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오디세이 I2022. 2. 10. 04:24

큰 이야기, 작은 인간, 그리고 믿음

(출애굽기 4:10-17)
 

1. 출애굽기 3장과 4장은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을 담고 있다. 장장 두 장에 걸쳐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부르심(calling)’을 그냥 쉽게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타지 않는 떨기나무로 가까이 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매우 신비한 이야기가 부르심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후에 전개되는 부르심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타지 않는 떨기나무 장면보다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부분은 그 이후에 전개되는 모세와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2.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풍기는 분위기는 4장 14절이 말해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the anger of the Lord burned against Moses, NASB)”. 이 구절을 보면 모세가 ‘분노 유발자’인 것을 알 수 있다. 부르심의 이야기는 소위 말해 ‘은혜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모세는 다섯 번에 걸쳐 거절을 한다. 모세가 하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거절을 하니까 결국 하나님이 모세를 향하여 화를 내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3. 모세 입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본인이 아무리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왕자라고 하더라도 이집트를 떠나온 지도 오래됐고, 그곳을 떠나올 때 좋게 떠나 온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집트라는 거대한 국가와 파라오(바로)라고 하는 막강한 군주와의 한 판 대결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고, 본인을 별로 좋게 인식하고 있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시켜 이끌고 나와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 부르심이 마음에 내킬 리 없다. 한 마디로,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하다가 내가 죽겠구나.”

 

4. 아무리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일을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 하나님의 정체성의 문제를 질문하고, 자신이 없고 능력이 없다는 핑계 등을 대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거부 의사를 계속 밝힌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모세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간구합니다. 그 일을 할 만한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Please, Lord, now send the message by whomever You will”(4:13).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인간적인 모세의 모습을 볼 뿐더러,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5. 거대서사(Meta Narrative/메타 내러티브)’라는 말이 있다. 요즘엔 ‘메타 내러티브’라는 말보다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이 더 유명해졌다. 예전에는 인터넷 속의 세상을 ‘가상공간’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인터넷 속의 세상을 가상공간이라고 부르기에는 인터넷 속의 세상이 너무도 실재적인 공간으로 성장을 했고 현실 세계 못지 않게 사람들이 그 세계 속에서 실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메타버스’라는 말을 쓴다.

 

6. 메타 내러티브는 큰 이야기를 뜻한다. 인간 존재는 자신보다 큰 존재를 만나면 움츠러든다. 인간 존재는 자신의 이야기(밥 하고 빨래하는 삶을 살다가)보다 큰 이야기(어떤 큰 사건에 연루되는 것)를 만나면 움츠러든다. 자신보다 큰 존재에, 자신의 이야기보다 큰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그 존재와 그리고 그 이야기와 연결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모세의 모습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세는 자신보다 큰 존재인 하나님 앞에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이야기보다 큰 하나님의 이야기 앞에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7. 3장과 4장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세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큰 이야기(메타 내러티브)’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큰 이야기는 창조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우리 인간의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에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연에게도 의존되어 있고 인간 간에도 의존되어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하도 ‘자율성’(autonomy/근대에 형성된 ‘자율성’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 사회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는 결과를 가져왔다.)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다 보니 ‘의존’이라는 말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의존’은 자유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서 오히려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 사이의 연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8. 창세기가 보여주는 큰 이야기는 형이상학적(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라면 출애굽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큰 이야기는 매우 역사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출애굽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큰 이야기는 3장과 4장에서 하나님의 입을 통해 모세에게 ‘계획’이라는 형태로 전달된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땅… 의 지방으로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7-10). 출애굽기는 이 계획이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9. 성경이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의 큰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큰 이야기는 아주 근본적인 역사의 본질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유’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안겨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과 변화를 일구시는 창조의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출애굽기는 분명히 이러한 큰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10.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러한 자유를 성취하기에는 너무도 작은 존재라는 것이다. 애굽에서 하층민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가 없어 고통스러웠다. 그들은 애굽이라는 큰 나라와 파라오라고 하는 절대적 군주의 폭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된 노동을 하면서 처절한 삶을 살았다. 자신들의 힘으로 해방과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모세에게 부르심이 임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모세도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일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이 일을 하다가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완강하게 거부 의사를 밝힌다.

 

11.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큰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신앙을 가지면서 우리의 작은 존재가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고 우리의 작은 이야기가 형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앙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을 가지면서 우리의 작은 존재에, 그리고 우리의 작은 이야기에 어떠한 균열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다. 우리는 이것을 평안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산다.

 

12. 그런데 출애굽기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그러한 소박한 일상을 넘어서는 일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 이제 애굽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모세는 작은 존재로, 작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다. 양을 치면서, 가족들 돌보면서, 특별한 일이 아무도 없는,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모세는 그렇게 살면서 애굽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족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자신과는 상관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모세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여전했다. 모세는 그들의 고통을 남몰라라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에 여전히 신경 쓰고 계셨다.

 

13.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장면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신앙은 그냥 작은 존재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작은 이야기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이야기를 자기 바깥의 존재와 이야기로 연결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이야기는 우리가 인식을 하든지 못하든지 존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계신다. “나는 나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면 존재하시고,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가 듣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께서는 쉴 새 없이 자신의 존재로, 자신의 이야기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God is calling us)는 뜻이다.

 

14.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더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 되어가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지 못하게 하고 철저하게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는 것을 막고 고립시키는데, 인간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벗어나서 내 바깥의 존재에, 나의 작은 존재보다 더 큰 존재에, 나의 작은 이야기보다 더 큰 이야기에 우리 자신을 연결시키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소비사회라는 게 그런 거다. 이거 없으면 못살 것 같게 만들어서 존재하기 위해 엄청난 것들을 각 개인이 사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연결되어 있으면 불필요한 것들이 정말 많다.) 그렇다 보니, 우리는 점점 더 살기 힘들다고, 사는 게 고통스럽다고, 삶이 왜 이렇게 외롭냐고, 아우성 가운데, 결국 혼자서 요양원에서 또는 노인 아파트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15. 믿음이란 무엇인가? 모세가 보여주고 있듯이, 믿음이란 결국 나의 작은 존재를, 나의 작은 이야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큰 존재에,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작은 존재와 이야기에 균열이 생기고 붕괴가 일어나 우리의 작은 존재와 이야기는 새롭게 정의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흥미진진하고 신비로운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창조고 구원이다. 그렇게 우리의 작은 인생은 확장되고, 해방과 변화를 경험하게 되며 우리 인생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인생에까지 해방과 변화를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이다.

 

16. 너무 자기 자신 안에만 갇혀 있지 말라. 너무 자기 자신의 작은 이야기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 내 바깥의 존재에, 내 바깥의 이야기에 참여하려고 노력하라. 특별히 전염병이 돌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은 너무도 움츠러들었다. 조심하는 것과 연결을 끊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을 더 큰 이야기인 팬데믹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방역 차원에서 교회 문도 닫고 예배 온라인으로 드리고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일상을 팬데믹을 넘어선 더 큰 이야기에 참여시켜야 할 때가 오기도 했다.)이 어려운 시절,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며, 우리는 고립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서로의 삶에 참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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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준식