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3. 2. 06:59

리추얼의 탄생

(출애굽기 12:1-14)

 

(무력감. 이것이 지난 한 주 내가 느낀 감정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수많은 갈등에 휩싸여 고통 당하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서 ‘전쟁’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아 분노가 치밀고, 한국은 대선 정국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운데, 미국에 사는 우리 한인들은 그 혼란스러운 정국을 코로나 사태 중에 두 번이나 맞이하니, 스트레스 지수가 더 높은 것 같다. 윤동주도 일본 유학 가서 조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무력감을 느껴서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그의 무력감은 <쉽게 씌어진 시>에 잘 드러나 있다. 그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이곳 건너편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는데, 우리는 전쟁에 대하여 약간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따스한 밥과 국 먹고, 따스한 물로 목욕하고, 따스한 잠자리에서 잘 잔다. 무력감. 어찌해야 할까. 이러한 때에 설교해야 하는 것은 참 어렵다. 무슨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은 한 주간이었다. 그래도 힘을 내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안에서 주님의 위로와 평화를 간구해 본다.)

 

1. 출애굽기 7장부터 10장까지 숨 고를 틈 없이(물론 실제로는 시간 간격을 두고 발생한 일이겠지만) 첫 번째 재앙부터 아홉 번째 재앙까지 단숨에 펼쳐진다. 그런데 열 번째 재앙은 좀 다르게 전개된다. 아홉 번째 재앙과 열 번째 재앙 사이에는 큰 간격이 존재한다. 그 간격 중간에 나오는 것이 바로 유월절과 무교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유월절과 무교절에 머물 수밖에 없다. 열 번째 재앙은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한 묵상 없이 맞이할 수 없다. 이 묵상을 통해서 열 가지의 재앙은 단순히 재앙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의 이야기로 승화된다.

 

2. (본인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또는 형성하게 된 어떤 사건이 있는가 / 나는 왜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 / 모세: 다른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죽어갈 때 본인은 물에서 건짐을 받은 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의 정체성은 출애굽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이전의 이야기들, 특별히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는 ‘나라’가 형성되기 전 족장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그 스케일이 다르다. 이제는 족장의 규모가 아니라 한 나라의 규모로 이야기의 규모가 바뀐다. (애굽에서 너희 ‘군대’를 내가 이끌어 내었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출애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그들의 근본적인 토대이다.

 

3. 유월절 규례가 등장하는 12장의 첫 번째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2절). 유월절은 이스라엘에게 ‘새해’를 규정해 준다. 유월절 사건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달력은 시작한다. 다른 말로, 이스라엘의 역사(시간)는 유월절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연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유월절 사건이 발생하는 날은 ‘오늘부터 1일’이 되는 날이다.

 

4. 한국인은 새해의 첫 달을 ‘1월’로 부른다(너무 단순화된 듯. 뭔가 부르는 고유어가 정착했으면 참 좋았을 것을). 영어로는 January라고 한다. 이스라엘은 새해 첫 달을 ‘아빕(אָבִיב, Abib)’이라고 부른다. 이는 ‘어린 이삭, ‘새로운’이라는 의미로, ‘첫 달’을 의미한다. 12장에는 유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자세히 나와 있는데, 유월절 어린 양은 열흘(아빕월 10일)에 취하여 사흘(3일) 동안 기다렸다가, 나흘(4일째)째 되는 날 해 질 때 잡아 먹는다. 양을 잡아서, 잡은 자의 피는 집 현관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양을 불에 구워서(날 거로 먹으면 안 된다) 먹을 때 고기만 먹으면 안 되고, 무교병(누룩이 들어가지 않아 부풀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한다.

 

5. 그런데, 유월절 양 고기와 무교병 그리고 쓴 나물을 먹을 때 그냥 편하게 식탁에 차려 놓고 먹으면 안 된다. 어린 양을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먹어야 한다. 한 마디로, 급히 먹어야 한다. 유월절 어린 양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애굽에 죽음이 난무하게 될 때 그 죽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6. 또한 쓴 나물을 먹는 것은 애굽 땅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가며 하루하루 건설 현장에서 고된 부역을 마치고 아무 곳에서나 널브러져 앉아 흙먼지 섞인 음식을 먹으며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히브리 사람들의 쓰디쓴 지난 인생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삶,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유월절과 무교절의 의미이다. 열 번째 재앙이 발생하면 누룩을 넣은 빵이 부풀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급하게 출애굽 해야 하는 구원의 순간이 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구원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오는 법이다.

 

7. ‘구원’이라는 말처럼 따스한 말이 있을까.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따스함을 느끼지만, 사실 사랑은 따스하기만 한 건 아니다. 사랑은 잔인하기도 하다. 구원은 참 따스한 말이다. 이스라엘의 시작은 이렇게 따스함이 배어 있다. 이스라엘은 구원으로부터 시작한다. 구원으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은 이미 구원 안에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어떠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구원으로 시작한 인생은 그 전체가 모두 구원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처럼 우리의 인생을 따스하게 만들어 주신다.

 

8. 출애굽기의 유월절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컬어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마 26:17/ 막 14:13 / 눅 22:7). 요한복음은 예수를 명시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 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명백하다. 구원을 말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라 구원의 죽음이라는 뜻이다.

 

9.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마음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이 찬송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구원의 기쁨에 대한 찬양인데, 시각장애인이었다가 눈을 뜨게 된 바디메오의 고백처럼 들린다. 눈이 보이지 않아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살았겠는가. 그런데 눈을 뜨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 바디메오는 구원과 더불어 새로운 인생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10. 이처럼 구원은 새로운 시작인 것이고, 그 이후의 인생은 구원의 인생이 되는 것이기에 그 중간에 발생하는 어떠한 일도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은혜 안에서 발생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유월절과 무교절은 단순한 규례나 율법이 아니다. 유월절이나 무교절을 단순한 절기법, 즉 율법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갑자기 고리타분해진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말로 옮기면 ‘리추얼(ritual)’이다. 리추얼은 그들의 인생이 어떠한 인생인가를 잊지 않도록 해준다. 구원 사건과 함께 드디어 리추얼이 탄생한 것이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에게 주는 메시지(복음)는 우리의 삶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간, 우리가 활동하는 공간은 모두 구원된 시간이고 구원된 공간이다. 복음은 이것에 대한 선포이다.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구원된 것들이다. (고기로 이야기하자면, 익은 고기니까 마음껏 즐기면서 먹으면 된다. 사람으로 이야기하자면, 신뢰할 만한 사람이니까 의심을 갖지 말고 기쁨과 사랑으로 교제를 나누면 된다.) 믿음을 통해 이것을 인식하든(이것을 인식하며 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들은 구원된 삶을 산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가진 보편성이다.

 

12.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구원된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구원된 삶을 살지 못하고, 여전히 구원을 갈망하면서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 평화가 없다. 늘 불안과 공포와 분노와 고립과 욕망이 넘쳐난다. 한병철 교수가 최근에 내놓은 책 <리추얼의 종말>은 우리가 얼마나 구원받지 못한 세상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를, ‘리추얼’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보여준다. 우리의 삶을 한 번 들여다보자. 리추얼이 있는가. 우리는 리추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우리의 삶 속에 리추얼이 없거나 무너져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구원된 삶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13.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열 번째 재앙이 있은 후 출애굽 한 뒤, 다시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한 규례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나오면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리추얼)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출 13:8-10).

 

14. 부모는 유월절과 무교절의 리추얼을 행하면서(통해서) 자녀들에게 출애굽 사건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을 전달해준다. 자녀들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리추얼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삶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의 인생과 그것을 모르는 사람의 인생은 같을 수 없다. 자신의 삶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감사와 찬송과 영광이 끊이지 않는 삶, 그리고 본인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든지, 그것이 본인을 괴롭히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삶이겠지만, 자신의 삶이 구원된 삶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닦달하면서, 또는 자기 삶을 저주하거나 슬퍼하면서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구원된 삶을 살아가기에 인생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불의한 일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 구원된 삶에 악한 것이 들어오는 것을 그냥 놓아둘 수 없기 때문이다.

 

15.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람들에게 던지는 가장 사악한 메시지가 무엇인가. “너희는 구원 받지 못했다. 너희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이다. 세상을 바라보니 마침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메시지는 설득력을 갖는다. 요즘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감정은 불안, 분노, 고립, 욕망이다.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워진 세상, 인플레이션의 압박 때문에 불안한 경제, 게다가 이 어려운 때에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어디를 둘러봐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구원받은 세상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세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마음은 요동치고 흔들린다. “그래 우리에겐 구원이 필요해. 누가 우리를 구원해 주지?” 이렇게 요동치고 흔들리는 우리의 마음을 세상은 파고들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구원해 줄게!” (요즘 넷플릭스가 구원자 아닌가? 에이 모르겠다. 복잡하다. 드라마나 보자. 드라마 보면서 평안을 누린다. 구원이다.)

 

16. 이럴 때일수록 리추얼은 중요하다. 밥 먹기 전에 드리는 기도, 잠 들기 전, 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드리는 기도, 마음이 불안할 때 켜는 촛불, 함께 모여 드리는 공 예배 등,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리추얼은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우리를 고립시키고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세상에 맞서,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 듯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에 맞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 우리의 삶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선포하며 우상(우리의 믿음을 저하시키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놓으려 하는 것들)에 저항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17. 세상은 우리에게 “너희의 삶은 구원받지 못했어. 너희에게는 구원이 필요해”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우리의 마음을 차갑게 만든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메시지들은 모두 우리를 낙심케 한다. 그리고 삶을, 미래를 고민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든다. 이럴 때일수록, 촛불을 키라. 무릎을 꿇으라. 십자가를 붙들라(십자가 선물하는 것 – 이번 사순절 프로젝트). 무엇보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라. 리추얼은 어질러진 시간과 공간에 질서를 부여한다. 무엇보다, 거룩성을 부여한다. 차가운 마음을 다시 따뜻하게 보듬어 준다. 우리의 삶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된 삶이다. 그러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 따스한 마음을 잃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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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24. 05:46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다

(출애굽기 10:15-20)

 

1. 이런 상상을 해봤다. 천국문이 있고 그 문지기로 구약을 대표로 모세가, 신약을 대표로 베드로가 문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천국문을 통과하려면 모세가 내는 퀴즈와 베드로가 내는 퀴즈를 맞춰야만 한다.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는 그들이 낼 문제를 예상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문제를 낼 것이고, 베드로는 어떤 문제를 낼 것 같은가. 아마도, 모세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본인이 일으킨 열 가지의 재앙이 무엇인지를 순서대로 나열해 보라고 문제를 낼 가능성이 크고, 베드로는 열 두 제자의 이름을 성경에 나오는 순서대로 외워보라는 문제를 낼 가능성이 크다. 모세는 자신이 낸 문제를 맞힌 사람을 칭찬하면서 자신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고, 베드로는 자신이 낸 문제를 맞힌 사람 앞에서 열 두 제자의 이름 중 자기의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는 것에 대해서 강조하며 자랑할 것이다.

 

2. 천국문을 통과할 때 풀어야 하는 문제가 이 정도라면 많은 이들이 어렵지 않게 천국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식적인 문제를 넘어, 심층적인 질문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모세가 이런 문제를 냈다고 생각해 보자. ‘열 가지 재앙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열 가지 재앙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말 해보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천국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열 가지 재앙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해석을 내놓을 것이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우면 천국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이고, 만족스럽지 못하면 통과 못하게 된다.

 

3. 가장 훌륭한 해석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가장 저급한 해석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열 가지 재앙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안 들으면 이런 재앙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모세가 이러한 해석을 들으면 이렇게 말한 사람을 천국문에 들이겠는가, 아니면 들이지 않겠는가. 내가 만약 모세라면 천국문에 들이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참으로 저급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전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4. ‘하나님 말 안 들으면 이런 재앙을 입을 것!’이라는 해석은 가장 저급한 해석이다. 하나님을 폭력의 하나님으로 전락시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는 사람과 멀리해야 한다.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공포와 불안 가운데 산다. 공포와 불안을 부추기는 자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자일 가능성이 크다. 광고들(약장사들)이 다 우리의 공포와 불안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 우리를 악에 내어주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우리에게 공포와 불안을 가져다주는 일이 혹시 발생하거든, 그것에 휩쓸리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이 우리에겐 더 필요하다.

 

5.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재앙을 겪는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갑자기 덮이는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전도서 9:11b-12). 우리는 살면서 죽음, 질병, 인간관계의 손실, 금전적 피해, 자연재해, 전쟁 등의 재앙을 겪는다. 재앙이 닥치는 것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무력해지고, 그 무력한 실존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보고자 신앙을 갖는다. 정말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를 이루게 해주는 어떤 힘이나, 또는 우리를 너무도 괴롭게 하는 어떤 일의 원인적인 힘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차라리 섬기고,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얻기 바라는 마음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무속(무당)은 인류가 숨쉬며 살아 있는 한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못 말린다. 권력의지가 있는 사람(정치인들이 무속을 의지하는 것), 성공의지가 있는 사람(‘나의 아저씨’ 고사지는 모습 공개), 무엇이든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간절함을 이루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게 되어 있다.)

 

6. 간암으로 6년 동안 투병하시던 아버지에게 병원에서 의사가 이제 8개월 밖에 못산다는 선고를 내렸을 때, 아버지가 우리들을 병원으로 불러서 그 말씀을 전하셨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경기도 양평에서 암병을 고친다는 기도원에서 몇 달 간 지내기도 하셨다. 매주 금요일 나와 형이 번갈아 가면서 아버지를 양평 기도원에 모시고 갔다. 내가 지금 후회하는 것은 그때 아버지랑 더 열심히 기도할 걸, 그렇지 못한 거다. 이제 8개월 밖에 못산다는 의학적 선고를 받으신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두려우셨을까, 그때보다 철이 좀 든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그때 그 마음을 더 이해하고 함께 집회 참석해서 아버지의 마음에 힘이 되어 드렸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기도원에 들어가 집회 참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동안 나는 차 안에서 잘 때가 많았다. 그때는 왜 그렇게 피곤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사실, 그때 기도원 원장이 여자 목사였는데, 솔직히, 사기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그때 잘못 생각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을 맞췄어야 하는데, 사기치는 것 같은 그 기도원 원장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에 신경이 쓰이다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좀 더 따스하게 보듬어 드리지 못한 것 같다. (아버지는 주치의 선고대로 8개월 사시다 가셨다.)

 

7. 어떤 병으로 고생을 죽도록 하는 사람은 그 병을 내린다고 생각되는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병을 거두어 가 줄 것을 요청한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 자꾸 우리를 괴롭힌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며 구원을 간구하게 된다. 미신은 나쁜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인간의 애환이 담긴 소박한 마음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더 이상 그러한 미신은 많이 물러갔지만, 여전히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미신에 기대며 살기도 한다. 인간은 그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뜻이다.

 

8. 고대근동의 신화적 세계를 모르면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은 이해하기 쉽지 않고, 잘못 해석될 수 있다. 바로 위에서처럼 말이다. 열 가지 재앙을 보면서 ‘하나님 말씀 잘 안 들으면 재앙을 겪게 된다’는 해석처럼 말이다. 그런데 다행히 지금은 고대근동의 신화적 세계관에 대하여 많은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과의 대결이었다는 내용은 많이 알려져 있다. 옛날 사람들이 섬긴 신이라는 것이 사실은 별거 아니다. 간절한 소망이 미신을 만들어 낸다. 애기를 낳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는 여인은 삼신 할머니한테 정성을 들이는 법이다. 조선시대의 양반집 여인이 임신을 했을 때 신발조차도 가지런히 정돈하면서 조심조심 산 것은 출산을 할 때 어려움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아이가 잘못됐을 때 ‘나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인간은 아주 소박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9.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실존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하나님을 폭군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열 가지 재앙은 본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 재앙을 당하는 애굽의 입장에서는 그처럼 잔인한 폭력이 없다. 애굽의 생명줄이었던 나일강물이 피로 변하는 것은 애굽 사람들의 생명을 끊어 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매우 잔인한 재앙이다. 나일강에서 개구리가 올라오는 재앙도 그렇고, 티끌이 이가 되는 재앙, 파리가 가득한 재앙, 우박이 내려 삼과 보리 농사를 망쳐 놓는 재앙, 그리고 공포의 메뚜기 떼가 우박으로 인하여 상하지 않았던 밀과 보리까지 다 먹어버리는 재앙은 그야말로 애굽 사람들의 생명을 끊어 놓는 잔인한 일이다.

 

10. 게다가 세상이 온통 흑암으로 변하는 재앙은 어떤가. 지금이야 캄캄해지면 촛불을 켜든, 비상용 손전등을 켜든, 전기가 들어오면 전등을 켜든 하면 되겠지만, 그 시절 흑암은 공포 그 자체였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밤에 일할 수도 없고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밤은 깜깜했다. 불 끄고 떡을 칼 같이 써신 한석봉 엄마의 솜씨는 실로 신의 경지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깜깜한 흑암을 몰아내는 태양 빛을 사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당시 사람들에게 폭력 중의 가장 큰 폭력은 태어난 것의 처음 것(장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 일이 발생했을 때,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애곡했다. 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의 이야기를 실존적으로 해석하면 아주 끔찍한 폭력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을 해석할 때 아주 조심스럽게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연습이 꼭 필요하다. 신학적으로 해석해서 실존적으로 적용해야지, 실존적으로 해석해서 신학적으로 적용하면 아주 큰 모순이 발생한다.

 

11. 한국어로는 ‘뱀’으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의 ‘나하쉬’는 바다 용, 바다 괴물, ‘큰 바다 괴물’을 뜻한다. 고대근동 사람들이 바다로 대표되는 혼란과 무질서의 신비로운 영역에 큰 바다 괴물이 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고 애굽의 술사들이 만들어낸 뱀을 모세의 뱀이 잡아먹은 것은 애굽 사람들이 생각했던 큰 바다 괴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열 가지 재앙에서 일관되게 하나님께서 그 재앙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나일강에서 애굽 왕 바로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애굽에서 신격화되어 숭배받는 자연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제까지 네(바로)가 듣지 아니하도다.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7:16-17)에 대한 선포이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신이시다.

 

12. 애굽 사람들에게는 나일강이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나일강을 신처럼 모셨다. 나일강 신의 이름을 하피였다. 그 당시 고대근동의 사람들은 파리 떼 때문에 엄청난 괴로움을 당했다. 파리는 위생의 문제를 일으켰다. 파리 떼가 들끓어 많은 이들이 질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그들은 파리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파리를 섬겼다. 파리 왕의 이름은 바알세붑(Beelzebub/비엘저법)이었다. 이와 연관된 이야기가 열왕기하 1장에 나온다. 북이스라엘의 왕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들었는데, 아하시야 왕은 자신의 병이 낫겠는지 신탁을 받으러 신하를 이웃 나라 에글론에 보낸다. 그리고 에글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는다. “내 병이 낫겠소?” 바알세붑, 파리 대왕한테 가서 자기의 병이 낫겠느냐고 묻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그때 활동했던 선지자가 엘리야 선지자였다. 엘리야 선지자가 아주 화끈한 사람인데, 열 받아서 아하시야 왕한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왕하 1:6).

 

13. 열 가지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과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의 싸움이었다. 나일강의 신에서부터 메뚜기 떼를 막아 준다는 민(Min) 신, 그리고 태양신 라, 죽음의 신 오시리스, 파라오들의 신 호루스 등, 그들이 믿는 신들은 여호와를 물릴 칠 수 없고 이겨낼 수 없으며 여호와 앞에서 무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에서 신의 현현으로, 즉 눈에 보이는 신으로 군림하고 있는 바로(파라오)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대로 이스라엘을 내보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앙은 신학적인 이야기이고 신앙적인 이야기이다.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재앙을 겪을 까봐, 폭력을 당할까봐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밖에 없다는 진리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심해야 하는 것이다.

 

14. 열 가지 재앙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윤동주의 다음 시가 떠오른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15. 윤동주의 <참회록>이라는 시이다. 열 가지 재앙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보이는데, 애굽의 왕 바로가 그이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바로 바로(파라오)다.” 자신이 섬기는 신들을 무력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면서도 바로(파라오)는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점점 더 강퍅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고 완악하게 하신 거라고 성경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 나의 마음을 보면서 완강하고 완악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내 마음을 이렇게 완강하고 완악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주님, 내 마음의 완강, 완악을 풀어주시고

내 마음을 부드럽게(온유케) 하옵소서.”

16. 팬데믹 때문에 경제가 어렵고, 전쟁의 소문이 들려오고, 대통령 선거로 인하여 이념갈등과 진영갈등이 심한 이때에, 사람들의 마음은 완강해지고 완악해진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인간은 그렇게 외부의 조건과 환경에 의해서 휩쓸리기 십상이다. 팬데믹 때문에 경제가 힘들어지고 정신적인 공황이 심해지니까 약자를 향한 폭력이 심하게 늘었다. 이 어려운 때에 서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큰 나라들이 작은 나라를 중간에 끼고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 세상이 점점 더 살기 어렵다 보니, 사람들은 정치가 세상을 구원해 줄 것 인양, 본인이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을 관철시키려고 서로 비방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

 

17. 어렵고 힘들고 혼란스러운, 이 재앙 같은 시절에, 마음이 휩쓸리면 우리는 열 가지 재앙 이야기에서 완강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사태를 점점 더 힘들게 만드는 바로(파라오)를 만나게 된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늘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이 완강해지고 완악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내보내 나를 섬기게 하라.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바로와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는다면, 우리는 이 어렵고 힘들고 혼란스러운 재앙 같은 시절에, 더욱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내 마음의 완강, 완악을 풀어주시고

내 마음을 부드럽게(온유케) 하옵소서.”

 

우리의 부드러운 마음(온유한 마음)이 평안과 평화를 이루게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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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15. 09:30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야다와 로야다)

출애굽기 5:1-14

 

1. 모세에게는 형 아론이 있었다. 출애굽기 7장에 보면 이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세 살인 것으로 나온다.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출 7:7). 출애굽기가 모세를 주연으로 해서 기록된 책이다 보니 아론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모세에게 아론은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아론이 없었다면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세의 부르심은 아론의 부르심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바로 앞에 서게 된다.

 

2.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이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1절). ‘절기를 지킬 것이다’는 ‘순례의 축제를 거행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순례는 신앙심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기 위해서 순례를 떠나야 한다. 주일에 교회에 오는 것은 일종의 순례이다. 교회 올 때마다 순례길을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 가짐이 달라질 것이다. 자신의 일상에 거룩한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 것은 우리의 삶에 큰 활력을 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야만 순례가 아니다. 일상에서 순례하는 일을 잘 해야 특별한 순례도 더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3. 그런데,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이집트 왕의 반응은 너무도 냉담하다.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로 야다티 에트-아도나이’라고 히브리어로 표현되어 있다. 로’는 히브리어에서 영어의 ‘not’과 같이 부정어이다. ‘암미’는 ‘내 백성’이라는 뜻이고,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호세아의 셋째 아들 이름이 ‘로암미’였다. 호세아에게 아들 이름을 ‘로암미’라고 지으라고 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으셨다. (이스르엘, 로루하마(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로암미)

 

4. 히브리어에서 ‘야다’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야다’는 ‘안다’라는 뜻이다. ‘야다’에 ‘로’를 붙이면,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집트 왕은 지금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집트 왕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전혀 없는 것일까? ‘알지 못한다’라고 할 때,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는 뜻일까? 지금 이집트 왕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백성을 보내라’는 말씀을 하신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다’라는 것은 어떠한 일이 발생하게 하거나 또는 발생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것 같다.

 

5. 이렇게 다시 물어보자.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가? 안다는 것은 대상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의 ‘야다’는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정서적’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누군가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는 것은 그가 나를 정서적으로 대해주었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는 뜻이다. 관계에서 정서를 공유하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만약 상대방과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면 서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알아간다고 하는 것,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정서를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6. 우리는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데, TV가 바보상자인 이유는 TV가 바보 같기 때문이 아니라 TV를 보는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 중에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가장 큰 것은 우리가 TV에 나오는 사람을 ‘안다’라고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대중매체의 힘이다. TV에 자주 나오는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를 ‘잘 안다’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나 그가 하는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그가 치킨을 먹고 싶다고 하면 치킨 사서 먹고, 그가 이런 상품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 우리는 그 상품을 산다. 정서가 일방적으로 주입된다. 그야말로 우리는 바보가 된다.

 

7. 이집트 왕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정서를 전혀 공유하지 못한다. 하나님과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니까, 이스라엘 백성과도 정서를 공유하지 못한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에 대한 이야기도 전하여 준다. 그러나 그들과 정서를 전혀 공유하지 못하는 이집트 왕은 모세와 아론의 이야기를 듣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한다. 이들이 잠시 노역을 멈추고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집트 왕은 더 무거운 노역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떠맡긴다.

 

8.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던 일은 벽돌을 생산하는 일이었는데 벽돌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는 이집트 정부에서 제공했다. 그런데, 이집트 왕은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고 벽돌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마련하여 벽돌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렇다고 벽돌 생산량을 줄여준 것이 아니었다. 똑 같은 생산량을 유지하면서 벽돌 만드는 재료까지 스스로 조달하라는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을 몇 갑절 더 힘들게 만들었다.

 

9. 이 과정에서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한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집트 왕에게 전달한 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역이 더 심해진 것을 두고, 모세와 아론을 심하게 원망한다. “너희가 우리는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장 21절). 너희 때문에 우리가 미움을 받고 죽게 생겼어!

 

10.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존재한다. 안다는 것은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다.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면 상대방을 아는 게 아니다. 우리는 객관적인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을 ‘안다’라고 잘못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객관을 뒤집으면 관객이 된다. 객관적인 지식은 그저 관객으로 서 있겠다는 뜻 밖에는 안 된다. 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주관적으로 개입하는 것, 대상과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정치적 입장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상대방과 같은 편이 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그래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알게 되면, 정서를 나누게 되면,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시대 가장 편만한 정서가 무관심이다. 알고 싶지 않아.

 

11. 우리는 출애굽기 5장에서 전개되는 이집트 왕과 모세(와 아론) 사이의 첫 대면에서 발생한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점이 그것이다. 아는 자는 ‘쉬게 하는 자’이지만, 모르는 자는 ‘쉬지 못하게 하는 자’이다. 아는 자는 상대방과 정서를 공유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쉬게 해 준다. 그러나 모르는 자는 상대방과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쉬지 못하게 한다.

 

12.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정서적 교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 사람들을 향해 계속 이렇게 외치기만 했다.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면서 그는 히브리 사람들을 쉬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정서적 교감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과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님은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모세와 아론을 보내 그들에게 ‘쉼’을 주려고 하신다. 이렇게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행동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13.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안식을 주려 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부터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나 자신과 충분한 정서적 교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쉬게 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구원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안식(쉼)에 들이신 것처럼,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쉼을 주는 것이다.

 

14.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쉬게 하신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에게 얻은 쉼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나도 그들을 쉬게 한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구원받은 사람은 상대방에게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쉬게 해주자. 쉬게 해주자.’ 모르는 자가 되지 말고, 아는 자가 되라.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쉼’을 선물로 주자. 초콜릿이나 케익, 또는 꽃보다 더 의미 있고 달콤한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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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10. 04:24

큰 이야기, 작은 인간, 그리고 믿음

(출애굽기 4:10-17)
 

1. 출애굽기 3장과 4장은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을 담고 있다. 장장 두 장에 걸쳐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부르심(calling)’을 그냥 쉽게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타지 않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매우 신비한 이야기가 부르심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후에 전개되는 부르심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타지 않는 떨기나무 장면보다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은 그 이후에 전개되는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2.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풍기는 분위기는 4장 14절이 말해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the anger of the Lord burned against Moses, NASB)”. 이 구절을 보면 모세가 ‘분노 유발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부르심의 이야기는 소위 말해 ‘은혜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모세는 다섯 번에 걸쳐 거절을 한다. 모세가 하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거절을 하니까 결국 하나님이 모세를 향하여 화를 내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 모세 입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본인이 아무리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왕자라고 하더라도 이집트를 떠나온 지도 오래됐고, 그곳을 떠나올 때 좋게 떠나 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집트라는 거대한 국가와 파라오(바로)라고 하는 막강한 군주와의 한 판 대결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고, 본인을 별로 좋게 인식하고 있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시켜 이끌고 나와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 부르심이 마음에 내킬 리 없다. 한 마디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하다가 내가 죽겠구나.”

 

4. 아무리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일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 하나님의 정체성의 문제를 질문하고, 자신이 없고 능력이 없다는 핑계 등을 대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거부 의사를 계속 밝힌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모세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간구합니다. 그 일을 할 만한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Please, Lord, now send the message by whomever You will”(4:13).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인간적인 모세의 모습을 볼 뿐더러,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5. 거대서사(Meta Narrative/메타 내러티브)’라는 말이 있다. 요즘엔 ‘메타 내러티브’라는 말보다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이 더 유명해졌다. 예전에는 인터넷 속의 세상을 ‘가상공간’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인터넷 속의 세상을 가상공간이라고 부르기에는 인터넷 속의 세상이 너무도 실재적인 공간으로 성장을 했고 현실 세계 못지 않게 사람들이 그 세계 속에서 실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메타버스’라는 말을 쓴다.

 

6. 메타 내러티브는 큰 이야기를 뜻한다. 인간 존재는 자신보다 큰 존재를 만나면 움츠러든다. 인간 존재는 자신의 이야기(밥 하고 빨래하는 삶을 살다가)보다 큰 이야기(어떤 큰 사건에 연루되는 것)를 만나면 움츠러든다. 자신보다 큰 존재에, 자신의 이야기보다 큰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그 존재와 그리고 그 이야기와 연결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모세의 모습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세는 자신보다 큰 존재인 하나님 앞에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이야기보다 큰 하나님의 이야기 앞에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7. 3장과 4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세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큰 이야기(메타 내러티브)’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큰 이야기는 창조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우리 인간의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연에게도 의존되어 있고 인간 간에도 의존되어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하도 ‘자율성’(autonomy/근대에 형성된 ‘자율성’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 사회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는 결과를 가져왔다.)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다 보니 ‘의존’이라는 말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의존’은 자유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서 오히려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 사이의 연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8. 창세기가 보여주는 큰 이야기는 형이상학적(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면 출애굽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큰 이야기는 매우 역사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출애굽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큰 이야기는 3장과 4장에서 하나님의 입을 통해 모세에게 ‘계획’이라는 형태로 전달된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땅… 의 지방으로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7-10). 출애굽기는 이 계획이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9. 성경이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의 큰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큰 이야기는 아주 근본적인 역사의 본질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유’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안겨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과 변화를 일구시는 창조의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출애굽기는 분명히 이러한 큰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10.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러한 자유를 성취하기에는 너무도 작은 존재라는 것이다. 애굽에서 하층민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가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애굽이라는 큰 나라와 파라오라고 하는 절대적 군주의 폭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된 노동을 하면서 처절한 삶을 살았다. 자신들의 힘으로 해방과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모세에게 부르심이 임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모세도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일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이 일을 하다가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완강하게 거부 의사를 밝힌다.

 

11.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신앙을 가지면서 우리의 작은 존재가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우리의 작은 이야기가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앙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을 가지면서 우리의 작은 존재에, 그리고 우리의 작은 이야기에 어떠한 균열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다. 우리는 이것을 평안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산다.

 

12. 그런데 출애굽기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그러한 소박한 일상을 넘어서는 일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이제 애굽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모세는 작은 존재로, 작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다. 양을 치면서, 가족들 돌보면서, 특별한 일이 아무도 없는,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모세는 그렇게 살면서 애굽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족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자신과는 상관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세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여전했다. 모세는 그들의 고통을 남몰라라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에 여전히 신경 쓰고 계셨다.

 

13.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장면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신앙은 그냥 작은 존재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작은 이야기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이야기를 자기 바깥의 존재와 이야기로 연결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이야기는 우리가 인식을 하든지 못하든지 존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계신다. “나는 나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면 존재하시고,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가 듣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께서는 쉴 새 없이 자신의 존재로, 자신의 이야기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God is calling us)는 뜻이다.

 

14.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더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 되어가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지 못하게 하고 철저하게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는 것을 막고 고립시키는데,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벗어나서 내 바깥의 존재에, 나의 작은 존재보다 더 큰 존재에, 나의 작은 이야기보다 더 큰 이야기에 우리 자신을 연결시키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소비사회라는 게 그런 거다. 이거 없으면 못살 것 같게 만들어서 존재하기 위해 엄청난 것들을 각 개인이 사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연결되어 있으면 불필요한 것들이 정말 많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점점 더 살기 힘들다고, 사는 게 고통스럽다고, 삶이 왜 이렇게 외롭냐고, 아우성 가운데, 결국 혼자서 요양원에서 또는 노인 아파트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15. 믿음이란 무엇인가? 모세가 보여주고 있듯이, 믿음이란 결국 나의 작은 존재를, 나의 작은 이야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큰 존재에,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작은 존재와 이야기에 균열이 생기고 붕괴가 일어나 우리의 작은 존재와 이야기는 새롭게 정의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흥미진진하고 신비로운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창조고 구원이다. 그렇게 우리의 작은 인생은 확장되고, 해방과 변화를 경험하게 되며 우리 인생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인생에까지 해방과 변화를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이다.

 

16. 너무 자기 자신 안에만 갇혀 있지 말라. 너무 자기 자신의 작은 이야기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 내 바깥의 존재에, 내 바깥의 이야기에 참여하려고 노력하라. 특별히 전염병이 돌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은 너무도 움츠러들었다. 조심하는 것과 연결을 끊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을 더 큰 이야기인 팬데믹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방역 차원에서 교회 문도 닫고 예배 온라인으로 드리고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일상을 팬데믹을 넘어선 더 큰 이야기에 참여시켜야 할 때가 오기도 했다.)이 어려운 시절,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며, 우리는 고립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서로의 삶에 참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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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2. 04:45

사명이 없어도 괜찮아

(출 3:1-12)

 

1. 몇 번을 봐도 신비한 장면이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일이 정말 가능한가? 잘 믿기지 않는 장면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이기도 하고 인생에 있어 가장 영광된 순간 아닐까 싶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는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그리고 가장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타지 않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다가서려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2.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기 십상이다. 다른 말로,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설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면을 이렇게 읽어내는 것도 우리에게 큰 유익이 있으나, 때로 이러한 해석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지 못하고 웅크리게 하기도 한다. 죄, 부족함이라는 말은 우리를 겸손한 존재로 만들기 보다 위험한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어차피 그런 존재야, 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을 가진 존재로 말이다.

 

3. “가까이 오지 말라, 신발을 벗으라”는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절규가 들린다. “주님,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쉼이 없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쉬지 못하며 산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계속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기 바라는 것, 누군가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것, 그래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쉼은 묘연한 것이다.

 

4.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증명하려는 모세를 멈춰 세우신다. 그리고 신발을 벗기신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증명해야 할 것이 더 이상 없다. 불필요하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필요도 없다. 있는 그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은 모세를 아신다. 하나님 앞에서는 신발까지도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더 이상 가야 할 길이 없으니 신발을 신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쉼, 안식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고단한 모세의 인생에 쉼을 주신다.

 

5. 우리가 얼마나 피곤한 인생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쓰며 산다. 모세가 그랬다. 그는 이집트의 왕자로 왕궁에 살면서 자기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쓰며 살았다. 그러다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나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를 쓰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너 자신을 나에게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며 산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너무 피곤하게 만드는 세상에 살고 있다. 존재가 증명되지 않으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세상. 말 그대로 피로사회다.

 

6.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했던 이집트 왕궁에서의 삶과는 달리 미디안 광야에서의 삶은 모세에게 훨씬 더 가벼웠을 것이다. 뭔가를 증명해야 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채우는 일이다. 뭔가 있어야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뭔가를 증명할 필요 없는 일은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비워냈기 때문에 특별히 보여줄 게 없다. 그렇게 모세의 시간은 흘러간다. 출애굽기 2장과 3장 사이에는 큰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모세의 삶 속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사건이 발생한다.

 

7. 평소와는 달리 모세는 광야 서쪽으로 양 떼를 몰고 갔다. 우리말로는 ‘광야 서쪽’이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어는 ‘광야 서쪽’이 단순히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모세가 평소에 다녔던 길이 아니라 미디안 지경을 벗어난 새롭고 낯선 먼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 발생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말이 ‘광야 서쪽(아하르 하미드바르)’인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이야기가 진행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정도의 긴장감을 뜻하는 말이 될 것이다.

 

8. 광야 서쪽으로 가서 모세가 도달한 곳은 ‘하나님의 산 호렙’이다. ‘호렙’은 어원상 ‘폐허’ 또는 ‘흙더미’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 호렙산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이러하신 분이라는 것은 성경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특별히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는 아무것도 아닌 여인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 자신을 일컬어 ‘비천한 종’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곳,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그 소식은 천사에 의하여 아무것도 아닌 자들인 목자들에게 먼저 알려졌다.

 

9.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곳,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통해서 이 땅에 오셨고, 모세가 아무것도 없는 곳(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안다면, 큰 것, 화려한 것, 놀라운 것에만 마음을 쓸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향해서도 늘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작은 것, 누추한 것, 별볼일 업는 것을 업신여기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것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10.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도시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면 모세는 그것을 알아보았을까. 화려한 네온사인에 비하면 불타는 떨기나무는 초라하다. 아무것도 없는 호렙이니 불타는 떨기나무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독교 영성은 비워내기에 집중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느라 성전의 장식이 화려해질 때 오히려 하나님은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화려한 성전을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나간 은둔 수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세례 요한 아닌가. 요한복음에 보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가서 정체를 물었을 때, 요한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 1:23).

 

11.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은 이집트 왕궁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광야였다. 이집트 왕궁에 있었을 때 모세는 나름대로 ‘사명감’이 넘쳤었다. 동족 이스라엘의 아픔이 눈에 들어왔고,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동족의 아픔을 해결해 보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였다. 사명감없이 어떻게 모세가 사람(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 다툼을 향한 그의 개입은 우발적인 게 아니라 계획적이었다. 그런데 모세는 바로 그 사명감 때문에 이집트 왕궁에서 쫓겨나 미디안 광야에서 나그네 신세가 되었다. 이제 모세에게는 아무런 사명도 없다. 그냥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떼들을 돌보는 평범한 목동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12. 우리는 때로 왕궁에 있었던 모세처럼 사명 콤플렉스에 빠지곤 한다. 한 때 한국교회에서는 ‘사명 선언서 쓰기’ 붐이 인 적 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래서 그때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명 찾아 삼만리를 떠나야 했다. 사명은 좋은 것이다. 사명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사나. 그런데 문제는 사명이 없으면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교회가 아닌 것처럼, 사명 콤플렉스에 빠져 사명만 있고 삶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데 있다.

 

13. 사명에 불타 살았던 왕궁 시절과 사명 없이 살았던 광야 시절 둘 중에서 모세에게 어느 시절이 더 행복했을까? 모세의 왕궁 시절은 모세에게 사명만 있고 삶은 없는 시절이었다. 사명 때문에 자기의 삶을 잃어버린 시절이었다. 그런데, 모세의 광야 시절은 모세에게 사명은 없지만 삶은 있는 시절이었다. 사명만 있고 삶은 없는 시절과 사명은 없지만 삶이 있는 시절 중 어느 시절이 더 행복할까? 너무도 자명하지 않는가. 사명은 없지만 삶이 있었던 광야 시절이 더 행복했다.

 

14.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명이 없어도 괜찮다. 사명 때문에 삶을 포기하지 말라.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사명보다 삶이 중요하다. 모세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준다. 삶보다 사명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세의 왕궁 시절은 모세에게 비참한 결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사명은 없었지만 그냥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았던 모세의 광야 시절은 모세에게 영광을 안겨주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날, 모세는 아무것도 없는 곳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사명감에 불타고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그냥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오신 것이다.

 

15. 우리는 본문에서 많이 성장한 모세를 만난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밝히 드러내신다. 계시의 순간이다. 감추어진 일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애굽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겠다는 구원 계획을 밝히신다. 그리고 바로 ‘너 모세’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모세였다면, 그 말을 들은 즉시, ‘아멘’하면서 그 일을 감당하겠다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절).

 

16. 내가 누구이기에. 미 아노키. Who am I? 마음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대답이다. 하나님에게 대하여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성숙한 모습이다. 모세는 왕궁에서 살면서 어쩌면 이 질문을 한 번도 진지하게 던져보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모세는 이제 광야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호렙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모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워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민수기 12장 3장에서는 모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17. 요즘의 교회를 보면 중세의 신앙으로 회귀한 듯할 때가 많다. 신앙은 삶인데, 어느덧 신앙이 사명으로 뒤바뀌어 있는 듯하다. 삶은 없고 사명만 있다. 공덕을 쌓아서 천국에 들어가려 했던 중세의 신앙인들처럼 우리 시대의 신앙인들은 사명을 성취하여 천국에 들어가려는 듯하다. 사명은 우리 시대의 공덕이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공덕을 쌓기 위해 성물을 모으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선행이 유행했다. 중세의 거지들은 본인들을 통해 사람들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거라며 자부심을 가졌고, 그래서 직업 거지들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공덕을 쌓아서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은 공덕을 쌓을 거리가 필요했기에 조작된 성물을 사들이거나 거지들을 일부러 방치해 두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삶은 없고 공덕만 존재하는 상황인 것이다.

 

18. 공덕에 사로잡히면 삶이 눈에 안 들어온다. 사명에 사로잡히면 삶이 눈에 안 들어온다. 사명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의 삶은 눈에 안 들어오고 그들의 죄나 그들이 나와 같지 아니한 것만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사명에 사로잡힌 사람은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굴게 되기 십상이다. 모세가 바로 그랬다. 상대방의 삶이 들어온 게 아니라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만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들의 잘못에 개입하려다가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라며 저항을 받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모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자식을 대하면 자식의 삶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식이 잘못하고 있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부모는 자식을 훈육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모세처럼 자식을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대하게 된다.

 

19. 사명이 아니라 삶이 먼저다. 미디안 광야에서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찾아오신다. 신학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 오셔서 살다 보니 십자가를 지게 되셨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비슷한 논쟁이다) 우리는 신앙고백 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한다. 이 고백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신앙고백은 발생한 일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라기 보다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살다 보니 십자가를 지게 되신 것이다. 삶이 먼저이지 사명이 먼저가 아니라는 뜻이다.

 

20. 사명이 없어도 괜찮다는 말은 사명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명은 삶 속에서 하나님과 사귀어 살다 보면 그 사랑 안에서 신비한 방식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나에게 임하는 삶의 한 형태이지, 삶과 사명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무슨 사명을 받은 거지, 나는 무슨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 라고 하면서 사명을 받지 못한 삶인 것 같아서, 또는 사명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힘들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명은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사명자로 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21. 삶은 없고 사명만 있는 자는 왕궁의 모세처럼 얼마 가지 못해 무너진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를 성찰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가는 자는 어느 날 사명이 주어지면 그 사명을 잘 감당한다. 삶과 사명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명이 없어도 괜찮다. 사명을 통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증명하라고 말하지 않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모두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주님의 품이 너무 좋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26. 05:28

고통 소리 내기 (groaning)

출애굽기 2:11-25

 

1. 요즘 전염병의 난 때문에 혼란하고 싱숭생숭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종교계에서는 우리 시대를 보듬고 안아주었던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 가톨릭 신부였지만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종교 평화 운동에 앞장서 오신 한스 큉 교수가 얼마전 돌아가신 데 이어,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라고 절실하게 외치며 기독교의 교리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돌아봐야 한다고 하셨던 성공회의 존 쉘비 스퐁 주교가 소천하신 데 이어, 불교의 대중화와 종교 평화 운동(세계 평화 운동)에 큰 기여를 하신 틱낫한 스님이 입적했다. 모두 90세 이상 사시며 장수하셨다. 종교계의 스승들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곁에 머물다 가셨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2. 위대한 종교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들려오는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의 위대한 종교인들은 사람에게서 들려오는 고통 소리에 주로 귀를 기울였다면, 산업화 이후의 위대한 종교인들은 사람과 그리고 더불어 자연에게서 들려오는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람이고 동물이고 자연(식물)이고 할 것 없이 고통 가운데 있다는 증거이다. 문제는 모든 생명체가 내고 있는 이 고통 소리를 우리가 듣고 있는가, 아닌가에 있을 뿐이다.

 

3. 본문의 이야기는 장성한 이후의 모세에게 발생한 일을 들려주고 있다. 모세는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주 중요하고 훌륭한 민족의 지도자인 동시에 종교 지도자였다. 위대한 종교인들이 고통 소리에 귀 기울였듯이, 모세에게도 위대한 (민족)종교 지도자의 자질이 보인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11절).

 

4. 장성한 모세가 세상에 나가서 본 것은 ‘고되게 노동하는 자기 형제들’이었다. 사실 왕궁에서 자란 모세가 세상에 나가서 ‘고된 노동’을 보았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왕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귀족의 화려한 생활이나 사치, 또는 질서가 잘 잡힌 계급사회를 보면서 자기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흡족해 하며 자신의 왕궁 생활에 도취되어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이나 폭력 등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모세의 눈에는 ‘고된 노동’과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고통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5. 모세의 고통 소리 듣기는 이집트에서만 발생한 일이 아니다. 그가 고통 소리를 들은 일 때문에 정의를 행하다 오히려 살인자로 몰려 이집트를 떠나 도망자 신세가 되어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에, 그는 미디안의 우물가에서 들려온 고통 소리를 듣는다. 광야에서 우물은 생명줄이다. 미디안 광야의 한 우물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그곳에서 발생한 다툼에 끼어든다. 힘센 남자 목동들이 힘없는 여자 목동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약자의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었다.

 

6. 민수기에서 보는 모세의 모습처럼 성숙한 모습은 아니지만,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는, 성장한 이후의 모세의 모습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그가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고통 소리를 들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성숙한 모습을 모이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우선 중요한 것은 고통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으냐, 고통 당하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일단 고통 소리가 귀에 들려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7. 그런데 본문에 보면, 고통 소리 듣기’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고통 소리 내기’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영웅적 탄생 이야기나 타지 않는 떨기 나무에서의 하나님과의 신비한 조우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영웅적 이야기를 듣고 너무도 빨리 그 영웅이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로 곧바로 달려가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 멈추어서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 이야기는 장성한 모세가 고통 소리를 들은 것 때문에 발생한 고통스러운 이야기이다. 이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의 존재뿐 아니라 신앙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너무도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8. 여러 가지로 고통스러운 팬데믹 시대를 보내면서 이 고통을 이겨보려고 나름 몸부림치면서 읽은 책 중에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저서 <고통 없는 사회>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꿰뚫어볼 수 있는 좋은 안목을 선물해 주었다. 한병철은 우리 시대를 ‘진통사회’, 즉 고통 없는 사회로 명명한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사는 시대, 우리가 사는 사회는 고통을 싫어하는 사회, 고통을 없애려는 사회, 마치 우리 눈앞에 있는 고통을 없는 것처럼 여기려는 사회라는 것이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서 사회적 문제로 지적된, 진통제의 남발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9.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는 그토록 고통(통증)을 마치 없는 것처럼 없애려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한병철 교수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진통사회와 성과사회는 서로 조응한다. 고통은 약함의 신호로 해석된다. 고통은 숨기거나 최적화를 통해 제거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고통은 성과와 병립할 수 없다. 고통의 수동성은 능력에 의해 지배되는 능동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다. 오늘날 고통은 모든 표현 가능성을 빼앗긴다. 고통은 침묵을 선고받는다. 진통사회는 고통을 격정(passion)으로 활성화하고 언어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12쪽).

 

10. 이것은 이 땅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이 자취를 감춘 원인이기도 하다. 코미디는 ‘풍자’를 매개해서 웃음을 자아내는 장르이다. 대개 코미디에서 풍자되는 것은 정치이다. 정치풍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고통을 코미디로 승화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에서의 고통을 더 부각시켜 보여준다. 그래서 코미디는 민중의 저항운동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는 더 이상 고통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병철 교수가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진통사회는 “고통을 격정으로 활성화하고 언어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통사회에서는 코미디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1. 그러면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는가. 전 분야에서 예능만 넘쳐날 뿐이다. 고통을 없애는 일, 진통, 즉, 위로만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코미디와 예능이 다른 점은 코미디는 위에서 말한대로 우리의 감추어진 고통을 풍자의 방식을 통해 드러내 놓지만, 예능은 반대로 우리의 드러난 고통을 위로의 방식을 통해 감추어 버린다. 그래서 지금 모든 방송은 예능화되었고,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너 나 할 것 없이 예능인이 되어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위로의 방식으로 감추느라 여념이 없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령 후보자들이 예능의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보면 예능화가 얼마나 깊고 넓게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12. 우리는 행복을 강요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실상은 행복하지 않은데, 행복을 말하지 않으면 ‘루저’로 낙인 찍힐까 봐, 사람들은 ‘난 행복해’를 자기 최면 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각종 SNS를 자기 최면의 도구로 활용한다. SNS에 불행한 모습을 올리는 사람은 없다. 모두 ‘행복한 모습’만 올린다. SNS는 마치 누가 더 행복하게 사는지 뽐내는 공간 같다. 사람들은 그곳에 올라온 타인의 행복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지지 않으려고 조작된 행복을 올리기도 한다. 마치 자신에게는 아무런 고통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13.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고통 소리를 듣기 쉽지 않다. 모두 겉으로는 행복한 척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 소리 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시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좀처럼 고통 소리를 내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보면서 대학생들이 더 이상 ‘데모’하지 않는 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 대학생들이 더 이상 데모를 하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에 더 이상 데모할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고통을 표현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고통을 표현하면 ‘루저’로 낙인 찍히는 기이한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4. 출애굽기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본문을 뽑으라면, 2장 23절에서 25절이다. 모세를 죽이려던 애굽 왕이 죽었다는 기사와 더불어, 무엇보다 비로소 ‘하나님’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헤세드의 하나님, 즉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밑도 끝도 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관계 속에 계신 분이시다.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그 언약을 지키시고, 그 언약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현재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그 언약에 따라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우리의 신앙은 밑도 끝도 없는 신앙이 아니라 언약 안에 있는 신앙, 즉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신앙(relational faith in God)이다.

 

15. 언약의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출애굽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했던 일이다. 그들이 애굽에서 한 일은 고된 노동이지만, 그 고된 노동을 하면서 ‘고통 소리 내기’를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출애굽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신앙의 지혜, 또는 삶의 지혜가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고통 소리를 쉬지 않고 냈다는 것이다. 이게 왜 신앙의 지혜이고 삶의 지혜이냐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 내기를 통해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고통 소리 내기가 없었으면, 아마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출애굽 하지 못했을 지 모른다.

 

16. 이것은 마치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시각장애인 바디매오의 이야기와 같다.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사역하실 때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데 길 가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는 지금 지나가는 분이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 시끄러운 소리로 예수를 불러 대는 바디매오를 보고 사람들은 꾸짖었다. “조용해!” (고통 소리 내기를 가로막는 자가 가장 못된 사람) 그런데, 사람들이 심하게 꾸짖을수록 바디매오는 더 큰 목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예수의 은혜를 간구했다. 바디매오는 예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통 소리 내기’를 실행함으로 인하여 잃었던 시력을 되찾고 구원을 받는다.

 

17. 출애굽기를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깨달어야 하는 신앙적 통찰은 출애굽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물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이라는 선행적 은총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 내기’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고통 소리 내기)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23절). 이스라엘의 고통 소리 내기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나게 하였고, 그 자손들을 돌보게 하였다.

 

18.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의 시간이 줄고 예배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줄고, 또는 교회에서의 예배와 프로그램이 점차 ‘entertainment 예능’화 되어가는 것도 고통을 표출하지 않고 위로를 통해 고통을 없는 것처럼 감추려는 이 시대의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 소리 내기’가 사라지니,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마치 하나님의 역사(구원)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바디매오처럼 ‘고통 소리 내기’를 하는 이가 없으니, 교회는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지루하고 따분한 곳이 되어가는 것 같다.

 

19. 삶에 문제가 있는데 왜 ‘고통 소리 내기’를 하지 않는가. 왜 기도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고, 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않는가. 왜 목사를 붙잡고 우는 사람이 없고, 왜 아무렇지 않은 듯 웃기만 하고, 왜 위로만을 바라면서 TV예능 같은 것에만 몰두하는가. 고통 소리 내기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신앙인들)이 잃어버린 귀중한 삶(신앙)의 유산이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의 신앙이 더 훌륭하다) 요셉은 임종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예언과 축복의 말씀을 전한다.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창 50:24). 여기서 ‘파카드(돌보시고)’라는 동사가 쓰이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라는 간절한 소망과 예언이 담긴 말이다.

 

20. 고통 소리 내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통로이다. 진통사회, 고통 없는 사회에서 ‘고통 소리 내기’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은 ‘고통 소리 내기’를 가장 두려워한다. 고통 소리 내기는 고통을 지목하고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 소리를 내면 ‘조용히 해’라며 고통 소리 내는 것을 못하게 하거나, 고통 소리 내는 것은 ‘루저’나 하는 일이라고 폄하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아 고통 소리 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고통 소리 내기는 하나님이 그 고통의 자리로 오시게 하는 축복의 통로요, 그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신비의 통로요, 고통으로부터 구원받는 은총의 통로이다. 우리 함께 다짐해 보자.

 

“나는 고통 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18. 11:16

잘생긴 모세

(출애굽기 2:1-10)

 

1. 창세기 1장과 2장에 보면, 각각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1장에서는 7일간에 걸친 창조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데,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먼저 조성되고 나서 인간은 제6일에 창조된다. 제 6일에 창조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축복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그리고 2장에서는 인간 창조에 대한 사뭇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1장과는 달리 남자가 독처(혼자 지내는 것) 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시고, 남자에게 여자를 ‘돕는 배필’로 지어서 주시는 것을 본다.

 

2. 창세기 2장의 이야기를 보면,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그 이후에 여자가 창조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만든 것으로 나온다. 하나님은 아담(남자/이쉬)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만든 여자(하와/이샤)를 이끌어 아담에게 주신다.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여자(이샤)를 보고 아담(이쉬)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4-25).

 

3. 인간 창조에 대한 이 두 이야기는 분명 인간의 본성, 특별히 사회적 본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본성을 위해서 남자와 여자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일,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본성(fundamental nature) 이라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본성(nature)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면, 그렇지 않고서 출애굽기 2장의 시작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4. 요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 중 하나는 출산율의 저조이다. 출산율 저조로 인하여 한국은 지금 ‘인구절벽’을 경험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결혼도 별로 안 할 뿐 더러, 결혼을 해도 아기를 갖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혼도 안 하고, 아기도 낳지 않으니, 인구절벽을 경험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사회가 고령사회로 변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미래이다. 그런데, 한국의 사회적 현실을 보면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결혼을 하거나 아기를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너무너무 거칠기 때문이다. 인간의 번영은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창조도 가장 마지막 날인 제 6일에 이뤄진 것 아니겠나.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

 

5. 출애굽기 2장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고된 노동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왕의 명령으로 인하여 사회적 집단 살해(genocide)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으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 것일까. 너무 무모해 보인다. 1장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이 끔찍한 말로 끝나지 않는가.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무슨 병아리를 낳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낳는 것인데,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꼼짝없이 죽여야 할 상황인데,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는 일은 매우 무모한 일이고 비상식적인 일처럼 보인다.

 

6. 분명 수많은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던져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이 더 윤리적인 행동 아닌가. 아기를 낳으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낳는 것 자체가 살인 아닌가.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의 본성만 생각하고 태어날 아기에 대해서는 너무도 배려를 하지 않는 것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들인가. 출애굽기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생기는 출산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7. 모세의 출생 이야기가 담긴 출애굽기 2장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2절이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레위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았으니 마땅히 나일강에 던져 죽여야 한다. 그런데 죽이려 보니까 그 아이가 ‘잘생긴 것을 보고’ 죽이지 못하고 살려 두었다. 그러면 그동안 못생긴 남자 아이들은 죽임을 당했던 것일까. 못생기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면 현빈이나 송중기, 정우성 같은 남자만 살아남고 나머지 남자들은 다 죽어야 하는가. 외모지상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이 보면서 딱 걸려 넘어지기 쉬운 구절이다.

 

8. 모세에게 붙은 수식어, “잘생긴”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외모가 수려했다’는 뜻일까. 잘생긴’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브’이다. 레위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는 ‘잘생긴 아이(fine boy. Fine child, beautiful child)’였다. ‘토브’가 처음 등장하는 성경은 창세기 1장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면서 ‘좋다(토브)’라고 하시며 흐뭇해 하셨다. 출애굽기가 창세기와 분리된 성경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성경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는 아기 모세를 보고 ‘잘생긴(토브)’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모세의 탄생, 또는 모세는 새로운 창조이고 창조의 활동이다. 아기 모세에게 ‘토브’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그를 통해 무엇인가 예상할 수 없는 ‘창조의 일’이 발생할 거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9. 창세기 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 중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다. 세상은 죄로 가득했고,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한탄하시며 세상을 물로 심판하려는 계획을 당대의 의인 노아에게 알려주신다. 노아는 하나님의 아름다운(토브) 피조물들을 구원하기 위해 창조의 일을 시작한다. 바로, 방주(ark)를 만드는 일이었다. 노아는 방주를 창조해 피조물들을 구원한다. 이처럼 창조에는 구원의 목적이 담겨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창조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구원의 개념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곧 구원 행위이다.

 

10. 모세의 탄생이 창조와 구원의 드라마라는 것은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토브’한 아이는 점점 성장했고, 3개월이 지나자 더 이상 숨길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모세를 구원하기 위해서 ‘갈대 상자’를 만든다. 상자(테바)는 노아가 만든 방주와 같은 단어이다. 노아는 사람들(피조물들)을 홍수(물)에서 살려내기 위해서 ‘테바(방주)’를 창조했고, 모세의 가족들은 모세를 나일강(물)에서 살려내기 위해서 ‘테바(상자)’를 창조했다. 모세의 갈대 상자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의미이다. 물에 의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11.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모세의 가족들은 모세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으로 떠내려 보낸다. 모세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일단 나일강에 바로 던진 것이 아니라 갈대 상자에 담아서 나일강에 풀어놓아 죽음을 지연시키긴 했어도 결국 죽게 될지, 아니면 구원을 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모세의 탄생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토브(선함/아름다움)’가 등장한다. 이집트 왕(바로)의 딸의 마음이다. 나일강에서 목욕하던 바로의 딸은 갈대 상자 안에 놓인 ‘히브리 사람의 아기’를 보고 ‘불쌍히’ 여긴다.

 

12. ‘히브리 사람’은 ‘노예 계급’이라는 뜻이다. 왕족이 노예 계급을 향해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왕의 명령까지 있던 상황에서 왕의 딸이 노예 계급의 아이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를 죽이지 않고 자기의 보호 아래 있는 아들로 삼는 것은 단순히 훌륭한 일이 아니라 ‘새창조의 역사’이다. 창조의 일은 이렇게 ‘토브’를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어떠한 선한 일, 아름다운 일, 그래서 생명이 살아나고 풍성해지는 것을 보면 단순히 좋은 일, 훌륭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토브(선하고 아름다운 것)’는 하나님의 창조에 배어 있는 하나님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만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토브(선하고 아름다운 것)’를 경험했거든, 주님을 찬양하라.

 

13. 잘생긴 모세. 이것은 모세의 외모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잘생긴 모세. 이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신학적 진술이다. 고된 노동과 살해의 위협 속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했다는 것은 그들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토브’가 임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14.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의 역사를 멈추지 않으신다. 잘생긴 모세의 탄생, 그것이 그 증거이다. ‘토브’가 탄생했다는 것,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생긴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죽이지 않고, 모세를 구원하기 위해 갈대 상자를 창조했다. 그리고 실제로 구원의 갈대 상자는 이집트 왕의 딸을 통해 ‘구원’을 성취했다. 모세의 이름은 뜻은 ‘물에서 건져냄’이다. 이 이름은 앞으로 발생할 또다른 창조와 구원에 대한 예언이고 기대이다.

 

15. 지켜야할 소중한 것이 있는가.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라.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인생/삶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반드시 드러날 것이다. (자기 몸을 쓰다듬으며, ‘사랑해’라고 말해보라.)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들이 참 많다. 나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 친구들, 일터, 나라, 지구. 그리고 우리 신앙의 공동체 교회. 죽음의 위기에 처해져 있었지만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가족들의 사랑 덕분에 모세는 살았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운 구원의 은총이 임했다. 그래서 모세의 인생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양이 되는 인생이 된 것 아닌가.

 

16. 우리도 모세처럼 잘생긴 사람이 되면 좋겠다. 사실 우리는 이미 잘생긴 사람으로 태어났다. 부모님 품에 안긴 우리들을 보고 하나님은 이미 ‘토브’라고 말씀해 주셨다.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 잘생긴 사람.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 창조의 일을 하고, 구원의 일을 하는 사람.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는 사람. 그리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고 보았을 때,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 그렇게 우리 모두 잘생긴 사람이 되면 좋겠다. “당신 참 잘 생겼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11. 10:37

십브라(Shiphrah)와 부아(Puah)

(출애굽기 1:15-22)

 

1. 21세기는 가히 동영상의 시대다.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여 자기 자신을 뽐낸다. 다른 말로 하자면, 21세기는 가히 ‘드라마’의 시대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갈망하는 시대, 동영상 드라마가 쏟아지는 시대, 드라마 시청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대다. 책을 보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동영상을 보는 사람은 넘쳐나고 있다. 옛날에는 “읽은 책 중에 무슨 책이 가장 기억에 남는가?”가 질문이었다면, 이제는 “시청한 드라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는 무엇인가?”로 바뀌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슨 드라마가 가장 기억에 남는가?

 

2. 나는 개인적으로 <사랑이 꽃피는 나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4년 여에 걸쳐 방영된 이 드라마는 그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나의 청소년기와 함께 했던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스타덤에 오른 패표적인 연예인은 최수종과 이미연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수많은 스타들이 배출되었다. 최재성과 최수지도 그들 중에 포함된다. 지금 시대 사람들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꿈꾸는 이유는 아마도 드라마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를 하도 많이 보다 보니, 드라마틱한 인생을 꿈꾸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3. 성경이 문자로만 전달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만약 성경을 다시 써야 한다면, 문자보다는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배포하면 지금 시대에 더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될 거라 생각한다. (대한성서공회에서 성서 보급을 위해서 이런 거 기획하면 좋겠다.) 최고의 작가들, 배우들, 감독들, 그리고 최신의 촬영기법을 동원하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드라마 형태로 동영상을 제작하여 성경을 다시 재구성한다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어떤 드라마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성경의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 드라마’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이 되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책 자체를 읽기 꺼려하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성경 좀 읽으라’고 권면 또는 강요한다고 성경을 진지하게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하기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최고의 출연진과 제작진을 투입해 성경을 드라마로 제작해서 시청하도록 권면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성경을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4. 이러한 생각이 생뚱맞은 것은 아니다. 중세시대, 모든 성경이 라틴어로 보급되고, 모든 예전이 라틴어로 진행되던 때, 그러나 라틴어를 읽을 줄 알고 알아들을 줄 아는 이들이 별로 없었던 때, 성직자들이 성경과 예전을 독점하고 있었을 때, 일반 대중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복음)을 알린 것은 글자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그림(성화)는 ‘가난한 자들의 성경’이라 불렸다. 성경이 비싸서 가난한 자들이 살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림은 직관적으로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그것에 대하여 상상하고 묵상하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에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갔다. 이처럼, 라틴어를 모르는 중세인들에게 그림을 통해서 성경의 이야기(복음)를 전달했듯이,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세대에게 드라마(동영상)를 통해서 성경을 전달하는 것은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사명이 아닐까, 화두를 던져 본다.

 

5. 내가 만약 출애굽기를 드라마로 제작하는 감독이라면, 본문에 등장하는 십브라와 부아 역에 김태희와 손예진을 캐스팅 하겠다. 그만큼 비중 있게 다루겠다는 뜻이다. 십브라와 부아,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반드시 사람들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독의 의도가 아니라, 성경 저자(작가)의 의도이다(하나님의 뜻이다.). 본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한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15절). 애굽 왕은 보통 ‘바로’라고 표현되거나, 아니면 그 왕의 이름을 거론하여 표기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혀 그러한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출애굽기의 저자(작가)는 매우 의도적으로 ‘애굽 왕’이라고 적음으로써 왕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

 

6. 그러나, 이름 없는 왕과 매우 대조적으로 히브리 산파들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십브라와 부아.” ‘히브리(Hebrews)’라는 용어는 ‘하피루(hapiru)’에서 온 말로 그 당시 이집트 사회에서 ‘하층 계급의 사람들(low-class folks)’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상식적으로 후대에 기억되어야 할 사람은 애굽의 왕이고 전혀 기억될 수 없는 사람은 하층 계급 취급받았던 ‘십브라와 부아’이다. 그러나 성경은 전복적으로 기록한다. 애굽 왕의 이름은 전혀 기억하지 않고, 하층민이었던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이게 성경이 가진 멋진 전복성이다. 하나님의 신비.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가 되는. 놀라운 신비.

 

7.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마주하는 세상은 ‘살고 싶은’ 드라마틱한 세상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드라마틱한 세상이다. 위협적인 왕,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반항하는 산파들.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하나 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캐릭터들이다. 게다가 우리는 점점 심해지는 핍박을 본다. 요셉을 모르는 애굽의 새로운 왕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된 노동을 부과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생명 자체를 해하려 한다. 그래서 애굽 왕은 산파들을 불러 ‘히브리 여인들이 아기를 출산할 때 돕다 그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후, 산파들이 본인의 명령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자, 생명을 해하려는 계획은 국가적 차원에서 구조적으로 실행된다.

 

8. 쥐는 삶의 질에 대한 바로미터다. 쥐가 시도때도 없이 출몰하는 지역에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한 지역의 삶의 질은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다. 쥐는 가난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는 도둑 대신 쥐가 드나드는 법이다. 못사는 나라일수록 위생의 문제 때문에 쥐가 들끓기 마련이다. 어린 시절, 한국이 지금처럼 부유하지 못할 때, 매일 아침 일과 중 하나는 집안에 설치해 놓은 쥐덫에 잡힌 쥐를 집 앞 개울물에 가서 죽이는 것이었다. 매달아 놓은 고구마를 먹으려고 쥐덫에 들어왔다 잡힌 쥐는 개우물에서 어린 아이의 불타는 사명감에 의해 생명을 잃었다. 지금 본문에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동일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22절).

 

9. 쥐와 같이 하찮은 미물 취급을 당하는 히브리 사람들, 더 정확하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생존했을까? 국가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저질러지는 인간말살(genocide) 정책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하층 계급(low-class)’이었던 이스라엘이 생명을 잃지 않은 데에는 ‘보이는 거대한 힘’을 압도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생명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이 꽃피는 이야기다. 생명이 꽃피는 나무.

 

10.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이 꽃피는 이야기는 두 가지의 큰 줄기를 통해서 전개된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내재된 생명력, 즉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이고, 다른 하나는 십브라와 부아의 용감하고 지혜로운 행동이다. 우리는 십브라와 부아가 꽃피는 생명에 대해 집중해 보려고 한다.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는 유명한 현대여성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당한 것은 나치에 의해서가 처음이 아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도 대학살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다만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서 일어난 아우슈비츠 대학살이 우리에게 시간적으로 가까운 역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떠올리게 될 뿐이다.

 

11. 한나 아렌트뿐 아니라 2차대전 때 나치에 의해서 자행된 아우슈비츠 대학살(홀로코스트: 이 말은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다. 제물을 불러 태워서 드린 번제를 가리키는 말이다)에 대한 반성은 그 사건을 경험했던 20세기의 모든 서구 철학자들에 중요한 과제였다. “왜, 어떻게 이러한 일이 발생했을까?” 이 질문을 깊게 파고 들어갔던 두 명의 철학자가 있는데, 하나는 아도르노이고 다른 하나는 한나 아렌트이다. 아도르노는 근대성이 만들어낸 이성에서 그 원인을 찾았고, 아렌트는 그 원인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12.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하고 있는 철학적 개념인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해하는데 있어 본문에서 등장하고 있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만큼 좋은 것도 없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의 주범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하면서 그가 어떤 악마가 아니라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그처럼 거대한 악을 저지를 수 있게 되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언어습관과 그의 ‘생각없음’에 주목을 한다. 그의 언어습관은 매우 관료적(별 생각없이 시키는 일만 하고 상투적인 용어만 사용하는 것)이고, 그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행하는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고, 아주 성실하게 상부의 지시를 따라 행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악의 평범성이란 이런 것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뭔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다만, 그 사람이 아무런 사유(생각) 없이 행동을 하면 거대한 악을 불러오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속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 죽는다.)

 

13. 본문에 등장하는 ‘십브라와 부아’는 아이히만과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들은 생각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생각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만약 산파가 아이히만 같이 아무런 생각없는 사람이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왕에 의해서 구조적으로 진행된 학살정책을 통해 자취를 감추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파들은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극악무도한 명령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었다.

 

14.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생명을 꽃피우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곽이 비로소 뚜렷해진다”(페터 슬로터다이크, <냉소적 이성 비판>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 가진 능력이다. 실제로 홀로코스트가 자행되고 있을 때 ‘아니오’를 실천한 사람이 있었다. 오스카르 쉰들러(Oskar Schindler). 그의 일대기는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에 의해 <쉰들러 리스트>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15. 나는 이 영화를 군대 있을 때 봤다. 하루는 내가 모시던 장군이 밤 늦게까지 안 주무시고 영화를 보시더니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차 안에서 나에게 물었다. “쉰들러 리스트 봤나?” 안 봤다고 대답하니, “꼭 봐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봤다. 그 이후 여러 번 봤다.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쉰들러가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 자책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장면이다. 그때 유대인 랍비는 쉰들러에게 감사의 뜻으로 반지를 주며 이런 말을 한다.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그래서 우리 주님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겠죠.)

16.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생명에 해를 가하는 것에는 무엇이든지 “아니오(No)”를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반대로 생명을 풍성케 하는 것에는 무엇이든지 “예(Yes)”를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예”를 말하는 것에 더 길들어져 있다. 이는 우리가 생명을 풍성케 하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에 해를 가하고 있는 일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아니오”를 하면 불이익을 보게 되는 경우를 이 세상에서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장대한 출애굽 이야기의 첫 장면에 나오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을 마주하며, 생명에 해를 가하려는 일에 맞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아니오’를 말할 줄 알았던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이 성경에 당당히 기록되어 있는 것의 뜻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도 그들처럼 혹시 살면서 생명에 해를 가하려는 일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것을 향하여 ‘아니오’를 말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17. 일부 사람들에게만 기억되었을지 모르는 쉰들러의 이름이 헐리우드 최고 감독의 손을 거쳐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로 거듭나 수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듯이, 그리고 그의 삶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듯이, 언젠가는 ‘십브라와 부아’의 이야기도 좋은 드라마 또는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드라마 또는 영화를 통하여 수많은 이들이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그들처럼 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하여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영감을 얻게 되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우리들부터 우리의 삶 속에서 ‘십브라와 부아’의 이름을 기억하며, 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해서는 ‘아니오’를 말하며 생명을 보듬어가는 용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한 용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 이 세상이 좀 더 생명력 넘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꿈꾸고 소망하며 우리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니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2. 1. 7. 09:08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출애굽기 1:1-14)

 

1. 2020년도도 다 못 산 것 같은데, 벌써 2022년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 중 가장 미스터리 한 것은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똑같은데, 그 시간의 양과 질은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 같다. 시간의 본질은 같은 것일 텐데, 그 시간을 받아는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시간을 살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복된 시간을 살고 있기를 소망한다.

 

2. 우리 나라 말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출애굽기는 ‘베엘레’로 시작하는데, ‘베’는 접속사이다. 즉, 출애굽기는 창세기와 동떨어진 기록이 아니라 이어지는 기록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창세기 마지막에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축복이 출애굽기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접속사이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야곱을 통해 아들들에게 주어진 축복이 어떻게 실현되고 보전되는 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7절).

 

3. 여기까지만 보면, 야곱의 축복은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8절을 보면 분위기가 드라마틱하게 전환된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8절). 지금은 완전 사막으로 변하여 고대 문명의 문화재를 바탕으로 관광산업을 통해 먹고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고대 이집트(애굽)는 매우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는 거대한 강대국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피라미드만 보더라도 고대 이집트 문명이 얼마나 강성하고 풍성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4. 고대 이집트는 한 왕조가 연속적으로 다스리지 않았다. 지금은 정권교체를 할 때 같은 민족, 같은 나라의 어떠한 당이 집권하지만, 고대 이집트 당시에의 정권교체는 완전히 다른 민족이 나라의 주인으로 등극하곤 했다. 그 정황이 8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이집트에도 극적인 변화가 생겼는데, 완전히 다른 민족이 이집트의 정권을 차지했고, 정권을 차지한 민족과 왕은 ‘요셉’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해서, ‘요셉의 신화’에 전혀 영향 받지 않는 민족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5. 자료를 찾아보니까, 2016년도 5월쯤에 발생한 일인데, 그 당시 잘 나가던 어떤 걸그룹이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퀴즈를 푸는 중 안중근을 알아맞히지 못해 대중들로부터 뭇매를 맞은 적이 있다. 젊은 세대가 안중근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중근에 대한 퀴즈를 맞히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안중근의 신화’라고 하는 집단적 윤리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뭇매를 맞은 것이다. 안중근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국민적 영웅으로 ‘윤리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모르거나, 그에 대하여 합의되지 않은, 즉 비윤리적인 해석을 내놓은 사람이 있다면(가령,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은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으로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안중근의 신화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풍요롭게 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을 하나로 모아주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영감을 주는 한 나라의 윤리적 공공재인 것이다.

 

6. 이처럼, 요셉도 이집트에서 이러한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이다. 창세기 41장 이후에 펼쳐지는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활약은 가히 민족적 영웅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요셉의 지혜를 통해 이집트는 가뭄 때문에 망하지 않고 존속했으며, 이집트의 주민들 뿐만 아니라 그 주변 나라들의 주민들까지도 기근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요셉의 신화는 가히 오래오래 사람들의 마음에 머물며 큰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7. 그런데, 그 신화가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안중근을 전혀 모르는 민족이 대한민국의 정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해 보라. 안중근을 전혀 존경하지 않으며 안중근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여도 전혀 감흥이 없거나 영감을 얻지 못하는 민족이 있다고 생각을 해 보라. 안중근의 신화 아래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내 절망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요셉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애굽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니, 요셉의 신화 아래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이 어떨지, 눈에 보듯 훤하다.

 

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복을 받았는데, 바로 그 복 때문에 고난 당하게 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게 된다. 7절에서 보았듯이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했다. 우리가 모두 알고 인정하다시피,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복이다. 이스라엘은 비로소 약속의 성취를 맛본 듯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리신 복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아주 이질적인 왕이 등장했다.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데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9-10절).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거운 노동의 짐을 지워 괴롭게 하고 고통을 준다.

 

9. 어떻게 하루 아침에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복이 갑자기 저주로 바뀌는 순간이다. 하나님이 복 주셔서 번성하고 강해졌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고통 받는 상황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고통으로 바꾸어 놓는다. 요셉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요셉을 모르니,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이 내리신 복이 그들의 눈에 ‘귀하게’ 다가올 리가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복은 ‘찬양과 영광과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대적해야 할 두려움과 위협으로 다가온다.

 

10. 우리는 여기에서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그 무엇보다도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고 신앙은 그 어떤 것보다도 여정이다.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차츰차츰 알아가게 되고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 즉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깊어지고 있는가.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 있는가.

 

11. 요셉과 그의 형제들 간에 발생한 일을 보면, 신앙이 무엇인지 좀 더 알게 된다. 요셉은 ‘꿈 꾸는 자’였다. 그 꿈은 요셉 자신의 헛된 꿈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 즉 비전이자 사명이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꿈을 무시하고 비난했다. 급기야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 질투하여 그를 애굽으로 향하던 노예상에게 팔아 넘기기까지 했다. 무슨 뜻인가? 그 당시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만큼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들의 신앙이 별로 깊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그들은 요셉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지 못했다.

 

12. 결국, 신앙이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는 것이다. 요셉을 노예상에 팔아먹을 때만 해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던 요셉의 형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사하게도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갔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덕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알았던 야곱은 부지런히 자식들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이끌었다. 즉 그들에게 신앙을 주었다(부모의 역할/사랑을 많이 주라. 그 사랑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려주라.). 세월이 흘러, 요셉과 형제들이 만났을 때, 비로소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리신 복을 언급하며 울었을 때, 요셉의 형제들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내리신 복을 알아보고 인정하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창세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13. 출애굽기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또는 하나님을 모르는 열방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출애굽’이 무엇인지를 여기에서 배우게 된다. 출애굽이란 어떤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것, 즉 신앙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탈출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상태,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출애굽이다.

 

14.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지 못해 하나님의 복을 두려워하고 그 복을 위협의 대상으로 생각해 대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막아 서지 못한다. 출애굽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또다른 구약성경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불러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보려고 시도하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막아 설 수 없었다. 발락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가던 발람은 결국 하나님께 이런 음성을 듣는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 22:12).

 

15.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도 막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에게 복을 받은 자는 아무도 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원죄(original sin)’라는 말에 익숙해 있지만, 사실 우리가 더 익숙하고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말은 ‘원복(original blessing)’이다. 신학적으로 말해,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의 의미는 원죄를 넘어서 원복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최초의 축복은 무엇인가? 번성하고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삶을 가로막고 있어 여러분을 두렵게 하거나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거든, 오히려 하나님을 더 힘써 알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신앙이 더 깊어지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더욱더 풍성해지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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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30. 07:37

사랑 받은 사람이 십자가도 진다

(누가복음 2:41-52)

 

1.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가장 선호하는 인물은 ‘솔로몬’이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솔로몬’같은 지혜를 얻어 공부를 잘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사실 솔로몬이 하나님께 간구한 지혜는 공부 잘 하게 해달라는 지혜가 아니라 나라를 잘 통치할 수 있는 지혜였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이 ‘지혜’를 얻어 공부를 잘 하게 되고, 그리고 이 험한 세상에서 자기 앞가림 잘 하며 살아가기를 간구한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은 이렇게 늘 애잔하다.

 

2.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두 번째로 선호하는 인물은 ‘다니엘’이 아닌가 싶다. 다니엘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재상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재상에 올랐기 때문에 그처럼 아이들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래서 아이들이 다니엘처럼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니엘이 선호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친구들 때문일 것이다. 다니엘에게는 세 명의 신실한 친구들이 있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다니엘을 떠올리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다니엘처럼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3. 그렇다. 아이들에게 ‘지혜’와 ‘좋은 친구들’이 있다면, 부모의 입장에서 흐뭇할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얻게 되고, 다니엘과 같이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이야기가 있는 듯싶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솔로몬의 이야기도 좋고, 다니엘의 이야기도 손색이 없지만,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정말로 많은 영감을 준다. 솔로몬의 지혜와 다니엘의 친구들을 간구하는 것은 신앙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거기에서 영감을 얻는 일은 신앙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4. 예수님이 탄생할 때의 이야기 빼놓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는 곳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누가복음 2장 외에는 없다. 열 두 절로 되어 있는 이 짧은 이야기는 아주 깊은 신학적, 인문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아기 예수의 탄생에서 예수의 역할은 매우 수동적이다. 그러나 이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예수의 역할을 매우 능동적이다.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예수이다. 그는 부모님을 따라 순례의 행위로서, 그리고 신앙의 행위로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지만, 그곳에서 행한 일은 매우 독특하다.

 

5.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번,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율법을 진지하게 지켰던 요셉과 마리아는 마을 사람들과 무리를 이루어 4, 5일 걸렸을 순례의 여정을 떠난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잘 도착했고, 예배도 잘 드렸고, 무리들과 함께 집으로 귀환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리 속에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를 찾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성전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예수를 발견한다.

 

6. 그런데,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 간의 대화가 참 흥미롭다. ‘선생들(the teachers)’ 사이에 있던 예수를 발견한 어머니 마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얘야,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걱정하며 찾았는지 모른다”(48절). 당연한 어머니의 반응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49절). 열 두 살 먹은 아이가 어머니에게 하는 대답 치고는 매우 당돌하다. 예수는 부모님이 자신을 찾아 다녔다는 것 자체를 의아해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평소 행동을 생각해 보았을 때, 부모님은 자신을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7. 예수는 나사렛에 있을 때도 언제나 회당에 가서 ‘선생들’과 시간을 보낸 듯싶다. 그래서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제가 어디를 가나 회당에서 선생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뭣 하러 저를 찾아 다니셨어요. 그냥 여기로 오셨으면 바로 저를 찾으실 수 있었을 텐데요.” 그렇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부모들은 괜한 걱정을 한 것이고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맨 것이다. 예수의 평소 습관을 생각했더라면, 요셉과 마리아는 다른 데 갈 필요 없이, 걱정할 필요 없이, 선생들이 있는 곳에 갔으면 될 일이었다.

 

8. 우리는 수많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말씀이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영어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한다. “Why were you searching for me? 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NRSV)”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된다. 예수님은 이미 열 두 살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자의식(self-consciousness)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았고, 또한 자기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할 줄 알았다.

 

9. 열 두 살 밖에 안 된 어린 예수가 보여주는 이러한 자의식과 신앙은 솔로몬에게 있었던 지혜, 그리고 다니엘에게 있었던 친구들과 더불어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간구해야 하는 삶의 자세이다. 지혜를 간구하고, 좋은 친구들을 간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는 자의식을 갖는 것과 신앙의 간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삶의 경지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부모들이 아이를 신앙인으로 키운다는 것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솔로몬과 같은 지혜가 있기를, 그리고 다니엘이 받은 축복처럼 좋은 친구들이 있기를 간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자의식(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기 인식)이 생기고, 그 자의식(self-consciousness)을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God’s purpose for one’s life)과 연결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10. 지혜를 얻는 것도 중요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 두 살 먹는 어린 예수에게서 보듯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즉 순종을 배우는 것은 신앙인의 최고 경지이고 삶의 꽃이다. 우리의 인생이, 또한 우리 자녀들의 인생이 지혜를 얻어서 공부를 잘 하게 되고 그래서 유능한 인재가 되고, 또한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화려한 인맥을 쌓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서만 멈추고 만다면, 그것이 우리가 신앙을 갖는 것의 목적이라면, 이 얼마나 사사롭고 기복적인 신앙이고 인생인가. 믿는 사람의 인생과 안 믿는 사람의 인생이 무엇이 다른 게 있겠는가.

 

11.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우리의 인생을 사사롭고 기복적인 인생에 머무는데 그치게 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공적인 영역으로, 무엇보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구원 사역에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이다. 순종은 운명이나 정치적 강압처럼 우리의 인생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과 평안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영원한 생명)은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순종은 곧 믿음인 것이다.

 

12.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Did you not know I must be in my Father’s house?” 이 말은 한 어린 예수는 그냥 예루살렘 성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보통 사람 같으면 아이를 예루살렘에 머무르게 하고 아이의 명민함을 알아본 선생들에게 맡겨 유학 시켰을 텐데, 어린 예수는 그곳에 머물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 시골로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부모님과 함께 머물며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낸다. 순종은 일차적으로 선생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13. 마지막 구절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리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점점 더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52절).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이 성장하면서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어로는 이것을 ‘in favor with God and men’이라고 표현한다. ‘favor’는 영어의 다른 단어로 ‘grace’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은혜 또는 은총’을 입는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호의(favor)’를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따스한 마음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14.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들로부터만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간구할 때, 우리는 지혜와 좋은 친구들에 대한 간구에 더해서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받기를 반드시 함께 간구해야 한다.

 

15. 예수님의 삶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 십자가 위에서 기꺼이 자기의 생명을 바쳐 죽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단순히 메시아이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는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서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마리아의 태를 통해서 태어났고, 그는 어린 시절을 겪었으며, 그는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오르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기꺼이 달릴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가 살면서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이다.

 

16. 예수님이 살면서 사랑 받지 못했다면,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따스한 마음, 은혜, 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했던 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수포도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 뜻을 이루었다. 바로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 받은 사람이 십자가도 진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결국 구원을 낳는다. 우리 더 사랑하고, 우리 더 십자가를 지자.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은 사람으로서 각자 삶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자. 각자의 십자가를 잘 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서로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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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21. 08:35

마리아, 아베 마리아!

(미가 5:2-5a / 히브리서 10:5-10 / 누가복음 1:39-45 / 누가복음 1:46-55)


1. 기독교는 크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있습니다. 원래는 하나였는데, 1054년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 논쟁’을 통해서 둘로 나뉩니다. 그러고 보면 ‘교리(doctrine)’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견해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분열을 경험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교리’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분열을 경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같은 주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서로 무슨 원수라도 된 것처럼 분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도 아프고,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2. 가톨릭과 개신교는 대표적인 서방교회의 전통을 지닌 교파입니다. 개신교인들에게 동방교회는 매우 낯설지만 가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신교는 가톨릭과 같은 신학적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 아주 가까운 사이죠. 그런데,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때로는 더 심하게 싸우기도 합니다. 한 부모를 둔 형제자매가 남들보다 더 심하게 다투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한 부모를 둔 형제자매가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것처럼, 같은 신학적 뿌리를 둔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것도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3. 개신교(프로테스탄트)는 16세기에 발생한 종교개혁을 통해서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됩니다. 이처럼 개신교는 동방교회로부터 분리된 게 아니라, 서방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파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분리되기 이전에는 한 식구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분리된 이후로 마치 원수처럼 싸웠습니다. 가톨릭 진영과 개신교 진영 간에 참 전쟁도 많이 했습니다. 대표적인 전쟁이 1618년에 발발하여 1648년에 끝난 30년 전쟁이죠. 이 전쟁으로 인해 자그마치 800만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두 진영 간에 좋게 지내는 게 쉽지 않습니다.

4. 그런데, 저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400년 전에 발생한 전쟁이고, 그것도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인데, 우리 한국인들이 그 전쟁 때문에 가톨릭인과 개신교인 사이에 좋지 못하게 지낼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임진왜란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었기에,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이 고통 당했던 전쟁이었기에, 그 전쟁을 통해 일본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수 있으나, 우리가 유럽에서 발생한 400년 전의 전쟁 때문에 서로를 미워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를 보면, 누구에게서 그 미움이 전가됐는지 모르게, 한국의 가톨릭과 개신교는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특별히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일컬어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참 기이한 현상이죠.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랑은 잘 전달이 안 되는데, 미움은 참 잘 전달되는구나.’

5. 개신교인으로서 가톨릭을 생각할 때 가톨릭의 어떠한 교리가 마음에 걸리십니까? 아마도 이 질문에 십중팔구는 ‘마리아에 대한 교리’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개신교인들은 대개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존재를 숭배하는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가톨릭은 정말로 마리아를 숭배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톨릭이 마리아를 숭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개신교인들의 오해입니다. 가톨릭은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숭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개신교에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 신학(Mariology)’입니다. 개신교인들이 마리아에 관해 오해하는 이유는 가톨릭의 ‘마리아 신학’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6. 마리아 신학은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리아 신학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마리아 신학은 기독론(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깊이에서 나온 신학입니다. 종교개혁 전까지 개신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서방교회, 즉 가톨릭 교회만 존재했는데, 그때까지 마리아 신학은 사도신경에서 지금도 우리가 고백하고 있듯이, 마리아의 동정녀 신학과 마리아를 일컬어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떼오토코스)’라고 부르는 신학이 존재했습니다. 우리가 마리아를 ‘동정녀’라고 부르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신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리아를 통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 그리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7. 이러한 신학에 근거를 제시하는 본문이 바로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서 건네는 인사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 1:28). 이 구절을 라틴어의 두 자로 줄여서 표현한 것이 바로 ‘아베 마리아(Ave Maria)’입니다. 한국말로 옮기자면, “안녕하세요, 마리아님!”, 또는 “마리아님, 만세!”입니다. 영어로는 “Hail, Maria.”로 옮깁니다. 그러니까 ‘아베 마리아’는 그냥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이미 거기에는 신학적 고백이 들어간 인사인 것이죠. 위에서 말했듯이, 마리아는 그냥 한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잉태한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고백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개신교인들도 동일하게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로 고백하는 것도 개신교인들의 신앙(교리)에 포함됩니다. 종교개혁자들도 대개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신앙고백은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닙니다. 기독론과 관련해서 마리아에 대한 신학을 전개할 뿐, 그 이상 나아가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개신교는 마리아에 대한 예배적 쓰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중보기도를 하지 않고, 마리아에 대한 찬가를 예배 시간에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를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차이 중 하나입니다.

9. <아베 마리아>는 굉장히 널리 알려진 음악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가 있고, 구노의 아베 마리아가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제목만 그렇지 실제로는 ‘마리아 찬가’가 아닙니다. 곡의 앞 뒤에 ‘아베 마리아’라는 구절만 나올 뿐 나머지 가사는 모두 월터 스콧(Walter Scott)의 서사시 <호수의 여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대중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죠. 제목은 <아베 마리아>이지만 실제로는 마리아에 대한 찬가가 아니라 그냥 대중적인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구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에 멜로디를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슈베르트의 것과는 달리 마리아 찬가입니다. 곡에 마리아 찬가 가사가 붙어 있습니다.

10. 우리는 마리아를 이렇게 교리적으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합니다. 가톨릭은 너무도 발달된 마리아 신학 때문에 ‘여인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하고, 개신교는 마리아 신학이 너무 없고 오히려 가톨릭의 발달된 마리아 신학에 대하여 반발하느라 ‘여인 마리아’에게 주목하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상황이죠. 그러나 우리가 교리적인 접근을 내려놓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이 세상에 존재했던 여인 중에 마리아만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여인도 없을 겁니다.

11. 우리는 마리아에게 교리를 덧 씌워, 평생 동정(The Perpetual Viginity), 하나님의 어머니(The Divine Maternity),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에 덧 붙여진 마리아에 대한 교리 무염시태(The Immaculate Conception / 마리아에게는 원죄가 없다), 그리고 성모승천(The Assumption)을 말하지만, 인간 마리아의 고뇌와 결단에 대해서 쉽게 간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무 살도 안 되었던 한 소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을 때, 그녀가 감당해야만 했던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원하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런 욕망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마리아의 경우에서 보듯이 인생 전체가 바뀌는, 새창조의 역사입니다.

12. 요즘으로 말하면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있던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 즉 자기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에 동참하고 순종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깜짝 놀랐을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웠고, 불안했고, 초초했고, 근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것을 감당했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이것은 그녀의 인생이 통째로 바뀌는 순간이고,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13.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듣고 엘리사벳에게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연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마리아가 받은 수태고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마리아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발생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대해서 털어놓았다면, 아마도 부정한 짓을 저질러 놓고 하나님 핑계 댄다며 곧바로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달랐습니다. 엘리사벳 부부는 이미 앞서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을 맛보았던 이들이라 마리아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14.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순종의 의미와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셨으면 하는 은혜는 사실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는 은혜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은혜에 대한 우리의 욕심과 편견과 왜곡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욕망을 채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새창조 사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새창조 사역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순종의 행위입니다.

15. 물론 이러한 순종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 줄리가 없습니다. 마리아처럼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어,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을 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친놈’ 소리를 듣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러한 순종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한 겁니다. 만약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이 없었다면, 마리아는 끝까지 순종하지 못했을 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순종을 비하하는 말만 듣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가혹한 핍박만 받고 말았다면, 마리아는 어느 날 언덕에 올라 하나님을 저주하며 자신에게 임한 ‘수태고지’를 파기(요즘 말로 ‘낙태’)했을 지 모릅니다.

16. 그러나, 마리아는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그녀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를 낳았고, 그를 길렀으며, 그가 죽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녀가 그러한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곁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순종의 도를 귀하게 여기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간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당신 덕분입니다!” 우리는 서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17. 마리아, 아베 마리아! 우리는  개신교인들이라 예배 시간에 마리아 찬가를 비록 부르지는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마리아의 순종을 기억해야 하고 마리아가 끝까지 순종할 수 있도록 그녀를 보듬어준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거든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새창조 사역에 동참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그러한 순종과 결단을 소중하게 여기며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신앙 공동체가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메리 크리스마스!

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18. 06:35

구원은 온다

(이사야 12:2-6, 스바냐 3:14-20, 빌립보서 4:4-7, 누가복음 3:7-17)

 

1. 빌립보서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바울은 기뻐할 것과 기도할 것에 대하여 말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절).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기뻐해야 할 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기뻐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맞는 생각이기도 하고, 틀린 생각이기도 하다.

 

2. 제임스 스미스가 쓴 <습관이 영성이다>라는 책을 보면, “당신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라는 말을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어떤 사람이 무엇을 욕망하는 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기뻐하는 이유, 또는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욕망의 문제와 관련 있다. 본인이 욕망하던 바로 그것을 손에 넣거나 성취하면 우리는 기뻐하게 되고, 본인이 욕망하던 것에 대하여 좌절을 경험하면 우리는 기뻐하지 않는다.

 

3. 그러니까, 바울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한 것은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주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욕망을 두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우리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망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

 

4.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표지(sign)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참 좋은 말씀이 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3-15).

 

5. 기뻐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분명 믿음의 표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훈련이 필요하다. 기뻐하는 훈련, 그리고 기도하는 훈련. 실 없이 기뻐하는 게 아니다. 소망 없이 기도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고,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 부른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 아닌가.

 

6. 임마누엘 신앙은 어려운 현실을 맞닥뜨리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현실을 뛰어넘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우리가 살펴본 이사야의 말씀과 스바냐의 말씀 안에는 ‘구원’이라는 말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그들은 구원을 갈망했고, 구원을 경험했고, 구원을 증언했다. 그들에게 구원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불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팍팍한 현실이 아니라 그 팍팍한 현실 가운데서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7.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습 3:17, 19). 이러한 문장들은 그냥 상상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깊이 경험한 이들이 온 힘을 다해서 증언하고 있는, 살아 있는 말씀 그 자체다.

 

8. 구약성경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과 기대는 모두 출애굽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 거대한 구원의 경험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작고 큰 일 가운데서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다. 여기서 그들이 구원을 ‘기대’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은 굉장히 묘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구원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 임재하심 자체가 주는 결과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9. 구원이란 가량 이런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나를 찾을 때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본인들 힘으로 해결이 불가능할 때이다. 그 중에서 나를 가장 열렬히 찾는 때는 본인들이 하는 게임에서 어떤 아이템을 구매하고 싶을 때이다. 그때 우리 아이들은 나를 아주 열렬히 찾는다. 아이들은 내가 자신들 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본인들 앞에 나타나면 좋아한다. 왜냐하면, 내가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곧 문제의 해결이기 때문이다. 나의 임재와 나의 임재를 통한 문제의 해결은 그들에게 ‘구원’이 된다.

 

10. 이것은 이해를 돕기 위한 약간의 비유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그 차원이 훨씬 깊다. 우리는 흔히 문제의 해결이 구원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자체이다.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면, 그것 자체가 구원이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는 문제의 해결을 수반한다. 수많은 무리들이 줄지어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 위해 따른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였다.

 

11.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로 구원이 임하는 경우도 있다. 바울이 대표적이다. 바울은 어떤 병을 앓고 있었다. 그 병을 고쳐 달라고 바울은 주님께 세 번 기도했다. 아주 간절히, 아주 깊고 높은 경지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네 은혜가 족하다”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 자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강함은 곧 약함에서 나온다는 고백을 한다. 바울은 비록 병 고침을 받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구원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 전체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12. 구약성경에 면면히 흐리는 구원에 대한 ‘기대’는 세례 요한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렇게 예언한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 3:6). 먹고 살기 정말 힘들었던 시대,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팍팍한 삶의 현실 속에서 구원을 기대하며 세례 요한에게 나아왔다. 구원을 간구하는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13.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례 받으러 나아온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군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그들은 왜 주변에 헐벗은 자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옷을 나누지 않고 두 벌이나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은 왜 굶주리는 자가 있는 것을 보면서도 먹을 것을 나누지 않았을까? 세리들은 왜 부과된 것 외에 더 많은 세금을 부과했을까? 구인들은 왜 사람들에게서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지 못했을까? 이게 참 아이러니컬한 것이지만, 그들은 ‘구원’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구원은 옷 두 벌 가지고 있는 것, 남들보다 음식을 많이 쟁여 놓는 것이었고,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 부당 이득을 취하는 것이었고, 사람들에게서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여 뒷돈을 챙기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4.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들이 행했던 일들은 ‘구원의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무엇이 구원인지를 올바로 가르쳐 준다. 올바른 구원을 알고 나면 그들은 더 이상 거짓 구원을 행하느라 삶을 낭비하거나 죄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6-17).

 

15. 옷 두 벌을 가지고 있고, 먹을 것을 쟁여 놓고, 부과된 것 외에 더 거두고, 강탈하고 거짓으로 고발하고, 받는 급료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떠한 행위를 가리킨다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언어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표지판이 되어 구원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을 안다면, 당연히, 너무도 당연히, 우리에게는 두 벌의 옷이 필요 없고, 음식을 쟁여 놓을 필요 없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고, 부과된 것 외에 더 거둘 필요도 없고, 강탈하거나 거짓으로 고발할 필요도 없고,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할 필요도 없어진다. 한마디로, 강퍅하게, 악하게 사는 이유는 구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6. 우리는 왜 기뻐하고 기도하는가? 우리는 왜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도 기뻐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데도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기뻐하라. 기도하라. 구원은 온다.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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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2. 7. 09:26

대림절과 메타노이아

(말라기 3:1-4 / 빌립보서 1:3-11 / 누가복음 1:68-79 / 누가복음 3:1-6)

 

1.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읽게 되어 있는 성서정과(Lectionary)는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네 개의 복음서는 모두 세례 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관련해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네 개의 복음서 중 마태와 누가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비해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은 누가복음 뿐이다. 우리는 누가복음이 전해주고 있는 세례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2.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부부에게 ‘불임’은 예나 지금이나 큰 고통이다. 세례 요한의 부모도 불임으로 고생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이들은 제사장 가문이었고, 아주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율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 이들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고, 그냥 그렇게 늙어갔다. 이들의 이러한 상황은 분명 구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3.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난 이삭이다. 또한 사사기에 등장하는 불세출의 영웅, 마노아의 아들 삼손이 떠오른다. 또 있다. 엘가나와 한나, 그리고 그들의 아들 사무엘이 떠오른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분명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불임 이야기를 통해서 구약의 이삭과 삼손과 사무엘을 호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이삭과 삼손과 사무엘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세례 요한은 새 이삭, 새 삼손, 새 사무엘이라는 뜻이다. 세례 요한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누가복음은 이 사람을 이렇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4. 요한은 히브리어 ‘요하난’에서 왔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이다. 그의 이름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요하난에 포함된 ‘하난’은 히브리어 ‘테힌나’와 관련이 있고, 그것은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뜻한다. 경건한 사람 사가랴와 엘리사벳, 특별히 제사장직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전 출입을 정기적으로 했던 사가랴는 자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마도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자식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아마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마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엘가나와 한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아주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5. 이러한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에 우리의 마음이 찡해지는 이유는 그러한 기도를 드렸던 신앙의 선배들의 삶의 이야기들이 감동적이어서라기 보다는, 여전히 우리의 삶에는 그러한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가 절실히 요청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일은 참 좋은 일이다. ‘간절함’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는 뜻이고, 우리가 생명력 있게 살고 싶어한다는 증거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없을 만큼 삶이 버려지고 포기된 상황이다.

 

6. 히브리어 ‘테힌나’는 ‘간구’라는 뜻이다. 이것을 그림언어로 표현하면, ‘항복을 하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이다. 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찬송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이다. 우리의 인생을 슬프게 하는 것도 이 ‘간절함’이고, 우리의 인생을 기쁘게 하는 것도 이 ‘간절함’이다. 간절함은 우리를 울리기도 하고 웃게도 만든다. 그게 인생 아닌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다면, 그것을 인생이라고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간절함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

 

7. 요한’이라고 하는 이름에서 우리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간절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간절함이 그를 성실하고 신실한 제사장으로 살아가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간절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너무 다행이고, 너무 감사하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테힌나)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 ‘요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간절함이 배어 있는 이름이고,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이름이다. 참 좋은 이름이다.

 

8. 대림절은 이렇게 ‘간절함(테힌나)’의 절기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지만, 이 절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 기쁨을 증진시키는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는 절기이기도 하다. 대개 그 간절함은 감춰져 있는 경우가 많다. 감춰져 있는 그 간절함을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친구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친구인 것이다. (이런 친구가 있기를!) 테힌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멈추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으라. 대림절기에 ‘요한’의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이것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9. 요한의 출생 소식과 함께 요한에게 쏠렸던 기대감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요한은 그야말로 기대주였다.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 되려나,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요한의 삶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진행된다. 제사장의 아들이니, 사람들은 그가 커서 대제사장이 되어 큰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히려 요한은 그 기대와는 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 그는 광야로 나가 기존 종교와 정치 체제에 비판을 가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10. 요한이 성전 밖에서 ‘죄사함의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기존의 종교 체제에서 죄사함은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요단강으로 불러 모았고, 그곳에서 동물의 피를 쏟고 삶을 태우는 제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요단강의 깨끗한 물로 그들을 씻는 의식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없애 주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말 대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위해서 였다.

 

11. 우리는 요한의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나 자신이 또는 우리의 자녀들이 세례 요한처럼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빛나기 좋아하고, 주목 받기 좋아하고, 세상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 시대에 세례 요한처럼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을 가리키는 사람으로, 명소가 아니라 명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의 이름이 담고 있는 ‘간절함’, ‘테힌나’의 기도,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면서도, 우리의 기도 자체가 요한처럼 되게 해달라는 기도 드리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2.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줄 알면서, 또는 ‘작은 예수’라는 용어를 좋아하면서도, ‘작은 세례 요한’이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는 드릴 줄 모를 뿐더러, ‘작은 세례 요한’이라는 용어 자체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작은 예수’가 되고 싶은 메시아 병에 걸려 있는지 모르겠다. 예수님처럼 작은 메시아가 되어서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작은 메시아의 역할이라도 감당하며 세상을 구원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세례 요한’의 이름을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지워버린다. 우리는 ‘작은 예수’는 될 수는 있어도 ‘작은 세례 요한’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대림절기는 오히려 우리를 ‘세례 요한의 자리’에 머물게 한다. 다른 말로 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것을 권장하는 세상에서,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게서 ‘메타노이아’ 해서 그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어드리는 삶으로 돌아서게 한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이 ‘작은 메시아’라는 의식 자체가 없다.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내 뒤에 오시는 이”, 즉 메시아를 가리키는 사람이다. 성경을 통틀어 온 인생을 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를 가리킨 사람이 요한보다 더 했던 사람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눅 7:28).

 

14. 대림절기는 무엇보다 요한의 ‘메타노이아’를 묵상하는 절기이다. 우리말로 ‘회개’로 불리는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히브리어의 ‘니함’ 또는 ‘슈브’를 옮긴 말인데, 그 뜻은 “반대방향으로 돌아선다”는 뜻이다(헬라의 군대가 행진하다 ‘메타노이아!’하면 ‘뒤로 돌아가!’가 된다.). ‘회개’가 ‘죄를 뉘우침’이라는 좁은 의미로 쓰이는 것과는 달리, 메타노이아의 뜻은 방향전환이다. 오시는 주님(메시아)을 만나려면 방향의 재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되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림절은 삶의 중심을 자기 자신에서 메타노이아(돌아서서)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본다.

 

15. 우리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테힌나’의 기도,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며,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테힌나’의 뜻이 ‘항복하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인 것처럼, 우리의 간절한 소망을 주님께서 이루어주시길,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바라면서 주님께 항복하기 위하여 손을 드는 것 자체가 ‘메타노이아’이다. 항복하기 위해 손을 드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느 방향을 향해 손을 들었냐이다. 항복해야 할 대상이 내 뒤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지 않고, 그 반대 방향으로 두 손을 들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16. 이 대림절기 동안, 오시는 주님을 오롯이 가리켰던 세례 요한을 묵상해 보기를 바란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메시아’가 되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고, 사람들이 실로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을 전환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드렸던 사람이다. 세례 요한은 아주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받을 수 없는 최고의 명예롭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17. 방향을 돌이켜(메타노이아), ‘작은 예수’가 되려 하기 보다, ‘작은 세례 요한’이 되는 삶을 한 번 묵상해 보면 좋겠다. 겸손(케노시스)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진실로 겸손했던 사람과 마주하면 좋겠다. 우리의 삶이 세례 요한처럼 오롯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이 되면 좋겠다. 세례 요한과 가까운 삶을 살면 살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도 그가 들었던 명예로운 축복의 말씀을 동일하게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세례 요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삶이었다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우리보다 큰 자가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은 아무개를 위해 잠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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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29. 14:45

하나님의 구원은 멈추지 않는다

(데살로니가전서 3:9-13)

 

1. 한국 기독교를 보면 용어 문제 때문에 교회일치운동이 참 어렵다. 하나님과 하느님, 교회와 성당, 세례와 침례, 바울과 바울로 등, 같은 것을 지칭하고 있는데도 용어가 다르다 보니 마치 존재가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영어의 Advent, 즉 대림절도 마찬가지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대림절과 대강절 그리고 강림절, 이렇게 세 가지 용어로 불리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도 한국 사회와 문화 속에 기독교가 충분히 녹아 들어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더 발전하고 성숙해지고 영향력을 가지려면, 용어의 일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소망해 본다.

 

2. 나는 Advent를 ‘대림절’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 ‘오심을 기다림’이라는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시는 것은 그리스도고, 기다리는 것은 우리들이다. ‘오심을 기다림’이란 그리스도와 우리들이 하나가 될 때 의미 있는 것이다. 오신다고 해도 기다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기다린다 해도 오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은 하나이어야 한다. 그래서 기다림 자체가 믿음인 것이다.

 

3.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은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는 신앙 중 가장 핵심적인 신앙이다. 신약성경 중 가장 먼저 쓰였다고 하는 데살로니가전서는 온통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처음 성경인 데살로니가전서가 그렇다는 뜻은 초대교회 사람들, 특별히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이 아직 살아 있던 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은 ‘종말신앙’이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세상의 파괴(파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4.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에서 종말신앙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자취를 감추었다기보다 덜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오심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른 말로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 역사가 진행되면서 종말이 매우 폭력적으로 묘사되었다는 데 있다. (폴라 구더, <기다림의 의미>, 41-42쪽) 마치 넷플릭스의 최신 드라마 <지옥(Hellbound)>에서처럼 말이다.

 

5. 그리고 요즘 대림절은 기다리는 거를 싫어하는, 아니 견디지 못하는 시대에서 거부당하고 있고, 기독교 내에서는 대림절이 성탄절에 잡아 먹힌 듯하다. 적어도 핸드폰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기다리는 일은 그 자체가 낭만이었는데, 요즘은 기다리는 것 자체가 짜증인 시대가 된 듯하다. 습작할 때 쓴 조잡한 시이지만, 옛날 친구들과 약속 장소를 잡고 기다리던 때를 생각하며 쓴 시도 있다. “말죽거리 국민은행 앞에서 만나”, 이런 문장이 들어가는 시다. 그때는 약속 시간 정하고, 약속 장소에 나가 친구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기다림’이 생활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기다리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시대다. 그렇지 않은가. 약속 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짜증내는 시대. 인터넷이 조금만 느려도 짜증내는 시대.

 

6. 기록시기가 복음서보다 빠른 바울서신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안 나오고 온통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정하여 지키고 있지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즉 세상의 종말이 있을 때, 예수님처럼 본인들도 부활하게 될 것을 믿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다.

 

7. 부활이 무엇인가? 부활이 곧 구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활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부활은 생명의 완성이다. 생명의 완성(Fullness of Life). 우리는 이것을 깊이 있게 묵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완성을 갈망한다. 우리는 흔히 구원을 말할 때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하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반쯤 만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죄’를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정죄하여 죄책감이 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생명을 해치고 생명의 완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소극적 구원)이 아니라 생명의 완성(적극적 구원)이다. 이것을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신앙이 곧 죄책감을 갖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거기엔 기쁨이 없고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 나쁜 사람들은 그러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착취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서처럼 말이다. (2019년 7월 13일, <두 편의 영화와 한 번의 강의>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죄론의 이해’라는 특강을 하면서 말했던, 죄의 메커니즘이 그대로 드러나는 드라마다.)

 

8. 생명의 완성. 너무 가슴 떨리고, 벅차고, 행복한 일이다. 우리는 살면서 늘 뭔가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느낀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완성되지(생명이 풍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의 생명이 부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고, 그 절대생명(완성된 생명)이 지금 오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9. 바울은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10절). 이것은 2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말씀이다. 우리는 정말 믿음이 부족하다. (지난 주 설교에서도 강조했지만) 믿음의 실종은 사랑의 실종을 반드시 불러온다. 대림절 신앙은 종말신앙인데, 기독교의 종말신앙은 사람들에게 많이 오해되고 있듯이 피비린내 나는 파멸과 파괴, 죽음이 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미 생명의 완성을 이룬 것이다. 생명의 완성을 이룬 자는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랑의 일을 한다.

 

10.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보라.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12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과 그의 일행은 자신들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을 이루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이것을 ‘자족’이라고 부른다.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바울과 그 일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완성을 이루었기에 생명의 풍성함을 느꼈고, 그 풍성함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했다.

 

11.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 먼저가 아니다. 믿음이 먼저다. 그들의 부족한 믿음이 먼저 보충되기를 원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이 굳건하게 갖게 되기를 바라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믿음이었다. 살아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하나 둘씩 그리스도의 오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 중 어떤 이들은 믿음을 잃어갔다.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랬는데, 2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더 심하겠는가.

 

12. 믿음을 잃어가는 일은 사랑을 잃어가는 일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지 않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구원이 마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자기를 구원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생명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우리의 심장을 딱딱하게 만들 뿐이다.

 

13. 어떤 분이 이러한 농담을 하는 것을 봤다. “개고기를 먹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개와 사는 것이다.” 이게 왜 더 큰 문제일까? 개와 사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개와 살아야 할 만큼 외롭다는 것이 문제라는 뜻이다 (오강남 교수의 페북에서). ‘외롭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문제를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을 보면, 인간들의 상실감,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우울함, 그것을 좀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처절한 노력들이 잘 그려져 있다) 이렇게 사랑이 없어 외로운 삶을 사는 현대인들의 삶이 회복되려면, 무엇보다 우리의 믿음이 좀 더 굳건해져야 한다. 믿음의 상실은 사랑의 상실을 불어오니 때문이다. 거꾸로, 믿음의 굳건함은 사랑의 풍성함을 불러온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14. 하나님은 구원을 멈추지 않으신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생명의 완성을 이루기까지 쉬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증거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소망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대림절을 지킨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미 시작된 생명의 완성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삶,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나아간다는 뜻이다. 사랑이 없어 외로움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이길 힘은 믿음 밖에 없다. 구원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생명의 완성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일(대림절기를 지키는 일)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을 주는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이다. 구원하기를, 생명의 완성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 우리네의 이 메마른 삶에 활기를 주는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는다. 하나님을 구원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좀 더 힘을 내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말씀을 선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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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
바이블 오디세이 I2021. 11. 22. 13:59

믿음과 미래

(요한일서 5:1-12)

 

1. <레 미제라블>을 좋아하세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장 발장(Jean Valjean)’은 정말 유명인사죠. 아마 ‘레 미제라블’보다 ‘장 발장’이 더 유명하지 않나 싶네요. 이 소설은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성경의 ‘요한’을 매우 좋아했나봐요. 프랑스어로 ‘Jean(장)’은 영어의 ‘John(존)’이고, 한국어의 ‘요한’입니다.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 외에도, 프랑스에는 ‘장(Jean/John/요한)’이라는 이름(first name)을 가진, 유명인들이 정말 많거든요. 그 이름들을 굳이 열거하지는 않겠습니다.

 

2. 작품은 어느 한 시대의 산물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레 미제라블>이 1862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서양의 역사 중,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왜 중요하냐면, 역사에서 비로소 시민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이에요. 그 이전까지 만해도 인류의 역사는 권력을 모두 소유한 한 인간, 즉 왕이 나머지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들이 거기에 반기를 들면서 한 인간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을 시민 각자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기반을 만듭니다. 몇 년 후, 1793년에 루이 16세는 시민들에 의하여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이건 굉장히 혁명적인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왕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일반 시민은 넘쳐 났어도, 시민에 의해 왕이 단두대에서 죽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3. 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두 차례 더 일어났었는데, 짐작하다시피, 그 싸움은 권력을 지키려는 왕과 귀족들, 그들에게 다시는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민들의 싸움이었죠. 누가 이겼을까요? 시민들이 이겼습니다. 그 덕분에 역사는 ‘민주주의’ 시대를 엽니다. 왕, 한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인 시대가 열린 것이죠. 그런 점에서 1848년 2월 혁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1848년 이후, 세상은 왕정체체/또는 귀족체제를 벗어버리고, 민주주의 체제로 들어섭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현재 우리의 지도자(대통령)를 우리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시민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뽑아준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것이고요.

 

4.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레 미제라블>은 그 제목이 보여주듯이 ‘비참한 사람들’에게 주목합니다. 왕정체제/귀족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체제가 왔다고 해서 세상이 평화롭고 정의롭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와 함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인간의 온갖 욕망이 함께 튀어나왔기 때문에, 사회는 엄청 더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졌죠.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주조된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에서 자유(Liberty)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사적인 소유물을 가질 수 있는 권리’의 자유를 말한다. 즉, 사유재산의 개념이 이때 생겨난 것이죠. ‘평등(Egality)’도 ‘너랑 나랑 똑 같은 인간이야’라는 뜻이 아니라 ‘법 앞에서의 평등’을 말합니다.

 

5. 19세기 혁명들 이후 발전된 민주주의는 두 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자유를 강조하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진영과 다른 하나는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진영이죠. 두 진영 모두 인간의 번영을 도모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사회주의 진영(공산주의)은 획일적인 평등을 강조하다가 인간성을 훼손시키며 몰락했고, 자유주의(자본주의) 진영은 사적인 소유를 강조하다가 인간성을 훼손시키며, 더 나아가 자연 자체를 훼손시키며 몰락해 가고 있죠. 우리는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 자유가 사적 소유의 자유,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에만 머물고 말면, 결국 그 자유가 칼이 되어 인간을 겨누어 인간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터전인 자연까지도 해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8.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들을 부여잡고 시작한 민주주의가 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고, 더 불행하게 만들었을까요? 요즘 우리 시대에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을 보세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일 하는 게 너무 힘들고, 너무 외로워하고, 무엇보다, 불안한 미래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움에 떨고 있죠. 뭔가 잘못되고, 뭔가 잃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9. 우리가 위에서 자유와 평등 중 어느 것 하나를 강조하며 발전한 진영을 살펴보았는데,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프랑스 혁명의 가치 중 ‘박애’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본주의) 진영이나 평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 그 어느 곳에서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박애(fraternity)’는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런데, 박애라는 사랑은 공동체성을 말하죠. 자유주의, 사적 소유에 젖어 있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매우 사적인 차원에서만 말해지고 있어요. 사랑은 마치 사적인 일로,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죠. 이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자유가 박애를 잡아먹는 꼴이에요. 박애는 사적인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공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10.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바로 이 박애의 정신을 보여주고 생각하게 하고 되살려 줍니다. 혁명을 통해 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시민사회, 민주주의(공화주의)체제로 이양되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었던 것이죠. 그게 바로 박애라고 하는 공적 사랑입니다. 장 발장은 굶주리고 있는 일곱 조카를 위해서 빵을 훔쳤는데, 그 죄로 인하여, 법에 의해서(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니까), 19년간 옥살이를 합니다. 장 발장이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사회에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출소 후 냉랭한 마음을 가진 장 발장은 자신에게 하루 숙소를 제공한 미리엘 신부에게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은식기를 훔쳐서 나옵니다. 그런데, ‘비참한 자’가 은식기를 들고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장 발장을 데리고 미리엘 신부에게 가 대질 심문을 합니다. 그때, 미리엘 신부는 경찰에게 그 은식기는 자신이 선물로 준 거라고, 왜 은촛대는 그냥 놓고 갔냐고 오히려 은촛대까지 챙겨주죠.

 

11. 박애란 바로 이런 사랑을 가리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 사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랑, 더 나아가서 미리엘 신부가 장 발장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악을 오히려 선으로 갚는 사랑, 이러한 사랑이 박애인 것이죠. 박애는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기독교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박애의 정신이 자유의 정신과 동일하게 강조되었다면, 자유주의(자본주의)의 과도한 사적 소유의 욕망은 컨트롤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만약, 박애의 정신이 평등의 정신과 동일하게 강조되었다면, 평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의 과도한 획일화가 컨트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그리고 평등주의 진영에서도 박애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인간의 욕망과 인간성의 훼손만 난무할 뿐입니다.

 

12.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유럽은 유서 깊은 기독교 국가들이죠. 기독교의 흥망성쇠와 그 역사를 함께 한 나라들입니다. 19세기는 유럽의 기독교에도 정말 중요한 시기였는데, 왕정체제/귀족체제가 무너지면서 기독교도 함께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세속화’, 즉 하나님 없는 세상이 이때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왕/귀족에 대한 거부는 곧 기독교 신에 대한 거부와 그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되고, 믿음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들의 힘(이성)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하죠. 19세기에 시작된 이러한 흐름은 현재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세상은 이제 ‘믿음’ 없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기독교의 잘못도 굉장히 크죠. 예수의 정신은 온데 간데없고, 왕과 귀족들처럼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했으니까요.

 

13. 저는 이 ‘믿음 없는 세상이 되었다’에 집중해 보고 싶습니다. 자유를 사적 소유로 생각하는 것이 깊어진 우리 시대에 ‘믿음’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믿음을 자기 자신의 신념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맙니다. 즉, 믿음도 사적 소유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것이죠. 자유의 개념을 자기 중심성(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의 개념으로 파악하다보니, 믿음도 그렇게 생각할 뿐이죠.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믿음’을 엄청나게 오해하고 훼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죠. 믿음은 개인의 신념, 즉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내 안에 오신 성령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14. 본문은 ‘믿음’에 대해서 엄청난 진리를 알려줍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기독교의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할 때, 우리 안에 성령이 있는 것이고, 그 성령으로 인하여 그 진리를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데만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존재를 바꿉니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적인 복음입니다. 창세기만 보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make)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애제자 요한은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피조물에 머물게 하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낳은 자(begotten)로 존재를 바꾸어 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도 동일하게 나오는 복음이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믿음이 단순히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믿음은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바꾸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죠.

 

16. 믿음이 우리의 존재를 단순한 일 개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같은 속성(본질)을 지닌 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속성(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너무도 잘 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데, 바로 사랑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죠.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 계명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쉽고 가볍습니다. 왜냐하면 그 계명이 바로 사랑인데, 사랑의 본질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자에게 그 사랑을 행하는 것은 돌고래가 물에서 수영하는 것처럼 너무 쉬운 것이기 때문이죠.

 

17. 우리는 왜 사적 소유를 갈망하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자유’를 외치며 살면서, 그리고 법 앞에서는 평등한 거라고 외치면서 법적 평등을 보장해 달라고 외치며 살면서, 왜, 이렇게 못살겠다고 아우성 칠까요? 가진 게 많은데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고 싶다고 아우성대고, 가진 게 없어서 못살겠다고 아우성, 저 사람과 내가 평등하지 못한 것 같다고 아우성대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악한 세상을 만들고 만 있을까요? 제 짧은 생각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선가 말씀하셨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18. 믿음의 실종은 사랑의 실종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공동체성이 사라진 것, 박애가 사라진 것은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자유, 즉 개인의 소유도 중요하고, 법 앞에서의 평등도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자유와 평등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 못하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성을 파괴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도서의 솔로몬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이 없으면 웃는 것은 '미친 것'이고, 즐거움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장 발장처럼 냉소적인 사람만 만들어낼 뿐입니다. 냉소적이었던 장 발장을 따스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으로 거듭나게 한 것은 바로 미리엘 신부의 ‘박애(사랑)’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걱정, 가족에 대한 걱정, 사업에 대한 걱정, 무엇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에게서 뭔가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여, 우리는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두려움을 극복해 보려고 아주 잘못된 선택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기도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해하며, 머물지 못하고 떠납니다.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한없이 약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도 안 들릴 것이고, 자기의 선택이 진리라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릴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악에 잡아 먹힐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더욱더 악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20.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열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사랑의 존재로 바뀐 사람이 그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잃어버리게 하기 위하여, 사랑의 존재인 우리를 그냥 연약한 한 개의 피조물로 바꾸어 버리기 위하여,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미래를 닫아버리고, 현재의 삶에만 집중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듭니다. 그 두려움이 지금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살겠다고 아우성 칩니다.

 

21. 누가복음 8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외동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딸을 살려보고자 야이로는 염치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와 엎드려 간구합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딸 좀 살려주세요!” 예수님은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 사이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고쳐주시죠. 그리고 길 가던 중,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 딸이 죽을까봐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야이로는 이 소식을 듣고 아마도 심장이 내려앉았겠죠.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 8:50).

 

22. 믿음을 개인의 신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능력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미래를 열어줍니다. 우리의 존재를 일 개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 자체를 바꾸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의 일을 하게 합니다. 이 믿음의 역사 없이,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으며,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자녀의 일로, 가정의 일로, 직장의 일로,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십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그 믿음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이미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일 개의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믿음이 불안한 미래를 열어줄 것이고, 그 믿음이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여 사랑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멋진 인생을 살게 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십시오.

Posted by 장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