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1. 3. 30. 10:36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서 죽으셨나?

(마가복음 11:1-10)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가 미국 전역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산업은 총기산업이다. 나는 이 뉴스를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 미국 내에서도 아시안 커뮤니티는 별로 총기 구매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언론에서 조사한 총기 판매 통계를 보면, 20 퍼센트 정도의 아시안들이 총기를 처음 구매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아마 여러분들도 아시아 혐오 범죄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총기 구매에 대한 욕구가 증가했을 것이다.

 

불과 3년 전만해도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총기규제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위가 무색할 정도로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을 거치면서 미국인의 총기 구매율을 급증했고, 급기야 총기 구매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아시아인들도 총기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법은 멀고 총은 가깝기 때문이다. 혐오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법을 제정하여 시행하여도, 법이 직접적으로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 총기 소지를 선택한다.

 

미얀마에서 들려오는 쿠데타 군부의 강경진압으로 인한 미얀마 시민들의 사망자 소식을 듣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가뜩이나 전세계가 바이러스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에 미얀마 사태를 놓아두고 국제사회가 분열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일도 너무 힘들다. 우리는 매일 같이 촛불을 켤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쳤던 것처럼,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가슴 찢어지게 외칠 수밖에 없다.

 

네 개의 복음서가 예수님의 사역을 그리는 방식에서는 각각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 얼개는 같다. 예수님의 사역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길’, 또는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가신 길(또는 여행)의 시작은 갈릴리였고, 그 길(여행)의 끝은 예루살렘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의 삶 자체가 길을 걷는 것, 여행이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복음서의 처음 부분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시는 말씀처럼, 그 길을 따라 나서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들의 삶은 필연적으로 ‘길 가는 자의 삶, 여행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는 여행처럼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여행의 끝은 결국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일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길래, 예수님의 길은 끝, 여행의 끝은 예루살렘이었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우리의 삶의 길, 여행의 끝도 예루살렘일 수밖에 없는가? 예루살렘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천년을 이어온 거룩한 땅이었다. 그곳이 거룩한 땅인 이유는 그곳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단순한 신전이나 건물이 아니었다. 구약에 전개되고 있는 성전신학을 보면, 성전은 이 세상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세상의 중심. 세상의 배꼽. 옴팔로스라고 불린다. 그리스 신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의 중심이 어딘지 알고 싶었던 제우스가 독수리 두 마리를 다른 방향에서 날렸는데, 그 두 독수리가 만난 지점, 그곳이 바로 델포이였다. 그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델포이 신전이 세워져 있다. 그 세상의 배꼽은 인간이 신과 만나는 거룩한 장소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단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매개해 주는 곳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중심지였고, 순례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기쁨의 길이었다. 그들은 늘 그곳에 가는 것을 동경했다. 그러한 마음들이 시편 120편에서 134편에 아주 잘 담겨 있다. 그 중 우리에게 익숙한 시편 한 편만 보면 이렇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무주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로다

(시편 121편)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어떤 여행이었을까? 아주 따스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로 집에 가는 길이었다.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가? 집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멋지고 좋은 곳에 여행을 갔다 할지라도, 결국 가장 가고 싶은 곳은 집이다. 우리는 늘 그 길을, 그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여행.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서 ‘내 아버지(나를 가장 사랑하시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가 계신 집으로’ 가는 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계신 곳, 예루살렘,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아버지가 계셔야 할 집에 강도가 든 것이다. 예루살렘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기에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생명을 지켜주며,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야 하는 곳인데, 불의한 자들(강도 같은 자들)이 권세를 쥐고 가족들을 억압하고 못살게 굴고 있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소위 성전 정화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자.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마가복음 11:15-18)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간 이유와 예루살렘에서 죽은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예루살렘은 ‘내 아버지가 계신’ 집이기 때문에 간 것이고, 그곳에서 죽은 이유는 아버지 집을 차지하고 온갖 나쁜 일을 벌이고 있는 강도 같은 세력들하고 싸우다가 죽은 것이다. 예루살렘, 아버지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정의와 사랑에 힘써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정의와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이 인간의 불의/죄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 고발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미가서와 이사야서 두 군데만 보자.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며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미가 3:1-3)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이사야 1:21, 23)

 

예루살렘, 옴팔로스, 우주의 배꼽, 하나님 아버지의 집. 이곳에서 발생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정의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고아를 신원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이다. 한마디로, 서로의 생명을 아껴주고, 서로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며, 서로의 삶을 보듬어주는 일이 있어야 한다. 왜? 그곳은 아버지의 집이니까. 예루살렘이니까. 그런데, 집에 간 예수님은 기대와는 달리 정반대의 상황을 목격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다. 1) 도망가든지, 2) 집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과 한통속이 되든지, 아니면 3) 그들과 맞서 싸우든지.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집(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가면서 계속해서 물었다. “어떻게 할꺼니?”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막 10:38). 여기서, 잔과 세례는 죽음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정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고, 예수님의 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 좌우편에 강도들 대신에 야고보와 요한이 달렸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 그렇기에 본인의 집이기도한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지금 강도가 불의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 강도들 때문에 가족들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도망을 치거나, 그 강도들과 연합하여 가족들을 헤칠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족이 아니거나 가족으로서의 자격이 없거나,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즉, 아버지의 집, 본인의 집에 도착하여 행하신 일은 아버지 집에 마땅히 있어야 할 정의와 사랑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지를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지키면서 두 눈으로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이다. 사도행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곳에 모여 있으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 정의와 사랑이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는 위에서 선지자들이 비난한 예루살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소개된다. (예루살렘의 회복)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3-47)

 

초대 교부 중 한 명인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소개할 때 그들의 합리적 논증의 힘을 보라고 외친 게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를 보라!”고 했다. 그들이 얼마나 미워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라는 이 말, 너무나도 마음에 사무치는 말이다. 지금 세상을 보면, 또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 말이 거꾸로 들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이 얼마나 서로 미워하는가를 보라!”

 

“Hate Crime!” 미워함의 범죄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미움이 가득한 세상). 2천년전 예루살렘, 아버지의 집에 도착한 예수가 목격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Hate Crime’(미움 자체)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의 삶 속에 가져다 주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Hate Crime’을 발생시키는 세력들과 싸우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서로 미워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공동체를 예루살렘, 아버지의 집에서부터 다시 세워나갈 것을 부탁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우리들, 우리는 어떠한 교회를 세워나가고 있으며, 어떠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 Hate Crime이 판을 치고 있으니까,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가? 또는 본인을 지키기 위하여 총기 구매를 고려하고 있는가? 우리가 정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다른 곳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집이고, 나의 집이라는 생각, 우리의 이웃들이 그냥 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가족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실제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형제자매인 것을 고백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라와 민족이 구분되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이 세상, 우리의 집에서, 우리들의 형제자매들, 우리 가족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불의한 일에 대하여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얼마나 서로 미워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는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가. 우리의 사랑을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우리의 사랑을 보고 사람들이 우리처럼 사랑하기 원하는가. 우리는 사랑의 히스토리(역사)를 써나가고 있는가.

 

Hate Crime의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리고 Hate Crime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한 사람으로서, Hate Crime에 맞서 싸우며,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 어려운 시대를 건너기를 다짐한다. (혹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는 끝까지 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할 것이다.) 우리 서로 사랑하며, 함께 그 길을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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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