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3. 1. 10:20

극강 휴머니즘 (Extreme Humanism)

(로마서 4: 13-25)

 

요즘 주식 투자 열풍이 불고 있는데, 혹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 있는가? 주식 투자에 관심 없는 사람은 주식 뉴스에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기업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식 투자에 관심이 있고, 어떤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 기업에 대한 소식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왜냐하면, 주식이 오르고 내리는 것이 내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주식이 올라서 돈을 벌면 좋고, 주식이 떨어져서 돈을 잃으면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주식을 샀다는 것은 이제 나의 삶이 그 기업과 연관되었다는 뜻이다.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것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사순절은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절기이다. 단순히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예수의 죽음이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복음이다. 기독교 복음이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기업과 연관을 맺으려면 주식을 사야 하지만, 즉, 주식을 사지 않으면 그 기업과 연관이 없지만, 예수의 죽음은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갖든지, 갖고 있지 않든지 상관없이 나의 삶과 연관이 있다. 그것을 복음의 보편성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그 기독교 복음의 보편성을 받아들이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삶과 연관되어 있는 것을 깨달아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예수의 삶의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나의 삶과 연관시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햇볕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햇볕은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든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든 동일하게 비춘다. 생명체는 햇볕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햇볕의 고마움을 인식한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햇볕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겠지만, 그 고마움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은 햇볕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렇다고 그들이 삶을 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냥 비추이는 햇볕을 받고 살 뿐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기에, 그것이 복음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었는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그 신앙이 어떠한 ‘가르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받아들고 죽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놓아두고 그것의 보편적 의미를 논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소크라테스가 살아 생전에 행했던 가르침에 주목할 뿐이다. 그것도 플라톤이라고 하는 제자를 통해서 재구성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주목할 뿐이다.

 

더 나아가, 인류가 공자라는 인물, 석가모니라는 인물을 성인으로 추앙하며 그들을 기리는 것도 그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 때문이다. 지구 상에 존재했던 그 어느 인물도 그 사람의 죽음이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오직 예수의 죽음만이 ‘문제적 죽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이 무슨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길래, 우리는 사순절기 동안, 즉 40일 동안이나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며 묵상해야 하는가? 40일 동안, 절기를 정해서 예수의 죽음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죽음이 우리 인간에게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일단, 한 가지 질문을 해보고 싶다. 다음 세 가지 진술 중에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진술은 무엇인가? 즉, 가장 믿기 힘든 진술은 무엇인가?

 

1) 무에서 유를 불러내시는 창조의 하나님 (creation from Nothing / God of Creation)

2)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 (God of Resurrection)

3) 죄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 (God of Salvation)

 

사실 세 가지 진술 모두 믿기 쉽지 않은 진술이다. 그러나, 1)번과 2)번은 인간의 현실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믿기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술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3)번이다. 이는 인간의 현실적인 행위와 연관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이 세번째 진술과 관련된 신학적 논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게 왜 문제인가?

 

로마서를 통해 바울은 유대인들이 통념적으로 가지고 있던 신앙 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유대인들의 생각한 의는 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하고 지킴으로써 의로움에 이른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율법을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일인 것 같지만, 현실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 문제를 이렇게 생각해 보면 쉽다. 지금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하고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하고 우주개발 경쟁이 붙었다. 그들의 꿈은 지구가 아닌 우주의 한 곳에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갖춘 행성을 개발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우주 개발에 성공했다고 가정한다면, 사람들은 점점 황폐화되어 가고 있어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지구를 떠나 그들이 개발한 새로운 세계로 가고 싶은 소망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그들이 개발한 우주의 행성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이다. 당연히, 우주의 행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의 탑승권을 구매할 수 있는 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 값은 얼마쯤 될까? 아마도 일반 사람들은 꿈 꿀 수 없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 것이다. 즉, 우주에 있는 또다른 행성으로 가는 일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그림의 떡’같은 이야기이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실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율법을 지킬 수 있느냐, 아니냐는 신앙의 문제, 또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현실의 문제다.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613가지에 달하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오늘 먹을 게 없는 사람에게 ‘안식일 준수’를 말할 수 있는가? 하루만 일을 하지 않아도 굶을 수밖에 없는데,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가?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는 사람들은 하루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이렇듯, 율법을 통해 의로움에 이르는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통념은 필연적으로 차별을 가져온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무능력’한 자들로 나뉜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의로운 자가 되어 머리를 치켜세우고 다니지만,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자는 불의한 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 다녀야 한다. 현실 세계에서 율법은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방편이 될 뿐이다.

 

이것은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능력주의’와 매우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요즘 사회의 키워드는 ‘공정’이다. 공정을 평가하는 기준은 개인의 능력이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준은 ‘개인의 능력’이다. 학교 성적이 얼마나 좋은 지, SAT 점수가 얼마나 높은 지, 등 객관적 기준이라고 불리는 것을 통해서 입학 사정을 한다. 만약, 어떤 학생이 그러한 객관적 기준에 못 미치는데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고 생각되면, 학교의 입학 사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빗발 칠 것이다.

 

최근 마이클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 The Tyranny of Merit>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공정이라는 덫’에 걸려 있는 지를 파헤치고 그에 대한 대안을 말한 적이 있다. 샌델은 공정의 기준이 되는 개인의 능력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아이비 리그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을 분석해 보면, 그들이 지닌 능력은 결코 공정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공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어진 것이기에 공정 자체를 평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하는 일이다. 경제력 뒷받침이 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한국의 명문 대학에 진학할 확률이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서 월등히 높다. 그러므로 명문 대학 입학 자체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이 제시하는 공정에 대한 해결법은 매우 흥미롭다. 명문대학교 입학을 할 때, 일정 자격이 되는 학생들 중에 제비를 뽑아 합격자를 정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대기업 취직도 마찬가지다. 일정 자격이 되는 사람들 가운데서 제비를 뽑아 입사를 시키면 된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이 제시하고 있는 방법을 받아 들일 수 있는가? 아마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내가 경쟁자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특별히 이러한 방식을 거부할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은 매우 전복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유대인들이 생각한 구원의 방식은 율법을 지켜 의로움을 스스로 보이는 자들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방식을 ‘공덕(merit)’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통념에 정면적으로 도전한다. 유대인들의 믿음을 뒤엎는 전복적인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을 통해서, 즉 인간들의 행위를 통해서, 또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능력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원의 방식을 ‘은혜(grace)’라고 한다. 이게 아주 은혜로운 이야기 같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게 아니다.

 

무에서 유를 불러내시는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심지어 그런 하나님을 간절히 원한다. 아무 것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할 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런 하나님은 나에게 유익이 되고 온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일도 어렵지 않다. 나도 죽을 것이기 때문에, 죽은 나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히려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죄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일은 쉽지 않다. 아주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전교 일등 하는 학생과 전교 꼴등 하는 학생이 동일하게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전교 꼴등 하는 학생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일은 감격과 은혜로운 일이겠지만(grace), 전교 일등 하는 학생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merit). 그러나, 전교 꼴등 하는 학생과 동일하게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과연 전교 일등 하는 학생이 전교 꼴등 하는 학생의 하버드 대학교 입학을 기뻐해 주고 축하해 주고, 함께 자랑스러워 할 것 인가의 문제는 다르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여기에서 걸려 넘어진다. 겉으로는 창조의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을 우리는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죄인이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어떻게 나보다 못한 인간이 나와 동일한 신분을 유지하고 나와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러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며 산다. 우리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우리가 저 죄인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며 살아야 속이 시원하다. 그게 공평한 신앙이라고, 그게 공정한 구원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전복적이다. 극강의 휴머니즘이다. 구원에 조건이 없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찌질한 인간이어도 하나님은 그들 사랑하시며 구원해 주신다. 무엇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냥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의롭다 여겨주신다. 무엇 때문에 그러냐면, 바로 예수의 죽음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 자체가 우리 모두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냥 믿으면 된다. 그러니 얼마나 이 복음이 전복적인가. 이것은 인간을 무조건 긍정하는 ‘극강 휴머니즘’이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로마서의 복음은 바로 이 세 번째의 전복적인 진술, 죄인을 아무런 조건 없이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복음의 선포이다. 우리는 이미 자격, 능력주의, 공정이라는 잣대에 찌들어 살기 때문에 이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삶 속에서 그러한 전복적인 극강의 휴머니즘을 실천하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믿음 자체도 ‘공덕(merit)’으로 변질시킨다. 자신이 이렇게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이렇게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일이 다 잘 돼야 하고 형통해야지 안 그러면 하나님이 마치 불의한 것(또는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한다.

 

영적인 문제는 육적인 문제, 현실적인 문제로까지 번지는 법이다. 현실에서 누군가 더 많이 가지면, 누군가는 덜 갖게 된다. 누군가 어디에 합격하면 다른 누군가는 불합격 하게 된다. 더 많이 가진 자, 어떤 위치에 올라선 자는 자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신을 정당화한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을 소유하고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예수의 죽음은 우리에게 그것을 묻고 있다.

 

예수의 죽음을 묵상하면 할수록 ‘극강의 휴머니즘(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을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되고, 예수의 죽음을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 이 세상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곳인가를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구원을 바랄 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놓을 줄 알 때, 실제로 그런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모든 구원을 놓아두고 ‘나는 이것을 받아 누릴 자격이 있어’라며 그 풍요로움을 낭비하지 말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시는 은혜야’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풍요로움을 아낌없이 나누시라. 그것이 바로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을’ 정도로 극강의 휴머니즘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의 휴머니즘이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