붙들다가도 어느 정도 선에서 적당히 현실과 타협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광야에서 배고픔 가운데 마귀에게 유혹 받으시며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이 말씀에 아멘!”하다가도,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리라는 말씀에 아멘!” 하다가도, 어느 순간, ‘사람이 어떻게 말씀으로만 사나, 떡도 먹고 살아야지, 어떻게 맨날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나라고 슬쩍 현실과 타협한다.

 

그러나, 시인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다. 시인을 해하려는 자들, 원수들은 이렇게 수근거렸다. “하나님도 버린 자, 쫓아가서 붙들어라, 구해줄 자 없으니 잡아다가 족치자!”(11). 누가 봐도 끈 떨어진 신발 신세였지만, 그래서 원수들은 그를 험악하게 대했지만, 시인은 그런 와중에서도 원수들에게 무릎 꿇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그렇게, 엄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왔던 시인은 이제 늙어서 죽음을 앞두고 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어떠한 소망이 있는가? 시인은 이런 소망을 고백한다. “당신께서 팔을 펴사 이루신 일, 그 힘을 오고오는 세대에 전하게 하소서. 하나님, 하늘까지 떨치신 당신의 정의를 전하게 하소서!”(18, 19). 그의 소망은 오고오는 세대, 즉 젊은 세대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일이다.

 

시인에게는 유산(Legacy)이 있다. 그의 유산은 하나님이다. 엄마의 태에서부터 모은 유산이니 얼마나 막대한 유산인가. 시인은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유산을 오고오는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어한다. 그러면, 오고오는 세대는 시인의 그 유산을 물려받고 싶어할까? 이것은 시편의 시인 세대에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더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유산을 물려주려면, 우선, 어른 세대에게 유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유산은 가치가 있어야 한다. 가치가 없으면, 그것을 오고오는 세대에게 물려주려고 해도 외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산이 가치가 있으려면, 어른 세대는 그 유산의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우리 어른 세대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유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으며, 그 유산이 가치 있는 유산이라고, 그리고, 그 유산을 보았을 때 젊은 세대들이 물려받고 싶은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가?

 

나는 시편 71편을 묵상하면서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쓴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이 소설은 디킨스가 창간한 <1년 내내>라는 잡지를 통해 연재되기 시작하여, 1861년에 완성한 소설이다.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의 지붕 아래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 문명의 틀을 본격적으로 이루기 시작한 유럽의 18세기와 19세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이전까지 인류는 지금의 삶의 방식으로 살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물질문명의 토대를 이루게 된 것은 18, 19세기에 걸쳐 일어난 여러가지 인류사적 혁명들(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등) 때문이다.

 

찰스 디킨스는 그러한 문명사의 전환기에 살면서 문명이 변하면서 발생하게 된 인간성 문제를 소설을 통해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서구사회는 전반적으로 고정된 계급사회였다. 신분이 정해져 있었고, 그 신분은 세습이 되었다. 왕의 신분은 그 자녀들에게 세습되었고, 귀족의 신분도 그 자녀들에게 세습되었다. 그리고 평민의 신분도 자녀들에게 그대로 세습되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왕과 귀족 세력이 무너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신흥 세력이 있는데, 그들을 일컬어 부르주아라고 부른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자본, 즉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신분이 고정되어 있던 사회에서 이제 돈만 있으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사회적 변화였다. 그런데, 새롭게 등장한 세력인 부르주아 계급은 물질은 풍요로웠지만, 그들에게는 귀족들이 지니고 있었던 정신적 풍요로움이 빈곤했다. 그래서 부르주아는 평소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귀족들과 같은 정신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며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 나갔다. , 귀족사회가 무너지면서, 부르주아가 등장하며 새롭게 제시되었던 이상적인 인간상은 물질적 여유도 있고, ‘정신적 소양도 갖추고, ‘도덕적 품성을 고루 갖춘 인간이었다.

 

우리가 요즘도 고급문화라고 일컫는 클래식 음악(Classic Music)’이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클래식 음악은 원래 귀족들이 전유한 문화였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도 귀족들처럼 클래식 음악을 향유하며 귀족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음악가들을 후원하며 클래식 음악의 발전을 이끌었다. 우리가 지금도 즐겨 듣는, 쇼팽이나 리스트, 그리고 슈만이나 슈베르트 같은 음악가들도 그러한 사회적 분위 속에서 성장한 음악가들이다.

 

우리가 잘 아는 ‘gentleman’이라는 용어도 19세기 시대에 생겨난 신조어이다. 귀족이라는 신분이 무너지고, 평소 선망의 대상이던 귀족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던 부르주아 계급은 귀족이라는 말 대신에 ‘gentleman’이라는 용어를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gentleman’고결한 인간이라는 뜻으로서, 위에서 이야기한 물질적 여유, 정신적 소양, 그리고 도덕적 품성을 고루고루 갖춘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은 바로 그 ‘gentleman’의 이상적 인간상이 무너져버린 영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소설이다. 디킨스는 소설에서 주인공 을 통해 ‘gentleman’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 그러나 ‘gentleman’의 칭호를 얻었지만, 결국 정신적 소양과 도덕적 품성, 즉 내면/정신의 풍요로움을 상실해 버리고, 오직 물질과 외양만 중시하는 속물로 전락해 버린 ‘gentleman’의 가치를 고발하고 있다.

 

소설을 보면, 결국 주인공은, 가난하지만 고결한 인간성을 붙들고 살았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스스로 ‘gentleman’이라고 생각한 자신의 비루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한국어로 <위대한 유산>이라고 번역된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영어 제목은 <Great Expectations>이다. ‘Great Legacy’가 아니다. ‘Great Expectations’가 지닌 뜻은 큰 재산을 얻거나 물려받을 가능성이나 기대이다(민음사, 2442).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물려받기를 기대한다. 그러한 가능성을 생각하며 행복해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물려줄 것이며, 무엇을 물려 받을 것인가?

 

물질문명 아래서 살다 보니, 그리스도인들도 어느덧,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처럼 속물 신사가 되어버린 듯하다. 물질과 외양에만 치중하고, 정신과 도덕은 온데 간데없고, 무엇보다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했던 시인의 고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시인은 자신의 위대한 유산인 하나님을 오고오는 세대에게 물려주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시인의 그러한 고백과 소망에서 감흥을 받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위대한 하나님의 유산을 가지려고도, 그리고 그것을 물려주려고도 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물질문명 아래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재산증식에 대한 관심, 건강에 대한 관심, 여가에 대한 관심은 극대화되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줄어들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자녀들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물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Great Expectations’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Great Legacy’를 가지고 있는가. ,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재산증식과 건강의 복을 기대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자체를 기대하는가?

 

사실 우리는 하나님 자체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것과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준다는 것 자체를 낯설게 여긴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산은 물질 또는 건강으로 한정되기에, 하나님에게 복을 받는다는 것은 재산증식이나 건강을 받게 된다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기도는 간구/간청의 기도, 그리고 감사의 기도만 넘쳐나고, 우리의 기도에는 영광과 찬양의 기도가 턱없이 부족하다. “하나님,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또는 하나님 이거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거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는 드리지만, 오늘 시편에서 시인이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는 언제나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의 입은 당신께 향한 찬양을 가득 담았고, 날마다 당신의 영광을 찬양합니다라는 기도는 드리지 못한다.

 

위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지고 싶다. 우리 어른 세대의 그리스도인은하나님이라고 하는 유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으며, 그 유산이 가치 있는 유산이라고, 그리고, 그 유산을 보았을 때 젊은 세대들이 물려받고 싶은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들으면서,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이지? 하나님만을 유산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지?” 이 질문에 대하여, 실천적 지침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다. 사도행전에도 있고, 한국초대교회사에도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모든 소유를 팔아 각기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국초대교회사에도 예배당 건축을 하기 위해 집을 팔고, 쌀을 나누어 먹고, 노비를 해방시킨 일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러한 구체적인 예화를 들고, 실천적인 지침을 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잘못 이야기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키거나, 저항을 받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이다.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지.

 

다만 분명한 것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유산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서무엇인가 얻기를 기대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자체를 유산(Legacy)으로 여기고 있는 것인지, 아주 기초적이고 전복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체를 유산으로 물려주고 있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소설 <위대한 유산>을 통하여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은 젠틀맨인가?” 그 소설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혹시 자신이 속물 젠틀맨이었다면, 주인공 과 같이 마음을 돌이켜 진정한 젠틀맨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이 시편의 말씀, 이 시편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시인, 노인의 질문을 진지하게 읽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진정 모아야 하고 나누어 주어야 하는 유산(Legacy)’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나의 유산이시고, 그 가치를 온전히 오고오는 세대에 전하겠다고, 시편의 시인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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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0. 12. 11:42

복자(the blessed)

(창세기 30:25-43)

 

세월호 사건 직후 한국사회가 슬픔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그리고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교황은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그 중에서 한국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시성식을 진행했다. 가톨릭교회의 시성 단계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종 à 가경자(존경할만한 사람 The venerable, 놀라운 정도의 덕행을 실천하거나, 순교한 사람이라야 가경자의 칭호를 받을 만하다,1913년 교황 비오 10) à 복자(the blessed) à 성인(the saint)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에서 복자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시성 단계에 있는 그런 복자는 아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시성 단계의 복자는 성인 전 단계의 있는 공경받기에 합당한 인물을 말하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인 야곱에게 붙은 복자복 있는 자, 또는 복을 가져오는 자의 의미이다. 특별히,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복된 일이 생긴다의 의미이다. 물론, 시성 단계의 복자복을 가져오는 자의 복자는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 것도 아니다. 아무튼, 멋지지 않나? 누군가에게 이런 칭찬을 받는다면, 정말 영광될 것이다.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야곱은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 고향을 떠나올 때, 엄마 리브가는 몇 날 동안피신해 있으라고 말했다. 그런데, 몇 날은 고사하고 십 수 년이 흘렀다. 창세기 373절에 보면, 야곱은 요셉을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고 한다. 11번째 아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굳이 나이를 계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야곱의 심경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게 중요하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나이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에 삼촌 라반은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감언이설을 통해 야곱을 그대로 머물게 하려고 한다. 라반은 야곱을 이렇게 설득한다.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그대로 있으라.”(27) 이것은 라반이 야곱을 머물러 있게 하려는 감언이설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라반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야곱은 복을 불러오는 사람이다.  그러나 라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조카인 야곱을 수없이 이용했다.

 

라반은 원래 소유가 별로 없는 자였다. 그러나 야곱으로 인해 여호와께서 복을 주셔서 큰 떼를 이루게 되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으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30) 야곱은 그야말로 복자. 함께 있으면 덩달아 복을 받게 되는 존재.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복을 받은 후, 야곱은 이렇게 복자가 되었다. 함께 있기만 해도 덩달아 복을 받게 되는 존재. 부럽다. 이런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가 소망하며, 기도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생각난다.

 

프란치스코의 기도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주여,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라반은 야곱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야곱의 노동력을 사용했고, 야곱을 통해 많은 복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야곱을 계속해서 곁에 두기 위해 인정에 호소함과 동시에 흥정을 한다.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또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27, 28).

 

그러나 야곱은 라반이 방식대로 품삯 받기를 거절한다. 야곱은 삼촌에게 품삯을 받으며 삼촌에게 종속되는 것을 거절한다. 야곱은 이제 삼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는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 내 집을 세우리이까”(30). 품삯을 거절하며 야곱이 라반에게 요구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야곱은 삼촌이 주는 것을 받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가겠다고 말한다. 야곱은 염소와 양 떼 중에 아롱지거나 점 있는 것을 요구한다.

 

라반 입장에서 야곱의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야곱에게 불리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때부터 야곱은 자신의 것을 가려낸다. 대신, 라반은 자기 것과 야곱의 것을 삼일 길 거리에 떨어뜨려 놓는다. 그리고 그 이후 야곱이 자기의 것을 가려내는 방법은 매우 특이하다. 야곱이 행한 일은 버드나무(Poplar), 살구나무(Almond), 신풍나무(Plane Tree, 플라타너스)의 껍질을 벗겨,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여 그늘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했더니,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검은 것이 나왔다. 게다가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 더욱더 그랬다. 여기서 야곱은 약간의 트릭을 쓰는데, 튼튼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약한 것은 삼촌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자신의 것이 되게 했다. 건강한 가축들을 소유하게 된 야곱, 그 이후 삼촌 라반을 능가하는 소유를 얻게 된다. “이에 그 사람(야곱)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43).

 

속이는 자였던 야곱이 부를 늘려가는 과정에서 보여준 것은 어떤 속임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자신감이었다. 야곱은 라반에게 자기 품삯에 대한 정당한 취득을 이렇게 표현한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내 대답이 되리이다”(33). 그러면서, 혹시 자신이 말한 것과 다르게 양과 염소 떼 중 아롱지지 않거나 점이 없거나 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도둑질한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만큼 야곱이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당당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창세기 14장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포로로 사로잡힌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주변 동맹군과 함께 그돌라오멜 왕과 그의 동맹군을 공격하여 롯을 구출해 냈을 때 그 과정에서 많은 노획물을 얻었다. 감사의 표시로 소돔 왕이 아브라함에게 노획물을 취하라고 권하지만 그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한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부터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14:23).

 

복자. 복의 근원인 사람들. 그 사람과 함께 있기만 해도 복을 받게 되는 존재. 이런 이들의 특징은 삶의 부요함이 누구에게서 비롯되는 지를 정확히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모든 부의 원천이시며,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야곱은 이것을 깨달았기에 삼촌 라반의 품삯을 거절하고, 자기의 것을 스스로 가려내려 했던 것이다. 자기의 것을 스스로 가려낸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서 품삯 받기를 갈망하는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품삯을 주실 것을 믿는다는 뜻이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뒤,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약속을 마음에 품고 잊지 않았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5).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댈 때 우리는 야곱처럼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다.

 

복자.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복을 나누어 주고 복을 가져오는 자. 그 사람과 함께 있기만 해도 복을 받게 되는 존재. 그 사람과 함께 있기만 해도 복된 일이 생기는 존재.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복을 받으려는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복을 나누어 주려는 겸손에 물든 사람. 본인은 가진 것이 별로 없지만, 이웃을 부요케 하는 사람. 이러한 복자의 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망한다.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야곱이 받았던 복을 누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에서처럼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에 복이 넘쳐나길 기도한다.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사라지고, 사랑, 용서, 일치가 넘치길 기도한다. 우리가 우리의 두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길 바란다. 두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열매가 가득하길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복자(the blessed)’로 시복하신 것을 믿고, 스스로와 옆 사람에게 이렇게 축복했으면 좋겠다.

 

나는 복자입니다. 당신은 복자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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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10. 7. 08:20

별미 인생

(창세기 27:1-4)

 

인생 말년에 이삭은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다. 노안이 왔거나, 녹내장, 또는 백내장이 왔던 것 같다. 눈까지 안 보이니, 이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루는 이삭이 에서를 불러 별미를 만들어 오게 한다. 이삭은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을 부르지 않았다. 이삭은 에서만 불러 별미를 만들어 오게 했다. 이삭이 에서를 편애했다는 뜻이다.

 

별미(savory food)란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음식을 말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삭은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음식을 먹고,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마치려 한다.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my soul may bless you before I die). 그러므로 이삭에게 별미란 먹으면 마음이 기쁘고 밝아지고 열려서, 넉넉한 마음으로 축복해 줄 수 있는 기력과 능력이 생기게 하는 음식을 말한다. 이런 게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별미.

 

마음껏 축복해 주기 위해서 별미를 찾고 있는 이삭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또는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다른 이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마음껏 내리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다른 이들이 마음껏 베푸는 호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상대방이 무엇을 별미로 생각하지 알아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해야 할 것이고, 마지막으로 정성을 다해서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신앙인으로서 이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닌가 싶다. 어떻게 하나님께 별미를 드릴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별미를 원하시는가?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서 먼저 발견해야 할 것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별미를 알려주고 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우리는 하나님께 축복 받기를 원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하나님께 소원을 아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소원을 아뢰지 않아도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알고 계신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별미로 생각하시는 지를 생각해 보거나 살펴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실 별미만 먼저 상상한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이 무엇을 별미로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삭은 에서가 잡아온 고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에서는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별미를 마련해 드리러 사냥을 나선다. 에서의 마음이 얼마나 짠했을까? 눈도 잘 보이지 않는 노인네가 별미를 찾고, 그 별미를 먹고 기력을 좀 회복해 본인을 축복해 주길 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짠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별미를 알고 있는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쁨이 더 이상 없는 그 시간에, 그 사람에게 (마지막)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별미, 그래서 기력을 조금 되찾게 해주어 (마지막)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 축복의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별미, 그런 별미를 우리는 서로 알고 있는가. 나는 탕수육을 좋아한다. 내가 탕수육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맛있어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탕수육을 먹을 때면 아버지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어릴 적, 아버지와 사우나 하고 나면 먹던 그 향수가 탕수육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삭이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별미는 무엇이었을까? 마지막으로 먹고 축복권을 발동할 수 있는 별미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 별미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별미는 자신을 축복한 아버지 아브라함을 생각나게 하는 별미였을 것이다. 이삭은 그 별미를 먹고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아들을 축복해 주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렇기에 별미는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기억이고추억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별미가 인애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을 마음에 잘 새겨 둘 필요가 있다. 이것을 가장 깊이 깨닫고 삶 속에서 철저하게 구현한 존재는 누구일까? 복음은 그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은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점철됐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통 거기에 집중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별미이고, 우리는 그 별미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다가설 수 있으며,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애(仁愛)는 영어로 ‘mercy’라고 표기한다. 보통 한국말로는 자비또는 긍휼이라고 한다. 인애(자비/긍휼)이란 엄마가 자신의 태에서 나온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뜻한다. 모성애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엄마가 자기 태에서 나온 자식의 생명을 끝까지 보호하기 원하는 것처럼 인애를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 뿐 아니라 이웃의 생명도 끝까지 잘 지킬 줄 아는 것이다. 인애는 한 마디로, 생명을 지극히 존중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장 큰 계명 두 가지 중의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인애의 삶이었다.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주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Have mercy on me)”라고 부르짖으며 인애를 간청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간청에 응답하여 넉넉한 인애를 베풀었다. , 모든 생명을 자기 태에서 나온 자식 같이 사랑하셨다. 예수께서 이렇게 사신 것은 바로 이 인애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별미라는 것을 뼛속 깊이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을까? 아마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것이다. 또는 아직 잘 모르지만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어떤 유명인을 아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어떤 유명인을 안다고 말할 때, 그를 TV에서 보았거나 그래서 그의 얼굴을 아는 것을 말한다. 또는 그와 만나보았거나 대화를 나누어 보았거나 삶의 어떤 부분을 공유하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TV에서 보듯 볼 수 없고, 대화를 나누거나 하나님과 어떤 삶을 공유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일컬어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전적 타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른 말로 경건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잠언서는 이렇게 말한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 하나님을 아는 것을 영어로 ‘acknowledgement of God’이라고 한다. ‘애그놀리지먼트는 책을 냈을 때 저자가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부분이다. 거기서 저자는 본인이 이렇게 책을 내게 된 것에 대한 감사를 전하면서, 책이 나오게 되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의 결과는 감사로 나타난다. 인지, 인식, 인정하지 못하면 감사하지 못한다. 아무리 주변에서 잘해줘도, 인지, 인식, 인정하지 못하면 감사할 줄 모른다. 우리는 너무도 무심해서 이것을 잘 못하며 산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호의조차 인지, 인식, 인정하지 못하고 사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지, 인식,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뒤집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 하나님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인정하고 싶다면, 우리는 우선 우리 주변 사람들, 특별히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다. 모두 감사할 일들이다. 엄마가 자식들에게 밥해주는 것은 당연한가? 그렇지 않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엄마가 차려준 밥상을 얻어먹는 자녀들은 엄마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엄마를 인지하고,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살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노동으로 먹고 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의 노동은 자연이 없다면 아무 것도 생산해낼 수 없다. 노동은 우리가 하는 것이지만, 그 노동이 결실을 가져오게 하는 자연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노동으로 많은 결실을 맺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노동의 결실을 맺을 수 있게 선물(은혜)를 먼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내 삶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겠다!” ?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생명)이 하나님께 별미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별미를 십자가 위에서 받으시고, 우리에게 마음껏 축복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로 산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처럼 별미 인생으로 만들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기쁘신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총(축복)으로 우리 자신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처럼 아름다운 삶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 별미 인생이 되는 삶, 그 인생이 어찌 복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별미 인생이 되는 삶, 다시 말해, 생명을 지극히 존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볼 뿐 아니라 이웃을 돌보는 삶, 그리고 범사에, 모든 일에, 숨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인정하여, 입에서 감사가 끊이지 않는 삶, 그런 별미 인생을 사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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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9. 30. 03:18

어빌리티

(시편 53)

 

Ability(어빌리티). ‘뭔가를 할 수 있는 수단이나 능력을 소유하는 것을 말하는 단어이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남자를 능력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능력여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한테는 커리어우먼이라는 말이 그 의미에 가까운 것 같다. 모두, 능력 있는 남자, 능력 있는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현대 사회는 능력을 중요시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또는 능력을 인정 받기 위해 사회 시스템이 돌아간다. 각종 교육 체계는 능력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작동한다. 그래서 여전히 서점가에서 최고로 많이 팔리는 분야의 책은 자기개발서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능력을 상승시켜 자신의 값어치를 높일까에 관심이 많다.

 

최고의 능력남, 커리어우먼들이 모인다는 뉴욕의 월스트리스에 찬바람이 분 적 있다. 2008, 월가를 시작으로 전세계에 불어 닥친 금융위기가 그것이다. 그때 이곳 실리콘밸리에도 적잖은 파장과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집을 빼앗기고 실직의 늪을 지나야 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마이클 샌델은 그의 베스트셀러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도덕의 문제와 엮어 흥미롭게 풀어낸다.

 

그 당시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정부에서 푼 돈이 7천억 달러이다. 정부에서 구제 금융으로 푼 덕분에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은 도산하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돈을 받아 살아난 금융회사 중 AIG 그룹의 후속조치에서 발생했다. 그들은 구제 금융 받은 돈으로 돈잔치를 벌였는데, 임원들에게는 16500만 달러 보너스를 지급했고, 직원들에게는 100만달러 혹은 그 이상의 보너스를 지급했다.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을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고간 이들이 납세자의 돈으로 포상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일로 AIG 그룹을 비롯한 월가의 금융회사들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하여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평가한다. “미국 국민들이 그들의 보너스(그리고 구제 금융)에 반대한 진짜 이유는 탐욕을 포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를 포상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탐욕보다 실패에 더 엄격하다. 시장 경제 사회에서는 야심적인 사람들이 이윤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이익 추구와 탐욕의 경계는 대부분 모호하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의 구분은 확실하다. 아울러 성공한 사람은 포상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이다”(마이클 샌델, 36).

 

미국인들은 탐욕보다 실패에 더 엄격하다.” 탐욕 부리는 것은 좋게 봐줄 수 있는데, 실패하는 것은 좋게 봐줄 수 없다는 뜻이다. 탐욕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착한 사람인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서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실패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실패하지 않고 성공을 거두는 자, 그 사람이 가진 능력을 어빌리티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는 피로사회를 살고 있다.

 

시편 53편에서 시인은 한탄을 한다. “착한 일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시인은 착한 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유를 첫 절에서 밝히고 있는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묻는 게 아니다. 과학적 사회에 물든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묻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 믿지 않는다로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지만, 성경의 세계에서 하나님은 당연히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라고 하는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유무를 묻는 질문이라기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세상을 굽어 보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빤히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그리고 모두들 딴 길 찾아 벗어나서 한결같이 썩은 일에 마음을 모둔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처럼, 빤히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아버지를 죽은 사람 취급하여 자기 재산을 챙겨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Wesleyan Quadrilateral(웨슬리의 사변형)’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계시(성경), 전통(역사), 이성, 경험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가 우리의 신앙, 또는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계시가 담긴 성경이 가장 중요한 삶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없는 삶의 원리는 전통이나 이성, 또는 경험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계시(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와 전통(역사에서 오는 것)은 인간의 바깥에서 오는 소스(source)이다. 그리고 이성과 경험은 인간 안에서 오는 소스이다. 인간 바깥에서 오는 소스와 인간 안에서 오는 소스가 균형을 맞춰야, 인간의 삶은 평안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소스 사이에 균형을 맞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이 두 가지 소스의 균형이 잘 맞은 적이 거의 없었던 듯싶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불행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중세 때는 계시와 전통의 소스가 너무 강해서 인간들이 고통을 받았고, 계몽주의 이후부터 지금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이성과 경험의 소스가 너무 강해서 인간들이 고통 당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었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 인간이 신을 죽였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고발은 통렬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인간은 자기 자신 이외에 그 어떤 존재에게서도 간섭 받기 싫어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신까지 죽이고 말았다. 신을 죽여버린 인간 사회에 발생하는 엄청난 일, 그 세상을 고발하는 것이 니체의 철학이다. 그리고 신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 니체의 철학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고, 즉 인간의 바깥에서 오는 소스를 거부하고,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만 있는 소스를 사용하여 세상을 만들어 나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두 가지 어빌리티의 상실이 있다. 하나는 shame-ability의 상실이고, 다른 하나는 hate-ability의 상실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능력의 상실, 미워할 줄 아는 능력의 상실. 이 두 가지 능력의 상실로 인하여,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얼마나 각박해졌는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3-4). Shame-ability를 상실하고 나니까, 악을 행하면서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그렇게 악을 행하면서도, 그렇게 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솜씨 좋게 성취하는 것을 능력(ability)이라고 도리어 칭찬한다. Shame-ability를 상실하니까 사회가 야만사회가 되었다. 위의 월스트리트의 이야기에서처럼 어떠한 일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그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돈잔치만 있을 뿐이다.

 

Hate-ability의 상실. 우리는 누군가 잘못된 일을 해도, 나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악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당장 나의 이익과 상관없으면 우리는 그 악에 눈을 감는다. 그래서 그 악에 피해를 보는 희생자가 눈 앞에 있는 데도 그냥 남몰라라 지나친다.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거반 죽게 되어 쓰러져 있던 사람을 그냥 지나친 레위인이나 제사장처럼 말이다. Hate-ability의 상실로 인해, 이 세상이 얼마나 무심한 세상이 되었는가. 함께 분노하고 함께 악을 몰아내고 싶어도, 무관심한 시선에 우리는 아무 일도 못하고 고개만 떨굴 뿐이다.

 

Shame-ability의 상실, 그리고 Hate-ability의 상실은 모두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 것?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ability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도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하나님 없는 세상에 젖어 산다. 주님께서 시장 바닥에서 기도하며 자기를 드러내는 바리세인들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시면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진지하게 의식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들은 다른 의미에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한다. 프라이버시 때문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남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에, 공공성(공의와 정의 /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통함)이 존재하는가? 요즘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ability에서 비롯된 기도라기 보다는, 자기 만족과 자기 탐욕의 근거한 기도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기도에 온통 나 자신밖에 없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지도를 받으려는 순종과 감사의 기도보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청원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는가. 내 기도 들어주시면 하나님이 계신 거고, 내 기도 안 들어주시면 하나님이 안 계신건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가?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생길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어빌리티, shame-ability, hate-abiltiy를 키울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성경공부를 통해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어빌리티를 키우는 것, shame-abilityhate-ability를 키우는 것’, 그 능력을 키워서,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한 세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책임감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함께 성경공부를 해 나가기를 소망한다.

 

어빌리티. 능력남, 커리어우먼이 되어 세상에서 인정받는 주의 자녀들이 되시라.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주의 자녀들이라면, 우리의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는 어빌리티도 반드시 갖추기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그로 인해 shame-abilityhate-ability를 갖게 되어, 주님께서 이 세상을 조금 더 밝은 세상, 조금 더 따뜻한 세상으로 만드는 데 우리의 어빌리티를 사용하실 것이다.

 

끝으로, 하늘을 우러를 줄 아는 능력을 갖기 원했던, 그래서 shame-ability hate-ability를 갖기 원했던 우리들의 신앙의 선조가 쓴 시를 한 편 읽으며 마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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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9. 23. 05:57

그와 같은 싸움: 참여구원

(빌립보서 1:29-2:8)

 

성경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다. 성경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담고 있긴 하지만, 성경의 세계는 현실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현실 세계는 찌그러진 원이지만, 성경의 세계는 완전한 원이다. ‘찌그러진 원’, ‘완전한 원’, ‘이라고 하는 본질은 같지만, 그 차원이 다르다.

 

현실 세계의 원을 보면, 온통 찌그러져 있어서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러나, 성경 세계의 원을 보면 찌그러져 있는 원이 활짝 펴져 온전한 원을 이루고 있어 마음이 좋다. 성경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두 현실을 산다. 이렇게 두 현실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일까, 아니면 참 어려운 일일까.

 

때로 우리는 니고데모가 되어 순진하게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 한밤 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니고데모는 이때 거듭난다/다시 태어난다(born again)’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3:3).

 

참으로 정직한 질문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정직. 참으로 지혜로운 질문이다.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지혜. 성경을 읽으며, 우리에게도 이러한 정직과 지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와 성경의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현실 세계에 너무 젖어 있어 성경의 세계가 낯설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와 같은 성경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그리고 성경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현실에만 파묻혀 버리고, 성경의 세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의 본문, 성경의 세계를 보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29-30).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고 싶으면 믿고, 안 믿고 싶으면 안 믿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인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고난을 받게 한다고 말한다. 은혜와 고난은 짝이 맞는 말이 아니다. 현실 세계에서 나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하면서 고난을 안겨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나쁜 놈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성경의 세계에서는 현실 세계에는 없는 낯선 말을 한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말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됐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보니까 고난을 당하더라고 말한다. 29절의 고난을 당한다30절에서는 그와 같은 싸움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싸움이 자신의 삶에 가득한데, 바울을 통해 빌립보교회 공동체는 그 싸움이 무슨 싸움이고 어떠한지, 바울의 삶과 증언을 통해서 목격한다. 그리고, 바울이 경험한 고난’, ‘무엇에 대한 싸움은 빌립보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어떠한 것을 향해 싸우게한다는 것이다. 무엇에 대한 싸움일까? 이 싸움의 내용은 무엇일까?

 

우리는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고 말하는 대속구원에 익숙하다. 위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은 굉장히 익숙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도 받게 한다”, “싸움을 하게 한다라는 말에는 익숙하지 않다. ‘고난 받는다’, ‘싸움을 한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참여한다라는 말인데, 우리는 이러한 참여구원에 대해서는 매우 낯설어 한다. 대속구원과 참여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런데, 우리는 동전의 한 면만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대속구원만 보면서 구원 받았다고 만족해 하고 감사해 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삶에는 구원의 감격과 평안은 있는데, 바울이 말하고 있는 고난과 싸움이 없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기록 중에,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기도하신 일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요한복음의 기도는 우리가 다른 복음서에서 목격하는 소위 겟세마네의 기도가 아니다.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 기도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달리 아주 독특하게 예수의 마지막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지막 만찬 대신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긴 기도문을 싣고 있다. 그 기도의 핵심은 21절과 22절이 담고 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로 하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17:21-22).

 

10.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받기 바라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니고데모처럼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는 지점이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니고데모식으로 질문하면, “우리가 각자 다 몸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엄마 모태로 들어가서 샴쌍둥이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겁니까?” 현실 세계에 사는 우리는 성경의 세계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됨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해서, 요한복음은 구원이라는 것을 하나됨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우리가 서로 하나되고,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상태, 그 상태를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몸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생각이 다른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어려운 질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사건을 통해서 깨우칠 수 있다. ‘하나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의 질문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지혜가 합해지면, 우리에게 깨달음이 오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성육신(Incarnation)을 우리가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옮기면 참여(participation)’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삶에 참여한 사건이다. 우리는 이 참여라는 말을 마음에 잘 품을 필요가 있다. 바로, 참여를 통해서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구원을 이루는데, 이 구원을 참여구원이라고 부른다.

 

참여는 나 아닌 다른 존재와 하나가 되는 통로이다. 우리는 지금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참여하는 행위를 통해 하나가 된다. 여러분과 내가 지금 하나이다. 지금 여러분은 내가 전하는 말씀선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공부에 참여하면 여러분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고, 참여하고 있는 서로서로가 하나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발행하고 있는 어떤 일, 그리고 교회에서 해야하는 어떠한 일들에 참여하고 우리는 그 참여를 통하여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다.

 

참여가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 우리는 참여의 가치를 너무 잃고 산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속구원에는 익숙하나 참여구원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대속구원 받은 우리는 아주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니 이제 나는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자유인이고, 어떠한 일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나의 자유일 뿐더러, ‘참여는 나의 구원과 별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고난과 싸움이 없다. 우리는 그저 인생의 고난과 싸움을 말하고 경험할 뿐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현실 세계에의 고난과 싸움을 경험할 뿐, 성경의 세계에 참여하여 그 참여로 인하여 받게 되는 고난과 싸움의 경험이 없다.

 

우리가 말씀에 참여하여, 성경의 세계에 참여하여 받게 되는 고난과 하게 되는 싸움은 무엇일까?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2:1). 이 진술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되면, 얻게 되는 대속구원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할 뿐 아니라, 우리를 고난과 싸움으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참여이기 때문이다. 하나됨 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참여로 인하여 우리가 받게 되는 고난과 하게 되는 싸움이 무엇인가? 마귀랑 싸우는 거? 아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이것 자체가 우리에게 얼마나 챌린지인가. 마음을 같이 하여같은 사랑을 가지고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이게 되나? 안 된다. 우리는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가. 현실 세계에서 경험하는 것은 분열과 미움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게 되나? 우리는 얼마나 다툼과 허영으로 일을 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남을 우습게 여기는가? “You are better than me!”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려 내 발 아래 굴복시키려는 게 이 세상의 현실 아닌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이게 되나? 우리가 우리 자신 일은 얼마나 살뜰하게 챙기는가?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일에는 얼마나 무관심한가? 다른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다가도 자신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가면 자기의 것을 지키겠다고 투쟁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다.

 

성경의 세계는 현실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대속구원까지에는 동의하고 감사하나, 현실 세계에는 없는 세상을 보여주시며, 현실 세계에서 성경의 세계를 구현해보라고, 현실 세계에서 성경의 세계를 살아보라고 부르시는, ‘참여구원은 못들은 척, 못 본 척한다.

 

산길을 가던 순례자가 우연히, 안타깝게도 호랑이를 만났다. 순례자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살려 주세요!” 그 순간, 호랑이도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 호랑이가 순례자를 맛있게 잡수셨다. 만약, 순례자가 이렇게 기도했으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까? “하나님, 저를 호랑이의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말도 안 되는 기도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세계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을 말하며, 거기에 참여하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5-8).

 

우리의 삶에는 싸움이 많다. 그런데, 그 싸움은 대부분 분열과 미움 때문에 생겨난 싸움, “I am better than you”라고 말하며 상배방보다 우위에 올라 서려고 하면서 생긴 싸움, 남의 삶은 쳐다보지도 않고 내 이익만 추구하려다가 생긴 싸움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싸움이 있는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우리에게 이 싸움이 있는가? 호랑이를 만나면, “주님,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기는 쉬워도, “주님, 오늘 제가 이렇게 호랑이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더러 자신의 삶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무엇보다, 우리는 참여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우리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는 거대한 일, 그런 거대한 참여는 할 수 없을지라도,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참여의 강력한 수단을 가지고 있는데, 그게 바로 기도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식사 시간에 늘 이렇게 기도하셨다. “나눠져 있는 식구들과 온 교우들 식탁 위에도 풍성한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도 식사기도 할 때마다 동일하게 기도한다. 그 기도를 통해서 나는 나눠져 있는 식구들의 식탁에, 온 교우들 식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그리고 참여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늘려가고 깊이를 더하면서 참여한다면, 우리는 대속구원 뿐 아니라 참여구원을 이루어, 완전한 구원을 이루게 될 것이라 믿는다. 현실 세계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성경의 세계(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그래서, 하게 되는 싸움, 그 싸움이 많아지는 복된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되시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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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9. 15. 07:31

불기둥과 구름기둥

(출애굽기 14:19-31)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인생이 같을 수 있을까? 유대인들의 힘이 이런 데서 나오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며, 어떤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있는가?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살아갈 힘을 안겨주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비유로, 교육이란 물고기를 잡아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 물고기 잡는 법이 바로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듣고 자라면, 그 이야기는 그 사람의 마음에 남아 빛이 되고 소망이 되고 힘이 된다.

 

유대인들은 절기를 잘 지켰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유대인의 삼대 절기는 무엇인가?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이다. 그들이 절기를 지켰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교육 차원에서 그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교육의 중심에는 이야기(스토리)가 있다. 유월절(무교절 포함)을 지키면서 그들은 불에 구운 양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었다. 그냥 먹는 게 아니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먹는 지침이 나온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야훼의 유월절이니라”(12:11).

 

이렇게 먹을 때 교육이 발생한다. 아이들은 이렇게 밥을 먹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다. 그때 부모는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는지를 이야기해 준다. 그때 부모는 아이들에게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 그리고 열 가지 재앙의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 가서 홍해를 건넌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바로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이야기 말이다.

 

칠칠절과 초막절도 마찬가지다. 칠칠절은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지키는 절기인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키는 절기다. 이에 대해 신명기 6장에는 이러한 지침이 나온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겨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6:6-9).

 

칠칠절을 지키며 그들은 자신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뿐더러,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이다. 가르치는 게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요즘 부모 세대가 성경을 잘 읽지 않고 성경을 기억하지 못하고 마음에 잘 새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녀의 성경교육(신앙교육)을 주일학교나 유스의 몇몇 사람들(전문가)에게 맡기려 한다. 그렇다 보니, 기억할 필요도 없고 마음에 새길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폐단을 반드시 고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 교육 학자는 개신교의 신앙교육이 무너진 원인을 18세기 영국에서 생긴 주일학교 제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정말 맞는 말이다.

 

물론 그 시대는 영국의 산업혁명 때문에 노동자들이 아이들을 붙들어 놓고 신앙교육을 시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육직책으로 주일학교 제도가 생겼지만, 그 이후 부모들은 일 해야 한다는 명분아래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신앙교육 전문가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때부터 부모들은 성경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지 않았기에 스스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초막절은 무엇을 지키기 위한 절기인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사건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초막절을 히브리어로 수콧(Sukkot)’이라 부른다. 초막절에 유대인들은 집 앞에 수카(Sukkah)’라는 초막(임시 장막 / 임시 텐트)을 지어 그곳에서 7일간 머물면서 먹고 마시며 축제를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이야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던 하나님의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지구적 동네 북이었다. BC 722/721년 북이스라엘이 망했을 때부터 이들은 엄청난 고통 가운데 살았다. BC 587/586년에는 남유다가 망하면서 정상적인 국가의 기능이 무너졌고,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야 했으며, 인류의 역사에서 생겨났던 수많은 제국들에게 계속 통치를 받으며 핍박을 당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국가를 다시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2차 대전 중에는 600만명이나 학살당하는 홀로코스트 사건을 격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며 세계를 주무르는 민족으로 남아 있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라고 믿는다.

 

우리에게 이야기가 있는가? 그냥 이야기 말고, ‘임마누엘의 이야기말이다. 우리에게 이야기가 있는가? 그냥 이야기 말고, 어렵고 힘들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이야기 말이다. 내가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나의 자녀들에게 들여주며 그들의 삶에 힘이 되어줄 이야기 말이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유대인들이 자기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고 자녀들에게 전해주었던 것과 같은 한국인의 이야기가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았다. 한국 역사의 전설적인 이야기 중, 우리 뇌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게 뭔가? 단군신화? 호랑이하고 곰하고 마늘 먹고 100일 동안 동굴에서 살았는데, 호랑이는 참지 못해 뛰쳐나가고, 곰은 끝까지 견뎌서 웅녀가 되어 하느님의 아들과 결혼하게 됐다는 그 이야기? 그 자손에서 나온 게 한국인이라는 그 이야기?

 

사실, 단군 이야기는 정말 멋진 이야기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가 하늘에 닿아 있다는 자부심을 안겨주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역사가 담긴 출애굽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고 감동을 받으나, 이상하게도 한국인의 멋진 이야기, 단군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 이야기에 감흥 받으면 마치 우상숭배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고려 시대 때 <동국이상국집>이라는 책을 지어 고려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이규보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현재 강화도 길상면 길직리에 묻혀 계신다. (내가 이 분을 반가워하는 이유는 이분이 묻혀 계신 곳이 바로 내 고향이기 때문이다.) <동국이상국집>에는 동명왕편이 실려 있다. 동명왕편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고구려 건국신화를 기록하며 신화적인 요소를 빼고 기록한 것을 비판하며 보충하여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재구성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동명왕편은 이야기다. 고려가 고구려의 정신을 이어 받은 나라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동명왕편에는 해모수(하나님의 아들), 주몽(고주몽/동명왕/고구려의 초대왕), 그리고 주몽의 아들 유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냥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웅서 사시이다. 이 이야기가 고려인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겠는가. 특별히 고려인들이 / 특히 무신 집권시기의 난세(대몽항쟁시기)를 지내면서 자신들의 뿌리가 이러한 하늘의 신화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 난세를, 힘들지만 얼마나 희망차게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돌파하려고 노력했겠는가.

 

우리는 지금 참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전지구적으로 인간은 집단 우울증 증세(코로나 블루)와 집단 분노에 시달리고 있다. 특별히 요즘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산불로 인하여 2중 고통을 당하고 있다. Everyday sunny day의 맑은 하늘만 보다가 요즘 햇볕을 못 보고 살고, 코로나 때문에 바깥에 잘 나가지도 못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공기의 질이 너무 나빠서 바깥에 나가지 못하고 사니, 심리적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코로나 이후의 불확실한 경제와 세상을 대면하며 사람들은 엄청난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살리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이야기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성경의 이야기를 참으로 특별하다. 이러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른다. 홍해가 갈리는 이야기를 보라.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런 일이 진짜로 있었어? 어떻게 바다가 갈려? 이런 질문은 어리석은 거다. 이 이야기가 전해주고 싶은 것은 이게 진짜로 있었던 일이다 아니다가 전혀 아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이야기의 핵심은 31절이 담고 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모세에 대하여 별로 신뢰가 없었다. ‘여호와가 애굽의 신보다 강하겠어? 모세가 무엇이관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겠어?’ 이러한 냉소적인 마음이 그들에게 가득했다. 이런 냉소적인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것을 주려 해도, 구원을 베풀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홍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했고, 모세를 믿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여호와가 애굽의 신보다 강하구나! 그렇구나 모세가 우리를 애굽에서 구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이겠구나!’

 

요즘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 우리에게도 알게 모르게 냉소적인 마음이 들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나겠어?’ 다른 말로, ‘하나님이 바이러스보다 강하겠어?’ ‘교회가 왜 이래? 챙피해서 못다니겠네.’ 다른 말로, ‘교회가 우리를 이 어려운 시기에 무슨 도움이 되고, 우리를 이 어려움에서 구출할 수 있겠어?’ 이뿐 아니라, 온갖 냉소적인 마음과 두려운 마음과 절망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출애굽 이야기를 아주아주 새롭게 들어야 한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홍해 이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야기를 엮어서, 아주아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매일 듣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의 냉소적인 마음, 그리고 힘든 현실을 뚫고 지나갈 수 있는 능력(두나미스/다이너마이트)’으로 들어야 한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이끌고 있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무엇인가? 냉소와 좌절인가? 그리스도인에게 냉소와 좌절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바다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어려운 일과 절망적인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냉소적으로 만들거나 좌절시킬 수 없다. 우리에게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희망(hope)과 확신(confidence)이다. 어렵고 힘든 시기,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야기, 우리 삶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되는 이야기, 성경 많이 읽으시라. 우리 모두, 힘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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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0. 9. 8. 05:43

의인의 기도

(시편 44:17-26)

 

시편에는 개인 탄식시와 공동체 탄식시가 있다. 구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화자(말하는 사람)이면 개인 탄식시이고, ‘우리이면 공동체 탄식시이다. 근방에 있는 시편, 42편과 43편을 44편과 비교해보면 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 탄식시이다.

 

우리는 살면서, 개인적인 삶 속에서 당하는 고통이 있지만,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당하는 고통이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공동체의 고통이다. 공동체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그리고 누가 기도할 수 있을까?

 

시편 44편의 분위기(어조)를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다. 22절부터 24절이다. “당신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죽임을 당하며 도살장의 양처럼 찢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의 주여, 일어나소서. 어찌하여 잠들어 계십니까? 깨어나소서,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렵니까? 어찌하여 외면하십니까? 억눌려 고생하는 이 몸을 잊으시렵니까?”

 

기도의 분위기가 겸손하지 않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이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시편 44편의 분위기는 시인이 하나님을 꾸짖는 분위기다. 원망하고, 항의하는 분위기다. 이러한 분위기가 이 시편을, 이 기도를 매우 특별하게 만들고, 주목하게 만든다. 어떻게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들은 대개 이러한 분위기의 기도를 들으면 당황해한다. 불경스러워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함부로, 감히,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대개 죄인의 기도는 드릴 줄 아나, 의인의 기도는 드릴 줄 모른다. 아니, 기독교인들은 대개 죄인의 기도 밖에 모른다. 한 번도, ‘의인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 말씀이 어디에 나오는가? 로마서에 나온다. 한국 교회는 로마서를 엄청 가르친다. 로마서 성경공부 안 해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도 로마서 강해설교를 세 번 해보았다. 우리는 로마서를 하도 공부하다 보니, 성경에 로마서만 있는 줄 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로마서 중심의 신앙이 굉장히 강하다. 그리고 로마서를 공부하면서(또는 가르치면서) 가장 뇌에 박히게 배우는 것이,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너는 죄인이야! 의인은 한 명도 없어! 니가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너는 그냥 죄인에 불과해! 구원받고 싶지? 그러면 예수 믿어!”

 

이것을 누구한테 가르치냐면, 새신자에게 가르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걸음마와 말을 배우기 전부터 그 아이를 가까이에서 돌보는 부모부터 가끔 만나는 동네 아저씨 아줌마까지 모두 그 아이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너는 나쁜 놈이야. 이디엇! 바보 같은 놈! 니가 할 수 있은 아무 것도 없어! 밥이나 축내는 놈! 그래도 잘 자라고 싶어? 그러면 내 말 잘 들어!”

 

이렇게 갓 태어난 아이한테 계속해서 이런 말을 퍼부어 보라. 그러면 그 아이가 온전히 자라겠는가? 잘 자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이미 나는 나쁜 존재이구나. 나는 바보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나는 밥이나 축내는 놈이구나.’라고 하는 부정적인 자의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이한테 그런 것을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가 자라면서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스스로, 자기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깊이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달어야 하는 문제를 억지로 깨닫게 하니, 그 아이가 온전히 자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죄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과 주변에서 그런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천지차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시인은 지금 항의하고 있다.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겼다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항의 기도가 아니라 회개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인은 항의 기도를 하고 있다. 시인이 이렇게 항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근거가 17절 이하에 나온다. “우리는 당신을 잊은 일도 없으며 당신과 맺은 계약을 깨뜨린 일도 없건만 마침내 이런 일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배반한 일도 없고 일러주신 길을 벗어나지도 않았건만, 당신께서는 여우의 소굴에서 우리를 부수시었고 죽음의 그늘로 덮으셨습니다”(17~19).

 

시인의 항의 기도를 보면 지금 누가 잘못하고 있는가? 기도하는 자에게는 잘못이 없어 보인다. 그는 하나님을 한 번도 잊어본 적 없고,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린 일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반한 일도 없고, 하나님이 일러준 길에서 벗어난 적도 없다. 그런데, 지금 시인은 입에 담지 못할 폭력에 시달리고 있고, 죽음의 그늘로 덮여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이 기도에서 잘못한 것은 시인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눈이 번쩍 떠지는 기도다.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니! 평생 죄인으로 살아온 우리는 상상조차 못한 기도다. 그런데, 이 기도가 불경에 실려 있는 게 아니라, 성경에 실려 있다. 우리는 매일같이 죄인의 모습으로, 주여 죽여 주시옵소서, 하며 회개하며 죄인의 기도를 드리면서 기도 끝에 가서 들리는듯 마는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나님께 살려주세요라고 구원을 요청했는데, 지금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기도하며 오히려 하나님에게 항의하고 있다. 이 얼마나 발칙한 기도인가! 이 얼마나 멋진 기도인가!

 

우리는 이 기도가 공동체의 기도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기도가 아니다. 공동체의 기도이다. 지금 이 공동체는 큰 고통 가운데 처해있다. 그 공동체 모든 구성원이 이 기도를 드리는 시인처럼 의인은 아닐 것이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 시인처럼 하나님께 항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모두 자신들에게 닥친 고통을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겪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통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고통을 그냥 감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는 의인이 있었다. 바로 그 의인이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와 항의 기도를 하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상황인가. 이 얼마나 멋진 반전인가. 공동체가 고통을 당할 때, 누가 공동체를 대신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공동체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가? 바로 의인이 기도할 수 있고, 의인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공동체가 고통을 당할 때 의인이 기도해야 하는 것은 그의 권리이고 의무이다. 그리고, 그 의인의 기도를 통해서 공동체는 구원받는 것이고, 공동체는 그러한 의인이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의인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개발 전 강남에서 자란 사람이다. 졸업은 양재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했지만, 입학은 말죽거리에 있는 언주초등학교로 했다. 초등학교 1,2학년 시절에는 동네서 버스를 타고 말죽거리까지 갔어야 하는데, 버스가 2시간마다 한 번씩 다녔다. 아침에 버스 놓치면 끝장이었다. 그러다 80년대부터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중고등학교 다닐 때 강남 8학군이라는 게 생겼다. 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 없이, 나는 강남 8학군에서 공부한 특권층이 되었다.

 

요즘에도 한국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강남 8학군이 이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정말 많았다. 반에서 10등 정도 안에만 들면, 서울연고대를 갔다. 학교에 반드시 모의고사 전국 1등이 있었다. 우리 때만해도 애교심이라는 게 커서, 본인이 다니는 학교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지, 다른 학교 다니는 친구들과 대결하곤 했다. 그때 단골로 등장하는 자랑은, ‘우리 학교에 모의고사 전국 1등 있어!’였다. 그런데, 이런 자랑을 하는 친구들은 정작 공부를 못하는 친구다. 모의고사 전국 1등이 있는 학교에 다니는 게 뭐가 중요한가? 그런 학교 다니면 자기도 좋은 대학 가는가?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신이 공부를 잘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모의고사 전국 1등이 있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마치 자신이 1등한 것처럼 우쭐해진다. 그게 인간의 소박한 심성이다. (이것은 그냥 웃자고 한 비유이다. 의인의 메커니즘은 모의고사 전국 1등하는 메커니즘과는 다르다.)

 

누가 의인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자꾸 주변을 돌아본다. 누가 의인이 되어줄 사람 없나, 하고.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욕심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온갖 속된 욕심은 다 부릴 줄 알면서, 왜 우리는 거룩한 욕심을 부릴 줄 모르는가. 바로 내가 의인이 되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공동체가 고통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 항의 기도할 줄 아는 의인이 되도록 노력해 보는 것이다.

 

17,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시민들이 전통의 권위와 종교적 권력에 짓눌려 고통 당하고 있을 때, 인간의 본성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이성에 기대어 세상을 개혁해보려는 의지가 피어날 때,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말을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계몽의 의지를 불태우게 했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용기를 갖고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라!”

 

나는 칸트의 말을 밀려 이렇게 의인의 의지를 불태우고 싶다. 과감히 의인이 되려고 하라. 용기를 갖고 너 자신의 믿음을 사용하라!” 나는 그 노력의 끝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믿는다. 과감히 의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믿음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갖고 우리 자신의 믿음을 사용해야 한다. 믿음이란 아무것도 안 하는 죄인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완전하지 못하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의인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성화(sanctification)이라 부른다.

 

한 가지 덧붙여서, 지금 이렇게 팬데믹으로 인해 모든 인류가 고통 당하고 있을 때, 누가 하나님께 항의 기도를 해야 하는가? 바로 교회가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항의 기도를 하고 있는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요즘 벌어지는 기독교계의 불미스러운 일들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향해 죄송합니다라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아니고, 세상을 향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회개 기도하느라 바쁘다. 이것은 뭔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우리의 믿음을 얼마나 잘못 사용해 왔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은 교회가 세상에서 지탄을 받고 있는 중이라 세상을 향하여 죄송합니다라고 회개하고 있는 중이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꿈 꿔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고백하는 세상을 꿈 꿔야 한다. 다음에 또 이러한 공동체의 어려움이 우리에게 닥친다면, 그때는 교회가 하나님을 향하여 항의 기도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대신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의인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과감하게 의인이 되도록, 성화되도록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면 좋겠다. ‘의인의 기도’, 나와 우리 교회 공동체가 드리는 궁극적 기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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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