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에 해당되는 글 580건

  1. 2018.03.28 거절당한 메시아
  2. 2018.03.27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3. 2018.03.23 우리 인생의 부림절 1
  4. 2018.03.20 때와 순종
  5. 2018.03.15 감춰진 악 1
  6. 2018.03.13 구원은 은혜다
  7. 2018.03.08 통증과 (중보)기도
  8. 2018.03.05 십계명 - 무심과 단순 3
  9. 2018.03.02 용서를 택하라
  10. 2018.02.27 내 삶을 깨뜨립니다
  11. 2018.02.22 듣는 마음과 선악 분별 1
  12. 2018.02.22 광야로 가자 1
  13. 2018.02.13 갑절과 겉옷 1
  14. 2018.02.01 에벤에셀과 한반도 평화
  15. 2018.01.18 나실인 삼손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8. 13:28

거절당한 메시아

(마가복음 12:1-12)

 

우리는 살면서 거절을 하거나, 거절을 당한 경험을 가지고 산다. 거절할 때도, 거절당할 때도 이유가 있다. 그리고,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하다. 그러나, 거절하거나 거절 당한 것 때문에 삶이 평안하기도 하고,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거절은 긍정적인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두번째 날은 온통 거절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중들은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 이후 성전관리자들(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거절한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다. 그들은 권위 문제를 들고 와서 예수님을 거절한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러한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간단한 질문 같지만, 권위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이것은 정치학에서도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서구 역사에서 권위 문제를 일으킨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이다. 그는 짐이 곧 국가다(L'État, c'est moi, 레타 세 모아)’라고 주장했는데, 그가 그러한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왕권신수설때문이다. 왕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백성은 마땅히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이 14세는 5살 때 왕이 되어, 72년간 프랑스를 다스리다, 7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을 때 아들 루이 15세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 루이 14세가 죽자, 국민들 중에 슬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국민들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권위는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권위를 가진 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통치를 받는 백성의 삶이 달라진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권위 문제를 들고 나온 이유는 성전에 대한 권위는 자신들의 것이며, 예수에게는 성전에 대한 권위가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성전 정화 사건을 벌인 이유는 그들이 가진 권위 대한 부정이요, 권위를 그들이 얼마나 부정하게 썼는지에 대한 고발이었다.

 

권위의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거절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다음으로 세금의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거절한 그룹이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이다. 그들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옳은 것이니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이 질문은 단순히 세금의 문제가 아니다. 매우 정치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햐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중차대한 질문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라라고 대답하면 유대인의 반역자가 되는 것이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라고 대답하면 로마의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답하나 저렇게 대답하나 예수님은 누군가에 의해서 반역자로 몰려 죽게 될 형편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12:17). 이 문제는 지금도 핫이슈이다. 특별히 종교인 과세를 시행한 대한민국에서는 세금 문제로 인해 교계에 한바탕 논란이 불었다. 복지국가/선진국일수록 세금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복지국가/선진국일수록 국가에서 국민복지의 문제를 대부분 해결하기 때문에 종교인이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방법으로 세금을 잘 내는 것은 오히려 종교계가 나서서 권장해야 할 사항이다.

 

세 번째로 예수님을 거절한 부류가 등장하는데, 사두개인들로 그들은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과 대결한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두개인들은 다른 정치권력 세력들보다도 훨씬 부유층으로서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대개 이 땅에서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땅에서 특별한 고통이 없으니, 굳이 사후의 평안을 바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질문은 자신들이 믿는 바, 부활의 세계는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계대결혼(고엘법)은 일종의 사회복지법이다. 남편(가족)의 도움 없이 생계를 꾸려갈 수 없었던 고대 여인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그래서 율법에는 자식 없이 남편을 떠나 보낸 여인은 그 남편의 동생(친족)이 거두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그러한 고엘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려 한 것이다. 한 집 안의 남자 일곱이 모두 한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모두 자식이 없이 죽었다면, 나중에 부활하여서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바래새인과 헤롯당,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질문들이 가진 의미를 아는 것이 먼저다. 그들이 예수님께 그러한 질문을 던진 이유는 그 문제 대한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그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다.

 

그들의 거절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예수님은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보여 주신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대신 농사짓게 하고 타국에 가 있는 중이다. 때가 이르러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소출을 얻으려고 종을 보낸다. 그런데, 그들은 소출을 내어놓기는 커녕 종을 잡아 능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한다.

 

이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그리고 주인은 그들이 적어도 아들은 존대하리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농부들은 엉뚱한 생각을 한다. 만약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면 농부들 자신이 그 포도원을 차지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들을 잡아 죽인 후 포도원 밖에 내던진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농부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축소판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말씀을 전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열매를 맺기 원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성경의 대표적인 선지자인 이사야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5:1-2)

 

이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의 관점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언한 이야기로 읽어야 이해가 더 확실해 진다.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마친 후, 예수님은 느닷없이 '머릿돌' 이야기를 하신다. 머릿돌 이야기는 시편 118편의 말씀이 근거이다. 그 말씀을 보면 이렇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118:22-23)

 

버림 받은, 거절 당한 포도원 농부의 아들로부터 건축자의 버린 돌 이야기로 초점을 옮긴 이유는 문학적 비유이다. 히브리어로 아들은 이다. 그리고 히브리어로 돌은 에벤이다. ‘에벤사이에 있는 언어적 유사점을 이용하여, 거절당한 아들이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고,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처럼, 거절당한 아들이 하나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증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시편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생각, 기대)를 완전히 뒤엎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의 사고에는 말세에 메시아가 와서 악을 심판하고 의인을 신원해야 하는데, 그러한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발생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버리고 죽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온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로 인정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들이 거절하여, 버림받고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시편의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요, 그들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자들은 '거절당한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믿지 못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며, 메시아를 거절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쯧쯧 혀를 차며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시 최고의 권력층이었고 지식층이었다. 그러한 자들도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했는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낫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메시아의 거절 이야기는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님이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구분한 뒤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양 같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4-37).

 

예수님께 이 말씀을 들은 오른편의 의인들은 의아해 하며 예수님께 이렇게 여쭙는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대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25:37-39).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25:40). 우리가 주리고 목마른 자들, 헐벗고 병든 자들, 옥에 갇힌 자들, 또는 그 외에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섬기는 이유는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메시아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거절당한 메시아를 통해서이지, 환영 받은 개선장군을 통해서가 아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곧 메시아는 아니다. 하지만, 거절당한 메시아를 통해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에서 거절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떠한 지혜를 가지고,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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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7. 16:40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마가복음 11:12-19)


며칠 전 토이즈러스의 설립자 찰스 라자러스가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났다. 1948, 25세의 나이로 전후 세대의 장난감 수요를 예측하고 세운 토이즈러스는 그가 떠나기 일주일 전 경영 악화에 따른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영원히 문을 닫게 되었다.

 

참 마음 아픈 소식이다. 자식 같은 사업채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난 것 같아, 그의 부고 기사를 읽고 마음이 짠했다. 토이즈러스(Toysrus)라는 이름은 Toys(장난감)과 그의 성(Last name)인 라자러스에서 ‘rus’을 합해서 만든 것이다. 거기에 R자가 거꾸로 표기한 이유는 아이들이 알파벳을 배우면서 흔히 하는 실수인 ‘R’을 거꾸로 쓰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토이즈러스는 동심을 반영한 사업인 것이다.

 

토이즈러스가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월마트와 아마존의 등장을 꼽는다. 월마트가 등장하기 전까지 토이즈러스는 장난감을 가장 값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월마트가 등장하면서 그 명성이 무너졌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 영입된 토이즈러스의 CEO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토이즈러스 매장을 장난감 체험 현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것을 통해서 토이즈러스는 아이들을 매장으로 끌어모을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토이즈러스 가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갑을 여는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부모였다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들에 비해서 합리적인 소비를 원한다. 물론 아이들이 토이즈러스에서 본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지만, 아이들의 조름에 넘어가는 부모는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 결국, 부모들은 장난감 구입을 토이즈러스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물품을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는 월마트나 아마존에서 구입한다. 장난감 체험이 구매로 이어지지 않자, 결국 토이즈러스는 적자를 못 이기고 영영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이들에게는 토이즈러스 매장이 문을 닫는다는 것, 그곳에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 장난감 체험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 온다. 일례로, 우리 아이들에게 토이즈러스 파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큰 아이는 그것이 아마존 때문이냐고 반문했고, 그러면서 왜 정부(government)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 치고 꽤 똑똑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큰 아이에게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해주고, 네가 그 해결 방안을 스스로 생각해 보라고 숙제를 던져주었다.) 작은 아이는 내 핸드폰을 잠시 달라고 하더니, 갑자기 아마존 앱을 지워버렸다. 동심에서 우러난 진지한 행동이었다. 아마존 때문에 토이즈러스가 망했으니, 아마존 앱을 지워버리면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안 것이다. 이처럼, 토이즈러스가 망한 사건은 아이들에게 여러모로 매우 심란한 사건이다.

 

본문에 등장한 사건도 매우 심란한 사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사건을 그렇게 심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간극은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유대인도 아니고, 그 당시 성전시스템에 혜택을 보던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본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일단 날이 저물자, 예루살렘 근처 도시인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즉 고난주간 첫째날인 월요일에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아침 식사를 못하셨는지, 예수님을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중 배가 고프셨다. 그래서 무화과 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따서 먹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에 가까이 가서 열매가 없나 살폈지만 나뭇잎만 무성한 것을 발견하신다. 그러자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를 향해 저주를 퍼부으신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4).

 

이 이야기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그렇게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 필요 없다. 무화과 나무 이야기와 더불어 등장하는 이야기는 소위 성전 정화 사건 이야기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신다. 그리고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7).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 사건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계시(revelation)이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드러내신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되었던 것이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5:4).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어떠한 열매를 맺을 것인지, 기대하시는 분이다. 다른 말로 해서, 주님은 심판자이시다.

 

그리고,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상업적인 행위를 허락한 성전권력자들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현존하는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 권력자들 위에 세우셨으며, 희생 제사 시스템이 더 이상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선포하신다”(생명의 삶 플러스, 마가복음). 구원을 주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지 종교 권력자들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과거나 현재에 머물러 산다. 과거에 매여 있거나, 현재에 파묻혀 산다. 그렇다 보니,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깊은 사유를 하지 못하고 산다. 사실, 그게 인간이 가진 한계이자 연약함이기 때문에 그것을 뭐라고 나무라기 쉽지 않다. 그리스도인을 빛과 소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할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해서 철저하게 자각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이나,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무화과 나무가 저주 받은 것이 열매가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며 열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성전이 타락한 것을 개혁해야 한다며 제도 개혁이나 도덕의 함양 같은 것을 강조하게 된다.


열매나 도덕은 매우 외적인 것이다. 이것은 행위의 측면을 강조할 때 쓰이는 단어들이다. 물론, 열매나 도덕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인이 다른 이들보다 열매가 풍성하지 않거나 도덕적이지 않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설득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요즘엔 기독교의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전도를 해도 잘 먹히지 않는다. 교회의 안티세력들이 교회를 비난하는 외적인 이유는 교회의 도덕적 타락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대충은 다 안다. 그러면,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으로 기독교의 명성이 회복되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까?

 

열매를 맺지 못하고, 도덕이 타락하는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자각하지 못해서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생득적으로 생명체는 자기 생명의 구원을 갈망한다. 그래서 생명을 지닌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만 정신을 쏟게 되어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반 사람들과 성전 관리들이 하나가 되어 희생 제사 시스템을 편리하게 구축하여 성전 제사를 활성화 한 이유는 그것이 그들에게 구원을 보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사업이 자신들의 생명을 번성해줄 것이라고 판단하면 그곳에 투자자가 몰리게 되어 있다. 기독교에 관심이 덜 해진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가 그들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하여 더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붙들고 있는가?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새것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새것은 좋은 것이고 헌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아이폰이 나오면 그거 사느라 애플 스토어 앞에 밤새 줄을 선다. 새로운 차, 새로운 집,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먼저 구입하여 그것을 누리는 것이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인 것처럼 인식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회는 구시대의 유물인 것처럼, 그래서 멀리해야 할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이전 기술은 폐기되고, 새로운 것이 발견되면, 이것은 버림을 받게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을 안고 살고,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발명하느라 피곤해졌다. 요즘 기업들의 성공은 누가 먼저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발견했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그래서 기업들은 사람들을 닦달하고, 사람들은 기업의 등쌀에 못살겠다며 힘들어 한다. 기업은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면서 그들에게서 노동력을 뽑아 낼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 여념이 없다. 경영학과 심리학은 그러한 기업의 프로젝트에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요즘에는 종교도 그러한 프로젝트에 봉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이나 요가).

 

사람들은 그렇게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그 새로움의 종착역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갖는 의미의 궁극성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창조의 시작이며 완성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보다 더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옛 유물인 것처럼 오해한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줄기차게 나누는 교회를 구 시대의 유물인 것처럼 오해한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교회의 잘못이 크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새로움의 궁극적 완성이라는 것을 세상에 제대로 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전의 희생 제사를 부정하는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을 종결하신다. 단순한 정화가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구원에 이르는 데 아무것도 필요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 필요할 뿐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의 삶의 질은 그리스도의 의미를 얼마나 깊이 깨닫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리스도가 궁극적 구원이시고 궁극적 새로움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닫는다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미덕인 현대인들이 무엇을 갈망해야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신상품이나 신기술만을 갈망한다면, 그것 때문에 인생이 피곤하다면,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궁극적 구원이시고, 궁극적 새로움인 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직 쓸 만하지만 새로운 무엇인가를 사기 위해 헌 것을 버리고 새것을 살 돈을 더 의미 있는 일에 쓸 것이다. 그렇게 의미 있는 일에 물질과 시간을 투자할 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많이 맺게 될 것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이라는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 외에 더 이상의 새로움은 없다. 더 이상의 구원은 없다. 최고와 최선의 새로움을 간직한 그리스도 공동체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최고와 최선의 새로움을 전달하는 새시대의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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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3. 04:05

우리 인생의 부림절

(에스더 7:1-10)

 

에스더 이야기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갈린다. 사건을 대처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지혜와 신앙을 알 수 있다.

 

아하수에로 왕은 페르시아(바사)의 크세르크세스 1세를 히브리어 일컫는 것이다. 다리오 왕의 아들로서 자신감 없고, 충동적이며, 벌컥 화를 내는 성격을 지닌 자였다.

와스디 왕후 폐위 사건을 보면 왕과 신하들의 얼마나 비열하고 우둔한지 알 수 있다. 아하수에로 왕은 술 취한 뒤, 자기의 소유물처럼 왕후 와스디를 사람들 앞에 보이려 했고, 왕후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어쭙잖게 남성의 권위를 지키려는 신하들의 간사한 조언에 넘어가 와스디 왕후를 폐위시킨다.

 

와스디 왕후 폐위 사건 때문에 에스더 (하닷사)가 역사에 등장한다. 에스더의 히브리 이름은 핫사다인데, ‘도금양(Myrtel, 꽃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고, 에스더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에스더는 와스디 왕후를 대신하여 왕후가 되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사촌지간이다(삼촌의 딸). “부모가 없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2:7). 그러나, 둘 사이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대개 모르드개를 에스더의 삼촌으로 부르기도 한다. (둘 사이의 촌 수 관계는 그렇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모르드개는 왕의 목숨을 구한다. 왕궁 문지기였던 모르드개는 어느날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우연히 알게 되는데, 그 일을 왕에게 알려 왕이 죽음을 피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일이, 궁중 일기에 기록되고, 그 기록은 나중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르드개와 유다인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

 

하만과 모르드개의 악연은 하만의 교만과 모르드개의 신앙의 기개 사이의 충돌 때문에 시작된다. 하만은 왕 다음의 권력자였고, 모든 이들은 그가 지나갈 때 꿇어 엎드려 절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하만 앞에서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모르드개는 자신이 유다인인 것을 대외적으로 밝혔다. 그가 자시 자신의 민족을 알린 것은 자신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신앙의 절개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절개가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 얼마나 많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가. 특별히 우리는 맘몬 신에 무릎 꿇고 절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만은 자신에게 절하지 아니하는 모르드개에게 적의를 품고 그와 그의 동족 유다인들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살해 위협을 많이 당했고, 실제로 대량 학살이 일어난 적도 있다.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의 유다인 말살 계획이 실제로 옮겨진 사건은 20세기 2차대전 중에 일어났던 홀로코스트 사건이다. 홀로코스트 학살 생존자인 엘리 위젤(Eli Wiesel)이 만든 연극 <하나님의 시험>에서 에스더서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부림절 전날 밤, 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그 연극 속에서, 부림절 전날밤, 그 마음의 모든 유다인들은 학살을 당한다. 연극에서 시인 아브레멜은 이렇게 말한다. “부림절의 기적 없는 부림절을 나는 상상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에스더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런데, 홀로코스트에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인들은 부림절을 지키며, 에스더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에스더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여전히 희망일까, 아니면, 허튼소리일까. 홀로코스트는 하나님의 부재를 나타낸다. 우리도, 인생의 한 가운데서 때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는가?

 

모르드개는 왕후가 된 에스더와 생명을 살릴 지혜를 강구한다. 이것은 계속해서 등장하는 아하스에로 왕과 그의 신하들이 보이는 비열함과 우둔함에 대비되는 모습이다. 한 쪽은 생명을 죽이려 하고, 한 쪽은 생명을 살리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누구 편일까? 우리는 쉽게 하나님이 생명을 살리는 편일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낙심을 경험한다.

 

모르드개가 고난을 당한 이유는 그가 공개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기의 신앙을 지켰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무릎꿇고 절하지 아니한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진 이유도 비슷하다.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을 것이다는 왕의 조서를 어기고,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부당한 일로 폐위된 와스디 왕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에스더의 왕후 즉위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로 묘사된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는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4:14).

 

그들이 생명을 보전한 것은 믿음과 지혜와 하나님의 은혜때문이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왕 앞에 나아가서 왕을 잔치에 초청하여,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는 과정에서도, 에스더는 믿음과 지혜와 은혜 안에서 그 일을 진행한다. 그리고,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집 앞에 세워놓았던 나무에 자기 자신이 매달려 죽는다.

 

이 보다 더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을까.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보면, 하만이 살던 궁궐 같은 집은 에스더에게 주어지고, 모르드개는 하만이 차지하던 지위를 갖게 된다. 그리고, 전국에 있는 유다인들은 자기들을 핍박하던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고, 자신들의 원수들을 물리친다.

 

이 사건이 유다인들에게는 명절이 된다. 죽임 당하는 날이 명절로 바뀐,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아달월(지금의 2-3) 십사일, 유다인들은 그날을 부림(Purim)절이라고 부른다. ‘부르는 제비를 뽑아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기 좋은 날 택한 것을 말한다.

 

에스더 이야기에서 일어난 반전보다 더 큰 반전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래서 궁극적 반전이라 부를 수 있다. 에스더 이야기는 죽음을 모면하는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긴 이야기이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이 여전히 에스더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이야기 삼는 이유는 그들이 비록 홀로코스트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그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더 더 확실한 믿음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부림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믿음과 지혜와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놓여 있는 어려움들을 이겨 나갈 수 있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에스더의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다. 최후 승리를 믿는가? 그렇다면, 내 삶에 있는 부림절, ‘믿음과 지혜와 은혜를 통해 누리게 되는 승리의 순간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더욱더 신앙안에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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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0. 08:09

때와 순종

(요한복음 12:20-33)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행인 셋을 잘 대접해서 아들을 얻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을 듣는 이야기가 있다. 그 사건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그 때를 잡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낳는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전도서 3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도사 3:1-8)

 

복음서에 보면 이 세대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 나온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1:17). 춤춰야 할 때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야 할 때 슬피 울지 않는 사람들, 참 쉽지 않다.

 

인간과 인간 관계에서도 때를 아는 것은 중요한 소통의 문제이다. 때를 안다는 것은 지금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풍성한 생명을 나눌 수 있는가의 중요한 문제이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때를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할 때를 언제 알았는가? 기도할 때하늘에서 무슨 음성을 들었을 때? 아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 뵙기를 청한 것을 통해서 알았다. 빌립과 안드레가 헬라인들의 요청을 예수님께 전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표현방식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인자가 영광을 얻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갖는다. 어떻게 수난과 죽음이 영광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밀알이 썩는다는 것은 해체요 죽음이다. 그러나 밀알이 땅 속에서 썩는 것은 생명의 사라짐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변화이다. (ppt) 밀알 안에 저러한 생명이 들어있다는 것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밀알이 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 놓을 때 비로서 저런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펼쳐진다. 생명의 변화는 나 자신의 해체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 내 생명을 드릴 때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체하거나 죽음의 상태에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깨달은 때는 하나님의 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라는 뜻이다. 예수님에게 임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것은 이런 뜻이다.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데, 그의 죽음은 심판의 죽음이요, 구원의 죽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소통을 하고 있고, 그 소통을 통해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는 때를 알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순종하는 데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이루어지는 때를 알아,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할 때, “왔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현재완료시제인 엘렐뤼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때가 이미 지금 여기에 현존해 있다는 것이다. 절대로 뒤로 물러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가 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은 온 존재를 다해 순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게 오히려 사는 길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죽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절대로 우리의 생명을 헤치지 않는다.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는 아들 이삭을 제사의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그 뜻을 감당하는 길은 온 존재를 다해 순종하는 방법 밖에 없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쳤다. 그런데, 오히려 그 순종이 이삭을 살리고 아브라함을 살렸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사건을 일컬어,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

 

에스더서를 보면, 모든 유다 백성을 죽이려는 하만의 음모가 나온다. 그런데, 그때 온 유다인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에스더 때문이다. 모르드개를 통해서 하만의 음모를 전해들은 에스더는 삼일 밤낮을 금식한 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려고 작정한다. 그러면서, 에스더는 이렇게 말한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가 죽음을 불사하며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기로 겸심한 이유가 무엇인가? 모드르개의 이말 때문이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는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스더 4:14).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를 안다는 것, 그리고 그 때에 순종한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해주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교회를 책망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3:15-16).

 

세상도 매력적인 남자/여자를 이렇게 부른다. 차도남 / 차도녀. 차든지, 뜨겁던지, 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에 반응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임한 때도 모르고, 그것에 순종도 안 하는 사람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나? 이방인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방인인가? 그리스도인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 이렇게 예배드리러 나왔으니까! 오늘 말씀에도 명절에 예배하러올라온 헬라인들이 예수님에게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예배하다라는 말은 '프로스퀴네인'인데, 이것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에게 무릎은 ''을 상징한다. 그러니 무릎 꿇고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의 힘을 포기하고, 만물의 주인인 창조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한다는 뜻이다.

 

독일의 통일을 이루어 독일제국을 세운 프로이센의 불세출의 정치가 오토 비스마르크가 이런 말을 했다. “신이 역사 속을 지나가는 순간, 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정치가의 책무다.” 이것은 처음에 언급했던, 아브라함의 천사 대접 이야기를 정치가 입장에서 풀어 설명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바꾸어서 말하고 싶다. “하나님이 역사 속을 지나가는 순간, 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를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가 왔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뛰어나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는 집단적으로 임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임하기도 한다.

 

결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살면서 수많은 남자를 만나고, 수많은 여자를 만난다. 그런데, 왜 저 사람하고 결혼하는가? 때가 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결혼 한 것! 하나님의 뜻이 임했고, 때가 찼고, 그래서 순종해서 결혼했으면, 밀고 나가야 한다. 그렇게 결혼했는데, 아직까지 긴가민가하면, 행복하지 않다. 삶의 질이 떨어진다. 그런데, 믿음으로 밀고 나가면, 행복해진다. 삶의 질이 높아진다. ‘죽으나 사나 나는 당신 밖에 없어!’ ‘당신은 내 삶을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은 결과야!’


선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누군가에게는 선교가 거룩한 부담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가야하는데!’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 같은데그러면, 순종해야 한다. 그냥 밀고 나가라. 주변여건환경 따지도 묻지도 말고, 밀고 나가라. 그게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거다. 그래야, 나를 통해 선교의 열매가 아름답게 맺어진다.

 

교회에 어떠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헌신해야 할 때를 생각해 보자. 나의 경우, 에어컨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있어, 바쁘지만, 주님 주신 집회를 통해서 에어컨 살 수 있는 비용을 마련케 하시고, 헌금해서, 올해는 반드시 에어컨 설치해서 예배 드릴 때 예배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어떤 프로젝트에 헌신하라는 마음 주시는데, 순종하지 못하면, 재물이든 시간이든 이상하게 그 만큼 다른 곳에 허무하게 쓰게 된다.

 

우리는 매일같이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말씀을 나누고 친교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일자적으로, 우리가 매일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임한 때를 분별하여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함이다. 내 삶의 역사를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 그것이 믿음이고 영성이다. 이는 우리가 잠잠히 하나님을 바랄 때 이룰 수 있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모멘텀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큼 우리에게 복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잠재력은 감추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임할 때 순종하면, 마치 뻥튀기 튀기듯이 엄청난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이 얼마나 보람차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인가. 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인생인가. 때를 분별하라. 그리고, 그 때가 임했을 때, 순종하라.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가 이미 여기에 와 있을 때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순종 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때를 분별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어(순종하여) 모든 생명을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때를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다시 말해, 역사 속(우리의 삶 속)을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면, 주께서 우리를 통해 귀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 주시며 우리의 삶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때를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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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15. 14:11

감춰진 악

(느헤미야 13:1-31)

 

언젠가 EBS 다큐프라임에서 <당신이 화를 내는 이유>를 제목의 방송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화를 왜 내는 것일까? 그 방송에서 말하기를, ''라는 감정 안에는 분노, 모멸감, 자기 비하, 그리고 좌절감까지 다양한 감정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화는 대개 부정적 감정이 어느 일정 부분 쌓이면 폭발하는 현상이다.

 

화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의 근원을 추적하여 그 근원을 보듬어주어야 한다. 방송에서 말하기를, 대부분 화를 습관적으로 심하게 내는 사람들의 경우, 그런 감정 분출의 근원이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서 이어진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고 신체적인 성장을 이루더라도 내면의 트라우마는 그 사람의 내면을 상처 받은 그 시간과 그 상태에 머무르게 하여, 어떠한 상황이 되면 감정이나 행동의 퇴행을 가져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생긴 트라우마를 치유하면 화가 없어지는가? 그리고, 어린 시절 왜 그러한 트라우마가 생겼을까? 대개 어린 시절 받은 상처는 불우한 환경 때문에 생긴다. 그런데, 어떠한 가정에 닥친 경제적 어려움은 그 가정만의 책임인가? , 화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 기제만은 아니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의 구조적 악으로부터 온다.

 

예를 들어,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결혼과 출산을 꺼려한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그들이 어렸을 때 결혼과 출산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의 감정이 메말라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청춘은 언제나 뜨겁다. 뜨거움이 청춘의 상징 아닌가? 그런데, 왜 요즘 청춘들은 결혼과 출산을 꺼려하는가? 결혼과 출산이 그들에게 짐이 되기 때문이다.

 

결혼과 출산이 저조하여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그것은 인구절벽문제와 고령화문제를 낳고 있다. 인구절벽은 인구가 감소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고, 고령화문제는 한 명의 노인을 봉양할 수 있는 젊은이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사회)가 붕괴된다.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청춘 남녀 각 개인에게 감정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장려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청춘 남녀가 결혼과 출산을 해도 짐이 되지 않도록 사회제도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 청춘 남녀가 결혼과 출산을 꺼리게 만드는 요소를 이라고 한다면, 그 악은 개인에게 숨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개인 안에 숨어 있는 악을 찾아내는 것보다 사회 안에 숨어 있는 악을 찾아내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원래 한 권의 책(두루마리)이다. 같은 시대적 배경을 하고 있고,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뜻이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의 포로귀환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1차 포로귀환은 스룹바벨이 주도했고, 2차 포로귀환은 에스라가 주도했고, 3차 포로귀환은 느헤미야가 주도했다.

 

스룹바벨은 다윗의 자손이었다. , 1차 포로귀환은 왕족을 중심으로 이뤄진 귀환이었다. 매우 정치적인 상징을 가진 귀환인 것이다. 그리고 에스라는 율법 학자 겸 제사장이었다. , 2차 포로귀환은 매우 종교적인 상징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는 평신도이면서 행정가였다. , 3차 포로귀환은 매우 사회적인 상징을 갖는다.

 

오늘 본문은 제 3차 포로귀환을 주도한 느헤미야가 포로귀환 공동체를 개혁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그가 하는 개혁의 특징이 있다. 그는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개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 그는 사회 안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져 있는 악을 찾아내어 그 악을 물리친다. 느헤미야가 훌륭한 개혁가인 이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관행처럼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진 악을 발견해 내는 통찰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느헤미야가 발견한, 감춰진 악은 크게 다섯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총회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은근 슬쩍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 배경은 신명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니리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느니라”( 23:4-5).

 

암몬과 모압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은근 슬쩍 모른 채 하고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 와서 목소리를 내려고 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까먹었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모르는 척 해서 암몬과 모압 사람을 은근 슬쩍 하나님의 총회에 참석하게 했다. 이렇게 은근 슬쩍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대한민국이 아직도 역사청산을 하지 못하고 사회적 갈등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닌가. 일본 정부는 2차대전 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은근 슬쩍 모른 채 하고 군사력과 정치력을 키워 주변 나라에 영향력을 미치려 하고, 친일파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매국행위를 은근 슬쩍 덮으며 대한민국 사회에서 계속하여 주류사회에 편승하려 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만행을 까먹었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모른 척 해서 그들에게 곁을 주려 하고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은근 슬쩍 넘어가려 할 때, 그것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결국 그것 때문에 사회는 붕괴되고 만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개혁했듯이, 반드시 역사 청산은 이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로, 느헤미야가 발견한 감춰진 악은 제사장 엘리아십과 암몬 사람 도비야가 내통하여 성전을 더럽힌 사건이다. 그들의 죄는 여호와의 성전을 사사로이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최고위 관리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찾아내기 쉽지 않은 악이다. 누구보다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내야 할 제사장이 여호와의 총회에 절대로 들어오면 안 되는 암몬 사람과 내통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은 그들의 부패가 얼마나 심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느헤미야는 성전에 있던 도비야의 방에 있는 물건을 모두 끄집어 낸 뒤, 그 방에 원래 있어야 할 성전의 물건들을 채워 넣는다.

 

세 번째로, 느헤미야가 발견한 감춰진 악은 성전을 위해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에 관한 것이다.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봉사를 해야 하는데, 느헤미야가 보니까, 모두 자기들의 밭으로 가서 먹고 사는 일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 이유를 조사해 보니까,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레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 조사해 보니까, 성전의 곳간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목회하면서 수 없이 많은 설교를 했지만 헌금 설교를 한 적이 없다. 그 이유는 교회 재정은 행정에 관한 것이지 복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물론 헌금은 신앙고백의 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헌금에 대한 설교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요즘 읽은 어느 책을 보니까, 교회에서 교회 재정에 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교회는 건강하지 못한 교회라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는 행정이 없을 수 없다. 그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재정이다. 교회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인 재정에 관한 문제는 적극적으로 지혜를 모아 대처 해야지, 소극적으로 대처하면 안 된다. 다만, 이것은 설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회의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느헤미야는 행정가이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재정적인 문제를 적극적으로 대처한 느헤미야에게서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다.

 

네 번째로, 느헤미야가 발견한 감춰진 악은 안식일 문제이다. 안식일 문제는 단순히 율법적인 문제가 아니다. 율법을 형식으로만 지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안식일 문제는 인간의 정체성 문제이다. 느헤미야가 발견한 것은 안식일에 아무렇지도 않게 예루살렘에서 상거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그들의 일상이 먹고 사는 문제로만 전락한 것이다.

 

인간은 쉬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쉰다는 것은 사색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요즘 현대인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쉬지 못하고 일에만, 먹고 사는 문제에만 몰두해 있다 보니까,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 소외가 자꾸 발생하여 물질적 풍요는 이루었으나 실제 느끼는 행복감(삶의 질)은 오히려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인간에게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은 행복의 근원이고 목적이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가 발견한 감춰진 악은 통혼의 문제이다. 통혼 문제는 그들의 독특한 역사적 자리에서 봐야 한다. 이것은 현재의 사회적 통념과 매우 다른 개혁이다. 느헤미야가 통혼에 대해서 개혁의 칼날을 들이댄 것은 그들의 신학적 반성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한 이유를 솔로몬에게서 시작된 통혼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신을 섬긴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자신들을 망하게 한 직접적 원인이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느헤미야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심각성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통혼이 아무렇지도 않게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는 드러난 것 때문이 아니라 감춰진 것 때문이다. 감춰진 감정이 폭발할 때 화를 내게 되고, 그 이유모를 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사회(공동체)가 무너지는 이유 드러난 것 때문이 아니라 감춰진 것 때문이다. 그것이 악인지도 모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는 그일이 결국 어느 시점에 가면 사회(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된다. (, 한국사회의 가부정적 문화, 편리를 추구하는 생활 방식(플라스틱 사용, 화석연료사용 등)).

 

개인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도 세포 안에 감춰진 암 세포 때문이다. 그 감춰진 암 세포를 얼마나 빨리 발견하여 제거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 (우리 아버지는 친구 목사님 따라 우연히 건강검진 받으러 가셨다 간암을 발견하여 수술해서 6년 반을 더 사셨다. 만약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더 일찍 세상을 떠나셨을 것이다.)

 

개인의 사회적 커리어를 망치는 일도, 결국 자기 자신만이 아는, 또는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감춰진 나쁜 습관() 때문이다. 가정을 무너뜨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드러난 일이 가정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는 일이 오랫동안 진행되다 어느 순간 드러나게 되어 가정이 무너지는 법이다. 교회 공동체도, 국가 공동체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감춰진 악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가정을 돌아보고, 교회 공동체를 돌아보고, 사회를 돌아보면서 우리를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감춰진 악이 무엇인지 부지런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의 생명을 지키고 풍요롭고 행복할 수 있도록 서로를 비춰주는 사랑과 의의 거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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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13. 03:53

구원은 은혜다

(민수기 21:4-9)

  

요즘 자율 주행 자동차 개발에 가장 많이 투자를 회사가 어디인지 아는가? 우버이다. 아마존이 유통업의 판도를 바꾸었다면, 우버는 운송업의 판도를 바꿀 것이다. 우버의 목표는 손님, 또는 물건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정확하게운반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인공지능센서를 개발하고 지형에 대한 엄청난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얼마 전 보도된 기사에 의하면, 우버가 개발하고 있는 자율 주행 자동차는 타사(구글)에서 개발하는 자율 주행 자동차에 비해 안전성과 정확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만약, 자율 주행 자동차 시대가 도래했고, 우리가 어딘가를 가고자 할 때, 우리는 어떠한 자율 주행 자동차에게 우리의 몸을 맡기겠는가? 당연히, 안전성과 정확성이 뛰어난 자율 주행 자동차에게 우리의 몸을 맡길 것이다. 그게 우리 인간의 당연한 마음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을 보장해 줄 초월자를 찾기 마련이다. 옛날 이집트는 나일 강을 주기적으로 범람시키는 신()인 하피를 섬겼다. 나일 강의 주기적 범람으로 인해서 나일 강 주변의 땅은 옥토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농사가 잘 돼 풍성한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이 잘 범람하도록 하피 신에게 예배를 드리며 그 신을 만족시키려 했을 것이고, 나일 강을 어김 없이 범람시키는 하피 신을 신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왜 신뢰하는가?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댈 수 있는 따스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기억하고 고백하며 신뢰한다.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제 막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하나님과 시편 23편에서 다윗의 입을 통해서 고백되는 하나님은 사뭇 다르다.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윗의 고백은 매우 스윗하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은 매우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안전하게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10가지의 재앙을 보냈고, 그 재앙 중 10번재 재앙이 임했을 때, 하마터면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도 애굽의 장자들처럼 죽을 뻔했다. 그리고, 그들은 출애굽 한 이후에도 뒤따라오는 애굽 군대를 피해 도망치다가 홍해에 가로막혀 애굽 군대의 칼날에 죽거나 홍해에 빠져 죽을 뻔했다.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이렀을 때도 그랬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든 적이 있는데, 그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는데, 그것 자체가 이스라엘에게는 굉장한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만약 여러분의 몸을 실은 자율 주행 자동차가 안전하지 않거나 정확하게 운송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불평할 것이다.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이 했던 불평 또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안전하게, 정확히 인도해 줄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불평했다.

 

오늘 말씀에도 이스라엘의 불평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고 나아갔다. 그런데, 그 우회도로가 별로 좋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이렇게 불평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5).


런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불뱀이 등장한다. 이것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불평 때문에 내리신 하나님의 응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려움에 처하면 불평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떻게 사람이 불평하지 않고 사는가. 성경에 보면 불평하는 일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시편에 보면, 대부분의 시가 탄원시이다. 탄원시는 시인이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대표적인 탄원시인 10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그리고 다른 대표 탄원시인 22장은 이렇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라고 하는 장르로 대하고 있어서 그렇지, 이 탄원시들의 내용 자체는 매우 거칠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때로,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 놓으라. 천벌 받을까 봐 무서워 하지 말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라. 시편에 보면, 불평으로 시작한 시편은 나중에 감사의 찬송으로 바뀌는 것을 본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평을 감사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불뱀은 독이 있는 뱀을 의미한다. 어릴 적, 우면산 기슭에서 독사를 참 많이 봤다. 한국의 대표적인 독사는 까치독사와 살모사이다. 까치독사는 알록달록 색깔이 예쁘고, 살모사는 회색과 검정색 점이 박혀 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화단을 꾸미려고 쌓아 놓은 흙더미 위에 까치독사가 나타난 적이 있다. 점심 시간이었는데, 오전반을 마치고 하교하는 저학년 아이들이 까치독사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독사는 독이 바짝 올랐는지, 대가리를 곧추 세우고 있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한 아이에게 돌진했다. 나는 달려가서 그 아이를 밀쳐내고, 가져간 강목으로 독사의 머리를 후려쳐서 독사를 잡았다. (내가 이래봬도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한 의인이다.)

 

독사에 물리면 죽는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독사에 물려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와서 간청을 한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7). 모세는 그들의 간청대로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보통, 이야기가 여기까지 전개되면, 우리는 이런 예상을 할 수 있다. 백성들이 회개하며 간청했고, 모세가 중보기도 했으니, 그들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뱀들을 물러가게 해줄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우선, 뱀은 물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을 무는 일도 멈추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지시하신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이 그들이 의도하고 원하는 대로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뱀이 물러가고, 더 이상 뱀이 그들을 물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구원이 임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9).

 

구원은 은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에베소서 2 8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구절을 통해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를 말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 받는다. 그 말은 우리가 구원을 공짜로 받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우리는 공짜를 너무 좋아한다. 그래서 구원이 공짜로 우리에게 선물로 임했다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 하며 좋아한다. 그런데 이것은 구원은 은혜다라고 하는 말을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면 무엇인가?

 

구원은 생명의 완성을 말한다. ‘구원은 은혜다라는 말은 생명의 완성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신비로운 방식)으로 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을 설정해 놓고, 하나님이 그것에 맞게 구원해 주시기를 원한다. 이것이야 말로 구원을 날(공짜로)로 먹으려 하는 놀부 심보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가 있다. 구원은 종말론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구원을 열망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고 상정해 놓은 구원을 갈망하며 기도한다.’ 결혼하고 싶은 처녀나 총각은 자신이 원하는 신랑감이나 신붓감을 상정해 놓고 기도한다. 취직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직장을 상정해 놓고 기도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원하고 있는 것을 성취해 주시기를, 즉 자기의 뜻대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런데, 우리가 설정해 놓은 구원의 방식이 진짜 우리를 구원하는가?

 

결혼 하기 전 청춘 남녀는 너 없으면 못살아.” 그러다, 결혼생활을 하다가, “이제 너만 없으면 살겠다고 한다. 취직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이 회사에 들어가게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했다가,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서 회사를 퇴사한다. 요즘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이미 퇴사한 사람과 퇴사를 꿈꾸는 사람.”  그 회사에 들어가려고 죽어라 공부했는데, 그 회사에 다니면서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퇴사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열왕기하 18장에 가면, 불뱀(놋뱀) 이야기가 다시 등장한다. 히스기야 왕은 남유다의 왕으로 등극해서 산당들과 우상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 그 중에는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도 있었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깨부순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놋뱀을 향하여 아직까지 분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은 놋뱀에 임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놋뱀이 가졌던 신비한 능력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놋뱀이 하나님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인들에게도 심심치 않게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십자가에 무슨 능력이 있는 양, 목에도 걸고 다니고, 차에도 걸고 다니고, 현관에도 붙여 놓고, 집에도 구석구석 달아 놓는다. 십자가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이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을 나타내는 상징일 뿐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지, 십자가에 무슨 구원의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은혜다. 구원은 공짜라는 뜻이 아니라, 구원은 우리가 생각한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임한다는 뜻이다.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신비롭게 우리에게 임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니라”(고전 1:23-24).

 

이 말은 구원이 그들에게 공짜로 임했다는 뜻이 아니라,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 예상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원이 임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인 것이다. ‘구원이 은혜인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원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구원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다.

 

그러니, 너무 삶에 힘 주고 살지 말라. 지금 그거 안 되면 죽을 것 같지만, 결국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구원은 신비한 방식으로 임한다. 그래서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그러니, 일이 좀 안 된 것 같아서 힘들어 하지 말고, 일이 좀 잘 된 것 같다고 들뜨지 말아야 한다.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에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했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은 정도로 아름답고 위대한 일을 우리의 삶에 이루어 주실 것이다. 구원은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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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8. 16:57

통증과 (중보)기도

(에스라 9:1-15)


통증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통증은 나쁜 것이다. 삶의 질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통증을 느끼는 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좋은 것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 죽어가는 줄 모르고 죽는다. 한센병이 무서운 이유는 통증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통증을 못 느끼니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죽어가는 줄 모르고 죽는다.

 

통증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다. 그런데, 통증을 느끼는 범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기독교 영성은 통증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기도는 내가 느끼는 통증에 대한 거룩한 반응이다.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기도를 하지만,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 가운데서도 기도하지 못한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선조들, 영성가들은 하나같이 기도의 삶을 살았다. 그들이 기도의 삶은 산 이유는 그들이 느끼는 통증의 범위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남다른 통증의 범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앙이 성장하면서, , 하나님과 가까이 살면서 잃어버렸던 통증의 감각이 살아난 것이고, 통증을 느낄 수 있는 범위가 점점 더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통증을 자신의 감각으로 실제적으로 느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에스라이다.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이었다( 7:11). 에스라는 제 1차 포로귀환을 이끈 스룹바벨에 이어, 2차 포로귀환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학자 겸 제사장으로서 무너진 신앙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세우고자 노력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공동체는 무너진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며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바로 세워 나가는 듯 보였다. 그들은 포로에서 귀환하여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을 보고 울었으며, 나중에 다시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 즉 스룹바벨 성전의 규모를 보고, 그 옛날 웅장했던 솔로몬 성전을 추억하며 주저 않자 울었다. 그만큼 그들은 마음 속에 여러 가지 한이 서려 있었으며, 예루살렘 재건과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재건을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일에 대한 보고가 오늘 본문이다. 방백들이 에스라를 찾아와 전해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고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9:2-3)

 

한 마디로 얘기해서,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증한 이방인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잘못인가?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독특한 자기 이해의 입장에서 봐야 하지, 다른 시선으로 보면 현대 사회의 문화적 교류에 반하는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요즘엔 국제사회 간에 문화 교류가 활발하다. 그 문화 교류 안에는 본문에 등장하는 단어로 표현하면, ‘통혼(intermarry)’도 포함된다. 요즘엔 인종들 간에, 다른 국적 사람들 간에 통혼이 자유롭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UN의 권고에 의하면, 한국 사회가 통혼에 대해 너무 보수적이라며, 통혼에 대한 관념을 바꿀 것을 권했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 통혼에 대하여 나쁜 인식을 가진 사람은 없다. 우리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에스라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간의 통혼을 가증한 것으로 보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바벨론 포로 경험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이후, 왕을 비롯관 고관들과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3차례에 걸쳐 강제로 이송되었고, 다른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진 경험을 했다. 지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자신들이 왜 이렇게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왔는지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한다. 여기서 이들이 신학적 반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신앙인이라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도 어떠한 일을 겪고 나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발생했는지, 신앙과 연관하여 돌아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학적 반성을 통해 낸 결론은 이것이다.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기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계약(covenant)’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즉 선민이 된 것은 하나님과의 계약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시내산 계약이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게 했다. 그런데, 그 계약은 조건부 계약이다. 이스라엘이 그 계약에 충실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지만, 그들이 그 계약을 어기면, 그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 가운데는 하나님이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이미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고 그들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말 것에 대한 계약이 있다. 이것을 헤렘법이라고 하는데, 그 계약을 보면 이렇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7:2-4).

 

에스라가 통혼에 대한 소식을 듣고 대노하며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은 이유는 이스라엘이 또 다시 계약을 파기하는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유가 계약 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약 파기의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이렇게 반복되어 일어나는 것일까?

 

나는 위에서 신앙의 성장, 영적인 성장, 즉 영성은 통증의 회복이라고 했다. 통증의 회복은 두 방향에서 일어나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는 통증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의 아픔을 느끼는 통증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피조물)의 통증을 느끼는 능력이 부족하다. 일례를 들어, 옛날에 잔치가 열리면 돼지나 소를 손수 잡았다. 나도 어렸을 때 교회에서 결혼식이 있을 때 교회 앞마당에서 돼지를 직접 잡는 것을 보았다. 돼지를 목만 내놓고 못 움직이게 만든 뒤, 해머(망치)로 돼지의 머리를 힘껏 내리 치는데, 바로 그때 돼지는 그야말로 돼지 목 따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돼지의 비명, 즉 고통의 표현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돼지를 잡아 먹겠다는 일념 하에, 돼지의 고통의 비명 소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욕망이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욕망이 강하면 공감능력이 떨어진다.

 

또한, 나무를 자를 때도 마찬가지다. 생나무를 자르면 진물이 나온다. 그것은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의 표현이다. 그들은 진물을 내뿜으며 소리를 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나무가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한다. 물고기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다. 물고기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서로 소통할 정도로 영리한 미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고기를 낚시하고 그 물고기를 칼로 손질 할 때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한다. 우리의 감각이 그만큼 손상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스라가 통혼에 대한 소식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아 있었던 이유는 그 통혼 소식이 그를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에게 실제적인 아픔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저녁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기도했다. 그 기도의 핵심은 죄에 대한 용서의 간구이다.

 

에스라가 기도하며 죄에 대한 용서를 빈 이유는 죄가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고,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죄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통증이고, 인간을 아프게 하는 통증이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 통증을 못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안 아프니까. 아무 문제 없는 줄 알고.

 

그러나, 에스라는 달랐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죄가 자신의 죄로 다가왔다. , 그들의 죄 때문에 자신이 아팠다. 그리고, 그는 죄가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것을 느꼈고, 그 죄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아프게 할 것이라는 느꼈다. 아주 실제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그는 속옷과 겉옷을 찢지 않을 수 없었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지 않을 수 없었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앉아있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에 고통이 가해지면, ‘아이구 아버지하면서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뿐이다. 하나님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 또다시 가나안 족속과 통혼을 저지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좋은 대로 가나안 족속들과 또다시 통혼했다. 이것 자체가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에게 통증이 있는데도 그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니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죄들이 난무하고 있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죄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자들이 희생당하고 고통당하고 있는데도, 그 통증을 실제적으로 느끼지 못하니까, 중보기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기적이고 연약한 존재들이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흔(stigma)이라는 것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에 난 창자국의 상처가 신자의 몸에 그대로 새겨지는 것을 말한다. 이 외에도 가시관 때문에 생긴 이마의 상처, 그리고 채찍질 당할 때 생긴 등의 상처, 또한 피눈물과 피땀도 성흔의 범주에 들어간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성흔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초상이 그려지기 시작한 13세기 이후부터 생겨난 현상이다. 성흔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성인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시에나의 카테리나(Catherine of Siena, 시에나의 캐서린)이 있다.

 

성흔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고통을 그대로 육신에 채우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도 성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성흔, stigma)을 지니고 있노라”( 6:17).


물론, 우리 모두가 성 프란치스코처럼, 시에나의 카테리나처럼,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육신에 성흔을 가질 수는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의 죄 때문에 느끼는 고통과 죄를 통해 고통당하는 이 세상의 무고한 자들의 그 모든 고통을 다 실제적으로 느낄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괴로워서 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통증을 느낄 수 있는 범주가 제한적인 것은 오히려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고통과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의 고통을 실제적으로 다 느끼신다. 그래서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의 간구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리가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교회)이라면, 우리는 부단히, 하나님의 통증과 이웃의 통증을 실제적으로, 희미하게 나마 느끼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갖는 최소한 양심이고 예의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성숙이고 영성의 심화이다. (중보)기도는 통증의 회복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통증과 이웃의 통증을 나의 것으로 삼아, 그 통증의 치유를 위한 생명을 향한 몸부림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의 통증 때문에 기도하는 행위는 구원 받은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단히 기도의 자리로 밀어 넣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신비한 방식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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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5. 13:45

무심과 단순

(출애굽기 20:1-17)


구원이 뭐에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하겠는가? 어떤 이는 “10원 빼기 1원이요.”라고 어쭙잖은 농담을 건네기도 할 것이다. 구원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구원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를 가질 수는 있어도, 구원에 대한 실체는 알 수 없다. 구원은 종말론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구원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조차도 잘 모른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구원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한다. “구원은 예수 믿으면 받는 거야.” 구원을 예수, 그리고 믿음과 연관시켜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구원의 개념이나 실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구원의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생명의 완성이다. 이것이 구원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을 주셨다. 그런데, 어떠한 것 때문에 완전한 생명에 금이 갔다. 그 어떠한 것이 무엇인가? 죄이다. 죄란 생명의 완전성을 헤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죄악이란 생명을 위협하는 부정한 것이다. 죄가 나쁘고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헤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죄 짓지 말아야 하고, 죄를 멀리 해야 하고, 죄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실존(Anthropology)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인간에 대한 비관론(Pessimism)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에 대한 낙관론(Optimism)이다. 비관론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이야기 한다. 인간에게는 죄를 극복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낙관론은 인간에게서 희망을 본다. 인간에게는 죄를 넘어서는 그 어떠한 힘과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비관론이든 낙관론이든 인간의 실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이다. 생명이 불완전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죄를 극복할 힘이 없다는 비관론도,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는 낙관론도 어떻게 구원 받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성경은 생명책이다. ,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시다. 성령은 생명을 존재케 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함께 읽은 십계명도 생명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온통 생명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성경은 생명책이다.

 

율법은 단순한 법조항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을 향한 몸부림이다. 율법에는 율법을 통해서 생명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유대인들의 희망이 담겨 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생명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율법이 어느 순간 생명을 못살게 구는 존재가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 법이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손 마른자(중풍병자)를 고쳐주신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법을 어겼다며, 예수를 죽일 놈 취급한다. 그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27-28).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약간 다른 형태로 나온다. (안식일에 배고파서 밀이삭을 자른 이야기도 함께 나온다.)

 

율법은 생명의 완성을 위한 몸부림인데, 어느 순간부터 율법이 그 율법을 관리감독하는 자들의 권력을 지키는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건강하고 배부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손 마른 자나 배고픈 자는 안식일을 지킬 힘이 없었다. 그들의 생명은 크게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이 생명의 완성을 위한 몸부림이라면, 그리고 그 율법을 관리감독하는 자들이 그것을 깨달아 알았다면, 그들은 손 마른 자와 배고픈 자의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안식일에 몸이 아픈 자를 고쳐 주시고, 배고픈 자를 먹여 주신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인 이유는 그가 율법에 담긴 희망을 성취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여러분에게 십계명은 무엇인가? 생명의 완성을 향한 몸부림인가? 아니면, 여러분을 구속(拘束,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하는 율법 조항인가? 우리는 흔히, 율법을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힘들고 어렵게 만들고, 귀찮게 하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율법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율법에 대한 오해이고 무지이다.

 

십계명은 10가지의 계명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사실 단 한 가지이다. 모두 생명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크게 세 가지로 그 얼개를 나눌 수 있다. 1계명부터 3계명과, 4계명, 그리고 5계명부터 마지막 10계명까지가 그것이다. 우선 1계명부터 3계명의 의미를 살펴보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기서 핵심은 우상이다. 우상(Idol)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헤치는 힘(power)’을 말한다. 반대로, 하나님은 생명을 살리는 힘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다. 가나안 전쟁이 그것이다. 특별히 여호수아서를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고자 가나안 족속들과 피 튀기는 전쟁을 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일 것을 명하는 이야기를 본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봐야 하는 문제이다. 가나안에는 각 부족마다 섬기는 신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바알, 아세라, 아스다롯, 몰렉, 밀곰, 다곤 등이 있다. 그들은 이러한 신들을 잘 섬겨야 그 땅에서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들을 섬길 때 인신제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킹콩 영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킹콩이 사는 섬의 부족은 킹콩을 잘 섬겨야 자신들이 멸망하지 않고 번성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인신제사를 한다.

 

우상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는 일,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에 대한 경고이다.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는 일은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결단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우상숭배하면서 산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며 사는가? 또한 우리는 어떤 이의 이익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당하고 사는가? 우리는 우상숭배하면서, 그 우상에 저항하지 못하고 투항하면서 산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상숭배 속에서 사는 불쌍한 존재이다. 자기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치지 말라. 남의 이익의 희생자가 되지 말라. 그러한 일이 있다면 저항하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십계명의 제1계명에서 3계명을 어기며 사는 것이다.

 

두번째로, 4계명을 살펴보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안식일은 쉬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기억할 때 일어나는 은혜이다. 모세오경에는 두 개의 십계명이 나온다(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 물론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부분이 있다. 4계명인 안식일에 대한 것을 말하면서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지, 그 이유에 대한 것이 다르다.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20:11).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창조때문이다.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고백하는 행위이다.

 

이와는 달리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5:15). 신명기에서 말하는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구원때문이다. 안식일은 구원의 하나님을 신앙고백하는 행위이다.


창조와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누가 나를 창조하셨나? 누가 나를 구원하는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을 끝까지 책임지신다. 생명을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26-32)

 

누가 내 생명의 주인인가?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인가? 그렇다면, 왜 안식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얼마나 소진하고 있는가! 안식일에 들로 산으로 놀러가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쉬는 것이다. 그 신앙고백이 철저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자기 스스로 생명을 보장하기 위해서 생명을 못살게 구는 죄에 상태로 우리를 밀어 넣고 말 것이다.

 

나머지 계명( 5계명 ~ 10계명)은 모두 이러한 신앙고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5~10계명은 욕심 부리지 말고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이다. 만족과 감사는 공중의 새처럼, 들의 백합화처럼,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때만 가능한 신비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자는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한다.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면서, 얼마나 욕심쟁이로 사는가. 이 타락한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욕심쟁이로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병폐가 이것이다. 우리는 모두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각 사람이 모두 시장(market)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에게 그 가치 외에 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소비력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다. 아주 대단한 발명품이다. 그래서 이 시대는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인의 욕망만 난무하는 타락한 시대이다. 불과 30년 전만해도 집에는 전화기 한 대, TV 한대만 있었다. 그것으로 족하고 행복했다.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누구에게 전화가 걸려 온 지 집안 사람들이 다 알았다. “준식이네 집이죠? 안녕하세요? 저는 준식이 친구 영주입니다. 준식이 있어요?” “준식아 영주한테 전화왔다.” 만약 준식이가 영주한테 전화를 받고 바깥에 나가면, 집안 사람들은 준식이가 누구를 만나러 나가는지 다 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준식이가 집을 나가도 누구 만나러 나가는 지 모른다.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레위기 2523절은 매우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땅을 영구히 팔지 말 것은 땅은 다 내것임이라.”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욕심부리는가. 땅에서 난 소산은 다 주님의 것이다. 땅에서 나지 않은 것으로 만든 것이 어디 있나.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물건은 모두 땅의 소산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핸드폰도, 자동차도, 집도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내 것이라 생각하며 얼마나 욕심부리고 치사하게 굴며 사는가.

 

우리가 타락한 자본주의 사회, 개인을 시장으로 보고 소비력이 없는 사람은 인간 취급도 안 하는 사회에 저항하는 방법은 성령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았던 것처럼 내것을 내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신앙고백하면서, 만족하고 감사하며,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지금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양극화 문제나, 3세계의 가난의 문제는 결국 우리가 제 5~10계명을 잘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시 한 편을 나누고 말씀을 마치려 한다. 이병률 시인의 <이 넉넉한 쓸쓸함>이라는 시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는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십계명의 말씀과 관련하여, 나는 이 시 중에서 다음 시구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무심함을 / 단순함을 /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우리는 무심하지 못하고, 단순하지 못해서, 탐욕스럽고 욕심이 많아서, 우리는 살지도 버티지지도 못하고 먼지처럼 쓸모 없어진다. 참으로 비극이다.

 

무심하고 단순하지 못나니, 우상을 숭배한다.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남의 생명을 헤친다. 무심하고 단순하지 못하니,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못살게 굴고 소진한다. 무심하고 단순하지 못하니, 우리를 끊임없이 욕심쟁이 만드는 이 사회에 저항하지 못하고 투항하여 남의 것을 탐하고 차지하느라 은밀한 죄를 지으면서 산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완성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생명의 완성을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신의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 욕심부리거나 염려하지 말라는 것을. 생명의 완성자이신 하나님만 바라보면, 다른 것들에는 무심하게 된다는 것을. 생명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안다면, 단순하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십계명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깨달음을 얻고, 우리의 생명을 완성해 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무심함과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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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3. 2. 17:22

용서를 택하라

(열왕기하 5:1-14)

 

한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순신 장군 때문에 훌륭한 장군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 중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에 많은 흥미를 느끼고 그 이야기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한다. 특별히, 높은 지위에 있거나, 몸이 아픈 이들에게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많은 희망을 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아픈 현실에서 구원 받기 위해 지푸라기 한 가닥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와 동일시한다. 그래서 그들은 나아만 장군처럼 행동한다. 다름아닌, 순종이 그것이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체면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고통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갖는다. 그리고 그 방법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 또한 감사해 한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매혹적인 것은 사실이나 그 이야기는 좀 더 큰 틀에서 봐야 한다. 오늘 우리는 나아만 장군 이야기 속에 발견되는 평화를 이루어가는 방식에 대해서 주목해 보려고 한다.

 

나아만 장군의 나라, 아람과 이스라엘은 서로 적대관계였다.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없었다. 두 나라는 전쟁을 했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2).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전쟁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비극이다. 우리는 나아만 장군보다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긍휼하고 정의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실제로, 나아만 장군의 아내의 몸종인 어린 소녀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나아만 장군을 가까이서 본 어린 소녀는 나아만 장군이 가지고 있는 삶의 아픔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다. 나아만 장군은 크고 존귀한 자였으나 치명적인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불치병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말 성경에서는 그가 나병을 앓았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나병이 아니라 악성 피부병이다. 만약 그가 나병을 앓았다면 분리 수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리 수용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나아만 장군의 고통을 본 어린 소녀는 장군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3). 전쟁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자기에게 고통을 가한 자에게는 저주를 퍼붓는 법이다. 그런데, ‘어린 소녀는 원망보다는 용서를 택한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오는 지를 보면, ‘어린 소녀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어린 소녀의 말을 들은 나아만 장군은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펼친다. 왕을 만나 적국에 가는 것을 허락 받고, 선지자에게 줄 선물로 가득 마련해, 자기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러 간다.

 

이 이야기의 중심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왕이 아람 왕의 편지를 받고 두려워하자, 사신을 보내 이스라엘의 왕을 안심시키는 엘리사의 말에서 발견된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8).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선지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 선지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는 일을 한다. 나아만 장군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이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 사람이므로 아람 신의 존재를 알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병을 고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온 이유는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며, 자신의 병을 고치는 일에 엘리사 선지자가 화려한 제의를 행하고, 자신에게 엄청난 일을 요청할 것을 예상하며 갔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병 고침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 고치는 방법이 너무 보잘것없었다.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10).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쉬운 것도 못한다. 오히려 화를 내며 돌아선다. 만약, 그에게 현명한 부하들이 없었다면, 그는 병도 고침 못 받고, 하나님을 아는 기회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마음 내키지는 않았지만,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다. 그랬더니, 정말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 일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어린 여자의 용서의 마음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사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6 23절에서 끝나는데,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된 아람은 이스라엘과 섣부르게 전쟁을 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의 도발 계획이 매번 수포로 돌아가자, 아람 왕은 나아만 장군을 스파이로 의심하지만(명시적으로 나아만 장군을 의심했다고 나오는 것은 아니나, 정황상 그렇다),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엘리사의 존재를 아람 왕에게 알린다. 그리고, 아람 왕은 엘리사를 죽일 계략을 꾸민다.

 

자기를 죽이러 온 아람 군대를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사마리아성으로 유인한 엘리사는 그들을 죽이고자 한 이스라엘 왕에게 그들을 죽이지 말고 살려주라고 말한다.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왕하 6:22).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아람 군대가 썼던 방법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을 선택한다. 아람 군대는 포로를 자신들의 노예로 데리고 갔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랬더니,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가 생겼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왕하 6:23).

 

물론,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군대를 데리고 사마리아를 치러 올라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는 나아만 장군과 그의 왕이 살아 있는 동안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있는 동안은 그 나라 사이에 평화가 존재했다.

 

평화는 용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용서가 어떠한 큰 일을 이루게 될지 모른다. 아람의 전쟁포로로 잡혀간 어린 소녀는 주인인 나아만 장군을 용서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를 알려 주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지만,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엘리사는 자기를 죽이러 왔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마리아성에 갇힌 아람 군사들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다.

 

어린 소녀의 용서와 엘리사의 용서는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다. 나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가치를 놓치면 안 된다. 나의 작은 용서가, 또는 힘겨운 용서가 어떠한 위대한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모른다. 다만,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순종(용서)을 들어 쓰실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용서를 선택하라. 그것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선교요,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평화의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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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27. 06:13

내 삶을 깨뜨립니다 (I break my life)

(마가복음 13:37-14:9 (Mark 13:37-14:9))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베다니에 사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가 나오기 전, 유대인 당국자들은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계략을 꾸몄고, 민란이 일어날 수 있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피해서 그 계략을 시행할 것을 결의한다.

Today's story tells us what happened when Jesus ate at the house of Simon the leper who lived in Bethany. Before this story is told, the Jewish authorities was making a plot of "how to kill Jesus," and decided to enforce the plan by avoiding the Passover and Unleavened Bread in which a riot of the people could take place.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은 값비싼 nard(나드)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었다. 그 행위를 보고, 어떠한 사람들은 그 여인을 꾸짖었다. 그것을 팔면 3백 데나리온 정도의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면 좋을텐데,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어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When Jesus ate at Simon the leper's house, a lady brought an expensive nard and poured it on Jesus' head. Seeing the act, some people rebuked the woman. If she sells it, she will be able to get a price of about three hundred denarii, and it would be nice to help the poor with it, but she is wasting it on Jesus' head.

 

이 사람들의 비난대로 그 여인은 정말 잘못된 일을 한 것일까? 그리고 그 여인은 왜 그런 일을 한 것일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여인이 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평가와는 달리 그 여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6). 그 여인이 한 일은 왜 좋은 일일까?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위를 이렇게 규정한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8).

Did the woman really do the wrong thing as these people accused her? And why did she do that? Through Jesus' words, we can see what the woman is doing. Jesus says that unlike people's evaluation, the woman's behavior is not wrong. "She has done good deed to Me" (v.6). Why is she doing so good? Jesus defines the act of the woman as follows. "She has done what she could; she has anointed MY body beforehand for the burial" (v. 8).

 

이것은 그 여인이 한 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그 여인은 정말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일까?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여인은 예수님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이렇게 향유를 부은 것일까? 아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알았을 리 없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는 계속해서 제자들의 무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을 예고할 때마다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This is Jesus' interpretation of what the woman did. But we can ask one question here. Did she really prepare for Jesus' burial? In other words, did the woman know that Jesus would die and poured perfume? No. The woman should not have known Jesus' death. For Mark continues to point out the ignorance of the disciples, and when Jesus preached his death, the disciples did not know what it meant.

 

그렇다면, 그 여인의 행동은 무엇일까? 왜 그 여인은 그러한 행동을 했을까? 그 여인은 분명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기쁨을 맛 본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그가 드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드려서 감사의 표현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일컬어, 예배라 부른다. 예배는 감사의 표현이고, 기쁨의 표현이고, 사랑의 표현이다. 예배는 최고의 감사이고, 최고의 기쁨이고, 최고의 사랑이다.

If so, what is the act of the woman? Why did she act like that? The woman must have been a woman who enjoyed the joy of salvation through Jesus. So the woman came to Jesus and gave thanks to the most valuable thing she could offer. We call this practice a worship. Worship is an expression of gratitude, an expression of joy, and an expression of love. Worship is the ultimate gratitude, the ultimate joy, and the ultimate love.

 

레위기에 보면 제사의 규정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는 기름을 태워서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이다. 요즘은 건강을 생각해서 고기를 먹을 때 되도록이면 고기의 지방 부분을 다 때어내고 먹지만, 옛날에는 고기의 지방 부분이 엄청 중요했다. 고기의 지방을 섭취하지 않으면 지방을 섭취할 방법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고기를 먹을 때 지방이 좀 베어있는 (마블링이라고 한다) 고기가 맛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마블링이 잘 되어 있는 고기를 최상급으로 친다.

In Leviticus, the regulations of the sacrifice are detailed, and the best service to God is a fragrant offering of oil. Nowadays, when we eat meat because we think about health, we take out the fat part of the meat, but in the old days, the fat part of the meat was very important. If they did not eat fat from the meat, there was no way to consume fat. And, when we actually eat meat, meat with a little fat (called marbling) is delicious. So, in Korea, marbled meat is best served.

 

우리는 열왕기상 3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제사를 기억한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 왕에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 뒤, 기브온 산당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그는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린다. 천 마리의 소를 한꺼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무 때나 드리는 것이 아니다. ‘일천이라는 숫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생각할 때,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와 기쁨과 사랑이다.

We remember the offering of Solomon in 1 Kings 3. After Solomon became king of Israel after his father David, he went to the high place of Gibeon and worshiped God. Worshipping there and he give a thousand burnt offerings to God. A sacrifice to bring a thousand cows together is not something that anyone can give, nor is it offered at any time. Considering the meaning of the number "one thousand," one thousand burnt offerings by Solomon are the greatest gratitude, joy, and love that Solomon can express to God.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뒤, 12장에 가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로마서는 온통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논증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논증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만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The apostle Paul goes to chapter 12 after he preaches the gospel of Jesus Christ in Romans. "Therefore I urge you,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b]spiritual service of worship." (Romans 12: 1). In Romans, Paul argues all over who is Jesus, why Jesus is the Christ, and what it means. Then, he emphasizes that Jesus Christ, whom he has argued, is worthy of our worship.

 

한 여인은 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고, 그가 바로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그래서 그 여인은 자신이 가지 최고의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예배했다. 물론 그 여인은 자기 자신이 한 행동인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헌신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 분이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A woman has suffered a lot of hardships while living. However, the woman met Jesus one day and realized that he was the Messiah (Christ). The woman was able to start a new life through Jesus Christ, and she worshiped Jesus with the best of things. Of course, she did not know that she was preparing for the burial of Jesus, but she eventually did with God’s grace. God is doing great things through our devotion in ways we do not know. We do not know all the will of God, but we do our best to love God.

 

내 삶을 깨뜨립니다라는 고백은 한 여인이 값비싼 나드를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처럼,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드리겠다는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드려 예수님을 예배하겠다는 최고의 감사이고, 최고의 기쁨이고, 최고의 사랑이다. 본문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은 최고의 것을 드려 예수님을 예배한다.

A confession that "I break my life" is that of faith that will give our lives to Jesus just as a woman broke and poured over the expensive nard to the head of Jesus. This is the ultimate gratitude to give our lives to worship Jesus, the ultimate joy, and the ultimate love. As seen in the text, those who do not know who Jesus is are trying to kill Jesus, but those who know who Jesus is worship Jesus by offering the best.

 

오늘 우리는 함께 모여서 예수님을 예배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메시아(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한 여인이 가장 값진 것을 깨뜨려 예수님을 예배한 것처럼, 우리의 삶을 깨뜨려 예수님을 예배한다.

Today, we gather together to worship Jesus, because we are the people who know who Jesus is. Jesus is the Messiah (Christ) who saved us. So we break our lives and worship Jesus Christ just as the woman worships Jesus Christ with the most valuable thing in the Bible.

 

오늘의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쓰여질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최고의 감사, 최고의 기쁨, 최고의 사랑을 담아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의 예배를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배 드리는 이 순간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자. 주님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

We do not know how today's worship will be used for the glory of God. However, if we worship with the highest appreciation, the highest joy, and the highest love, God will receive our worship and will use our worship for His glory in a mysterious way. Therefore, let us rejoice and enjoy this moment of worship. The Lord works through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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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22. 16:28

듣는 마음과 선악 분별

(왕상 3:1-15)


사람은 기본적으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속임수에 넘어가 먹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선악을 알게 하는 능력을 인간에게 가져다 주지 않았다. 그것은 뱀의 속임수였다. 그리고, 선악을 아는 능력은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뱀은 인간의 욕망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욕망을 이용하여 인간이 죄를 짓도록 유도한 것이다.

 

좀 더 말하자면,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는 하나님의 고유 능력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말하는데, 선과 악이 따로 존재한다기보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좀 불합리해 보이지만, 우리의 눈에 보기에 선한 것도 하나님이 악하다고 판단하면 악한 것이고, 우리의 눈에 보기에 악한 것도 하나님이 선하다고 판단하면 선한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개념인데, 자칫 잘못하면 오용되기 십상이기도 하다. 일례를 들어서, 사무엘하 11~12장은 다윗의 죄와 나단의 지적, 그리고 다윗의 회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요즘 실정법에 의하면, 다윗은 간통죄와 살인교사죄를 범한다. 그런데 다윗은 구속되거나 실형에 처해지지 않는다. 다만,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우화를 통해 그의 잘못을 지적할 뿐이다. 물론, 나단 선지자의 책망에 다윗이 회개했다는 진술이 나오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때, 다윗의 회개가 그의 법적 책임을 피하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me too 운동은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도 사회 곳곳에서 미투 me 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나도 당했다는 고발은 피해자의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법정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지기까지, 당한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 가해자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거나 피해자에게 제 2차 피해(합의 하에 진행된 일이라는)를 가하는 방식을 통해 문제 자체를 흐리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보다 더 헷갈리고 당황스러운 상황은 가해자가 스스로 용서 받았다고 선포하는 일이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아이를 죽인 가해자는 감옥을 찾은 아이의 엄마에게 나는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선언을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리고, 최근 안태근 검사 간증 사건을 통해 보듯이, 그도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간증집회를 통해서 선언하는 것이 또 하나의 예이다.

 

위의 상황이 바로 회개와 용서가 오용된 경우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가해자 중심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 회개는 가해자가 하는 것이고, 용서도 가해자가 받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성경에 나와 있는 회개와 용서의 언어는 가해자 입장에서는 복음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피해자가 무시된다는 것이다. 피해자 입장에서 성경에 나오는 회개와 용서의 언어는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는 심판을 받아야지, 회개를 통해 용서를 받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회개를 통해 용서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 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가해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란 그가 피해자에게 입힌 상처를 심판 받는 것이다. , 가해자에게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졌을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분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인간에게는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근 문학계에서는 고은 시인의 불의한 행동의 여파로 혼란에 빠져 있다. 수원 시와 맺은 협정이 파기되었을 뿐 아니라, 수원 시에서 제공한 집에서 고은 시인은 방을 빼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교과서 제작 업체들은 교과서에 실린 고은 시인의 시를 걷어내는 작업을 고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 왕의 불의한 행동을 보면서도 여전히 다윗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편을 성경에서 걷어내거나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애독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성경은 왜 다윗 왕의 치부를 기록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최고의 신앙인으로 추앙하는 것일까?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의 원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그것이 다윗에게 드러나고 있다. 다윗은 비록 불의한 행동을 했지만, 회개를 통하여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 상식선에서 이해하면, 다윗은 간통죄와 살인교사죄로 처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절대적 주권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다윗은 여전히 의인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이야기에서 솔로몬이 간구하는 것은 보통 엄청난 것이 아니다. 솔로몬의 기브온 산당 제사 사건은 여러 가지를 말해 준다. 우선, 그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은 그가 아버지 다윗의 신앙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새로운 왕이 된 솔로몬에게는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 제스쳐이다.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되고 있는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의 왕위는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니었다. 솔로몬이 왕 위에 오르기까지 전개된 살얼음판 같은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 준다. 그는 수많은 왕자들을 물리치고 왕위에 앉게 되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 입증이었다. 기브온 산당 제사는 그러한 갈망에 대한 성취이다.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사람들은 그 제사를 받은 하나님의 반응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응답을 하신다. 성경 기자는 이렇게 전한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그 날 밤에 꿈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하셨다고 한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Ask what you wish me to give you?)” (5)

 

하나님 앞에서 솔로몬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어 자기를 작은 아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또한 고백한다. 그러면서, 한 가지 더 특징적인 고백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선악을 분별하는 것재판을 연결시킨다. 듣는 마음이 있어야 선악을 분별할 수 있고, 그래야 주의 백성을 재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요구이다. 보통 사람은 장수와 부, 그리고 복수를 간구한다. 지극한 인간의 마음이다. 오래 살고 싶고, 잘 살고 싶고, 자기에게 못되게 군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게 인간의 평범한 마음이다. 사실, 우리의 간구의 대부분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솔로몬이 구하는 듣는 마음선악 분별은 엄청난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성이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보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속임수에 넘어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겠다는 욕망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은 곧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솔로몬의 욕망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솔로몬이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얻고 싶은 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의 성취라기보다는 자신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이었다. 실제로 자신이 간구한 것이 성취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기브온 산당에서 드린 일천 번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것만으로도 솔로몬은 자신의 왕위를 굳건하게 할 수 있었다.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얻는 지혜를 가지고 통쾌한 재판을 하고 있지만, 결국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원인 또한 솔로몬의 죄악 때문인 것을 확인한다. , 우리가 아무리 솔로몬처럼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분별하려고 한다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렇다고, 우리가 듣는 마음을 가지고 선악을 판단하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우리는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판단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이고 능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삶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선악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더욱더 가까이 해야 하는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윗처럼, 솔로몬처럼 제단을 끊임없이 쌓는 것이다. , 끊임없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지혜(듣는 마음과 선악 분별)를 간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실하게 하는 자는 선악을 분별하여 평화를 누릴 것이고, 이것을 불성실하게 하는 자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여 평안치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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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22. 16:25

광야로 가자

(마가복음 1:12-15)


우리가 하도 성경 이야기를 들어서 그렇지 성경의 세계는 참 낯선 세계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중동의 세계를 잘 모른다. 중동은 한국 사람이 가장 낯설어 하는 문명이다. 그래서 다른 문명은 잘 받아 들이는데, 이슬람 문명은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중동의 문명은 기본적으로 광야 문명이다. 낙타가 대표적인 예인데, 낙타만큼 광야(사막)에 적합한 동물이 없다. 오늘 말씀 제목이, ‘광야로 가자이지만, 우리는 이게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다. ‘광야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광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약간 이해라도 하지만,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광야라는 개념을 갖기 힘들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정말로 아름다운 시이지만, 현실성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광야에서의 목축업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그리고,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성경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는 이야기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간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음성을 들려주신 후, 어떻게 그를 광야로 몰고 가시는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나, 의문이 든다. 사랑하는 아들인데, 다른 좋은 곳에 가서 융숭한 대접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하필이면 광야인가?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Midbar)이다. 이는 히브리어의 mi’다바르dabar’의 합성어이다. 히브리어로 다바르(dabar)’말씀이라는 뜻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단어를 더 보자. 히브리어로 성전은 미크다쉬(Mikdash)이다. 이는 히브리어의 mi’거룩을 뜻하는 카도쉬(kadosh)’의 합성어이다. , 히브리어에서 어떠한 단어 앞에 mi’자가 붙으면, 그 단어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뜻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거룩함(카도쉬)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성전(미크다쉬)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이 임하는 곳이 광야(미드바르)인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광야의 개념과 고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광야의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광야로 나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요,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성취이다.

 

출애굽기서에 보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힘든 인생을 살았다. 노예로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인생을 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노예의 신세를 벗어나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된 것은 그들이 출애굽하여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이다.

 

개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의 인생을 보면 알 수 있다. 모세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된 것은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나일 강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는 왕궁에서 성장한다. 모세는 자라나면서 자기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의식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왕궁 밖에서 불의한 장면을 목격한다.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본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과 동족인 히브리 사람을 위해서 애굽 사람을 쳐 죽인다. “그렇게 하면 너한테 칭찬 받을 거라 생각했어.”

 

그 다음 날, 모세는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는 것을 목격한다. 그래서 모세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시시비비를 가리려 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모세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런 나도 죽이려느느냐?” 이 말을 듣고, 모세는 결국 두려움에 사려 잡혀, 왕궁에서 빠져나와 광야로 도망친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그가 왕궁에서 왕의 교육을 받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미디언 광야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 양을 치고 있을 때, 광야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이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다윗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같은 것을 목격한다. 블레셋의 위협 때문에 세워진 왕 사울은 여느 때와 같이 블레셋과 대치 상황에 있었다. 그런데,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가 버티고 있어서, 이스라엘은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사울은 백방으로 적장과 싸워 이길 이스라엘의 장수를 찾고 있었지만, 아무도 거인 골리앗과 상대하겠다는 장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 심부름을 갔던 목동 소년 다윗이 사울 왕에게 나아가 적장 골리앗과 싸우게 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내어주지만, 다윗은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이 평소에 즐겨 쓰던 물매와 돌 다섯개를 주워 가지고 골리앗 앞에 나선다. 그러면서 다윗은 이렇게 외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5, 47).

 

다윗은 골리앗을 넘어뜨린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한 것을 무슨 군사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다윗은 평소 광야에서 양을 치며, 곰과 사자가 덤빌 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물매로 그들을 물리쳤고, 광야에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배웠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 다윗은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키웠다. 그리고, 광야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법을 배웠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적으로 가장 혼탁한 시대를 살았던 엘리야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지켜내기 위하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 뒤에, 이세벨의 살해 위협 소식을 듣고 도망치던 엘리야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던 사명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도망치던 중간에 탈진하여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한다. “자기 자신이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그렇게 죽기를 간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루만져 살리신 후, 그 길을 계속 걸어가게 하여, 결국 엘리야는 광야 깊은 한 곳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영적인 침체에서 회복하여 새로운 사명을 받고 세상으로 나시 나온다.

 

모세가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것은 왕궁 교육 때문이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다윗이 아무도 이기지 못했던 골리앗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군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영적 침체에 빠져 죽기를 간구할 정도로 힘든 상황 속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여 모든 인류의 구원의 소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의 이야기가 무수히 나온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광야는 물리적 장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다. , 신앙의 선조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광야로 나가거나, 광야로 불러내어졌다.

 

우리는 자녀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온갖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마땅하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온갖 좋은 곳을 다 구경 시켜주고, 좋은 곳을 다 데리고 간다. 할 수 있거든, 더 많이 하시라. 그러나, 우리가 광야의 영성으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아이들을 광야로 보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자녀들이 인생을 살면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중요한 삶의 문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문제는 도서관에서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다 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을 만나서 조언을 구한다 해도 풀지 못한다. 광야로 나가, 적막한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만나야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

 

현대인들의 삶이 불안하고 힘든 이유는 삶 속에서 광야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마땅히 존재해야 할 광야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화려한 불빛의 도시만이 자리 잡고 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는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바벨에 세워진 성읍과 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들의 지혜로 살아가겠다고 하나님을 대적한 인간들의 교만을 고발한다.

 

실제로 도시의 삶 자체는 먹고 사는 데만 몰두하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광야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도시의 문화가 그것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 일례로, 지난 수요일은 214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재의 수요일로 지키며 사순절에 들어갔음을 인식하고 공포해야 하지만, 그날은 발렌타인데이였기 때문에 교회보다는 레스토랑이 붐볐다. 그리고, 사람들은 재를 생각하기 보다는 초콜릿을 훨씬 더 많이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광야로 나가야 하는 절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절기이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리스도의 이 선포가 진지하게 들린다면, 성령께 간구하라. “나를 광야로 데려가 주세요!”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새창조의 역사가 삶 가운데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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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13. 14:19

갑절과 겉옷

(왕하 2:7-14)


오늘은 산상변모주일이다. 복음서(마태 17:1~9, 마가 9:2~8, 누가 9:28~36)에서 전하고 있는 산상변모 사건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제자도에 대한 제시이다.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올바르게 파악된 예수가 우리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이어서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한다. 몸으로서 교회는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 우리는 과연 그 길을 잘 걸어가고 있는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평생에 걸쳐서 묵상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숙제 중의 하나이다. 오늘 우리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을 몇 가지 나눌 것이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척도는 유일신 신앙에 있다. 한마디로, 그들의 신앙의 척도는 십계명의 제 1계명을 삶 속에서 얼마나 인정하면서 사는냐에 달려 있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20:3).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은 왕에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제 1계명을 무시하며 살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합 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이다. 이세벨은 기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여인이었다. 시돈 왕 엣바알의 딸이었는데, 아합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 엣바알은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는데, 역모를 일으켜 왕이 된 인물이었다. 엣바알의 뜻은 바알과 함께 한 자이다.

 

바알신에 대한 절대적 신봉자였던 엣바알의 딸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하여 이스라엘 왕실의 신앙을 허물기 시작했다. 바알의 사당을 전국 곳곳에 세우고, 바알의 짝 신이라고 숭배되었던 아세라상을 만들어 바알 신당에 두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한 아합과 이세벨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자기의 욕심에 따라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다.

 

아합과 이세벨이 엘리야 선지자에 의해 비난 받은 이유는 그가 단순히 나봇이라는 사람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아서가 아니다. 그것 자체로도 말할 수 없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들이 그런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 배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제 1계명을 믿지도 실천하지도 않았다.

 

엘리야가 한 일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고 타락한 정치권력에 맞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은 일이다. 어느 시대나 정치권력과 맞서는 일은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한 일이다. 엘리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이긴 뒤, 정치권력의 위협 때문에 망명을 해야 했다. 그리고, 엘리야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일이 너무도 힘들어서, 로뎀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간구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아이들의 소꿉장난과 같지 않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토대이신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 자체를 내어놓아야 한다. 그만큼, 신앙은 진지한 삶의 성찰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제 목숨(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생명)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신앙생활이 힘든 이유는 우리가 바빠서 그런 게 아니다. 신앙생활이 힘든 이유는 신앙의 속성 자체가 우리의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중에 열심히 일한다. 기본적으로, ‘먹고 살기 위함이다. 우리가 일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생명을 유지하고 지키는 일은 그 자체가 고된 노동이다. 신앙은 그러한 생명 유지에 대한 심화이다. 신앙은 우리의 생명의 토대가 어디에 있는지를 좀 더 근본적으로 들여다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발견에 근거해서, 우리의 생명을 지켜내고자 하는 열정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토대가 우리의 노동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것은 노동의 가치를 부정하는 진술이 아니다. 노동은 소중하다. 노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먹고 살 수 없다. 그러나 그 노동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잇닿아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노동의 노예로만 살게 될 뿐이다. 생명의 해방은 노동을 열심히 하는 데서 오지 않고, 노동과 하나님을 연결지어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데서 온다. 그럴 때, 우리의 노동은 하나님이 복 주신 즐거운 일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을 모르면 노동은 지겨워진다.)

 

엘리야가 한 일은 단순히 타락한 정치권력과 싸우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엘리야의 노동은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고되고 힘든 일을 잘 마치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는 장면에는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엘리사이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선지자 생도 문하생 중 한 명이었다. 나중에 엘리야의 뒤를 잇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동네 아이들이 그를 놀리던 것을 보면,아마도 그렇게 인기 있는 문하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결국 엘리야의 뒤를 잇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인기 있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엘리야를 끝까지 따랐던 엘리사였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기 전,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강을 두루 돌아다닌다. 그런데, 그 마지막 여정에 끝까지 함께 했던 엘리야의 문하생은 엘리사였다. 그 여정을 전하고 있는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엘리사는 룻기서에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붙좇은 룻과 같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왕하 2:6).

 

요단강에 이르러 이제 하늘로 들림을 받기 전,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묻는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9). 그에 대해 엘리사는 이런 간구를 한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 엘리사의 간구를 엘리사의 욕심으로 보면 안된다. 엘라사의 간구에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한다.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10).

 

여기서 어려운 일이란 엘리야가 엘리사의 간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정녕 네가 내가 지던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느냐?”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엘리야가 했던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생명을 내놓고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엘리사는 지금 스승이 하던 그 일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마음이 짠한 상황이다.

 

갑절이라는 뜻은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욕심의 표현이 아니고 계승의 표현이다. 고대 이스라엘 전통에서 장자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는다. 그래서 장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두배(갑절)를 받는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한 것은, 그가 스승 엘리야의 유업을 이어받은 장자가 되겠다는 뜻이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곳저곳을 다닌 이유는 그의 문하생 중에 누가 자신의 유업을 물려 받는 장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엘리야에게는 50명이 넘는 문하생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멀리 서서 엘리야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엘리사만이 엘리야 곁에서 엘리야의 부르심을 지켜보았다. 결국, 엘리사는 엘리야의 장자가 되어 엘리야가 행한 일을 이어서 하는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엘리야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굉장히 역동적이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물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11). 엘리야의 인생이 어떠한 인생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표현이다. 엘리야의 인생은 에너지와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더 주목해서 보야 하는 말씀은 엘리야의 죽음 뒤에 벌어지고 있는 엘리사의 행동이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죽자 이렇게 소리지른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12). 이것은 이제 자신이 아버지엘리야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으로서의 선지자가 되었다는 것에 선포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행동은 이것이다. “이에 엘리사가 자시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12). 이것은 괴로운 마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버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제 엘리사는 더 이상 이전의 엘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엘리야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되었다.

 

엘리사는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찢어버리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 든다. 이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행동이다. 겉옷을 영어로 ‘mantle’이라고 한다. ‘mantle’에는 겉옷이라는 뜻의 심화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책임지다의 의미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집어 든 이유는 이제 그가 엘리야가 하던 일을 이어서 책임지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신학적으로 다시 말하면, 이것은 엘리사가 엘리야가 지고 가던 십자가를 집어 든 후, 자기가 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선포를 다시 확인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4-25).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책임지고 사는가? 우리는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노동하는가? 우리의 노동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맞닿아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나와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엘리야처럼, 엘리사처럼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게 살고 있는가?

 

흑인해방신학자 제임스 콘은 그의 기념비적인 책 흑인해방신학(A Black Theology of Liberation)에서 이런 말을 했다. No one can be free until all are set free. (James Cone, A Black Theology of Liberation) “모두가 자유롭게 될때 비로소 나도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은 이런 말이다. “상대방에게 자유가 없는데, 어찌 나만 자유를 누릴 수 있나. 상대방이 아직 가난한데, 어찌 내가 부자로 살 수 있나. 상대방이 아직 안식이 없는데, 어찌 나만 안식을 누릴 수 있나. 상대방이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는데, 어찌 나만 구원에 이를 수 있나. 모두가 하나님의 안식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안식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이번 수요일에 드리는 재의 수요일예배를 통하여 사순절에 들어간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가는 여정에 동참하는 절기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의 이유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몸으로 경험하는 절기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신에 채우는 절기이다.

 

우리는 그 절기를 평화 기도회로 시작하려고 한다. 평창올림픽을 통해서 남북간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를 세워 나가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평화 기도회를 하려고 한다. 외신들의 보도에 의하면, 현재 한국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남북관계 개선되면 트럼프 정부와 관계가 소원해질 수 있고, 트럼프 정부와 뜻을 같이 하면 남북 평화가 깨지거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남북 단일팀이 입장할 때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환영했는데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미국의 펜스 부통령의 행동을 보면 현재의 상황이 어떠한 상황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조국,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은혜가 필요한 순간이다.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한국인으로서, 통일을 위한 기도와 노력,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와 노력, 우리의 조국,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보다 더 간절하고 바쁜 일이 있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갑절의 영감과 겉옷을 두른, 십자가의 군병들이다.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을 위해 변화산을 떠나 마을로 내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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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2. 1. 09:46

에벤에셀과 한반도 평화

(사무엘상 7:1-14)

- 북핵문제와 미국의 대응을 걱정하며 - 

 

오랜 시간이 흘러 사무엘이 다시 등장한다. 시간적으로는 20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나온다. 20년 동안의 사무엘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2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건강하게 성장한 것 같다. ‘미스바로 모이라는 사무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이 미스바로 모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부르심대로 성장하는 것은 공동체의 축복이다. 특히나 어려운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사무엘은 사사시대의 끝자락을 산 사람인데, 사시기의 이야기와 엘리 제사장 가문의 이야기, 그리고 법궤를 빼앗긴 이야기를 보면 사무엘이 살던 시대가 얼마나 혼탁한 시대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시대 가운데서도 그 시대를 보듬으며 이겨나갈 복 있는 자를 세워 가신다.

 

그러한 사람은 룻기서와 사무엘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일반 사람들 중에서는 보아스와 룻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복 있는 자이고, 지도자들 중에서는 사무엘이 돋보인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때문에 사회가 혼탁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새로운 세상을 위해 헌신할 당신의 일꾼을 세워 가신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헌신할 일꾼으로 택함을 받는 일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것만큼 인생에서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무엘이 다시 등장하기 전까지의 이스라엘은 매우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시기가 어떠한 시기였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법궤사건이다. 법궤는 원래 성막에 있어야 하는 거룩한 물건이다. 그러나 법궤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엉뚱한 데 가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하지 못하고, 엉뚱한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메타포이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고 다른 것이 들어가 있으니,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는 2절 말씀에 등장하는 사모하니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사모하니라로 번역했지만, 이 말은 히브리어의 나하인데, 영어성경은 이것을 ‘lamented’로 번역하고 있다. , ‘나하울부짖다’, ‘신음하다’, ‘애도하다의 뜻을 지닌 동사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다. “하나님, 못 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탄식(lament)’는 슬픔이 아니라 축복이다. 탄식은 성령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이다. 우리가 탄식할 때 성령은 우리를 대신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부 하나님께 간구한다. 보통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해지면 탄식하지 않는다. 그저 불평할 뿐이다. 불평과 탄식은 질적으로 다르다. 불평은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만 바라보며 그 너머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이고, 탄식은 그 상황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께 손을 뻗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뻗는 손을 결코 놓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이 탄식하자, 하나님은 오랜 세월 준비된 사람, 사무엘을 보내신다. 사무엘의 등장은 이스라엘의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보냄 받은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탄식 가운데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준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3).

 

이게 굉장히 쉬운 말이고, 쉬운 행동 같지만 그렇지 않다. 대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지 모른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아플 때 왜 아픈지 모른다. ‘아파,아파하면서도 왜 아픈지, 그리고 어떻게 그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생명을 잃는다. 그런 현상이 이스라엘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포한 말씀은 쉬운 말 같으나 결코 쉬운 말이 아니다. 그의 선포는 이스라엘이 왜 아픈지, 그 아픔 가운데서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영적인처방전이다. 다행인 것은 이스라엘이 사무엘의 처방전을 받아들고, 그대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탄식은 거짓 탄식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탄식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한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이게 한다. 그들의 결단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다. 미스바에 모여 사무엘과 이스라엘이 한 행동은 기도와 회개였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은 세 가지의 행위를 한다. ‘여호와 앞에서 물을 붓는 행위’, ‘종일 금식하는 행위’, 그리고 자신의 죄를 입술로 고백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물을 붓는 행위는 세례를 연상시킨다. 예레미야 애가에서도 이러한 행위가 나온다.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2:19). 이것을 미루어 보건데, 여호와 앞에서 물을 붓는 행위는 회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들은 종일 금식했다. 금식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이시라는 신앙고백이다. 밥이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이시다. 우리는 금식하면서 이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금식은 단순히 극기 훈련이 아니다. 금식은 무엇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지에 대한 자각이다.

 

미스바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참으로 거룩한 일이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 자복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거룩한 순간에 그 거룩한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등장한다. 블레셋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7).

 

사탄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했던 일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내고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일을 가장 싫어한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끄집어 낸 뒤, 그곳을 잡동사니로 채우는 데 집중한다. 보통 사람은 그러한 사탄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마음의 중심을 잡동사니로 채우고 산다. 그러면서, 자기의 삶이 어지러운 이유를 알지 못한다.

 

바로, 그때 믿음이 없는 자와 믿음이 있는 자의 행동이 갈린다.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된 회개와 믿음이 없었다면, 그들은 블레셋의 공격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걸음아 나 살려라하며 도망쳤을 것이다. 하나님이고 뭐고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고 미스바를 탈출하기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겠다고 결단한 미스바의 이스라엘은 다르게 행동한다. 그들은 두려웠지만, 도망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8).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사무엘은 그들의 부탁대로 온전한 번제를 드리며 기도했다. 여기서 온전한 번제란 그들의 간절함을 표현한 예배라는 뜻이다. 보통 번제를 드릴 때 제물로 바쳐진 짐승의 가죽과 내장은 태우지 않고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여기서온전한 번제를 드렸다는 뜻은 제사장(사무엘)에게 돌아갈 가죽과 내장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다는 뜻이다.

 

간절한 예배와 간절한 기도가 어떠한 능력을 발휘하는지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똑똑히 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간절한 예배와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역사를 이루어 주신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10).

 

간절한 예배와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신비로운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 여기서 신비로운 방식이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큰 우레로 표현하고 있다. 우레는 천둥을 의미한다. (이것에 대한 잘못된 표기는 우뢰이다. 마가복음 317절에 보면,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를 예수님은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는데, 많은 곳에서 우레의 아들우뢰의 아들로 잘못 표기하는 것을 본다.)

 

하늘에서 우레가 발하자,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로 인식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도망치는 블레셋을 벧갈 아래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물리친다. 블레셋을 물리친 뒤, 사무엘은 돌을 하나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그 돌을 세워놓고, 그것을 에벤에셀이라 칭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 가려져서 그렇지, 대한민국의 상황이 풍전등화와 같다. 프럼프 정부는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군사적 행동을 감행할 태세이다. 이는 올림픽을 통하여 한 자리에 모여 평화를 도모하는 세계와 반대되는, 블레셋과 같은 행동이다. 북한이 핵개발을 완성하고, 그 핵무기를 미국 본토까지 실어나를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개발을 거의 완성한 것으로 판단한 미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하여 대한민국을 제껴놓고 독자적으로 북한을 폭격할 태세이다.

 

핵폭탄과 같은 대량 살상무기가 양 진영에 갖춰진 시대에 전쟁은 공멸하는 지름길이다. 전쟁은 절대 안 된다.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국지전과 핵폭탄을 사용하는 전쟁은 그 피해가 질적으로 다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매우 걱정스러울 뿐더러, 대한민국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좁게는 한국 교회가 취해야 하는 자세는 두려움간절함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한마음 한뜻으로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간절한 예배와 기도를 통해 탄식해야 한다. 지금은 한국의 모든 국민이 하나님 앞에서 물을 붓고 온종일 금식하며, 온전한 번제와 기도를 할 때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미국도 북한도 서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한국의 평창이 미스바와 같은 곳이 되기를 소망한다. 올림픽이 에벤에셀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간절한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신비한 방식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 주시기를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신비한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해 주셨을 때, 이스라엘에는 회복과 평화가 깃들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렛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14).

 

조국 대한민국, 한반도의 평화는 다른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의 평화를 다른 사람 손에게 맡길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손으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의 손으로 평화를 이루려면, 한국 교회는 평창 동계 올림픽 기간(29~ 25)을 미스바 성회로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간절한 예배와 온종일 금식하며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탄식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신비한 방식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 주실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한 돌(또는 십자가)을 가져다가 평창에 세우고, 그것을 에벤에셀이라고 칭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여, 한반도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한반도에 평화를 내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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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18. 1. 18. 09:41

나실인 삼손

(사사기 16:23-31)

 

성경이 다른 종교의 경전과 다른 점은 이야기(narrative)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굉장히 중요한데, 진리는 진술되기보다 이야기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진리는 정의할 수 없다. 진리는 그저 이야기 될 뿐이다.

 

성경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 중에서 단연 삼손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아마도, 성경의 이야기 중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이야기를 둘만 꼽으라고 하면, 삼손과 솔로몬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삼손은 힘을 상징하고, 솔로몬은 지혜를 상징한다. 힘과 지혜를 상징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이유는 그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통 사람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투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힘과 지혜를 원한다. 왜 일까?

 

이 세상은 경쟁사회이다.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과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된 사회진화론 (허버트 스펜서)에서는 결국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그것을 적자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고 한다. ‘적자생존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힘과 지혜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삼손의 힘과 솔로몬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손 이야기와 솔로몬 이야기에 열광한다.

 

보통 사람들은 삼손 이야기와 솔로몬 이야기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성경을 읽으며 삼손과 솔로몬에게 주어졌던 힘과 지혜가 자신들에게도 주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삼손에게 주셨던 힘과 솔로몬에게 허락하신 지혜를 주시옵소서!”

 

본문에 등장하는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신을 섬겼다. 다곤은 히브리어의 물고기뜻하는 다가또는 곡물을 뜻하는 다간에서 왔다고 여겨지는데, 블레셋 사람들은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물고기 모습을 하고 있는 다곤신이 풍요와 생산을 주관한다고 믿었다.

 

삼손 이야기와 솔로몬 이야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삼손과 솔로몬에게 주어졌던 힘과 지혜를 간구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풍요와 생산의 신이라고 믿었던 다곤신을 섬기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상숭배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 사람은 하나님마저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는다.

 

삼손은 나실인이었다. 나실인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사람이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그 가정에 자식이 생길 거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그런데, 그 자식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바쳐진) 사람으로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하는 나실인이었다 (13).

 

나실인으로서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20년간 지낸다. 사사가 곧 나실인은 아니다. 사사는 삼손의 이었고, ‘나실인은 삼손의 이었다. ‘은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고, ‘소명이나 사명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직업이라는 말은 소명이나 사명을 어떠한 기능을 통해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은 내적인 일이고, ‘은 외적인 일이다. 이 두 개의 일이 잘 조화되어야 아름답다.

 

나실인으로서 삼손은 외적인 에 대한 일을 비교적 잘 감당했다. 그에게는 엄청난 힘이 있었으므로, 숙적 블레셋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실제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 사람들을 많이 물리쳤다. 그가 나귀 턱 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을 천 명을 죽인 일은 그가 얼마나 힘이 장사고 얼마나 블레셋에게 큰 위협이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일화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의 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여호와의 사자가 전해준 것처럼,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으로서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 말은 다른 말로하자면, 그의 마음이 다른 것에 빼앗기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향하여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것이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삼손의 이었다. 그런데, 삼손은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해내지 못한다. 삼손이 사사로 세워진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부정한 블레셋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삼손의 인생을 보면, 그는 처음부터 부정한 것에 마음을 두었다. 그는 블레셋 도시 중 하나인 딤나에 가서 부인을 얻는다.

 

그 일을 놓아두고 삼손의 부모는 삼손을 만류한다.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이하려 하느냐”(14:3).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삼손은 할례 받지 아니한즉 부정한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 했다.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이 꼬여가며 부지중에 블레셋 사람들을 여럿 무찌르지만, 그것은 나실인과 사사로서의 소명 가운데 일어난 일이기보다는 그런 와중에도 삼손을 들어 쓰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14:4).

 

하나님이 금지하신 일을 기어코 하려고 하는 삼손의 인생은 점점 꼬여갔다. 첫 결혼 시도를 실패로 끝낸 삼손은 계속하여 부정한 것과 관계를 맺는다. 삼손은 결국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문제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삼손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부정한 것과 관계를 맺는 일은 겉으로는 즐거워 보여도 속으로는 패망의 지름길이다.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어야 하는 나실인삼손은 결국 부정한 여인 들릴라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이것 자체가 실패이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나실인삼손의 인생은 그때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블레셋 방백과 들릴라의 꾀에 넘어간 삼손은 자신의 힘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비밀을 누설하게 되고, 그 대가로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두 눈이 뽑히고 블레셋의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셰익스피어의 극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 왕자는 죽느냐 사는냐 (To be, or not to be),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감행하고 죽기로 각오한다. 그래서 <햄릿><오셀로>, <리어왕>, <맥베스>와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의 작품으로 불린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성경의 삼손 이야기도 비극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영이 임하는 은총을 받고 태어난 삼손이었지만, 그 특별한 은총이 무색할 정도로 삼손의 최후는 초라했다. 그는 두 눈이 뽑혀 블레셋의 포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블레셋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블레셋의 다곤 신보다 열등한 신으로 만들었다.

 

본문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에게 제사를 드리며 큰 잔치를 벌인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24). 이 말은 이런 뜻이다.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보다 힘 세고 더 위대하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불러 자기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한 것은 단순히 삼손을 욕보인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욕보이는 것이다. 이러는 와중에도 삼손은 여전히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한다. 블레셋에게 조롱거리가 된 삼손은 마지막 힘을 다해 원수를 갚으려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건물의 기둥에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한 뒤, 여호와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는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28).

 

그리고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고 외친 뒤, 기둥을 무너뜨려 다곤 신전을 주저앉게 만들고, 그 곳에 있던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마감한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평가한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아 있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30).

 

어떤 주석가는 이 구절을 삼손의 인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라고 말한다. 삼손은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는 평가라는 것이다. (생명의 삶 플러스, 201310월 호, 93) 햄릿이 비극인 이유는 그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죽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삼손도 마찬가지다. 그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고 죽는다.


삼손은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 그가 하나님께 마지막 힘을 간구한 이유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의 눈을 뺀 블레셋에게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 삼손 이야기의 진짜 비극은 이것이다. 그는 나실인으로서의 업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삼손의 이야기는 삼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삼손이 살던 사사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여전히 삼손의 힘과 솔로몬의 지혜만을 간구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면서 산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살려 하기 보다는 힘과 지혜를 소유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원한다.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에 집중하면서 사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힘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힘과 지혜가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삼손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은 슬프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31).

 

'소라와 에스다올은 삼손의 인생에 있어 특별한 공간적 배경을 지닌 곳이다. 사사기 13장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13:24-25).

 

나실인 삼손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기 시작한 곳이 소라와 에스다올사이였다. 하나님은 그를 처음 부르셨던 곳으로 다시 불러 들이신다. 그리고, 그곳에 먼저 장사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눕게 하신다.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었던 나실인 삼손은 사는 동안 하나님께 구별된 인생을 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여전히 구별하셔서 처음 부르신 곳으로 불러 그의 아버지와 함께 평안히 눕게 하신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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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